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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의 진산인 동악산은 나라의 훌륭한 인재나 성인이 탄생할 때마다 하늘이 진동하며 음악소리가 들려 동악산(動樂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동악의 악(樂)자는 풍류를 뜻한다.
대체로 ‘악’자가 들어가는 악(嶽,혹은岳)산은 악(惡~)소리가 나는 법이라며 우스갯소리를 많이 하지만 동악산의 경우는 이와는 틀리다는 이야기.
동악산은 청류동(淸流洞)계곡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봉을 형제봉, 북쪽에 있는 봉을 동악산(북봉)으로 나눠 부른다.
능력에 따라 종주를 하여도 좋고 아니면 길상사지나 배남이재에서 끊어 탈 수도 있다.
몇 해 전 죽으라 땀 흘리고 두 산 이어타기<☞ http://blog.daum.net/bok-hyun/85>를 한 바가 있다.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인데 이는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지인에게 준 화첩(畵帖)의 발문(跋文)이다.
이를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인용하면서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알면 보이게 된다’는 표현으로 고쳐 사용했다.
문화유산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일 것.
나도 이번엔 다른 각도로 동악산을 바라보기로 하였다.
나라와 백성이 어려울 때마다 끊임없이 성인(聖人)을 배출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한다는 일명 성출산(聖出山)이라는 동악산의 전설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김인후(金麟厚 1510∼1560)․고경명(高敬命 1533∼1592)․정철(鄭澈 1536∼1593)․유형원(柳馨遠 1622∼1673)․허생(許生)․박세채(朴世采 1631∼1695)․
김창협(金昌協 1651∼1708)․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익(李瀷 1681∼1763)․정약용(丁若鏞 1762∼1836)․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등을 비롯하여
구한말에는 기우만(奇宇萬 1846∼1916)․전우(田愚 1841∼1922)․송병선(宋秉璿 1836∼1905)․황현(黃玹 1855∼1910)․최익현(崔益鉉 1833∼1906) 등 그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우국지사들이 동악산으로 들어와 비분강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역(周易)의 빛나는 방책(方策)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일으켜 구국제민하여
자손만대에 전할 호국(護國)의 성지(聖地)라고 하였다.
<자료인용: 박혜범님의 천간지비(天?地秘)>
청류동 구곡(九曲)의 반석(磐石)과 바위에 새겨진 글들은 중종 때의 학자 남주를 매개로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을 이어 오던 곡성의 선비들이 조선 말기 순조(純祖, 1790∼1834) 때부터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여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은밀하게 일본에 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기록들이다.
한갓 풍류객들의 질펀한 놀음과는 사뭇 다르다고 하겠다.
필자는 선열들의 기개와 우국충정에 행여 누가 되지않을까 자못 마음세를 가다듬고 청류동구곡을 거슬러 오르기로 하였다.
아래 부산일보 산행지도는 참고용.
우리 버스가 여기까지 올라 왔다.(조금 아래에서 산자락으로 붙어야...)
부산일보 산행지도의 깃대봉 산행기점(야외 음악당)이다. 운동장 건너 낮은 산자락이 들머리로 우리 일행들은 모두 건물 뒤의 소로를 따라 들어가고....
버스는 조금 더 올라와서 주차 대기한다.
주차장에서 도림사쪽 입구에 도림민박식당이 있고, 그 입간판 아래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있다.
아예 청류동구곡(淸流洞九曲)을-은어가 알을 낳기 위하여 그러하듯-거슬러 오르기로 하였다.(계곡 내려가는 길 철계단)
마치 초등학교 시절 보물찾기라도 하는 양 마모되고 퇴화된 각자(刻字)를 찾아 안경을 벗었다꼈다 두리번거리며 오른다.
어느 위치에 무엇이 있는지 예비지식은 별로 없다.
천간지비(天?地秘)의 박혜범님에 의하면 '하정 조병순(荷亭 曺秉順 1876~1921)선생이 구곡(九曲)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 일곡(一曲) 쇄연문(?煙門)
2. 이곡(二曲) 무태동천(無太洞天)
3. 삼곡(三曲) 대천벽(戴天壁)
4. 사곡(四曲) 단심대(丹心戴)
5. 오곡(五曲) 요요대(樂樂臺)
6. 육곡(六曲) 대은병(大隱屛)
7. 칠곡(七曲) 모원대(暮遠臺)
8. 팔곡(八曲) 해동무이(海東武夷)
9. 구곡(九曲) 소도원(小桃源)
계곡을 내려서자마자 제일 먼저 이곡(二曲)을 만난다. 그렇다면 일곡(一曲)은 더 아래에 있을 것.
