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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선 지연전(공주/대평리전투, 대전전투,영동-김천전투)
제 1 절 작전개요
1. 작전개요
금강선 지연작전은 미 제24사단이 7월 12일 조치원에서 철수하여 금강을 연하는 방어선에서 북한군 제3,4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금강-갑천-대전지역에서 실시한 전투와, 이어서 증원된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황간-김천에 이르는 경부 국도 축선에서 실시한 지연전이다.
미 제24사단은 제34연대가 7월 8일 천안전투에서 패하여 공주방향으로 철수하고 미 제21연대는 전의-조치원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7월 12일에 대평리방향으로 철수하여 금강방어선(바로 제19연대로 교대, 21연대는 예비로 대전 비행장에 위치)을 점령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전의-조치원전투에 이어 미 제24사단을 소멸시키고자 제4사단을 공주 방향, 제3사단을 대평리 방향, 제2사단을 청주에서 대전 방향으로 기동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지만 제2사단의 기동이 늦어져 제3,4사단 만으로 공격키로 하고 7월 14일 공주방향에서 먼저 제4사단이, 7월 16일 대평리 방향에서 제3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되면서 7월 22일부터 북한군은 제3사단이 경부국도를 따라 영동-김천으로, 제4사단은 금산-안의-거창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대전지구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장은 직접 전쟁 발발 후 최초로 보급된 3.5" 로켓포로 적 전차를 격파하기도 했으나 결국 퇴로가 차단되고 우회 길을 잘못들어 실종과 동시에 포로가 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7월 22일 영동지역으로 진출한 미 제1기병사단은 25일까지 영동에서 버티다 철수를 개시하며 북한군이 26일 영동을 점령한후에 26일 새벽부터 29일 사이에 경부 국도 축선을 따라 공격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1950년 8월 1일 15시경에 차후작전을 고려하여 전군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게 된다.
2. 피. 아 지휘관 현황
가. 미군현황
"우리의 지휘관과 다른점 : 상급자가 앞을로 나서다"
먼저 미 제24사단의 직위자를 보면 사단장 딘소장은 7월 20일 실종-포로가 되고 새로운 처치소장이 임무를 하게 되며, 제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이 7월 16일 부상, 제1대대장 윈스태드 중령 7월 16일 전사한다. 제34연대 연대장 보챔프는 7월 16일 부임하고 제3대대장 스미스는 7월 8일 후송되며 그 후임인 랜트론 소령은 7월 20일 실종된다. 포병연대 제63포병 대대장인 다우손은 7월 8일 후송 된다.
다음 미 제1기병사단은 7월 18~22일어간에 포항으로 들어오게 되며 사단장은 게이소장이다.
나. 북한군현황
제3사단장 이영호 소장은 소련군 소위출신이고, 제4사단장 이권무는 소련군 중위였다. 제105전차 사단 사단장 유경수 소장은 소련군 전차중대장을 역임했으며, 제107연대가 제4사단에 배속 운용되고 제203연대가 제3사단에 배속 운용되었다.
제 2 절 공주-대평리 전투
1. 전투개요
가. 개 요
공주-대평리 전투 상황도
적109전연 적203전연
적4-5연 종촌리 적3-7연
적4-18연 적3-8연 금강
대평리 괴화산
적4-16연 신관리 적3-9연 미19-1개 대대
금강 가동 매방산
검상리 공주 구곡리
미34-3대대 34연=19연 수색소대 제19연
수색중대 삼교리 미62포병대대
미제63포병대대 미제13포병대대 안산리
봉곡리 미제34연
이인리 미제34-1대대 맥그레일연
유성
대전
공주-대평리 전투는 금강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설정한 미 제24사단이 제34연대와 신예 제19연대를 공주와 대평리 정면에 각각 투입하여 북한군 제4, 제3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수행한 전투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은 금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을 효과적으로 이용못하고, 7월 14일과 16일에 각각 공주와 대평리에서 북한군의 후방 기습교란에 방어선이 붕괴되어 하루 만에 금강선에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공주 북방에서 금강도하 공격 준비를 완료한 후, 7월 14일에 미 제34연대를 정면과 측면에서 공격하였다. 이때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서측방으로 은밀도하 공격을 하여, 검상리 일대를 도하하여 미 제34연대를 화력지원하는 미 제63포병대대를 기습유린하였다. 그 결과 제63포병대대는 단 한발도 화력지원을 하지 못했다.
이 당시에 전방 서측에 배치되었던 제3대대 L중대는 도하하는 북한군을 보고도 대대와 통신이 두절되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방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전방진지에서 무단을고 철수하였다. 후방에 있던 제1대대가 포병을 구출하기 위해 뒤늦게 출동했으나 날이 어두워 포기하고 임무를 중단하며, 이로서 제34여대는 적 공격 하루 만에 와해되어 논산으로 철수한다.
북한군 제3사단은 대평리 북방에서 도하공준비를 완료한 후, 7월 16일에 미 제19연대를 정면과측방에서 공격하였다. 정면에서 소규모 도하공격으로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에 측방에서 대규모 도하로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연대 주보급로를 차단하였다.연대는 보급로를 개통하여 임시 예비대를 편성하여 노력을 기울렸으나 실패하고 북한군 공격 하룻 만에 붕괴되어 병력들은 소규모 또는 각 개인별로 야간에 소로를 이용하여 후바으로 철수한다.
나. 피.아 전투전 상황
(1) 북한군 상황
북한군 제4사단은 오산 죽미령에서부터 평택-천안-전의전투에 이르기까지경부국도 축선을 따라 선두에서 공격한다. 그러나 7월 9일 전의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일단 전투에서 이탈하여 북한군 제3사단의 초월 공격을 지원한 후, 하룻 동안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7월 10일에 경부국도에서 분리된 23번도로를 따라 정안-공주방향으로 기동하여, 앞서 후퇴하고 있는 미 제24-34연대를추격하며 7월 12일에 공주 북쪽 신관리에 진출한다.
북한군 제3사단은 수원에서 북한군 제4사단을 계속 후속하다가 7월 9일 전의에서 초월하여 7월 10일부터전의 전투에 참여한다. 이들은 전의 맟 조치원에서 미 제21연대에 많은 피해를 입고, 7월 12일 야간에 금강 북안의종촌리 및 나성리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도하공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금강 상류의 교량을 확보하지 못해 전과확대 및 추격작전에 실패하며 계속되는 전투에서 5,000~6,000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 미군의 공중공격으로 주간 행동에 제한을 받고 보급추진도 어려워졌다. 이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징용 등의 방법으로 인원과 장비를 보충하여 병력은 60~80%수준이고, 장비는 40~60문의 야포와 30여 대의 T-34 탱크를 보유하였다.
(2) 미 지상군 상황
미 제24사단은 먼저 투입된 제34연대가 천안전투에서패하자, 차후 방어에 유리한 금강선 방어를 결심한다. 이에 제34연대는 7월 11일 오전에 공주 방향, 제21연대는 7월 12일 오후에 대평리 방향으로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철수하여 금강선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딘 소장은 대구에서 제19연대가 7월 13일 오전에 대평리에 도착하자, 미 제21연대와 교대시키고, 제21연대는 대전비행자으로이동하여 사단 예비가 되었다.
한편, 사단의 동측은 국군 제2사단이 청주일대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서측은 공백상태였다.
다. 피아 작전계획
(1) 북한군 작전기도
북한군은 7월 6일, 김일성의 3단계 작전방침으로 "연속타격을 가하여 금강과 소백산맥 줄기 계선을 유지하려는 미군의 기도를 파탄시키고 기본집단을 대전과 소백산맥줄기의 남동부에서 각개 포위 소멸함으로서 남해와 대구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북한군 제1군단은 제2사단을 동쪽의 청주-문의-대전방향으로, 제3사단을 대평리-유성-대전 방향으로, 제4사단을 그 서쪽의 공주-논산-대전 방향으로 우회기동시켜 대전을 3면에서 포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7월 14일 실제 공격시에는 제2사단의 진춝이 늦어져 최초 계획을 수정하여 제3, 제4사단만이 대전 포위 공격에 가담하였다.
(2) 미 제24사단의 작전 복안
당시 미군의 정보판단은 북한군의 작전기도를 명확하게 분석하였다. 이러한 정부판단에 따라 공주 방향과 대평리 방향에 각각 1개 연대를 배치하고 1개 연대는 대전 비행장에 예비로 두기로 한다.
이러한 제24사단장의 작전복안에 따라, 제34연대가 공주 방면, 제21연대가 대평리 방면에 배치되며 뒤이어 도착한 제19연대와 제21연대를 교대하여, 13일에 제19연대가 대평리 일대를 점령하였다. 제21연대늕 대전비행장으로 이동한다.
라. 미 제24사단의 방어준비
당시 금강선을 따라 방어하는 제24사단의 방어정면은 굴곡을 감안한다면 무려 48km가 넘었다. 이에 사단장은 도하공격이 예상되는 대평리 정면과 공주 정면에 병력을 집중 운용하기로 한다.
사단장은 먼저 하천선에서 가장 중요한 도하수단으 모두 파괴하도록 하였다. 이에 7월 12일 사단 수색중대가 도선장에 나룻배를 모두 파괴하고, 공병부대는 금강교를 폭파항려 경간 일부를 파괴한다. 그리고 7월 13일 새벽ㅇ데는 신탄진에서 공주 정면에 이르는 모든 교량을 폭파하도록 하여 대평리 정면의 금성교도 폭파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통신수단이 매우 미흡하였다. 대대급에서는 통신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배터리도 방전되어 전령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1) 미 제34연대
연대 책임지역은 구곡천(공주 동쪽 4km)으로부터 공주 서쪽 검상리까지이며, 제3대대를 공주 정면에 뱌치하고, 제1대대를 예비로 이인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배속된 사단 수색중대는 공주서쪽 강안을 차장하도록 하였다. 연대를 직접 지원하는 제63포병대대는 삼교리 부근에 진지를 편성한다.
사실 제34연대는 손실된 병력과 장비에 대한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방어 임무에 들어갔다. 제3대대 K중대는 40여 명이 모두가 극도로 심신쇠약에 전투능력을 상실하여 중대원 모두가 대전으로 후송된다. 7월 8일 마틴 연대장의 전사와, 제3대대장 스미스 중령도 탈진으로 후송, 제63포병대대장 도유손 중령도 일사병으로 후송, 연대정보과장과 작전과장이 혼수상태로 후송되었다. 그러니 사실 제34연대는 제3대대의 2개 중대로서 북한군 1개 사단의 도하를 저지해야 하는 셈이었다.
(2) 미 제19연대
연대의 방어 구역은 서측으로 구곡천으로부터 동측으로 신탄진까지 이며, 직전거리로는 22km, 강안을 따라서는 30km가 넘었다. 적의 주공방향이 예상되는 대평리 일대에 제1대대, 제2대대는 예비로 종심지역에 배치한다. 연대를 직접지원하는 제52포병대대는 두만리부근에 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2. 전투경과
가. 공주전투
(1) 제3대대 전방전투
공주전투 상황도
수촌리
적4사/ 적203전연
적 1개연
검상리 금강
L중대 금강
I중대
수색중대 공주 34=19
금강 미34-3대대
삼교리
미 제63포병대대
봉곡리 미 제34연
이인리 미제34-1대대
7월 14일, L중대에서 검상리 나룻터에서 30여 명이 부선을 이용하여 도하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이들은 08시부터 09시 30분 사이에 500여 명이 도하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L중대는 무전기가 작동하지않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다가 오전을 보냈다. 적의 포사격이 중대의 머리위에 낙하됨에 따라 중대장은 적의 포위망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여 독단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보고받은 대대자은 중대장을 보직 해임하였다. 반면에 동측의 I중대는 적의 포사격에도 굳건하게 진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에 적의 일부가 후방의 공주-부여 도로를 차단하였다는 보고에도 계속 진지를 지키다 21:30분경에 연댕의 명려으로 봉곡리로 철수하였다.
(2) 제63포병대대의 피습
전방의 제3대대는 북한군의 보병 공격을 받지 않았다. 반면에 삼교리의 포병대대는 전방 제3대대와는 통신수단이 없었다. 따라서 전방대대에 아무런 화력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포병관측연락기로부터 검상리에 적이 도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유효한 표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에 제11포병대대 155mm곡사포 2문은 똑같은 보고를받고 적 도하선박에 포격을 가하였다. 하지만 곧 적 야크(YAK)가 나타나 더이상 사격을 유도하지 못했다.
북한군의 도하병력은 포병화력이 침묵하는 사이 아무런 방해없이 강 남쪽의 구릉지대를 확보한다. 이들은 1개 대대 규모에 달하자, 일부 병력으로 검상리의 사단 수색중대진지를 우회하여 수색중대와 포병대대 사이의 유선을 절단하고 포병진지로 향했다.
이를 목격한 대대관측소로부터 보고를 받고도 "적으로 확인될 때까지 사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대기 중에 적은 코앞에 나타나 본부포대지역부터 유린되어 손한번 사용하지 못하고 숙대밭이 되어버렸다. 포탄이 적재된 차량이 폭발하고 통신수단은 모두 파괴되었다. 병사들은 각자 포대를 이탈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다.
대대본부로부터 220m이격된 A포대는 소화기 사격으로 진내로 진입하는 적을 격퇴한다. 그러나 곧 북한군 보병들이 박격포 사격과 동시에 밀어닥쳐 포대장이 전사하게 되면서 본부포대와 A포대는 완전히 유린되고 말았다.
