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동 쌍계사에서 화개장터를 지나 섬진강을 끼고 구례로 가는 길이었다.
사진: 구글 지도
길 가에 운조루(雲鳥樓)-조선시대 양반가옥이란 팻말이 나왔다.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산 밑에 한옥 단지(?)가 있다.
여행 전 운조루에 대하여 들은 바 없었지만 차를 꺾어 들어갔다.
한옥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는데 짓고 있는 집도 여러 채다.
어떤 한옥은 팔작지붕, 둥근 기둥에 헌함(軒檻: 난간)까지 돌렸다.
옛날 세월에는 돈 있다고 아무나 저런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둥근 기둥은 대궐에나 쓸 뿐, 민가에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어느 주민을 붙잡고 이거 누가 짓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한옥 짓겠다고 여럿이 어울러 신청하면,
(도(道)인지, 군(郡)인지에서) 보조금 6천 만원 정도가
연리 이점 몇 프로에 장기상환 조건으로 나오고,
거기에 자기 돈 보태 다 합해 1억 정도에 짓는 거에요.
1억? 한옥이 그거 가지고 됩니까?
아뇨, 겉은 그럴 듯 해도 안은 대충이에요.
나무도 일일이 목수질 하면 돈 많이 들지만
규격 대로 맞추면 큰 돈 안 들어요.
설명하는 중년 남자는 분명 이웃일 텐데 어쩐지 못마땅한 눈치다.
원래 가족이나 동네 사람에게 인정 받기가 더 힘든 법이다.
짓고 있는 집 한 군데를 들어가 보니 과연 전통 한옥과는 다르다.
그런데 운조루는 뭐에요?
여기가 바로 우리나라 삼대 길지 중 금환낙지(金環落地) 아닙니까?
저 안으로 돌아가면 운조루라고 옛날 집 있어요.
하는 말에 운조루까지 찾아 들어 갔다.
운조루(雲鳥樓)
한옥 단지에서 모퉁이를 돌아서자 옛날 집이 나오는데,
기와도 갈고 새로 싹 단장을 해 놓았다.
사진: 운조루 전경
안내판을 읽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구례 운조루, 중요민속자료 제 8호
조선 영조 52년(1776)에 세운 조선 시대 양반가의 대표적 구조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로
금환낙지(金環落地) 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
이하… 기둥, 도리, 팔작지붕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로 금환낙지(金環落地) 의 형세와 국면이라..
일찍이 삼대 길지(吉地)니, 십승지지(十勝之地)니 하는 말을 들었지만
운조루가 거기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삼대 길지 검색해 보니
안내판 설명은 썩 정확한 편이 아니었다.
길지(吉地)가 세 군데 있는데 운조루가 그 중 하나란 이야기가 아니다.
길지를 분류하면 세 종 있는데, 금환낙지가 그 중 하나란 뜻이다.
풍수에서 손 꼽는 3가지 국면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금환낙지(金環落地)고
운조루 일대가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환낙지에 해당하는 땅이 더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 형세는 금귀몰니(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다.
(*)금귀몰니(金龜沒泥) ;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
오보교취(五寶交聚);금,은,진주,산호,호박 5가지 보물이 쌓인 터
그런데 위 셋이 삼대 길지 면, 내가 들은 삼남의 삼대 길지
금닭이 알을 품는다는-금계포란(金鷄抱卵)형국의 어느 마을과
밝은 달빛 아래 비단을 펼친다는-완사명월(浣紗明月)형의 마을은 또 뭐란 말인가?
돌아다니는 삼대 길지 죄 꼽으면 셋이 훨씬 넘는다.
세 군데가 넘으면 삼대 길지라 할 수 없고…거 참…
금환낙지(金環落地)란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하고 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 한다.
선녀가 가락지를 떨어뜨렸으면 뭐가 좋은데?
그에 대한 설명은 찾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자꾸 물으면 화 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형상이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여성이라면
전라남도 구례 땅이 여성의 옥음(玉陰)에 해당 한다고 한다.
과거 여성이 출산하거나 성행위를 할 때
가락지를 빼놓는 것을 상례로 여겼는데,
이곳이 바로 출산이라는 생산행위를 위하여
금가락지를 빼놓은 금환락지의 명혈(明穴)이라는 것이다.
