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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나님 내가 누구죠? 원문보기 글쓴이: 隸僕
하젤의 신약신학 :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
신약신학의 역사와 방법론
981237. 3-3. 김주한
제 1 장 신약 신학의 시작과 발전
1. 종교개혁으로부터 계몽시대까지
신약 신학이라는 말은 초기 기독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개혁 전까지는 신약 또한 교회의 전통이라는 범주하에서 논해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스콜라 철학자들과 교회 전통에 대해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내새우면서 성경은 전통과 그 무엇보다 우월한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가 도입되었고 이로써 성경신학이 발전하는 계시가 되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는 마틴 루터에 의해 강조 되었는데, 그것은 (1) 성경과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성경만이 참 성경이라는 것과(그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에스더서도...) (2) 그것으로써 율법과 복음이 구분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아직 성경신학이라는 분야를 알지 못했으며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는 성경 전 영역에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 신학'이라는 용어는 재세례파에 속한 1530년대의 사람 오스왈드 글래이트와 피셔에 의해 제시되었고, 100년후에 볼프강 야콥 크리스트만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쯤에서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내건 독일 경건주의의 출현이다. 그들은 성경신학이라는 도구로 개신교 정통주의에 반발을 하였는데 그 핵심 주자가바로 필립 야콥 스페너이다.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745년에는 이미 성경신학은 '교리(조직) 신학'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전자가 후자의 기초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성경 신학이 교리 신학의 단순한 보조학의 역할에서 독립해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것은 계몽시대의 합리주의 시기에 성취되었다.
2. 계몽시대
계몽시대에는 성경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접근법이 여러 가지 영향하에서 개발되었다. 그 영향을 열거해 보면,
우선 (1) 초자연주의에 반발한 합리주의를 꼽을 수 있겠고,
다음으로는 (2) 역사 비평법이라는 새로운 해석학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 성경에 대한 급진적 문서 비평의 적용을 꼽을 수 있다. 이 비평에 의해 성경은 하나의 고문서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로써 성경의 영감에 대한 점은 더 이상 고려되지 못했다.
1787년은 성경신학이 교리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해로 여겨진다. 성경 신학에 대해 게블러는 "성경신학은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써 거룩한 저자들이 신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리 신학은 교훈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특정 신학자가 자신의 능력, 시간, 연령, 장소, 분파 혹은 학파, 기타 유사한 것들에 따라 신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철학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면서, 세 가지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우선 (1) 영감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2) 성경 신하의 과업은 성경 각원 저자들의 개념들과 사상들을 조심스럽게 수집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3) 역사적 학문으로서의 성경 신학은 그 정의 자체가 '옛 종교외 새 종교의 여러 기간들간에 부분'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하게 역사적인 성경 신학의 목표를 추구한 사람은 게오르그 바우어였다.
3. 계몽 시대로부터 변증 신학까지
계몸시대는 지속적인 영향력 지녔고 신학에 변화를 가져왔다. 성경 신학은 이제 서술적인 학문이 되었고, 성경 자자들이 생각한 것, 즉 '당시의 의미'를 묘사하는 역사적인 학문이 되었다. 그리고 해석은 그 시대에 유행하던 철학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역사적인 접근법과는 별로로 '적극적이고 역사적인', '종교사적인', '구원사적인' 접근법들이 등장하였다.
1813-1821년에 고트로브 필립 크리스티안 카이저는 3부작 '성경 신학'을 썼는데, 그는 거기서 초자연주의를 거부했고 종교사적인 방법을 적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그는 성경적이거나 비성경적인 국면들을 모두 종교의 원리에 종속시켰다(종교사학파의 시작?).
순수한 역사적인 신약 신학에 관한 게블러와 바우어의 접근법은 튜빙겐 학파의 창설자인 페르디나드 크리스티안 바우어의 글에서 나타났다. 그는 그들의 접근법은 거의 완성했는데, 그의 제자 다비드 프리드리히 스트라우스는 1835년에 신약의 예수에 대한 기록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한 '예수의 생애'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 책에서 복음서 기록들은 신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19세기의 구속학파는 다음의 몇 가지의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1) 말씀 속에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와
(2) 성경 영감서
그리고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인 역사의 (예비적) 결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개신교 신학은 다양한 파노라마로 표현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1) 1897년 바젤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인 신약 해석과 고대 교회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프란쯔 오버벡에 의한 것이었고(그는 그것이 자신을 불신앙으로 이끌었다고 함),
다른 것은 (2) 종교사학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3) 순수한 역사적 방법을 비판한 쉴레터에 의한 것이다.
4. 변증법적 신학에서 현재까지
세계 1차 대전 이후 기간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새로운 요소들이 신학에 등장하였다. 텐달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네 가지 제시했는데 그것은,
우선 (1) 진화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신념의 상실과
둘째 (2) 역사적 진리가 순수 과학적 역사성에 의해 도달 될 있다거나 혹은 이러한 객관성이 도달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
그리고 셋째는 (3) 신정통주의 신학을 통해 계시 사상에로의 귀향하는 경향
마지막으로 (4) 자유주의의 역사주의는 부적절한 것이라는 관심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칼 바르트는 해석학과 신학에서 과격한 변화를 제시하였다. 그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알게되었고, 그것은 1918년 자신의 명저 로마서 주석의 서문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그는 변증법적 신학을 태동시켰는데, 그는 신인관계에서 계시의 출처로서 하나님을 강조하는 신학을 주창했다.
