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쿠바이야기
서 영 복
집 떠나온 지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날 즈음 우리는 여섯 번째의 나라 쿠바에서 일주일을 머물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이곳에 처음 상륙했을 때 “내가 눈으로 본 곳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표현했다는 어떤 책의 글을 읽고 이번 중미 배낭여행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기대했던 여행지였다. 아메리카대륙 최초의 공산국가, 우리에겐 무엇보다도 숙소부터가 생소하다. 작년에 다녀온 남미에서도 이런 숙소는 없었다. 물론 이곳에 시설 좋은 호텔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전의 과테말라에서 묵었던 호수 주변 호텔이나 방갈로, 코스타리카의 멋진 카리브해변 호텔보다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이곳 까사 파티 클라르의 색다른 경험은 나그네에게 호기심과 신선함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까사는 스페인어로 집이라는 뜻이다. 쿠바에서는 국가의 허가를 받아 가정집의 여유 있는 방을 개조해 여행자들에게 빌려주고 음식도 제공하며 수익금의 절반쯤을 국가에 내고 있다. 방값은 1박에 30쿡 정도(약 4만 원쯤)로 호텔보다 훨씬 저렴하고 밥값도 5쿡 정도인데 가정집 주방에서 주인아줌마와 함께 지어먹을 수도 있다. 우리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 나라 수도 아바나에서 지내게 되었다. 백 년 전쯤 지어진 듯한 주택 까사와 엘리베이터 문을 손으로 열고 타는 아파트의 까사까지 가정집 세 곳, 그리고 또 다른 도시 트리니다드 마을에서 깔끔하고 상냥했던 데이지 아줌마네 까사에서의 좋았던 추억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아침 식사는 아줌마가 정성을 다해 차려주는 대로 먹었지만, 어느 날 저녁은 내가 해보기로 하였다. 점심을 식당에서 랍스타 요리로 건하게 먹은 터라 간단히 먹을 요량으로 한국 라면에 준비해간 말린 김치를 넣어 끓였다. 물기 한 방울 없이 깨끗하게 정리돼있는 주방에서 오십 대 초반의 주인아줌마 부부와 함께였는데 처음으로 본다는 라면의 포장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신기한 듯 천천히 먹어 본다. 하지만 데이지 아줌마는 입에 넣자마자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휘둥그렇게 하더니 “피까,삐까”를 연발한다. 맵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쿠바의 음식은 대부분 단순한 방식으로 조리한 건강식이어서 짜거나 맵지 않다. 화학비료를 쓸 수 없는 이곳에서는 모든 재료가 유기농이며 향신료나 조미료를 많이 쓰지 않아 남미에서의 짠 음식에 비하면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지곤 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그들이지만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나는 서툰 영어를 쓰고 그들은 스페인어만을 사용한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기도 하고 형제나 자매가 되기도 하며 미소와 함께 자기소개하자마자 곧 포옹한다. 처음 몇 번은 쑥스러웠지만, 쿠바에서 며칠 지내고 보니 이들이 참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함을 느꼈다.
인터넷이 잘되는 호텔 같은 서비스를 기대할 수는 없어도 쿠바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숙박비나 밥값을 그들의 손에 직접 주면서 자연스러운 이곳의 팁 문화에 익숙해져 팁까지 주고 나면 선한 일을 한 것처럼 마음이 한층 가벼워진다.
쿠바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게 되는 캐릭터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다. 거리의 담벼락은 물론이고, 옷이며 가방에도 심지어 기념품 가게의 그 많은 물건마다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그만큼 그를 사랑하며 가까이하고 싶은 모양이다. 세계인들에게 영원한 청춘의 우상으로서 혁명의 아이콘이 된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였지만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상의 모순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목숨 걸어 쿠바혁명에 가담하였다. 우리는 이 층으로 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보다가 혁명광장에서 내려 내무성 건물 전체를 꽉 채운 그의 얼굴이 철근으로 만들어져 있는걸 보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어렴풋이나마 혁명정신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체 게바라 못지않게 이곳 쿠바를 상징하는 인물로 느껴지는 사람은 노벨 문학상의 작가 헤밍웨이다. 그는 미국출신이지만 쿠바의 매력에 빠져 아플 때를 제외하곤 거의 이십 년 동안 쿠바에 머물러 작품을 썼다. 심지어 몸이 불편하여 노벨상 수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내가 받은 상은 사랑하는 쿠바의 것’이라고까지 피력할 정도였다.
