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1월 8일 수요일 맑음
어젯밤 살짝 내린 비에 땅바닥이 젖어있다.
‘황토길 미끄러울 테니 오가피는 다음에 따고 오늘은 매실 거르기를 마쳐야 겠다’ 매실 통에 달려들었다.
50리터 매실 통이 24개, 30리터 통이 6개, 약 1000kg의 매실이 액기스로 탈바꿈되었다.
더 담으려 했지만, 창고를 짓기 시작 전이었고, 통을 보관할 장소도 부족하여 앞마당의 장소가 허락하는 만큼만 담궜었다.
‘내년에는 창고 안에다 마음껏 담궈야지’
첫 번째 통에 달려들어 뚜껑을 열고, 비닐을 벗겼다. 톡 쏘는 향기가 코를 자극하니 입안 가득히 군침이 흐른다. 토종매실 특유의 향이다. 한 국자 떠서 입안에 넣고 음미를 해 본다. ‘잘 익었다. 향도 좋고 맛도 그만이다. 앞으로 3년 숙성시키면 깊은 맛까지 가미되어 일품이 되겠다’ 기분이 좋았다.
꿀꺽 목구멍을 넘기니 ‘화’한 시원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더니 뱃속의 편안해 짐이 금방 전달되어 온다. ‘이 맛에 매실원액을 먹는 거지’
속살을 다 빼앗기고, 씨 위에 껍질만 붙어있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매실을 철망 뜰채로 하나 가득 담아 들어 올린 후 통의 턱에 걸쳐놓고 액기스가 다 흘러 내리기를 기다린다. 실처럼 떨어지던 액기스가 방울방울 떨어질 때가 되면 비닐 봉지로 옮겨 담았다. 썩기를 기다려 매실나무 밑에 뿌려야지.
그런데 방해꾼이 찾아 왔다. 처음에 땅벌 한 마리가 슬금슬금 날아와서 앉았다 날랐다 하더니 다음은 꿀벌이, 나중에는 무시무시한 말벌까지 날아온다. 매실 원액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내에 이끌려 온 것이다.
저 혼자만 맛을 보고 가면 됐을 텐데 조금 있으니까 친구들까지 데려 오네. 벌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건들지 않으면 쏘지도 않고, 저희들끼리 놀다 가니 심심치 않아 좋더라.
단조로운 작업이 계속 되었다. 액기스 한 방울이라도 건지려고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였다. 약간 지루하였다. 몸을 덜 움직이니까 소화도 덜 되고.... 점심도 조금만 먹었지. 몸을 많이 움직여 줘야 밥맛도 산다.
오후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작년까지는 아파트 방안에다 담그고, 걸렀기 때문에 작업을 할 때 땀이 흘렀는데, 야외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하니 더운 줄을 모르겠다. 눈앞의 은행나무는 이미 샛노래진지 오래고, 뒷산의 밤나무 잎에도 단풍이 물들어 간다. 막바지 가을이다. 선뜻함이 숨어있는 바람까지 느껴진다.
“아빠, 일해 ?” 캐나다에서 막내딸의 전화다. 아까는 큰 딸이 일본 출장을 간다고 전화하더니.... ‘이놈들이 아빠한테 오늘 전화하자고 짰나 ?’
“응 일하지” “거기가 어디야 ?” “뭘, 정산이지” “뒤에 건물이 못보던 건데....”
‘아, 영상통화구나’ “응 이번에 새로 지은 창고야. 구경시켜 줄게. 여기는 문이고, 이곳이 재조실이야. 여기는 방이고, 여기가 숙성실, 이곳은 저온창고고....”
“와 좋다. 뭐할려고 ?” “매실 액기스 만드는 공장이야. 식품제조 허가도 받을 거고....” “인터넷으로 팔고 그러려고...?” “식품제조 허가가 있으면 슈퍼에서도 팔 수 있어” “야, 우리 아빠 새 출발하는 것 같애” “그래, 좋아 보여” “그럼”
“그런데 왜 전화했니 ?” “응 아빠, 나 서울대 대학원 다닐 때 있지. 그 때 같이 다니던 사람이 그동안 박사도 따고, 미국에 와서 파듀 대학이라고 있거던. 시카고 근처에 있는 과학으로는 알아주는 대학이야. 그 대학 조교수로 왔다고 연락이 왔어.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그동안 뭘 했나 ? 하는 생각이 들어서....”
“왜 후회 돼 ?” “아니 후회까지는 아니래도....” “뭘 너도 열심히 했지. 서울대학원 다니다 그만 뒀지만 세계적인 대학인 토론토 대학 편입시험에 떡하니 합격을 했지. 그 건 쉬운 일이 아니었잖아. 2년 만에 졸업을 하면서 간호사 시험까지 합격을 했고, 졸업하기도 전에 캐나다 제일의 대학병원에 취직을 했잖아”
“그래도 뭔가 허전하고,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잖아. 그러다 나흘 일하고 닷새 쉴 때면 따분하고,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 땐 네가 하고 싶은 공부라도 하라고 했잖아” “이 나이에 될까 ?” “뭠마. 네 나이가 서른 둘 밖에 더 됐어. 아빠는 마흔 다섯이 넘어서 석사를 시작했어.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잖아” “그래도 선뜻 책이 안 잡혀” “준비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게 기회야. 인생이 짧은 것 같지만 길어. 인생 한 살이를 거치는 동안 몇 번의 변화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언제 어느 순간에 네 일생 일대의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항상 준비해 둬.” “알았어 아빠” “참 너 영주권은 언제 나오니 ?” “지금 진행 중이야. 영주권 나오면 한 번 집에 갈 게”
“그래 몸 조심하고....” “아빠도 너무 일하지마”
시집 빨리 가라는 말은 못했다. 똥차가 밀려있기도 하고, 내가 서두른다고 눈이 파란 놈이라도 데려오면 어떻게 해.
매실 거르기를 마쳤다. “으이구 시원하겄네” 장모님께서 같니 시원하신가 보다. 시원한 날씨 속에서 시원하게 마쳤다.
‘내일은 오가피 열매를 따야지. 하루 안에 될래나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11.11 1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