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어느 제도권 학자는 한국의 首都이자 지금의 서울을 定都 600년이라고 썰을 푼바 있었고,
어떤 고대사 전공학자는 조선사 三國(고구려,백제,신라)의 주요 爭覇지역이 한반도의 한강
유역이라는 억지 해설을 한바도 있다.이 해설은 지금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늘상 나
오는 얘기다.더하여 한국의 現代史에 와서는 한국을 대변하는 말중에 한반도 역사와 함께
하는 젓줄인 '漢江의 奇蹟' 이란 말까지 생겨 났다.아무튼 과거나 현대에 있어 또 조선사나
한국사에 있어 漢江의 존재 의미는 크다.일단 정사서에 기록된 '漢陽이란 지명 탄생은 한강
의 북쪽에 있는 고을이나 도시(지역)' 였다는 기준에서 생겨났다.랜드마크의 기준점인 산의
남쪽은 山陽이 되고,산의 북쪽은 山陰이 되는 지형에 따라 정해진 명칭이 있다.
2, 따라서 지금의 한강 남쪽이자 강남3구 지역을 비롯한 한강의 남쪽 지역은 말할 필요도
없이 '漢南이나 漢陰' 이란 역사 지명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실제는 없다.강남이란 역사성
지명인 漢南(漢陰)이란 지명은 역사의 水原에서 가져갔고,漢南洞이란 지명은 실제로 한강의
강북에 있다.의미만 유사한 南漢이란 지명은 지금의 경기도 廣州가 漢州란 지명과 함께 어색
하게 자리를 펴고있다.지금 서울의 江東과 江西란 지명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 강의 흐름
과는 인연이 없는 지명이다.江東과 江西란 지명이 생겨 날려면 대체로 강의 흐름 구조가 北
에서 南으로 흐르는 강이 있어야 생겨날수 있는 랜드마크 지명이다.황하 유역의 河東과 河西
처럼 말이다.漢城(漢忽)이란 지명과 통하는 역사지명으로는 평남 安州와 황해도 載寧이 품고
있고,또 安城이 있다.이른바 편안하고 안전한 고을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3, 그러나 반도의 한강은 실제로 역사서와 걸맞는 역사성 지명이 없다.즉 역사와 함께하는
그림자가 전혀없고 강제의 냄새만 물씬난다.반도의 한강 줄기는 강원도의 오대산에서 발원
하여 '평창->영월->단양->청풍->충주->여주->이천->팔당'을 거쳐 서울이자 역사의 한양
으로 유입된다는 반도적 해설이 있다.그러나 정사서에 쓰여진 대강이자 한강은 東流하는 강
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이것이 기록의 오류로 인해 동류하는 대강이 아니고 西流하는
한강이라고 할지라고 강유역에는 강역사와 함께하는 역사지명들이 늘어서 있어야 한다.또한
우리가 역사를 거론하면서 東國이라 함은 한반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반도는 역사 동국의
한귀퉁이나 조각일 뿐이다.倭나 일본이란 표현도 동국에 대한 사투리적 표현이다.따라서
역사서에 東國이나 海東이란 표기에는 반도를 한정하는 의미는 한조각도 없다(東國여지승람,
海東역사,東國통감,동국사략,해동성국,해동증자,동국5현 등등).
4, 예를 든다면 한강의 유역에는 오랜 한강 역사와 함께 했다는 증빙의 지명으로 '漢中,漢陰,
漢川,漢州,漢口,漢陽,漢津,漢忽' 과 같은 지명들이 있어야 조선의 한강이자 漢水와 함께 했다
는 역사성을 인정 받을수 있다.그러나 반도의 한강 유역 전체에는 지금의 한국 수도인 '한양
(한성)' 을 제외 하고는 어느 한곳도 한강과 관련된 漢이란 글자를 채택한 역사지명들이 없다.
이른바 한강에 의지해 살면서 한강에 대한 고마움이 없었다는 뜻이다.현재 한강으로 불리는
강은 본래 한강이 아니였다는 뜻이고,한편으로는 역사지명의 이전을 두서없이 엉터리로 했다
는 확증도 된다.대신 유역에는 근거없는 엉뚱한 역사 지명들만 가득하다.아마 지금의 한강
하구인 金浦나 인천이 漢江 하구의 뜻을 지닌 '漢口' 가 되고,忠州나 驪州 쯤에 '漢中' 이란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런대로 속아 넘어갈수 있었을 것이다.
5, 그렇다면 조선의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 대륙조선의 한강 유역 실태는 어떤가? 섬서성 지역
에서 발원하여 호북성을 남동으로 관통한 다음 호북의 潛江市에서 동류하여 武漢에서 장강과
만나는 대륙 조선의 한강이 있다.이 한강은 역사서 대로 東流하는 유역 곳곳에 강과 함게했던
역사지명을 수두룩 남겼다.즉 한강이 흐르는 섬서성과 호북성 지역에 '漢中,漢陰,漢川,漢州,
漢水,漢口,漢陽,漢津' 이란 역사 지명을 강유역을 따라 고스란히 남겨두고 있고,강때문에 고을
명칭이 생겨 났다고 지명 연혁까지 가지고 있다.사실 강유역 문화와 역사 지명은 이래야 정상
이다.사람에게 이력이 있듯이 강과 하천의 지명에도 증빙의 품격과 이력이 있는 것이다.
