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문인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을 보고
박 진 용(본회 부회장)
1923년, 100년 전이다, 한반도에서는 일제의 식민 통치가 극에 달했고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무고한 동포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할 때였다. 절망적인 민족의 수난기에 그래도 어린이들에게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방정환 선생은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 잡지를 창간했다. 이때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탄생 100주기를 맞이한다.
대전문학관 기획전시실에서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세 분의 특별전 -대전 문인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을 열고 있다. 잘 알려진 한성기 시인, 박희선 시인, 원종린 수필가 등 탄생 100주년을 맞는 세 분의 문학적 성과를 조명하고 기념하기 위해 특별 전시회를 기획한 것이다.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문학과 삶을 재조명하고 그분들을 추모하는 일은 지역문단 100년을 바라볼 때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 분을 문학청년 시절에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고 큰 행운이었다. 둑길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성기 선생은 이장희 시인의 주선으로 당시 시인 지망생이던 고 변재열 시인과 함께 가끔 만나서 식사를 했다. 도청 앞 동태찌개를 잘하던 작은 식당에서 만날 때마다 민화투를 치면서 밥값 내기를 할 정도로 소박하신 분이다. 작은 역처럼 거기 서 있는 쓸쓸함과 바람이 맛있다고 노래하는 초월적인 삶의 모습이 기억의 낡은 사진첩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박희선 시인은 문학단체 모임에서 종종 뵈었는데 앞에 모시고 앉아있기 참 어렵게 느껴지는 분이었다. 눈빛이 서늘하고 과묵한데다가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의식과 불교 정신이 투철한 분이라서 그런지 시어가 난해했고 그 사유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작고하신 정만영 선생이 〈문학시대〉 초대 사무국장을 할 때 선생의 난해한 시를 현대문법에 맞게 몇 자 고쳤다가 엄청나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그만큼 시어를 하나하나 선택하는데도 신중했고 자부심이 컸으며 깊은 사상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씨가 같은 나에게 중파, 소파 시조를 묻더니 소파 시조인 청재공이 충절을 지킨 훌륭한 분이라고 말씀하시며 정겹게 손을 잡아 주셨는데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원종린 수필가는 공주교육대학 재학 시절 영어 교양과목 강의를 해 주셨는데 강의 교재에 나오는 딸기밭의 배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디테일한 장면을 생생하고 재미있게 강의하셨던 분이다. 인품이 훌륭하셔서 목소리도 늘 온화하고 따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10여 년 뒤에 ‘하늘 높이 차올리는 구두’라는 첫 수필집을 내셨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대전문인총연합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신 송백헌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어느덧 3주기가 돌아오고 있다. 서울 병원에 가시기 불과 며칠 전, 약주를 몇 잔 드시고 나서 한 사나흘 걸릴 거라며 얼른 다녀온다고 하신 말씀이 유언이 되었다. 가장 후회스러웠던 점은 평소에 좀 더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축적해놓지 못한 것이었다. 약력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졸업한 초등학교를 알아내기도 어려웠다. 학교로 전화를 하면 개인정보라고 알려 주지 않았고 고향을 찾아갔지만, 노인회장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한테도 기억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초강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을 밝혀내긴 했지만 이렇듯 사소해 보이는 일까지 작고한 후에는 전설이 되기 때문에 생전에 관심을 두고 기록해 두지 않으면 묻혀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 지역, 내 주변에 훌륭한 원로 문인들이 많이 계시고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은사님은 물론이고 문학청년 시절부터 깊은 애정으로 이끌어주신 분들이다. 앞으로 지역 문단 100년을 말할 수 있으려면 문인으로서 스스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원로 선배 문인들을 더욱 존경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작고하신 후에는 그분에 대하여 많은 추억을 꺼내 들고 자랑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