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헌은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족손되는 허복(許馥)이 편술한 것인데 기록은 길지 못하나 왕산의 거의 사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신빙할 수 있는 자료다. 1896년 병신(丙申) 3월 10일 왕산은 진사(進士) 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이은찬(李殷贊)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양제안(梁濟安)으로써 선봉장을 삼고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김산(金山) 군기고에 보관해 둔 병기를 압수하고 의병부대를 김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매복시키는 한편 격문을 사방에 뿌리며 군사를 집결할 즈음 대구의 공병(公兵)이 먼저 성주진을 습격하고 서울과 공주(公州)의 군대가 합세해서 달려들어 김은찬·조동호가 체포되고 의진이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왕산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진천(鎭川)까지 진군 하자 전운경(田雲慶)이 의병을 해산하라는 임금의 칙서를 전하므로 왕산은 어명을 어기지 못해서 휘하 장병들을 타일러 해산했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그는 울분한 마음을 억제치 못해서 속세를 떠나려까지 했다가 임금이 거듭 부르므로 부득이 궐하에 배알하여 원구단(圜丘壇) 참봉, 평리원(平理院)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秘書院丞) 등을 역임했었다.
그러나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형편을 보다 못하여 침략 일본의 죄악을 들어 통론하고 마침내 군대 해산 뒤 정미(丁未)년(1907) 가을에 경기도를 활동 무대로 의병을 다시 일으켜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이인영(李麟榮) 등과 같이 수천 명 의병을 양주(楊州)에 집결하고 서울을 쳐서 통감부등 적의 기관을 분쇄하려고 친히 3백의 정병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까지 이르렀으나 미리 약속한 다른 의병부대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또 이인영이 친상을 당하여 문경(聞慶)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서울 공격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산은 더욱 더 군율을 정하고 군표발행, 물자조달, 군사훈련, 군기제조, 납세명령, 미곡반출금지 등 치밀한 계획하에 다음해 4월 13일 다시 일어났다. 이 때를 이용하여 이완용은 경상남도 관찰사 또는 외무대신을 제수하겠다고 사람을 통하여 꾀이기까지 한 일이 있었거니와, 그 다음날 밤에(무신 5월) 왜의 헌병 40명이 포위하고 달려들어 왕산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9월 27일에 적을 꾸짖어가며 교수대의 처형을 받아 최후를 마쳤는데, 이 같은 전후 사실이 적혀 있는 문헌이므로 왕산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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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
병신(丙申) 3월 10일.
이은찬(李殷贊)·진사(進士) 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장수의 명목을 분담해 맡았다.
양제안(梁濟安)으로 선봉장(先鋒將)을 삼고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해서 장정 몇 백 명을 모집했다.
우리는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에 둔 병기(兵器)를 압수(押收)해서 김산(金山)·성주(星州) 사이에 나누어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檄文)을 발송해서 바야흐로 군사를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이 때 대구(大邱)의 공병(公兵)이 먼저 성주(星州)의 진을 습격하여 경성(京城)과 공주(公州) 공병(公兵)과 함께 때를 타고 합세하여 이은찬(李殷贊)과 조동호(趙東鎬)를 쫓아 사로잡았으니 이는 대개 의병(義兵)을 처음 창설해서 세력이 아직 떨치거나 견고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에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다시 진천(鎭川)지방으로 나가려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대내(大內)의 봉서(封書)를 받들고 와서 손수 선생에게 바친다.
그 내용은 곧 의병(義兵)을 급속히 해산시키라는 것이다.
부득이 장졸(將卒)들을 타일러 각각 물러가 흩어지도록 했다.
이 때 감동한 바 있는 시(詩) 일절(一絶)을 읊었다.
호남 3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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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이로부터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만 세상을 등질 뜻이 있을 뿐이었다.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진보(眞寶) 집으로 가서 함께 공부를 하여 얻은 바가 많았다.
