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기 1부, 모스크바 전투 - 미하일 쿠투조프, 러시아의 야전 원수, 프랑스의 대육군(Grande Armee)을 패퇴시킨 장군 - 청야 전술(scorched earth)을 선택했고, 대회전을 벌이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퇴각할 것을 명. - 나폴레옹을 도발하여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Battle of Maloyaroslavets)
1812년, 모스크바로 향하는 24개국 60만명의 병사들! 나폴레옹은 왜 러시아를 정복하려 했을까? 유럽 역사상 최대의 군대를 동원한 전쟁! 사실적이고도 감동적인 그날의 기록!
러시아 원정은 1812년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러시아 제국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을 가리킨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 전쟁의 완패를 계기로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조국 전쟁이라 부르며 나폴레옹 스스로는 이 전쟁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명명했다
나폴레옹 원정기
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1812, by Jacques-Louis David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Napoleon's second wife, Marie-Louise, Empress of the French
1798년 5월 19일, 이집트를 향해 남프랑스에서 배로 떠난 나폴레옹의 군사행동. 이집트원정의 동기는 나폴레옹 개인의 동방에 대한 야망도 있었지만, 이집트를 제압함으로써 인도에 진출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더욱 강했다. 원정군은 33척의 함대와 200여 척의 수송선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3만여 명의 육군과 167명의 학자, 기술자를 태우고 지중해를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6월 10일 몰타섬에 상륙하여 이 섬을 점령한 뒤, 7월 초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다.
현지의 맘루크 기병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으나 화포의 위력으로 제압하고 7월 21일 나일강변의 도시 카이로에 입성했다. 입성하자 곧바로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나폴레옹은 현지인에게 유화정책(宥和政策)을 약속하고 이슬람교를 공인하였으며 투르크의 압제를 배제하는 한편 인민의 해방과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입성한 지 얼마 안되어 아부키르만(灣)에서 영국의 넬슨함대에 프랑스해군이 격멸되었기 때문에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져 고립되게 되었다. 이듬해인 99년 2월 나폴레옹은 시리아원정의 장도에 올랐다. 목표는 남하를 계획하는 투르크의 요충지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물 부족과 페스트로 고통을 겪으면서, 하이파로 진군하여 아크레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되돌아왔다. 기세등등한 투르크군은 7월 아부키르만에 상륙했으나 프랑스군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99년 8월 말, 나폴레옹은 단독으로 이집트를 떠나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군사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함께 갔던 학자들의 손으로 곧 이집트학이나 고대동방의 문물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 장교가 발견한 로제타돌에 새겨진 고대 이집트 문자를 샹폴리옹이 해독함으로써 후세에 커다란 공헌을 남기게 되었다.
2. 아부키르전투 (Battle of Aboukir) - 1798년 8월 1일, 영국해군이 프랑스함대를 격멸한 해전.