이어서 B포대 지역으로 북한군이 공격을 하게 되고, 포대는 포 3문의 공이와 조준장치를 제거한 후 유기하고서 봉곡리 방뱡으로 철수하엿고, 반면에 근무포대는 손실없이 병력을 보존하였다.
이날 불과 1시간 30분여의 공격으로 미포병은 105미리 야포10문과 탄약적재를 포함한 차량 60~80대를 잃고, 11명의 장교와 125명의 사병이 실종되는 참상을 보게 되었다.
(3) 국군 기병중대 증원 실패
국군 기병중대는 7월 12일 밤에 공주 북방에서 유규전투를 치르고 공주로 복귀하려다, 공주의 금강교가 끊어져 밤새도록 말을 달려 13일 아침에 부여의 대안지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배를 구하여 부여로 왔다. 여기서 길을 잃은 미군 6명을 만나 함께 제63포병대대가 있는 삼교리로 갔다.
7월 14일, 점심식사 중에 적의 사격을 격퇴하고 삼교리의 미 제63포병 제B포대가 유린되는 과정에 구출하러 갔으나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부상병을 말에 싣고, 기병중대 병사들은 봉곡리를 거쳐 논산으로 이동했다. 부상 병사들은 도로에 있던 미군 차량에 인계하고 기병중대는 논산으로 이동하였다. 논산에서 밤을보내고 7월 15일에 미 제34연대의 지휘에서 벗어나 여산-전주로 이동하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된다.
(4) 미 제34-1대대의 역습실패, 논산으로 철수
제34연대장 웰링턴 중령은 7ㅇ눨 14일 10시 25분경에 사단장의 지시로 적이 도하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지연진지를 선정하려 연대 지휘소를 공주읍에서 봉곡리로 이전하고, 논산 부근 지형정찰을 나갔다가 15시경 복귀하였다.
이때 15시 30분경에 삼교리로부터 철수하는 제63포병대대원으로부터 포병대대의 피습상황을 처음으로 보고 받았다. 이에 제1대대장에게 즉시 삼교리로 진출하여 적을 격멸하라고 명령하고, 일몰전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논산으로 철수하라고 하였다. 이에 제1대대는 17시가 지나서야 삼교리로 출발하여 적정을 알지도 못하고 진출중에 최초 근무포대 입구에서 길목을 지키고 잇던 적에게 기습ㅇ들 당하여 전투태세에 돌입하였으나 이미 일몰이 되자 연대장의 명령을 상기하며 포병대대의 진지 회복을 단념하고 최초진지인 이인리로 철수하여 그곳에서 차량편으로 부여를 거쳐 논산으로 철수하였다.
훗날, 제1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은 연대장으로부터 출동 명령을 받기전까지는 포병대대의 피습을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편 포병대대 통신장교인 스타링 중위는 14시를 전후하여 그가 제1대대 지휘소에 가서 위급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햇다고 증언하였으나 그 내용이 왜 대대장에게는 보고되지 않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제34연대의 공주 방어선은 전방 방어진지보다 후방의 포병진지가 유린당하여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7월 14일 저녁에 논산으로 철수한 제34연대는 15일 논산으로부터 도로를 따라 6km동족의 마구평리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당시에 북한 군제4사단 제16연대는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미군 전폭기의 공격 대문에 낮 동안에는 강을 건너지 못하는 등 중장비의 도하에 시간이 소요되어 15일 저녁 무렵에야 공주로부터 논산가도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한다.
미 제34연대는 적과 접촉이 없는 가운데 하루를 보내며, 7월 16일에 미 제7사단 제32연대장인 보챔푸 대령이 새로운 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새로운 연대장인 보챔푸 대령은 이날 저녁에 마구평리에서 논산-대전 가도를 따라 갑천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5) 사단장의 조치
7월 14일, 딘 소장은 제34연대장에게 축차진지를 선정하여 지연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금강이라는 천연적인 장애물을 활용한다하더라도 진지고수만을 고집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연대장이 진지정찰 중에 제63포병대대가 유린되고 제3대대는 그런 상황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연대장이 복귀했을 때는 이미 포병대대는 와해되어 버렸고, 상황을 파악하여 제1대대에게 역습을 지시했지만 저녁무렵에야 출발하여, 그나마도 진지입구에 도착하면서 바로 적에게 기습을 당하고 철수함으로써 공주방어는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논산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과정에서도 연대장이 제1대대장에게 일몰전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기에 대대장은 바로 철수해 버렸다.
사단장은 제34연대가 패퇴하여 철수하고 있는 상황인 7월 14일 16시 40분경 부대간의 협조를 유지하고, 정찰을 강화하고, 현진지를 계속 확보하여 적을 격퇴하라고 지시한다.
또한 제24사단장 딘소자은 7월 15일 아침에 유기한 제63포병대대 장비들을 항공폭격으로 파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인해 적 제4사단은 소규모 병력만이 도하하여 논산에 도착한다.
나. 대평리전투
미 제19연대는 7웕 12일 저녁에 대평리 일대에 도착하여 13일 09시30분에 방어책임지역을 미 제21연대로부터 인수받았다. 따라서 연대는 북한군의 공격이 임박해서 방어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인접부대인 제34연대가 공주에서 북한군 제4사단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받던 7월 14일, 미 제19연대는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은 없었다.
대평리전투 상황도
적3-7연
금강
적203전연
적3-8연 금강
괴화산
적309연 나성리 C중 매방산 미24사=국2사
금강 E중대
대평리 A중
가동
구곡리 B중 발산리 미19연/G중
34연=19연 금강
미52포병대대
수색소대
마암리 봉암리
맥그레일 TF
미13/11포병대대
인산리
유성
(1) 연대예비대 조기 투입
미 제19연대는 7월 14일 오후에 서측의 제34연대가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써 서측방의 경계 보강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15일 07시경에 연대수색소대로부터 북한군이 도하를 시도햇고 , 이에 근접항공지원으로 격퇴시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로써 적은 서측과 정면에서 제19연대를 압박하게 된다.
연대장 멜로이 대령은 정면의 적보다 서측방이 더 위협하다고 판단하고, 제2대대장 맥그레일 중령에게 대대 예비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서측방을 강화하라고 지시하였다.
맥글레일 대대장은 강력한 TF, G중대와 H중대의 기관총 1개 소대 및 81밀리 박격포 1개 반, 그리고 연대에서 지원한 전차(제78전차대대 M-24경전차 2대)와 대공포(제26대공포대대의 M-16반궤도차 50대공포 4문 장비)2대를 이끌고 유성에서 공중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신속히 이동하였다.
(2) 북한군 도하공격
북한군 제3사단은 7월 15일 하루 종일 대평리 정면에서 도하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미군의 공중공격으로 중장비를 이동시킬 수 없었고, 병사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 제19연대자은 , 7월 15일 야간에 반드시 적이 도하공격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야간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고, 공중공격과 지원야포 및 박격포로 적 집결 예상 지역에 대한 포격으로 병력 집결를 방해하였다.
북한군은 어둠이 내리자 야간 도하공격을 시작하였다. 적들은 수중으로 도섭을 감행하기도 하고, 일부는 수영으로 건너기도 하지만 강력한 집중사격을 받고 결국 7월 15일의 도하공격을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7월 16일 03시에 북한군 야크기(YAK) 1대가 상공에 나타나 조명탄을 투하하였다. 북한군은 작은 배와 뗏목을 이용하여 도하를 감행하고 일부는 수영으로 도하를 실시하였다.
이에 미 제19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조명탄을 쏘아 올려 대낮처럼 밝힌 가운데 적의 도하를허럭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20~30여분 조명탄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틈을 이용하여 적이 도하에 성공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제1대대 동측 C중대 진지를 먼저 공격하였다. 이들은 미호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합강리(괴화산 동북쪽 3.5km)부근에서 강을 건너 C중대와 E중대 사이를 우회하였다. 중대는 적의 기습을 네차례나 물리쳤다. 결국 적은 괴화산 일대에 배치된 중대주력을 우회하여배후부터 공격을 기도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제1대대 서측방에서도 도하를 강행하여, B중대는 어둠이 걷히면서 적 병력이 20~30명씩 무리를 지어 무기와 보급품을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포격을 요청했으나 야산지대라 효과가 미미하였다. 더욱이 이미 300~400명의 적이 중대진지 남서족 능선에 나타나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면서 중앙정면에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여 결국 대대는 연대지휘소가 있는 발산리로 철수한다. 여기서 부대장 쿡소령이 임시예비대를 급편하여 역습을 감행, 가동을 다시 회복하고 잔적을 강건너로 격퇴시켰다. 하지만 여기서 부대대장 쿡소령과 대대인사과장 해켓 대위가 전사하였다.
연대자은 제1대대장에게 일몰까지 진지를 확보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내륙으로 진출하고 있는 적이 배후에서 공격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3) 북한군에 의한 연대보급로 차단
연대보급로 차단 상황도
적3-7연
금강
적203전연
적3-8연 금강
괴화산
적309연 나성리 적? C중 적? 매방산 미24사=국2사
금강 E중대
대평리 A중
가동
B중 발산리 미19연/G중
34연=19연 금강
적? 미52포병대대
F중대
적? 봉암리
적? 미13포병대대
인산리
미제11포병대대
유성
연대장 멜롱이 대령이 가장 우려한 적에 의한 보급로 차단이 현실로 닥치게 되었다. 제2대대 군수장교가 전방부대에 탄약재보급을 위해 유성에서 북쪽으로 이동 중에 적에게 보급로가 차단되었다는 보고를 한다. 이에 연대장은 구곡천 부근의 제2대대장 맥그레일 중령에게 보급로를 개방하라고 명령하고 본인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12시경에 도착하였다.
그곳을 차단한 북한군은 이날 새벽에 20~30명씩 무리를 지어 강을 도하하여 서측방으로 우회하여 후방의 한 능선을 점령하고 있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보급로를 차단하기 전에 용수천 서쪽 능선을 따라 이동하였으며, 연대 후방의 두만리에 진지를 점령중이던 제52포병대대가 이를 발견하고 A포대가 직접조준사격을 실시하고, 인넙 제13포병대대에도 알렸다.
하지만 적도 박격포 사격으로 응수하면서 포대장과 일부 간부가 전사하는 등 위기에 처했으나 포병 자체 병력으로 결국 적을 격퇴하였다.
이렇게 되자 적은 포병공격을 단념하는 듯, 포병진지로부터 남쪽으로 750m 떨어진 고지에 나타나 동쪽의 도로르 향하여 사격을 가함으로써 당시 보급추진 중이던 차량이 정지하게 되고, 적의 화력위협에 갈팡질팡하는 차량들이 모려들면서 길을 메우게 되어 연대보급로가 차단되었던 것이다.
연대보급로 차단지점은 연대 후방의 제52포병대대와 제13포병대대진지 사이에 있엇다. 두만리에서 남서방향으로 가던 더로가 급격한 굴곡을 이루어 남동방향으로 굽어지는 굴곡부가 잇는 곳으로, 차량이 우회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차단지점을 감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북한군이 선점하여 미 제19연대의 공격을 쉽게 차단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전방의 제1대대와 연대본부, 제52포병대대가 전후방이 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이곳에 도착하여 지휘를 하던 연대장 멜로이 대령이 다리에 관통상을 당하여, 제1대대장에게 연대 지휘권을 13시경 넘겼다. 이 상황을 연대 작전과장이 사단장에게 보고하자 사단장은 즉시 연대는 철수하여 가능한 병력과 장비를 구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바로 연대 통신차량이 적의 포탄에 파괴되어 통신두절이 된다.
연대 지휘권을 부여받은 제1대대장 윈스테드 중령은 연대보급로 차단지점으로 달려가 13시 30분을 기해 연대의 철수명령을 내리고, 대대병력을 지휘하려 대대지휘소로 돌아가던 중에 적탄으로 전사하게 된다. 지휘권을 위임받은지 채 1시간도 못되는 시간이었다.
(4) 전방 방어진지에서 철수
전방 제1대대 병력은 대대장이 전사한 가운데 7월의 폭염(섭씨 37.7도)과 북한군의 맹렬한 포병사격에 철수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 괴화산을 점령하고 있던 C중대는 적에게 후방이 차단되어 소대별로 이동하며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피해가 커졌다. 전방 부대들은 보급로가 차단된 상황도 제대로 모르는 채 지휘자도 없이 차단선 북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5) 연대보급로 개방 시도
미 제19연대는 이날 13시 30분경부터 보급로 개방을 위해 차단선 북쪽과 남쪽에서 수차례에 걸ㅊ쳐 임시공격대를 편성하여 투입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에는 수부대 단위로 분산되어 산악소로를 이용하여 철수하게 된다.
(가) 차단선 북쪽에서 돌파공격 시도
먼저 차단선 북쪽에서 임시편성부대로 공격을 한다. 16일 13시 30분에 연대장 대리인 제1대대장 윈스테드 중령의 명령으로 작전과장인 로간 소령이 D중대 박격포 소대장을 소대장으로 하여 공격응 개시하였다. 처음에는 F-51전투기 1개 편대가 지원하여 기총소사를 하엿으나 적은 위장된 진지에 잇어서 제대로 식별되지 못하여 공격이 별 효과가 적었다. 반면에 엄폐된 진지에서 자동화기로 접근하는 소대를 향해 화력을 집중하여, 50여 명의 공격대는 소대장을 따라 적 진지 전방까지 도달한 병사는 단 한 명이었다. 모두가 개천가에 엎드려 적 사격을 피하느라 급급했다.
