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뻗침 머리에 스키니 진을 입고 큼직한 남성용 손목시계를 찬 정유정 작가와의 인터뷰는 유쾌했다. 거칠 것 없이 말을 이어가다가도 문득문득 눈물이 고이는 그는 씩씩하면서도 내면은 여린 캔디같았다. 박력 있는 남성적인 문체를 지녔으면서도 섬세한 결이 살아 있는 캐릭터가 꿈틀대는 그의 소설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허스키한 음성의 그는 연신 통쾌하게 “하하하” 웃었다.
《7년의 밤》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최현수)에 대한 이야기다. 그 남자로 인해 딸을 잃은 또 한 남자(오영제)가 벌이는 치밀하고도 처절한 복수극으로부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7년간 벌이는 드라마가 이 소설의 골자다. 작가가 직조해낸 거대한 세계는 리얼리티가 하도 강해 책장을 덮은 지금도 댐의 물속 어딘가에 세령마을이 잠겨 있을 것만 같다. 여운도 길다.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이 내내 주위를 감싸는 듯하다. 재미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 책이 500페이지가 넘는다는 사실을 마지막 책장이 세 장 남았을 때 알았다.
정유정 작가 하면 ‘간호사 출신 소설가’라는 수식어가 먼저 붙는다. 정식 문학교육을 받지 않은 소설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짐작했다. ‘천부적인 소설가가 아닐까’라고. 아니었다. 독학으로 익힌 문학이론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 그가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소설을 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놀랍다. 그는 ‘연장’이라고 쓰인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닌다. 그 수첩에는 대학 문학수업 시간에나 들을 법한 내용이 빼곡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최근 출간된 창작관련 책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구절을 옮겨 적고, 밑줄을 긋고, 형광펜으로 강조한다. 그의 문학적 스승은 두 사람이다. 스티븐 킹과 레이먼드 챈들러.
“스티븐 킹의 소설을 다 구해다 읽었어요. 40권 넘게요. 한 번 읽을 때에는 안 보였는데, 두 번, 세 번 읽으니까 일정한 패턴이 보여요. 주인공이소개되고, 문제가 제시되고, 주인공의 욕망이 출현하고, 대립세력과 싸우고, 마지막에 가서 해결이 되는 구조 말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인 심연 구조를 만드는 것도 스티븐 킹에게서 배웠어요.”
스티븐 킹에게서 스토리 구조를 배웠다면, 레이먼드 챈들러에게서는 그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스타일을 배웠다. 꼭 필요한 이야기만 쓰면서 시도 때도 없이 웃기는 것, 정확한 문장과 단어를 사용하면서 내용을 되씹지 않는 것, 직설적이고도 툭툭 내뱉는 말투 등을 배웠다. 그의 소설을 두고 ‘낯설다, 새롭다’고 하는 것은 챈들러의 영향 때문이다.
《7년의 밤》은 원고지 2100매 분량이다. 초고는 2500매였는데 작가는 이 소설을 3개월 만에 뚝딱 썼다. 그리고 1년 동안 고쳤다. 수정 작업만 여덟 차례나 했다. 《내 심장을 쏴라》는 무려 열다섯 차례나 수정했다고 한다. 작가는 소설가와 주부 역할을 성실히 오간다. 집필실이 따로 없고 뒷베란다로 통하는 작은 방에서 집필한다. 새벽 3~4시에 일어나 소설을 쓰다가 남편과 아들 아침을 차려내고, 다들 나가면 빈집에 남아 이어서 소설을 쓴다. 오후에는 집 안 청소를 하고 저녁상을 준비한다. 살림을 병행하면서 원고 2500매를 3개월 만에 써내다니. 그것도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아들한테는 제가 원하는 인생을 강요하지 않아요. 일일이 간섭하면 못써요. 남편이 외조를 잘해주는 편이에요. 119 구조대원인 남편은 남동생 친구예요. 세 살 연하고요. 아침 출근길에 반찬거리를 메모해서 주면 퇴근길에 장을 봐와요. 매일. ‘두 남자’다 눈치가 백단이에요. 제가 소설이 잘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있으면 말도 안 붙이거든요(웃음).”
그가 소설가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면서다. 그다음 작품 《내 심장을 쏴라》는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작가는 앞의 두 작품과 《7년의 밤》을 “자유의지 3부작”이라고 했다.
