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의 시의 분류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자신의 시를 아래와 같이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閒適詩), 감상시(感傷詩), 잡률시(雜律詩)의 4종류로 분류하였다.
"좌습유가 된 이래로 사물을 접하면서 느낀 모든 찬미, 풍자, 흥(興), 비(比)에 관한 것과 무덕(武德)에서 원화(元和)까지 시사를 제재로 삼고 '신악부'라 제목을 붙힌 것을 합한 150여수를 풍유시라 하였다. 또 공직에 물러나 홀로 지내거나 병을 핑계로 물러나서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분수를 알고 몸을 잘 보전하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읊은 것 100수를 한적시라 하였다. 또 사물이 밖에서 끌어당기고 정감이 안에서 움직여 느낌이 닿는대로 찬탄하여 읊조린 것 100수를 감상시라 하였으며, 5언, 7언, 장구(長句), 절구의 100운에서 2운에 이르는 것 400여수를 잡률시라 하였다."
(自拾遺來, 凡所遇所感, 關於美刺興比者, 又自武德訖元和, 因事立題, 題爲新樂府者, 一百五十首, 謂之諷諭詩, 又或退公獨處, 或移病閒居, 知足保和,吟翫性情者, 一百首, 謂之閒適詩, 又有事物牽於外, 情理動於內, 隨感遇而形於歎詠者, 一百首, 謂之感傷詩, 又有五言七言長句絶句, 自一百韻至兩韻者, 四百餘首, 謂之雜律詩.)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풍유시는 바로 풍자시로 그 내용은 정치의 좋고 나쁨과 민생의 고락 등을 노래한 것이며, 그 범위는 권력을 잡고 있는 권신과 재야의 은사를 불문하고 논하여 시대의 부족함과 시정의 득실을 도우고 살핀 것이다. 이것은 국풍(國風)에서 그 방법을 취한 것으로 <시서(詩序)>에서 말하는 "문장을 가지고 넌지시 간하니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족히 경계해야 한다.(<毛詩大序>: 主文而譎諫, 言之者無罪, 聞之者足以戒.)"는 것과 같은 것이다. 풍유시 중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는 <신악부>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를 들 수 있으며, 여기에서 거론한 중점적인 문제는
① 백성들의 고통스런 생활상,
② 과중한 세금과 부역,
③ 권문세가와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
④ 세력자들의 권력남용과 횡포,
⑤ 쓸데 없는 전쟁,
⑥ 권력자에 아부하거나 위선에 찬 세상 인심,
⑦ 부녀자의 문제 등이다.(金學主, 李東鄕 ≪中國文學史Ⅰ≫, 韓國放送通信大學出版部, 1986. p322)
그러나 백거이는 강주로 좌천된 후부터는 <방어(放魚)>, <문백상(文柏牀)>, <심양삼제(潯陽三題)>, <대수(大水)> 6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풍유시를 쓰지 않았으며, 시절을 감상하고 늙음을 탄식하거나 자식과 친구를 슬퍼한 몇몇 시들 외에는 모두 한적한 생활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 한적하고 쾌락한 생활을 희망했던 그는 이러한 마음을 주제로 삼아 주로 자연의 풍광(風光)과 마음의 평정을 읊은 시를 한적시라 이름하였으며 그 평가는 풍유시 다음에 두었다.
