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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외 4편
어떤 아침은, 아침임을, 속죄하고 싶어 한다.
그런 날은 마음 울에 가둬 기르던 양 한 마리 거친 들판으로 내몬다.
닦을수록 커지는 얼룩들의 창에는
산문적으로 두꺼워지는 안개와 안개가 만드는 묽은 풍경,
시든 예언처럼 쉽게 풀어져 창문마다 입술을 주는 배고픈 고백들,
불탄 나무 우듬지에서 새소리가 태어날 때
쫓겨난 숫양이 빈 들을 위로할까.
뾰족 파도를 닮은 초록 뿔이 그 양을 키워낼까.
종소리를 찾아 종탑으로 올라간 마을 아이들
돌아오지 않는데
-—2015, <21세기 문학> 봄호
싱크홀
달을 주홍빛 음문이라고 쓴 시인이 있다.
지금 우리에겐 진하고 따뜻한 피를 흘리는 신이 필요하다 말한
그녀의 검은 땅, 검은 몸을 생각했다.
달을 본다.
우리가 가진 것은
버린 트렁크처럼
상한 양파 비린내 머금은 달,
숨은 지배자의 뒤집힌 모자처럼
검푸른 어둠을 방전하는 입이다.
달빛 얼룩은 이 거리의 오랜 복식이고
우리는 치마 속에 감춘 것들이 많다지.
선신이 태어나기에도
짐승이 태어나기에도 좋은 지금이라고
수다스런 거리는
피의 비밀을 서둘러 지우러간다.
읽히기도 전에 무가지(無價紙)처럼 버려져 사라지는 울음.
불빛이 어둠을 파먹는 동안
달의 찢어진 입술이
공회전하는 거리를 삼키는 동안
— 2014, <발견> 겨울호
여의도
침실이 있다 묻지마 관광의 마이크가 있다 아침의 낙종과 한밤의 쪽대본이 있다 다시보기가 가능한 빨강버튼 채널이 있다 그림자극을 따라가는 동선이 있다 프리메이슨 비밀클럽이 있다 음모론이 있다 불빛 환한 암전이 있다
손닿지 않는 스위치가 있다 비상구로 통하는 만능 알약이 있다 핀치 히터의 물방망이가 있다 금일휴업 식당이 있다 도시락을 든 배달부가 있다 식전과 식후를 구분 못하는 공복이 있다 스캔들을 기다리는 단물 빠진 단검이 있다 침대 밑에 대기하는 구토물 수거인이 있다 거울 낭떠러지에서 건진 배우의 붉은 입술이 있다 꽃피는 헌사가 있다 헌화가가 있다
운집한 암표상이 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 약장수의 북소리가 있다 나팔수가 있다 벽장 속 율법과 타다만 양초가 있다 앵무새가 태어나는 뻐꾸기 둥지가 있다 있고 있다 박제된 발제가 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이곳을 누구는 비대한 바람의 퇴적지라 부른다 무풍지대라 부른다 김치 치즈 카메라를 피해 섬 밖으로 날아가는 풀씨가 있다 낮은 풀잎으로 자라는, 섬이 모르는 땅속의 초록 섬이 있다 폐쇄화였나 흙 아래 작은 꽃 피우는 젖은 눈이 있다
—2015, <시산맥> 여름호
빵 굽는 편의점
초승달 크루아상은 아직 덜 구워졌다
시간 여행자처럼
어떤 이는 좀 더 머물고 어떤 이는 서둘러 떠난다
맛을 과장하며 구애하는 냄새들,
계산서를 굽지 않고
창가에서 마감직전의 잡문을 쓰거나
모차르트처럼 그늘 없는 음표로 ‘버터 바른 빵’을 굽는 이도 있겠지
발포비타민 아닌 구운 햇빛 알갱이를 달라는 건
봄날의 주문
까맣게 구운 손으로 은화를 구걸하는 이도 있다
편의점 아줌마가 꺼내는 별모양 쿠키에는
대추야자 씨앗을 닮은 초콜릿이 박혀있다
강아지 콧등에서 하품이 구워진다
간혹 밤의 라디오가 구워주는 음악편지가 빵 속보다 촉촉하다
아줌마의 오븐바닥에 눌어붙기도 한다
이 유리창은 젖은 것부터 먼저 구워낸다고