구한말 당시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활동하다 1921년 7월 15일 밤 곡성경찰서에 끌려가 고문 살해되었던 의병장 '하정 조병순(荷亭 曺秉順)'선생과
'춘기 정순태(春沂 丁舜泰)선생'이 2곡(二曲) 물가 암반에 ' 盈科後進(영과후진) 放乎四海(방호사해)' 라 새겼다.
선생 두 분이 이 글을 여기에 새긴 것은, ‘도덕적으로 수양이 된 군자는 주위의 환경과 유혹에 쉽게 동요되지 않으며 나갈 바를 분명히 한다.’는 뜻으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차분히 만반의 준비를 하여 적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근본을 이어가는 선비의 자세를 밝힌 것이다.
특히 한때의 빗물이 모여서 크고 작은 도랑과 웅덩이들을 모두 가득 채웠다가 비가 그치면 모두 말라버리는 것 같이 일시적인 행동을 경계한 것은 목숨을 내건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때의 울분으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독려한 말이다.
무엇보다도 암반을 흘러내리는 두 물이 하나로 합수되는 그 옆에 새겨놓은 것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연을 통해 느끼고 깨닫게 하려는 배려이며 자연을 이용한 현장학습이다.
구덩이가 있으면 그곳을 다 채운 후에 넘쳐흘러 끝내 사해에 이르게 된다는 말로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마침 비가 많이 오지않아 암반에 새겨진 각자를 찾기에는 안성마춤의 조건이다.
'兩崖交翠陰(양애교취음)/ 一水自淸瀉(일수자청사) /俯仰契幽情(부앙계유정) /神襟頓飄漉(신금돈표록)'라는 오언절구(五言絶句)를 만난다.
회암(晦菴) 주부자(朱夫子)詩를 후학(後學) 조병흠(曺秉欽) 정봉태(丁鳳泰) 근송각(謹誦刻 삼가 외워 새긴다.) * 조병흠은 조병순의 동생이다.
섣부른 한시독해(漢詩讀解)를 삼가하고...
동그란 모양도 놀이를 하기위한 인위적인 흔적 같다.
수려한 청류동계곡을 계속 타고 오른다.
'三曲(삼곡)에는 神山九折溪(신산구절계) 沿沂此中半(연기차중반)'라는 주부자시를 후학 정순태,조병순 근송각(謹誦刻
빙청옥계(氷淸玉溪) 각자에도 '춘기(春沂)선생'과 '하정(荷亭)선생'이 새겨져 있다.
주부자(朱夫子) 詩
독해(讀解)를 위하여 옥편(玉篇)도 뒤적이며 머리를 싸매지만...ㅠㅠ
계곡 위로 잠깐 올라서니 도림사 계곡 안내판이 있다. (곡성 도림사 계곡은 그 자체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01호다.)
청류수석동악풍경(淸流水石動樂風景) 좌측으로 춘화화음희제(春和華陰戱題)
제일 우측의 숭정기원후사신ㅇㅇ(崇禎紀元後四辛ㅇㅇ) * 숭정(崇禎)은 중국
'奇蘆沙 松沙 兩先生杖屨處(기로사 송사 양선생 장구처)'라는 작은 글씨아래...
'서산강론(西山講論)'이라 큰 글씨로 새기고 아래 아홉명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언뜻 보기에는 강론을 한 사람들의 호와 이름을 새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구한말에 나라를 찿으려는 의지를 새긴 비밀서약이라고 한다.
오재 정봉태(梧齋 丁鳳泰),수태(秀泰),해태(海泰)는 형제들 같고,하정 조병순(荷亭 曺秉順)과 그의 아우인 병흠(秉欽)도 형제간이다.
丹心客上丹心臺 - 단심(丹心)을 품은 나그네 단심대에 올랐네.