이에 로간 작전과장은 다시 운전병 ,포병 병력, 일부 기술병들로 공격대를 편선하여 공격했으나 역시 무위로 끝났다. 로간 소령은 세번째로, 연대가 보유 주인 M-24경전차 2대로 적진으로 진격하여 적의 화력거점을 타격하도록 하였으나 위장된 적의 진지를 찾지를 못햇고 오히려 적에게 노출되어 포탄만 소비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또 이번에는 F중대로 공격하여 적을 제거토록 하였다. 그러나 중대는 이미 족에게 노출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진지에서 이탈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에 마지막 수단으로 직접 차량으로 신속한 돌파를 시도햇으나 앞의 차량들이 길을 막고 엉켜있어서 실패하고 말았다.
(나) 차단선 남쪽에서 기갑부대로 공격 시도
이렇게 북에서 돌파가 어렵게 되자, 연대 작전과장 로간 소령은 다른 방법으로 차단선을 개방하고자 하였다. 본인이 직접 20여 명을 대동하고 동쪽 산악도로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2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16시 30분 경에 안산리 부근의 제13포병대대 진지에 도착하였다.
이때 마침 사단장 딘소장이 일단의 기갑부대를 이글고 대전으로부터 출동하여 도착하였다. 제78전차대대의 M-24전차 2대와 제26대공포대대의 M-16 반궤도차 2대, M-19 반궤도차 2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에로간 소령이 본인이 직접 선두에서 차단선 돌파를 위해 나서겠다고 자원하였다.
하지만 사단장은 제2대대장 맥그레일 중령에게 임무를 부여하였다. 맥그레일 중령은 6대의 기갑차량을 지휘하여 안산리에서 두만리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가 적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서쪽의 적으로부터 중기관총과 경대전차포 사격이 집중되어, 장갑이 약한 대공포차가 적의 대전차포에 맞아 모두 불타고, 전차 2대만이 남게 된다. 이에 포탄이 모두 소모되어 도로변에 엎드려 있는 병사들을 남겨둔 채로 18시경 안산리로 철수한다.
(다) 차단선 남쪽에서 G중대 공격
맥그레일 TF로서 연대 서측방에 배치되었던 G중대는 진지에서 철수 중에 유성에 이르러, 부사단장 멘노허 준장의 지시로 적의 유성진입에 대비하여 갑천 지류에 방어진지를 급편하도록 지시를 받는다,. 그러다 18시경 두만리 부근의차단선 회복을 위해 두만리 부근으로 이동한다. G중대장은 안산리의 제13포병대대 진지로 이동하여 사단장 딘 소장을 만났다. 사단장은 G중대를 봉암리 서쪽 고지의 적을 공격하도록 하여, 19시경 272고지로 기어올라 공격을 준비하는 중에 어둠이 깔려 사단장은 다시 G중대를 유성으로 철수시켰다.
(라) 연대보급로 차단지점 북쪽의 혼란 상황
연대본부와 제1대대 병력은 철수로가 차단되어 개방되지 않아 그곳에 갇힌 채 시간만 짗체하게 되었다. 또한 게속적인 개방노력에도 실패를 거듭하게 되자,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져 홀로 또는 소부대 단위로 대정방햐인 남동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1) 부상당한 연대장 탈출
제1대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하고 도로가 뚫리기만을 기다리던 연대 참모들은 계속하여 돌파기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연대장을 경전차에 탑승하여 그 전차로써 차단선을 돌파 감행하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부상당한 연대자이 탑승한 경전차 뒤로 20여대의 차량이 뒤따르게 된다. 하지만 적의 화력을 뒤집어 쓰고 진출 중에 기관고장으로 일시 정지하게 되는게 다행이도 적의 화망을 벗어난 지점이었다. 여기서 유성으로 철수 중인 F중대를 만나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유성으로 철수하게 된다.
2) 도로차단선 북쪽에서 병력 탈출
당시에 차단선 북쪽에는 약 500여 명의 병력과 100여 대의 차량이 집결중이었다. 연대는 모든 차량은 소각하고 병력은 동쪽 고지 능선을 따라 유성쪽으로 철수하기로 한다. 이 와중에 연대작전보좌관 펜스터마처 대위가 적의 사격으로 목이 관통되어 전사하게 된다.
지휘자를 잃어버린 병력은 야간에 산길을 걸어 7월 17일 대전에 재집결하게 되는데 제19연대는 900명 중 434명만이 집결되었다. 이때 도로차단선 북쪽에 함께 있던 제52포병대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
미 제24사단은 금강 방어선을 구축한 7월 12일부터 4일만인 7월 16일 밤에 붕괴되었다.
다. 제21연대 전투 상황
미 제21연대는 7월 13일 미 제19연대에 대평리진지를 인계하고 대전비행장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를 하였다. 그런데 7월 15일 청주부근의 국군 제2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으로 퇴각함으로서 대전 북동쪽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에 노이게 되자 사단장은 제21연대장에게 7월 16일 아침 대전 동쪽으로 이동하여 마달령 부근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에 제21연대는 7월 16일 아침 6시에 마달령 일대로 예하 병력을 배치하고 연대는 옥천에 지휘소를 개설하였다. 당시 제21연대는 전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고, 제3대대장이 전사하여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통합지휘하였다.
3. 전투결과
가. 피.아 피해 현황
미 제19연대는 총손실은 총 3,401명 중에 650명이었다. 그 중 제1대대가 785명 중 338명, 제2대대는 777명 중 86명, 제52포병대대가 393명 중 55명 이었다. 연대본부는 191명 중 57명이 손실되었다. 그 가운데 제12대대의 C중대는 171명 중 122명이 손실되었다. 제52포병대대는 지난 7월 5일 죽미령에서 포 5문으 ㄹ잃고, 이날도 9문의 포중 8문을 유기하여, 포 1문과 차량 3대만이 구출되었다.
제34연대는 제63포병대대가 기습으로 붕괴되며, 105밀리 야포 10문과 탄약을 포함한 차량 60~80대를 잃고 11명의 장교와 125명의 사병이 실종되는 참사을 보게 되었다. 기타 보병부대 등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제 3 절 대전 전투
1. 전투개요
가. 개요
대전전투는 7월 16일 야간에 미 제34연대가 갑천선 일대에 배치되면서 7월 20일 야간에 대전에서 철수할 때까지 북한군 제3.4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갑천을 연하는 방어선과 대전 시내에서 실시한 전투다.
대전전투 상황도
적2사
신탄진 국1사
미24사=국1사
적3사 적3-7연
갑천
유성
적4-1개연대 B중대
제1대대 제3대대 I중대
193고지 마달령
미제21-1대대
대전 미 제34연 세천터널
적4-16연 보문산
적4-18연 구완리 적18-1개대대 낭월리
무수리
이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요구대로 7월 20일까지 대전에서 지탱했으나, 철수시기가 늦어진연유로 대전 후방이 차단되어 철수과정에 미국 전쟁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단장이 실종되었다가포로가 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행한다.
딘 소장은 대전의 제34연대와 마달령의 제21연대, 그리고 영동의 제19연대로 축차적 지연전을 실시하고, 대전에서 대략 7월 19일 야간에 제34연대의 철수를 계획하였다. 그런데 7월 18일 아침에 대전비행장에 도착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현재 포항에 상륙 중인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로 전개하는데 최소한 2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여 딘 소자응ㄴ 철수시기를 1일 더 연장하여 20일 야간으로 변경하였다. 이를 위해 제19연대 2대대를 제34연대에 배속시켰다.
북한군은 금강교교두보를 확보하고 이틀간의 공격준비를 실시, 7월 19일 오전에 유성지역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 밤이 깊어지자 북한군의 공격징후는 더욱 짙어갔으며, 사전 침투부대들은 대전 후방지역의 곳곳에 도달하였다.
드디어 적은 7월 20일 03시경 유성방면에서 맹렬한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전차와 함께 보별이 공격하였다. 이에 북한군 전차들은 제34-1대대 진지를 통과하여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확인한 제1대대장은 연대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철수명령을 내린다. 이어서 증원된 제19-2대대도 북한군 전차가 길목을 차단하고 잇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고 철수를 하여 7월 20일 오전 중에 방어진지에서 모두 이탈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 전차들이 대전시내로 들어와 연대본부 시설 및 주요 시설에 전차포와 기관총을 난사하여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이때 한국전에 최초로 들어온 3.5" 로켓포를 사단 수색중대와 공병중대에서 운용하여 시내에 들어온 북한군 전차는 모두 격파되었다.
사단장은 적 전차를 격파한 후 14시경 연대지휘소에 들어왔다. 사단장은 이대까지 전방대대가 진지를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적이 금산및 옥천 가도를 완전히 차단할 때까지 정면공격을 늦추어 지휘부가 오판을 가져오게 되었다.
사단에서 철수명령이 17시 30분에 하달되고, 행군 본대는 18시에 철수를개시하는데 이대는 이미 북한군이 금산 및 옥천방향 도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반면 제34연대의 철수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달령에 배치된 제21연대는 적이 차단한 세천터널과는 떨어져 있어서 철수로 개방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철수병력은 도로차단선을 돌파하지 목하게되자, 뿔뿔히 흩어져 산악소로를 이용하여 개인 도는 소부대 단위로 사단지휘소가 있는 영동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제1기병사단에 방어책임을 인계하고 후바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에 들어간다.
이로서 미 제24사단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전투르르개시하 ㄴ일래, 7월 20일 대전전투까지 약 100km라는 공간에서 많은 병려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지만 15일간이라는 시간을 획득하였다. 이는 후속부대들이 전방지역으로 전개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공중폭격으로 북한군의 작전지속능력이 현저히 감소 된다.
나. 피.아 작전계획
(1) 북한군 작전기도
북한군은 평택을 점령한 뒤에 7월 7일부터 실행할 작전의 핵심은 대전이었다. 이에 북한군 제3. 제4사단은 금강방어선을 돌파한 후 연속하여 대전을 공격하려 한다. 그러나 당시에 북한군은 미군이 대전을방어하려 사생결단으로 저항할 것이라 판단하고 대전공격에 신중을 기하여 7월 17일 및 18일에 양일 동안 공격준비를 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은 그들 제3사단을 대전 북서쪽에서 공격케 하고, 제4사단을 대전 서쪽에서 정면 공격하되, 그 중에 1개 연대로 하여금 1일전 보문산 남쪽의 산길 소로로 침투하여 금산가도와 영동가도를 차단하여 미 제24사단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하였다. 공격개시일은 20일 03시로 한다.
(2) 미 제24사단 작전 복안
대평리 전선에서 제19연대가 어이없이 무너지자, 딘 소장은 갑천을 연하는 선에서 2개 연대를 점령시키려던 계획을 바꾸어, 제34연대만 점령하기로 한다.
사단은 7월 16이레 제34연대를 경부국도상의 월평동에 투입하여 적 제3사단의 공격을 지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7월 17일에는 제19연대를 영도으로이동시켜 지연진지를 점령하도록 하고, 하루전날 마달령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21연대에게 대전-옥천간의 도로와 터널을 폭파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제34연대가 대전에서 철수하는시기는 북한군 전차가 금강을 건너 대전으로 기동하기 직전인 7월 19일 야간으로 하였다.
그러나 7월 18일 아침에 대전비행장에 항공기로 도착한 워커 미 제8군사령괸이 포항에 상륙ㅎ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의 영동 전개 시간을 고려 향후 2일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내용에 철수를하루 연기하여 7월 20일 야간에 철수하기로 했다.
다. 미 제24사단의 방어준비
대전 방어에 대한 책임은 7월 16일 새로 부임한 연대장 보챔프 대령의 지휘아래 17일 아침에 대전비행장에 연대지휘소를 개설하고 예하 병력을 배치하였다. 유성가도를 통제할 수 있도록 제1. 제3대대를 종심으로 배치하고, 논산가도에는 제3대대 L중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배치시켰다.
제34연대장은 논산가도의 전투력을 보강하기 위해 사단에서 배속전환된 사단 수색중대와 제19-2대대(가수원교 일대)를 7월19일 투입하였다.
제34연대의 철수로 확보를 책임진 제21연대장은 사단에 마달령(중약터널진지)보다는 세천터널쪽이 효율적이라고이동을 건의하였으나 사단장은 마달령을 고수하였고 정기적인 도로정찰을 하여 통로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2. 전투경과
대전전투는 북한군이 7월 19일 아침에 대전지역에 공중공격을 개시함으로서 시작된다. 그들은 먼저 야크(YAK)기로 대전 후방의 보급로를 강타하였다. 야크기 6대가 07시 20분경에 미 제21연대 상공을 지나 옥천 북서쪽 3.2km 지점에 있는 철교에 폭탄 4발을 투하하여 그중에 한발이 명중되어 교량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제3전투공병대대가 바로 복구를 완료하였다. 이어서 대전비행장에도 폭격을 개시하였으나 제26방공포병대대 A포대에서 대공사격으로 2대를 격추한다. 곧바로 미군 공군기들이 투입되어 퇴각하였다.
