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천길에 울퉁불퉁 산이 겹쳐 의지했는데,
쌓인 눈이 하늘을 적시어 이슬이 맑구나.
신사에 신령이 응당 있음을 알겠고,
해마다 삼백이 내려 풍년을 기약하네" ... 徐居正 : 公嶺積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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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의 "십영(十詠)" 중 하나. 서거정은 대구의 수려한 경치를
읊은 십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이를 "십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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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八公山)'
대구 사람들에게 있어 팔공산은 그대로 풍족한 삶의 원천이다. 대구를
떠올릴 때가장먼저 꼽을 수 있는 것 또한 팔공산이다. 예로부터 팔공산은
대구 분지를 병풍처럼 감싸 안으며 사람들의 삶의 평안을 지켜 주었고, 명
산영악(名山靈岳)으로서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정신적 위안과 도
움을 주어 왔다. 팔공산은 그야말로 '대구인의 마음이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팔공산의 '고상함'과 '높은 덕'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대구
를 대구이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태백산맥과 연결된 팔공산은 지형적으로 주변에 넓
게 분포된 퇴적층 중에서 화강암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강암이 퇴적층 속에 관입하여 돔(Dome)지형을 형성하고
, 그 뒤의 침식작용으로 상부의 퇴적암이 제거되면서 그 속에 뭍혀 있던 화
강암이 노출되어 현재와 같은 높고 웅장한 산세와 기묘한 절벽 등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 위에 울창한 숲이 함께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팔공산 주변의 산록부에는
도덕산(道德山, 660m) 응해산(鷹蟹山,526.4m) 응봉(鷹峰,448m) 문암산(門岩
山,431m) 용암산(龍岩山,373m) 함지산(涵芝山,287.7m)등이 둥근 띠 모양의
환상산맥을 이루면서 그 속에 또 하나의 작은 분지(盆地)를 품고 있다.
팔공산이 머금은 물은 산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흘러나와 지묘천(智妙
川) 동화천(桐華川) 불로천(不老川) 율하천(栗下川) 용수천(龍水川) 팔거
천(팔거천)등의 여러 갈래로 흘러 대구의 젖줄 금호강(琴湖江)으로 담아 낸
다. 금호강은 팔조령(八助嶺)에서 발원하여 대구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신천(新川)과 함께 대구에 생명수를 공급하면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든다. 팔공산의 형상은 주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봉(1,155m)과
서봉(1,041m)을 좌우에 끼고 있어 협시보살을 거느린 삼존불의 모습을 하
고 있다. 동봉쪽으로 솟은 봉우리들은 염불봉(念佛峰), 수봉(壽峰),인봉(印
峰),노족봉(老足峰),관봉(冠峰),환성산(環城山)을 이루고 서봉은 삼성봉
(三聖峰),파계봉(把溪峰),가산(架山)을 거느려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보이기도 한다. 산의 전체 능선 길이는 무려 20km에 달하
며, 행적구역상으로는 대구시 동구, 경북 군위군 부계면, 산성면, 영천시
청통면,신령면,칠곡군 가산면, 동명면,경산시 와촌면,구미시 정천면등의 6
개 시.군에 걸친다. 산의 총면적은 122.08km2로 울릉도의 약 2배에 이른
다.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택리지(擇里志)에서 "돌봉우리가 가로 뻗치
었고, 산동서의 계산(溪山)이 자못 아름답다"라고 쓰고 있는 데서 알 수 있
듯이 팔공산은 아름다운 경관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한다. 또한 이 산은 숱
한 전설과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시대 팔공산은 부악(父岳)
혹은 공산(公山)으로 불렀는데, 당시 4악(四岳)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악(中岳)이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공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
대에 들어와 팔공산으로 정착된 듯 하다. 팔공산이라는 명칭이 어떻게 생
겨났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많은 이설(異說)이 있다.
(1) 여덟 고을(八郡)에 걸친 산이라는 설
영천.신령.하양.인동.칠곡등의 여덟 고을에 걸친 공공(公共)의 산이라는
뜻으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이는 [영종대왕원당사적(英宗大王願堂事
跡)]의 '반거팔읍지지(磐據八邑之地)'라는 기록이 그 전거(典據)가 된 듯
하다.
(2) 여덟 장군이 순절(殉節)한 산이라는 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의 동수대전(桐藪大戰),공산싸움)에서 고려 장수
신숭겸.김락.전이갑(全以甲).전의갑(全義甲)등의 여덟 장군이 왕건을 위기
에서 구하기 위해 순절한 것을 기려서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3) 8간자(八簡子)를 봉안(奉安)한 산이라는 설
동화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심지(心地)대사가 영심(永深)으로부터 전수
(傳受)하여 동화사에 봉안하여 왔던 8간자(八簡子)를 고려 예종(睿宗)이 궁
중에서 친견(親見)하실 때 서기(瑞氣)가 뿜어나와 팔간자의 '팔'자를 공산
위에 씌워 팔공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4)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중국 안휘성(安徽省) 봉대현(鳳臺縣)의 팔공산에서 전진왕(前秦王) 부견
(符堅)이 진군(晉軍)과의 싸움에서 대패한 것을 왕건과 견훤의 싸움에 빗대
어 팔공산으로 했다는 설이다.
화려한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던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화랑도의 심신
수련장으로서 삼국통일의 간성들을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터전이었
다. 특히 김유신이 17살 때 낭도들과 함께 수련에 정진했다고 전해지는 은
해사(銀海寺) 중앙암(中巖庵) 뒷편 장군석굴과 경산시 압량면에 있는 화랑
조병장터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후삼국 분열기인 고려초의 팔공산은 정치
적.군사적으로 격변의 중심지였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백제 견훤과의 싸움
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그 중요한 원인은 왕건이 당시 동화사와 파계사
가 견환세력과 밀착된 백제계 법상종에 속한 사찰로 팔공산 일대가 견훤세
력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팔공산은 불교의 형상을 닮은 명산답게 동화사.파계사등의 수 많은 사찰
과 암자, 그리고 갓바위를 비롯한 숱한 불상들이 산속 곳곳에 흩어져 있다.
특히 팔공산은 약사여래신앙의 총본산으로 유명하다. 이는 신라 선덕여왕의
병을 약사여래의 영험으로 치우하면서 융성하기 시작했다. 팔공산에는 갓바
위 뿐만 아니라 계곡과 정상에 많은 약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동화사
경내에 최근 완공된 '남북통일발원약사여래석조대불'은 완공 당시부터 전
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불교신도들의 신심을 돋우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로부터 팔공산은 군사상 천혜의 요새지로서 외침을 막아내는 중요한
성벽의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명대사가 이곳
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고, 또한 권응수 장군 중심의 의병부대도 조직되어
팔공산은 의병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
쟁 때에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유엔군이 팔공산자락 다부동전투에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아 북진이 가능하게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팔공산은 1980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1년 7월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공산면 일대가 대구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산 총면적의 25%가 대구시 자연공원으로, 75%가 경상북도 도립공원
으로 관리가 이원화되어 있다. 대구시는 팔공산의 진입도로를 넓혔고, 1992
년 1월에는 동화사에서 군위 삼존석굴(제2석굴암)까지 순환도로를 개설하여
팔공산은 대구 시내에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을정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도로는 오른쪽으로 비로봉 정상을 끼고 멀리 고령.의성까지 조망할 수
있는 답사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대구역사기행 ... 향토사 교육 연구회 ...