빗방울 마른 얼룩이 불똥으로도 보인다고, 중얼거린다
— 2015, <시산맥> 여름호
정객
오늘씨를 부르면 나요, 하며 나타나는 어제씨의 손
어제씨와 오늘씨는 시제가 바뀐 장소였네
눈길에 미끄러지고 추억에 쫒기는 거리
탈출에는 모험과 액션이 길이겠지만
길고양이는 이 건물 옥상 빨랫줄에서 부적처럼 다정히 말라가는 세 마리 물고기를 꿈꾸겠지
바람은 어디서 바람과 만나 기다리는 바람을 낳나
슬쩍 열어 보이는 바람 포켓은 겉씨식물과 속씨식물들의 숲
번식과 복제에 흉허물이 없다 우기네
숲의 입구에서 죽은 봄이 남은 꽃을 들고 계절을 흥정한다
다른 장소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꿈이군 꿈이야, 추억의 잔해가 들것에 실려 나간 공터는 쓸 만한 망명 지라지
저이는 짝짝이 신발 신은 마네킹의 손을 잡고
게임의 끝까지 달려간다
또 다른 오늘씨는 막, 커피잔은 빠져죽기엔 너무 작다*는 문장에서
빠져나오는 중
*볼프강 보르헤르트,「뭐라고 말할 수 없는 커피 맛」중.
— 2015, <21세기 문학> 봄호
[지리산 문학상 수상소감]
지리산 자락의 아름다운 고장 함양에서 지리산의 이름으로 주시는 상을 받습니다. 지리산은 우리의 삶과 예술 속에서 대체 불가능의 장소성을 획득하고 있는 현장이기에 저의 왜소함으로 인한 부끄러움이 기쁨에 앞서기도 합니다. 저에게 지리산이라는 시간은 젊은 날의 안개비와 원추리 꽃빛과 노고단의 운해로 남아있는 몽환의 갈피이기도 합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우연히 이곳에 들러 상림의 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 생애의 한 시기를 함양 사람들과 각별하게 관계 맺었던 고운 최치원 선생과 연암 박지원 선생의 체온을 그때 느꼈던 듯도 합니다. 고운의 현실적 좌절과 연암의 편답이야말로 그분들이 가진 문학의 육체였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천년을 살아서 건너온 인공 숲은 그 자체로 이미 문학인 것이겠지요. 습지와 오솔길, 잠자거나 발아하는 씨앗들, 이끼와 버섯, 새와 곤충들까지를 숲의 감수성이라 불러봅니다.
오늘의 만남 이후 지리산과 함양이라는 시공간을 제 몸에 들이는 일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기 수상자 분들이 열어 보여주신 언어를 향한 사랑과 고통을 잊지 않겠습니다. 산의 너른 품이 제게 나눠주는 숨을 제 시의 생기로 삼겠습니다. 부족한 글에 격려를 주신 세 분 심사위원 선생님과 함양군에 감사드립니다. 시산맥과 함께 하는 선후배 작가님들께 제 조심스러운 마음을 드립니다.
류인서 약력
1960~1980년
· 1960년, 경북 영천시 금호읍 교대동에서 출생.
· 유년기, 집 옆 수리조합 공터 귀퉁이를 개인 놀이터 삼아 자람.
· 취학기, 대구시 동구 동내동으로 가족 이사.
· 문예에 약간 소질. 중 고 시절 중앙통 YMCA 강당 복도에서 학생시화전, 안팎의 백일장에 불려 다님. 교지 편집장을 맡아 일함.
· <학원>, <여학생> 등 학생잡지에 작품 투고, 가끔 실림. 어렴풋이 시인의 꿈을 키움.
· 시대상 혼미의 청년기, 데모하는 선배들을 향한 선망과 권태의 이중시선을 가짐.
1980~2000년
· 80년 초입 대구시 동구 신천동으로 가족 이사.
· 소년기부터의 자가 면역질환 증세 다시 발현. 휴학. 만 2년간 병원 외엔 외부 출입 없이 견딤.
