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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묵상글 들 ( 설 명절-축복과 강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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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설 명절-축복과 강복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 창세기 말씀을 요약하면 '너희가 축복하면 내가 강복하리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이웃에게 축복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하신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준다는 뜻이고 강복이란 복을 내려준다는 뜻이니
강복은 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길 비는 축복은 우리의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복을 내려줄 수 없고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빌어주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복을 비는데 다시 말해서 축복하는데 자가 축복은 불성립입니다.
물론 나 자신을 위해 복 주십사고 주님께 청할 수는 있고,
나를 위해 복을 빌어달라고 이웃에게 청할 수도 있지만
축복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설 명절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는 것이나
오늘 창세기의 말씀처럼 올 한해 축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올 한해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게 하는 대단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부자되라고 빌거나 건강하라고 비는 것보다 좋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부자되는 것이나 건강하기를 비는 것도 축복중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축복의 시작이요 끝이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올해 복권에 당첨되라고 빌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로또 당첨자들의 말로를 보면 그것은 축복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는 진정 행복을 빌어주는 축복자들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오늘 세배드릴 때도 건성으로 복을 빌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서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그러해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그러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올 한해
내 입에서 말끝마다 저주가 나온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불행입니까?
축복을 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이 되지만 나에게 더 행복이 되는 것처럼
저주도 그에게 불행을 선사하기 이전에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자기 안에 행복은 하나도 없고
나올 것이 저주밖에 없는 사람이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올 한해 오늘 창세기 말씀처럼
주님께 복을 빌고 청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을 향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께 청하는 사람은 청할 것이 있을 때만 주님을 찾게 되기 쉽지만
주님을 향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찾고
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여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면
주님을 향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여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기에
더 완전한 행복임에 의심할 여지 없겠지요?!
아무튼 올해도 여러분 모두 주님으로 인해 행복한 한해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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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김레오나르도 김찬선 30 분 전
새해 인사 따로 드리지 않고, 여기서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올해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아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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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새해의 첫날을 시작해 봅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금연, 금주, 다이어트 등.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품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작심삼일로 그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결심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함께 응원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복을 바라고, 또 복을 비는 행위는 우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그들의 전통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복이 다른 사람에게 내릴 수 있도록 빌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설렘과 희망을 품고 축복 가득한 새해 벽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복을 빌어 주고, 어떤 복을 바라고 있나요? 저마다 바라는 복의 모습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해 보면 어떨까요? 새해 첫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박형순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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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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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날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배, 세뱃돈, 선물, 복 받으세요. 덕담, 떡국, 고향방문, 씨름대회”가 떠오릅니다. 신앙인들은 연도를 바치고, 설날 미사에 참례합니다. 설날을 기억하는 것은 조상들에게 감사드리고, 가족들이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여서 안부를 전하고, 정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세배를 받으시고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을 기원해 주셨고,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가는 동생수녀와 제게는 늘 겸손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손자들에게는 직장생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아버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로 가셨으니 이제 덕담을 들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아버님과 함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가슴이 찡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1월 17일에 나온 ‘미카엘의 순례일기’입니다. 13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베드로라는 신부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는데, 고민의 한가운데에는 미사 중 변화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 작고 동그란 밀떡과 검붉은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평범한 음식이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순례를 결심합니다. 베드로 성인의 유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를 간구했는데도 여전히 성체의 거룩한 신비에 대한 의심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순례에 큰 기대를 걸었던 베드로 신부님은 크게 상심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로마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볼세나에는 성녀 크리스티나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열 명 남짓 둘러앉아 전례를 행할 수 있는 작은 경당이 있는데, 베드로 신부님도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누룩 없이 만들어진 흰색 제병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양성체를 하는 순간, 갑자기 성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붉은 피는 베드로 신부님의 손을 적시고 흘러내려 그 밑의 성체포까지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이 사건이 분명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기적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290년 사람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성체포를 보관하고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300년 후 그 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면서 한국에서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온 사제가 있었습니다. 볼세나의 성체포 기적 성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신자들과 함께 순례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습니다. 성체포 성당에서 미사가 시작되었고 말씀이 선포된 후, 강론대에 오른 신부님은 고개를 떨구고 한참이나 서 있기만 하였습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신부님은 말을 하였습니다. 매우 짧은 강론이었습니다. ‘저 역시 베드로 신부님과 같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은경축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얼마나 의심하면서 살았는지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신부님의 눈물과 신자들의 흐느낌이,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처럼 작은 경당 안에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부족한 사제가 열심한 신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5처를 묵상하면서, 6처를 묵상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기꺼이 시몬이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저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가식과 위선으로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신자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고, 은총이 가득한 ‘십자가의 길’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설날을 맞으면서 바라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연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설날입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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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40).”
1)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라.”, “한눈팔지 마라.”,
“딴 생각에 빠져 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깨어 있는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종말과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심판을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곧 회개입니다.)
종말의 심판을 잘 준비하는 일은 종말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이 닥치면, 곧바로 심판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준비할 시간이(회개할 시간이) 아예 없습니다.
2) 예수님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아닌 상황에서도,
즉 평소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총)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딴 생각에 빠져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총)을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이 잘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청할 때에는 간절하게 청하면서도,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려고 할 때에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주시는 것을 못 받게 됩니다.
그 경우에 자기가 받지 않아서 못 받았으면서도
하느님께서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미사참례를 예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미사 시간 내내 졸다가, 또는 딴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성찬의 전례 시간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고, 영성체를 할 기회를 놓쳤다면,
그 상황에서 영성체를 하게 해 달라고 조를 수 있는가?
자기가 잘못해서 영성체를 못 한 것에 대해서 누구 탓을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의 복(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는 받을 준비를 안 한 사람에게도
자동적으로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복(은총)을 받고 싶으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묵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묵시 3,19-21).”