대신(大臣) 신기선(申箕善)이 들어가 임금께 아뢰기를,
“허위(許蔿)의 경륜하는 것과 포부(抱負)는 세상에서 관중(管仲)과 제갈양(諸葛亮)이라 일걷사오니 불러서 쓰시는 것이 바로 이 때가 아니겠읍니까.”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야(莘野)에서 밭가는 늙은이와 동해(東海)에서 낚시질하는 늙은이를 천거하는 자가 없으면 내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급히 명령하여 부르도록 하라.”
하였다.
선산군수(善山郡守) 송영대(宋榮大)가 관찰사(觀察使) 조한국(趙漢國)이 전하는 임금의 급한 칙서를 속히 봉행하라는 명령을 받들어 진교(眞僑)에 급히 보했다.
이에 선생은 말을 타고 길에 올라 대궐 밑에 이르러 임금께 절하니 때는 기해(己亥) 3월 초 2일이었다.
임금이 선생이 서울에 들어온 것을 듣고 곧 하교하기를
“포의(布衣)의 선비로는 입시(入侍)할 수가 없으니 특별히 명하여 원구단참봉(園丘壇叅奉)을 제수하여 즉일로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3월 6일.
또 영희전참봉(永禧殿叅奉)을 제수하여 즉일로 입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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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에 또 소경원봉사(昭慶園奉事)를 제수했다.
4월 4일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배했다.
계묘(癸卯) 10월에 육품승훈랑(六品承訓郎)에 승진되었다.
갑진(甲辰) 4월 1일에 주차일본공사(駐剳日本公使)의 수원(隨員)에 임명되었다.
4월 3일 통훈대부(通訓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승진되었다.
11일에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었다.
5월에 평리원(平理院) 수반판사(首班判事)에 배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올랐다.
이 때 김태식(金泰植)이란 자가 토지로 소송(訴訟)을 일으켰는데 세력있는 집에서 긴요한 부탁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완강히 이를 듣지 않고 김(金)으로 하여금 소송에 지게하고 엄하게 가두어 버렸다.
세력있는 집에서는 마침내 하늘을 뒤흔드는 권리를 이용해서 하루 밤 사이에 그 사건을 뒤집어 놓았다.
선생은 이로 인하여 출근하지 않고 말하기를
“법관(法官)으로서 법을 행하지 못하니 마땅히 그 직책을 사퇴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선생의 마음을 통찰하여 그 소송을 옳게 판결하게 하고 곧 출근하기를 권했다.
8월 3일.
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배했다.
사무를 본 지 불과 수일 동안에 쌓였던 송안(訟案)을 일체 공평하고 분명하게 판결하니 사람들이 그 밝은 식견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8월 10일.
의정부참찬(議政府叅贊)에 배했다.
선생은 바로 취임하여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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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폐단을 없이할 조목 10가지를 건의(建議)했으니
첫째,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그 재주가 우수한 자를 골라서 외국에 유학(留學)시킬 것.
둘째, 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군사는 농사에서 나오고, 농사는 군사에서 나오는 것이니 봄·가을로 무술을 연습하고 출입하면서 농사군과 교환할 것.
셋째, 철도(鐵道)를 증설(增設)하고 전기(電氣)를 시설하여 교통(交通)과 산업(産業)에 이바지할 것.
넷째, 연탄(煙炭)을 사용하여 산림(山林)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 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쓸 것.
일곱째, 해항세(海港稅)와 시장세(市場稅)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꾼들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 우리나라 지폐(紙幣)는 폐단이 심해서 물가(物價)는 몹시 높고 화폐는 지극히 천하여 공사(公私)의 허다한 재용(財用)이 고르지 못한즉, 은행(銀行)을 설치하여 금·은·동전(銅錢)을 다시 통용시킬 것.