이 시대의 신학자였던 불트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1) 그는 종교사학파 였다는 것이다. 종교사학파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순수한 역사적 방법을 사용했다.
둘째로 (2)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자신의 신학의 전제로 삼았다.
셋째로 (3) 그는 신학적인 문제와 역사적인 문제를 결합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이를 가리켜 스텐달은 그가 "그것을 의미한 것"을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 떼어놓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1928년에야 비로서 처음으로 신약신학을 출판했다. 불란서 신학자 레모녀는 자신의 책에서 주제적 접급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마이너츠(1950), 본시르벤(1951) 등도 이어서 신약신학의 주제로 자신의 저서들을 출판했다.
1940년대 이후의 미국의 성경신학 운동을 차일는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우선 (1) 미국의 성경신학 운동은 철학 체계들에 대한 반대
(2) 히브리 사고와 헬라 사고의 대조
(3)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 강조
(4) 환경에 대조되는 성경의 독특성에 대한 강조
(5)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
그리고 마지막으로 (6)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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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성경신학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개관은 현재의 성경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가 생각해야하고 보완·수정해야하고, 발전시켜야할 부분이 어디인지 그 윤곽을 제시해 준다.
제 2 장 신약 신학의 방법론
신약 신학내의 이슈들은 심각하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이유에는 학자들이 동일한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의한 원인도 있다. 현대 신약신학에는 네 가지 주요 접근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한번 살펴보자.
1. 주제적 접근법
1) Alan Richardson
<신약신학의 전제> 그는 "신약신학 서론"(1958)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그 책의 서론에서 "사도적 교회가 공동의 신학을 소유하고 있었는지의 여부와 그것이 신약문헌으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길은 "신약문서들 밑에 깔려 있는 신학에 대한 하나의 가정을 만들고 그리고 나서 모든 가용한 비판적 역사적 지식에 비추어 그런 문서들의 본문과 관련해서 그 가정을 테스트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신약신학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역사적 비판적 문학적 언어학적 고고학적" 방법과 기타 방법들이 포함된다.
2) Karl H. Schellkle
<방법론의 의미> 카톨릭 학자인 그는 1968년에 4권의 신약신학을 출판하였고, 그는 그 책을 통해 "통일된 신약신학"을 제시하려하였다. 그의 방법론은 "신약 전체를 통해서 더 무게 있는 단어들, 개념들, 주제들을 추적하고 신약의 개별적인 책들과 그 그룹들 속에서 실제로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조직적으로 요약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신약 신학의 정의> 그는 3권에서 신약신학의 방법, 본질, 목적에 관한 그의 이해를 다루는데, 그는 "신약 신학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것은 그 자체가 옛 언약에 동화되는 것임-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 계시에 대한 증거로 신약책 속에 제시 되어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정의는, 신약신학은 정의상 신약문서들의 정경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분명 "신약신학의 자료는 신약정경속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교부들, 특히 초기 교부들의 글들도 신약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지는 않는다.
<방법론의 두가지 : 서술과 해석> 그는 "신약 신학은 신약의 보도를 묘사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할 것이다"라고 서술과 해석이 신약 신학의 본분임을 강하게 제시했다. 그는 서술적 측면을(1), "그 내용과 그 선언들의 형태와 목적들-그 형태들은 우리에게 아마 생소할 것임-을 조사하는" 시도 면에서 말하고, 해석의 측면은 "신약의 선언들을 우리의 현대적 질문들 및 우리 시대와 관련시키려는"것 이었다. 그런데 그의 해석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인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는 신약신학을 교리신학의 준비로 보면서, 해석을 "신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에 시작되어 있는 것을 상호 연결시키는" 신약신학의 국면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의 해석은 오늘의 시대와 관련될 필요가 있는 신약의 사상들을 상호 관련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통합된 신약신학 추구> 그는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신약신학의 설명이 서로 다른 책들의 차이점들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다양성 속에서 그 통일성을 인식하고 나타내는 의무가 있고 그런 목표를 추구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다양한 신학이 존재하지만 결국 신약신학은 하나의 신학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통일성에 관한 이해는 그가 채택한 주제적 방법의 열쇠이기도 했다.
그는 주제적 방법에 따라 신약신학을 네 가지로 조직했는데,
제1권은 창조(세계, 시간, 인간),
제2권은 역사와 구원사 속의 계시(예수그리스도와 구속, 하나님, 성령, 삼위일체),
제3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신약의 도덕)
제4권은 하나님의 지배, 교회, 완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신약 의 통일성에 대한 관심은, 그가 신약의 사상들과 주제들을 신약 증거들 속의 연대기적 순서대로 조사했다는 점과 18세기 말엽 G.L.Bauer 이후 신구약을 분리해서 연구한 경향에 반대해 신구약을 통합해 연구하는 작업에 초석을 놓았다.