아부키르만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20㎞ 떨어져 있다. 1798년 프랑스 혁명군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의 무역항로를 방해하고 인도 지배를 위협할 목적으로 이집트 침략계획을 세웠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대규모 프랑스 함대가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의 한 항구에서 출항하리라는 정보를 들은 영국정부는 영국함대 총사령관인 세인트 빈센트 백작에게 명령을 내려 호레이쇼 넬슨 해군소장으로 하여금 툴롱 해역으로 정찰을 나가 프랑스 해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했다. 넬슨이 탄 배는 폭풍에 돛대가 부러졌고, 그의 프리깃함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지브롤터에 있는 영국군 기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인트 빈센트 백작이 보낸 배들이 6월 7일 넬슨과 합류함으로써 넬슨 함대의 전력은 14척으로 보강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영국의 전함을 교묘히 피하여 먼저 몰타로 항진했고 6월초에 영국에게서 이 섬을 빼앗았다. 몰타에서 1주일을 보낸 나폴레옹은 함대를 이끌고 주요목표인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넬슨은 툴롱이 텅 빈 것을 발견하고 프랑스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정찰용 프리깃함이 부족하여 프랑스 함대를 놓쳤으나, 프랑스 함대보다 먼저 이집트에 도착했다. 알렉산드리아 항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시칠리아 섬으로 돌아가 물자를 공급받은 넬슨은 프랑스 함대를 찾아낼 결심으로 다시 이집트로 갔다. 8월 1일 넬슨은 아부키르 만에 정박하고 있던 프랑수아 폴 브뤼에스 데겔리에르 제독이 지휘하는 13척의 전함과 4척의 호위함으로 이루어진 플아스 본대를 찾아냈다. 해가 지기까지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브뤼에스의 배들은 아부키르 섬의 해안 포대가 측면을 방어하고 있는 모래 만에 안전하게 정박해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넬슨은 기습공격을 명령했다.영국전함 몇 척은 프랑스 전함의 앞쪽을 돌아 안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뒤쪽을 공격했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넬슨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전투는 오후 10시경 고비에 이르렀다. 그때 정박해 있던 함대 가운데 가장 크고 120개의 포를 갖춘 브뤼에스의 기함(旗艦)이 제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사들과 함께 파괴되었다. 밤새도록 전투를 계속해 마침내 2척의 전함을 제외한 프랑스 해군의 모든 전함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다. 영국군은 약 9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그 10배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다. 나일 강 전투는 여러 가지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 때문에 나폴레옹군은 이집트에서 고립당해 결국 붕괴되었다. 또한 영국은 적절한 때에 프랑스에게서 몰타를 되찾게 되어 위신을 세웠고 지중해 통제권을 확보했다.
Delaroche's "Napoléon abdiquant à Fontainebleau" ("Napoléon abdicated in Fontainebleau"), 1845 Paul Delaroche
3. 마렝고 전투 (Battle of Marengo) - 제2차 동맹전쟁 때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대항한 유럽 국가들에게 가까스로 이긴 전투(1800. 6. 14).
이탈리아 북부 알레산드리아에서 남동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 마렝고 평원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약 2만 8,000명과 미하엘 프리드리히 폰 멜라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1,000명이 싸웠다. 이 전투로 프랑스는 민초 강까지 이르는 롬바르디아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군사적·국민적 위신을 높일 수 있었다.
Napoléon Bonaparte as First Consul, feb.1803
나폴레옹은 5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멜라스 장군과 오스트리아 본국 사이의 연락망을 끊어놓았다. 멜라스는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해 알레산드리아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멜라스가 서쪽으로 80㎞나 떨어진 토리노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멜라스가 쳐들어왔을 때 나폴레옹군은 넓게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1만 8,000명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밀려 오후 3시쯤 6.4㎞나 뒤로 후퇴했다. 승리를 확신한 멜라스는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알레산드리아로 물러났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이 늦추어진 덕분에 루이 드제 장군이 이끄는 1만 명 가량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병력을 한 군데로 모을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오후 5시에 거센 반격을 시작했고 얼마 안 되어 드제가 전사하긴 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을 후퇴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은 약 7,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4,000명이 포로가 된 반면 프랑스군은 6,000명이 죽었다. 다음날 멜라스는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1805년 10월 21일 이베리아반도 남서부 트라팔가 곶의 난바다에서 넬슨의 영국함대가 빌뇌브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 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한 해전.
에스파냐의 항구 카디스에 정박중인 빌뇌브의 함대가 나폴리로 출격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넬슨은 카디스 근처의 트라팔가 곶 난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함 33척으로 편성된 빌뇌브의 함대는 영국함대를 확인하자 북쪽으로 침로를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넬슨은 27척의 영국함대를 자신이 직접 인솔하는 15척과 부사령관 콜링우드가 지휘하는 12척의 2대로 나누고, 기함 빅토리호에 <영국은 각자가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라는 신호기를 내걸고 서쪽에서 접근하여 적함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영국함대는 침몰함 0척, 전사자 약 1600명인 데 비하여 적함 격침 5척, 포획 17척, 전사자 약 8000명이라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넬슨은 전사하였다. 이 해전으로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단념하였다.