아홉째, 노비(奴婢)를 해방하고 적서(摘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째, 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등이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내 소(疏)를 올려 사직했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은 풀 속에 묻힌 천한 물건으로 재주와 식견이 얕고 짧아서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사옵고, 또 이름이 드날릴 수도 없사옵니다. 그리하와 밭 두둑 사이에 엎드려 분수에 따라 살고 있을 뿐이옵더니, 저번 을미(乙未)에 국가의 큰 변을 만나오매 생각하옵건대 춘추의의(春秋之義)에 난신(亂臣) 적자(賊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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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모두 베인다 하였읍니다. 신(臣)이 비록 못생겼사오나 폐하의 덕화(德化) 속에서 생장하였사오니, 다만 의리(義理)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을 알 뿐이옵고 성패와 이해는 돌아다보지 않고, 이에 감히 풀 위에 잠자고, 창을 잡아다려 한 마음으로 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할 생각을 먹었읍니다. 혹 괘효(挂孝)하고 의병(義兵)을 규합하며, 혹 글을 올려 대궐 앞에 부르짖었사오나 마침내 털끝만한 보답도 되지 못하옵고 한갓 폐하의 조심만 끼친 것이 이미 1년이 지났사옵니다. 그러하온데 어찌 폐하께서는 신(臣)을 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발탁하시어 1년만에 승진하여 재상의 반열에까지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신(臣)의 용렬함을 생각하오면 만에 하나도 이럴 수가 없사옵니다. 신(臣)이 만일 오랫 동안 어진 사람들의 길을 막고 있사오면 이는 더욱 죄를 더할 뿐이옵고, 위로는 우리 성상(聖上)께서 종시 보전해 주시는 은택을 보답하는 것이 되지 못하겠나이다. 이에 감히 마음 속의 간절함을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급히 신(臣)의 맡은바 책임을 갈으시고, 주석(柱石)의 신하를 골라 나라를 광구(匡救)하는 효험이 있게 하시옵소서.”
하였다.
10월 27일에 이정소의정관(釐正所議政官)이 되었다.
을사(乙巳) 3월 1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배하고 계급이 가선칙임관2등(嘉善勅任官二等)으로 승진했다.
이 때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우리 궁중을 점령하고 정무(政務)를 총찰(總察)하며 권세와 위엄을 제 마음대로 행했다.
모든 나라 안의 크고 적은 일은 그를 경유하여 결정되는 형편이었다.
이 까닭에 충성된 신하들은 모두 조정을 떠날 뜻이 있었으니 선생의 사직하는 것도 역시 이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국가의 형편이 점점 더욱 위급해질 무렵, 마침 선생은 독일요관((獨逸要官) 한 사람을 인천항(仁川港)에서 만났으니 이는 선생이 전부터 잘 알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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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선생은 그에게 무기(武器)를 빌려 줄 것을 확실히 악속 받고 민모(閔某)와 함께 방법을 비밀히 의논한 결과 독일에 갈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민(閔)의 위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니 아는 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이 때 원승(院丞) 중에 세 신하를 잡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세 신하란 곧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과 판서(判書) 김학진(金鶴鎭) 및 선생이었다.
선생은 이 때 일본사람의 죄상을 나열한 격문(檄文)을 국내에 뿌렸었다.
일본 사신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세 신하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최찬정(崔贊政)은 소리를 높여 크게 꾸짖다가 갇힌 지 이틀밤 만에 석방되었고 김판서(金判書)는 무수히 힐난하다가 하루밤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독 선생만은 일본 사신 염천(鹽川)과 무한한 힐난을 하다가 종시 굴하지 않고 일본사령부(日本司令部)에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선생은 격렬한 항변을 하여 못할 말없이 모두 다 하다가 넉달 만에 비로소 석방되니 모두 그 강직하기 대적할 리 없음을 탄복했다.
이 때 때는 위태롭고, 형세 험해져서 아무도 감히 말 한마디도 선생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전 시독혜사(侍讀蕙社) 강원형(姜遠馨)이 큰 이익을 위해서는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위 허의 석방을 청원하는 글을 투함하였으니[逆龍麟探虎牙投請釋] 여기에서 그 우의의 중함을 알 것이다.