도서출판 나랏말중에서]
[부연 설명]
약사여래신앙...약사여래는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인으로 대의왕불이라고
도 한다.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음
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래서 항상 손에 약항아리를 들고 있
다. 약사여래에 대한 믿음은 서방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여래의
숭배와는 정반대로 현세에서의 복을 구하고 질병퇴치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4악(四岳)...동악(토함산:신라명산),서악(계룡산:백제명산),남악(지리산
:가야명산), 북악(태백산:고구려명산)을 가리킨다. 4악중에 중악인 팔공산
을 합쳐 신라오악이라 하였다.
대구지방의 청동기문화...대구지방의 청동기 유물로 가장 대표적인 것
은 비산동에서 출토된 오리형 칼자루 장식을 한 세형동검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 청동기 문화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시베리아에서 유
행한 동물 장식 수법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지금은 국보 137호로 지정
되어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군석굴...김유신장군의 소도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1969년 10월
한국일보 주관의 신라삼산학술 조사단에서는 월성군 단석산 상인암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1978년 5월 경북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의 중앙학술조사단은
중암암석굴이라고 주장하였다.
은해사
1. 은해사의 역사와 성보문화재
은해사는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면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다. 현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憲德王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 하였다. 그
뒤 1270년(원종11)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충렬왕1)에는 원참이
중건하였으며. 1485년(성종16)에는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妙峰
庵)을 중창하였다. 1546년(명종1)에는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 하였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에 묘진(妙眞)이 중건하였고, 1589년(선
조22)에는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712년(숙종38)
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으며 1761년에는 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수
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이 사천왕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동서남북의 네곳을 지키게 된다. 원래 사천왕
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
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은 그 부하인 팔부신중을 대동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선악을살피다가 착한 이에게는 상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한다. 그
리고 그 결과를 매달 8일에는 사천왕의 사자들이, 14일에는 태자가, 15일에
는 천왕 자신이 도리천에있는 제석천에게 반드시 보고하게 된다. 동쪽은 지
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 이라 한다. 대부분 사찰에서는 일주문을 두고 인
왕문(仁王門) 다음에 천왕문(天王門)을 설치하고 있다.}}
을 세웠다. 1772년에는 자암(慈庵)이 대웅전(大雄殿) {{ '대웅'은 석가모니
불에 대한 수많은 존칭 가운데 하나이며 대웅전은 대영웅 석가모니를 모신
궁전이다. }}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도봉(道峰)은 영산전(靈山殿) {{ ) 영산전은 석가여
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한 영산회상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상
도라는 불화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지은 전각이다.}}과 시왕전(十王殿) {{ )
불교의 우주관은 아주 다양한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로 구성되어 있
다. 6 도(道)에서 헤매는 중생들은 죽으면 염라대왕 앞에 끌리어 나가 자기
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엄격하고 공정한재판을 받게 되는데 염라대왕
은 명계(冥界)의 총사령관 격이다. 염라대왕은 중국에서더욱 발전 되어 10대
왕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러한 10대 대왕의 상을 모신 곳을 시왕전
또는 명부전(溟府殿)이라고도 한다.}}의 불상을 개분하였다. 이렇듯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이래 은해사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1847년 (헌종13)에 은해사 창건이래 가장 큰불이 났다. 이때의 화재는 너
무 가혹한 것이여서 1.000여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862년(철종13)
3월 혼허지조(混虛智照)가 지은 "은해사중건기(銀海寺重建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헌종 13년 정미(1847)에 실화로 은해사가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칸의
사우(寺宇)를 전소시키는데 인종의 태실 수호 사찰이며 영조 어제의 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기 때문에 당시 영천군수 김기철이 솔선하여
300꿰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하는 것을 비롯 대구 감영과 서울 왕
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 3년여의 불사 끝에 헌
종 15년(1849)에는 그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대웅전·향실(香室)·고간(庫間)·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
청풍료(淸風寮)·보화루(寶華樓)·옹호문(擁護門)·안양전(安養殿)·동별당(
東別堂)·만월당(滿月堂)·향적각(香積閣)·공객주(供客廚) 등이다.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로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
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로 성장하였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이
절은 논 46만 4000여평, 밭 2만 8000여평, 임야 920정보를 자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논 2만 4000여
평, 밭 1만7000여평, 임야 851정보, 건물 19동, 승려 50여명이 수도하고 있
다.
이곳은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 사
격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影波)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
엄교학(華嚴敎學)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
웅전을 비롯하여 설선당·심검당·종루·보화루·독성각·승당·요사채·객
실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암·
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은해사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조선조 인종의 태실과 은해사
의 중창관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인종은 조선 12대 왕으로 등극 했으나 8개월만에 돌아가니 조선 시대에
있어서 재위가 가장 짧은 임금이 되었다. 바로 인종의 태실이 은해사 근
방 태실봉에 모셔져 있게 된 것은 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중종 15년
(1520)이다. 태실봉 바로 아래에는 당시 백지사(栢旨寺)로 불리던 현재 백
흥암(百興庵)이 있었서 당시 불교계는 이를 계기로 삼아 백지사를 수호사
찰로 하고 대사찰을 창건하고자 은해사를 창건한 것이다. 중종반정 이후
성리학 이념을 정당하게 실천하겠다는 성리학자들에게 의해 정국은 더욱
보수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왕세자 태실 수호 사찰을 새로 짓는다는 것
은, 특히나 기존의 사찰도 폐사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
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왕대비 정
현왕후 파평 윤씨의 배려로 이루어 지게 된다.
정현왕후는 중종반정시에 자신의 친자인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중
종의 조강지처인 거창신씨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연산군의 처남인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출하고 파평윤씨의 세도를 다지기 위하여 중종 2
년 숙원(淑媛) 윤씨를 왕비로 간택하였다. 그러나 이 장경왕후(章敬王后)는
중종 10년(1515) 2월에 원자를 낳고 7일만에 급서 한다.
이에 정현대비는 원자의 보육을 위하여 원자가 3세때인 중종 12년(1517)
에 원자의 외조부 윤여필의 당질인 윤지임의 딸을 중종 계비로 맞이 하니
이가 바로 문정왕후(文定王后) 파평윤씨이다. 이후 정현대비는 원자 나이 6
세에 중종 15년(1520) 왕세자로 서둘러 책봉케 하였다. 이렇듯 왕세자에
대한 자애가 각별하였던 터라 그 태실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을리 없다. 이
에 팔공산 중의 명당인 백지사 뒷봉우리에 태실을 안치하고 이의 수호와
세자의 복록을 기원하는 원찰의 신창(新創)을 은밀히 추진해 갔다. 그래서
정현왕후가 승하하던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에 은해사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이후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나 곧 돌아가고 인종의 이복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니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시대가 열렸고 문정왕후
가 불교 부흥에 힘썼으므로 은해사의 사세도 어느 정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 형제들과의 세도 다
툼으로 을사사화까지 일으켜 피를 흘리게 되니 대윤(大尹)·소윤(小尹) 두
집안의 감정이 문정왕후에게 전이되어 문정왕후가 인종을 몹시 증오하게되
어 문정왕후 생존시에는 은해사의 확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명종이 하나밖에 없는 순회세자(順懷世子)를 그 나이 13세에 잃게 되
자 중종 후궁 소생의 왕손이 양자로 들어와 대통을 잇게 되니 그가 선조
이다. 선조를 왕손에 지목하여 보위에 오르게 한 사람이 명종왕비 인순왕
후(仁順王后) 청송 심씨의 친정동생인 심의겸이었다. 심의겸은 성리학자였
으며 선조 즉위이후 이황·기대승·이이 등 기라성같은 성리학자들이 이상
정치를 펴려했던 것도 이 같은 정치 상황에 힘입어서였다.