5. 아우스터리츠 전투 (Battle of Austerlitz) - Battle of Three Emperors 라고도 함. - 제3차 유럽 동맹전쟁의 첫번째 전투(1805. 12. 2).
나폴레옹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의 하나로서 6만 8,000명의 나폴레옹군이 명목상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9만여 명의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의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평화협정(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프로이센은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하기를 한동안 망설였다. 전투는 프랑스가 11월 13일 빈을 공략하고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모라비아 (지금의 체크 슬라프코프우브르나)로 몰아넣은 뒤,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 근처에서 벌어졌다. 전쟁터로 달려온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가 갖고 있던 최고 지휘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동맹군은 아우스터리츠 서쪽에서 나폴레옹과 싸우기로 결정하고, 나폴레옹이 함정으로 비워놓은 프라첸 고원을 점령했다. 이어서 동맹군은 프랑스군을 빈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약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프랑스군의 오른쪽(남쪽)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1만 5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루이 다부원수의 프랑스 군단이 이 공격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나폴레옹군의 북쪽 측면을 공격한 동맹군의 보조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는 동안, 나폴레옹은 니콜라 술트 원수에게 2만 명의 보병을 주어 프라첸 고원 위에 고립되어 있는 동맹군의 허약한 중심부를 격파하게 했다. 술트는 고원을 점령한 다음, 나폴레옹이 예비병력 중에서 보내준 2만 5,000명의 증원군과 함께 고원을 되찾으려는 동맹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동맹군은 곧 둘로 분열되어 고원 북쪽과 남쪽에서 격렬한 공격과 추격을 받았다. 결국 동맹군은 1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만 1,000명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나머지 패잔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9,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틀 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전쟁을 중단하기로 동의하고 알렉산드르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나폴레옹이 울름과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한 후 프레스부르크 (지금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오스트리아와 맺은 협정(1805. 12. 26).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으며, 오스트리아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에서 얻은 베네치아 영토의 전부를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에 양도했고, 티롤 · 포어아를베르크 등 몇몇 소규모 영토를 바이에른에 양보했으며, 그밖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서부 영토를 뷔르템베르크와 바덴에 양보했다. 또한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은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의 선제후들을 왕으로 인정하는 데 동의했으며, 이미 쇠락한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온갖 봉건적 속박에서 그들을(바덴 포함) 해방시키는 데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오스트리아는 금화 4,000만 프랑을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나폴레옹은 약간의 보상으로 오스트리아가 잘츠부르크, 베르흐테스가덴, 튜튼 기사단의 영지 등을 합병하도록 허용했다. 프랑스 제국은 피에몬테 · 파르마 · 피아첸차 등을 접수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프레스부르크 조약은 라인 강, 알프스 산맥, 피레네 산맥을 둘러싸는 프랑스 속국의 고리를 창설하려던 나폴레옹 정책의 핵심부분이었다.
6. 예나 전투 (Battle of Jena) - 일명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작센 지방의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벌어진 전투(1806. 10. 14).