이 시간 이후부터 북한군 전투기는 나타나지 않았고, 지상병력으로만 유성가도와 논산가도에서 공격을 실시하였다. 7월 20일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는 적 침투부대에 의한 후방차단과 통신두절로 조기에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대전 시가지전투 상황도
갑천
적1개연대
갑천
적3사
갑천
적107전차연
A중대 138고지
유성
B중대
제1대대 제3대대 I중대
C중대 193고지 마달령
갑천 제19-2대대 미제21-1대대
189고지 대전 미 제34연 세천터널
F중대 (L중대) G중대93고지 포병대대
적4사 E중대 보문산
적4-18연 구완리 적18-1개대대 낭월리
갑천
무수리
한편, 당시에 미 공군은 한국 내에 F-51전투기 및 C-47수송기를 운용할 수 있는 적합한 비행장은 비포장인 대구의 K-2비행장과 포항영일의 K-3 비행장 뿐이었다. 진주 남쪽의 사천에 있는 K-4비행장은 긴급시 운용할 수 있는 비행장으로 가용하였다. 따라서 미군의 전술폭격기들은 일본에서 이륙하여 운용되기 때문에 한국내에서 작전시간이 제한되어 적시적인 지상작전 지원에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시간 이후부터 북한군은 공중지원 없이 지상병력으로만 유성가도와 논산 가도에서 공격을 실시하였다. 반면에 미 제24사단은 7월 20일 북한군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는 적이 후방에 침투하여 보급로 차단과 통신시설 파괴로 조기에 붕괴되어 철수하게 된다.
가. 전초진지 전투
(1) 유성-대전 가도
북한군 제4사단(재5연대)은 7월 19일 오전에 유성방향 미 제34-1대대 주진지와 대전비행장에 포병화력을 집중하더니, 이윽고 적 대대규모가 유성에 추진 배치된 B중대를 공격하여 소대장 2명이 부상하는 등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철수하게 되어 유성을 넘겨주게 된다. 따라서 이제 갑천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며 날이 저물어 갔다.
제1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은 B중대의 보고를 적이 야간에 집중적인 공격이 있을리라 판단하여, 연대에 철수를 건의하지만 연대장 보챔프 대령은 20일까지 방어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포화가 집중되며, 연대장은 사단장의 승인을 얻어 연대본부와 포병진지를 연대본부는 충남도청사 맞은편(지금의 대전시청)으로 포병은 문창동 (공설운동장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제1대대장은 잪차 2대만 남기고 모든 차량은 시내로 이동시켰다.이날 밤이 깊어가면서 대대장은 적이 침투하고 있는 것으로 상황을 분석하여 연대장에게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연대장은 거절하였다.
(2) 논산-대전 가도
논산가도엔 7월 19일 오전까지 제34연대 L중대의 1개 소대가 차출되어, 가수원교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생하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의 이곳에 보챔프 대령은 사단에서 증원된 제19연대 제2대대를 이곳에 보강하기로 한다.
연대장은 금산남쪽에서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돌어온 사단 수색중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논산가도로 투입하였으나, 도중에 가수원교를 지나 서쪽으로 4KM정동에서 적에게 기습을 당하게 된다. 이에 L중대를 가수원교로 증원하여 189고지를 점령하게 하였다.
한편 사단장은 19일 아침에 제21연대지휘소를 들렀다. 그러다 아무래도 제34연대가 불안하여 급히 대전으로 달렸는데 이대가 바로 189고지의 L중대가 갑천을 사이에 두고 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사단에서 지원된 M-24경전차 2대에 직접사격을 지휘하면서 분전을 독려했으나 중과부족으로 진지 일부가 유린된다.
마침 제19연대 2대대가 정오경에 대전역 광장에 도착하고 있어서 바로 논산가도를 방어중인 L중대 진지를 회복하라고 명령하여, 제19-2대대는 F중대를 우측, E중대를 좌측, G중대를 예비로 갑천방향으로 공격하여 189고지를 회복하였다.
(3) 북한군의 후방차단 기도
북한군은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그들의 제4-18연대 병력을 경무장시켜 대전 후방으로 침투시켜, 미 제34사단의 철수로를 차단시키고자 하였다. 미 제34연대장 보챔프 대령은 7월 19일 밤에 북한군 침투부대 일부가 후방지역에서 활동하는 징후가 포착되었으나, 이를 무시함으로서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연대장은 7월 19일 자정 무렵, 남쪽의 금산도로가 차단되엇다는 불안한 보고에도 적이 아군의 심리적 교란을 획책한 것이라 가볍게 판단한다. 02시경에도 옥천가도에서 짚차 1대가 적의 매복병을 만났다고 보고가 있었으나 그후로 통행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나. 갑천 방어선 전투
북한군 제3, 제4사단은 7월 20일 03시에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7월19일 야간까지 주력을 갑천 서쪽에 전개시키고, 후방 침투부대들도 도로 차단목표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1) 유성-대전가도 전투(제34-1대대)
7월 20일 03시경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먼저 적의 보병이 야음을 이용하여 갑천을 건넜고, 전차는 갑천을 건너 종심깊이 통과하여 후바을 교란하였다.
제1대대장은 전면적인 공격이 아니라 방어 강도 탐색을 위한 부분적인 공격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A중대 화기소대에서 진지후방으로 기어오르는 북한군을 발견하고 적이 배후에 나타났다고 대대에 보고했다.
대대장이 상황을 파악하려 지휘소를 나오는 순간 상고에 조명탄이 터지며 적의 포화가 지휘소 주변에 작렬한다. 뒤이어 04시경 지휘소를 향해 기관총 사격을 퍼부어, 대대장은 전방 중대를 호출했으나 통신이 이미 두절되었다. 이미 전방중대는 진지를 이탈하고 있엇고, 3.5"로켓조가 철수한 상태에서 적 전차가 비행장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대대는 제대로 전투 한번 못해보고, 연대에 보고조차 못하고 철수하게 된다.
(가) 연대장의 조치
연대장 보챔프 대령은 7월 20일 새벽에 대전 남쪽 금산가도에 나타난 적정에 대한 조치도 취할 겨를이 없이 유성가도로부터 방어진지 붕괴하는 보고를 받게 된다. 연대장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려 짚차를 타고 유성방향으로 진출 중에 적전차와 정면으로 부닥치게 되었다. 연대장이 뛰어내리는 순간 차량이 대파된다.
다행이 큰 부상을 면한 연대장은 도로분기점으로 달려가 그곳에 배치되어 있ㄲ던 제3전투공병대대 C중대의 3.5"로켓조를이용하여 적 전차를 격파하기로 마음 먹고, 적전차에 사격하여 적전차가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한국전에서 최초의 3.5"로켓포가 적전차를 격파한 사건이다.
이어서 연대장은 수색중대 로켓조에도 도로분기점에서 경계를 강화시켜, 수침교를 건너오는 적전차 2대를 06시경 격파하였다.
당시 연대자은 제1대대와 무선교신을 강구하는데 어쩌다 교신이 되어 "아직 진지를 고수하고 있다"고 보고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군이 제1대대장의 지휘차랴을 노획하여 그 무선으로 위장 통화한 것으로, 이로인해 연대장의 오판은 계속되게 된다.
(나) 제3대대의 증원 실패
연대는 제1대대가 진지를 계속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행장 동쪽고지에 배치된 제3대대에 제1대대와ㅑ 제19연 제2대대 사이를 보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목적지로 향하여, 비행장을 지나던 중 T-34 전차 6대를 앞세운 적 1개 대대와 접적하게 된다. 이로서 K중대는 원래 진지로 철수하게 된다. 북한군은 20일 04시에 비행장을 점령한 후 이동을 정지하는데 이는 대전 후방으로 기동한 침투부대들이 후방퇴로를 차단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다.
(다) 제1대대 철수
제1대대는 7월 20일 새벽 06시에 논산가도를 방어하고 있는 제19-2대대 방어진지 후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제2대대장 메그래일 중령으로부터 대전으로 들어가는 후방도로가 적 전차로 차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도로 남쪽의 보문산 기슭을 타고 우회하기로 하였다.
제1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은 보문산 중턱에서 부대대장 일행과 합류하엿다. 여기서 남쪽의 금산 가도를 다라 북한중인 피아를 알수 없는 큰 규모의 부대를 목격하였다. 이에 부대대장이 수습된 150여 명으로 도로를차단하러 대별리로 이동 중에 수 미상의 적 유격대를 만나 격전이 벌어졌다. 그 후에 접적 이탈하여 구완리 방향으로 기동했으나 여기서도 적의 기습사격으로 부대대장이 목에 치명상을 입게 됨녀서 무수리(구완리 서쪽 2KM)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 대대장과 작전장교, 중화기 중대장 그리고 타임지의 피일더 기자가 연대본부를 찾아 금산가도로 이동하는데 , 도로에 올라서기도 전에 적의 사격으로 흩어지면서 대대장과 작전장교 및 중화기 중대장은 숲속에 종일토록 숨어 있다가 어두워진 다음에 그곳을 탈출하게 되고 기자는 시체로 발견된다.
이와같이 제1대대는 와해되고 , 연대에도 이런 상황이 전달되지 못했다.
(2) 논산-대전가도 전투(제19-2대대)
(가) 전방방어전투
논산-대전가도에서는 7월 19일 오후에 투입된 제19-2대대가 밤새도록 적과 화력전을 전개하였고, 20일 새벽부터는 갑천을 넘어서려는 적의 공격으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다. 그때 도로 북쪽의 F중대는 적의 압력으로 물러나 189고지로 물러났으나 결국 06시 경에는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그 무렵 유등천 동쪽에 위치한 대대지휘소에서는 한명의 대대원이 시내 쪽에 적전차 3대가 길을 막고 잇다고 보고한다. 사실 이것은 앞서 공병중대와 수색중대 3.5"로켓조에 의하여 파괴된 전차였으나 멀리서 그 형태만 보고 오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대장 맥그레일 중려은 후방이 차단 되었다고 판단하고, 이 도로차단 상화응ㄹ 연대에 보고하려 했으나 통신이 두절되어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바로 제34-1대대 병력의 선두제대가 대대지휘소에 도착하게 되는데 비로소 전투상황을 듣고 후방통로의 차단을 확신하였다. 그 무렵에 F중대가 189고지에서 대대지휘소로 철수하고 있었다.
(나) 제19연대 제2대대 철수
연대와의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11시경 연대와의 연락을 시도하려고 출발한 참모진들이 돌아오지 않게되자, 대대장은 대대의 철수를 결심하고 대대지휘소를 보문산 중턱(정상 북서쪽 1.5km)으로 정했다. 그리고 E중대를 무전으로 불러 철수하라고 명령햇다.
대대는 정오경 F중대와 보문산기슭으로 옮기고, 대대 예비인 G중대는 93고지에서 오전도안 진지를 확보하고 있다가 철수명령에 13시경 철수하게 된다. 이과정에서 화기소대장이 박격포탄이 남았으니 이를 모두 사용하고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화기소대는 적의 공격을 받고 소대장과 18며의 소대원 모두 그곳에서 옥쇄하고 말았다.
이어 논산가도는 13시 부로 제19연대 제2대대가 전부 철수함으로서 북한군에게 완전히 개방되었다.
다. 대전 시가지 전투
대전 시가지 전투는 갑천방어선 전투와 동시에 발생한다. 즉 유성가도에서 북한군 전차가 04시경 일부 보병만 탑승한 가운데, 미 제34연대 제1대대를 돌파하여 시내로 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미 제34-1대대 병력은 05시경에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10시경에 대전비행장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후방차단 부대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반면 딘 소장과 보챔프 대령은 전방대대가 계속 방어진지를 잘 지탱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적 전차만 시내로 진입한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 결과 후방침투부대들이 후방 도로를 모두 차단할 때까지 주력부대들이 대전시내에 남아 있었다. 결국 철수로를 돌파하지 못하고, 소부대 도는 개별 단위로 산악도로를 따라 철수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1) 적 전차 대전 시내 교란
딘 소자은 7월 19일 제34연대 지휘소에서 밤을 세웠다. 7월 20일 05시 30분경 새벽안개 속에서 소화기 총성을 듣게 되고, 이어서 도로분기점까지 적 전차가 접근하여 격파하는 상황을 보고 받는다. 날이 어두워 오자 사단장은 연대를 대전에서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전선상황이 혼미한 가운데 06시 30분을전후하여 제34-1대대가 철수하고, 아무도 없는 유성가도를 따라 적 전차 3대가 대전시내로 들어왔다. 적 전차는 시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전차포와 기관총을 난사하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 어느 병사가 3.5"로켓포를 찾아들고 전차를 추격한다. 당시에 적 전차는 의무중대 앞에서 부상자가 만재한 짚-차에 주포사격을 가하여 그 부상병 모두를 살해하고, 부상을 입고 땅바닥에 방칟된 생존자를 그대로 갈아뭉개고 지나가는 잔학성을 보였다. 그곳까지 추격한 수색중대 병사 2명이 3.5"로켓포를 연달아 사격하여 결국 2대를 격파하고 1대는 타격을 가하였다.
이 무렵 연대지휘송에 머무르고 있던 사단장은 전차소음을 듣고 확인하니, 도망간 적 전차 1대가 바로 연대 지휘소 앞 도로를 지나 비행장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였다. 이에 사단장이 직접 2.36"로켓포 사수를 대동하고 전차를 추격한다. 그러나 전차는 비행장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비행장 쪽에 불타고 잇던 탄약차 뒤에 적 전차 2대가 있어서 사수에게 사격을 명하였으니 첫발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포탄을 한발 뿐이어서 그 자리를 피하게 된다.(사단장 1차 실패)
그 후 정오에 적 전차 1대가 다시 다시 시내로 들어오다 제3전투공병대대 C중대의 3.5"로켓조에 파괴되도, 13시경에는 다른 적 전차 1대가 연대 지휘소 앞으로 태연하게 지나갔다. 사단장은 다시 이번에는 공병중대 3.5"로켓조를 이끌고 짚차를 타고 전차를추적하여 결국 발견, 적 전차를 파괴하게 된다. 이로서 사단장 자신이 3.5" 로켓포로서 적 전차와 대결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사단장 2차 성공)
북한군 전차는 보병없이 위세를 부리다 이날 중에만 모두 10대가 격파되고, 그 가운데 8대가 3.5"포에 , 2대는 야포에 파괴되었다.