예수님께서 ‘언제’ 문을 두드리실지, 그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가버리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문을 열어드리는 일은 우리가 합니다.
만일에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듣고,
그래서 제때에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무한정 기다리신다는 뜻은 아니고,
언제인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어떤 시점까지만’입니다.
어떻든 은총은, 늘 깨어 있으면서,
그것을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4)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는
인사말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받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
라는 격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내가’ 받기를 바라는 ‘복’이 정말로 ‘복’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선을 주시는데 뱀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달걀을 주시는데 전갈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은 안 받으려고 하고 나쁜 것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아닌지,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루카 11,11-13).
잠언에 나오는 다음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에 연결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8-10).”
전에 한때 우리나라에서 “부자 되세요.” 라는 인사말이
새해 인사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IMF 체제에서 모진 고통을 겪은 뒤라서 그런 인사말이 유행한 것인데,
그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만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악’이고, 그 ‘악’을 인사말로 삼는 것은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은 선에서 비롯되어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빌어주는 일도 선을 빌어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받은 줄 알았는데 악한 결과로 끝난다면,
그것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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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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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구정) 명절 미사.<복을 빌어주는 사람>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사실 명절을 기다려온 것은 서로의 만남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만남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덕담도 성경말씀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통통,통통’복을 받으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쓰레기통입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하는 일 마다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여기다가 '전화한통'을 덧붙입니다. 자주 인사하고 먼저 안부 전하는 '전화한통'입니다.
예전에는 세뱃돈과 설빔을 받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유명절은 그래도 가족의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명절이 되면 도심으로 나가있던 삼촌과 누나를 기다렸습니다. 명절에는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돈을 얻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물이나 돈의 액수가 줄어들면 마음속으로는 서운해 하였습니다. 그저 공짜로 받는 주제에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크게 받으면 다음에 받을 때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았으나 감사할 수 없으니 줄때도 잘 줘야 하고 받을 때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합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오복의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또,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 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 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았다 해도 일시적입니다. 믿는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명절귀신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 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했다.
“설날 제사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에 갈 때 차 막힌다고,
새벽에 벌써 지들끼리 편한 시간에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다 가버리고 없었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했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여,
나는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었더라구.
알고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거야.
거길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누?”
아까부터 찡그리고 앉은 다른 조상귀신,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온 음식이 죄다 상해서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뿔난 또 다른 귀신,
"나쁜 놈들!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프라스틱 음식으로 차려서 이빨만 다치고 왔네."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했다.
“난 말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었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상을 받았나?”
“먼저 카페에 회원가입을 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ㅎㅎㅎ
@@ 설날 속터지는 女子들 한탄!!.
1. 엎으러지면 코 닿을것 같이 가깝게 살면서도
명절 때 면 꼭 늦게 오는 동서.
2. 형편이 어렵다며 늘 빈손으로 와서는
지그집에 갈때는 이것저것 싸가는 동서.
3. 온몸이 쑤셔서 한 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고스톱을 계속 치고 있는 남편.
4. 술이 잔뜩 취했으면서도 안 취했다고 우기면서 가는 손님 붙잡는 남편.
5. 시댁에는 금방 갔다 오면서 친정에 일찍 와서는
이 참견 저 참견하는 시누이.
6. 넓은 마당에서 잘 뛰어 놀다가 꼭 부침개 부칠때 와서는
식용유 뒤엎어 놓는 철없는 조카.
7. 기름 냄새 맡으며 간신히 부쳐놓은 부침개를
날름 집어 먹어버리는 시동생.
8. 며느리는 친정에 안 보내면서 시집간 딸은
빨리 안온 다며 찻길 막힌다고 빨리 오라고 전화하는 시어머님.
9. 시댁에는 30만원, 친정에는 10만원으로 차별하는 남편.
10. 시집에 늦게 와서는 '동서 수고한다.' 는
말 대신 '아직도 일하고 있어! 하며 큰소리치는 형님.
11. 막상 가려고 하면 '한 잔 더하자'며 술상 봐 오라는 시아버님.
@@ 마누라의 3金 ? 현금, 지금, 입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
음식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을 상징하는 지금. 이 세 가지다.
남편이 마누라에게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문자 퀴즈를 냈다.
“여보야…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한 3가지 금을 뭐라 생각하노??”
잠시 후 마누라한테서 답문자가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허덕거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쬐금, 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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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새벽을 열며. 설. 빠다킹 신부님.
신학생 때 산악부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부가 되어서도 계속 등산을 좋아할까요? 사실 신부가 된 뒤에는 산에 간 기억이 몇 번 없습니다. 아마 10번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했던 등산에 대한 재미를 잃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니 ‘속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학생 때는 체력이 좋아서 거의 산을 뛰어다녔습니다. 심지어 산 정상까지 누가 빨리 다녀오는지를 산악반 동기와 내기했던 기억도 많습니다. 등산을 이렇게 속도전으로 하니 산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얼마나 빨리 정상에 다녀오느냐만 관심사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 꾸준히 운동하지 않았고 또 등산도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산을 뛰어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제가 가졌던 등산의 목적인 ‘속도’를 채울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등산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면서 걷는 산책과 상쾌한 바람을 느끼는 자전거 하이킹은 계속하게 됩니다. 체력 문제보다 주변을 바라보려는 넓은 마음만 있으면 되니까요.