그는 “자유의지란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 인생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는 의지”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가 자유의지의 발현이고 《내 심장을 쏴라》가 자유의지의 구현이라면, 《7년의 밤》은 자유의지의 시험이에요. 도덕성도, 목숨도 빼앗고, 발로 걷어차서 지옥으로 떨어뜨려놨을 때에도 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운명과 드잡이할 수 있는가를 보고 싶었죠. 그래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남자가 피해자가 겨누는 복수의 칼날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이야기를 쓴 거예요.”
작가는 왜 자유의지를 소설 창작의 원형적 모티프로 삼았을까. 그는 “그건 제 청춘과 관계가 있어요”라더니 자신의 20대 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작가의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여행사를 운영하는 대표였다. 여장부였던 어머니는 2남2녀 중 맏딸인 그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맏딸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어머니는 딸에게 고액과외를 시키며 극성으로 뒷바라지했다. 하지만 문과 성향의 맏딸은 의대 진학에 실패했다. 대신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어머니가 간암에 걸리면서 그의 처지는 바뀌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는 3년간 암 투병하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처녀 가장이 됐다. 가세는 기울었다. 빚이 늘었고, 아버지는 집까지 팔았다. 대학생이던 동생 셋의 등록금을 대출하기 위해 그의 표현을 빌리면 ‘개 발에 땀나게’ 뛰어다녔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그는 “그 세월이 참으로 암담했다”며 “대신 견디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그는 3년간 중환자실 근무를 자처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공간은 그에게 일터이기 이전에 상처였다. 5년간의 간호사 생활을 접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심사위원이 됐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면서는 그마저도 그만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다. 종종 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었다. 막연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절박감은 없었다. 그러다 극적인 계기가 생긴다. 1980년 5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직후의 일이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작가는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소위 유학을 왔다. 남동생과 함께 그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하숙집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오늘밤은 살아 돌아오지 말자”고 외치며 트럭을 타고 도청으로 나갔다. 광주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하고 진압군이 시 외곽을 포위한 상태였다. 하숙집에는 그와 남동생 둘만 남았다. 그는 무서웠다.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대학생 오빠가 사는 옆방에 들어가서 수면제용 책을 찾았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눈에 들어왔다. 세로 쓰기의 두툼한 책은 따분해 보였다. 잠자리에 들면서 확신했다. 여섯 장 넘기기 전에 잠들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고, 밖에는 동이 터왔다.
“순간 가슴에 용암 덩어리 같은 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울음이 터졌어요. 눈물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엉엉 소리 내어 대성통곡을 했죠. 그때 왜 내가 작가가 되고 싶은지 알았어요. ‘나도 나중에 이렇게 독자를 울리고 충격을 주고 밤을 새도 모를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죠.”
그의 이야기는 힘이 강하다. 대부분 2차 저작물로 제작됐거나 제작 중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은 모두 영화사에 판권이 팔렸다. 《내 심장을 쏴라》는 연극으로도 제작됐다. 《7년의 밤》은 15개 영화사에서 제안을 받았고, 판권료만 1억원에 팔렸다. 서사가 강렬한 그의 소설은 유독 남성 독자가 많다.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이야기에 맞는 캐릭터의 틀을 만든 후 자신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 캐릭터를 심화시킨다. 그는 “가장 내밀하고 부끄러워서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부분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면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했다. 3년간 중환자실에서 근무한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많이 봤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가장 좋은 정보의 보고는 나 자신”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는 《7년의 밤》을 탈고하자마자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갔다. 그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과연 맞는가, 인간은 지구상에 사는 숱한 동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전염되는 병을 소재로 삼았다. 개썰매를 끄는 청년이 주인공이고, 벌써 관련 바이러스와 개 심리학, 개 해부학 등에 대한 자료조사를 마친 상태다.
그는 “궁극의 이야기”를 쓰는 게 꿈이라며, “제 소설을 펴는 순간 제 세계에 갇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꿈은 이루어진 게 아닌가. 기자의 추천으로 이 소설을 읽던 한 지인으로부터 “《7년의 밤》에 빠져 다른 일을 못하고 있으니 책임지라”는 원망 아닌 원망을 들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