한편 미 제5공군 예하 항공기들도 역시 대전전투에서 적 전차 수십 대를 격파했다. 이날 아침에 적 전차 15대가 유성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공격하여 5대를 격파하였다. 미 공군은 대전에서 적어도 15대 이상의 적 전차를 격파한다.
(2) 대전 철수 준비
(가) 잘못된 상황 판단의 연속
사단장은 전차를 파괴한 후에 연대 지휘소에들러 14시겨에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먹으며 상황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지도 갑천 방어선이 지탱하고 있다고 잘못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오판의 결정적 이유는 북한군은 A중대와 제19연대의 F중대진지를 점령하고선 그곳에 은폐하여 공격징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각에 북한군은 미 제24사단을 섬멸하기 위해서 대전 동쪽의 옥천가도와 남쪽의 금산방향 도로를 차단할 때까지 정면공격을 유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장은 전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제34연대장 보챔프 대령에게 일몰 후로 예정된 철수를 앞당겨 주간철수를 지시한다. 이는 시내에 남아잇는 적 저격병들의 교란활동을 감안하여 차량통해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15시경에 하달된 철수명령은 비행장 동쪽에 남아있던 제3대대만이 수령하게 되고, 제34-1대대와 제19-2대대는 철수하여 보문산 기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더욱이 공군은 지상군으로부터 표적을 얻을 수 없어서 지상병력에 대한 식별이 곤란하여 항공지원이 곤란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적의 전차와 포병에 역점을 두도록 강조한다.
당시에 제19연대 G중대의 제2소대는 논산가도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중인 대대규모의 적을 발견하여, 도로분기점에서 800m 이동하여 구릉지역에 호를 구축하고, 마침 제11포병대대의 1개포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어 사격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포구방향이 보은도로.청주도로.경부국도로 되어있어 지원이불가능 하고, 하려면 대대의 지시가 있어야 전환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이에 소대장이 대대 작전장교와 무선통화를 시도했으나 불통이었다. 이때 적이 먼저 박격포사격을 포대진지와 소대진지에 퍼붓기 시작한다. 그러자 허버트 소위는 전령을 연대지휘소에 보내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는데 , 당시 연대 지휘소에 대기주이던 제19-2대대 정보장교 위갈 중위가 달려와 포대가 철수할 때까지 현진지를 고수하라는 연대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사단장 딘 소장은 이 소대를 맥그레일 중령이 지휘하는 제19-2대대 주력으로 알고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장에서 상황파악은 어려운 것이다.
허버트 소대가 용전분투하며 대대규모의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있는데 포대는 사격에만 열중하고 철수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소대장은 먼저 진지에서 이탈하게 되고, 적이 포대를 점령하게 된다. 이에 사단장은 부연대장에게 즉시 포대를 구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즉시 역습부대를 급편하여 작전과장인맫ㄱ대니엘 소령이 지휘하여 진지를 탈취한 다음에 포차로 포를 견인하여 그 일부를 구출하였다.
(3) 후방 퇴로 차단 및 철수
(가) 연대장의 세천터널 확보 실패
제34연대 제3대대의 L중대가 7월 20일 16시경 마미박 엄호부대로 남아 북한군의 시내진입을 저지하는 동안에 연대본부는 철수를 서둘러 철수로인 옥천방향 도로에 대한 적의 차단기도가 노골화 되기 시작하는데, 먼저 연대지휘소를 떠났던 연대장인 보챔프 대령이 먼저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연대장은 먼저 철수로를 정찰하던 중에 철수로에 적 일부가 숨어들어 도로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큰 규모의 적이 가오동 마을(판암동 남쪽 1km)을 지나 북상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적이 적이 철수로인 옥천가도를 차단하려는것으로 판단하고 동행한 전차를 재촉하여 북동쪽의 세천터널로 달려갔다. 이곳이철수로의 요충지라 판단했다.
대전과 옥천 사이의 도로는 결부국도와 철도가 나란히 이어지고 있으며 마달령 부근에 증약터널과 세천터널(증약터널 서쪽 1.3km)로서 두 개의 터널이 있다. 그리고 도로는 터널위의 고개에서 협곡을 지나야 하기 대문에 이 두 곳이 도로차단에 절호의 장소였다.
제21연대가 증약터널 부근을 확보하고 있기에 제34연대장은 세천터널을 확보하려고 했다. 마침 공병폭파조가 있어서 연대가 철수하면 폭파토록 지시하고, 마침 고개를 지나가던 M-16대고포차 2대를 세워, 경전차 4대와 함께 도로와 터널을 경계토록 한다.
이어서 제34연대장 보챔프는 보병이 있어야 경계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16시 30분경 마달령 부근의 제21연대 제1대대(대대장 스미스 중령)를 찾아갔다. 그때 부사단장 멘노허 준장이 옥천에 있으면서 이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연대장을 호출하여 그곳에 가서 상황설명을 하였다. 이에 제21연대장 스테판 대령도 제34연대의 위기를 알았지만 당장 병력을 차출하여 세천터널로 보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격전차 1개 소대를 지원받고, 먼저 집결된 60명의 병력을 데리고 세천터널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34연대장이 도착하기 전에 적이 먼저 세천터널을 기습하여 공병 폭파조는 전원 전사하고, 대공포차는 동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연대장이 지휘하여 세천터널 확보작전을 감행했으나 2시간여긔 혈투에도 결국 싪패하고 탄약이 모두 덜어져 마달령 진지로 되돌아 가야 했다. 그러나 대전에서는 이러한 연대장의 행적에 대해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
영동의 사단지휘소에서는 16시경 사단장 명령ㅇ으로 대전역의 보급화물차를 견인하기 위해 인접 이원역(세천역 남동쪽 7.km)에 있는 기관차 1대를 대전기관사무소 소속의 승무원(기관사) 3명과 열차호송병 30여 명을 탐승시켜 대전으로 올려 보냈다.
기관차가 탄수차를 앞세워 역진형태로 16시 30분경 세천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탄수차가 터널 속에서 서쪽으로 머리를 내밀자 남쪽 능선에서 적의 사격으로 급수조가 파열되면서 비처럼 쏟아지는적의 화망을 뚫고 대전역에 도착하지만 수압이 저하되어 화차를 견인하지 못하고 기관차만 다시 16:45분경에 호송병과 함께 옥천으로 되돌아 가는데 , 이때 는 적이 터널에 이르는 좌우 능선을 점령하고 사격을 가하여 1.5km나 되는 적의 차단선을통과하면서 기관사 김재현이 죽고, 현재영은 부상하고 마지막 황남호가 혼자서 기관차를 운행하여 옥천으로 귀환하는데 호송병은 단 1명만 생존하였다.
(다) 연대 본대 철수
부연대장 웰링턴 중령은 옥천가도의 상화은 전혀 모르는체 마지막 철수준비를 한다. 그가 지휘소앞 도롱에서 차량종대를 편성하던 중에 적의 박격포탄이 집결지에 떨어졌다.
엄호부대인 L중대로부터 큰 규모의 적이 비행장에서 시가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ㅇ어왔다. 이에 사단장 딘 소장은 행군본대의 출발을 재촉하는 한편, 부관 클라크 중위를 대동하고 호위차량 1대를 앞세워 17시 55분에 연대지휘소를 떠나고 행군본대는 18시에 출발하였다.
그러나 선도차가 길을 잠못들어 행군대열이 오합지졸이 되고 여기에 적의 화력이 집중적으로 덜어져 더이상 차량 행군은 불가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차량을 버리고 120여 며의 병력만이 동쪽 126고지(판암동 북쪽 1.2km) 방면으로 올라가 남동쪽 방향으로 산길을 타게 되었다.
이들은 흩어져 철수하는 과정에 많은 피해를 입고, 다음날 아침에 우군방어지역으로 도착하고, 일부는 7월 22일에 도착하였다.그러나 일부는 실종되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연대작전과장 매대니엘 소령은 포로가 된다.
(라) 도로차단에서의 혈전
제19연대 제2대대 H화기중대가 선도하는 제대는 대전역 광장에서 이동하여 철도와 도로가 상하로 교차하는 세천터널 전방지점에 도달하여, 적의 집중적인 사격을 받으면서도 차량이 멈춰서면 반궤도 차량으로 밀어붙이면서 진출하여, 일부 연막차장을 하면서 터널을 빠져 나가고, 일부는 차량을 소각하고 병력만이 도로 북쪽의 능선으로 올라 각각 철수로를 찾았다.
(마) 사단장 딘 소장의 실종
당일 20일, 18시경 호위차와 함께 옥천방향으로 사단장이 더났다. 그러나 앞서가던 호위차가 옥천방향 도로 입구를 진나 곧장 금산 방향으로 잘못 들어서게 되었다.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지만 적이 집중사격을 가하여 그대로 달려 옥천방향으로 접어들기로 하고 돌를 따라 계속 남하하였다.
사단장 일행이 옥천방향 분기점에서 5km를 달려 낭월리 부그에 이르렀을 때에 금산방향 도로도 차단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사단장은 앞서 탈추하다 부상당하여 너부러져 있는 부상병을 수습하여 차에 태우고 지역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적이 차단선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이에 사단자은 도로의 서쪽 고지로 올라섰다.
고지에 올라선 사단장은 부상병을 치료하며, 갈증을 호소하는 병사를 위해 손수 수통을 들고 어둠 속에서 물을 구하려다 계곡에서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실신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딘 소장이 클라크 중위의 철수대와 이탈하게 되었다.
앞에서 선도하던 부관장교인 클라크 중위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사단장을 기다렸으나 이튼날, 21일 03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게 되자, 비로소 당황하여 사단장의 행방을 찾아 나섰으나 어둠속에서 찾을 길이 없었다. 그 이튼날 종일 그 부근의 숲속을 더듬어 사단장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포기하고 금산가도를 건너 동쪽의 산길을 따라 영동방향으로 이동하여 23일야 우군지역인 영동에 도착했다.
한편 사단장은 낭떠러지로 덜어져 실신하였다가몇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이제 단신으로 어개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산야를 방황하면서 철수하게 된다. 그런다 우연히 제19연대 제2대대 E중대 테이버 중위를 만나 설로 의지하면서 길을 찾다가 , 금산부근에서 다시 적 병력을 마나 응급피신하게 되는데 여기서 테이버 중위와도 떨어졌다.(테이버 중위는 진술에서 8월 4일 포로가 되었ㄷ고,압송되는도중에 우군기의 폭격을 받아 크게 부상을 입었고 영양실조로 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일생을 마감햇다고 증언한다)
딘 소장은 그 뒤로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서 "박종구"의 도움을 받아 1개월 더 산속에 은거하다. 진안까지남하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움을 청하였던 "한두규(진안 안천면 노성리)"의 밀고로 완주군 상전면 운산리에서 적 자위대 대원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이날이 8월 25일로 대전을 떠난지 36일이 되는 날이었다. 낯선 땅에서 적에게 쫒기면서 제대로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거의 냉수로 연명하던 사단장 딘 소장은 붙잡힐 당시에 당초 86kg 이던 것이 58kg이었다고 한다.
그가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그해 10월말 아군이 북진하여 평양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에서 처음 알게 되엇다. 그후에 그이 생사여부를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마침내 생존이 확인되고, 포로생활을 마친 뒤인 1953년 9월 4일에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하게 되었다.
(4) 부대의 수습
대전의 전투는 7월 20일 일몰과 함께 제34연대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각 부대는 소부대별로, 개인별로 살길을 찾아 산길을 헤매다가 후방의 우근 지대로 모였다.
먼저 제34-1대대는 보문산으로 우회하여 대전으로 철수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수리로 이동, 이곳에서 제19연대 G중대와 합세하여 400여 명으로 증강된다. 이들은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금산-전주를 거쳐 열차편으로 23일 남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신태영 소장)의철수 병력과 25일 여수에서 해군 YMS-504, 512 두개의 함정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회항해서 대구로 집결한다.
그리고 제19연대 제 2대대 주력은 부문산에서 금산으로 남하하다가 산길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7월 21일 영동에 도착한다. 여기에 제2대대장 맥그레일 중령, 제34-1대대장 아이레스 중령 등이 있다.
부연대장 웰링턴 중령이 지휘하던 본대는 시내 동쪽에서 흩어져 산길로 옥천을 향해 재촉하여 7월 22일아침에 영동에 도착하고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 부대를 수습하게 된다.
한편 판암동 부근과 세천터널에서 적과 교전속에 분산된 인원은 밤길을 더듬어 옥천과 영동으로 탈출하여 7월 23일까지도 도착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대를 엄호한 제34연대 L중대는 적의 교란으로 금산가도로 길을 잘못 들게 되었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사단장 일행이 타고 떠났던 차량과 장비들을 수집하고 50여 명의 부상병을 포함한 150여 명의 병력을 수습하여 차량으로 차단선을 돌파하였다. 그 뒤로는 별다른 적의 추격이 없어서 금산-안의를 거쳐 진주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부산의 병원열차를 불러 부산을 경유, 대구로 집결하였다.
당시에 연대장 보챔프는 옥천으로 되돌아 가고, 마달령의 제21연대 제1대대는 바라만 보고 차단선 개통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그 후 이튿날 아침에 북한군의 공격을 맞이하여 제2대대는 철수하게 된다.
3. 전투결과
가. 피.아의 피해 현황
미 제34연대는 7월 19~20일까지 대전전투에서 병력 3,933명 중에 1,150명이 손실되었다. 그 중 48명이 저사로 확인되고 , 228명이 부상당했으며, 사단장을 비롯 874명이 실종되었다.