12만 2,000명의 프랑스 군대와 11만 4,000명의 프로이센 · 작센 군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 2세 시대의 프로이센 구식군대를 격파했고, 그결과 1807년 7월 틸지트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806년 7월 러시아와 비밀 동맹을 맺은 후 전쟁 준비를 했다. 10월초 브룬스비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 작센 군대는 나폴레옹의 서부 병참선을 위협하기 위해 작센을 지나 서쪽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동맹군이 프로이센 군대와 합세하기 전에 엘베 강을 차단한 후 프로이센 군대를 고립시켜 공격하기 위해 튀링겐 숲을 지나 신속히 북쪽으로 진군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후미에서 공격해오는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해 방향을 돌려야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공작 휘하의 병력 6만 3,000명을 아우어슈테트에 배치했으며 호엔로에잉겔핑겐의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공이 이끄는 약 5만 1,000명을 바이마르와 예나 간의 24㎞ 길이의 전선에 배치했다. 그 해 10월 14일 동이 트자마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9만 6,000명 병력 중 약 5만 4,000명만을 움직여 예나에 있는 호엔로에잉겔핑겐 병력 3만 8,000명을 공격했다. 오후 3시경 나폴레옹 군대는 그들과 1만 3,000명의 증원군을 패퇴시켰다. 한편 북쪽으로 21㎞쯤 떨어진 아우어슈테트에서는 루이 니콜라 다부가 지휘하는 2만 6,000명의 프랑스군 제2부대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공작의 프로이센 주력부대와 마주쳤다.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공작은 월등하게 우세한 전력을 여러 개의 소규모 공격부대로 분산시켰는데, 이로써 다부는 6시간 동안 굳건히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공작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자, 국왕이 지휘를 맡았다. 예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로이센의 공격은 힘을 잃었다. 다부는 포병대를 이동시켜 프로이센군 전선 전체에 걸쳐 타격을 가했다. 오후 4시가 되자 프로이센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 혁혁한 승리로 다부는 나중에 아우어슈테트 공작작위를 받았다. 프랑스 군대는 통틀어 약 1만 2,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프로이센과 작센의 군대는 약 2만 4,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2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동맹국 지원에 나서기 전 6주 만에 프로이센을 완전히 정복했다."
◆ 틸지트조약 - 1807년 나폴레옹 1세와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사이에 맺어진 조약.
1806년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선전포고하였으나 예나의 싸움에서 패하고 지원나온 러시아군도 같은 운명에 놓였다. 1807년 2월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은 클라이페다강 위의 뗏목에서 만났으며 이어서 프로이센왕과 7월에 화평조약이 성립되었다. 조약에 따라 엘베강 왼쪽 연안 전지역은 베스트팔렌왕국이 되고,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원수로 취임하였다. 단치히(그다니스크)는 자유시가 되었고, 옛 폴란드령에 바르샤바공국이 건설되어 작센왕이 지배자를 겸하고 프로이센에게는 군비제한과 함께 막대한 보상금이 부과되었다.
7. 아일라우 전투 (Battle of Eylau) - 나폴레옹 전쟁중 러시아의 제3차 대(對) 프랑스 동맹 때 벌어진 전투(1807. 2. 7-8).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남쪽으로 37㎞ 떨어진 도시 아일라우 (지금의 러시아 바그라티오노프스크)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고전한 전투이다. 러시아군이 기습적인 겨울 공세를 벌인 직후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이 이끄는 7만 6,000명의 러시아-프로이센 동맹군은 나폴레옹군 7만 4,000명과 맞섰다. 첫번째 전투는 2월 7일 갑자기 벌어져 양쪽이 각각 사상자 4,000명 정도를 냈을 뿐 성과없이 끝났다. 2월 8일 아침 나폴레옹은 병사 4만 1,000명만 거느린 채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작전을 쓰면서 러시아군 6만 3,000명과 싸웠다. 나폴레옹은 기병대의 공격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눈보라로 앞이 안 보여 제1차 공격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실패했다.
한편 러시아군 3개 대열이 프랑스군의 취약한 방어선으로 진격해오자 프랑스군은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나폴레옹은 조아생 뮈라가 이끄는 기병 예비병력 1만 700명에게 진격해오는 대열과 러시아군 중심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기병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으로 꼽힐 만한 돌격전을 벌여 러시아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2개 대열로 나누어 러시아 전열의 중앙을 돌파한 뒤 러시아군 후미에서 단일 대열로 재편성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러시아군을 향해 다시 쳐들어갔다. 이 공격으로 나폴레옹은 중앙부대를 지키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다음 6시간 동안 양쪽 모두 증원군을 받아 오후 10시경 서로 지칠 때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양쪽은 각각 병사 1만 8,000~2만 5,000명 가량을 잃었고 밤이 되자 베니히센은 퇴각했다.
8. 반도전쟁 (半島戰爭 Peninsular War) - 나폴레옹 전쟁 가운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졌던 전쟁(1808-14).
