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통합, 그리고 연속의 무늬
ㄹ
국어사전인데도 외국어들만이 나타나 큰기침을 하고 있는 곳이 있다. 마치 조차지租借地처럼 한국말은 완전히 밀려나 발 디딜 곳이 없는 땅, 그곳은 '라디오'로 시작되어 '링' 등으로 끝나는 ㄹ 항목이다.
두음법칙에 의해서 ㄹ 음이 첫머리에 나올 때에는 그 소리가 ㄴ 음으로 바뀌게 되는 음운론 탓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한글 사전의 ㄹ 항에서는 문자가 소리를 압도하고 앞자리에 서게 된다. ㄹ 자는 이미 단순한 소리의 흔적, 소리의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된 시민권을 지니고 두 발로 서 있다.
그러고 보면 한글의 문자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또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그 ㄹ 자라고도 할 수 있다.
흔히들 한글을 표음문자라고 하지만 그 자형을 가만히 살펴보면 영어의 알파벳과 결코 같은 자리에 앉혀 놓을 수 없는 문자다. 한글은 단순히 소리를 표기하는 자의적인 글자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영어의 K 자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소리와는 어떤 동기성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소리와 글자의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글의 첫째 자음인 ㄱ 자는 ㄱ을 발음할 때의 소리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ㄱ 음을 발음할 때에는 혀뿌리를 높여 입천장 뒤쪽에 붙였다가 떼어야만 한다. 그때의 혀 모양을 본뜬 것이 바로 ㄱ이라는 한글의 자모다. 일종의 발음기관의 상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한글이 지닌 특성이다.
두 번째 자모인 ㄴ 자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ㄴ 음은 ㄱ과는 달리 혀끝을 윗잇몸에 붙였다 뗄 때 나는 소리이므로 그 혀 모양은 ㄱ과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ㄱ과 ㄴ은 글씨 모양이 완전히 뒤집어진 대립 관계를 보여준다.
이렇게 따져가면 ㄹ 음에서는 혀끝을 떠는 혀 모양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뿐만 아니라 ㄹ이 ㄱ, ㄴ, ㄷ의 세 자소를 다같 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ㄱ과 ㄴ의 이항대립을 함께 포섭하여 무한한 연속체를 만들어내는 통합의 형태가 바로 ㄹ 자다. 마치 그 글자는 1, 2, 3, 4 등의 모든 숫자 모양을 다 포함하고 있는 디지털 숫자판에 나오는 아라비아 숫자 8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있다.
물론 ㅁ 자도 그렇다. 그러나 ㅁ 자는 그것 자체로 완성, 고립되어 닫혀 있지만 ㄹ은 한국인이 곧잘 애용하고 있는 완자무늬처럼 계속 연결하여 끝없는 연속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열린 형태를 하고 있다.
사실 그러기 때문에 한글의 ㄹ 자처럼 ㄹ의 그 유음과 잘 어울리는 글자도 아마 없을 것이다.
돌돌 돌아가고 졸졸 흘러가는 것들을 한글로 적어 놓으면 표음문자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상형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ㄹ이 겹쳐져 있는 글자들은 우리에게 무한히 연속되는 유동체의 운동을 눈앞에 선하게 떠올리게 한다.
'솔방울이 떼굴떼굴 굴러간다'라고 써놓으면 완자무늬처럼 여섯 개의 ㄹ 자가 등장한다. 여기에 만약 ㄱ 자를 넣어 '솔방 울이 떽떼굴 떽떼굴 굴러간다'고 하면 계속 굴러가던 솔방울이 무엇에 걸렸다 굴러가고 굴러가다 걸리는 단절과 연속을 나타내게 된다. 한글의 ㄹ 자는 한글이 지닌 글자의 특성과 그 미학을 가장 잘 나타내는 황금의 모형이다.
우리 문화 박물지 중에서
이어령 지음
첫댓글 황금의 모형~~ 어떻게 저렇게 잘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존경할 어른이 잘 없는 세상에 이어령 교수님은 글로 만나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큰 한국인 어르신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