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을 먹으며
신 보 성
제주 앞바다 물빛 같은 김
해녀들 숨비소리 둘둘 말아 건져 올린 바닷물고기
이름 하여 김밥
그 안에
밭이랑 가꾸시던 할머니의 한숨과 푸성귀들의 잃어버린 꿈이 있다
시금치의 꿈은 결 고운 피부 잘 가꾸어 어느 바람 좋은 날
민들레 홀씨 타고 산 넘고 강 건너 부잣집 도련님 집으로 시집가는 것이고
단무지의 꿈은 그 늘씬한 몸매로 미인대회라도
나가 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할머니의 한숨은 허리디스크로 정형외과 물리치료실의 기계소리가 되었고
시금치 단무지는 새로운 꿈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얀 쌀밥이 들려주는 이앙기 탈곡기소리
원성처럼 들리던 그 소리가 농사직불금으로 위로받으며
지금은 들판에서 불러대던 풍년가 대신
노래방의 대중가요라도 되어야 하는데
아, 이것들을 전부 죄인 멍석말이 하듯 둘둘 말아
아가씨 섬섬옥수로 중국에서 건너온 참기름 칠까지 한 것을
단 돈 이천 원 내놓고 이빨이 시리도록 꼭꼭 씹어
내 목구멍으로 삼켜야 하다니
내가 김밥 한 줄 자급자족하려면 시금치 무 직접 길러야하고
이앙기 탈곡기 운전하면서 쌀농사 지어야 하고
제주 앞바다 내려가 미역 따오고 참깨 들깨 기르거나 중국 가서 사와야 하는데
단돈 이천 원이면 김밥 한 줄이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처럼 내 앞으로 달려오니
자동으로 조절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수요 공급과 분업의 원리에 놀라고
내가 숨 쉬며 밥 먹고 살아가는 것이 나 아닌 것들의 덕분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나는 무슨 짓을 하던 내 할일만 열심히 하여 단돈 이천 원만 벌면
김밥 한 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김밥장사는 열심히 김밥만 만들면 되고 어부는 열심히 고기만 잡으면 되며
거지는 부지런히 구걸만 하면 되는 것을 배우게 되지만
시인이 열심히 시만 쓰면 되느냐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선 시를 쓰는 일이 직업이냐?
직업을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경제적 소득활동이라고 정의한다면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일부 잘 나가는 몇 몇 시인을 제외하고는 시로써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우니까 시 쓰기는 직업이 아니고 시인은 직업인이 아니라고 보며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에 대하여 항의할 생각이 전혀 없다
고위공직자가 받았다는 뇌물 7억 원이 김밥 몇 줄이 되는 지는 그런 돈 만져 본 일이 없어 계산조차 아득하다
내가 삼킨 김밥의 일부는 나의 뼈와 살이 되어 한 평생 나와 동행할 것이지만
나머지는 똥오줌으로 내 몸을 빠져나가 다시 거름이 되고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푸성귀가 되어 끝없는 윤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내 몸을 시원하게 떠나가는 김밥이여,
잘 가라
그리고 잘 지내거라
혹시 인연 있어 서운산 날망에서
꽃으로 잎으로 벌 나비로 다시 만나면
우리 서로 모른체하지 말고 빙그레 웃음 한 번이라도
웃어주자
첫댓글 온갖 번뇌와 상념 눈물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곳
서운산 자락 낡은 의자에 기대앉은
“끝없는 윤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할”
노 시인의 그림같은 모습을 떠 올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일일이 댓글의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