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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기미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제국으로부터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민족의 독립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대한 독립’을 외쳤지만 일제의 총칼 앞에 무참히 저지 당했습니다. 이 독립운동은 지도자들의 임시정부 설립의 동기가 되고, 백성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국내와 해외에 무장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삼일 독립운동의 100주년의 시초부터 한국과 일본의 긴장이 예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본 초계기에 한국의 함대에서 레이다를 정조준 했다는 시비 때문에 긴장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소원은 빼앗긴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차 세계 대전 후에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은 한 맺힌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대국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갈라진 남북한은 65년이 되어갑니다. 우리의 소원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통일’ 분단된 조국이 하나가 되는 통일입니다.
북한의 실권을 잡은 김정은 정권이 모든 것은 내려놓은 결단과 남한 정부의 포용 혹은 빅딜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계획하고 추진할지도 역사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하는 기원입니다. 기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소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향하여 품고 있는 소원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여기서 바울의 기원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되지 않을 ‘성도의 거룩’입니다. 왜 성도가 거룩해야 하느냐 하면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레 11:45). 성도는 몸을 거룩하게, 마음을 거룩하게, 삶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는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라”고 권면하였다(엡4:13).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흠 없이 보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원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악한 세상 가운데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온전하심 같이 흠없이 온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면서 24절에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거룩과 온전함을 소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이루어 주실 분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에 대한 소원이 있고, 이 소원을 이루어주실 분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 대한 소원을 기도하고 이루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평강의 하나님
23절을 다시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에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애써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이번 시험에는 60점 이상을 얻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는 60점 이하인 사람은 60점에서 5점이 모잘 때마다 빳다 1대씩 맞는다고 엄포를 내립니다.
또 다른 선생님은 지난 번 성적보다 20점 이상을 얻는 학생이 있으면 내가 소보로 빵 하나를 쏜다고 약속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느 선생님의 과목에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까? 빳다가 무서워서 공부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달콤한 소보로 빵 하나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두 가지 다 포기했습니다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소보로 빵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더 많았습니다. 공포보다는 격려가, 두려움보다는 화목함이 더 선호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다고 믿고 기다린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심판주로 오신다고 했을 때에 여기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소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불안에 떠는 자도 없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목사님이 설교하니,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혹시 예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닐까? 혹 나는 예수님께 영접을 받지 못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재림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소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온전한 삶입니다. 불안과 공포 가운데 안전부절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온전을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며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는가? 영원히 낙오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와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과 온전함을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되게 해 주시리라는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두려움과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택한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살 찢고 피 쏟아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자, 제자들이 불안과 공포심에 사로 잡혀 있을 때에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인사가 무엇입니까? ‘샬롬’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자 많은 무리들이 배 불리 먹고, 병 고침을 받고, 죽은 자를 살릴 때에는 누구나 다 “할렐루야”하며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무슨 죽음이냐 하는 근심이 쌓였습니다. 불안해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4, 15, 16장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나 너희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 “보혜사가 오셔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보혜사가 누구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셔서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근심 가운데 있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요 14:27)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보내신 성령님이 내 속에 임하여 역사하시면 우리는 세상에서 주지 않는 평화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한 평강입니다.
호화 여객선이 항해 가운데 갑자기 풍랑을 만났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장의 어린 딸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는 무섭지 않니?'라고 이상히 여기며 묻자 선장의 어린 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울 게 없어요. 우리 아빠가 이 배를 운전하고 계시니까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운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단지, 비나 눈을 내리시며 이 세상의 태양이나 달을 운행하시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바로 당신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고통과 근심을 보고 내버려두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의 자녀된 자들의 고통을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성도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는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허덕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평강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꾸 내 힘과 재주, 내 경험과 지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돈벌이도 내 힘으로, 자식 키우는 데도 내 능력으로, 교회 봉사하는 데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힘 들고 힘 빠지고, 재미가 없고,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의 모든 행사에 주도권을 평강의 하나님께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왕좌를 하나님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인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길이라도 가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과 온전함으로 이끄시고, 우리에게 평강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19년도에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해주시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온전하라”[ 창세기 17:1]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에 온전해집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아이고 모세님, 우리가 당신을 쳐다 볼 수 없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주십시오. 우리가 도저히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하므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한 모세를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세를 통해서 느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평강이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나는 하나님의 반사체가 되어서 우리의 삶에 거룩함과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쁘신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 우리를 만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불러주신 평강의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입니까?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변치 않으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미쁘신데,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것처럼 자신의 미쁘심을 부인할 수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직하고 변함이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중국의 오지 선교사로 귀하게 쓰임 받은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오지로 선교를 가서 붙들었던 말씀이 바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였습니다.
영국 선교부에서 보내는 선교비가 끊어졌을 때에도 그는 거기서 그대로 근심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도움 없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리라는 자세로 중국 내륙에 들어가서 전도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남들처럼 가는 곳마다 땅을 사고 신학교를 세우고, 건물을 짓는 일을 하는 대신에 복음을 전하여 평신도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받은 성도를 세워서 가정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뿌린 복음의 씨앗은 중국이 공산화되어서 그 효력이 드러났습니다. 허드슨 데일러가 풀 타임 교역자들을 세우는 일에 했다면 중국 문화혁명 당시에 다 감옥에 가고, 죽음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 선교 본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도, 선교사와 관계가 끊어져도 신실하신 하나님 한 분을 붙들고 가정교회를 지키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 정부에는 공산당에 맞는 성경 번역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도적으로 복음과 교회에 적대적인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미쁘신 하나님을 붙든다면 복음은 더욱더 시너지 효과를 내며 중국을 복음화해 나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그 분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십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원이며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그 소원을 이루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일에 우리가 좀 달갑게,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동참하고 노력하면 어떻겠습니까? 마지 못해,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거룩과 온전함이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