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대원군의 외딴 별장/석파랑
소재지:서울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석파정은 사유지다.
간간히 열리던 문도 2004년 이후로는 완전히 닫혔다.
인근 한정식집 석파랑에서 그나마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이 1958년에 옮긴 언덕배기의 석파정 별당이다.
흥선대원군이 난을 치던 대청에서 가만히 지난 시간을 음미한다.
조선말 도성 최고의 경승지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세검정 방면으로 내려온다.
큰 도로와 접하기 전 왼쪽으로는 높은 철제벽이다.
그 너머의 풍경을 허락하지 않는 높이다. 그저 예의 공사 현장이거나 바위산이려니 한다.
그 자리가 석파정(石坡亭)이다.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이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더 잘 알려졌다.
정자 주변으로는 큰 바위와 노송이 많은데 정자의 이름 또한 거기서 유래한다.
석파(石坡)는 정자의 앞산이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흥선대원군의 아호인 석파 역시 석파정에서 나왔다.
처음부터 흥선대원군의 소유는 아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별장으로 전한다.
숙종 때는 조정만의 별장 소운암(巢蕓庵)이 있었다.
석파정 내의 바위에 ‘三溪洞(삼계동)’이라는 암각이 있어
삼계동정자 또는 유관재(幽觀齊)라고도 불렸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팔기를 청했으나 김흥근이 거절했다.
이에 하루만 묵어가기를 청했고 고종과 함께 다녀갔다.
임금이 묵은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는 것이 관례라 자연스레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됐다.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의 별장이 마음에 들어서였다고도 하고
세도가이던 안동 김 씨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석파정은 당시부터 도승의 경승지로 손꼽혔다.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고 큰 바위와 소나무가 안위하듯 집을 품었다.
본래 일곱 채의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등의 세 채가 남았다.
수백 년 된 반송(盤松,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60호)이나
중국풍 정자 아래 뒤뜰의 계곡 전경도 빼어나다. 봄과 가을로 꽃과 단풍 또한 일품이다.
조선말을 지나서는 대원군의 후손들이 살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천주교 계통의 코롬바 고아원이 있었다. 몇 해 전에는 경매에 붙여졌다.
지금은 개인 소유로 알려졌다.
2000년대 초까지는 한정적으로 개방했으나 지금은 출입이 불가하다.
그 활용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하다.
북악산 백악대에서 내려오다보면 먼발치 석파정의 흔적이 보인다.



석파정 또는 석파정 별당
석파정의 별당도 남았다. 부속 사랑채로 추정한다. 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다.
상명대 앞에 있는 한정식집 석파랑 안에 있다.
별당은 원래 석파정의 사랑채 옆에 있던 건물이다.
많은 이들이 석파랑을 석파정으로 오인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문화재 지정도 다르다.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다.
석파정 별당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다. 그러나 하나의 공간에 있던 건물들이다.
석파정 별당은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다.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인물이다.
석파랑은 소전의 집념이 지어낸 건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집을 짓기 위해 30년 동안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목재와 기와 등을 모았다.
운현궁·선희궁·칠궁·이완용의 별장 등의 자재들이다.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는 트럭 30대 분을 옮겨오기도 했다.
그 자취들을 모아 1963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했다.
언덕배기의 석파정 별당으로 유명하지만 입구에 있는 문서루 또한 예사 한옥이 아니다.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왔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호벽(胡壁)을 재현했고
입구에는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붙여 품위를 더했다.
덕분에 옛 한옥의 기품이 그대로 살았다. 거리와 접한 돌담을 따라서는 대나무를 심었다.
뒤쪽 주차장 쪽에서 보는 전경은 또 다르다.
누마루가 있어 한층 그윽한 운치를 안긴다. 대지의 높낮이 차가 적잖았음을 보여준다.
석파랑은 1993년 새로운 주인을 만나 한정식집으로 문을 열었다.
내부는 음식점으로 쓰기 위해 최소한만 바꿨다. 주로 궁중요리와 전통 한정식을 낸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도 맛볼 수 있다.
원래 문서루와 석파정 별당 그리고 맞은편 한옥의 세 채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문서루와 석파정 별당만 석파랑의 소유다. 문서루가 음식점으로 쓰인다.
효자동의 한옥을 옮겨온 맞은편 건물은 소유주가 다르다.

청나라풍의 상류 사회 별장
석파정 별당에 앞서 정원을 지난다.
150년 된 감나무와 만세문(萬歲門)이 커다란 상징처럼 자리한다.
만세문은 고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웠던 문이다.
만세를 누리라는 의미로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기원한다.
구름 사이로 불로초를 물고 나는 암수 두 마리의 학과 박쥐 등이 그려졌다.
만세문을 지나 문서루로 향한다. 외국인들에게는 소원을 비는 하나의 통로다.
정원은 석파랑(문서루)과 석파정 별당을 잇는 계단 주변으로 조성했다.
봄에는 철쭉과 진달래가 만개한다. 가을에는 단풍과 홍시가 계절의 멋을 더한다.
당연히 정원이 보이는 자리가 명당이다.
석파랑은 옛 고택의 중후한 멋도 있지만 정원의 화사한 기운을 만끽하려 찾는 이도 적잖다.
낡은 기와나 벽돌들도 길가에 차곡차곡하다.
정원을 가로질러 석파정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침목을 깔았다.
정원과 잘 어우러진다. 별당은 너른 바위 위에 자리 잡았다. 그 너머로는 야산이다.
주변으로 소나무들이 멋들어진다. 건물은 ‘ㄱ’자 형의 구조에 맞배지붕을 가졌다.
원래는 ‘一’자 형이었다는 설도 있다.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 옆에 방이 있는 구조다.
흥선대원군은 앞쪽으로 돌출한 큰방을 썼다. 건넌방은 손님이 사용했다.
대청마루에서는 난초를 그리곤 했다.
지붕이 끝나는 서편에는 붉은 벽돌을 쌓아 벽을 세웠다.
원형과 반원형의 창을 낸 것도 특징이다.
전체적으로는 전통한옥보다는 청나라 건축 양식이 짙게 묻어난다.
특히 고급 자재를 활용해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지어
조선후기 상류 사회 별장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부암동의 석파정은 사유지로 출입을 금한다.
반면 석파랑은 한정식집으로 영업 중이지만 공간을 개방하고 있다.
정원과 석파정 별당은 누구라도 양해를 구하고 가볍게 둘러볼 수 있다.
주변에는 옛 유적도 많다. 5분 거리에 세검정과 홍지문(탕춘대성)이다.
평창동이나 부암동도 가깝다. 한적한 동네라 산책 삼아 코스를 짜도 좋을 듯하다.






가는 법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지선버스 0212, 1020, 1711, 7016, 7022, 7018번,
마을버스 종로13번 환승. 상명대 하차.
간선버스 110B, 153번, 지선버스 7730번 세검정 하차.
상명대 삼거리에서 부암동 방면 오른쪽
사이트:http://www.seokparang.co.kr
이용 시간:정오~오후 3시, 오후 6시~오후 10시
글:박상준(직업여행작가)
출처:오!!! 멋진 서울/저자박상준/웅진리빙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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