주님께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 응답만 요구하면 금세 주님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곳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오랫동안 커다란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는 것, 오랫동안 주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커다란 준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의 만족만을 원하고, 짧은 노력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빠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올 한 해도 주님께서는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빠른 응답만을 요구하고, 크고 화려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요구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복음에 나오듯이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는 사람만이 올 한 해의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속도를 요구하는 종이 아닌, 긴 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갖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한 해를 멋지게 만들면 어떨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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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점을 찾아내어 말하는 것은 어쩌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김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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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도전
KFC 할아버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커넬 할랜드 샌더스로 40대에 닭튀김을 만들어 팔며 요식업에 뛰어들었지만, 화재로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65세 노인이 되었을 때, 이제 가진 돈은 105불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낡아빠진 트럭을 끌고 다니며 자신의 조리법을 팔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았습니다. 1008번이나 식당에서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결과, 드디어 1009번째 자신의 조리법을 받아들인 식당을 찾았습니다. 이 노력이 지금의 KFC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이도 많고, 돈도 없고, 사람들의 외면까지…. 정말로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또다시 맞이하는 새해입니다. 많은 좌절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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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명절.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하느님의 축복을!
- 성사 교리 ⓹ 성품 성사, 고난의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키는 은총
⒈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신축년(辛丑年) 한 해 동안 흰 소처럼 올 한 해 동안
여유와 끈기로 살아가시고 이 해의 연말에 가서는 풍요롭게 그 결실을 맺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설날의 ‘설’은 ‘낯설다’, ‘삼가다’는 뜻에서 보듯이, 경건하게 맞이해야 할 새로운 때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의 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새 해를 맞이해 온 전통을 반영합니다.
설날에 행해온 세시풍속(歲時風俗)을 살펴보면 그 뜻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설날 아침에는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냅니다. 이 경우에 조상님들께 표하는 인사방식이 ‘절’입니다.
이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행해 왔기 때문에 한민족에게만 남아있는 풍속입니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새 해의 초하루를 경건하게 맞이하도록 일깨워온
이유는 설이 사실상 섣달 그믐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경건하게 새 해를 맞게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설날에는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뜻으로 쌀로 빚은 가래떡을 썰어서 떡국으로 끓여 먹었습니다.
설날에 입는 옷을 설빔이라 했는데, 노랑이나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 등으로 색깔 있는 색동저고리를
어린이들에게 입히곤 했습니다. 설날의 놀이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이 대표적입니다.
윷놀이의 말판은 북극성을 둘러싼 별자리와 고조선 시대 이래로
전쟁에 출전하는 진용 즉 사출도(四出道)를 합친 모습입니다.
도, 개, 걸, 윷, 모는 야생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삼은 짐승들 즉 돼지, 개, 소, 말 등을 상징했고,
이 이름을 따서 저가(猪加), 구가(狗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등 관리들의 질서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가축화되지 않는 곰이나 범 같은 동물들은 문벌보다 더 큰 부족의 토템으로 신성시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주류인 한민족은 봉황, 혼인 동맹을 맺었던 맥족은 곰, 북방으로 갈라져 나간 예족은
범을 자기 부족의 아이콘으로 삼았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통 문양에 남아 있습니다.
⒉ 이러한 설날 세시풍속의 으뜸은 조상님들께 대한 차례를 올리고 난 다음
윗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일이고, 그러면 세배를 받은 어른들은 용돈이나
음식 또는 선물 등을 준비하여 내려주면서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아랫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은 윗 사람이었고,
이는 하늘의 복을 대신 전해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능력이나 의지도 없는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것은 세시풍속에도 어긋나는 빈 말이지요.
⒊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켜온 전통에서도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아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
이렇게 하느님의 복이 필요한 이유는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돌보심 없이 우리의 생명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야고 4,14)이기 때문입니다.
⒋ 사제는 일상적으로 미사 때마다 하느님의 복을 전달합니다.
그 전례의 취지가 어떠하든, 독서와 복음 내용이 어떻든 상관없이 모든 미사의 마침 예식은 강복입니다.
‘강복’(降福)이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이는 모세의 예에 따른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기원을 둔 것이며,
성령 강림에서 연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의 강복은 사제 개인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복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서 선발되어 성품성사로 사제품을 받은 사제들이 이 신자들을
위하여 수행하는 직무를 직무사제직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보편 사제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서, 그리스도인들 중 특히 가정의 가부장(家父長)과
가모장(家母長)인 신자 가정의 부모들은 직무사제직의 강복예절을 본받아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안수를 통해 전달해 줄 수 있고 또 전달해 줄 의무도 있습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의 마침은 부모가 하느님의 복을 안수로써 전달해 주는 강복으로 행해야 합니다.
직무사제직이나 보편사제직 모두 사제직은 대사제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비허(自己卑虛)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를 축성하는 서품예식의 핵심은 안수 예절입니다.
이는 모세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며,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축성하신 예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기도 후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 빵과 포도주와 함께 제자들도 사도로 축성하시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사제직과 성체성사는 그 연원이 같습니다. 이후 사제직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숱한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축복하여왔습니다.
⒌ 모세가 하느님의 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려던 사제직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로 고생하던
그 백성을 당시 지중해 문명권 세계에서 최고로 강력하던 이집트의 손아귀에서
탈출하여 무사히 약속의 땅으로 해방시키는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와 다른 여러 판관들이 수행한 사제직은 필리스티아 등 주변의 강대한
부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내는 축복으로 나타났고, 결국 사울과 다윗
그리고 사무엘의 활약으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하고 열두 지파를 결속시키는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후 왕국의 역사에서는 권력자들의 박해 탓으로 비록 왕국의 분열과 바빌론 유배를 막지는 못했으나,
예언자들이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일로 이어져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을 통해서 변함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복을 말씀을 통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성취로 나타난 축복에 못지않게 말씀을 받아 전하고
이를 다시 기록하여 보존한 말씀의 축복도 엄청난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고난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의 은총”(삼종기도)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위기를 극복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한국인들도 국난극복의 빛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반만 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 동안 수나라와 당나라 등 대륙의 이민족과 일본 같은 해양의 이민족으로부터
수백만에서 수십 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침공과 백여 명 내외의 노략질을 당하여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맞았었고, 백 년 전에는 일본에게 아예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했는가 하면,
칠십 년 전에는 북한으로부터 동족상잔의 남침을 당해 전 국토가 황폐해 진 적도 최근에 있었습니다.