2. 실존주의적 접근법
1) Rudolf Bultmann
<불트만 신학> 그는 신학은
우선(1) "순수하게 역사적인" 연구방향과 종교사 학파에 근거를 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그가 역사비평법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2) 그의 역사적 뿌리는 변증법적 신학의 선두주자인 바르트와 고가르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신약 책들이 "현재에 대해 무언가 말하는 것이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였고, 역사에 대해서는 "역사 저 너머의 모든 것을 피하고 역사 안에서 스스로 하나의 입장을 찾으려는 목적을 세웠다.... 왜냐하면 역사의 본질은 실재에 있어서 초역사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시간 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역사와 인간존재에 대한 자신의 이해 체계 속으로 실존주의를 병합했다. 이로써 그는 "역사적 재구성"과 "실존주의적 해석"을 결합하였다.
<실존주의적 해석> 그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비신화화 프로그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신화'(1958)라는 책에서 방대한 비신화화라는 말의 정의를 제시했는데, 그는 "비신화화는 해석학적 방법, 즉 해석 내지 주석의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신화화가 해석의 방법으로 필요한 것은, '신약의 우주론이 성격상 본질적으로 신화적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특징은 현대인에게는 믿음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한 한계 내에서 두 가지 길 만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현대인이 복음의 메세지와 신화적 세계관을 동시에 받아들일 것과, 다른 하나는 "신학이 케리그마에서 그 신화적 틀을 벗겨내는 작업 즉, 그것을 '비신화화 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시도한 비신화화 작업이 케그리마에서 무슨 추상적인 것을 뽑아낸다든지, 무엇인가를 제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비판 방법을 사용해서 그것을 해석하는 것", 즉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의 '재구성'과 '해석'의 개념> 그의 재구성과 해석의 개념은 그의 신약신학을 이해하는 기초이다. 우선(1), 신약 책들의 "재구성"이란 '신약 해석을 돕는 것으로서 신약 책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2) "해석"은 '신약의 사상들을 '삶의 행위'와의 관계 면에서, 즉 신앙의 자기 이해에 대한 설명으로서' 풀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신약신학을 '실존주의적 접근법'에서 다루는 것은 그의 신약신학이 특정한 철학체계, 즉 초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 의해 조건화된 신약신학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약신학의 구조>
제1부는 "신약신학의 전제와 모티프"라는 제목으로 되어있고, '예수의 메시지', '최초 교회의 케리그마', '바울과 별도로 헬라적 교회의 케르그마'를 몇 장으로 다루고 있다.
제2부는 그의 신학의 핵심인, "바울의 신학"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신앙 계시 이전의 사람"이라는 장과 "신앙하의 사람"이라는 부분으로 나누고 세 부항목을 다루고 있다.
제3부는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들의 신학"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방향 설 정', '요한의 이원론', '세상의 심판', '신앙' 등의 세부항목이 있다.
결론부인 제4부는 "초대교회를 향한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는데, 교회 질서, 교리, 발전,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을 다루고 있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적 인 과정은 브레데의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암시해주는데, 보다 직접적으로는 부세트의 '주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있다.
<반론들> 그는 "예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서 신약신학의 일부라기 보다 신약신학을 위한 전제이다"라고 선포한다. 이에 대해 스티븐 니일은 자신의 신약신학에서 "일체의 신약신학은 예수의 신학이 되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불트만이 말한 문장의 암시하는 바를 공략했다. 사실 불트만의 위의 문장은 F.C.Baur의 요구와 그의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1/후기 불트만 학파) 불트만의 신약신학에 대한 비판적인 반론은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가 현대 논쟁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이는 케제만, 본캄, 브라운, 로빈슨, 푹스, 에벨링 등 "후기 불트만 학파"로 불리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비판되었고, 그들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의 연속성을 탐구하기 위한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탐구를 시도했다.
(2/우익 비판자들) 바르티, 쉬니빈트, 예레미아스, 엘바인, 킨더, 퀴네쓰, 디엠, 틸리케, 알트하우스 등도 불트만을 비판한 우익비판자들이었다.
(3/정통 루터교) 정통 루터교 비판자들은 불트만이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 재림 등의 구속 사건들의 객관적 사실성을 부인한다고 지적했다.
(4/좌익 비판자들) 좌익 비판자들은 스위스의 자유주의 신학자 프리츠 부리와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 이국의 신학자 슈버트 오그덴이다. 우선(1) 부리는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충분히 전개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신화의 잔재인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방치를 지적했는데, 거기서 부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도 "탈케리그마화(dekerygmatized)"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하였다. 다음으로(2) 야스퍼스는 불트만이 실존적인 운동에 객과적인 요소가 유입한 점을 비판했다. 야스퍼스는 역사적 예수와의 연결을 유지하는데는 객관적인 요소가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오그덴(3)은 불트만이 "현대 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건설적인 제안을 완전히 무효화했다"라고 주장했다.
좌익 비판자들이 말하고자 한 점은 다음과 같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즉,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본질적 상대성은 예수에 대한 지식이 다른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지식과 종류가 다르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예수는 모방될 수 있는 하나의 최고의 예에 불과하거나(부리, 야스퍼스) 혹은 다른 곳에서 알려지는 것의 "결정적인 현현"에 불과하다는 것(오그덴)을 의미한다.