한반도를 토끼나, 노인에 비교하더니, 여기서는 또 여자란다.
옥음(玉陰)을 우리 말로 뭐라고 하는 것쯤은 다 알 것이다.
성행위와 출산을 명혈(明穴)과 연결시키는 발상은 꽤 그럴 듯 하다.
원시사회에서 성의 힘은 곧 왕성한 생산력이고
생산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곳이 곧 명당 아니겠는가?
풍작을 기원하며 남녀가 교접하는 의식을 올리던 자취는
지구 상 곳곳에 있고, 가락지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 성을 암시한다.
연지(蓮池)와 배롱나무
운조루 앞에 연지(蓮池)가 있다.
함빡 연꽃이 피었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원칙대로 네모 난 연못 가운데에 둥글게 섬을 만들었다.
사진: 배롱나무가 못 가에 활짝 피어 있다.
나는 이 연못을 그냥 조경(造景)으로 만들어 놓은 줄 알았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보니 이 연못이 바로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
그러니까 금환낙지의 혈(穴)이라는 것이다.
입장료
운조루 대문에 붙은 문간 방에서 할머니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어른 개인 1,000 원, 단체 800 원, 학생 700 원, 군경 500 원, 어린이 무료
군인은 학생보다 밑으로 가는 모양이다.
고가(古家)를 여기 저기 다녔지만, 돈 받는 곳은 보지 못하였기에
처음엔 야 이정도 가지고 뭐 돈을 받고 그러나 하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돈을 받지 않으니 미안하고
또 아예 들여 보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돈을 받으니 마음 놓고 보고 또 고가(古家)를 유지하자면
제법 돈이 들 텐데 다소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호랑이 뼈
대문 상인방에 등(燈)이 달렸고, 그 좌우로 웬 뼈가 걸려 있다.
저거 소 뼈 입니까? 라고 물으니
호랑이 뼈에요 라고 어느 방문객이 가르쳐 준다.
윽.. 호랑이 뼈 라고…
호랑이뼈 맞는지 DNA 조사하자고 덤빌 수는 없었다.
왜 걸었는지 묻지 않았지만, 벽사(僻邪)-잡귀를 막는 용도 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조사하니, 옛날 운조루 대문엔
정말 호랑이 뼈를 걸어 두었던 모양이지만 그만 도둑 맞고
지금 걸린 것은 말뼈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래서 까칠하다는 소리 듣더라도 확인 할 것은 해야 한다.
남의 대문에 걸린 뼈다구까지 훔쳐가는 인간은 누구의 아들 (또는 딸)일까?
오미동가도(五美洞家圖)
호랑이뼈 아니 말뼈를 보며 대문을 들어서는데 옛 도면의 복사본이 걸려있다.
왼편에 횡서로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라고 썼으니,
전라도 구례 오미골에 있는 집-바로 이집 배치도란 뜻이다.
위 아래로 산 이름이 적혔는데, 지리산 노고단이 주산(主山)이요,
좌청룡(左靑龍)은 왕시루봉, 우백호(右白虎)는 형제봉이다.
이 집터의 명당수(明堂水) 섬진강은 (마주 볼 때)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흘러 간다.
안산(案山)은 오봉산인데, 그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비보(裨補)로 판 것이
연지(蓮池)로 풍수 상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혈처(穴處)다.
타인능해(他人能解)
헛간에 네모 난 뒤주와 함께 그 보다 조금 작은 둥근 나무통이 있는데
그 밑으로 글씨가 쓰여 있어 읽어보니 타인능해(他人能解)다.
타인능해(他人能解)란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
(끼니가 떨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퍼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배고프면 와서 먹을 만큼 쌀을 가져가게 한 것이다.
직접 쌀을 퍼 주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하는 배려와 함께.
옛 조선조가 곧 망할 듯 하면서도 500 년을 버티어 온 뒤에는 이런 면이 있었다.
어른들 이야기 들으면 옛날 부자는 혼자 잘 먹고 잘 산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자라면 괜히 질투들 하고 그래 라는 소리가 가끔 들린다.
