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金閣寺)
그 이면에 얽힌 이야기
섬뜩한 광기(狂氣)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와 교토의 금각사
당시 불에 탄 절
일본 교토에 가면 청수사와 금각사란 유명한 절이 있다.이중에 금각사는 말 그대로 엽서 크기의 금박을 입힌 종이를 절의 외부에 덧붙여서 금 빛을 내게한 절이다.시사소설로서 "금각사"가 얼마만큼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가는, 실제 방화 사건의 범인인 햐야시 쇼켄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야시의 신상에 대해서는 미즈카미 쓰토무가 20년에 걸쳐 면밀히 조사해 작성한 "금각염상"(1979)이 가장 세밀하지만, 방화범이라는 측면에서 범행에 관련된 부분만을 종합한 것으로는 고바야시 준쿄의 "금각 방화승의 병지"가 있다. 이 자료들의 내용을 갖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방화범 하야시 쇼켄은 1929년 3월 19일 교토 부 마이즈루시 근교의 나리우 곶에 위치한 서덕사라는 조그만 절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도겐은 31세, 어머니 시마코는 29세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의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이었으며, 원래가 허약 체질로 26세에 주지가 되어 결혼 후에서 건강이 좋지 않았고, 하야시가 태어난 후에 결핵에 걸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정 반대로, 독단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이라 친척들이나 마을 사람들도 꺼려할 정도였다.
하야시는 4세 무렵부터 말을 더듬게 되어, 주위로부터 놀림 당하는 것을 괴로워하였고, 이후로 친구도 없이 혼자서만 지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반에서 1, 2 등을 다투는 성적에 몸도 건강하고 각종 운동을 좋아하였으며, 유도와 기계 체조를 특히 잘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하여 부모의 슬하를 떠나, 히가시마이즈루에 있는 큰아버지 기이치로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하야시의 말더듬 증세는 더욱 심해졌으나, 평범한 성격에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말이 없는 편도 아니었다. 말을 더듬는다고 놀림을 받아도 태연하였다. 단지, 이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심하여져, "큰어머니가 지어 준 옷은 입겠지만, 어머니가 지어 준 것은 싫다."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소설(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에서는 1944년 초여름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1942년 12월 10일이다. 하야시의 아버지는 당시의 금각사 주지인 무라카미 지카이와 전혀 면식이 없었으나, 죽기 2개월 전에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금각사의 도제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주지의 승낙이 있자,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 3월 하야시는 어머니를 따라서 금각사를 방문하여 득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 문제 때문에 일단 마이즈루로 돌아갔다가, 1년 후인 1944년 4월에 정식 도제가 되어 학교도 히가시마이즈루 중학교에서 교토의 하나조노 중학교로 옮겼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6월, 하야시는 폐결핵으로 인하여 귀향하였으나, 증세가 양호해지자 이듬해 3월에 다시 금각사로 돌아왔다. 절에서는 혼자 고독하게 지냈으며, 성격이 괴팍하고 급한 탓으로 다른 도제들과 자주 다투었다.
1947년 4월, 하야시는 오타니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예과에서는 말도 없이 고독하게 지냈으나 학업에는 열중하였다. 성적은 1학년 때에는 83명 중 24등, 2학년은 77명 중 33등, 3학년은 79명 중 79등이었다. 성적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야시가 갑자기 변한 것은 3학년 때인 1949년 무렵부터였다. 예과 3학년의 성적은 당연히 낙제에 해당되었으나, 1950년에 학제가 개편되어 예과 3학년이 폐지되는 바람에 하야시는 본과로 진급하였다.
1950년, 본과에서도 학업을 게을리 한 탓으로 주임 교수의 주의가 있자, 장로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하야시는 사건 후의 조서에서, "장로에 대하여 어쩐지 호감을 못 느꼈고, 자신을 좋게 보아 주지 않는다는 불평이나 반항심이 갑자기 생겨났다." "장로는 친절한 듯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데가 있고, 나만을 따돌렸다." "훗날 누군가가 녹원사를 지배하겠지만,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의 도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세 사람 중에서 자신이 가장 뒤지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장로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주지가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하였다.
