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사촌 중, 세째인 대일 형은 사격의 명수로서 겨울철에 한 두시간만 나갔다 오면, 머리통만 맞춘 참새를 백 여 마리씩 새끼줄에 끼어 가지고 들어 오곤 하였다. 아마, 남의 집 담 넘어 떨어진 것 까지 줏어 올 수 있었다면, 더 많이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가 동숭동 청년단장으로 6.25직전 훈련을 받고 임관하였는데, 6.25일 이미 서울이 점령되어, 괴뢰군의 국군 패잔병에 대한 소탕전이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낙산 방어를 하던 일개 소대의 무장 병력을 데리고, 창신동을 거쳐, 중앙 시장을 통과하여, 신당동 우리 집에 오전 11시경 도착하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시간에 어떻게 다수의 병력을 끌고, 우리 집에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동덕여중 근방을 지나올 무렵, 갑자기 골목에서 권총을 뽑아 든 <동대문 경찰서> 소속 형사 하나가 나타나서는, “나는 이 지역 담당 형사인데, 경찰서장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통과를 못시키겠다”고 길을 가로 막아서서 한창 실랑이를 벌렸는데, 사촌 형이 집에 와서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면서, “세상에 이런 용감한 사람 처음 봤다”고 하였다. 상황이 위급하고, 다수의 병력이 도피 중이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아까운 사람 그냥 죽일 뻔 하였는데, 하도 용감하고 기특해서, “지금 시내 전체가 점령 당해서 빠져 나갈 데가 없으니, 당신도 빨리 피신하라”고 말하면서 빼앗았던 권총을 돌려주며, 피신을 권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소대장으로 형이 소지한 무기는 일본도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M 1 소총, 칼빈, 99식 일본총, 38식 일본총 등을 들고 있었는데, 형은 형사가 가진 권총이 탐이나서, 그것을 빼앗았다가, 하도 그 형사가 용감하고 기특하여서 만지작 만지작 하다가 도루 돌려 주었다고 하였다. 상관들은 철수 명령도 내리지 않고 도망하고 피난하기 바쁜 터에, 권총 한 자루 들고 골목길을 가로 막고 있던 형사는 어느 나라의 형사였는지. 우리는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또 그의 이름조차 알 수 없지만, 옛날 사람들은 나라를 이렇게 생각한 분이 많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나라가 이렇게 유지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은 나라가 혼란하여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도 모르고, 또 경찰이 경찰의 명예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 시대에, 권총 한자를 들고, 자기의 임무 완수를 위하여, 겁도 없이 1개 소대의 무장 병력 앞을 가로 막고 선, 동대문 경찰서의 이름 모를 형사의 우국 충정을 생각해 본다.
점심으로 주먹 밥을 급히 해 먹이고, 협의 끝에 1시경 부대를 해산 하기로 결정하고, 무장 병력들을 개별적으로 모두 귀가 시켰다. 형은 1시 반경, 사복으로 갈아 입고 일어섰다. 큰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강은 넘어서야 한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남편의 옷자락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광에 있는 숯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는, 부벼서 얼굴에다 발라 주었다. 괴뢰군이 언제 어떻게 들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시간은 분초를 다투고 있었다. 집을 나선 형은 금호동 고개를 넘어가는 군중들 사이에서 집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다음 그 모습을 감추었다. 형이 안 보이자 아주머니는 더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형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러나 형은 큰어머니가 그렇게 당부하던 한강을 그예 건느지 못하고, 나중에 시내에서 피신 중,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 후에 확인되었다. 어린 조카를 손에 쥐고, 임신 중에 형의 옷자락을 틀어 쥐고 놓지 않겠다던 아주머니도 9.28 수복 당시, 서울역 부근 동자동에 있던 조선 신학교(한국 신학 대학) 교정에서 피신중, 포탄의 파편을 맞아 뱃 속에 아이까지 일가족 4명이 몰살하는 비운을 당하여,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아주머니는 피격 후에도, 10시간 이상 상당히 긴 시간동안 숨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같았으면 능히 살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당시는 전혀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결국 조용히 눈을 감고 말었다. 그리고 큰 아버지 김두석 목사님도 9.28 직전 체포, 납북되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집에 왔던 이 일행 중, 어떤 사람이 부역하는 통에, 우리 집의 소재가 밝혀져서, 우리 아버지(고 주수겸 장로)와 사촌 누나(김인자 목사)가 또 이 일로 체포되어, 연지동 정치 보위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극심한 심문을 당하였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고 피신하였다. 수복 후, 큰 어머니는 대일 형이 그리워 무덤도 없고, 묘비도 없는 동작동 국군 묘지에 자주 들려, “대일아-, 대일아-” 아들 이름을 부르며 지내시다가 돌아 가셨다. 이 땅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민족 비극 역사의 가슴 아픈 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의 명예도 다른 사람이 아닌, 경찰의 몫이고, 경찰의 망신도 남이 아닌, 경찰의 몫이다. 57년전, 서울 시내가 이미 새빨갛게 되었는데도, 상관의 명령을 따라 권총 한자를 들고, 골목길을 지키던 형사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조국의 산과 들에서 이름없이 나라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군과 경찰들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