그런 국난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싸웠던 이들은 나라로부터 혜택이라고는
받아본 적도 없었던 노비들과 평민이었고, 이들이 의병(義兵)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⒍ 최근의 사례들만 보더라도, 1960년대에 전쟁의 결과로 벌거숭이 민둥산 투성이였던
전국의 산림을 푸르게 녹화시킨 운동을 먼저 들 수 있습니다.
1967년부터 1982년까지 식목일은 물론 주말마다 전 국민이 나서서 나무를 심은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세계적으로 산림녹화에 성공한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1998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전 국민이 동참하여 20년 이상 걸릴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고 3년 8개월 만에 외채를 갚아버린 금모으기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또 2007년에는 충남 태안의 앞바다에서 유조선이 다른 선박과 충돌하는 바람에
무려 만2천kl가 넘는 검은 원유가 서해로 유출되어 인근의 양식장과
어장은 물론 해안가까지 모조리 기름범벅이 되어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벌어진 모든 해양 원유 유출 사고 중 가장 심각한 규모의 사고였기 때문에
죽은 바다를 되살리려면 바다의 자정작용에 의해 빨라야 20년이고
늦으면 백 년이 걸릴 수도 있으리라던 환경훼손사태였습니다.
그런데 연인원 2백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기름을 닦아 내어
사고가 난 지 채 십 년도 되지 않아 원상으로 복구해 냈습니다.
⒎ 이런 비상한 단결력과 국난극복의 행복한 경험이 뒷받침되어,
작년의 일본발 수출규제조치에 항의하는 불매운동이 벌어지면서 지금에 와서는
반도체 소재와 부품과 장비를 국산화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가 하면,
또 작년 초부터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도 바로 옆에 위치한 우리나라로 번져서
한때 위험할 뻔 했으나 대단히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방역 비상으로 노심초사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방역을 잘 해 내고 있는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네 번의 큰 박해를 포함하여 만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치명하는
백 년 간의 끔찍한 박해조차도 이겨낸 자랑스런 전통도 가지고 있습니다.
⒏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과 기운은 언제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축복으로 전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로서는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시편 90,17. 화답송 후렴) 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미사의 화답송에서 기도했던 대로,
“산들이 솟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생기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⒐ 성품성사는 사제직의 성사입니다. 직무사제직으로 보편사제직을
지향하는 이 성사의 은총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은총을 받는 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살아 있는 돌”(1베드 2,4)이신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시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이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
이 설날, 하느님께 복을 청하시고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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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하느님의 자녀답게!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주 예전 29년전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한 강론 제목이 지금도 여전히 절박한 물음으로 와닿습니다.
새벽 일어나 집무실에 들어가기전 ‘삼위일체적 삶’이 되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원 세바퀴를 돈 후 맨손체조를 합니다.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적 삶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우리 소망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미사 본기도를 나눕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그대로 본기도가 오늘 강론 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느님의 자녀답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 기도 내용대로,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이 되어 즉 삼위일체적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한 구체적 지침을 줍니다.
첫째, 하느님께 축복 받은 삶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천복天福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참으로 귀한 하느님의 선물, 품위의 사람입니다. 요즘 태어난 신자 아기들을 대할 때 마다 저절로 나오는 탄성입니다. “아, 하느님의 선물이다!”, “아, 하느님의 작품이다!” 그러니 시종여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늘 깨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간 사랑의 일치도 이렇게 하늘 아버지의 자녀요, 서로간에는 형제라는 자각이 있어 가능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제의 강복으로 새삼 우리 하나하나가 축복 받은 존재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한 두 번의 축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사되는 천복이요, 날마다 특별히 오늘 설날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사제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6,27)는 주님의 분명한 약속 말씀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 보편 사제직에 불림받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이웃을 소중하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주님의 축복이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도 주님의 축복을 비는 내용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둘째, 겸손한 삶입니다.
주님의 강복降福을 청하는 마음 자체가 겸손이요 축복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회개의 은총과 더불어 선사되는 겸손의 덕입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겸손humilitas이요 사람homo입니다. 흙처럼 수수하고 소박하여 진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을수록 참으로 지혜로운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 롤모델입니다. 오늘 제2독서 야고보서는 부자들에 대해 자만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믿기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의 허무감에서 벗어나 겸손히 하느님께 하느님께 희망의 닻을 내리고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의 근원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 절망과 무의미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겸손입니다. 겸손이야 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셋째, 깨어있는 삶입니다.
주님앞에 겸손이듯 주님 앞에 깨어있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막연한 깨어있음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리워할 때, 기다릴 때 깨어있음입니다. 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자 축복인지요!
외로워서 사람이라 합니다. 외로움에 대한 근원적이 처방도 깨어있음뿐입니다. 외로움을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바꿔 깨어 기다릴 때 외로움은 행복감으로 변합니다. 기다림의 깨어있음,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외로움은 없습니다. 저 역시 혼자 있어도 외롭다 느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님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주인’을 ‘주님’으로 바꿨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은 모습은 그대로 준비된 깨어있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을 때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순결과 열정이 샘솟는 참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깨어있음의 영적훈련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있는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님이 올 것이다.”