그런데 그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정치에 구현하려면 먼저 문정왕후에 의
해 주도되었던 반성리학적인 불교 부흥운동에 철퇴를 가하여 이를 배제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 승하(昇遐)이후 불교 부흥책을 꾀
했던 보우(普雨)대사에게 죄를 씌워 제주도에 유배시켰다가 장살하고 문정
왕후의 오라버니들인 소윤일당이 저지른 을사사화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
리학적 명분을 세우려한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이상 정치를 실현시키려
했던 인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정당한 예우를 추가하게 된다. 이런
시운을 틈타 은해사측에서는 인종 태실 수호 사찰임을 내세워 확장을 꾀하
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 22년(1589)에 법영(法英)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낸다.
은해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이 많이 전한다. 잠시 그 이유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근 파계사를 원찰로 하고 있던 영조가 왕자시절에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完文)을 지어 보낸 일이 있고 이것은 영조
등극후에 어제완문(御製完文)이라 하여 이 절을 수호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시기 추사는 경상 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
로경(金魯敬)을 따라와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할 때 이 은해사에
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1862년에 쓰여진 "은해사중건기"에는 대웅전(大雄
殿)·보화루(寶華樓)·불광(佛光)의 삼대 편액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
喜)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華嚴樓閣)과 같다고 하였다.
1879년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액(門額)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 글씨이고 노전
(爐殿)을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은해사는 중창후에 추사 글씨를 많이 받아다 현판으로
새겨 걸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은해사 거조암
①거조암(居祖庵)은 693년(효소왕2)에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뒤 고려시대에는 지눌(知訥)이 송
광사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룩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를 익혔던 사찰로 유명하다.
1182년 지눌은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선정(禪定)을 익히고 지혜닦기를 힘쓰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지어
후일을 기약하였다. 1188년 봄에 거조사의 주지 득재(得才)는 지난날 결
사를 기약하였던 수행자를 모으고 당시 경북 예천의 하가산 보문사(普門
寺)에 머물렀던 지눌을 청하여 처음으로 이 절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그 뒤 이 결사는 송광사로 옮겨 갔다. 1298년 정월에는 원참이 밤중에 낙
서(樂西)라는 도인을 만나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
생의 참법을 전수받아 기도도량으로도 크게 부각되었다. 그뒤의 역사는 자
세히 알 수 없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과 2동의 요사채가 있
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려 앞 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尙彦)이 그린 탱
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중 법계도(法界圖)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특이
하고 영
험이 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영산전 앞에는 고려시대의 3층석탑이 있다.
은해사 운부암
②운부암(雲浮庵)은 711년(성덕왕10)에 의상이 창건하였으며, 이때 이곳
에 서 운(瑞雲)이 떠 있으므로 운부암이라고 하였다. 그뒤 관음기도 도량으
로 전승되어 오다가 1860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응허(應虛)와 침운이 중건
하였고, 1900년에 보화루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
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왼쪽에 운부랸야(雲浮蘭若)가 있고,
오른쪽에 우의당(禹儀堂)이 있으며, 앞쪽에 보화루가 있다. 이중 정면 3칸,
측면 2칸의 원통전 안에는 보물 제514호로 지정된 은해사 운부암 청동보살
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신라말에 혜철국사가 인도에서 해금강으로 들어오
는 배 안에서 모셔왔다는 전설이 깃들여 있다.
이곳 역시 문루(門樓)를 보화루라 하였는데 백흥암과 같은 규모이다. 현
판 글씨는 해관 유한익(1844-1923)이 1900년 7월 상순에 썼다고 하였는데
그 필체가 훌륭하다. 원통전 동쪽 요사채에는 운부난야(雲浮蘭若)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환재 박규수(1807-1876)의 글씨로 아마 철종 13년
(1863)에 운부암의 중수를 끝낸 응허대사의 청에 의해 쓴 듯하다. 환재는
임술년에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파견되
어 이를 수습하였으니 이때 오가는 중에 운부암과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화루 안에는 환재가 쓴 팔봉(八峯)대사의 진찬(眞贊)판각이 걸려 있기
도 하다. 원통전 서쪽 우의당에는 영파 성규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이 운부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운부사로 나타나
있어 원래 독립된 큰 사찰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전해오기로는 실상산문의
조사인 홍척(洪陟)국사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은해사 백흥암
③백흥암(百興庵)은 사기(寺記)에 의하면 혜철(惠哲)이 861(경문왕1)에 착
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松旨寺)
라 하였다고 한다. 그뒤 1546년(명종1)에 백흥암으로 개칭하였고 1651년(효
종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3)에 중수하였다. 1730년(영조6)에는 보화
루(寶華樓)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9)에는 청봉(靑峰)이 영산전을 중수하
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영산전 . 명부전 . 문루
. 산신각 . 선실 . 원주실 . 요사채 등이 있고 이 중 극락전은 보물 제790
호로 지정되어 있고 극락전안의 아미타 삼존불을 바치고 있는 수미단(須
彌壇)은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1531년(중종
26)에 간행된 법화경판과 이 절에서 정진했던 24인의 고승들의 영정이 봉
안되어 있다. 이 절은 현재 비구니의 수도 사찰로서 선실에서는 여름과
겨울 안거(安居)때 수십명의 비구니들이 정진한다.
요사채에 걸려 있는 '십홀방장(十笏方丈)'이란 글씨는 추사가 쓴 것으로
송대의 대문장가인 동파소식(東坡蘇軾)의 "석각이 그린 유마 거사상을 읊
음(石恪畵維摩頌)"이라는 글 중에서 6구절을 따서 쓴 내용이다.
은해사 중앙암
莞 오다가 1834년(순조34)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객사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석
등과 3층석탑이 있다. 이중 3층석탑은 창건 당시 건립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가 3.7m이다. 이밖에도 도괴된 부도 1기가 있다. 절 주변에는 삼인암
(三印巖), 건들바위, 장군수(將軍水) 등이 있다.
이중 건들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여 있는데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
어지려고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또 장군수는 김유신이 17세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
간수이다.
은해사 묘봉암
⑤묘봉암(妙峰庵)은 833년(흥덕왕8)에 심지(心地)가 창건하였다고 전한
다. 그 뒤 오랫동안 관음기도처와 수행처로 전승되어 오다가 1485년(성종
16)에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중창하였고, 1780년(정조4)에 혜옥(惠玉)
과 서징(瑞澄)이 중건하였으며, 최근에 주지 법운(法雲)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당우로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왼쪽에 요사채가 있
고 오른쪽 뒤편에 산령각(山靈閣)이 있으며 원통전 아래에 염불당(念佛堂)
과 부목방(木房)이 있다. 원통전은 무척 높아서 정사각형의 모양에 가까운
데, 그까닭은 내부에 큰 돌이 뻗어 있어 그 아래에 관세음보살상을 안치
하고, 왼쪽 위에 2층을 만들어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은해사 기기암
기기암(寄寄庵)은 애장왕때 국사로 봉안된 정수(正秀)가 816(헌덕왕8)에
창건하였고 1546년에는 쾌선이 중건하여 안흥사(安興寺)라 하였으며 60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한다. 그뒤 182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로는 요사채와 법당을 겸한 건물 1동이 있다.