장로에게서 받은 등록금은 학교에 납입하였으나 여전히 등교하지 않았다. 옷과 서적을 판 돈으로,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유곽에 드나들었다. 이러한 곳에는 처음 드나든 것이었다. 상대한 여자는 와카야마 현 출신의 헤야 데루코, 21세였다. 유곽 출입을 끝낸 3일 후인 6월 22일, 약국에서 수면제를 구입하였다. "혼자 죽을 생각이었지, 금각을 불태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금각에 불을 지를까 하는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지만, 2주일 정도 전부터 방화할 기분이 들었다."는 진술로 보아, 수면제를 구입한 이후에 방화를 결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방화 당일인 1950년 7월 2일 새벽, 하야시는 화재 경보기의 고장을 확인하고, 자신의 방에서 소지품들을 꺼내어, 짚단과 함께, 북쪽 문으로 금각 내부에 들어가, 아시카가 요시미쓰상 앞에 두고 점화하였다. 하야시는 예정대로 금각 누상에서 죽으려 하였으나, 2층 입구가 잠겨 있었기에 올라가지 못하고, 뒷산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금각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며 수면제를 먹고 단도로 몸을 찔러 혼수 상태에 빠졌다. 불 속에 뛰어들지 않은 것은 "불을 보고 무서워진 것인지 불 속에 뛰어들 생각이 없었는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나중에 진술하였다. 하야시는 저녁 무렵 산기슭에서 체포되었다.
다음 날이 7월 3일, 하야시는 경찰에서 "자신이 한 짓에 대하여 사회가 제재를 가한다면 감수하겠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나쁜 짓을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로에게는 이따금 야단을 맞았지만 원인은 나에게 있으니, 원망하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와 있다고 하는데,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폐가 된다면 어머니와 인연을 끊겠다." "이러한 생각들은 자신의 주관에 입각한 것이기에, 도저히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할 수가 없다."고 진술하였다 어머니는 이날 교토 지검에 출두하여 하야시의 성장 과정, 성격 등에 관하여 설명한 후, 저녁 무렵 귀향하던 도중, 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7월 24일 제 1회 공판에서, 기소장에 방화 및 자살 동기로 든 "자기 혐오, 미에 대한 질투, 아름다운 금각과 함께 죽고 싶었던 점, 사회에 대한 반감, 방화에 대한 사회의 비판을 듣고 싶다는 호기심"에 대하여, 하야시는 "기소 사실 그대로, 별로 할 말이 없다. 정말이라면 정말이고, 정말이 아니라면 정말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훗날, 하야시는 "사회에 대한 반감이나 미에 대한 질투에 관하여는, 그다지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정신 감정은 교토 대학 교수인 미우라 모모에 씨에 의하여 8월부터 10월까지 5회에 걸쳐서 행하여저, "범행 당시 및 그 전후에 있어서의 정신 상태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고, 가볍기는 하지만 정신 이상 증세가 있기에, 분열병질로 진단하여야 할 상태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본 범행은 동증병질의 부분 현상인 병적 우월 관념에 의한 것임." 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하야시는 미우라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형무소 대신에 정신병원에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는 한편으로, 상신서에서도 역시 무죄가 아니면 정신 병원으로 보내 달라고 탄원하였다.
12월 20일 제 3회 공판에서 검사는, "사실 관계에 있어서 금각을 불태울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전적으로 독선에 의한 범죄로서, 자기 만족을 위하여 사회를 희생시킨 악성 행위."라며, 관념적 경합죄를 적용하여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다. 12월 28일의 판결에서 변호인이 주장한 심신모약에 관하여는, 정신 감정에 입각하여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야시를 징역 7년에 처하였다. 그리고 특사에 의하여 5년 3개월로 감형되었다. 하야시는 항소하지 않았다.
3년 후인 1953년 3월 12일, 하야시는 정신 장애 및 폐결핵으로 인하여,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55년 10월 교토 형무소로 옮겨, 10월 30일 만기 출소하였다. 출소 즉시 교토 부립 라쿠난 병원에 조치 입원이 되었으나, 환청 피해 망상, 피영향 망상, 작위 체험 등의 증세에 시달렸다. 이듬해인 1956년 3월 7일, 환각, 망상, 작위 체험 등의 증세가 진정된 반면, 폐결핵 악화 및 전신 상태 불량으로 인하여, 만 27세에서 12일 모자라는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건에 대한 여론은, 금각사의 주지가 되려는 꿈이 무너지고, 주지에게 냉대를 받자, 그에 반항한 하야시가 금각에 방화하였다는 식으로 일단락지어졌다. 하지만 오타니 대학 예과 3학년이었던 1949년, 하야시가 급격히 학업을 게을리 하게 된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방화 당시 하야시의 정신 상태가 이미 정상이 아니었음은 확실하며, 말더듬이라는 콤플렉스와 고독한 성장 과정도 범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