프랑스군과 이에 맞선 영국 · 스페인 · 포르투갈 동맹군이 싸움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크게 부채질하게 되었지만 1813년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벌인 전투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중부 · 동부 유럽에서 프랑스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영국은 1793-1814년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반도전쟁에 참가했고, 아서 웰즐리 영국군 사령관은 이 전쟁의 승리로 행운을 잡았으며 나중에 웰링턴 공작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7년 7월 7일 러시아와 맺은 틸지트 조약으로 인해 안심하고 영국에, 그리고 영국과 동맹 또는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스웨덴과 포르투갈에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러시아는 스웨덴을 맡기로 했던 반면, 1796년부터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있던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맡아 '영국에게 항구를 봉쇄할 것과 전쟁을 선포할 것을 요구' (7. 19)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종결시키는 방법으로서는 영국의 무역을 봉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기 때문에, 영국에 대해 경제전쟁을 치르도록 계획한 대륙봉쇄를 완성하자는 의도였다. 포르투갈이 계속 머뭇거리자 나폴레옹은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스페인을 지나 포르투갈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1807. 10-11)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도피했고, 쥐노는 11월 30일 리스본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북부의 일부 지역도 함께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자신의 속셈을 분명히 드러내 포르투갈의 전지역과 스페인 북부지방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정부 차원으로 저항군을 조직할 수 없었던 스페인 총리 고도이는 국왕 카를로스 4세에게 포르투갈 왕실처럼 남아메리카로 피신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마드리드를 떠난 이들은 아란후에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란후에스 반란(1808. 3. 17)을 조직한 페르난도파(派)는 고도이를 해임시키고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켜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조아생 뮈라 장군을 보내어 마드리드를 점령하도록 했고, 위협 반 약속 반의 제안을 하며 카를로스와 페르난도에게 바욘에서 회담하자고 유인했다. 나폴레옹은 1808년 5월 5일 바욘에서 페르난도에게 카를로스를 위해 퇴위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카를로스에게도 자신을 위해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 그 대가로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임명한 통치자 밑에서도 가톨릭 국가이자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택했다.
그러나 5월 2일 이미 마드리드 시민들은 침략자에 맞서 봉기했으며 스페인 독립전쟁은 시작되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궁극적으로 나폴레옹 세력을 멸망하게 한 운동의 시작이었다. 비록 이 봉기는 프랑스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스페인 전역에서 지역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스페인 사람들은 게릴라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프랑스군은 발렌시아에서 퇴각했으며 안달루시아로 진군했던 피에르 뒤퐁 장군도 퇴각하여 마침내 바일렌에서 전(全)부대와 함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7. 23) 수도 마드리드로 진군한 스페인군은 8월에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몰아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다시 공격해들어와 1808년 12월, 마드리드를 탈환했고 스페인 임시정부는 남쪽으로 후퇴해 세비야까지 갔다. 1810년 1월 프랑스의 니콜라 드 디외 술트 장군은 안달루시아 점령작전을 시작했고, 같은 달 세비야가 함락되자 임시정부는 다시 카디스로 도망했다. 포르투갈에서 웰링턴 장군의 끈질긴 저항, 끊임없는 게릴라 활동, 프랑스군 내부의 갈등 등이 있었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는 겨우 최후의 굴복을 모면하고 있었다. 실제로 1808년 8월 1일 처음으로 포르투갈에 상륙한 영국군은 곧바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리스본을 점령하고 프랑스군에게 포르투갈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1808. 8. 30, 신트라 회담). 1809년 포르투갈로 재진군한 프랑스군은 잠시 포르투와 리스본을 점령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많은 어려움을 뚫고 프랑스군의 측면을 지나 마드리드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는 탈라베라 전투(1809. 7. 27-28)에서 승리했으나 그것도 잠시뿐, 포르투갈 중부로 후퇴해야 했으며 이곳에서 다시 영국의 수중에 들어와 있던 리스본 주변의 시골에서 전열을 강화했다. 웰링턴의 유명한 '토레스 베드라스 전선'은 나폴레옹의 어떤 군대도 막을 수 있도록 설계한 방어요새였다. 그 뒤 2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러 지방에서 여러 번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가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병력(이때까지 20만 명 이상)과 물자가 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1811-12년에 온 전력을 러시아에 쏟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고갈된 반도군대는 보충받기는 커녕 러시아로 진군하는 대군대(Grand Armee)를 강화하기 위해 3만 명 정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을 훌륭하게 방어하고 있던 웰링턴은 1812년 스페인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는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주르당 원수를 패배시킴으로써 결국 반도전쟁을 종결시켰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스페인에서 철수했고, 웰링턴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본토까지 쳐들어갔다. (1813. 8) 한편 라이프치히 전투(1813. 10. 16-19)에서 완패한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계속 지킨다는 사실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808년 퇴위시킨 뒤 발랑세에 유폐했던 페르난도를 풀어주었다.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3월 스페인으로 돌아와 즉위했다.