문화재 / 은해사의 성보문화재
현재 은해사에는 많은 성보(聖寶)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대웅전 주존 석가모니상과 후불탱
현재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주존 석가모니상은 목불로서 밋밋한 느
낌이 든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상이 없이 독
존으로 모셔져 있는데 그 수인(手印)으로 보아 아미타 불상임을 알 수 있
다. 이는 정미년 대화재때 극락전(極樂殿) {{ ) 아미타전(阿彌陀殿) 혹은 무
량수전(無量壽殿) . 수광전(壽光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전'이라고 했을
때는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신 불전임을 뜻하고 무량수전이라 했을 경우
무량수불을 주불로 한 의미인데, 아미타여래와 무량수불이 결국 같은 여래
이므로 마찬가지의 뜻을 갖는 불전이다. 좌우 협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한다. }}만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소실되었는데 이때 극락전에 있던 이
불상을 후에 대웅전을지은 다음 본존으로 모셨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불상은 측면 처리가 얇은 것이흠인데 이는 큰 통나무 하나를 파서 만들었
기 때문에 재료의 한계성에 기인한 결함인 듯하다. 아마도 이 불상의 제작
시기는 선조(1568-1608) 연간 중창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후불탱 {{ )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를 만들어서 거는 불
화를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탱화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존하는 탱화는고려시대 작품부터 보이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국
시대에도 이미 불화를 그리고 있었던것으로 보여진다.}}은 역시 아미타 삼존
탱인데 역시 본존과 같이 극락전에 보셨던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후불탱의 전호와 존상이 일치하지 않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후불탱의
제작시기는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쪽벽에 걸려 있는
삼장탱(三藏幀) {{ ) 삼장탱은 지장보살 그림이 발전 . 확대되어 나타난 그
림이다. 불교가 교리으로 발전되어 감에 따라 석가여래 일신(一身)에서 이
신(二身)으로다시 삼신사상(三身思想)과 신앙이 심화 .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등의 3신사상은 결국 석가
여래, 즉 '부처'라는 한 낱말에서 그 기능적인면인 성격에 따라 다르게 본
사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더 확대되어 삼세불(과거불, 현재불, 미
래불), 천불, 삼천불도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논리가 지장보살에 적용된
것이 바로 삼장사상(三藏思想)이다.}}과 거의 비슷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삼장탱의 제작시기가 1775년(영조31년)이니 아마도 같은 시기로 비정함이
옳을 듯하다.
② 은해사 감로왕 {{ ) 감로왕도는 지옥에 빠진 자기 부모(가족 .친지)가
우란분재의 성반을 올림으로써 지옥의 고통을 여의고 극락에 왕생한다는 발
상에서 나온 것이다.
감로왕은 바로 서방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여래인데 감로왕탱의 제일 윗부분
에는 극락의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 중생을 맞이 하러 오는 장면을 그리고
있으며, 그림 오른쪽에는인로왕, 즉 지옥중생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맞아 가
는 보살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랫 부분의 그림에는 이 아귀
지옥뿐만 아니라 갖가지 지옥이나 현실의 여러가지 고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감로왕 그림은 우란분경과 목련경의 사상을 주로 하여여기에 극락왕생
사상이 덧붙여진, 말하자면 지옥에서 벗어나 극락에 왕생하기 위한
바램에서 그려지 그림이라 하겠다. }}
은해사 감로왕도 (銀海寺甘露王圖)
1762년(영조38)작으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였다. {우란분경}(盂蘭盆經) {{ )
우란분경의 우란분은 산스크리트 말로 '거꾸로 매달다'의 뜻이다. 즉 죽은
이가 손발을 묶여 꺼꾸로매어달리는 고통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부처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가 깨달음을 얻은 후, 살펴보니 자기의 돌아
가신 어머니께서 아귀도에 빠져 먹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라, 밥그
릇에 음식을 담아 공양하였더니 음식은 모두 불꽃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를
슬퍼한 목련이 부처님에게 사정하니 이에 부처님이 7월 15일인 참회의 날에
과거 . 현재의 돌아간 부모를 위하여 시방의 부처님과 스님에게 온갖 음식
을 공양하면 소원이 성취되고 돌아간 어머니는 하늘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
이라고 그 방법을 일러주게 되는 것이다. }}의 내용을 도해(圖解)한 것으로
윗부분에는 극락의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중생을 맞이하러 오는 장면, 중
앙에는 2구의 아귀(餓鬼), 그리고 그 좌우와 아래에는 아귀지옥을 비롯하여
갖가지 지옥과 현실의 여러가지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상부에는 아미타
여래와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여섯 여래와지장보살이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내영한 모습과 이들을 정토로
인도하기 위한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및 수레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 주
위로 오색이 찬란한 애운이 둘러 싸여 있어 천상세계와 지옥세계를 구분
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감로왕도에서 중앙에 표현되는 성반의식(盛飯儀式)
{{ ) 음식을 올리는 의식으로 우란분경에서
7월 15일에 승려 및 시방제불(十方諸佛)에게 백미(白米)를 올려 발원한다고
하는 것을 도상화한 것이다.}}은 생략되었으며 2구의 아귀가 특히 강조되어
커다랗게 묘사되었고 그 주위로는 지옥의 고통스런 장면과 현계의 여러
상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각 장면 사이에는 구름과 암산을 표현하여 각 장면을 구분하고 있
다. 또 장면마다에는 적지묵서(赤地墨書)로 각 장면을 설명하는 문구를 써
놓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화면 아래 나무 밑에 그려
진 호랑이 그림으로
서 그 모습이 조선 후기 회화나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전통적인 한국산 호
랑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이러한 점은 불화의 도상이 다분
히 한국적 성격을 띠고 전개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동시에, 풍속화적인 면
이 특히 두드러진 감로왕도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해주고 있다. 중앙의 아
귀를 특히 강조한 특이한 화면구성을 하고 있으며 짙고 탁한 색채라든지
비수없는 일률적인 필선 등은 18세개 후기 불화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
다.
③ 대웅전 산신도
산신도(山神圖)
{{) 산신은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우리 민족의 토속 신앙이다. 그러나 불교
전래 이후 불교에서는 이들 산신은 호법선신으로 포용하여 사원내 산신
각을 짓고 산신탱화를 봉안하게 되었다. }}는 호랑이의 화신신(化身神)인
신선을 큼직하게 그리고,진짜 호랑이는 신선앞에 정답게 애교까지 떠는 모
습을 그린 형식을 보여준다.깊은산 그윽한 골짜기에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
을 배경으로 기암괴석 위에 신선을 그렸는데 옆에는 동자를 배치하였다.
소나무 아래 호랑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신선은 상투꽂이를 꽂고 흑
망사 망건을 썼으며 적색의 장삼을 입었는데 끝단을 화문(花紋)으로 장식
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모습이 아니라 검은 수염이 난 모습으로 그렸
다. 호랑이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애교있는 모습이다. 신선 등뒤로 동
자가 연꽃같은 지물을 쥐고 있고 또 한 동자는 신선의 가슴에 안기어
있는데 어색해 보인다.
이 산신도는 호랑이와 신선 그리고 동장가 직립하고 있는 일반적인 형
식을 보여주고 탁한 적색과 갈색, 회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여 어두워
보인다. 화기에 의하면 건양(建陽)2년(1897)에 금어(金魚) 영운(永雲)등 4인
의 승려가 그린 것이다.
④ 심검당(尋劍堂)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아미타내영도는 염불왕생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즉 극락왕
생하려면 념불을 잘 생해야하고 잘 행한 사람은 죽을 때나 수행이 성숙해
지면 아미타불이 마중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모
습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 아미타내영도이다.
이 내영도는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무리들을 용선에 태워 관음보살과 대
세지보살이 극락으로 인도해 가는 모습을 그린 형식이다. 상단과 하단의 2
단 구도로 매우 복잡하고 화려한 구도로 상단은 극락의 궁전을, 하단에
는 연화지(蓮華池)를 나타내고 있다.