감상시란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실제로 한적시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풍유시가 세상을 풍자하고 한적시가 허심탄회하게 자연의 풍광을 읊은 것이라면, 감상시는 인생의 경험에서 감정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즉 인생에 대한 허무, 애상, 인정, 세정(世情), 추억, 우정 등에 관한 감회와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楊林 <白樂天과 그의 詩>, 서울대학교대학원, p26) 이것은 주로 노년기에 쓴 작품으로 그 분량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감상시 중에서도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 등은 창기들도 능히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시정(市井)에 널리 유행하여 천고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잡률시는 어떤 사물에 정감을 느끼고 흥취가 일어나서 짓거나 아름다운 형식과 격률에 치중한 시의 한 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격시(格詩)라는 형식을 포함하여 모두 2203수로 그가 분류한 시가 유형 중에 그 편수가 가장 많다. 그러나 사실상 잡률시 중에는 풍유시에 속하는 것도 있고 한적시나 감상시에 속하는 것도 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집 15권을 처음으로 편집한 것은 헌종(憲宗) 원화 15년(815)의 일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시를 상술한 바와 같이 풍유, 한적, 감상, 잡률로 사분하였고, 그후 목종(穆宗) 장경 4년(834)에 시문을 함께 담은 ≪백씨장경집(白氏長慶執)≫을 편집했을 때도 여전히 이 네 가지 분류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문종(文宗) 대화 2년(828)에 ≪백씨장경집≫ 이후의 시문을 모아 후집 5권을 3차 편집하였을 때는 이미 있던 작품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작품만을 분류하면서 격시(格詩)와 율시(律詩) 두 종류로만 분류하였다. 그는 그러한 분류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율시는 이미 아는 바와 같고, 격시는 대체로 한위(漢魏)의 고시에 다른 다양한 형식이 가미되어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종의 고체시를 가리키는 것이다.(劉本棟 ≪白居易≫, 中國歷代詩人選集 18, 林白出版社, 1978, 金在乘 <白居易의 格詩考> 中國人文科學 제3집, 1984, 참고)
백거이의 격시는 만년에 쓰여진 것으로 형식이 다양하며, 내용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정감과 당시의 생활상을 소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관직생활, 술, 지족안분(知足安分)하는 낙천적인 생활태도를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백향산시집(白香山詩集)≫에서 격시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작품은 모두 293수이며, 그의 나이 51세(장경 2년, 822)부터 71세(회창 2년, 842)까지 20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백거이 시의 특징
백거이의 시가 당대 그 누구보다 많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가 갖는 독특성 때문이며, 그것은 대체로 평이성, 풍자성, 사실성으로 귀납할 수 있다.
1) 평이성(平易性)
"백낙천은 시를 지을 때마다 한 사람의 노파도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해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이해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다시 그것을 쉽게 고쳤다."
(<甌北詩話>: 白樂天每作詩, 令一老嫗解之, 問曰解否? 曰解則錄之, 不解則復易之.)
여기에서 그가 얼마나 일반대중이 읽기 쉽도록 평이한 시어(詩語)를 사용하여 시를 지었는지 알 수 있다. 명대(明代) 호응린(胡應麟)은 ≪시수(詩藪)≫ 권6에서, "낙천의 시는 세상에서 이르기를 얕고 속되다고 하는데 이는 뜻과 말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다.(樂天詩, 世謂淺近, 以意與語合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얕고 속되다"고 한 말은 곧 평이하다는 뜻이며, "뜻과 말이 합치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어가 복잡하거나 함축적이지 않은 직설적인 언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언어 구사가 가장 잘 나타난 시가 바로 풍유시와 <비파행>, <장한가> 등이다. 특히 그의 시는 장안(長安)에서 강서(江西) 3~4천리에 이르는 향교, 불사, 객사라든지 일반 서민, 승려, 과부, 처녀들의 입에까지 회자하였다. 절간의 벽에 그의 시가 쓰여지고 <장한가>를 외우는 기녀가 술좌석에서 돈을 더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시가 평이한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 풍자성(諷刺性)
뜻이 과격하고 말이 질박한 것이 백거이 풍유시의 특색이다. 뜻이 과격하다는 것은 그의 시가 노골적인 풍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두보를 비평하고, 두보의 시 중에서도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나뒹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것과 같은 사상만을 취하여 그의 풍유시를 써 나갔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풍유시 172수 가운데 매우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그가 당시의 정치나 사회를 풍자한 것은 바로 그의 문학 주장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자성을 가진 그의 풍유시는 일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
3) 사실성(寫實性)
백거이의 시 3800여수는 모두 그가 일생동안 겪은 생활의 기록이며 당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반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에서는, "헌종 원화 2년에 백거이는 악부 및 시 100여편을 지어 시사를 풍자하였다.(憲宗元和二年, 白居易作樂府及詩百餘篇, 規諷時事.)"라고 하였고, <여원구서>에서는,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시사를 풍자하고 시대나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는 것 등은 바로 백거이 시의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생활과 시사를 이탈하지 않고 현실을 충실하게 노래한 그의 사실적 시가창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첫댓글 백거이가 쓴 시의 특징이 시를 쓸 때 가징 필요하고, 또 대부분의 문청들이 번번히 실수 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인 것 같아요!
정말 백거이는 대단하군요^^
저도 저 세가지에 기초하여 시를 써야겠어요 ㅎ
일반사람들이 알기쉽게 고치고, 평이하게 쓰여지면서,풍자적으로 그 시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이 백거이의 시의 특징이군요. 저 또한 잘 새겨야 겠습니다.^^
'"백낙천은 시를 지을 때마다 한 사람의 노파도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해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이해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다시 그것을 쉽게 고쳤다."' 좋네요!! 누구나 알기 쉽게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좋은 자료 잘 읽었어요^^*
백거이 시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자료입니다
전 풍자성이 짙은 시가 참 좋더라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