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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의 걸림돌
마가복음 4:7, 18~19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오늘 우리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4가지 밭에서 세 번째로 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비유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돌밭에 뿌려진 것은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되었고, 길가에 뿌려진 씨는 싹은 틔웠으나 뿌리를 못 내린 점을 말하였다면,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므로 단계적으로 성장에 대한 것을 보이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토질이 좋아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시떨기의 실뿌리와 함께 뿌려진 씨가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시떨기는 잡초의 일종으로 이스라엘 땅에는 가시떨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만 뿌린 씨앗이 뿌리를 깊게 내려 자라지 못하게 되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가시가 기운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가시의 영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가시떨기’를 영어로 ‘thorns’라고 하였고, 원문에서는 ‘아칸다’(ἄκανθα)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창 3:18에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 형벌로 주어진 것이 가시덤불입니다. 처음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마음이 괴롭고 환경이 거칠어집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머리에 강제적으로 씌운 것이 가시 면류관입니다. 머리를 찌르는 가시로 인하여 예수님의 정신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이 거둘실 때까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마귀의 술책을 알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입니다. 아담은 온전한 사랑을 잃어 죄를 짓고 이후의 모든 자손이 그 죄에 묶이게 되었다면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셨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녀야 할 마땅한 태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으로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를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를 성장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과의 사랑은 감성에 의한 혼적인 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면 기분이 좋고 헤어지면 그리워지고 하는 감성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는 다릅니다. 오직 성령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성령으로 내게 둘러쳐 있는 환경에서 느낄 수 있고 말씀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와 닿으면서 나의 온 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모든 지정의(知情意)를 합하여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보내므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믿음이고 우리가 성취하여야 할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열매 맺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는 이를 방해하는 3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시를 제거하는 길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염려가 믿음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하였습니다.
막4: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더러는’을 영어에서는 ‘Other’라고 하였는데 헬라어에서는 ‘알로스’(ἄλλος)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러 개의 많은 씨가 있는데 다른 이라는 것은 씨의 본질은 같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에게 떨어지므로 말씀의 기본은 같으나 어떤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씨와 더불어 가시도 함께 자라고 이로 인하여 가시의 기운으로 결실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미뤄 우린 신앙인들의 마음에 깔린 습관적인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막 4:18,19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듣고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것 같으나 세상의 염려 때문에 결실하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성은 외부의 자극 때문에 세심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우리에게 접근하여 염려 근심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반응하지 않도록 합니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고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듯이 내게 주어진 환경이 어두워질 때 사람은 이에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생활비가 떨어지고 아이들의 등록금의 기한은 다가오는데 가진 것은 없을 때 당황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여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의 공통점이기에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경우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순간 습관적으로 당연하게 염려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 보살핌과 사랑을 잊어버리는 순간 세상 사람들처럼 어려움에 부닥치고 곤란한 환경에 이르게 되면 당연하게 여기고 한숨을 내쉬며 염려에 빠져 있다면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재물의 유혹이 결실치 못하게 방해한다고 하였습니다.
재물의 유혹이란 ‘the deceitfulness of wealth’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짜 부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많은 재물이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이며 허상을 말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유혹에 빠집니다. 결혼을 앞둔 커플 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 행복하게 해 줄거야”라고 속살거리기도 합니다.
행복은 재물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입니다. 잠 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재물이 있어야 안정된 삶을 살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주입하여 그리로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지정의(知情意)가 하나님께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정적인 요소인 감성이 염려와 근심으로 어두워지고 잘못된 정보인 지성으로 빠져들게 되면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기타 욕심이 믿음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하였습니다.
막 4: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기타 욕심이란 앞서 말씀드린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대한 연장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제는 의지에 있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나갑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믿음생활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정의 죄를 씻어내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인하여 이제는 의지마저 믿음의 성장에서 떠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울삼아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게을리하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데 데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한때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선교 사역의 동역자였던 데마(Demas)는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주후 1세기 새로 설립된 교회에 아시아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던 지도층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세계 선교 사역을 위한 조력자였고,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열렬하게 고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되어 있을 때 데마는 그리스도 신앙을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하였습니다. 데마가 신앙을 멀리한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지 않으면 세상이 커 보이고 좋게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우리의 지정의에 마귀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오염된 지정의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회개입니다.
염려와 근심 두려움 이런 것이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와 같은 것입니다.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우는 종종 포도원 등지에 굴을 파고 자생하면서 봄철 포도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필 무렵 포도원을 돌아다니면서 포도나무를 갉아 먹거나 해칩니다. 뿌리가 손상되었기에 꽃이 피었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감정에 묻어있는 두려움과 근심 염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환경에 휩싸여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회개하여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마음에서 이런 염려와 근심이 떠나고 평안이 주어질 때 나를 괴롭게 하였던 환경도 떠나가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지성이 신앙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리요 하나님만이 우리 보장이시며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우선순위를 바뀌면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이 있으므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마귀의 유혹이며 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재물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따르며 욕심을 내어 성취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불행을 겪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하고 현재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아는 넉넉함이 필요합니다.
지성과 감성이 온전히 세워지면 내 의지는 자연스럽게 길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반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이 합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고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특징은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와 신랑이라는 의미에서 오직 사랑의 교류로 인하여 얻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철저하게 반응하는 것은 세상에 살면서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 늘 평안을 누리며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