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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에 (한국 리서치라고 하는)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에서 ‘2022 종교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조사에 의하면 주요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를 100점 만점으로 조사한 결과, 개신교는 31.4점이 었습니다. 과락에 해당하는 점수입니다. 불교나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가 각각 47점, 45점인데 비하여, 개신교가 제일 낮았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개신교에 대한 호감도를 100점 만점에 25점 이하로, “매우 부정적”이라고 평가한 응답자가 전체의 49%에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50점 이상을 주어서 ‘약간 긍정적이다’ 혹은 ‘매우 긍정적이다’라고 하는 응답은 합해서 20%였고, 결국 국민들의 80%는 개신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에 속한 교인들에 대한 호감도, 성직자들에 대한 호감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인에 대한 호감도는 32.3점, 성직자에 대한 호감도는 33.1점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크리스챤이라면 왠지 호감이 가고 신뢰가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품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해야 할 일반 국민들 눈에는, 우리 기독교나 크리스챤에 대한 시선이 이렇게 안 좋다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가 외부의 시선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그저 우리만 복받고, 우리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잘못 믿어온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신교인들에 대한 이미지나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고,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이 교회나 혹은 교인들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존재와 내 삶의 근거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며 구원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나오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섬긴다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주일이면 우리 교회는 설립 40주년을 맞이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40년 전 우리교회가 처음 시작할 당시, 저는 27살, 갓 신학대학을 졸업한 청년이었습니다. 20여명의 교인들은 모두가 20대 청년으로서, 대부분이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이었고, 노유경 집사와 심현자 집사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돈도 없고, 경험도 없고,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힘쓰고, 이 땅의 낮은 자들을 섬기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서 주님께 인도하겠다고 하는 순진한 믿음뿐이었습니다.
교회가 모임을 시작하고 한 달 후에 교회 이름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교우들이 한 달 동안 기도하고 서로 생각한 이름을 발표하고 투표로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수의 교우들이 ‘늘푸른교회’를 선택하였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교회를 시작하는데, 언제나 그 푸르른 청년성을 유지하자고 다짐하는 의미와, 그리고 늘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의 이미지도 담고 있는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름을 누가 처음 제안하였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마 누가 지었는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실 것입니다. 누가 처음에 제안을 했든, 우리 교우들이 함께 한 달이라는 기간을 두고, 기도하고 뜻을 모아서 늘푸른교회라는 이름이 정해졌는데, 그렇다면 그 이름은 성령께서 주신 이름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참신하고 의미있는 이름을 생각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인데, 이 이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시면 저를 찾아 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우리교회가 설립 30주년에 30년 역사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하였는데, 그 이후, 지난 10년간의 우리교회 연보를 정리한 자료가 우리 교회 인터넷 카페에 실려 있습니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저 감사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늘푸른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것도 감사하고, 좋은 믿음의 형제들을 허락하신 것도 감사하고, 변함없이 40년을 함께 하신 것이 그저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리고 부족한 우리들을 통하여 많은 일들을 행하시고 영광받으시고 우리교회를 지키셔서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좋은 교회를 꿈꿉니다. 우리교회가 참 좋은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좋은 교회’를 꼽으라면 어떤 교회가 먼저 떠오르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다들 다른 교회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왜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좋다고 평가하는 그 기준은 과연 어떤 근거에서 온 것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교회는 좋은 교회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과연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이겠는가? 하나님은 무슨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평가하실 것인가? 우리는 오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진 게츠라고 하는 미국의 신학자는 <척도>라고 하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게츠 교수는 교회를 평가하는 척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평가할 때, 좋은 예배당 시설, 등록 교인 숫자, 편안하고 은혜로운 설교, 잘 짜여진 예배와 훈련 프로그램, 다양한 봉사 활동, 이런 것들을 척도로 삼아서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교회에서 점심에 제공되는 교회 밥이 얼마나 맛있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밥도 맛있어야 하고, 시설도 좋아야 하고, 설교도 은혜롭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있어야 합니다. 다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게츠 교수는 신약성경, 특히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 나타난 기준들은 이런 척도들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 여러 편지들이 있는데, 이 편지들 속에는, 사도 바울이 그 교회를 떠올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교회를 떠올리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내용은, 앞서 말한 그런 요소들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게츠 교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예로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의 수도로서 항구도시입니다. 중요한 국제 교역로 상에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 가운데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감사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해준 복음을 따라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교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 소문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온 희랍 반도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섬기는 세상 풍조 속에서, 그들은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을 잘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방에 널리 퍼져 나갔으니 그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지, 어떻게 복음이 그들의 삶을 구원하고 변화시켰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이 그것을 말해 주는데, 거기에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먼저 나 스스로가 잘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믿음을 나의 삶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호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의 성품은 어떤지, 나의 가정은 어떤지,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얼마나 남을 배려하며 섬기고 살아가는지, 내가 겪는 삶의 고난이나 아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말이 주는 울림보다 더 큰 것은 삶이 주는 울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들고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물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지만, 그 세 가지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치도 삼각형의 세 꼭지점과 같이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덕목들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칭찬하는 좋은 교회의 첫 번째 코드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역사’라고 하는 말은 ‘행위’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돈을 믿는 사람인지, 권력을 믿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지, 그 살아가는 삶이 그것을 드러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예수를 나의 구원자요 또한 나의 생명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삶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떠나있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맹목적 신앙이거나 아니면 그것은 신앙의 위선일 것입니다. 믿는 자라면 마땅히, 그 믿음이 그의 봉사와 헌신과 사랑의 삶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그 교회 교우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믿음이 교우들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또한 좋은 교회의 조건으로 바울은 ‘사랑의 수고’를 들고 있습니다.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릅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으로만 걱정하고,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수고하고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수고에 대한 댓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기를 때 온갖 수고를 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수고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수고이기 때문입니다. 수고를 하되 그것이 전혀 짐이 되지 않는 그런 수고,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수고를 하고 계십니까? 그저 염려하고 그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이웃들을 위하여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역사를 읽어보면서, 이렇게 40년을 지나오는 동안, 교우님들의 그 사랑의 수고가 역사 속에 배어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농촌교회와 미자립교회들을 찾아가 전도도 하고, 여러 기관들과 불우한 이웃들을 또한 물질로 섬기고, 찾아가 봉사도 했습니다. 성도들은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도 나누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역사 속에 교우들의 사랑의 수고가 아름답게 배어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도, 교회 사랑도, 이웃 사랑도, 우리의 수고가 함께 수반되어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의 수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었기에 바울은 이를 기억하며 하나님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타내 보여야 할 덕목은 인내입니다. 이것이 좋은 교회의 또 하나의 척도입니다. 소망하는 자가 인내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현실의 고통을 인내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포기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신앙의 삶에 있어서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데살로니가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은 단순히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소망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 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소망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고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스스로 주인이 되고 자기 마음의 욕심대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최고라 믿고,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려고 애를 씁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나만 세상의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나만 손해보고 사는 것은 아닌지, 때대로 흔들립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또한 세상에서 소외되고 혹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참아내고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소망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소망의 책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그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기다림과 소망이 있어 우리는 넉넉히 인내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성령께서 그 일곱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일곱 개의 교회 가운데 책망받지 않고 칭찬 들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둘 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 가운데 있었고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다음에 나오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부자 교회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사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임을 알지 못한다고 성령은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크든지 적든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며, 사랑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며,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은 바로 교우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