여기에서 선생은 또 소(疏)를 올려 벼슬을 사양했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臣) 같은 소홀하고 천한 몸과 용렬한 모양으로 족히 당세에 쓰이지 못할 터인데도 전하께서 잘못 은혜를 두텁게 내리시와, 갑자기 벼슬이 승진되어 직위가 재상에 이르오니 황송하고 국축하와 어찌할 바를 몰라 감격하고 감격하여 스스로 마음에 맹서하기를 ‘천지같이 낳고 길러 주시는 은택이 깊고 두텁기 이와 같으니 뼈가 부숴지고 몸이 가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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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더라도 그 만분의 1도 보답하지 못하겠도다’ 하였나이다.”
하였다.
선생은 상소에서 또 말하기를
“신(臣)이 나가서 이미 국가에 유익할 것이 없사온데, 이제 물러가면서 또 한마디도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신(臣)이 마침내 폐하를 저바리는 것이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되고 지나침을 피하지 않고 가슴 속 말을 다 드리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폐하께서는 말이 적다고 하지 마시고 굽어 받아 들이시와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으로 생각을 하시오면, 신의 몸이 비록 가더라도 신의 말은 행해지는 것이 되오니, 신이 다시 무엇을 한하오리까. 옛날에 신이 온 것도 감히 녹(祿)에 관계가 된 것이 아니온데, 이제 신이 가는 것도 또한 무엇을 탓한다 하오리까.”
하였다.
을사(乙巳)년 여름에 시골로 떠났으나 집에 돌아갈 뜻이 없어, 바로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蜂) 아래 두대동(頭大洞)으로 향하여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중간에 5조약(五條約)이 이루어졌다.
선생은 분한 기운이 더욱 일어나 본도(本道)와 경기(京畿)·충청(忠淸)·전라(全羅)·강원(江原)의 각 도를 돌았다.
여기에서 남쪽에서는 참찬(叅贊) 곽종석(郭鍾錫), 북쪽에서는 현상건(玄尙建)·이학균(李學均)과 서쪽에서는 유인석(柳麟錫)으로 더불어 비밀히 속마음을 통하고, 한편 또 영천(永川) 사람 정환직(鄭煥直)에게 주선시켜 자금 2만냥을 얻어 흩어져 있는 군인들의 생계를 도와 주었다.
정미(丁未) 4월에 어느 사람이 와서 비밀히 임금의 글을 전한다.
여기에는 다만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를 종이에 썼을 뿐인데 이것이 곧 의대조(衣帶詔)[역자 주 : 임금이 보내는 편지를 옷 속에 넣어서 비밀로 전하는 것이다]
이 때는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순종(純宗)에게 왕위를 전했으니 곧 융희(隆熙) 원년이다.
당시 군대를 해산했다는 말과 7조약(七條約)이 또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황감하게 생각하는 중에, 분하고 슬픈 마음이 뒤섞여서 가을과 겨울에 비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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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병을 포천(抱川)·연천(漣川)·적성(積城)·삭녕(朔寧)·철원(鐵原)·양주(楊州) 등지에 벌려 세워 강화(江華)를 향해 내려갔다.
이 때 부하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등이 여러 번 적진을 깨뜨리니 군대의 소리가 크게 떨쳤다.
이에 국내의 지사(志士)들에게 연락하여 양주(楊州)에서 모이니 군대가 도합 만여 명이 되었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總大將)을 삼고 선생은 스스로 군사장(軍師長)이 되었으니, 이는 병술(兵術)과 전책(戰策)이 일찍부터 익숙한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각 도 대장(大將)과 대호(隊號)를 나누어 맡기게 되었다.
관동(關東)은 민긍호(閔肯鎬), 호서(湖西)는 이강년(李康䄵), 교남(嶠南) 박정빈(朴正斌), 경기 진동(京畿鎭東) 권중희(權重熙), 관서(關西) 방인관(方仁寬), 관북(關北) 정봉준(鄭鳳俊)으로 정하기를 이미 끝냈다.
이리하여 사기(士氣)를 북도두어 경성(京城)으로 행했으니 그 뜻은 새로 맺은 조약(條約)을 부셔 폐기시키고, 각국 영사관(領事館)을 순회하면서 전국의 옳지 못한 것을 성토하고, 한국(韓國)의 현재 당하고 있는 처지를 자세히 말하려 함이었다.