縱有丹心有孰知 - 단심이 있다한들 누구에게 이 마음을 줄 것인가
莫道丹心知者少 - 단심을 아는 이 적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丹心只恐死如灰 - 단심이 죽어 재가 될까 다만 두려울 뿐이라네.
'우구산시(右臼山詩)' - 구산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1841-1922)선생의 별호이며, 구한말 애국지사로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 읊은 것을 새겨놓은 거라고 한다.
단심대(丹心臺)에도 역시 하정선생과 춘기선생이...
남주(?)유적(南ㅇ遺跡)
풍화작용(風化作用)의 영향으로 글체가 많이 닳았다. 글쓴이가 가을(秋) 고독(孤獨 ?)을 심하게 앓았을까?
천하의 명필로 보이지만 반쯤 감긴 눈을 탓할 수밖에...
글씨를 쓴 사람도 명필이지만 새긴 사람의 기술이 더 훌륭해 뵌다. 뻗치고 힘을 준 획마다 가늘게,혹은 깊고 굵게 새긴 기술은 명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계곡에서 고개를 드니 도림사 돌담 석축이 바라 보인다. 이 지점의 별로 크지 않은 바위(빨간▽표시)에 아래의...
오곡(五曲) 요요대(樂樂臺)가 새겨져 있다. ('樂'자는 즐거움을 뜻하는 '락'과 풍류를 뜻하는 '악'과 좋아할 '요'자로 읽힌다.)
역시 하정선생과 춘기선생이다.
도림사 아래의 부도군(浮屠群)을 살펴본 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해독 불가하고...
연륜이 느껴지는 도림사 축대.
연륜이 느껴지는 이끼 낀 석축.
도림사(道林寺)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 왼쪽의 건물이 최근 말끔히 복원된 보제루(普濟樓)이다.
도림사 탐방은 내려올 때 하기로 하고 일단 패스다.
도림사 안내판.
도림사를 지나 본격 산행들머리에 있는 바위에...
육곡(六曲) 대은병(大隱屛)이 새겨져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구시(求是)인가?.)
들머리에 설치된 동악산 산행안내도를 일별하고 조금 올라가면 아래의 바위를 만난다.
남파대사(南坡大師),눌봉대사(訥峰大師),유석처(留錫處),영산선사(靈山禪師),허주선사(虛舟禪師),ㅇ月大師,용산(龍珊),춘봉(春峯)...에고ㅠㅠ
처음 만나는 1철교를 건너면 좌측 계곡 암반위에...
비교적 선명한 각자가 나타난다.
제일 위에 '중류지주백세청풍(中流砥柱百世淸風)' 이라 새겨져 있다.
중류지주(中流砥柱)는 중국 하남성 협현 황하강 중류에 위치한 기둥과 같이 생긴 지주산(砥柱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탁류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개를 말한다.
서애 유성룡의 형인 겸암 유운룡(謙庵 柳雲龍 )이 '야은 길재'선생의 묘 동쪽 기슭에 세운 경북 구미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도 '지주중류비'가 세워져 있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은 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백세(百世)는 ‘오랜 세월’ 또는 ‘영원’을 뜻하고, 청풍(淸風)은 매섭도록 맑고 높은 군자의 절개나 덕을 비유한다.
따라서 백세청풍은 영원히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의미하며 충남 금산 청풍사(淸風祠)에도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碑)가 세워져 있다.
쾌사창애일도천(快瀉蒼崖一道泉) 푸른 절벽 사이를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은
백룡비 하을람천(白龍飛下鬱濫天) 백룡이 하늘에서 숲으로 날아 내리는듯 하네
공산유차진기관(空山有此眞奇觀) 인적없는 산중에서 이런 절경을 보고 있으려니
의장래간사름연(倚杖來看思澟然) 지팡이 의지해 와 둘러본 마음까지 젊어지누나
회암주부자시후학정순태조병순송각(晦菴朱夫子詩後學丁舜泰曺秉順誦刻) 주부자(朱夫子)의 시를 삼가 후학 정순태 조병순이 노래하고 새겼다
제일 왼쪽 끄트머리에 황매천 진사 장구처(黃梅泉 進士 杖履處)라고 새겨져 있다.
구한말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선생은 광양시 봉강면에서 출생, 자는 운경, 본관은 장수, 무민공 황진의 후손이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해 유명하다.
