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원하십니까, 퀘이드씨?” “당신과 마찬가지로, 기억하기를 원하오.” “왜죠?” “나 자신을 찾고 싶소.” “당신의 행위가 당신입니다. 인간은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정체성이 결정되지요.”
『퀘이드는 기억을 주입해주는 여행사 토탈 리콜사를 찾아가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이른 바 ‘최신식 자아여행’으로서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원하는 곳에 원하는 이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발작을 일으키고, 누군가 자신의 진짜 기억을 지우고 다른 사람을 입력시켰음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남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꿈속에서와 같이.
이로부터 퀘이드는 정체불명의 일당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애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화성을 지배하는 코하겐 일당과 빈민 조직 간의 내전에 휩싸인다. 알고 보니 과거에 자신은 화성의 정보기관에서 코하겐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 여자를 만나 자신이 악의 편에 가담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음을 고쳐먹어 코하겐을 처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빈민조직의 대장 쿠아토를 만나 ‘인간은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말을 듣고, 퀘이드는 코하겐 일당과 격전 끝에 발전기를 가동시켜 산소를 방출시킨다. 화성에 아름답고 푸른 하늘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사력을 다하던 퀘이드에게 주어진 답은 바로 이 말이었다. “사람은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정체성이 결정된다.” 아직도 사성계급의 폐해가 남아 있는 인도 땅에서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붓다는 설했다. “사람은 출생에 의해서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서 귀천이 결정된다.”
인간의 고귀함과 천박함을 결정짓는 것은 출생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이다. 고귀한 사람이 따로 있어서 고귀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이가 고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박한 자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천박한 행을 하는 자가 천박한 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종성種姓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찰나 생멸하고 있는 이 몸과 마음을 떠나서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의 나’는 없다. ‘결정되어 있는 나’가 없기 때문에 ‘나의 행위’에 따라서 ‘내’가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고정불변의 ‘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나의 행위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의 행위가 ‘나’이다. 보살행을 하다보면 보살이 된다. 인간에 합당한 행을 하다보면 인간이 된다. 짐승 같은 짓을 하다보면 짐승이 되는 것이다. 금생에서건 내생에서건.
그러므로 나는 내가 창조한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 주인 된 삶을 사는 이는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주위 조건을 탓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스스로 초래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다만 꾸준히 마음에 그리는 바를 이루어나갈 뿐이다. 일체 중생을 나와 한몸으로 생각하면서 더불어 생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변적인 것이다. 만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내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에게 어느 날 홀연히 ‘내가 바다에서 나와 바다로 돌아간다는데, 도대체 바다란 어떤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는 ‘바다를 확실히 알기 전에는 헤엄쳐 다니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어떨까? 허공을 나는 새가 ‘내가 허공에서 나와 허공으로 돌아간다는데, 도대체 허공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의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허공을 규명하기 전에는 날아다니지 않으리라’생각한다면 어떨까?
달마, 이 영화를 말한다
"나는 내가 창조합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 부처의 행! 그것은 머무르지 않는 삶이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더불어 생동하는 삶입니다." [행불송行佛頌]
<영화로 떠나는 불교여행-월호스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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