·차츰 회복. 타 대학 친구 권유로 연합서클 가입. 또래 나름의 친밀 교류, ‘맥향’ 등 클래식 음악 감상실에 둥지 틀었음.
· 서울행, 마포구 용강동에서 결혼생활, 수년 후 대구행.
· 이후 학업 연결. 전과하여 청소년학과 국문학 공부, 대학원에서 국문학 공부.
2000년 이후 ~
· 도서관 임시 사서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를 씀.
· 2000년 <시와 사람>, 2001년<시와 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 2005년 3월,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창비) 출간.
· 2005년 6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로 선정.
· 2005년 7월, 이 기간의 작품으로 제 5회 미당문학상 2심 후보로 추천받음.
· 2007년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문예진흥기금 수혜.
· 2009년 3월, 시집 <여우>(문학동네) 출간.
· 2009년 8월 <여우>가 한국도서관협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
· 2009년 12월, 시집 <여우>로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 2010년 10월, 시집 <여우>로 ‘청마문학상 신인상’ 수상
· 2013년 3월, 시집 <신호대기>(문학과지성) 출간.
· 2013년 10월, <여우>가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지원 대상도서로 선정.
· 2013년 11월, <신호대기>가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
· 2013년 12월, <신호대기>로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 2015년 7월, 제10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 대구한의대 시간강사. 외 아르바이트 교사, 그리고 생업으로 문학과는 상관없는 작은 일을 하면서
현재 느리게 글을 쓰고 있음.
[심사평]
이번 제10회 지리산문학상 후보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시산맥시회 회원들(100여 명)의 1차 추천을 받았다. 추천받은 시인들 중 이미 문학상을 여러 개 받은 시인, 그리고 중견 시인 이상은 시산맥 편집부에서 제외하고 득점순으로 7명의 후보를 2차로 추천하였다.
심사대상은 최근 1년간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 및 최근 1년 이내에 발간한 시집이다. 심사대상이 된 작품은 김종미 시인의<기린 방문기> 외 9편, 류인서 시인의 『희생』 외 9편, 문성해 시인의『수녀원엔 동치미가 맛있습니다 외 9편, 복효근 시인의『젖은 눈망울에 대하여』 외 9편, 서안나 시인의『소녀 a』 외 12편, 이승희 시인의『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외 9편, 최금진 시인의 『전갈』 외 9편으로 무기명 심사를 하였다.
우리 시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최종심에 오른 일곱 분의 시인들이 일구어낸 시적 성취는 눈부셨다. 어느 분이 수상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심사 규정에 따라 무기명의 작품을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인들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묘한 흥분과 설렘이 있었다. 심사하는 시간은 실제 작품보다 이름에 좌우되어 텍스트에 접근한 적이 많았던 일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을 정독하고 심사표를 작성하여 합산하는 과정을 가졌다. 그 중『희생』 외 9편과『젖은 눈망울에 대하여』 외 9편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다시 두 시인의 작품을 놓고 심사숙고했다. 약간의 이견이 있었으나 다시 검토하는 과정에서『희생 』외 9편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수상작이 확정된 후 주최 측에서 이름을 공개했다. 류인서 시인이었다.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신호대기』등의 시집으로 주목을 받은 시인이었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익숙한 세계를 전복하여 펼쳐 보여주는 그의 장기는 경이로웠다. 얼핏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이면을 섬세한 감각의 깊이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매 시편마다 잘 발휘되고 있었다. 익숙한 방법으로 익숙한 세계를 재생산하는 현실 모사의 시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한 감각과 전율이 류인서 시인의 매력이었다. 그는 행과 행, 낱말과 낱말 사이에 습관적으로 배치되는 일상적, 재현적 맥락을 지우고,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뛰며 부단히 시의 한계를 돌파한다. 고도의 시적 에너지가 충전된 “흙 아래 작은 꽃 피우는 젖은 눈”으로 “상한 양파 비린내 머금은 달”을 바라보며 “공터를 쓸 만한 망명지”로 인식하는 시의 여정도 신뢰의 중요한 요소이다. 류인서 시인의 눈은 밝고 깊어서 앞으로 시의 몸집을 더욱 풍요롭게 키워나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문인수(시인) 황인숙(시인) 홍일표(시인) (대표집필 홍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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