또 의병(義兵)이란 순전히 애국자(愛國者)의 혈단(血團)인즉 여러 강국(强國)들도 또한 이렇게 인정해 달라는 뜻을 글을 돌려 성명(聲明)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군율(軍律)을 정비하자 군대의 견고함이 철통(鐵筒)과 같아서 한 방울 물도 새지 않게 되었다.
이에 전군(全軍)에 전령을 내려 동대문(東大門) 밖으로 재촉하여 나가니 대군의 행세가 장사진(長蛇陣)을 이루고 천천히 전진하게 되었다.
선생께서 친히 감사병(敢死兵) 백 명을 거느리고 선두(先頭)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되는 지점에 서서 전군이 와서 모이기를 기다려 일제히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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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군(後軍)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日兵)이 졸지에 몰려와 장시간 사격을 몹시 심하게 하니, 이 때 후원군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퇴진(退陣)되었고,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起羽)가 모두 탄환을 맞고 붙들렸다.
당시 이인영(李麟榮)이 친상(親喪)을 당해서 시골에 돌아가니 뒷일을 선생에게 부탁했다.
이리하여 선생은 중한 책임을 겸해 맡아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고, 물자를 마련해 조달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고, 납세(納稅)를 명하고, 미곡(米穀) 반출하는 것을 금했다.
다음해 4월에 또 13도에 통문(通文)을 내어 다시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한편 박사(博士) 경현수(慶賢秀)를 시켜 밀서(密書)를 가지고 청국(淸國) 혁명당(革命黨)에 가게 했다.
당시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은 선생의 막하(幕下)이다.
선생은 태황제(太皇帝)의 복위(復位)할 것과, 외교권(外交權)을 도로 돌려보낼 것과, 통감부(統監府)를 철거(撤去)할 것 등 30여조를 편성했다.
대개 이것은 모두 우리나라 권리를 회복하려는 운동으로서 이것을 통감부(統監府)에 통고하게 함이었다.
또 경기 안을 돌아 왜적을 많이 죽였다.
일찌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漣川)에 주둔했을 때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거짓 경남관찰사(慶南觀察使)로 유인했다.
또 그는 사람을 보내서 외부대신(外部大臣)의 자리를 주겠다고 유인했으나 선생은 모두 크게 꾸짖고 물리쳤다.
이 때 휘하의 군사들이 온 사람을 죽이려 했으나, 선생은 이를 말리면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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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자를 마땅히 죽일 일이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용서해 보냈다.
그 이튿날 밤에 헌병(憲兵) 40명이 포위하고 선생을 체포하니 이 때는 무신(戊申) 5월인데 갑자기 천둥과 비가 크게 일었다.
서울로 들어와 사령부(司令部)에 가두니 종질(從姪) 참봉(叅奉) 민(▼(土+敏))과 발(坺) 형제가 들어와 보았다.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으니 죽은들 또한 무엇이 한스러우랴. 나를 위해서는 조심하지 말라. 민(▼(土+敏))은 여기서 머물러 하회를 보고, 발(坺)은 급히 집으로 돌아가라. 영(▼(土+英))의 혼인 날이 가까웠으니 그 정한 날에 떠나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한 달이 넘어 서대문 감옥에 옮겨 가두고, 일본 사람 명석소장(明石少將)이 경무총감(警務總監)이라는 자를 데리고 와서 직접 심문했다.
그들은 선생의 경력(經歷)과 이력(履歷) 그리고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또 동양평화(東洋平和)에 대한 경륜(經綸), 한학(漢學)과 역학(易學)의 깊은 조예(造詣)를 듣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師表)라 해서 마음속으로 스스로 공경하고 복종했다.
이에 선생은 명석(明石)과 조용히 문답을 하게 되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일본이 한국(韓國)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이다.”