누구를 기다립니까? 기다릴 대상, 주님이 계시기에 주님을 희망하여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기다리겠는지요! 늘 깨어 설레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큰 행복이요 축복인지요!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깨어 있음뿐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만나는 기도시간이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끊임없이 축복을 내리시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겸손한 삶,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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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행복하게 한 해를 살아갈 지혜를 일러줍니다. 복음의 "깨어 있음", 제1독서의 "축복의 소명", 그리고 제2독서의 "하느님 중심성"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한 해를 시작하는 설에 우리 민족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가신 조상들을 기립니다. 새로운 시간을 열면서 다가올 미래를 두근두근 기대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또 언젠가 맞게될 죽음을 상기하는 것은 지혜롭고 의미 깊은 전통입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
각자의 마지막 날과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오직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만 아시는 그날 그 시간은,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게 만들지요. 그렇기에 하느님 계획에 대한 무지는 오히려 인간에게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예수님께서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이들이 행복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깨어 있음"은 물리적으로 잠에서 벗어난 상태라기보다, 영적인 각성 상태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의 근원과 목적지를 인식합니다. 하느님의 숨이 아니면 흙의 먼지와 같이 보잘것없고 미소한 존재임을 아는 겸손에,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함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이들이지요.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을 기억합니다. 기억은 그 은총과 환희와 감사를 현재화해서 살아가게 하지요. 하느님과 누린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지금 여기서 그 사랑을 살아가는 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깨어 있는 영혼을 본 주인의 기쁨이 이렇게 표현되다니 놀랍지요! 종과 주인의 세속적 주종 관계를 생각하면 마치 종과 주인 사이의 신분이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강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낡고 병든 계급 관념을 깨뜨리고 내려오신 신비입니다. 주인이 깨어 기다리던 종에게 해 주는 섬김의 모습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고 싶어 늘 준비하고 계신 사랑입니다. 그분은 언제라도 그렇게 해 주고 싶어 노심초사 기다리십니다. 이 기다림은 그래서 그분과 우리, 쌍방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제인 아론 집안에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복을 지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께서 사제들에게 축복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이 백성을 향해, 주님께 복을 받고 그분 얼굴을 마주하며 은혜와 평화를 누리라고 빌어 줄 때,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서로를 축복해 주는 이 아름다운 소명은 직무사제직에 불리운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으로 불리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 누구나 축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축복은 타인을 위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축복을 빌어 주는 이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축복하는 마음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우리 삶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5)
치열한 물질주의적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미래와 직업, 재산과 관련해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동동거리지요. 하지만 재산이나 건강, 커리어 등 기껏 쌓은 공든 탑이 계획과는 상관없이 일순간 무너져 버린 허무한 경험을 자신에게든 타인에게서든 목도한 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제 능력이나 우연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모든 것 뒤로 당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의 겸손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얕은 꾀와 조급한 계획, 엉성한 실행력에도 불구하고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제 능력인양 오만하고 교만하게 하느님과 세상을 낮추어 보기 일쑤지요.
"주님께서 원하시면"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이제부터 우리의 계획이나 지향 앞에 늘 이 말씀을 새겨넣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살라는 뜻이 아니지요. 모든 일이 그분께 달렸다는 듯이 겸손하게 의탁하고,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렸다는 듯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대림시기 첫 날, 1월 1일,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에게 벌써 새로움의 은총이 세 차례나 주어졌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사랑을 향해 깨어 준비하며,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있어 올해의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고, 주님도 뿌듯하고 기쁘실 겁니다.
아론의 측복으로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새해 주님 복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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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오늘은 민족의 큰 고유명절인 '설 명절'입니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본질인 사랑이 더 충만하고, 그래서 영과 육이 더 건강해지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작년 3월에 어머니를 하느님께 보내드리고, 부모님이 안 계신 가운데, 첫 설 명절을 맞이하게 되어서 특별한 마음이지만, 미사와 기도 안에서의 만남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설 명절은 우리의 본질인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조상님들을 통해 베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이 사랑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날'입니다.
이번 설 명절은 코로나로 인해 친교의 제한을 받고 있어 함께 모여 지낼 수 없는 특별한 설 명절이지만, 마음으로 더 뜨겁게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드리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그런 설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이것이 지금 살아있는 우리네 인생이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니,
욕심과 탐욕을 좀 내려놓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나누고, 그래서 함께 행복한 사람들, 그렇게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 명절인 오늘은 '아론의 축복'으로 강복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전능하신 천주(+)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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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설 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수천년간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 풍속도까지 뒤바뀌게 했습니다.
그 얼마나 정겨웠습니까?
평소 각자 삶의 자리에서 발버둥치다가 오랜만에 고향집에 모여 오손도손, 알콜달콩 밤늦도록 시간가는줄 모르고 쌓인 정담을 나누던 시절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선책을 찾는 것이 도리겠지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 함께 한 자리에 모이지는 못할지라도 영상통화나 SNS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설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더 간절한 마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기도해드리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라는 성경 말씀이 오늘따라 어찌 그리 피부로 와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가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탄탄했던 가족 구조가 언제 그랬냐는듯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앞 세대가 한명 한명 떠나고 허물어지자 신기하게도 다음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의 든든한 보루셨던 할머님께서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허무하게도 먼저 떠나가셨습니다.
제게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든든했던, 마치 슈퍼맨 같았던 아버지께서도 자동차 시동 꺼지듯이 스르르 사라지셨습니다.
듬직하고 자랑스러웠던 형 조차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황급히 건너갔습니다.
따지고보니 저는 어느덧 가계 구조 안에서 최상위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꿈을 꾸는데, 먼저 떠나신 할머님, 아버님, 형, 이모, 고모, 사촌 누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다들 큰 강 건너편에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이모, 고모, 사촌 누나들이 너무 고운 것이었습니다.