<불트만 신학의 핵심 : 바울신학과 반발> 불트만은 바울이 "기독교 신학의 창설자"로 생각했다. 이것은 "바울신학이 에수의 설교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구조라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바로 바울이 헬라적 기독교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불트만은 바울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바울의 신학은 그의 인간론으로 다루는 것이 가장 좋다. 첫째는 신앙계시 이전의 인간, 둘째는 신앙하의 인간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여 바울신학의 인간론적이면에서 구원론적인 방향이 돌출 되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바울 자신의 회심을 초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범주에 따라 "그의 종전의 자기 이해"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기에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바울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몸, 영혼, 세상, 율법, 죽음, 의, 은혜, 신앙, 자유 등 바울적 용어들을 용어 면에서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M. Barth는 불트만의 바울신학 제시 방법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불트만은 바울을 참된 자기 이해와 존재의 사도 요컨대 참존재의 사도로 묘사했다. 바울을 사도들 중 실존주의자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지침없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불렀다.
H. Schlier는 불트만의 로마카톨릭 제자로서, 불트만과는 대조적으로 바울과 용한 신학과 병행해서 복음서신학을 제시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는 바울신학을 신약신학의 기초로 삼는 대신에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 형식들을 신약신하의기초로 삼아야한다고 제시했다.
H.Braun은 신약신학의 가능성을 의심했는데, 그는 기독론, 구원론, 율법 등의 주제들을 거론하면서 "신약의 저자들은 인간의 구원 및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거론하는 진술들을 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조화될 수 없다. 그것들의 차이성으로 보아 그것들의 주제는 그것들의 진술하는 대로가 아니라 표현된 대로 상호 모순적이다"라고 했다.
후기 불트만학파에서는 아직 신약신학이 나오지 않았다.
Norman Perrin은 후기 불트만의 입장으로 돌아섰는데, 그럼에도 그는 불트만이 신약신학을 전혀 정립하지 못하고 다만 바울과 요한의 신학만을 정립했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그는 불트만과 같이 예수는 "신약의 전제"라고 하였다.
2) Hans Conzelmann
<신약신학 개요 1967> 콘젤만은 불트만의 제자로서, 그러나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진보를 보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책의 구조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 구조를 살펴보면,
우선(1) 서론은 신약 신학과 헬라적 환경, 유대적 환경의 문제가 거론되었고,
제1부는(2) "원시 공동체와 헬라적 공동체의 케리그마"를 다루고,
제2부에서는(3) "공관복음의 케리그마"를 다룬다.
제3부에서는(4) 불트만처럼 "바울신학"을 다루었지만
제4부에서는(5) "바울 이후의 발전"을 다루고
제5부에서(6) "요한의 신학"을 다루었다.
<불트만과 콘젤만의 차이 : 변화점>
우선(1),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신약신학 자체의 일부라기 보다 신약신학의 전제로 보고 포함시켰지만, 콘젤만은 이것을 전체적으로 생략해 버리고, "역사적인(historical) 예수"는 신약신학의 주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콘젤만은 신약신학의 기본문제라 선포자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선포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주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오리려 왜 신아이 승귀하신 분 부활 후 현현 이후에 나사렛 예수와 꾸준히 동일시 했는가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2) 콘젤만은 불트만의 책과 비교해 볼 때, 마지막 2부(4부와 5부)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a) "초대교회"에로 움직여간 운동이 퇴보라는 가치판단을 피하기 위해서,
(b) 바울 문헌을 바울 이후 문헌과 바울학파의 존재와 특별하게 연결하기 위해서
(c) "사도적" 시대와 "속사도적" 시대가 "하나의 전제가 아니라 신약신학의 한 요 소"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3), 그는 공관복음의 내용을 신약신학 개념의 일부로 포함시킨 면에서 불트만을 훨씬 능가하는 진보를 하였다. 이것은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편집 비평적 연구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이 면에서 콘젤만은 선구자였다.
<신약의 방법론과 직결된 이슈들> 콘젤만 기독교 신조를 전제했다. 그리고 그것과 공관복음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연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로써 불트만적인 입장으로 회귀했는데, 그는 "즉, 고백 형식들을 기독교의 자기 이해의 객관화로 본 것인데, 이것이 그 후의 해석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밝혀지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더 획일화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왜곡되기도 했다"라고 언급했다. 이로써 콘젤만은 불트만과 출발점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불트만의 입장으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콘젤만 역시 신학을 곧 인간학으로 여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재구성과 해석의 상호관계에 있어서의 변화> 콘젤만은 불트만의 2가지 방법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재구성", 즉 규범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인 것을 향한 변화이다. 불트만의 시대에는 "말해진 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과 본문들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강조하였으나, 콘젤만은 "시각들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불트만의 강조와 달리, 콘젤만은 "역사적 재구성, 즉 신약시대에 의해서 조건화된 신약시대의 사고 세계에 대한 자세"를 강조했다. 이러한 변화는 의미심장한 것인데, 그는 불트만적인 "재구성"과 "해석"의 상호 관계성을 고수하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한계> 이러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불트만과 콘젤만의 실존주의적인 접근법은 신약 전체를 대변하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로써 여러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3. 역사적 접근법
1) Werner G. Kuemmel
<신약신학 1969> 불트만 학파에 속했던 콘젤만은 "신약신학의 기본 문제는 선포자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선포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주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콘젤만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이에 대해 큄멜은 불트만 학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콘젤만이 부정했던 그 작업을 시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제를 간단히 제시했는데, "나는 예수의 선포, 원시 공동체의 배경에 비추어 본 바울의 신학,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메시지(그 본질적인 특성 면에서)를 제시하고 이러한 제시에 근거하여 이러한 선포 형태들을 나타난 통일성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제에 맞게 자신의 책의 구조를 짰는데,
제1장은 "첫 번째 세 복음서들에 의거한 예수의 선포"를 다루었고
제2장에서는 부활 사건 때문에 사물을 새로운 빛에 비춰 본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다루고 있으며,
제3장의 "바울의 신학"은 팔레스틴의 사도적 공동체에서 그 후 이방기독교 공동체로 넘아가는 과도적 내용으로 되어있다.