상단은 극락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림의 중심부에는 극락
의 2층 궁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미타삼존불이 원광안에 있으며 왼쪽에는
제자 아라한 보살 등의 성중(聖衆)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앞에는 난간
이 그려지고 있다. 주위는 온통 오색 구름이 뒤덮인 하늘이며 공작새와
학 가릉빈가(迦陵頻伽) {{ ) 고대 인도의 음악의 신으로 몸은 새, 얼굴은 인
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등의 새들이 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하단 즉 난간 앞에는 극락의 보배로 된 못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연꽃
이 피어 있다. 연꽃속에는 연화생보살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모두 아미타
9품인의 수인을 취하고 연꽃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에는 왕생자들이 용선을 타고 있는데, 앞에는 관음보살이 뒤에는 대세지보
살이 서서히 연화장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불화는 정토경전에 묘사된 극락의 모습을 웅장, 화려하게 재현하려
고 했고 여기에 염불 왕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덧붙여 묘사한 내영도로서 다
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상을 보여준다. 화기는 건륭15년(1750)이
라는 연대만 남겨 두고 잘려져 나가 화사(畵師)등을 알 수 없지만 탁한
녹색과 적색에 황색과 옅은 하늘색 등을 써서 웅장한 극락세계를 나타내려
고 했다.
⑤ 심검당 아미타불화
은해사에는 흑색바탕에 금은선으로 그린 불화 2점이 있는데, 설법인
(說法印)을 취한 것은 아미타불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구도를 위
하여 고행한 석가는 고행이 구도에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하산하
여 니련선하에서 목욕하고 여인에게 우유를 얻어 마시고 요기를 한다음 보
리수 밑에서 정관에 들어 간다. 이때에 수많은 악마들이 석존의 깨달음
을 위한 수도를 방해하므로 이를 물리치려 한 상을 조각한 것이 항마상이
다.}}을 취한 것은 석가불로 보인다. 아미타불화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2
보살, 아난및 가섭존자 등으로 구성된 간략한 구도를 보여준다.
본존은 2중륜광(二重輪光)을 지고 있는데 원만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작게 묘사했는데 입술에는 주색을 칠했다. 두부(頭部)는 윤곽선만 표시된
나발(螺髮)머리 {{ )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소라 껍질 모양처럼 생겨서 [소
라나자]를 써서 나발이라 한다.}}에 높은 육계를 얹었으며 반달모양의 중
앙계주와 보주형 정상계주를 묘사했으며 역시 주색을 칠했다. 통견의 불
의(佛衣)에 원문이 옷끝단에는 화문으로 장식했고 발목에는 풀잎같은 모양
의 치견(侈絹)을 장식하였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앞에서, 왼손은 무릎위
에서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좌우에는 2중륜광을 지고 반가좌
한 자세를 취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각각 연꽃과 여의(如意)를 들고
시립(侍立)하고 있다. 불의는 가는 선을 여러번 그어 승각기 장식이나 옷
끝단을 표시하였다.
본존 두광 좌우로 아난과 가섭존자가 합장한 자세로 시립하고 있고 그
밖에 공간을 서운(瑞雲)으로 처리하였다. 이 불화는 흑색 바탕에 금은니선
으로 그렸는데 얼굴과 가슴, 손, 발은 육색(肉色)으로 입술과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는 주색으로 칠했다. 화기에 의하면 함풍 5년(1855)에 제작된 것
으로 화사비구(畵事比丘)와 하은당 응상(霞隱堂應相) 등 2인의 승려가 그린
것이다.
⑥ 심검당 석가모니불화
이 석가불화는 흑색 바탕에 금은니선으로 그린 것으로 심검당에 현괘
(懸掛)된
아미타불화와 짝을 이루고 있는데 현재 따로 보관하고 있다.
석가불화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4대 보살, 십대 제자, 사천왕이 에워싼
구도를
이루고 있는데 아미타불화보다는 협시들이 좀 더 많다.
본존은 2중거신광(二重擧身光) 광배 {{) 원래 각자, 즉 깨달은 자들은
몸에서 빛이 나는데 이를 [紫金身光]이라고 한다. 불상을 제작할 때 이것을
광배라는 것으로 표현 했는데 머리에만 그런 모양을 표시한 것을 두광(頭
光), 몸부분은 신광(身光)이라 하고 몸전체를 광배로 표현한 것을 거신광이
라 한다.}}
를 지고 원만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작게 묘사했는데 입술은 주색을 칠했
다. 두부는 윤곽선만 표시된 나발머리에 육계 {{ ) 부처님 머리위에 볼록
튀어 나온 혹같이 생긴 것을 말하며 지혜를 상징하는 의미로 표현 된다.
}}를 얹었는데 중앙계주와 정상계주에도 역시 주색을 칠했다. 우견편단의
불의로 원문(圓文)과 화문(花文)을 장식하였고 발목에는 풀잎모양의 치견
(侈絹)이 장식되어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좌우에는 반가좌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 )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등
이 자비의 보살이라면 문수보살은 지혜의 보살이고 보현보살은 특현에
대한 보현을 나타내는 대행 보살이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지물로 경전을
손에 쥐기도 한다. 그리고 주로 문수는 사자를 보현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이 2중윤광을 지고 있고 각각 연꽃가지와 여의를 들고 있다. 본존 두광
좌우로 2보살이 합장을 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시선은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 그 옆으로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과 보검을 든 지국천왕이 각
각 호위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십대제자상을 배치하고 있다. 모두 자
유스런 동작과 표정을 짓고 합장을하는 등 활달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불화는 심검당에 현괘된 아미타불화와 같은 밑본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광배나 우견편단의 불의, 10대제자상 등의 협시 인물들을 더 배
치시켜 복잡한 구도를 이루고 있는 점만 다르다. 함풍(咸豊) 5년 (1855)에
제작되어 심검당에 아미타불화와 함께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동화사(桐華寺)'
동화사는 팔공산에서 은해사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신라 고찰이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신라의 승(
僧) 진홍(眞弘)이 석장(錫仗:쇠지팡이)을 허공에 날려 석장이 이곳에 떨어
지므로 드디어 이 절을 짓고 거처하였다고 한다. 땅 생김새가 좌우 산맥이
모여 들었고, 가람이 굉장히 커서 엣날부터 명승으로 수행하는 자가 많았다
"고 하고 있음을 볼 때 옛부터 상당한 명찰(名刹)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화사의 창건자는 신러 헌덕왕(憲德王:809-825)의 아들인 심지(心地)대
사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말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숙부인 흥덕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던 심지는 정치에 회의를 품고 인생무상을 느끼며 출가했따. 그는 중
악, 지금의 팔공산에서 살다가 속리산의 영심율사(永深律師)가 그의 스승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물려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가지고 과증(果
證)범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참예하러 갔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법당에 올라가 참예할 수 없었다. 찬 겨울에 7일 동안 땅에 자리를 깔고 참
예하던 중에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다.
하지만 심지가 앉아 있는 둘레 10자쯤만 눈이 내리지 않음으로 모두들 신
기하게 여기고 법당으로 안내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핑계하고 사양하여
방안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법당을 향하여 가만히 참예하였는데 이때 팔뚝과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이는 진표가 선계산(仙溪山)에서 있었던 일과
같았다.