부(富)를 정당히 이루고, 세금 꼬박꼬박 내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또 옛 사람은 청부(淸富)라도 주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지리산 자락은 공비활동과 그 토벌작전이 심했던 곳이다.
그 험한 세월을 지나며 운조루가 온전했던 것은 인심을 잃지 않은 탓이리라.
금환낙지, 금귀몰니 따위보다 이 집을 명당으로 만든 것은
타인능해 라고 쌀 뒤주에 써 붙인 그 정신 일 것이다.
금귀몰니(金龜沒泥)
안채 대청에 앉아서 부엌의 나무 기동과 장독대를 바라 보다가
그 정겹고 아늑한 광경을 담고자 한 컷 찍었다.
돌아와 조사하니 이 부엌 채가 바로 금귀몰니(金龜沒泥),
금 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터의 혈심(穴深)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사진 무조건 찍어 놓아야 한다.)
거기가 혈이라면 그 위에 안방을 앉히면 더 좋을 것 같지만
안방엔 물이 없고, 아궁이 때면 화기(火氣)만 올라올 것이다.
그래서야 수중생물 거북이가 어떻게 살겠나?
부엌 같으면 그 안에 물 드무도 있고, 아니라도 물 일이 많을 테니,
거북이가 물속에서 편안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금귀몰니(金龜沒泥) 혈심에 부엌을 지었다는
전설의 고향인지, 고향의 전설인지 하는 이야기다.
운조루 사랑채
퍼 질러 앉아도 좋을 듯한 안채에 비해
사랑채는 옷깃을 여미고 뵈어야 할 단정한 선비의 기상이 있다.
아무것도 덮지 않은 맨땅 흙 마당에는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현대 한국인은 저 마당에 잔디를 심고 싶을 것이다.
운조루 현판
운조루(雲鳥樓) 이름은 “돌아가자, 전원이 묵는데 어이 아니 돌아가리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로 시작하는 도연명의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구름은 무심히 골짜기를 나오는데 (雲無心以出岫)
날다 지친 저 새 돌아올 줄 아네 (鳥倦飛而知還)
구름과 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현판 왼쪽 아래에 석정(石亭)이란 낙관이 있는데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곡전재(穀田齋)
운조루에서 나와 큰 길가 쪽으로 조금 가면 곡전재가 있다.
여기도 금환낙지라고 써 놓았다.
KBS ‘아름다운 정원’에도 나왔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대문 앞 안내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곡전재(穀田齋)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3-9호
이 건물은 1929년 건립하였다…..중략
2.5 m 이상으로 호박 돌 담장을 설치하여 집터의 환경을
금환의 개념을 도입한 점등이 독창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집이 문화재로 되려면 일단 200 년 이상 되어야 한다.
나의 집안-시골 큰 집 정자를 문화재로 신청하려도 거기서 우선 결렸다.
햇수가 짧으면 뭔가 특출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 집은 호박 돌 담장에서 찾은 모양인데 좀 약한 기분이 든다.
사진: 곡전재 대문과 호박돌 담장
오래 되었다는 것과 보호가치가 있느냐는 것은 다를 수 있다.
200 년 되지 않아도 보호해야 할 경우도 굉장히 많다.
햇수가 짧건 말건 정원은 KBS 에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지정 사유야 어찌 되었던 보호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사진: 곡전재 안뜰
아름답긴 한데 뭔가 빠진 기분이 든다.
그것이 무엇일까 ?
곰곰이 생각하니 요즈음 유행어로 스펙이라는 것이 있다.
고가(古家)에도 그 스펙이 있을진대, 곡전재 지을 때는
조선 선비 사회가 망한 뒤 지었으니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내 눈에 허전하게 보이는 것이다.
스펙이야 어찌 되었던 소담스럽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이다.
사진: 곡전재 꽃밭
|
첫댓글 감사합니다 구경 잘했구요 운조루 나도 구경한번 가봐야 겠네요 많은걸 배우가 갑니다 .
타인능해(他人能解)아름다운 전통 부자는 나눔을 겸손해하는 그 시대적 배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는군요 어느 터에 자리잡고 사느냐 하는것도 하늘의 뜻이라 하지요
사라져간 우리의 민속 이렇게라도 명맥을 이어가야 하지않을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