제4장은 "제4복음과 서신들에서의 요한의 그리스도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예수-바울-요한 : 신약의 핵심"이라는 제목으로 예수 바울 요한의 메시지의 통일성을 거론하고 있다.
<바울과 예수> 큄멜은 불트만과 달리 바울을 예수의 건전한 증인이며 해석자로 보았다. 물론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큄멜의 결론은 "예수와 바울은 동일한 역사적 진리에 대한 증인들이지만 바울은 예수가 이루어낸 구원과 예수로부터 기대된 구원을 되돌아보면서 또 내다보면서 지적한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요한문헌> 큄멜에 의하면 요한문헌(그의 책 4권)은, "후기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시각으로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설교를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
<공헌 : 통일성이 문제 강조> 큄멜은 다이스만의 요구, 그리고 다른 방식이지만 G.L.Bauer의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신학을 제공하였다. 그는 신약신학의 통일성 문제를 강조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신학이 예수, 바울, 요한 등 주요 증언들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 전체의 통일성 문제에 대답할 수 없었지만, 어쨌는 신약신학의 통일성에 대한 주의를 끌었다.
<재구성과 해석에 대한 큄멜의 견해> 불트만과 콘젤만에게 있어서는 "해석"이 "재구성"과 분리된 것으로 실존주의를 통해서 이루어졌음에 비해, 큄멜은 "재구성"과 "해석"을 통합하되 후자가 전자에 연결되게 하였다.
2) Joachim Jeremias
<공헌> 그는 "적극적-역사적(역사 긍정적)" 연구방향의 최고 대표자로써, 신약신학을 "케리그마 신학"으로 만드는 불트만의 접근법을 선두에서 비판한 학자중의 한 명이었으며, "강력한 역사 반비판주의"를 개발했다. 예레미아스의 연구는 역사적 진리를 받들고 말씀을 가현설적 증발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신약신학 : 예수의 선포 1971> 예레미아스는 이 작품에서 불트만과 그의 학파로부터 알려진 "재구성"과 "해석"의 상호관계 같은 것은 아애없다는 것을 주저없이 말했다. "해석"이라는 것은 고작 예수의 말씀을 비판적 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얻어낸, 에수의 선포의 체계화일 뿐이다라고 한다.
제1장에는 "예수의 어록 전통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것인데, 예레미야스는 "우리의 출처들이 예수 설교의 기본적인 사상들을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가지고 제시해 주기에 충분하기의 여부"를 조사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 이전 전통"의 역사적 재구성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는데, 하나는(1) "비교 종교적 방법" 즉 주로 비유사성의 기준에 근거하여 그것이 유대주의에서 유래한 것인지 혹은 초대교회에서 유래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방법과 두 번째(2) 언어와 문체에 대한 연구의 방법이었다.
제2장은 "예수의 사명"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작은 항목으로 예수와 세례요한, 예수의 소명, 계시의 전달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그것은 출처들의 내용, 각각의 중요성 내지 의미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쓰여져 있다.
제3,4장에는 "구원의 시대의 여명"과 "은혜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예수의 선포가 언급되어져 있는데, 거기서 그는 "예수의 공식 선포의 핵심주제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5장은 예수 메시지의 개인적인 호소와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백성"이 언급되어져 있고, 제6장에서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증언"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방법론을 논시하고 있다.
마지막장에서는 "최초의 전통과 최초의 해석"이라는 주제로 예수의 선포 이상으로 넘어가서 예수의 선포를 부활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신약신학의 주제와 예수> 예레미아스는 모든 주요한 신약 주제들과 예수의 선포는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했다. 부활 이후의 교회가 예수의 부르심에 반응을 보이기는 했으나 어떤 창조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한다. 교회의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 간에 어떠한 연결도 없다는 것이다.