하니 명석은 말한다.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病者)를 안마(按摩)하는데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선생은 책상 위에 있는, 거죽은 붉고 속은 푸른 것을 가리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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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이 연필은 한 번 보면 붉은 빛깔이지만 안팎이 모두 푸르지 않은가. 귀국(貴國)이 우리 한국을 대하는 것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이렇게 문답하는 동안에 명석(明石)은 국사(國士)로 선생을 대접하여 예의를 차리는 속에 겸하여 동정하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선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통감(統監)에게 청했으나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판(判)·검사(儉事)들이 서로 바뀌어 가면서 의병(義兵) 일으킨 연유를 묻자, 선생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비록 한국(韓國)에서 났으나 한결같이 교활한 왜적의 주구(走狗)이니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대한국(大韓國)의 당당한 의병장(義兵將)이다. 너희들과 변론하고자 하지 않으니 다시는 묻지 말라.”
했다.
왜관(倭官)이 또 묻기를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大將)은 누구이냐.”
하니 선생은 웃으면서
“의병(義兵)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요, 대장(大將)은 바로 나다.”하였다.
왜가 또
“어째서 이등(伊藤)이라 하느냐?”
하자. 선생은
“이등(伊藤)이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義兵)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병을 일으킨 것이 이등(伊藤)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였다.
외부대신(外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이 선생의 일을 가지고 여러 번 통감(統監)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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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나로서 결정짓기 어렵고 권리는 일본 정부에 있다.”
하였다.
이 해 9월 27일 정오에 선생은 교수대(絞首臺)에 올라갔다.
그러나 선생은 신색(神色)이 변치 않고 말이 태연하다.
형이 집행될 때 왜승(倭僧)이 주문을 외워 명복(冥福)을 빈다. 그러나 선생은 꾸짖기를,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으랴.”
하였다.
왜관(倭官)이 묻기를
“남길 말이 있느냐.”
하자 선생은 말하기를
“대의(大義)를 펴지 못했는데 유언(遺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묻기를
“시체를 거둘 사람이 있는가.”
“이 감옥에서 썩어도 좋다.”
이렇게 말하면서 선생은 큰소리로
“빨리 나를 죽여라. 빨리 나를 죽여라.”
하면서 터럭만큼도 눈썹을 찡그리는 빛이 없었다.
아아! 일은 끝이 났다.
이 때 하늘도 태양도 빛이 없고 큰 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뜰가에 섰던 백 척이나 되는 소나무 둘이 졸지에 꺾어지고, 후원에 있는 맑은 약수(藥水)가 졸지에 변해서 누르고 흐리다.
이것은 큰 사람이 원통히 가매 천지도 감동하고 목석(木石)도 변이(變異)를 일으켜 이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옥졸(獄卒) 두 사람이 이것을 보자 찼던 칼을 풀어 놓고, 모자를 찢어 던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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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물러가면서 말하기를
“차마 이 충의(忠義)의 대인(大人)이 잘못 이 변을 당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우리들은 맹서코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지 않으리라.”
했다.
이것을 보고 같은 감옥에 있던 죄수 몇 백 명은 모두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우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금시에 도성(都城) 안팎에 있는 사람들이 부음(訃音)을 전한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박상진(朴尙鎭)은 선생의 문하(門下)에 모시고 따른 지 이미 여러 해가 된 자이다. 이 때 선생의 시체를 거두어 산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집에 모시고 4일의 제도를 이루었다.
그러나 왜는 회상(會喪)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했고, 또 주상(主喪)은 마침 전염병에 걸렸었으니 그 창황한 모양을 어찌 이루 말하랴.
초종에 쓸 물건은 종로(鍾路) 장사군들이 각자 성의껏 만들어 와서 모두 유감없이 치루었으니, 여기에서 가히 그 아름다운 마음이 모두 같음을 보겠다.
이 때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이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통곡하면서,
“공(公)은 어찌하여 나를 빼 놓고 먼저 가셨는가.”
하였다.
이듬해 5월 ○일에 지천(芝川) 방암산(舫岩山) 미좌원(未座原)에 장사 지냈으니 이것은 그 선영(先塋)을 따라간 것이다.