9. 바그람 전투 (Battle of Wagram) -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1809. 7. 5-6).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독일 점령에 맞서 일으켰던 1809년 전쟁을 종결짓는 쇤브룬 조약(1809. 10)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군대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15만 4,000명의 병력을 갖춘 나폴레옹 군대와 카를 대공이 이끄는 15만 8,000명의 오스트리아 군대가 빈의 북동쪽에 있는 마흐펠트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다. 5월에 있었던 아스펀-에슬링 전투에서 패배했던 나폴레옹은 새로운 반(反)프랑스 동맹 결성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승리해야 했다.
카를은 바그람 마을을 중심으로 23㎞에 걸쳐 병력을 배치하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카를 대공의 형, 요한 대공이 이끄는 3만 명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7월 5일 저녁 도나우 강을 무사히 건넌 나폴레옹군은 드문드문 늘어선 오스트리아 진영을 서둘러 공격했지만 패퇴했다. 7월 6일 아침 카를은 프랑스군의 도나우 강 접근을 차단하고 남쪽 진영을 포위하기 위해 남쪽을 공격해왔다. 나폴레옹은 루스바흐 브루크를 따라 늘어선 오스트리아 전선 북쪽을 주요 공격목표로 삼았으며 프랑스군의 남쪽 진영을 강화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북쪽 진영을 공격 하여 승리했다.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중심부를 공격해 그곳을 갈라놓았다. 오후 늦게 요한 대공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카를의 군대는 퇴각하고 있었으며 요한도 쉽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는 어떤 전투보다도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생겼는데 오스트리아는 4만 명 이상, 프랑스는 약 3만 4,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4일 뒤 카를은 휴전을 요청했다.
◆ 쇤브룬 조약 (Treaty of Schonbrunn) - 1809년 7월의 바그람 전투 결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조약(1809. 10. 14).
오스트리아는 성급히 나폴레옹에 대항한 해방전쟁을 벌였으나 기대했던 프로이센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바그람에서 패전해 빈의 쇤브룬 성(城)에서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8만 3,000㎢의 영토와 거의 35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넘겨주었다. 조약의 규정에 따라 프랑스는 크로아티아 · 피우메 · 이스트리아 · 트리에스테의 일부와 카린티아 · 카르니올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나폴레옹을 지원했던 러시아는 동(東)갈리치아의 타르노폴 지구를 차지하고, 바르샤바 대공국은 서(西)갈리치아 · 크라쿠프 · 루블린을 차지했다. 바이에른은 잘츠부르크 · 베르히테스가덴 · 인피르텔 및 하우스루크피르텔의 절반을 차지했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고 군대를 15만 명으로 줄이며 영국과의 외교 · 무역 관계를 끊기로 했다. 이 조약이 체결된 뒤 짧은 기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폴레옹은 1806년 2월 베를린칙령으로 대륙봉쇄를 선언하고, 다음해 틸지트조약에 의해 러시아에게도 협력할 것을 요구했지만, 곡물 수출국인 러시아가 불응하자 12년 64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병력의 반은 폴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의 동맹국 군대였다. 러시아는 스웨덴 · 영국 · 에스파냐 등과 동맹을 맺고 바르클라이 데 톨리 장군 휘하의 제1서부군, 바그라치온 장군의 제2군 그리고 토프만프 장군의 제3군 등 약 23만을 이끌고 방위에 나섰다. 그해 6월 24일 네만강을 건너 나폴레옹군은 빌나 · 스몰렌스크를 거쳐 계속 진격해 총사령관 쿠트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과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교전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9월 14일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평화교섭제의는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무시되고, 또 모스크바가 원인불명의 대화재로 초토화되어 식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겨울도 다가와 나폴레옹은 10월 19일 모스크바 철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각은 러시아군의 추격과 농민의 게릴라 공격으로 비참했으며, 마네강을 건너 도망쳐 온 군사는 겨우 2만 5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 10만을 포함하여 55만 명을 이 원정으로 잃었다고 한다. 