4. 구원사적 접근법
1) Oscar Cullmann
<신약의 구원사> 그는 직접적으로 신약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지는 않았지만 신약에 대한 구원사적 접근법의 최고의 대표자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그리스도와 시간'(1946), '역사 속의 구원'(1965)에서 전재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보다 일찍 신약의 구원사의 기본 개요를 제시하였다. 이는 초기 기독교의 시간 이해와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 안에서 때가 찬 시간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을 재구성함으로써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시간의 중심" 혹은 시간의 "중점"으로서 직선적 시간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유동적 직선"으로. 쿨만에게 있어서 구원사적 접근법은 "'기독교가 무엇인가'하는 옛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 바로 이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 속의 구원>
제1부는 "서론"이 포함되어 있고, 2세기의 영지주의, 20세기의 종말론, 구원사와 관련된 해석학이 개관되어 있고, 그 다음에 구원사의 정의가 내려져 있다. 제2부에는 "구원사적 접근법의 창시"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여기서는 내용과 해 석, 성경 증언들의 신앙, 항시성과 보수성, 신약에서의 구원사적 인용들의 공고화 등이 다루어져 있다.
제3부에서는 역사와 신화, 구원사화 역사, "이미"와 "아직 아니"의 갈등 등에 역점 을 두고 "현상학적인 특징들"을 거론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그 책의 핵심부로서 구원사의 "신약의 주요 유형들" 즉 예수에게서의 구원사의 시작, 구원사의 중간시대, 요한의 복음과 구원사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제5부는 "조직신학의 내용과 교리의 역사 : 구원사와 성경 이후 시대"를 다루 고 있다. 그는 이러한 개요를 통해 구원사가 신약 증언들의 본질적인 특이라 는 것을 주장하면서, 불트만과 추종자들에 의한 실존주의적 신약신학 방법에 도전을 가하고 있다.
<구원사의 본질> 쿨만은 구원사를 "역사 '곁'의 역사..."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 속에 있다"라고 주장했다. 성경적 구원사의 본질적 측면은, 어떤 "역사적으로 통제 가능한" 사건들은 "역사적 연구에 대해 열려"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 자체에 의해 밝혀지지 않은 명백한 연결 속에 배치되어 있는 세속사에 속한 사건들"이었다. 다시말해 "세속사에 속한 사건들"이 구원사적으로 해석되었다.
<사건과 해석> 쿨만은 폰 라드를 어느정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독특한 문제들을 지닌 견해이다. 그는 사건과 해석운동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구원사는 신앙에 의해서 구원적인 사건들로 인식된 사건들을 단순히 첨가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리려 과거의 구원적 사건들의 '수정'이 새로운 사건들에 '비추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과 해석의 과정은 복잡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런 복잡한 이슈들을 세 가지 독특한 측면들을 강조함으로써 요약했다.
첫째(1) 선지자가 목격자가 되어야 하고 불신자에 의해서도 파악된 적나라한 사건, 둘째(2) 그 사건 속에 선지자에게 밝혀진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선지자가 신앙으로 그것이 자신과 연결된 것으로 봄),
셋째(3) 이전의 구원사적 계시들의 연결성 강조(다른 선지자들이 그러한 계시들을 재해석하여 전달함).
<사건과 해석에 있어서 폰 라드와 쿨만> 쿨만은 폰 라드의 "구원사의 노선" 즉 "이스라엘의 옛 전통들의 점진적 재해석이 현재의 새로운 사건들에 의해 계속 깨우쳐지고 있다"는 견해를 따르나, "적나라한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폰 라드와 차이점(폰라드는 적나라한 사건을 인정치 않음)을 가지고 있었다. 폰 라드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는 단지 해석의 형태, 즉 회고된 역사이기에 그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폰 라드는 케리그마적 묘사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고, 역사비평적 묘사를 역사적인 것으로 보면서 이 중에 양자택일하라는 입장을 거부했다. 특히 그는 "케리그마적 묘사 역시... 실제 역사에 근거한 것으로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는 원시 역사 초기의 "역사적 경험들"을 "역사적 시", "전설", "Saga", "시적 이야기들" 즉 "시대착오"를 담고 이는 거슬 면에서 언급했다. 폰 라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알맹이가 "픽션"으로 덮여 있다는 것이 아니고, 후대 해설자 자신이 사가 속으로 읽어 넣은 신앙의 지평 경험이 "역사적"인 것이므로 사가의 신학적 내용이 크게 풍부해 졌다는 것이다. 폰 라드는 모든 것을 전승사적으로 생각을 했고, "구원사적 시각이 시작된 과정은 더 이상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우선, 가장 오래된 전통들의 기원과 그 이후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계기들을 항상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특히 구전들이나 구두 케리그마들은 후에 예배 의식에서의 신앙고백 형태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구두 전통이 흔히 관련되어 있을 때가 그렇다... 위대한 역사적인 개념들 속에서만..... 우리는 구원사적 해석들과 재해석들의 기원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쿨만은 폴 라드의 전승사 방법을 의존하여 작업하였고, 소위 "적나라한 사건"의 꾸준한 해석과 "구원사 전통"의 재해석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쿨만의 접근법이 두가지의 역사적 묘사를 가지, 역사와 전승사 이슈 전체과 관련된 문제들을 참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는 아이크로트와 헤쎄의 폰 라드에 대한 비판 즉, 케리그마가 "실제 역사"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비판에 대해, "실제에 있어서 이 세 학자들 스스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들간에 커다란 합의가 존재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고, 쿨만은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역사와 구원사를 구분하는 것은 구원사에 잇어서, 즉 사건들과 사실들을 체험함에 있어서와 그 기록들과 그 해석(케리그마)을 신앙으로 충용함에 있어서 계시가 가진 역할이다. 여기서 사건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체험되고 이와 같이 그 기록들과 해석들이 신적 계시에 연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계시가 구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역사적인 구원과정은 원시 역사와 종말 역사를 포함하여 모든 역사의 핵심이다"라고 한다. 즉,"사건들의 선별"에 계시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쿨만은 "약속과 성취"의 체계를 구원사와 관련시킨다. "성경의 틀 속에서의 성취는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구원사는 계속 전개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지만, 약속은 세부적으로 개관하기가 어렵고 한 번으로 끝을 내는 인간의 지식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취된다."