당시 심지에게는 지장보살이 날마다 내려와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열심히 수도하여 정식으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심으로부터 진
표 전래의 8간자를 전수받았다. 법회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함속에 쇠를 채
워 둔 볼골간자 중의 두개가 자꾸만 그의 옷자락 속에 묻어 따라왔기 때문
에 두번씩이나 되돌려 주러 가서 결국은 모두 받아 왔다는 것이다. 이를 전
수받았다고 하는 것은 곧 진표율종(眞表律宗)의 종통(宗統)을 이어 받았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 뜻을 신라 영토내에 펼치기 위해 그의 수봉지였
을 팔공산에 크게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막혔떤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간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라네."
그 때 간자가 떨어진 곳이 첨당(籤堂) 북쪽 우물이라 하였는데, 첨당은
곧 동화사의 원터가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동화사는 이 간자를 봉안하여
신라 불교의 일급 보물로 삼아 받들었으며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중심지의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다.
동화사의 창건연대는 832년(흥덕왕, 7년)으로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대가람으로 성장하여 금산사(金山寺).법주사(法住寺)와 함께 우리나라 법상
종(法相宗)의 3대 사찰이 되었다. 법상종에서는 미륵불을 본존으로 받드는
데, 다른 사찰들과 달리 동화사만은 현재 미륵불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약사대불이 최근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동화사의 옛 전통과 역사가
단절되어 버렸음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라고 하겠다.
동화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명찰이기에 숱한 풍상도 겪었다. 고려때인
1202년(신종 5년)에 경주 벌초군의 반란에 동화사 승려들이 가담하여 정부
의 토벌을 받게되는 시련을 겼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는 동화사
에 "영남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조련하고 지휘하였는데, 봉서
루(鳳棲樓) 뒷편에 있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은 당시
이곳이 승군의 총지휘소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대구 역사 기행 ... 향토사 교육 연구회
도서출판 나랏말]중에서
[부연설명]
동화사의 창간 연대...동화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조
선사찰사료](상)에서는 신라 때인 493년(소지왕 15년)에 승 보조(普照)가
처음 창건하고, 782년(혜공왕 2년)에 승 심지가 재창했다고 한다. [동화사
사적기]에는 동화사 창건을 493년(소지왕 15년)에 극달화상(극달화상)이 창
건하여 유가사라 했고, 832년(흥덕왕 7년)에 심지가 중창하여 동화사라고
했다고 한다. [최완수, 1994 [명찰순례] 1, 대원사, p346]에서는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문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동화사 당간지주 桐華寺 幢竿支株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소재 동화사 입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당간지
주.
높이 3.1m,너비 0.76 X 0.34m. 보물 제254호.
두개의 화강암석주가 0.66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새김장식이 없으며 바깥면에는 모를 깎고 중심에 세로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앞뒷면은 역시 모를 죽였을 뿐 아무 새김장식이 없고
꼭대기는 위로는 뾰족하고 앞뒤로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었다. 지주의 중심
부는 안쪽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에 1m 정도를 살짝 음각하였는데,이
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수법이다. 지주의 위와 아
래에는 두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의 것은 네모꼴이고 지면 가까이에
는 둥근모양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댓돌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둥준함이 엿보이고 있어 제작시기는 신라말
기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사 창건시기가 832년(흥덕왕7)왕사(王師)심지(心
地)에 의한 것임을 참작하면 이 당간지주의 조성연대도 이 때와 부합된다
고 하겠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소재 동화사 비로암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
탑. 높이 3.71m. 보물 제 247호. 이 석탑은 비로암의 주전(主殿)인 대적광
전 앞뜰에 있는 것으로 나직한 토단 위에 2층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
의 탑신이 올려진 일반형 석탑이다. 석탑의 구조를 보면 방형의 하층기단
은 4개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은 한개의 돌에 지대석과 기단중
석 및 탱주(撑柱).우주(隅柱)를 각출하였다. 갑석(甲石)은 네모로 된 4개의
판석을 붙여서 덮었음며 윗면은 중앙의 굄돌 아래.위에 굴곡을 만들어 마
치 별개의 판석을 끼운듯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상층기단부는 중석을 4매
의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를 각출하였다.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덮고 윗면은 하층기단과 같은 형식으로 굄을 심한 굴곡으
로 각조하고 탑신을 받게 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屋蓋)와 옥신(屋身)을
별개석으로 각조하였다.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를 각출하고 위로 올라가
면서 약간의 체감을 나타내었다. 옥개는 상면 중앙에 굄을 각출하고 추녀
는 전각(轉角)까지 직선을 이루게 하였으며,하면은 4단의 받침을 각조하고
옥리(屋裏)에 가는 홈을 파서 돌렸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磐).복발
(覆鉢).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볼때 탑의 규모는 작으나, 각
부의 비례가 신라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초층 탑신 아래와 하층기단의 갑석에 별개의 돌을 삽입하듯이 조각
한 수법은 특이한 양식으로서 신라 하대에 나타나는 석탑양식이다. 이 석
탑은 1966년 사리구(舍利具)를 도난 당한 바 있었으나 요행히 중요유물만
은 수습되고 사리석호(舍利石壺)에 명문이 있어서 이 석탑이 863년(경문
왕 3) 민애왕의 원당(願堂)에 건립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1967년 도굴
행위로 상층기단 일부와 탑신부에 이상이 있어서 해체복원 공사가 있었
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桐華寺 毘盧庵 石造毘盧舍那佛坐像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소재 동화사 비로암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
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 293.6m. 보물 제244호.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
하여 그와 사촌간인 왕사 심지(心地)가 863년 (경문왕3) 비로암의 창건과
동시에 봉안한 불상이다. 호분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중후하면서도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둥근 얼굴,
바로 뜬 눈,평범한 작은 코와 입, 단순하고 간명한 귀등 단정한 상호(相
好)를 이루고 있어서, 마치 고요한 선(禪)의 세계에 빠진 선사(禪師)의 모
습을 보는 듯하다. 얼굴의 특징은 신체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는데 좁아
진 어깨와 양감(量感)없는 단정한 체구,지권인(智拳印)을 짓는 두 손의 안
정된 자세 등은 생동감이나 긴장감 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불의(佛
衣)는 통견(通肩)으로,얇게 빚은 듯한 평행의 옷주름이 신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특히,팔이나 앞섶에는 섬세하고 규칙적인 옷주름이 평면적으
로 묘사되어 다소 형식화되고 추상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길상좌(吉
祥坐)를 한 다리와 무릎을 감싸고 흘러내린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
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통견의 대의(大衣) 안에는 내
의를 입었고,지권인을 결한 왼손 바로 아래에는 내의를 묶은 띠매듭이 표
현되었는데,이러한 착의법은 축서사석조비로사나불좌상 이나 무봉사석조
여래좌상(보물 제493호)등 9세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광배
는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로서 8세기 광배양식과 유사하면서도 훨씬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즉,거신광배에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
여,화려한 보상(寶相).당초문(唐草文).연꽃무늬등을 가득 배열하고,두광.신
광의 선을 따라 구름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화불(化佛) 8구를 배열하
였다. 또한, 두광.신광의 바깥에는 불꽃무늬를 묘사하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형태의 화불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광배는 특히 9세기에 유
행한 것이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유행한 8각삼단대좌(八角三段
臺座)인데,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거의 원통형에 가
까운 8각의 중대에는 구름무늬와 괴수문(怪獸紋)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섬려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상대의 꽃무늬는 8
세기의 연꽃과는 다른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며,중대의 안상(眼象)에 부조
된 상 역시 형태와 선에서 섬세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불상과 관련
된 사실이 비로암 석탑조성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신라 하대 조각
양식 편년에 절대적인 자료가 되는 귀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구의 문화유산...소나무숲에 자리한 송림사(松林寺)]
'송림사(松林寺)'
소재지 : 칠곡군 동명면 구덕동 92-1번지
송림사는 팔공산 자락인 가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적구역상으로
는 경북 칠곡군 동명면에 해당한다. 그러나 팔공산 순환도로와 연결되어 있
고, 대구시내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대구시민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휴식처로 알려져 있다.