아아! 선생은 천지의 순강(純剛)하고 정대(正大)한 기운을 타고 났으며 구름과 우뢰같은 경륜(經綸)과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궁한 시골집에 엎드려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도(道)를 즐겨 날마다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도다.
그 성품은 본래 호상(豪爽)하고, 큰 도량이 있어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비록 환한에 처하더라도 뜻이 더욱 단단하고, 비록 죽는 데 임했더라도 변치 않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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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대로 만일 그 의리가 아니라면 부귀가 그를 음란하게 할 수 없으며, 빈천(貧賤)이 그의 뜻을 옮기지 못했으니, 맹자(孟子)가 말한
“잘 나의 호연(浩然)의 기운을 길렀도다.”
란 것은 그 선생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예전 갑오(甲午)년간에 조정에서 잘못 판단하고 일본의 허위적인 보호의 유인에 속아, 적을 불러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저들의 지혜의 소굴과 이로운 구멍을 이 땅에 설치시켰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고 보니 안팎의 중요한 땅을 모두 점령해도 금할 줄 모르고 있으니, 국가 형세가 급박하여 자못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여 있게 되었다.
이런 때에 선생은 분연히 자기 몸을 돌아다보지 않고 책상을 치고 벌떡 일어나 드디어 의거(義擧)할 것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에 사방에서 바람처럼 움직이고 향응해서 장차 무슨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위로부터 엄하게 해산하라는 명령이 있어, 선생은 부득이 사퇴하고 돌아가니 장졸(將卒)들은 드디어 통곡하고 돌아가 시골에 누웠었다.
뒤에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있자, 선생은 이에 깨끗이 생각을 고치기를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해 보리라.”
하고 드디어 벼슬에 올랐다.
이리하여 정치하는 친구들 중에 함께 일할 만한 자가 있는가 좌우를 돌아보았으나, 명철(明哲)하고 염치있고 의리있는 선비들은 이미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으며, 못생긴 자들이 녹봉(祿俸)을 탐내어 모두 외적의 더러운 주구(走狗)들이 되어 있을 뿐이니 또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선생은 스스로 정부 안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밖에서 오히려 일을 해 보리라 하고, 여러 번 차자(箚子)와 소(疏)를 올려서 힘써 사양하고 용맹스러이 물러갔었다.
몇 해 동안 몸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겨 두루 국내의 호걸스럽고 충의(忠義)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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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씩씩하고 용맹하여 죽기를 무릅쓰는 무리들을 찾아 드디어 의병(義兵)의 깃대를 들었던 것이다.
이 때 하루 밤 동안에 군대의 소리가 크게 떨쳐 형세가 산악과 같으니, 이에 열 두 나라 우방(友邦)에 격문을 보내어 장차 대의(大義)를 천하에 펴고자 했다.
선생은 때때로 대중에게 맹서하기를
“사직(社稷)을 호위하고 강토(彊土)를 보호하는 것은 산 사람의 대의(大義)이다. 의리는 곧 하늘이니, 나는 마땅히 하늘을 받들어 행할 뿐이요, 성패와 이해는 나의 예측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
이것은 선생께서 초려(草廬)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마음속으로 계산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천하가 선생을 돕지 않아서 마침내 감옥에서 화를 당하시니 아! 이것은 명(命)이로다.
이 날 날이 갑자기 어두워 빛이 없고, 음풍(陰風)이 크게 불어 큰 나무가 꺾어지고, 맑은 샘물이 변하여 흐려졌으며, 도회의 인사들 수 만 명이 일시에 눈물을 흘렸으니, 대개 이는 충성된 혼과 열렬한 혼이 가슴에서 용솟음쳐서 물건에 부딪치고 사람에게 감동해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옛 날 육수부(陸秀夫)가 죽을 때 별이 떨어지고 문정산(文正山)이 죽을 때 회오리바람이 분 것도 역시 이따위인가.
아아! 선생이 죽자 나라도 따라서 망했으니, 가위 대한 백년의 충의(忠義)를 끝마쳤다 하겠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