“거문고 타고 피리부는 술집 골목은 흥청대고/말 발굽에 나는 흙먼지는 온 장안에 자욱하여라/
모르리로다 벼슬 길에 오른 이들 가운데 /백성을 구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몇인가”
매천 선생이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목도한 광경은 이토록 비참하였고, 조정 지배층을 `귀국광인(鬼國狂人)이라고 비판하며 미련없이 낙향하였다.
“충무공 가신지 2백년 만에 나라가 열리더니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 꽃이 해를 가리네
…거북선이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면/왜놈들이 살려 달라 하고 양놈들은 물러가겠지”
l910년 8월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천은 유서와 절명시(絶命詩)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명분은 없다. 다만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 하지 마라."
칠언절구의 4수, 지조와 선비다움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게 하는 매천의 절명시(絶命詩) 중 3수를 읽어본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이미 물속으로 가라앉네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어렵구나, 지식인의 사람다움을 지키기가.
우죽(友竹),옥강(玉岡)정일흥,두후(斗後)조상묵 등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그 옆에 팔곡(八曲) 해동무이(海東武夷).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조선(海東)식 버전으로 뜬 듯하다. <* 주자(朱子)는 중국 남송(1127-1279)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존칭이다.>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근본 도량이며 하늘의 뜻을 살피고 땅의 일을 헤아리는 주역(周易)의 교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삼강오륜(三綱五倫)도 확인이 되고...
모곡(慕谷) 운곡(雲谷)의 장구처(杖履處:지팡이와 짚신을 끌고 온 곳)와 정은서 은동(丁隱西 隱東)이라는 글씨도 확인된다.
'1철교' 우측 계곡아래 하류에 절구통 같은 게 보인다.
'돌확(물확)'이라고 하는데 곡식을 넣고 빻으면 절구통이고, 물을 담아 연잎이라도 띄워 작은 자연으로 활용하든지 또는 처마밑 낙수지점에 두어 낙숫물 소리를 듣기도 한다.
도림사에서 400여m 올라와서 만나는 길상암지 삼거리갈림길.
길상암 형제봉 방향으로 올라간다.
이 지점은 해발 230m의 소방 위치번호<01-01>
삼거리 갈림길 맞은편 바위에 새겨진 '구곡(九曲) 소도원(小桃源)'
소도원 :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줄임말로 내가 거처하는 이곳이 바로 작은 무릉도원(이상향, 별천지를 비유)이라는 말.
목석거록시유(木石居鹿豕遊 나무와 돌이 있는(居) 곳에 사슴과 돼지가 놀다.)
바위에 새겨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
마른 계곡이 끝나면서 길상암지가 나온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서풍등고(西風登高)를 빌려 올린다.
역시 확인하지 못한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 * 글귀는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주자(朱子) 의 구곡(九曲)에서 따왔다.
九曲將窮眼豁然 (구곡장궁안활연) 아홉 굽이 장차 다해 눈이 훤히 열리니
桑麻雨露見平川 (상마우로견평천) 뽕나무 삼나무 비이슬이 평천을 보누나
漁郞更覓桃源路 (어랑갱멱도원로) 어랑이 다시 무릉 도원 찾지만은
除是人間別有天 (제시인간별유천) 이게 바로 인간 세상 천하 절승 별천지네
길상암(吉祥庵)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하나 확실한 자료는 없고 60년대에 폐찰(廢刹)되었다고만 전한다.
길상암지(址) 표석.
연륜이 느껴지는 돌확에 대통을 통하여 또르륵 또르륵 물방울이 떨어진다.
마음이 허하기로는 허물어진 성터가 2등가라면 섧고,무엇보다도 폐사된 절터를 보면 마음이 더 허허롭다.
폐사지(廢寺址)에서 느끼는 이토록 허한 허허로움이라니...
고갯마루(공룡능선 갈림길)에 올라섰다. 등로 복판에 턱하니 버티고 선 출입금지(공룡능선)를 알리는 목판.
곡성군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가까이의 공룡능선 너머로 동악산이 우뚝하고 좌측 멀리 매봉인 듯...
가까이의 공룡능선과 뒷쪽 동악산과 좌로 뻗은 매봉 그리고 동악산 뒤로 보이던 고리봉은 숨었다.
