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앤 볼린이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아버지 헨리 8세로부터 냉대를 받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자 홀로 자랐다. 그녀는 ‘피를 부르는 메리’라는 별명답게 잔인했던 언니 메리 여왕에 의해 런던탑에 갇혀 위험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마침내 엘리자베스 1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튜더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잉글랜드가 대 제국으로 성장할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엘리자베스는 성공회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업적을 세웠다. 여왕은 성공회가 가톨릭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교리만 개신교로 바꾼 중도적 교회로 만들려는 종교 정책을 제안하였다. 엘리자베스는 부친과 성장 환경으로 말미암아 프로테스탄티즘을 선호하였다. 그녀는 새로이 수장령(1559)을 선포함으로써 메리가 제정한 가톨릭 법령들을 모조리 철회했고, 동시에 에드워드 시대에 행해진 예식상의 프로테스탄트적인 개혁들을 대부분 수용했다. 반면에 그녀는 주교에 의한 교회 통치를 그대로 유지했고, 신앙 문제에서의 논란이 많은 일부 조목들, 특히 성찬의 의미 등에 대해서는 정의를 분명히 규정하지 않고 모호하게 남겨둠으로써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극단주의자들까지도 대부분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 분쟁의 종말이 아니라 더 큰 갈등의 시작이었다. 여왕의 종교 정책은 국민들을 그에 순응하는 국교도와 불응하는 비국교도로 분열시켰다. 종교문제의 해결에 있어 엘리자베스 여왕은 온건한 중도 노선을 견지함으로써 일반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를 수립했지만, 열렬한 가톨릭교도와 급진적 개신교도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비국교도들 중에서도 완전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열망하는 퓨리턴들은 국교회를 부정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가혹하게 탄압을 받던 이들은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러므로 미국 문명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나머지 퓨리턴들은 탄압에 저항하다가 1640년대에 이르러 청교도 혁명으로 불리는 잉글랜드 내전의 주역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종교분쟁이 없어지는 날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새시대가 시작되는 날이 되겠지
남편이 영업을 이유로 '교회 다닐까? 그러는데...
가라고 조언했다. 뭐는 뭐라서 안되고 그런거는 좀 넘어서보자. 그리고 경험해보자는 측면으로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