모스크바원정은 2년 후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Napoleon's withdrawal from Russia, a painting by Adolph Northen
11. 보로디노 전투 (Battle of Borodino) - 나폴레옹 전쟁 때 모스크바 서쪽 110㎞ 지점의 모스크바 강 근처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의 치열한 전투(1812. 9. 7).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포 600문 이상의 장비를 갖춘 12만 러시아군을 상대로 13만 병력과 대포 500문 이상을 갖추고 승리함으로써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쿠투조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보로디노에서 후퇴를 중지하고, 급히 요새를 구축해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진군을 차단하려 했다. 나폴레옹은 측면 공격이 실패할 경우 러시아군이 도망칠까 우려해 과감히 정면공격에 들어갔다. 새벽 6시부터 정오까지 약 5㎞에 걸친 전선을 따라 밀고 밀리는 격렬한 총격전을 펼쳤다. 정오쯤에 프랑스군 포병대는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었지만 뒤따른 프랑스 보병의 공격은 러시아군의 저항을 억누르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지휘하던 나폴레옹은 전투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2만 명의 근위병과 1만 명의 신참군대 파견을 거부했다. 쿠투조프가 이미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투입하여 사실 나폴레옹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기회를 잃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양측 군대는 기진맥진해졌고 전투는 포격전으로 접어들어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쿠투조프는 밤중에 후퇴했고 나폴레옹은 1주일 뒤 아무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은 제2군사령관인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 공(公)을 비롯해 약 4만 5,000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프랑스군은 3만명을 잃었다.
12. 라이프치히 전투 (Battle of Leipzig) - 일명 Battle of the Nations. - 독일과 폴란드에 남아 있던 프랑스 병력을 완전히 격파시킴으로써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전투(1813. 10. 16-19).
약 18만 5,000명에 달하는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및 기타 군인들과 약 32만 명의 동맹군이 작센 지방 라이프치히에서 교전했다.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러시아 · 스웨덴 군대로 이루어진 동맹군은 각각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 게프하르트 레베레흐트 블뤼허 장군, 레온티 레온티에비치 베니히센 장군, 스웨덴 왕세자 요한 베르나도트의 지휘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에서 퇴각한 후, 1813년 독일에서 새로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베를린 점령에 실패하고 엘베 강 서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동맹군이 라이프치히를 통과하는 나폴레옹의 병참선을 위협하자 그는 그 도시에 병력을 집결시켜야만 했다. 10월 16일에 남쪽에서 슈바르첸베르크가 이끄는 7만 8,000여 명의 부대의 공격과 북쪽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5만 4,000여 명의 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는 있었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했다. 17일 전투가 잠시 멈추었을 때 베니히센과 베르나도트의 부대가 도착해서 그를 포위한 군대수는 증가했다.
