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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기자의 바른말 광] 괴팍하고 강퍅한 규정 |
부산일보 | 기사입력 2007-09-04 11:57 |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한양대 정민 교수가 조선 중기 시인 권필의 시 <과정송강묘유감(過鄭松江墓有感)>의 첫 구절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를 번역해 들고 가자 그의 스승은 그 석사 논문을 이렇게 고쳤다.
'빈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22자나 되는 시구를 11자로 줄이는 '내공'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강력하다. 달리 스승이 아니다.
정 교수는 얼마 전 펴낸 책 <스승의 옥편>에서 'KO패를 당한 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선생님의 연구실을 나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고 이런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중복 표현을 '그럼에도'로 줄이는 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뒷배경, 술취하다'보다는 '배경, 취하다'로 쓰는 사람이 더 많다.
줄이는 것으로 치자면 소리와 발음에 관한 걸 빼놓을 수 없다. 이중모음(복모음)을 하도 단모음으로들 발음하는 바람에 아예 표기가 바뀐 말도 있다. '괴팍하다'라는 말이 바로 그렇다. 원래 '괴퍅(乖愎)하다'로 썼으나 워낙 많은 이들이 [괴퍅-]이 아니라 [괴팍-]으로 발음하자 국립국어원은 '괴팍하다'로 표준어를 바꿔버렸다. 그러니 아래 문장에 나오는 것처럼 이제 '괴퍅하다'로 쓰면 틀린다.
'그럼에도 연암은 그의 괴퍅함을 잘 참아내는 한편, 그의 개성을 낱낱이 묘파해 놓았다.'(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하지만 이 규정은 사실 괴팍한 규정이다.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는 뜻인 '강퍅(剛愎)하다'는 '강팍하다'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성질이 엉큼하면서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는 말인 '암퍅(暗愎)하다'나 '교만하고 독살스럽다'는 뜻인 '오퍅(傲愎)하다'도 그대로 '퍅'을 살려 쓰도록 했다.
같은 한자인데도 '팍'과 '퍅'으로 다르게 써야 하는 일은 혼란스럽다. '너그럽지 못하고 까다로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질'을 '퍅성(愎性)'이라고 하는데, 까다로운 언중이라면 퍅성 부리게 생겼다. jinw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