쿨만의 공헌은 "구원사가 신약 메시지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사고해 내었다는데 있다.
<쿨만과 불트만> 쿨만은 "해석" 즉 구원사에 대한 신약의 종교적인 이해를 현대인에게 적절한 틀로 별혁 또는 번역하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쿨만은 "해석" 즉 오늘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임의적이거나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았는가? 쿨만은 부분적으로 대답을 준다. 사실 그 역시 불트만과 함께 신약에 의해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신적인 사건, 그 해석과 함께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계시된 사건은....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할 하난의 요구를 내게 하고 있다... 나의 존재를 그 사건들의 연속과 함께 내게 게시된 구체적인 역사와 연결시키도록." "'신약에' 의도된 신앙의 결정이 우리에게 우리를 그 '사건들의 연속'과 연계하도록 요구한다면, 그 연속은 비신화화,비역사화, 혹은 비객관화될 수 없을 것이다"
종말론의 시간성을 제거하는 방식, 즉 신약 케리그마의 풍요성을 붕괴하여 실존적으로 재해석한 불트만의 비신화화와는 대조적으로, 쿨만의 대한은 "이미"와 "아직 아니"간의 구원사적인 긴장이 신약의 열쇠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의 선포를 포함한 신약 신학 전체가 이런 긴장에 의해 한정된다"라고 한다. 오늘날 인간은 "구원사의 중간시대," 즉 "두 극점, 성경시대와 종말시대간의 중간 단계"에 살고 있다.
2) George E. Ladd
<신약신학 1974과 그의 신약신학의 전제> 레드는 이 책에서 신약신학에 있어서 구원사적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차일즈의 견해를 따라 성경신학과 신약신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와 역사적 방법을 다른 전제들에 근거하여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이야기의 진실성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했다. "역사의 본질에 대한 전제는 성경 메시지를 재구성하는 데 계속 투영해 왔다... 세속주의적인 역사적 방법에 매여 있는 학자들에게, 역사란 하나님의 사람들을 용납할 여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예수 배후에는 역사적 예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역사를 수평적 원인과 결과의 폐쇄된 체계로 보는 전제는 성경에 표현된 시재를 다룰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및 인간들의 구속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계시와 구속의 개념 자체가 성경 모든 곳에 암시되어 있고 흔히 명시되어 있는 어떤 전제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하나님, 인간, 죄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전제들은 성경의 역사가 일반 역사가들이 "역사'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하면 안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성경은 비록 하나님께서 "보통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활동하시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하나님은 일반 역사 속에서는 활동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의 한 흐름 속에서 구속적으로 활동해 온신 것이다 그것(성경)은 또한 어떤 주어진 시점들에서 하나님께서 보통의 역사 경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역사 속에서 활동하셨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따라서 "계시 사건들은 역사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에 의해 산출 되는 것이다. 그분은 역사 위에 서 계시고, 역사적 피조물을 위해서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다". 역사의 독특한 사건들 속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구원사의 일부인 것이다.
<래드와 쿨만의 구원사관의 차이> 래드는 구원사관을 전승사에 연결시키지 않는다. 래드는 구원사를 "구속사" 혹은 "거룩한 역사"라는 부정확한 용어로 사용했는데, 이 경우의 구원사는 하나님이 어떤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는 비록 구원사를 쿨만처럼 "계시사의 흐름" 묘사하기는 했지만 그의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 다시말해 초기의 해석들에 대한 "재해석" 혹은 초기 구원사 해석들의 "교정"의 개념(쿨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래드는 G.E.Wright의 언어를 사용하여, 신약은 이러한 구원사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과, "신약 신학은.... 주로 하나님께서 나사렛 에수 안에서 행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진술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와같이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의 방법> 래드는 신약신학의 방법을 언급하면서, "성경신학은 성경 안의 신학을 그 자체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의 형태들, 범주들 및 사고 형태들 안에서 설명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라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약 신학은 주로 서술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그것(성경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구속을 추구하는 인간 역사의 무대 안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서술과 해석이다"라고 정의한다.
<책의 구성> 래드의 신약신학은 전체 6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공관복음"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신약신학의 역사와 본질에 대해 교훈을 주는 한 장으로 문을 연다.
