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11호 역동적인 삶을 원하면 목표를 설정하라 (빌3:10~21)
역동적인 삶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목표가 당신의 삶을 신바람 나게 할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힘든 훈련을 감내할 수 있었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저희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있기 때문에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3년 후 파리 올림픽을 위해 달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목표가 있어 땀이 비 오듯 하는 강훈련에도, 감독의 불호령에도 이탈하지 않고 버티는 것입니다.
배우가 한겨울에 물에 빠지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구르기도 하는 등 힘들고 어려운 연기를 너끈히 해내는 것도 그들에게 확실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스타가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영화가 잘 되어 흥행대박을 치면 나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꿈과 목표가 있기에 임계점을 넘나들며 혼신을 다해 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표가 있는 자, 목적의식이 분명한 자는 의욕이 넘칩니다. 목표가 의욕을 생성케 하는 묘약인 셈입니다. 의욕은 넘지 못할 벽이 없을진대 포기하거나 피곤할 리가 없지요.
언젠가 제 영어통역을 해주는 임 박사가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때 저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을 지구촌에 전하는 것이고, 최종 목표는 그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불리며, 열 고을의 왕권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37년 동안 지치지 않고 이렇게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크고 작은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전 세계를 교구화 하리라’는 목표부터, ‘전 세계와 전국의 체육관을 활용해서 복음을 전하리라’, ‘이 나라와 민족에 평화통일을 이루고야 말리라’…. 이런 목표들이 저를 쉬지 않고 달려오게 한 원동력입니다. 지금도 저는 ‘저 김일성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리라’는 목표와 ‘백만 명 집회를 하리라’는 목표가 있기에 잠시도 나태하게 지낼 수 없습니다. 갈 길이 먼데 어찌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겠습니까?
목표가 확실한 자와 목표가 없거나 모호한 자의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부평초와 같고, 표류하는 배와 같아 이미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방향 없이 이리저리 달린다면 어떻게 골인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활을 잘 쏘는 사람일지라도 과녁이 없다면 어디에 활을 쏜단 말입니까?
‘명문대에 가리라’는 목표를 세운 수험생과 ‘아무 대학이나 가지’ 하는 수험생의 공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직업이니까’ 하고 세일즈 하는 자와 ‘이걸 벌어야 엄마 병원비를 마련할 수 있다’라고 목표가 분명한 자의 영업방식과 열도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가 한 말이 있습니다. “어린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느 배역이든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플 시간도 없었고,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두 아들을 잘 키우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그녀는 역경이 역경인 줄 모르고 힘차게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저는 윤여정 씨를 보면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어린 자식을 살리겠다는 목적이 그녀로 하여금 무모하리만큼 대범한 행동과 지혜를 발휘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자! 이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툭 하면 시험에 들고, 뻑 하면 교회 가기 싫은 분들, 교회에서 뭐 좀 하라고 하면 먼저 불평불만부터 터지는 분들, 왜 그럴까요? 분명한 목표가 없어서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바로 이것입니다. 그날에 받을 면류관과 상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만 부름의 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와 똑같이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9). 하나님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고 하셨습니다.
그날의 소망을 확실히 붙잡은 자는 누가 하라고 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상을 보고 뜁니다. 그날에 목표를 둔 자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이 땅에 유토피아를 쌓지 않습니다. 동록이 없는 하늘나라에 쌓지요. 그날에 받을 상과 면류관이 목표가 된 자는 이렇게 코로나가 창궐하여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에 더욱 기도하고, 묵묵히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날에 받을 상은 마치 사과 씨 안의 사과처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헌신, 아주 작은 헌금, 겨자씨만한 믿음을 행했을 뿐인데, 하늘에서 받을 상은 사과 씨 하나를 심었는데 많은 사과를 거두는 것처럼 엄청난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망이 되고, 목표가 된다면 어찌 대강대강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남들이 다니니까, 부모가 다니라고 하니까 교회에 다닙니까? 그러면 다니는 당신도, 보내는 누군가도 힘듭니다. 힘들지 않게, 기쁨으로 성전에 나오고 싶지요? 그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천국과 주님이 주실 면류관과 상을 목표로 삼아보세요. 지난주일까지 그렇게 무겁기만 하던 교회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천 원 내기도 아깝던 헌금이 천원 밖에 못 드려서 죄송하게 될 것이고, ‘왜 저 사람들은 주일에 나와 종일 저러고 있나?’ 했던 것이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변하게 될 것입니다. 목표를 갖게 되면 이렇게 달라집니다. 나태하고 수동적인 삶이 역동적으로, 능동적으로 180도 바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9:26~27)고 했습니다. 향방 없는 자의 삶, 목표가 없는 자의 삶은 허공을 치는 것 같다는 겁니다. 허공을 치고 사는 삶, 참 가련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지금처럼 사시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라 하십니다(요15:14). 친구는 곧 동지요, 뜻을 같이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곧 예수님의 러닝메이트로서 그분의 뜻을 함께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대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하다면 못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봄에 나른함을 이기고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거둘 곡식을 알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목표가 흔들리면 삶도 흔들립니다. 목표가 무너지면 삶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목표를 꼭 붙들라고 경고하십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아들을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한나, 금의환향을 목표로 가진 야곱, 무너진 예루살렘 성곽을 보수하겠다고 결심한 느헤미야, 푯대를 향하여 달린 사도 바울,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일념에 온몸을 던지신 예수님. 모두 남들의 무시와 핍박과 야유를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목표가 없다면 이제라도 작은 목표부터 세워봅시다. 그러면 당신 삶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사냥감같이 매번 숨고 소극적이던 인생이 사냥꾼의 인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역동적으로 말입니다. 매사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질주하는 삶, 신바람 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냥감이 될 것이냐 사냥꾼이 될 것이냐
목적이 이끄는 삶은 지치지 않는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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