이팔청춘 때의 얼굴이었습니다.
까르르 웃으면서 저에게 빨리 건너오라는 듯이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저는 “오늘은 내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라는 말씀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수시로 하게 되는 수많은 착각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참 많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음식은 칼로리가 그렇게 높지 않을거야. 마음껏 먹어도 괜찮을거야!”
“통장에 얼마나 잔고가 남아있을까? 아직 많이 남아있겠지?”
“나는 절대 착각하지 않을거야!”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야.”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거야!”
다양한 착각 중에서도 가장 큰 착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적어도 죽음이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대자연의 순환주기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그 누구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하느님 측의 마지막 초대 앞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같아서는 가는 세월을 꼭 붙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웬걸, 잠깐 한 눈 팔다보면 순식간에 70이요 80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 백번 생각해봐도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100세를 넘기기 힘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백일 붉은 꽃이 없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 지금 이순간의 상승무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이 꿈결 같은 행복, 이 순간의 축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도 잘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순환의 법칙은 때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순간, 꽃 같은 젊음도 가고, 인생의 절정기도 가고, 그 좋았던 시절도 가고,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시들고 메마른 육체, 그리고 임박한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외적으로 특별대우를 받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처럼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죽음에 대한 시각이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 죽음으로 인해 끝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 그간 일궈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은 결코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일깨워줍니다.
죽음은 나약한 우리 인간과 사랑 지극한 하느님이 온전히 합일되는 감사의 순간입니다.
죽음은 부족한 우리 존재가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충만히 실현되고 완성되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신앙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힘입어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이 절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희망에 찬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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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설 날]
부모의 은혜
사람들은 제 이름을 듣고 개명할 생각을 안 해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제 이름이 창피한 줄 잘 몰랐는데, 대학교 들어가니 저를 모르던 학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일제히 웃는 것을 보고는 조금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주신 부모님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름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은 제가 딸이기를 무척 바랐습니다.
그런데 또 아들이 나오자 어머니도 고생해서 아이를 낳고도 인정받지 못했고, 아버지도 화가 나셨는지
형 둘은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었지만 저는 그냥 세 번째 태어났으니 뒤에 돌림자 ‘용’과 앞에 ‘석 삼’을 넣어
‘삼용’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기가 죽어있는 상태라 말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저는 태어날 때 목 뒤에 커다란 혹이 달려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삼형제 중 저를 낳을 때가 가장 힘드셨다고 합니다.
얼굴도 얼마나 못생겼던지, 어머니는 이런 저를 안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시며 목에 붙은 혹을 제거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원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가 태어난 이후로 집안에 우환이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도 여러 번 크게 다치셔서 뇌수술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도 점점 더 가난해졌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에 ‘김원전’이라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성은 ‘김’이고 이름은 ‘원’인데, 태어날 때부터 알처럼 생겨서 이름이 ‘둥글 원’입니다.
어머니가 어느 날 혼절하는 고통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검은 알처럼 둥글게 생겼습니다.
어머니도 까무러칠 일이었지만, 남편이 이를 보고나서 부인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아기는 어디 있소?”
아마도 “도대체 ‘내가 기대했던’ 아기는 어디 있소?”라고 묻는 것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게 되자, 동네 사람들 중 어떤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알에서 이무기가 나와 못된 짓을 하고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군사를 풀어 그 이무기를 죽이고, 그것을 낳은 사람도 흉악한 죄인이라 하여 빛을 못 보는 곳에 가두었다가 굶겨 죽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덕망이 높은 집안에서 저런 알이... 아니 아이가...”
부부가 시름에 잠겨 밥을 먹고 있는데 알이 이불 속에 있다가 굴러서 밥상 옆으로 옵니다.
아버지가 입도 없는 녀석이 밥을 먹으려고 하니 신기해하면서 밥을 한 그릇 주어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알에서 입이 새 부리마냥 나와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아내에게 밥을 계속 주라고 합니다.
검은 알은 밥을 먹으며 몸집이 커져서 결국 다른 방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달빛을 타고 신선이 내려와 알을 깨뜨리니 알에서는 건장한 청년이 나옵니다.
이 건장한 청년은 머리가 아홉 달린 아귀라는 괴물이 공주들을 납치해가는 것을 목격하고 공주를 구하러갑니다.
지하세계에 들어가니 괴물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괴물을 죽이고 공주들을 구하고 그 중 한 명과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머리 아홉 달린 아귀는 자기 자아입니다.
자아가 그렇게 크고 대단해지면 부모님 또한 그런 모습을 하게 됩니다.
사춘기 때는 자아가 너무 커져 부모님이 내가 넘어서야 하는 큰 괴물같이 보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박해하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날 참으로 어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부모님에 대한 시선도 다시 변하게 됩니다.
만약 김원의 부모님이 이웃의 말을 듣고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면 아이가 성장하여 자기 자신을 벗고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부모는 아이가 밥을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 부모가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가장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아프게 한 것만 생각하며,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춘기부터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자아라는 괴물을 죽이지 못해서입니다.
저도 못난이로 태어났지만, 제 목에 난 혹에 어머니가 자주 당신 침을 발라 계속 문지르셨다고 합니다.
그 혹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의 사랑은 저를 온전히 자라게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도 저희를 사랑하셔서 고생스럽게 돈을 버셔야 했지만, 저를 보며 화를 내신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사랑해주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사랑이 저를 성장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를 감싸고 있는 못난이 콤플렉스는 제 스스로의 싸움이었고, 제 신앙으로 인해 달을 타고 내려오신 그 분께서 깨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 안에서 나와 나 자신과 싸워나가고 그래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까지
성장시켜주신 분은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괴물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음식을 차리고 차례도 지냅니다.