제2부는 "제4복음서"를 다룬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것이 어느 정도로.... 공관복음과 유사성이나 차이성이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요한의 이원론, 기독론, 영생,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령 및 종말론에 대한 장들을 그는 잘 정리하고 있다.
제3부는 "초대교회"라는 제목하에 사도행전의 신학을 다루고 있다. 제1장은 사도행전의 본질적 역사적 신빙성을 변호하는 장으로서 여기서는 가스끄의 지원을 받았다. 부활, 종말론적 케리그마, 교회에 대한 장들이 사도행전의 신학을 요약해 준다.
제4부는 바울 신학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요한복음의 신학 다음으로 래드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빼어난 부분이다. 그는 W.D.Davies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업적을 통한 도래하는 구속의 새 시대의 실현"이라고 본다. "통합적인 핵심은.... 구속사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었다". 이것은 리델보스의 "바울:그의 신학의 개관"에 제시된 견해와 다르지 않다. 래드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신학적인 규범으로 보았는데, 거기에서부터 서술적인 과제가 전체적으로 현대인을 위한 규범이라는 인상을 준다.
제5부는 "일반서신"의 신학을 요약한다.
마지막으로 제6부는 "계시록"을 다룬다.
<구원사적 접근법> 래드의 접근법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접근법은 개념적 통일성을 기하는 것이었다.
3) Leonhard Goppelt
<신약신학 1975-6> 그의 책은 현재까지 집필된 모든 신약신학 "학문의 역사와 문제들"에서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신약신학에서 자신은 폰 라드와 쿨만의 광범위한 구원사적 접근법 속에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나 쿨만과는 대조적으로 신약은 "구원사를 보편사이 계획으로"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원사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약속과 성취의 체계에 주로 제한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구원사는 "그 기적성이나 논시될 수 있는 연속성을 통해서" 정규 역사와 분리되는 역사가 아니다. "구원사는 더욱이 궁극적으로 서로서로 연결된 특징을 가진 역사적 과정들의 연속이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최종적 자기 현시가 준비되고 예수도 그 과정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라고 역사비평을 배제하고 구원사를 독특하게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 비평적 성경연구의 원리들, 즉 비평, 유추, 상관관계 등의 원리들과 신약의 자기 이해를 비판적은 대화의 관계로 이끌려"는 시도를 했다.
<신약신학의 목표> 그는 신약신학의 목표를 "(신약의) 하나의 글, 혹은 그룹의 글들로부터 내용적으로 질서화되고 연결된 묘사, 예수의 사역이나 초대교회의 선포와 교훈의 이러한 묘사를 도출해 내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
그의 신학 신학은 2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제1권은 "예수의 행위의 신학적 의미"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제1부
제1장은 신약신학의 출발점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이슈들을 토론 한다. 그는 주경적 연구로, "신약신학의 출발점은 부활 케리그마인데, 초기 기 독교 전승에 의하면 이것이 기독교 교회들의 형성과 예수의 계속적인 영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럼데도 예수의 지상 활동을 보고하 는 것이 신약신학의 토대인데, 그 결과로 신약신학은 그 자체의 구조에 근거하 여 지상적 예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즉 "신약 신학은 지상생애 동안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신 예수를 다루어야 하며, 바로 이 예수가 또한 역사적(historic) 영향을 미친 예수이다"
- 제2장은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로 시작된다. 예수 선포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 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그 용어를 성경내에서 다루고, 그 배경을 구약, 유대주의, 헬레니즘에서 선명하게 개괄하고 또한 연구의 역사를 토의했다.
- 제3/4장은 예수의 요구와 하나님 통치의 선물로서의 "회심"이라는 주제를 다루 고 있다.
- 제5장은 "종말론적 갱신으로서의 예수의 구원활동"을 제목으로 예수의 활동의 일환인 기적들을 다룬다.
- 제6장은 메시아의 자기의식을 다루고
- 제7장은 "예수와 교회"
- 마지막 장에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것으로서 수난,죽음,부활,승천을 다룬다.
제2권은 1976에 출판되었고, "사도적 그리스도 증언의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부 제 가 붙어있다. 여기에는 오순절 이후의 동향을 최초 교회가 그것을 이해 한 대로 3개의 부로 다룬다.
제2부는 "교회로서의 예수의 제자도"와 "기독론의 시작들"에 대한 장들을 담고 있 다. 여기서의 신학적 원리는 "예수 전통의 형성과 부활 케리그마의 설명 간의 대화적 상호 관계로...이것이 초기 교회의 선포와 교육에" 작용했 다.
제3부는 "바울과 헬라적 기독교" 제목으로 헬라적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서론과 바울 신학의 전제에 대한 한 장을 할애하는 것으로 토의를 시작한다. 고펠 트는 바울 신학의 핵심을 언급함에 있어서, 법정적인 강조점, 즉 "하나님 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하신다"는 것을 "인간이 이 관계속에서 사는" 주관적인 강조점과 결합하였다.
제4부는 :바울 이후 저술들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미완성이다.
- 제1장은 베드로의 신학을과 계시록의 신학을 다룬다.
- 제2장은 야고보의 신학을 마태의 신학과 쌍으로 다루고 있다.
- 제3장은 히브리서의 신학을 다룬 다음 구원사의 신학자 누가를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