이정표
부채바위(부처바위)를 지나면...
진행할 형제봉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잘 설치된 고급스런 나무계단을 올라....
돌아보니 부채살처럼 잘 펼쳐진 부채바위가 보이고 동악산도 부채바위에 몸을 숨겼다.
7대륙 최고봉과 세계 3극점을 등정한 탐험가 아버지 허영호대장과 그의 아들 허재석 부자(父子)는 2010년 5월 17일 세계최초 부자(父子)에베레스트
등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명 성출봉(聖出峰)인 형제봉 동봉.
진행하다 좌측으로 건너 보이는 형제봉 서봉(대장봉)
안부의 너른 공터 한 켠에 서있는 이정표.
원효동 4km이다. 원효동은 원계동(元溪洞)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원효(元曉)선사가 도(道)를 강론한 곳으로 전해지는데,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원계동에 원계비둔(元溪肥遯)이라고 새겨진 선명한 각자(刻字)는 군자(君子)가 그 지위에서 물러나 세상을 피해서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서봉인 대장봉에 섰다.
계속 휘어지는 능선 뒷쪽에 최악산(697m)이 보이고...
이정표의 숨은 날개엔 대장봉 0.5km.
(이정표와 시간을 참고.)
큰물이 나면 배가 넘어 다녔다는 전설이 깃든 배넘어재.
배넘어재의 이정표.
도림5교를 지나고...
등로는 계곡 암반을 가로 지르는데,큰물이 나면 이 길을 건너지 말고 저 아래쪽에 보이는 다리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있다.
도림사 1.2km
길상암 갈림길 계곡아래에 네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석재 윤ㅇ섭(石齋 尹ㅇ燮),석파 김석인(石坡 金錫麟),방은 최성관(方隱 崔成官),운강 최성철(雲岡 崔成哲)
돌확의 가장자리에 네 개, 여섯 개의 홈이 있어 주역(周易)의 동악산이므로 무슨 팔괘(八卦)가 아닐까하고 계곡으로 가까이 내려가 봤다.
돌확을 만들어 운반하려고 정을 넣은 자국 같기도 하였다.
원효조사(元曉祖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ㅇㅇ거사(ㅇㅇ居士),도선국사(道詵國師),지환대사(智還大師)등이 새겨져 있다.
천년고찰 도림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통일신라 헌강왕2년(876년)에 도선국사가 고쳐 세웠다고 한다.
도선국사,사명대사, 선산대사 등 도인들이 숲 같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절이름을 도림사(道林寺)라고 했다.
도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화엄사 말사이다. 그 입구에 도림사 보제루(普濟樓)가 자리하고 있다.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모든 건물이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어졌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가 나란히 서있고...
보광전 앞으론 사철단풍나무가 철그른 옷을 입고 섰다.
보광전 계단 왼쪽에 눈길을 끄는 연리지(連理枝)가 보인다.
한
연리지 가지 사이로 보이는 요상한 나무는 흡사 'S'곡선의 잘빠진 여성의 몸매를 닮아 있다.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이라는 보광전 주련(柱聯 )뒤로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모신다)이 보인다.
보광전의 화려한 단청과...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곡성 도림사 보광전목조아미타삼존불상 (谷城 道林寺 普光殿木造阿彌陀三尊佛像)' <전남 유형문화재 제271호>
아미타불 뒤의 탱화는 보물 1341호인 '도림사괘불탱(道林寺掛佛幀)'은 아닌 듯하다.
중앙에 석가불과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한 석가삼존도 형식의 괘불이다. <자료사진> -보물 1341호-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도림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776cm, 폭 719cm로, 중앙의 본존불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본존불 좌우에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두 보살은 거의 비슷한 형태인데, 왼쪽의 문수보살은 보관에 조그만 부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 오른쪽 보살과 다르다.
조선 숙종 9년(1683)에 계오·삼안·신균 등의 세 화원 비구가 그린 이 그림은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화기가 있어서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자료가 귀한 석가삼존불형식으로 그 색채구성과 문양표현, 인물의 형태 등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17세기 후반기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하다.<문화재청>
보광전 주련 뒤로 응진전과 칠성각이...
반야실(般若室).
범종각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비천상(飛天像)을 모방한 듯 똑같다.