이중 제34-1대대는 712명 중에 203명, 제3대대는 666명 중에 256명을, 그리고 제19-2대대는 713명 중에 211명을 잃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철수엄호를담당한 제34연대 L중대는 총 153명중 107명을 잃었고, 공병 C중대도 161명 중 85명을 손실되었다. 차량은 65%가 상실되엇으며, 제11포병대대 A포대는 155밀리 야포 모두를 잃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그들의 포로 진술에 의하면 보병은 크게 손실이 없었고, 다만 76밀리 포 15문과 120밀리중박격포, 그리고 전차 15대 등이 파괴되었다고 진술했다.
나. 전투 후 전황
(1) 북한군 동향
7월 20일 저녁에 대전을 함락하자, 북한군은 전승을 자축하는 축제분위기에 샇여 그 이튿날에는 부대정비를 한다. 이 ㅈㄴ투에서 공헌한 제3, 제4사단과 제4사단의 제18연대, 서울 105전차사단과 공군제1격추기연대에 "친위부대"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특히 연대급인제18연대가 선정된 것은 그 연대가 대전 남쪽으로 우회하여 후바을 차단함으로써 대전을 포위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김일성은 전선사령부(사령관 대장 김책)에 혿된 질책을 가하였다고한다. 이유는 7월 16일에 금강선을 돌파했음에도 대전함락이 4일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는 지적이었다 한다.
북한군은 다시 7월 22일부터 공격을 시작한다. 제3사단과 105전차사단의 일부가 경부국도를 따라 대구로 기동하고, 제4사단은 대전에서 남쪽의 금산가도로 이동하여 안의-거창방면으로 기동한다.
(2) 미 제24사단 동향
미 제21연대장 스테판 대령이 우려한 대로 북한군ㄴ은 7월 21일 날이 밝자, 1개 연대 규모가 세천터널 부근에서 동쪽으로 마달령을 포위하려 하였다. 그곳의 제1대대는 연대자의 철수명려에 즉시 공병으로 증악터널을 폭파하도록 하고, 제52포병대대의 엄호하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옥천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다시 영도으로 이동하였다. 그후에 금강의 양정교를 건넌 후에 그 교량을 마지막으로 폭파하고 강의 동족에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그 이튿날인 7월 22일 정오에 제8군 명려에 따라 진지를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에 인계하고 영동에 집결한다.
미 제24사단은 영동에서 수습된 8,660명으로 김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한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사단장 처치 소자이 7월 22일 부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항공정찰결과 부간군 제4사단이 대전에서 공격방향을 남으로 돌려 금산도로를 따라 안의-진주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에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자은 7월 24일에 정비중인 미 제24사단을 진주방향으로 전환시켜 그 방면의 적 공격을 막도록 조치함에 따라 사단은 그날 야간에 진주로 급히 달려가 낙동강의 서남부전선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제 4 절 영동-김천 지연전
1. 전투개요
가. 개요
영동-김천지역 작전 상황도
옥천
적3-8연대, 적 기갑연 미25사 황간 미1기병사지휘소
미 1기병 노근리 미8연
미1대대
미7연
미7-2대대 미8-2대대 김천 미 1기병사
미수색소대 미8연/ 426고지 가리 미7연 미5연
주곡리 미5-2대대
영동
미2대대 갈령
적3-7연 미5연
적3-9연 적3-1개연
지레
영동-김천 전투는 미 제1기병사단이 미 제24사단을 증원하여 영동 일대에 투입된 7얼 22일부터 7월 31일까지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지연하기 위하여 경부국도 축선을 중심으로 실시한 지연전을 말한다. 이 축선에서 결정적인 전투는 없지만 공중공격과 포병화력에 의한 북한군의 주력을 약 9일간 지연시킴으로서 미 제8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미 제1기병사단은 맥아더 장군의 작전구상에 따라 7월 초에 인천상륙작전부대로 선정되었으나, 먼저 투입된 미제24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증원하기 위해 7월 18일 포항으로 상륙하였다.
포항으로 상륙한 제1기병사는 예하 제8기병연대가 7월 22일 정오에 영동 북서쪽에 위치한 미 제21연대로부터 방어진지를 인수함으로서 경부축선에서의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반면 북한군은 대전전투에서 와해된 미 제24사단을 계속 추격하지 못하고, 대전에서 하루 동안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에 7월 22일부터 기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의 제3사단은 영동을 목표로 옥천방향에서 정면공격과 동시에 주력은 금산-무주 방향으로 우회공격을 기도한다.
미 제8기병연대는 제8군의 정부판단에 따라 옥천방향과 무주방향에 각각 1개 대대씩 배치하여 적을 지연시키고자 했다. 미군은 주로 공군 및 포병화력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잘 저지하였으나, 결국에는 방어진지 후방의 도로가 차단되어 바어진지가 붕괴되었다. 즉 7월 25일 오전에 방어진지에서 철수하고, 17시경에는 영동에서 철수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이후 영동에서 황간 사이의 지역에 추가로 투입된 제7기병연대와 이미 투입되었던 제5, 제8기병연대가 축차진지를 점령하면서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지연전을 수행한다. 이 기간에 큰 전투는 없었다. 그러나 7월 29일에 황간 북서쪽의 보은 방향에서 미 제27연대(미 제25사단소속)가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으로 철수함으로써 측방이 노출되었고, 또한 김천 남서쪽의 지레에서 북한군의 기동이 감지되어 후방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황간에서 철수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사단사령부를 김천으로 이동하고, 예하 제5기병연대는 김천 남서쪽의 지레 방향, 제8기병연대는 북쪽의 상주방향에 투입하고, 제7기병연대는 계속하여 경부국도 축선을 담당케하였다. 이후에 사단는 7월 31일까지 치열한 전투는 없었고, 다만 지레에서 공격하는 적 부대와 소규모 근접전투는 게속 되었다.
그 후 8월 1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전군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를 하하는 명령을 내림으로서, 미 제1기병사단도 상주 방향에 진출해 있던 미 제25사단과 상호 엄호하에 왜관으로 철수하여 낙동강 동안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미 제24사단으로부터 7월 22일 영동 전방에서 전투지역을 인수하여, 철수할 때까지 약 10일 간의 지연전을 수행하여 미 제8군의 낙동강 방어선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나. 피.아의 작전계획
(1) 북한군의 작전기도
북한군은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다음에 제4차 작전방침으로 "연속적인 타격과 대담한 기동작저으로 미군과 한국군을 김천, 함창, 안동 지역들에서 포위 소멸하고, 마산-대구-영천-포항계선에 진출함으로써 최종적인 미군을 격멸시키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선사령부 차원에서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운용하는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전 전선에 균등하게 전투력을 배분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만이 경부국도를 따라 기동하고, 북한군 제4사단은 대전에서 금산가도를 따라 무주-안의-진주방향으로 기동하고, 제2사단은 보은-황간방향으로 기동하고, 제15사단은 괴산에서 상주로 기동하고, 제1사단은 문경새재 방향으로 기동하도록 하였다.
(2) 미 제1기병사단의 전방전개 및 작전 복안
(가) 영동지역 전투 전개
미 제1기병사단은 6.25전재이 발발하자 맥아더 장군에 의해 7월 초에 구상된 최초의 인천상륙작전계획인 불루하트 계획에 의해 인천상륙작전부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먼저 투입된미 제24사다이 조기에 대전으로 밀리자, 7월 10일 취소되었고, 북한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부대로 투입하게 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일본의 요코하마 지역에 주둔 중에 한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5. 제8기병연대를 함한 선발대가 1차 상륙부대가 되어 7월 12일~14일 사이에 승선을 끝내고, 7월 15일 요코스카항을 출발하여 7월 18일 포항으로 상륙한다. 그리고 제7기병연대와 후속부대들은 7월 17일 승선을 끝냈으나태풍으로 인해 출항을 미루다 7월 22일에 포항에 상륙한다.
당시에 미 제8군사령과 워커 중장은 대전의 제24사단장 딘 소장에게 미 제1기병사단의 상륙과 전방전개를 보장하기 위해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토록 지시하고, 대구로 이동하여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불러 신속히 영동으로 전개하여 제24사단을 증원하도록 명령하였다.
사단은 7월 19일 포항에서 영동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먼저 제5기병연대가 20일 오전 9시에 김천 일대 관리에 도착하고, 제8기병연대가 7월 20일 13시에 열차로 출발하여 야간에 영동 일대에 도착하여, 21일 오전 주에 영동 서쪽 부근에서 미 제24사단 제21연대와 방어진지를 교대하였다.
사단 포병연대는 7월 20일 16시 40분에 김천에 도착하여, 그 중에 제77포병대대와 제99포병대대는 제8기병연대를 직접지원하기; 위하여 7월 22일 아침에 영동으로 이동하였다.
(나) 미 제1기병사단의 작전 복안
사단장 게이 소장은 7월 18일 사단 포병사령관 파머 준장에게 먼저 상륙을 끝낸 제5, 제8기병연대를 지휘하여 제24사단을 지원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본인은 제8군사령관의 명령을 수령하러 대구로 달렸다. 여기서 워커 중장은 게이 소장에게 "제1기병사단은 영동을 방어하라. 그 후방에는우군이 없으므로 후방보급로 확보에 주의를 요한다. 식량없이는 살 수 있지만 탄약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것을 명심하라. 영동-대구의 도로가 폐쇄되었을 때에 이미 탄약이 소진된 뒤일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8군사령부는 1개 대대를 뽑아 영동 북서쪽으로 경부국도를 따라 가다가 금강동안에서 진지를 점령토록 하고, 다른 1개 대대는 영동 남서쪽 무주도로에 배치토록 요구하여 관철시킨다. (당시 사단은 병력을 집중운용할 게획이었다). 당시 제8군은 북한군의 우회공격을 할 것으로 판단한 요구였다.
전방 방어를 맡게 된 제8기병연대는 22일 주간에 제1대대를 영동 북서족 5.5km 지점의 금강 동안에, 제2대대를 갈령(영동 남서쪽 5km)부근에 배치하였다.
(다) 전투준비태세
미 제1기병사단은 6.25전쟁 참가 전에는 미 제8군사령부 예하 4개 사단 중 하나로 일본 관동지방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령부는 도쿄 주변에 있었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훈련이나 장비 확보 등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그나마 먼저 출동한 제24사단에 인원(6.25일 당시에 10,374명이 6월 30일에 12,340명이 된다. 제24사단에 많은 병력을 보내고 그 빈자리를 다른 부대로부터 새로운 인원으로 보충받았다. 그러니 리더쉽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과 장비를 보내야만 했다. 각 연대는 공히 2개 대대로 편성되고, 장비는 신혀이 없이 구형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포병대대도 2개 포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다. 인접부대 상황
미 제25사단이 제24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된 주일 미 제8군 소속의 사단으로, 오오사카 지역에 주둔 중에 제8군의 명령으로 7월 10일~15일 사이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예하 제27연대가 7월 10일에 먼저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미 제24연대는 12일, 그리고 제35연대는 13~15일 사이에 각각 상륙완료하였다.
당시에는 미 제24사단장이 주한미군사령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 제25사단에 대해 한국군을 지원할 준비를 갖추고, 1개 대대를 포항비행장을 경비하도록 하고, 1개 연대를 김천에 예비로 확보하여 대전 또는 청주방면으로 증원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다 7월 13일 00시 01분부터 한국에서 주한미군의 지휘권을 제8군사령관에게- 부여됨으로서,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의 임무를 명시하는 작전명령이 하달된다.
이에 따라 제24사단은 금강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제25사단은 중부지역에서 적을 지연 중인 한국군을 지원하되, 1개 대대로써 포항비행장을 경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제25사단은 제8군사령부의 작전명령으로 13일에 제27연대를 안동으로추진하고, 상주로 올려 보낸 제24연대에서 제2대대를 뽑아 포병 1개 포대와 함께 예천에 투입하여 제천-풍기-안동 축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8사단과 충주-문경-함창 축선을 담당하고 있는 국군 제6사단의 간격을 보강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35연대에서 제1대대로 포항비행장을 경비하게 하고 제35연대(-)는 김천으로 이동하여 예비로 운용하였다.
미 제25사단은 이때까지 별다른 접적 없이 한구군 후방의 제2선에서 지원태세를 갖추고 대기 중에, 7월 18일에 미 제1기병사단의 주력이 포항에 상륙함으로서 임무가 변경되었다.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제1기병사단으로 경부국도의 미 제24사단을 지원토록 함으로서 미 제25사는 상주로 이동하고, 김천의 제35연대를 함차응로 추진하여 예천의 제24연대 제2대대를 통합지휘토록 하는 한편, 제24연대로서 상주 서쪽의 괴산-화령장-상주도로의 방어에 중점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안도의 제27연대를 보은-황간 도로로 이동시켜 그 정면의 적을 지연토록 하였다.
당시 미 제25사단은 제27, 제35연대는 2개 대대로 편성되고, 제24연대가 유일하게 3개 대대로 편성되는데, 이 연대는 연대장만 백인인 화이트 대령이 유일하였고 나머지 연대원은 모두 흑인으로 구성되었다,
2. 전투경과
가. 영동 전투(7.22~7.25)
영동전투 상황도
미25
금강 금강
이원면 미1기병
금강 고당리 용당리
적107전차연 미제1대대
국사봉 502 금강
양강교 초강리
고당교 각계리 황간
적3-8연대 약목리 노근리 금강 282m 가리
양강면 제77포병대대 주곡리 제5기병연
영동 제99포병대대
금강 성산 437m 미제8기병연
부용리
제61포병대대
괴목리 양정리
금강 274m 양강면
묘동리
갈령
미제2대대
적전차? 적3-7연대
적3-9연대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 제3사단, 제4사단, 제105전차사단은 21일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7월 22일부터 기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북한군 제3사단과 제203전차연대는 경부축선을 중심으로 기동하는데, 예하 제8연대와 전차부대 일부는 옥천-영동가도로 공격하고, 제7.제9연대와 전차부대 일부는 금산-무주 방향으로 우회하여 영동을 우선 탈취하고자 하였다.