송림사의 창건시기는 신라시대인 544년(진흥왕 5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이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
해 창건한 사찰이다. 그 때 이 절에 호국안민을 위한 탑도 함께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092년(선종 9년)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했고, 1235년(고종
22년) 몽고의 침입에 의해 폐허화 되었다. 다시 중건된 절은 조선 중기
1597년(선조 30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858년(철종
9년) 영추(永樞)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는
[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와 그 부록이 경판으로 소장되어 있다.
1. 송림사 5층전탑 (보물 제189호)
송림사 5층전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7기의 전탑 중 규모가 크면서도
균형미가 뛰어난 가장 아름다운 전탑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전탑은 1959년
4월에 해체수리 때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는데, 이 유물들은
따로 보물 325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국립대구박
물관이 개관되면서 그곳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유물들은 탑신에서 나왔는데, 1층 탑신에서는 목불 2점과 석불 1점.청동
연화대 등이 나왔고, 2층 탑신에서는 중앙에 녹색 유리잔을 안치하고 그 안
에 녹색의 유리사리병이 놓여 있는 금동전각형사리기(金銅殿閣形舍利器, 높
이 14.2cm)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라시대의 유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사리기 옆에 금은제수형장식구(金銀製樹形裝飾具, 높이 18cm)가 세워져 있
었는데, 이 유물들은 채색된 돌거북 속에 넣어져 있었다. 3층에서는 나무뚜
껑을 덮었던 돌궤가 있었으나 그 속에는 부식된 종이만 있었다고 한다. 그
리고 옥개석 위의 복발에서도 청자상감원형(靑磁象嵌圓形)과 금동원륜(金銅
圓輪)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이 중 가작 주목되는 것은 2층에서 나온 전각형사리기로서 사리장식과
마개등이 약간 황색을 띤 투명체이고 유리제품은 모두 녹색으로서 사리장엄
구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이들 유물 이외에도 탑에서는 구슬 281개.은환(銀
環) 15개.향목(香木) 7편.열매 1개가 동시에 발견되었다.
전탑의 규모는 높이 16.13m, 기단 폭 7.3m로 기단부는 화강암 장판석과
얕은 토축으로 만들었다. 기단 위의중앙에는 화강암으로 1단의 탑신 받침을
만들었다. 탑신부는 방형과 장방형의 두가지 종류의 벽돌을 이용하여 균형
있게 축조하였는데,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층을 이루는 단의 숫자가 줄어 들
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상륜부에는 동판(銅板)으로 싼 나무기둥을 찰주(擦
柱)로 세웠으며, 여기에 동(銅)으로 만든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
輪).용차(龍車).보주(寶珠)를 끼웠으며, 보륜의 일부와 수연(水烟)은 없어
진 듯 하다. 5층의 옥개석 위에 있는 노반(露盤)의 네 모퉁이에는 풍경이
달려 있는 동판을 얹어 갑석을 대신하고 있다. 상륜부의 총 높이는 4.51m로
상륜부의 복발 안에서 상감청자합(象嵌靑瓷盒)이 나왔고, 합 속에는 향목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탑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벽돌의 형태 및 재료등으로 보아 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신라시대 금동상륜부의 형태가 지금까지 남
아 있어 주목할 만 하다. 그리고 상륜부에서 나온 유물들로 보아 고려시대
와 조선시대에 들어와 보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은 임란중에
피해를 입어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1959년과 1961년에 수리되었다.
2. 송림사 대웅전 삼존불상(大雄殿 三尊佛像)
나무로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대웅전의 편액은 숙종의 어필
(御筆)로 추정된다.
3. 칠곡 기성동 3층석탑 (보물 제510호)
송림사에서 가산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팔공산 순환도로 못미쳐 오른쪽의
논밭 가운데 서 있다. 계곡 옆의 넓지 않은 대지에 남아 있는 탑으로 주변
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축대.초석등이 나왔다. 이 칠곡 기성동 3층석탑은 법
성탑(法聖塔)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당시의 절 이름과 관련있는 듯 하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방형의 3층 탑신을 올린 것으로, 체감율은 신라
시대 석탑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층기단은 8개의 석재로 이루어
졌고, 각면에는 우주를 모각하지 않고 커다란 안상 한개씩을 얕게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갑석은 윗부분에 2단의 각형 굄을 마련하였고 아래에는 부연을
새겼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탑신석을 별개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아래
에 5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위에는 2단의 굄을 만들었다. 탑신석은 우주를
모각하고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부의 면석에 우주를 모각하지 않고 큼직한 안상(眼
象)을 새긴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비록 화려하거나
웅장한 것은 아니지만 온화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탑이다. 1971년에 무너
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대구 역사 기행 ... 향토사교육연구회
도서출판 나랏말]중에서...
군위 삼존석굴 ( 軍威 三尊石窟 )
국보 제 109 호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통일신라 7세기 후반
자연굴의 구석 벽면에 화염 광배를 조각하고
삼존상은 굴의 암석과는 석질이 달라서
따로 만들어 안치한 듯하다.
굴 내 구석에는 본존을 위한 방형 대좌가 놓이고
본존은 좌상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크고 삼도가 희미 하게
나타나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 通肩)에 의단( 衣端)이
대좌를 완전히 덮었고 그위에 좌우대칭의 고식
의문이 나 있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왼손은
무릎위에 놓았다.
양 협시상은 입상이고 조각양식은 거의 동일하다.
머리에 쓴 3면보관중 좌협시에는 보병(寶甁)이,
우협시에는 화불(化佛)이 조각되었고
좌협시는 다시 늘어뜨린 좌수로 정병( 淨甁)을
잡고 있다.
우협시에는 없어졌지만 좌협시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있어 귀중하다.
이 석굴은 한국의 석굴사원 가운데서 자연암벽을
이용한 유일한 예인 점에서 매우 귀중하다.
협시보살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인 점에서
이 삼존상은 아미타(阿彌陀)삼존임이 분명한데,
본존의 수인(手印)이 항마촉지인인 점에서
아미타여래의 이례적인 수인으로 지적된다.
삼국기 불상양식을 보이면서도 통일시대 양식이
뚜렷한 불상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
보물 제 431 호 경산군 와촌면
통일신라 9세기초
관봉(冠峰)정상에 1석으로 된 석불을 안치 하였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큰편이고 존용(尊容)은
근엄 장중하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뚜렸하고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 이다.
의문은 음각선을 이용하였는데 가슴에 엄액의와
군의의 매듭이 보이고 의문선은 팔과 무릎이
평행해서 밑으로 늘어져 상현좌의 흔적을 남겼다.
머리 위에는 판석이 얹혀져 있으나 고려시대에
첨가한 듯하며 이 암산을 "갓 바위"라고
부르는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석질이 치밀한 탓인지 안면의 각선은 잘 남아 있어서
자비(慈悲)의 표출이 뚜렸하나 불신의 의문 처리는
퇴화된 자취가 역력하다.
제작연대는 800년을 약간 넘은 시기로 추정된다.
대구.경북에 소재한 박물관
대구에는 1994년 11월에 개관된 국립대구박물관을 비롯하여 경북 대학교
.계명대학교.대구교육대학교 및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대구효성가톨릭대학
교 등 각 대학에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고, 특수 박물관으로 한국무속박물관
(옛 건들바우 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유물전시관으로서는 약령시 전시관.