우리는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머물러 집필활동을 했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과 생전에 단골로 다닌 라~플로리디따 술집 근처를 몇 차례나 거닐게 되었다. 쿠바여행이 끝나갈 무렵 아바나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코히마르 어촌마을에 가 보았다. 이곳은 헤밍웨이가 쓴“노인과 바다”의 실제 모티프가 된 곳이라 해서 일부러 택시까지 타고 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바닷바람에 한 번씩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내 소녀 시절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해 주었다. 바다를 향한 조그만 광장에는 그의 기념비와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흉상이 있는데 이는 이 마을 어부가 기증한 어선의 스쿠르 프로펠러를 녹여 만든 것이라 했다. 광장을 돌아보는 동안 내리던 비도 그쳐 그가 자주 들렸다던 라~떼레사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안쪽 테이블에 앉아 노인과 헤밍웨이가 즐겼던 다이끼리와 모히또를 마시면서 넓은 유리창 밖으로 코히마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선장 할아버지의 사진까지 전시돼있어 소설이 아닌 실제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여느 때처럼 서너 명의 나이 지긋한 뮤지션들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 그들은 식당이든 카페든 여행자가 자리에 앉으면 어디선지 코앞에 나타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미지를 적당히 차용하며 노랠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 “베싸메 무쵸”“라팔로마”등 우리 귀에 익숙한 곡을 연주하여 기쁘게 지갑을 열게 하고 마지막은 함께“꼼빠이”를 외치는 합창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워준다.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며 끝까지 고기와 싸워 자기의 고깃배보다 더 큰 고기를 잡았던 산티아고 할아버지, 하지만 조각배 옆에 매달고 몇 날 며칠 항구로 돌아오다가 끝내 상어 떼에게 고기의 살점을 다 빼앗긴 채 커다란 고기의 뼈만 매달고 지칠 대로 지쳐 돌아온 노인, 그에게 “할아버지가 이 커다란 고기를 이겼어요” 하고 말해 주었던 소년, 아 아! 나는 그곳에서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유일한 단짝친구 마놀린도 보고 싶어졌다.
천천히 한적한 꼬히마르의 마을 길을 걸었다. 학교를 마치고 재잘거리며 거리로 나오는 아이들을 만나 버스 타는 곳을 물으니 따라오라는 시늉을 한다. 남편과 나는 뜻도 모르는 서로의 다른 말을 하면서 그들과 한바탕 웃기도 하고 아이들의 휴대전화에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버스를 탔다.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불리는“관타나메라”음악을 가득 싣고 있던 버스는 단돈 50원에 우리 두 사람을 태워준다. 요금은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1모네다 이다. 택시비 10쿡(13000원정도)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요금이다. 쿠바에서 이중화폐를 쓰고 있는 점은 여행자들에게 참 재미있는 일이다. 외국인이 주로 사용하는 쿡과 현지인이 사용하는 모네다 인데 사실은 두 화폐를 혼용하고 있다. 우리도 환전하면서 모네다 화폐를 약간 마련하여 시장보기도 하고 1모네다 커피나 5모네다의 아이스크림 등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하였는데 화폐에 모네다 인지 쿡 인지 글씨로 적혀있지 않아서 구분하려면 꽤 신경이 쓰였다. 아무튼, 나는 당분간 쿠바에 머물고 있는 상상에 빠져 지내고 있다.
요즘엔 자주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골 아가씨를 노래한 “관타나메라”를 흥얼거린다.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시를 가사로 붙인 노래이다.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 말에 양심이 찔리기도 한다. 오늘 저녁에도 혁명 기념관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잊히지 않도록 내 발자국을 남겼던 쿠바 곳곳의 이야기를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간직한다. 그래야 훗날에도 사진첩을 보듯이 자주 들춰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에서 가까워 새벽에 산책 장소로 적격이던 말레꼰 해변의 해뜨기 전 동녘 하늘, 빈손으로 산책 나왔다가 우리를 졸졸 따라오는 거리의 강아지에게 미안했던 일, 보행자 거리인 쁘라도 거리는 몇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데 자동찻길보다 몇 배나 넓으면서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가로수가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근처의 학교 아이들과 선생님이 체육수업을 하던 거리, 옛날 영화 장면처럼 50년대의 미국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누비는 예쁜 색깔의 올드카 물결, 보기에도 앙증스러운 노란 코코 택시와 두 사람 타기 미안해서 끝내 타보지 못한 자전거 택시들, 세계 문화유산인 비냘레스, 그 옛날 노예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탕수수농장, 흰색모래와 코발트 빛 바닷물이 환상적이던 앙꼰 해변, 별빛 가득한 마요르 광장에서 살사를 추어대던 세계의 젊은 여행자들과 남녀노소의 현지인들,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물고 내 옆에서 사진모델이 되어준 중절모의 멋진 노신사, 비록 아직은 좀 가난하지만 웃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
밤을 새워 내 좋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매혹의 땅,
쿠바, 쿠바 이야기. (20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