부모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님들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알 속에만 갇혀있지 않게 우리를 알 밖으로 나오게 해 주신 또 다른 부모님이 계십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부모님이신 하느님과, 또한 그 분께서 우리 부모님으로 세워주신 그 분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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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설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입니다. 먼저 설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잘 아는 복음입니다. 한마디로 “깨어 있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하는 게 깨어 있는 것인지는 어려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잠을 자지 않는 게 깨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지 않을 때 이 말씀이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깨어 있음은 생물학적인 깨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일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00년 전에도 때가 차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셨는데 그럼 20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무런 징후가 없는데 이 말씀은 그럼 부도난 수표인가 하고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 개신교 다닐 때 가장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부분입니다. 심지어는 목사님에게도 이 부분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시면 제가 완전히 예수님께 올인을 하겠다고 단언한 적도 있었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은 성경을 질문하면 거의 성경에 대해서만큼은 예전에 보면 답을 하지 못한 목사님은 없으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개종 후 우연히 고성 올리베따노 수도원에서 제가 일주일 동안 마산에서 고성까지 수도원에 수사님들을 위해서 영어 강의를 하러 가고 마지막에 토요일에 뒷풀이하면서 수사님과 신부님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이 부분을 말씀드리면서 한 수사님이 어떤 설명을 하셨습니다. 사실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은 누구나가 아는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그 말씀으로 예전에 의문을 가졌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좀 더 사실적으로 와 닿을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육을 입고 사는 육적인 존재라 육적인 시간의 개념이 예수님이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시간의 개념과 달라서 쉽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는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2000년 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고 또 예수님의 재림은 언젠가인지도 모르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재림이 지금이라고 하면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육적인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잠시 이렇게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 50년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간이라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실제 그렇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50년이라는 시간도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우리는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 하나 “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은 2000년 전에 하신 과거의 역사 속 말씀이라고 인식을 하면 되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거라고 봅니다. 현재진행형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깨어 있는 사람일 겁니다.
깨어 있다는 사실이 마치 천국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사실은 가장 기본일 겁니다. 영혼이 깨어 있지 않다는 것은 육은 살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혼은 죽어 있다는 말씀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의 심판대를 생각합니다. 물론 죄를 지을 땐 그땐 그걸 놓치곤 합니다. 죄를 지으면 또 회개를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대하면 겁이 날 수도 있지만 꼭 겁만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심판대는 격려와 위로, 영광의 심판대도 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얼마나 그걸 잘 극복하려고 애를 써고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그 과정도 충분히 참작하실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은 성인들께서도 언급을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의 의지에 하느님께서는 초점을 두실 겁니다. 그럼 결론을 맺겠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지만 오늘 제가 묵상한 내용의 요지는 성경이나 하느님의 말씀이 과거 역사 속에 하신 말씀쯤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자기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고 또 그 말씀은 먼 미래에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고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바로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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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설 매일미사_조정래 시몬 신부 집전
https://youtu.be/4pbDAPyHdn8 (50:16)
•2021. 2. 12.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조정래 시몬 신부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집전
** 매일미사 시청 시에는 "자막 (오른쪽 상단의 CC)"를 꼭 끄고 시청부탁드립니다. **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40
*** 신부님 강론 21분 43초부터 31분 23초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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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로마노 형제님.
음력설 제1독서 (민수 6,22-27)
◀구약의 사제(제사장)의 임무▶
① 사제는 <(번)제단>에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성결케 하는 일을 행했다. (레위16,18-19) (번)제단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갈바리아산 십자가 제단을 의미한다.
② 사제는 <물두멍>에서 수족을 닦는 일을 행했다. (탈출30,19-21) <물두멍>의 씻음은 영적으로 회개와 성령을 의미한다. 날마다 자신을 씻어야 하고, 씻어야만 <성소>에 들어가 봉사를 할 수 있고 씻지 않으면 죽었다.
③ 사제는 <제사상>에 <제사빵>을 놓아 두어야 했다. (탈출 25,30 : 레위24,6-8) 사제는 성소안에 있는 제사상에 매 안식일마다 12개(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를 올려 놓아야 한다. <제사빵>은 영적으로 생명의 빵(성체)이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④ 사제는 <등잔대>(탈출25,31-40)에 불이 꺼지지 않게 점검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탈출30,7-8) 올리브유의 순결한 기름으로 등불을 켜고, 저녁부터 아침가지 사이 사이 점검하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사명이 있었다. 이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일곱 등불은 칠성사를 상징한다.
⑤ 사제는 <분향 제단>에 향을 피워야 했다. (탈출30,7-8) 사제는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을,<등>을 정리(손질)할 때와 저녁(해거름)에 등을 켤 때도 피워야 한다. 사제는 분향 제단에서 향이 끊이지 않고 타오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향을 피우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구약의 대사제(대제사장)의 임무▶
①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일을 행했다.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 7월 10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신과 온 백성들의 지은 죄를 속죄하는 의식의 임무를 담당했다. (레위16,17 : 히브9,7)
② 판결하는 일을 했다. (신명21,5)
③ 만남의 천막안의 모든 일을 총지휘했다. (민수3,21-37 : 4,46-48)
④ 하느님의 말씀(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2역대15,3 :신명6,6-7 : 8,3) 대사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살 수 있도록,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했다.
⑤ 대사제는 대를 이어 종신토록 직무를 담당했다.