백련(百鍊)의 도림사 편액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1.2~1977.3.15)화백은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출생하였다. 시·서·화(詩,書,畵)를 겸전한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이다.
궁현당(窮玄堂)
병들어 강호에 누워 있은지 몇해나 지났는고 /또 다시 찾아오니 마을 풍경 그윽하다
선경을 찾아온 손님 모두가 나이 어린데 /슬퍼하는 백발 노인 옛 추억에 잠겼네
바위와 늙은 소나무는 옛 모습 그대로인데 /시냇물 위의 절집은 새롭게 단장했어
석양 빛 저물어 갈제 절간 찾아 투숙하니/갑자기 깨달았어 이날 놀기가 옛 놀이보다 나은 것을
<곡성출신으로 처사(處士)로 살다가 떠난 조시해(趙時諧)>
이제 버스로 돌아가기 위하여 도로를 따라 걷는다.
도림사 주차장 아래에 그렇게 찾았던 보가효우(保家孝友)각자를 만난다.
동악산 청류동 삼곡(三曲) 대천벽(戴天壁) 석림(石林) 돌 벽에 새겨진 고종황제의 어필이다.
우(友)자 옆에 명기된 ‘주연서우석어당(珠淵書于昔御堂)’은, 주연(珠淵)은 고종황제의 호이고, 석어당(昔御堂)은 덕수궁에 있는 고종황제의 집무실이니,
고종황제가 덕수궁 석어당에서 썼다는 뜻이며, 의병장 조병순의 서실(書室) ‘이이재(怡怡齋)’ 대청마루에 걸려있던 현판과 똑같은 것으로,
이는 구한말 고종황제가 조병순을 주축으로 한 동악산(성출산) 유림들을 격려하고, 그 대표인 조병순에게 천하를 안정시켜 줄 것을 부촉한 어필이며,
원본은 후손에게 전해져 있다.<박혜범님의 자료>
광무(光武)는 대한제국의 연호로서 1897년(고종 34) 8월 17일부터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광무 9년이면 1906년인 것 같다.
보가효우(保家孝友) 청류동(淸流洞) <고종황제의 어필>
* 보가효우 왼쪽에 '주연서우석어당(珠淵書于昔御堂)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료사진 참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彿)
매표소를 지난다.(문화재관람료인 입장료가 2,000원으로 인상되었다.)
곡성출신의 구한말 강인한 선비요 재야인사였던 비운의 천재 오강(梧岡) 김정호(金正昊1872~1909)는 청류동을 무대로 여러편의 시를 남겼다.
도림사(道林寺)안에 있는 보제루(普済楼)에 "파초가 무성하고 임계석(臨渓石)에 오르는 사람은 손이 가볍고 발이 경쾌하다."며 쓴 김오강(金梧岡) 중수기가 있다.
이곳에 자주 들러 흥에 겨워 짓기를...
밤기운이 바다처럼 깊어져도 /술 향기에 추위를 타지 않네.
독경(讀經)소리 같은 벌레 우는 소리/산사(山史) 추관(秋官 사헌부)의 관리 같네
시(時) 주고 받고 머리싸매 거듭 고치고/고향 소식 편안하다 입으로 전해주네.
또 어느날 길상암(吉祥庵)에서 다시 조남기를 만나...
올라가는 계단에 이끼가 끼었는데 /골짜기 벌레소리에 봄기운이 아득해.
이곳 동락산에 즐거이 사는 것이 큰 바다 밖 삶이 아닐까 /부끄럽지만 그대 위해 소인(蘇人)을 물어보네
산 속 생활 즐거움을 늦게나마 알았으니/서쪽 난간 계곡물 보며 한뎃잠 청하네
그가 지은 글들과 시를 우국지사 장지연(1864~1921)과 석방 윤봉구(1853~1939)가 편집하여 오강유고(梧岡遺稿)를 남겼다.
산 내려와 잔병치례로 근 보름만에 얼음막걸리 단숨에 들이킨다.
막걸리 두 잔의 불콰해진 얼굴로 청류동 옥계수(玉溪水)에 발을 담그니 청류옥경(淸流玉鏡)에 하늘이 내려 앉았다.
내려 앉은 하늘에서 하얀구름 몇 점 덩달아 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