이 당시에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는 제1기병대대를 옥천-영동가도에, 제2기병대대를 무주-영동가도에 각각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1) 옥천-영동 가도
7월 22일전투는 금강을 도하하려는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제8연대 사이에 포병사격전이었다. 이 당시에 미 제77포병대대는 제1대대를 직접지원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12시경 금강대안에 북한군 병력을 관측하고 13시에 영동에서 처음으로 포사격을 실시하여 도하를 방해하였다.
북한군은 7월 23일 새벽부터 야음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도하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적의 우회침투에 대비하기 위해 사단장은 제5기병연대를 제8기병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 사이(9km간격)을 보강하도록 명령하여 제5기병연대자은 제1대대를 출동시켰다.
북한군 다시 7월 24일 아침에 전날과 마찬가지로 박격포와 전차포 사격을 시작하였으나 미 제5-1대대 병력도 투입되어 적의 도하를 저지한다.
(2) 무주 -영동가도(피난민을 가장한 오열의 침투로 대량 피해 발생)
7월 22일에 이곳 미 제8기병연대 제2대대지역인 갈령지역에는 적정이 없었다. 제99포병대대가 대대를 직접지원할 준비를 마쳤으며, 제61포병대대가 사단을 일반지원 및 화력증원위해 황간에서 영동으로 이동하여 사격임무에 가담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 예하 제7, 제9연대는 마침내 7월 23일 아침에 공격을 개시하여 낮 동안은 잘 지켜냈으나, 야간에 적이 진지후방의 교동(갈령 북쪽 2.5km) 부근의 도로를 차단하여 혼란에 빠졌다.
다음날 7월 24일 아침에 후바이 차단되었음을 인지한 제2대대장 필드 중려은 M-24경전차 3대를 동반한 일부부대를 지휘하여 도로차단지점을 돌파를 시도하여 성공했지만 돌 개통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대대장은 부상을 입고 후송된다.
도로차단상태로 나머지 병력은 버텨야 했다. 이에 사단에서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제5기병연대 제1대대 일부와 제16정찰중대 일부를 투입하여 하루 종일 4차례의 작전이 모두 실패했다.
7월 25일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미 제8기병연대 F중대와 제5기병연대 F중대, 제16정찰중대는 219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실종된 제8기병연대 F중대는 산을헤매며 7월 27일 연대와 접촉이 이루어져 구출되었으나, 제5기병연대 F중대는 영영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차 7대를 포함한 다수의 차랴을 잃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피난민을 가장하여 아군 후방으로 침투함으로써 포병진지의 기습과 통로의 차단 등 교란을 획책하였다."
당시 미 제61포병대대, 제99포병대대가 이렇게 하여 기습을 당했으며, 피난민 일부를 검색한 결과 임산부로 보이는여인의 옷 속에 소형 무전기가 감추어져 있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진지 배치상태와 포병위치를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한국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피난민의 검색을철저히 하도록 하는 한편, 야간에 지정된 통로를 사용토록 통제르르함으로서 피난민을 가장한 오열의 침투방지에 노력하게 된다.
(3) 영동에서 철수
미 제1기병사단은 7월 24일 오후에 북한군이 방어진지 좌우 측방으로 깊숙이 우회 침투하여 후바을 차단 및 교란하고, 이로 인해 많은피해를 입게 되자, 영동 전방에서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25일 02시경에 철수명려을 하달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7월 25일 영동 서족에서 영동을 목표로 여명 공격을 가해왔으며, 이날의 공격이 가장 강력하였다.
미 제8기병연대 전날 영동에 투입된 제5기병연대의 지원을 받아 영동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적이 7월 24일과 25일 야음을 이용하여 방아지역 남쪽과 북쪽으로 적의 대부대가 우회하여 측면을 위협하였고, 적의 침투병력이 진지 후방의도로상에 강력한 도로차단점을 형성함에 다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옥천가도의 제1대대는 일짝부터 적의 공격으로 8시경에 철수를개시하였으며, 당시제92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적의 도로차단점을 돌파하여 큰 손실없이 영동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반면에 무주방면의 제2대대와 이를 지원하고 있던 제5기병연대의 F중대는 끝내 적의 도로차단점을 돌파하지 못하고, 부대는 그룹별로 산악지대로 탉출해야 했으며, 사단에서 이를 구출하기 위해 제16정찰중대와 제71전차대대 A중대를 투입시켰지만 이들 역시 적의 대전차공격조의 매복에 걸려 맣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날 25일 10시 30분경에는, 적의 침투부대와 게릴라들이 영동읍 북방 1km 지점에 있던 제77포병대대와 영동읍 남쪽 500m 지점의 제61포병대대를 기습하여, 포병이 직접사격으로 대항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 빠진는 등 전투지원부대들의 경계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제8기병 제1대대가 혼란 중에 영동 읍낼로 들어와 오후에는 전방에서 철수하는부대를 엄호하고 있었으나 16시 30분경에 적의 대부대가 영동 남동 방향으로 우회하고 있다는 항공정찰 결과로 17시경에 마지막 부대가 영동을 떠남으로써 영동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군이 영동읍에 들어온 것은 7월 25일 20시경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3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에게 항공공격과 포병사격으로 큰 타격을 주었지만 (포로들의 진술이 2,000명이라 함)사단도 희생이 컸다. 사단의 총사상자는 415명이었고, 그 중에 전사 49명, 부상 234명, 실종 118명, 확인된 포로14명이었다.
나.영동-황간전투(7.26~29)
영동-황간전투 상황도('50.7.26~29)
적2사
미25-27연
미25사
미1기병사 황간 미1기병사지휘소
미7연-2대대 모든 포병(77.67.99.61)
노근리 미5연
안대리 미7연-1대대
미8연-2대대
서송원 적?
미5연-1대대
미7연-2대대
426고지 적?
주곡리 가리
영동 미 5연- 2대대
적3사 / 적107전차연
(1) 제1지연진지 전투
북한군 제3사단은 7월 25일 영동을 점령하고, 곧 영동 동쪽의 고지대에 진지를 점령하여 역습에 대비하는 듯 하였다. 그들은 아직 지원포병이 금가을 도하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은 불가하였다. 포병은 이날 23시경 금가을 도하하여 심천으로 이동하고, 영동에는 이틀 후인 7월 27일 5시경이었다.
미 제7기병연대 제2대대는 주곡리 북쪽의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24일 24시까지는 아무런 적의 징후가 없었다.,그러나 사단은 사단의 우측 미제25사단 제27연대가 북한군 제2사단의 압력으로 후방으로 긴급 철수함으로써, 적2사단의 공격을 황간 서측에서 방어하지 못하면 영동 바로 동쪽의 유일한 도로인 경부 국도에 의지하고 있는 예하부대들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사단은 모든 부대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리고, 사단은 김천 북방 관리로 철수하였다.
전방의 제7-제2대대장 헤이어 중령은 7월 26일 01시20분에 정체 불며의 차량 1대가 대대지역을 통과하였다고 연대에 보고하자, 사단은 바로 제2대대의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01시 30분경에 적의 침투공격을ㅇ 받게 되는데 장병들은 공포에 걷잡을 수 없이 분산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다.
북한군은 이후에 02시 20분경에는 제2대대 맞은편에 배치된 제5-제2대대 전초부대를 전차와 보병들이 공격하였다. 이에 제5기병연대는 이들을 포병사격으로 격퇴하였다. 이날 적은 01시 경부터 04시 경까지 공격이 계속되었고, 제82포병대대와 제61포병대대는 지속적인 포사격으로 전방부대를지원하였다.
한편 적 기습공격에 무너진 제7기병연대의 제2대대는 연대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08시경 약 300명이 노근리 부근 안대리에 집결된다.
제5기병연대 제2대대는 이날 늦은 아침에 철수하여 안대리 능선상에 부대를 배치하였고, 미 제5기병연대 제1대대는 그 후에 철수하여 제2대대 동쪽 후방인 소계리 능선에 배치된다. 한편 백마산 북동쪽 도로 북쪽에 능선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8기병연대 제2대대는 오후 접적이 없는 상태에서 황간 동쪽으로 철수했다.
(2) 제2 지연진지 전투
(가) 지연진지 배치
미 제1기병사단 예하 연대들은 7월 26일 오후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여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제8공병대대 A중대는 제5기병연대가 철수한 이후 13시경에 서탄막과 서송원입구에 적이 이용할 수 있는 교량을 파괴한 뒤 주변에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도도대화구를 설치하는 등 대전차장애물을 집중 설치하였다.
북한군은 7월 26일 아침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주곡리 근처에서 숨어버려 관측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제7기병연대 제2대대는 서소원 입구-노근리 주변에 급편진지를 구축하였다.
제5기병연대는 가리에서 철수하여 제2대대가 12시경 노근리 쌍굴 동측 능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1대대는 제2대대를 엄호한 후 철수하였다.
이때 부대배치를 약간 조정하여, 7월 26일 정오부터 노근리 주변에는 쌍굴 북동쪽과 인접한 능선에는 제7기병연대 제2대대가, 쌍굴 동쪽 안대리 능선상에는 제5기병연대 제2대대가 배치되었다.
그러다 다시 아날 저녁에 제7기병연대 제1대대가 이날 새벽에 기차로 포항을 떠나 12시경에 황간역 남쪽에 도착하여, 18시경에 제5기병연대 2대대진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부대교대로 인해 노근리 근처에는 찰도와 도로의 분기점을 기준으로 월유봉 남족 능선부근에는 제7기병연대 제2대대가, 노근리 쌍굴 동족 능선진지는 제7기병연대 제1대대가 점령하게 되었다.
(나) 제2지연진지 전투
북한군 제3사단은 7월 27일 새벽부터 포병사격과 함께 후반야 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제7기병연대 전방 부대들은 포병과 소화기 사격으로 이들을 격퇴하였으며, 북한군은 07시경 모두 사라졌다.
황간 북쪽과 황간-관리-김천 도로 축선에서도 이날 야간에 침투한 적 정찰병과 300여 명의 게릴라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계속하여 제1기병사단 진지 간격, 후방지역으로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였고, 특히 지원포병을 집중적으로 타격하고 있었다.
특히 제7기병연대 제2대대와 미 제25사단 제27연대 제1대대 사이의 간격으로 북한군이 침투해 옴으로로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 제2사단은 7월 28일, 이른 새벽부터 황간서측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실시한다. 여기서 미 제27연대 제1대대는 전날 적의 공격으로 월유봉 정상 고지를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제7기병연대 제2대대와 반격으로 저지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3사단은 아날 아침 06시15분경에 경부국도에서 제7기병연대 제1대대 정면을 향해 강력한 포병사격과 함께 좌우 측면으로 침투공격을 개시하고, 오후에는 노근리 방향으로 전차와 보벼으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은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을 항공폭격과 포병사격 등으로 격퇴시킨다.
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은 전방 방어진지가 돌파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고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제8기병연대가 황간 북방의 고지대를 점령하고 제7기병연대가 월유봉 남쪽고지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 미 제25사단 제27연대가 20시경에 먼저 철수하여 황간 동쪽으로로 철수하면 제7기병연대가 29일 새벽 05시 30분경에 철수를 개시하고 제5기병연대는 현 진지를고수하며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7월 29일 08시 45분경에 차후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다. 김천 전투
김천전투 상황도('50.7.29~31)
상주
선산
적3사(-) 미8연 남산리
적전차(?)
275고지 미7연
미92포병
김천 미99포병 미77포병
미61포병
왜관
185고지 미5연
미 제21연대 3대대
지례
적3사 1개연대(?)
(1) 방어진지 편성
북한군은 7월 26일부터 경부국도 축선에서의 정면돌파를 단념하고, 이 축선에 일부 병력만 남겨 미 제 제5.7기병연대를 견제하는 가운데 주력을 남쪽의 무주로 전환시켜 지례(김천 서남쪽 16km)-김천으로 우회공격 하려 하였다. 이러한 적의 기도는 미구늬 항공정찰로 확인되었다.
이에 황간에 사단지휘소를 두고 있던 게이 사단장은 북한군의 후방차단을 우려하여 병력을 김천으로 철수시키게 되며, 대구에서 정비중이던 제24사단 제21연대 제3대대를 제1기병사단에 배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 제1기병사단은 배속된 미 제21-3대대를 지례방향 하원리(지례북동쪽 6km)에, 제7기병연대는 김천 북서쪽 9km 지점의 275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황간-김천 경부국도를 통제하고, 제5기병연대는 김천 남서쪽 4km의 185고지 부근에 배치하여, 미 제21-3대대의 후방 축차진지를 점령하여 지례-김천에 이르는 3번 국도를 통제하고, 제8기병연대는 김천 북쪽 5km남산리 부근에 배치하여 상주-김천에 이르는 3번 국도를 통제하도록 한다.
(2) 지례 부근 전투
미 제1기병사단 사단장 게이 소장은, 김천으로 철수한 29일 아침에 사단수색중대를 김천남서쪽 지례방향 도로를 정찰하도록 하였다. 이에 라우에 중위가 인솔하는 1개 소대가 차량정찰대를 이끌고 09시경 지례에 도착하기전에 한국경찰로부터 지례에 적 1개 대대가 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중대장 하아비 대위가 직접 다른 1개 소대를 직접지휘하여 지례마을 로 달려가 앞선 소대와 합류하였다.