⑥ 대사제는 축복하는 일을 하였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레위의 자손 사제들) 선택하시어 당신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판결에 따라 모든 송사와 폭력 사건이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21,5)
대사제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 주님께서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사제들에게 일러,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축복을 빌라고 하셨다. 그 축복이 바로 유명한 사제의 축복이다. (민수6,24-26)
"주님께서 그대(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6,22-26)
주님께서는 사제가 백성들을 행해 비는 복을 그대로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민수6,27)
주님께서는 사제들에게 축복권을 주셨다. (신명21,5) 축복은 사제가 하지만, 축복을 보장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사제는 계속 축복해야 한다. 주님의 종 모세도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마음껏 축복했다.
바로 유명한 축복장이 있는 곳이 신명기 28장 1-6절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땅의 모든 민족들 위해 너희를 높이 세우실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 소와 새끼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음력이든 양력이든 설에는 항상 새해 첫날이기 때문에, 미사를 통해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민수기 6장 22-27절의 말씀을 선포한다.
구약을 통해 사제들의 변천사를 보면, 축복의 변천사도 함께 묵상할 수 있다.
아담으로부터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족장(가장) 사제들이었고, 그 다음 율법시대에는 아론과 그 아들들, 그 다음은 레위지파, 그 다음은 나지르인으로 넘어가다가 이제 신약의 시대에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만인 사제단이 탄생하였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1베드2,5)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2,9)
오늘 음력 설 미사를 통해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사제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도,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의 노고와 희생을 통해 영적 제물을 바치는 사제이기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가깝게는 가족들, 친지, 친척, 친구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자.
2021년 2월 12일 [설날] 깨어 있어라
(루카 12,35-40)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 허리(몸의 중심) -곧 삶의 중심에~ 띠 - 진리 그 진리의 성령의 불을 켜 놓아라. 성령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살아라. 입니다. 등은 교회입니다.(묵시1,20참조) 그 교회를 성령으로입니다.
(요한14,16-17)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을 진리로 알고 의지하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에페 1,13)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로마 8,1-3)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세상 속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모든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 예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와 하나, 한 몸을 이루시고~ 영, 그리스도로 오십니다. 그 완성이 혼인입니다.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 구원의 주님으로 곧 바로 맞아드릴 수 있도록 기다려라 입니다. 내 뜻을 위한 주님이 아닌, 또 도덕과 윤리의 주님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죄인들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르시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이~~ 그가 주님의 눈이 보시는 깨어있음입니다.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 예수님께서 어떻게 시중을 들어 주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대해 주시는 그 시중입니다. 땅의 선악의 도덕과 윤리 그 심판이 아닌 하늘의 진리 죄의 덮으심을 위한 당신의 대속, 그 진리로 용서 받은 자 , 거룩한 자로 당신의 신부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히브13,12) 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티모 4,5) 5 사실 그것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 주님께서 밤중- 우리의 어둠 때, 그 시련으로 오시든. 새벽-삶의 빛, 기쁨으로 오시든~ 구원의 주님으로 기다리는 이는 복이다. 하십니다.
우리의 시련을 통해서 주님은 구원의 일을 하시기에 그 시련 속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때 오시는 주님을 무슨 수로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지혜로는 아무리 준비를 잘 한다 해도 그분의 때를 맞추기는 불가능 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기름 = 성령. 곧 하느님의 뜻 그분의 때를 잘 아시는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25,3-4)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 깨달음이 아닌 행위의 신앙을 하는 어리석은 등(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은 죄입니다.(마르7,22참조) 그러나 깨달음을 위한 기름, 곧 성령을 준비하는 신앙은 슬기로움, 선입니다.
(요한7,38-39)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 그 성령께서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5,16참조)
(로마 8.9-10)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아멘 -*^ㅇ^*-
설날 복음(루카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5~36)
루카 복음 12장 35절에서부터 38절까지는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인데, 루카 복음 12장 35절에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두 가지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모습이다.
'페리에조스메나이'(periezosmenai; girded about)는 '띠를 매다'는 뜻의 동사 '페리존뉘미'(perizonnymi)의 완료 수동태로서 '이미 허리에 띠가 매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허리띠를 지금 당장 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맬 것도 아니며, 이미 허리띠를 맨 상태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입었던 겉옷은 길고, 그 통이 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일을 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겉옷을 허리띠로 졸라 매야만 했다.
여기서 종들이 허리에 띠를 맨 이유는 문맥상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도 혹시라도 나태해져 방심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깨어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준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등불을 켜 놓은 상태로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켜 놓고'로 번역된 '카이오메노이'(kaiomenoi; burnning)는 '불을 켜다'는 뜻의 동사 '카이오'(kai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 '계속적으로 불이 켜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는 목적은 어두워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하며 기다리던 주인을 맞아들이기 위한 것이다(마태25,1~13).
따라서 본문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있어라'에 해당하는 '에스토산'(estosan; let be)은 '에이미'(eimi; be) 동사의 현재 명령형 3인칭 단수로서 '계속적으로 있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에이미'(eimi)동사는 '있다' 또는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가 여기서 현재형으로 사용된 것은 이러한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르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몬'(gamon; wedding banquet)의 기본형 '가모스'(gamos)는 혼인 잔치 자체를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졌기에, 그 주인이 혼인 잔치로부터 돌아올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이 되므로, 그 종들은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는 교훈을 주기에 적절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배경 설정의 이유만이 아니라, '혼인 잔치'는 천상에서의 기쁨과 영광의 혼인 잔치를(묵시19,9), '그 주인'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혼인 잔치의 집'은 하늘 옥좌를 암시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돌아오는'으로 번역된 '아날뤼세'(analyse; he will return)의 기본형 '아날뤼오'(analyo)는 '풀다'는 뜻에서 발전하여 '떠나기 위해 천막을 걷거나 배의 닻줄을 푼다'는 점에서 '떠나다','출발하다'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는 혼인 잔치 집을 떠난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주님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옥좌를 떠나 내려오실 것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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