냉천 농경민속자료관.천주교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등이 있다.
1) 국립대구박물관 ... 소재지 : 수성구 황금동 산 41번지
국립대구박물관은 1989년부터 설립이 추진되어 1994년 11월에 개관되었
다. 경북고등학교 맞은 편의 수성구 범어공원 지구에 대지면적 30,581평.연
건평 3,048평에 3개의 상설 전시실(고고실.미술실.민속실)과 기획전시실.강
당.세미나실.보존과학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대구.경북지방을 중심
으로 한 영남권의 유물 1,3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관인 고고실에는 대구의 비산동과 내당동등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 450여 점을 집중 전시하고 있고, 미술실에는 특별 기획전시물로 불교
관계 유물 등과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 의병장들의 유품들을 따로 전시하
고 있다. 여기에는 망우당 곽재우와 최진립(崔震立,1568∼1636).최문병(崔
文炳,1557∼1599).김승일 등 상주.안동.예천등 경북 13개 지역에 흩어져 있
는 의병장들의 유품들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대구박물관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시실의 하나가 민속박물관식의 모형전시
가 이루어지고 있는 제3전시관인 민속실이다. 전국 9개 국립박물관중에서
전주박물관에 이어 두번째로 마련된 이곳에는 영남지방의 선비문화와 주거
문화, 그리고 민속놀이.신앙 등을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하여 이 지역의 의
식과 생활사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따. 전시유물 도록으로
발간된 【국립대구박물관:1994,통천문화사】에는 전시된 우물 가운데 선정
된 500여점의 사진 도판을 싣고 있다.
☞ 주요소장품
(1) 석보상절 권11(釋譜詳節 券十一) : 보물 제523호
(2) 월인석보 권21(月印釋譜 券二十一): 보물 제745호
(3) 탁영종택문적(濯纓宗宅文籍) : 대구 유형문화재 제27호
: 소재지-남구 봉덕3동 1329-2
(4) 탁영(濯纓)거문고 : 보물 제957호
(5) 신해생갑회지도(辛亥生甲會之圖) : 모불 제1045호
2) 경북대학교 박물관 ... 소재지 : 북구 산격동 1370번지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1959년 5월에 개관하였다. 이보다 앞서 그 해 2월에
구 대구시립박물관 소장품의 관리를 위탁받은 바 있다. 처음에는 도서관
3층에서 개관하였다가 옛 도서관 건물을 인수받아 1986년 5월 개교 제40주
년 기념으로 총 6개의 진열실로 확장하였다. 야외박물관(월파원)을 포함한
부지면적이 4,840평, 건물의 연면적이 1,600평에 이른다. 1층에는 사무실과
작업실.창고등이 있고, 진열실은 1층에서 3층에 걸쳐 주로 시대별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정원에는 석탐.석불.부도등의 석조물이 진열되어 있
다.
박물관의 소장 유물은 보물 7점과 함께 토기나 도자기류가 3,319점.금속
류가 1,727점.옥석류가 444점.서화류가 200점.목죽류가 702점.피혁지류가
401점.고대 의상이 39점.기타가 8점으로 합계 6,840점의 우물과 3,612권으
도서를 갖추고 있다.
☞ 주요소장품
(1) 석조부도(石造浮屠) :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 : 보물 제135호
(2) 〃 〃 : 보물 제258호
(3) 마지은니수능엄경 권10(麻紙銀泥首楞嚴經 券一十): 보물 제271호
▶ 10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말 1356년(공민왕 5)에 이방한이
죽은 어머니 이씨의 명복을 빌가 위해 만든 명복경(冥福經)이다.
(4) 분청사기연화문편호(紛靑砂器連花紋扁壺) : 보물 제268호
(5) 석조여래좌상 :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보물 제335호
3) 영남대학교 박물관 ... 소재지 : 경산시 압량면 대동
영남대학교 박물관은 1968년 5월 개교와 동시에 대구 대명동에서 창립되
어 청구대학 부설 신라가야문화연구소의 수장품을 인수하여 대명동교사(校
舍)에서 개관하였고, 그해 가을 150여평의 전시실을 마련하였다가 1972년
7월 학교의 이전과 함께 경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박물관의 수장품은
1989년 11월 현재 1만2천여점으로, 낙동각유역 문화권에 속하는 유산과 자
료를 중점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4) 계명대학교 박물관 ... 소재지 : 남구 대명동 2139번지
계명대학교 박물관은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 및 민중생활의 연구'에 목
표를 두고 1978년 5월에 개관하였다. 소장유물은 토기류 1,360점을 비롯해
무기류 200여점.마구류(馬具類) 80여점. 장신구류가 50여점에 이른다. 이들
유물들과 성주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박물관 제1전시실에 주로 전시되고 있
다. 제2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토기조각,
석기.청동기류와 중국 전국시대와 낙랑의 유물들이 비교 전시되고 있다.
5) 대구대학교 박물관 ... 소재지 : 경산시 진량면 본관 10-14층
대구대학교 박물관은 1981년 5월에 개관하여 고고학.역사학.민속학.인류
학에 관한 문화유산을 수집.보관.전시하고 있으며, 소장품은 모두 3,000여
점에 이른다. 현재 박물관의 소장품은 석기류와 선사금속유물 120여점, 토
기류 285점, 금속제품 및 옥(玉)류 121점, 서화류 290여저므 고려도자 40여
점, 조선도자 90여점, 외국유물 20여점등 총 2,300여점에 이른다.
6)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박물관
소재지 : 경산시 하양읍 금락1리 330번지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박물관은 국내외 역사,고고,예술,민속과 인류학 분
야의 자료, 특히 가톨릭.한국여성사.신라 가야문화의 자료를 수집.보관.전
시하고 있다. 현재 소장유물은 2,600점에 이르고 있는데, 그 중 고고자료가
1,200여점, 미술자료 500여점, 민속자료 500여점, 기타 400여점에 달한다.
7) 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 ... 소재지 : 남구 대명2동 797-6번지
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은 1975년 9월 고고유물실로 출발하여 이듬해인
1976년 3월 정식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현재 소장유물은 2,000여점에 이
른다.
8) 한국무속박물관 ... 소재지 : 중구 대봉2동 733-4번지
한국무속박물관은 한국의 민속 종교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전문
박물관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1992년 12월 21일 문화체육부에 등
록되었다.
제1전시관...가정 및 마을신앙과 무속신앙의 전반적인 생활사에 관한 자
료전시
제2전시관...재액을 막는데 사용했다고 하는 각종 부적과 인간의 미래를
예견해 보는 점책.점통등과 함께 민간 치료요법에서 사용한
주술적인 행위를 재현
9) 약령시 전시관 ... 소재지 : 중구 남성로 52-1번지
대구 기독교 청년회에서 금호호텔 앞까지를 잇는 4백여m의 긴 골목은 언
제나 한약재 향기로 가득하다.
약령시의 기원은 1630년(인조 8)에서 1657년(효종 8)사이로 거슬러 올라
간다. 향토사학자들은 당시 경상감사 임의백이 조정에 진상할 약재를 구하
고 일본과의 약재무역을 위해 경상감영 주변에서 해마다 2월과 10월에 약령
시를 연 데서 비롯.
10) 냉천농경민속자료관(冷泉農耕民俗資料館)
소재지 :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
냉천자연농원 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2동의 단층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은 옛 조상들의 농경생활에 사용된 물품들을 진열하여 산업사회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농민들과 선조들의 지혀로왔던 생활상을 알 수 있
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