British etching from 1814 in celebration of Napoleon's first exile to Elba at the close of the War of the Sixth Coalition
18일 30만 명 이상의 동맹군이 공격을 위해 라이프치히 주변에 모였다. 9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프랑스군은 도시 외곽지역으로 몰렸고 19일 오전 2시 나폴레옹은 엘스터 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모두가 무사히 건넜으나 동맹군의 공격 위험도 없고 아직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로 붐비고 있던 때에, 놀란 하사 1명이 다리를 폭파시켰다. 이 폭파로 인해 3만 명의 후위군(後衛軍)과 부상군인들이 라이프치히에 갇혔고 이튿날 모두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3만 8,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동맹군측은 총 5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나폴레옹 전쟁(1800-15)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에 속하는 이 전투로 라인 강 동부의 프랑스 제국은 붕괴되었다.
Adieux de Napoléon à la Garde impériale dans la cour du Cheval-Blanc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Napoleon's farewell to the Imperial Guard in the White Horse courtyard of the Palace of Fontainebleau By Antoine Alphonse Montfort, Palace of Versailles
13.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 - 나폴레옹이 최후의 패배를 겪은 전투(1815. 6. 18).
이로써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이 끝났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복귀한 백일천하 때 워털루(브뤼셀에서 15㎞ 남쪽에 있음) 남쪽 5㎞ 지점에서 나폴레옹의 7만 2,000명 병력과 웰링턴 공작의 동맹군 6만 8,000명 (영국 · 네덜란드 · 벨기에 · 독일 군대) 및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주력 부대인 약 4만 5,000명의 프로이센군 사이에 벌어졌다. 나폴레옹군 원수인 미셸 네와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6월 16일 워털루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웰링턴을 카트르브라에 묶어둔 후 적이 분산되어 있을 때 공격해 섬멸하는 데 실패했다. 나폴레옹의 총병력 10만 5,000명 중 약 1/3에 해당 3만 3,000명을 거느린 그루시는 뒤늦게 블뤼허를 추격했다. 6월 18일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블뤼허 후위군 1만 7,000명의 저지를 받았으며 그동안 블뤼허의 주력부대는 위기를 벗어나 웰링턴 군대와 다시 합류해 13㎞ 남서쪽에 있는 워털루에서 전투의 대세를 바꾸어놓았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아침에 웰링턴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던 것을 땅이 마르는 정오로 연기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는데, 바로 이 때문에 블뤼허 군대는 워털루에 도착해 웰링턴 군대를 지원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오후 6시에 이미 4차례에 걸쳐 프랑스군은 동맹군 중심부를 약화시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사이에 전혀 손발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또다른 전투가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프랑스 군대는 블뤼허 군대의 카를 폰 뷜로 군단 소속인 3만 명의 프로이센군을 맞아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워털루에 당도해 나폴레옹군의 동쪽에서 압력을 가해왔다. 프로이센 병력이 후미로 진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로보 백작 조르주 무통이 이끄는 부대를 이동시키고 웰링턴 군대를 상대하던 주력 부대에서 몇 개의 근위대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마침내 오후 6시 네가 보병 · 기병 및 포병 합동공격을 개시해 동맹군 전선 중앙의 한 농가인 라에생트를 함락했다. 프랑스 포병들은 동맹군 중심부에 포격을 시작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웰링턴 군대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수도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측면공격을 막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네이의 보병 증원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후 7시가 지나 측면을 안전하게 하고 나서야 나폴레옹은 근위대 몇 대대를 네이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미 웰링턴은 폰 차이텐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받아 방어태세를 재정비한 뒤였다. 네이는 근위대 일부 병력과 다른 몇 개 부대를 지휘해 연합군에 대한 최후 공격에 나섰다. 빽빽이 늘어섰던 근위대 보병은 동맹군 보병의 화력에 밀려 뿔뿔이 흩어졌다. 동맹군의 총진군이 시작되었고 동쪽에서는 프로이센군이 공격을 개시한지 15분 만인 오후 8시에 근위대가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공포에 휩싸여 이리저리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나폴레옹 군대 중 2만 5,000명이 사상당하고, 9,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웰링턴 군대는 1만 5,000명, 블뤼허 병력은 약 8,000명이 사상당했다. 4일 후 나폴레옹은 2번째로 퇴위했다.
Napoleon returned from Elba, by Karl Stenben, 19th century, 나폴레옹 엘바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