6, 지명은 아무나 생각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생겨나야 할만한 연유가 있다.특히나 한강
하구에 해당하는 漢陽 지역이자 양자강과 만나는 광활한 수역에는 '漢川,漢口' 와 같은 지명이
나란히 자리 잡고서 한양이란 지명을 보필,두둔해 주고 있다.즉 한강 때문에 생겨난 역사 지명
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이곳의 漢陽과 武昌이란 지명을 합쳐서 武漢이란 지명을 민국시대에
만들어 냈다.한양과 무창이 있고 이어 무한이 있는 한강 하구지역은 중국의 3대 가마솥(화로=
중경과 남경)에 들어가는 곳으로 무진장 덥다.이곳이 한강과 연계된 조선의 핵심부다.이곳까지
거대한 무역선이 장강을 통해 들어온다.
7, 漢城府에 대한 별칭으로 南平壤으로 불렸던것 역시 대륙의 장강 유역에서의 별호로 南京
중심의 南朝鮮의 뜻이다,北平壤 이란 별칭은 지금의 황하유역이 되고 이어 북조선이 되지요.
그래서 황하유역 역사를 많이 가져간 북한은 북조선이 되고,장강 유역의 역사를 많이 옮겨온
남한은 남조선이란 명칭을 거론한다.이 남평양이자 남조선의 표기는 한성부의 다른 명칭인
역사의 南京(강소성)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조선사의 楊州와 인연이 깊고,廣陵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단지 반도의 서울이나 인근의 양주나 광주지역에 놓고는 역사적 인연도 없고 전혀
다른 세상의 얘기가 된다.북조선이자 북평양의 역사를 가져간 반도의 북조선국은 김일성이
살아있을때 역사 조선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고,평양에 있다면서 없던' 단군릉과 동명성왕의
묘' 도 거창에게 만들어 놨다.
8, 지금의 반도 한양이자 한성은 定都 600년이라고 말은 하지만,경주 1000년 처럼 팔아 먹을
과거가 너무 미약하거나 없다.왕들이나 왕비들의 무덤도 있기는 있는데 품격과 품위가 없고
왕릉으로만 불릴 뿐이다.왜소하고 규모가 고만고만 비슷비슷하여 대륙의 현령이나 태수,군수
들의 墓만도 못하다.또 반도의 한성은 역사의 남경이나 남평양이 되어 본적도 없다.그냥 역사
의 차용과 이전에 따라 고급 지명과 설명들이 반도로 따라 왔을 뿐이다.역사의 楊州는 현대륙
의 揚州와 同格 지명이다.楊이나 揚은 모두 태양이 떠오르는 '東쪽 ,동방,동국'을 표시하는
지명으로 오른쪽의 양자는 暘(해돋이) 처럼 태양이 떠오르는 형상의 글자다.역사의 楊州는
지금의 대륙 남경 일대와 그 동쪽의 절강성과 강소,강서일부,복건지역을 말한다.
9, 한성이자 한양을 다르게 부르는 廣陵이란 지명은 '황제가 거처하는 큰집의 京都' 를 말하는
것으로 남경과 함께하는 지금의 강소성 '江都,江浦,江寧,江心,江陰' 지역 일대를 지적하는 지명
이다.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조선역사의 江華지역 이다.역사의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다는 것은
지금의 하남성 開封에서 강소성 남경이나 江都(장강 남)로 천도 했다는 뜻이고,근세조선의 인조
가 강화로 도망 갔다가 잡혀 왔다는 그 강화도 지금의 남경에서 양주의 江都로 도망 갔다가
청태종에게 잡혀 남경 일대로 왔다는 뜻이다.청태종은 인조를 굴복시키려 반도로 온적이 없다.
이른바 江州(강서성,강소성)의 중앙이자 수도였던 華州(남경부)가 바로 역사조선의 한성부의
핵심인 江華가 된다.
10, 한성부의 실제 주인이 이씨라고 했을때 그 李氏들의 관할지역은 대륙 한강과 장강의 중하
류 유역을 포함하고 淮水와 장강과 만나는 전지역이 된다.구체적인 위치로 지금의 호북성 한양
에서 강소성의 남경을 거쳐 江都와 揚州 일대는 물론 常州와 蘇州,절강,복건 지역 모두 조선의
한성부 지역에 포함된다.여기서 漢山이라는 산명을 첨가하여 한성의 지명을 보충해서 설명한
다면 그 한산은 그냥 中山이나 대산이란 보통명사의 기준점 의미로 쓰인 것으로 楊州(한양,
광릉)와 관련이 깊은 한산은 지금의 안휘성 涇縣의 진산에서 살피면 있을 것이다.
첫댓글 지금 생각해보니 언론에 의해 부각되어 굳어지는 경우 많습니다
39번쌍용버스 종점 벽촌 토평리가 80년대 어느날 갑자기 이병도에 의해 초기백제 하남시로 지정되어 이후 도시화되는 것을 목격.
잠깐 살았던 여주에 세종대왕릉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군이 시로 커지면서 세종대왕이 부각된 것을 느꼈습니다.
님의 기억력과 예리한 관찰력에 찬사를 보냅니다.그렇게 끼워 맞춰 놨으나 500년 왕조라고 보기에도 초라할 정도로 고만고만하고 비슷한 유물과 유적이란 것들만 있지요.책봉을 받는 제후가 세종이란 묘호를 사용할수도 없지만 실록을 보면 그는 장헌대왕 이었습니다.역사적으로 대왕(황제의 조선식 표기)이 반도에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광주(廣州)는 회안(淮安)이고 산양(山陽)이었는데, 지금 강소성 양주(揚州) 방면 장강(長江)으로 연결되는 한강(韓江)이 있었네요. 백제가 여기에 도읍을 했었다면 신라보다는 절강성 해안쪽 倭와 연계가 더 좋았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