양주시[楊州市]
역사
서울과 인접한 이 시는 고대부터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항상 국토의 요충이 되어 왔다. 이 시는 서울의 상당부분과 남양주시·구리시·의정부시·동두천시 등을 포괄하는 큰 시였지만 지금은 모두 분리되어 경기도에서도 크지 않는 시에 속한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은현면 운암리에서 다각면원구(多角面圓球)와 긁개 등이 발견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옥정동, 유양동·마전동, 은현면 선암리·하패리, 남면 한산리 등지에 고인돌이 있다. 은현면 용암리와 남면 신산리, 광적면 덕도리에서 민무늬토기편과 마제석기류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는 한강 이북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서기전 1세기 초에는 낙랑군에 속하였고, 3세기 초에는 대방군의 강역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에는 먼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에 속했고, 이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고구려 영토가 되어 이곳에 매성군(買省郡, 일명 창화군)이 설치되었다. 551년(진흥왕 12, 성왕 29) 이른바 나·제동맹으로 신라는 죽령 이북, 백제는 남한성·북한성 일대를 취하게 되어 이곳은 잠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으나,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자 다시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서울이 한양군(漢陽郡)으로, 이곳이 내소군(來蘇郡)으로 개칭되었다. 이곳 읍치(邑治)에서 가까운 대모산성(大母山城)에서 출토된 백제토기편과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물들, 그리고 천보산맥과 불곡산·도락산 일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군사용 보루유적을 포함한 28개소의 관방유적이 분포되어 있음은 이 지역이 남북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양주의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때부터이다. 한양군이 양주로 바뀌고 본래 양주 땅이었던 내소군은 견주(見州)로 바뀌었다. 이때 지주사(知州事)가 양주에 설치되면서 견주는 양주의 관할지가 되었다. 995년(성종 14) 전국 12주에 절도사가 두어질 때 양주는 해주(海州)의 우신책군(右神策軍)과 아울러 좌신책군절도사(左神策軍節度使)의 부임지로 광릉(廣陵)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1010년(현종 1)에는 물밀듯 쳐들어오는 40만 명의 거란병을 피해 왕이 송도를 버리고 멀리 나주까지 몽진할 때, 양주에 며칠간 머문 일도 있다. 당시 남진하던 거란군이 장단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서북단 천험의 요새지 감악산에 군대의 정기(旌旗)와 군마가 있는 것 같이 보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한 사실을 기록한 완문(完文)이 감악산사당(紺岳山祠堂)에 전해온다.
1012년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으며, 1018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고 견주·사천현(沙川縣: 지금의 양주시 회천면·은현면 일원)·풍양현(豊壤縣: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진접읍 일원)이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문종은 양주를 남경(南京)이라 하여 신궁(新宮)을 조영했는데, 이때 견주감무를 별도로 둔 일이 있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양주가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조선왕조가 한양부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성부(漢城府)라 개칭하고 그 전의 한양부 부치(府治)를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기고 지주사로 강등시켰다. 1395년(태조 4)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7년에 다시 부치가 견주(지금의 양주시 양주동)로 이전되었고 그 뒤 계속 양주라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잠시 양주목이 없어졌다가 1506년(중종 1) 양주목이 부활되면서 지금의 유양동에 새로운 도시가 마련되었다. 이곳의 해유령(게너미고개)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이 육전에서는 최초로 전승을 거둔 전첩지이다. 1895년에는 한성부 소속 양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22년 군청사가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柴芚面: 지금의 의정부시)으로 이전됨에 따라 양주면이라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用大)가 있다.
교육자로는 민족항일기인 1926년 브나로드운동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추계학원(중앙여자중·고등학교)을 설립한 임봉순(任鳳淳)과 1906년 엄비(嚴妃)의 후원을 얻어 명신학교(明新學校)와 숙명학교(淑明學校)를 설립한 이정숙(李貞淑)이 있다. 1946년 파주군 남면이 이 군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2월 24일에 와부면 조안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 해 이담면(伊淡面)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고,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화도면의 3개 리와 진접면의 1개 리 및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가 병합되면서, 수동면이 신설되었고, 노해면(蘆海面)과 구리면 5개 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66년 7월 1일에 별내면 퇴계원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2월 14일에 동두천읍 광암출장소가 설치되었고, 7월 1일에는 포천군의 탑동리가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 4월 30일에 동두천읍 생연·보산·소요출장소와 구리읍 갈매·수택출장소가 설치되었고,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 양주군 관할구역 중 구리읍·미금읍·별내면·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와부면이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고, 별내면의 고산리와 산곡리가 의정부시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백석면 영장리와 기산리가 파주군 광탄면으로 편입, 1985년 10월 1일 회천면이 읍으로 승격, 1987년 1월 1일에 광탄면 기산리 일부가 백석면으로 편입되었다. 2000년 9월 25일 군청사를 의정부에서 현 남방동으로 이전하였고, 그 해 10월 1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하여 2개 읍 5개 면이 되었다. 다시 2001년 10월 1일 백석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개 읍, 4개 면으로 되었다가,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도농복합시인 양주시로 승격하여 현재의 1개 읍, 4개 면, 6개 행정동이 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4-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