수색중대 2개 소대는 그때 정면에 나타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응하다 지례마을로 철수하게 되며, 이대 적 200~300명이 남쪽으로부터 마을로 진입하게 되며 여기서 수색중대장 하아비 대위가 전사하게 되면서 수색중대 41명은 근처 산으로 올라가 진지를 구축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김천으로 철수하여 30일 아침에 사단지휘소에 도착한다(2명 전사 3명 부상, 14며이 실종)
이에 사단장은 제21-3대대와 제5-1대대를 지례로 추진하여 제99포병의 지원하에 지례마을 북쪽 고지를 점령하여 적과 대치하게 된다.
그런데 뒷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례에 먼저 도착한 북한군 제3사단 제7연대는 그들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렸던 거승로 확인되었으며 31일까지 지례에서 대치한 상태로 보냈다.
(3) 경부 국도 축선 전투
북한군 제3-8연대는 경부 국도 축선에서 소강상태를보이다가 7월 31일에 황간으로부터 전차 2425대를 앞세우고 공격한다. 이에 김천 북서쪽 9km의 275고지 부근에 배치되어 있던 미 제7기병연대는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공격으 저지하였다. 이날 하루 동안에 공중공격으로 13대의 북한군 전차가 파괴되고, 다른 6대는 도로상에서 불타고 있었다. 이날 북한군 제3사단 병력 및 장비뿐만 아니라, 병행 공격한 제105전차사단의 전차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라. 낙동강 방어선의 철수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7월 25일에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을 상실했을 때에 이미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해야겠다는 작전복안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7월 26일에 준비된 진지로 이동하여 차기 공세작전에 필요한 지역을 확보하려 한다며, 철수준비 령을 내렸다. 철수시기는 후달한다고 했다.
그리고 철수준비와 더불어 대구의 군사령부를 부산으로 이동하고자 일본 동격의 UN군사령부에 건의하였다. 이에 맥아더 장군이 직접 7월 27일 아침 10시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대구의 군사령부를 들러 워커 중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자리에서 현 전선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절대로 한국에서 제2의 덩케르트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제 8군사령부는 대구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워커 중장은 이틀 뒤인 29일에 상주의 미 제25사단을 방문하여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바탄과 덩케르크의 비극을 상기하라고 강조하였다. 이 훈령은 곧 "고수냐 죽음이냐(Stand or Die)로 표현되어 전군에 전파되었다.
[바탄] 제2차 세계대전초에 일본군에 사로잡힌 7만명의 미군과 필리핀 전쟁 포로들이, 1942년 4월 9일 바탄반도의 남쪽 긑 마리벨레스를 출발한 대열은 신페르난도까지 88km를 강제 행진하고 이어 카피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하고, 다시 카파스에서 수용소까지 13km를 행군한다. 이 행군과정에서 긂주림에 시달리고 구타를 당하고, 낙오자는 총검에 질려 죽음을 당했다. 결국 7,000~1만 명의 포로들이 행진중에 사망하고 단지 5만 4,000명이 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 책임을물어 당시 필리핀 침공작전을 수랭한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46. 4.3일 처형된다.
[덩케르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1940년 5월26일부터 6월 4일까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에서 벌어진 연합군의철수 작전이다. 독일군은 그해 5월에 프랑스.벨기에 국경지대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서쪽으로 밀고 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은 퇴로가 막혀 해안에 고립된다. 당시에 여기에 고립된 영국군 22만 6000명과 프랑스.벨기에 연합군 11만 2000명이 최소한의 희생을 치르고 영국으로 철수한다. 특히 일반인들의어선이나 요트 등 작은 배까지 철수작전에 나서 병사들을 구출했다.
한편 북한군들은 이틀 뒤인 7월 31일 경부 국도와 3번 국도(지례도로)를 따라 김천에 압력을 가하고 있을 무렵에 미 제8군은 제25사단장 칸 소장을 상주에서 철수시켜 김천후방으로 축차진지를 점령케 하여 대구 정면의 방어력 증강을 모색하였다. 이에 8월 1일 새벽에 상주 남쪽으로 이도하여 김천 동쪽에 집결한다.
미 제8군은 15시경에 전군에 낙동강 동안으로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거의 동시에 미 제25사단은 삼랑진으로 집결하도록 수정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제25사단은 왜관으로 집결하여 열차편으로 삼랑진으로 출발하였다. 낙동강 서남부지역의 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리고 제1기병사단은 8월 1일까지 김천을 사수하고, 제25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뒤에 낙동강을 건너왜관 일대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한다.
3. 전투결과
가. 피.아의 피해 현황
북한군 제3사단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2,000여 명이 사상자를 본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로써 병력 수준이 5,000명 내외로 감소되고 전차 등은 거의 무력화 돼버렸다.
반면 미군은 7월 23일 적과의 첫 교전을 시작으로 7월 31일까지 모두 793명이 손실된다. 전사 64명, 부상 355명, 실종이 374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엄호부대 역활을 하던 제8-1개 대대와, 제5-1개 대대가 큰 손실을 보았다.
나. 전투 후 전황
미 제1기병사단은 8월 3일 밤에 왜관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고, 낙동강 동안에서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왜관 북쪽 3,km지점을 전투지경선으로 국군 제1사단과 책임지역을 분할하였다.
미 제8군은 8월 4일부터 낙동강선을 따라 북쪽으로부터 미 제1기병사단이 적 제1.제3사단과, 중앙의 미 제24사단은 적 4사단과, 그리고 제일 남쪽의 미 제25사단이 적 제6사단과 각각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7월 29일 미 제8군의 에비로 전환되었던 제25사단 제27연대는 30일에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진주지구에 투입되었고,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었던 제24사단 제21연대 제3대대는 원대복귀한다.
제 5 절 유해발굴 위한 공주 -대평리 전투, 대전전투, 영동-김천 전투 탐사 및 탐문결과
7월 13일 대구에 지휘소를 개소한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미 제24사단으로 금강선을 연하여 방어배치를 완료하고 미 제25사단을 10~15일 사이에 이동완료하여 제27연대를 의성, 제24연대를 상주에 진출시켜 국군을 지원토록 하고 제35연대를 예비로 1개 대대를 차출하여 영일 비행장을 방어토록 한다.
국군은 제1군단(수도사단 :제17연대 배속, 제2사단)이 괴산-미원일대에서, 제2군단(제6.8사단)이 이화령-죽령간에서 제3사단 제23연대가 영해 남방으로 물러나 방어태세 중이였다.
1. 공주방면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14일, 공주 북방에서 금강을 은밀 도하하여 미 제34연대를 측방에서 공격한다.
화력지원하는 제63포병대대 진지부터 기습하여 공주 오룡리일대의 포병은 단 한발도 사격못하고 초토화 되어 버렸다. 반면에 공주 전방의 제3대대는 1개중대가 전장피로증으로 심신 쇠약에의해 모두 후송되는 등 병력배치가 미흡했지만 북한군의 정면공격이 없었다.
결국 포병은 마침 진출한 국군 기병중대등의 지원이 있었지만 화포 10문과 차량 60~80대를 버리고 진지를 탈출해야 했다.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9일 전의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뒤로 빠져 제3사단의 초월공격을 지원한 후에 7월 10일 경로를 바꿔어 23번도로를 따라 정안-공주 방면으로 기동했다.
"저수지에서 빨가벗고 목욕하는 미군"
이곳일대는 용성천이 흐르고 많은 지류들이 발달해 있다. 웬만한 논에는 둠벙 하나씩은 다 있는 곳이다. 검상리 대안상에는 보흥천이 흘러 금강에 이르고 나루터가 있지만 어천-공주간 개통도로가 '20년도에 완공될만큼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다.
우린 이인면에 가서 먼저 노인정을 찾았으나 마침 농번기라 어르신들이 없다. 부여가 집인 유법사가 앞으로 나서서 수소문끝에 한 어르신을 보건소 앞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혹시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미군들을 보셨습니까?"
"그야 내가 12살인데 다 보았지요. 전쟁이 뭔지도 몰랐고 어느날에 미군이 왔다는데 얼굴이 까만 사람이 많이 와서 떠들어대는데 정말 씨그럽더라고."
"우리 전사기록에 이 일대에서 미군이 많이 전사했다는데 보셨는지요?"
"나는 원래 밤고개가 있는 태봉동에 살았는데 대포들이 많이 들어와 밭작물을 밀치고 그냥 들어가 미군들이 진을 치는데 다 봤지요. 북한군이 몰래 강을 건너 들어와 신흥리를 막아버리고 콩닥거려 다 죽었다는데 시체는 못보고 차량이 불타서 길 옆에 있는 것은 많이 보았지요."
"바로 발굴을 해간 미군유해"
우리는 미군이 목욕했다는 길옆 둠벙으로 갔다. 실개천 옆에 있는데 그리 크지도 않았다. 그해 여름은 무척 비가 자주 내리고 덥기도했는데 미군이 들어와서는 밭에다 대포를 갔다놓고 죄다 이곳에 들어와 빨가벗고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미 사전에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들이 앞 뒤에서 총질을 하니 어떤 군인은 옷도 안입고 뛰다가 복룡리 구주리고개 중간쯤에서 죽어서 동네사람들이 묻었다고 들었다 한다.
우리는 구주리 고개로 갔다. 40번 국도 이인에서 697번 지방도가 갈라져 나가는데 여길 넘어가면 논산이다. 가는 도중에 복룡리에 들러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니 전쟁중에 미군이 나중에 와서 발굴해 갔다고 한다. 길에서 멀리도 아니고 바로 인접인데 제보자 아저시기 명확히 알고 있다.
"혹시 다른 유해는 못밨습니까?"
"여기도 내가 본 것이 아니고 미군이 와서 신기해 지켜본 것이고 당시에는 마을 어른들이 좀 있었는데 그 분들이 묻었지 우리는 몰라요."
"전투흔적이 없는 검상리-만수리강변"
우린 다시 이인과 태봉동으로 올라가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방아달산이나 개승산 등이 있지만 200m미만의 산들로 올라가니 사실 아무런 개인호도 보지 못했다. 대평리는 그래도 많은 호들이 강둑이나 야산에 남아 있었는데 여긴 흔적이 없다.
동네분들 이야기는 이구동성으로 미군은 왔으나 총한방 안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다. 와서는 대낮에 발가벗고 개천에서 목욕이나 하고 기타치는 군인도 있고 요즘 말하는 포커치는 군인도 있고전투하러 온 군인이 아니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니 북한군 공격 하룻만에 제34연대는 논산으로 와해되어 철수하고 말았다.
"전사에 남겨진 국군 기병대의 모습을 찾아라?"
빛나는 참전용사의 공훈록에 보면 장철부(본명 김병원)기병대장(중령)의 일화가 있다. 그는 평북 용천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강제징용에 맞서 중국 서주에서 탈출을 기도하여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그 후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일본군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군수품 수송열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해방후에 귀국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48년 4월에 육사 5기로 임관하여 육사에서 교관 등 임무를 수행후 기병 대대장이 된다. 전쟁이 발발 하자 기병대대는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지원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6월 29일에는 신사리 정면의 한강 차안상으로 도하하려는 북한군 수백명을 사살하고 7월 2일~4일까지는 수원등지에서 적의 선견대를 공격하여 진출속도를 지연시켰다.
7월 11일에는 공주 유구리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고 그 대대장의 지프를 노획하였다. 7월 14일에는 미군 제34연대 3대대가 공주 남방 삼교리에서 포위되어 있는 것을 구출작전을 시행하였다. 그 후에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전투를 하다 어깨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기 직전에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여 명예를 지킨다.
이미 앞편에서 유구리의 기병할동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였다.
내가 맨 처음 조사한 것이 계룡대에서 멀지않은 이곳의 전쟁관련 내용이었다. 공주경찰서장 등이 말을 타고 나타나고 전사하여 묻혀진 일화와 유가족이 찾아간 사연도 알았다.
하지만 북한군 1개 대대를 무력화 시켰다는 전사의 기록에 대해서는 이곳 주민들이 국군이나 우리 기마대를 별로 목격한 것이 없다는 것이였다.
"서울 강남 신정동에 남아 있는 기병대의 추억"
기병부대는 말이라고 하는 특수성으로 동네사람들의 뇌리에 오래남아 있을 수 있다. 사실 한강변 신사리지역에서의 활동은 강남 신성동에서 우리가 탐문 할동간 기병대의 활동을 접수하여 그 신뢰성이 증명되었다. 기병부대들이 마을에 있는 북한군 탄약고를 습격하고 많은 북한군이 죽었으며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국군이 이곳을 지나다 적과 교전으로 몇이 전사하여 가매장된 것을 우리가 유해를 발굴하여 그 제보내용을 증명한 것이다.
"한국군 전사에는 없는 국군 2개 연대의 천안전투 참여"
오히려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제1권 188p)에 의하면 7월 8일 정오무렵 제4보병사단 주력이 천안전투에서 미 제24사단 제34연대와 국군 2개 연대 잔여병력을 붕괴시켰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 투입된 북한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1군단의 우익을 보호하면서 천안에서 서천방향으로 방향을 돌려 7월 11일부터 진격을 개시한다.
보고서에 의하면 제6사단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7월 12일 아침 6시에 유구리지역에 도달한다. 서해 연안을 따라 예산,홍성,서천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3연대는 예산부근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한다.
이때 미군기의 공군기들이 제6사단의 이동대열을 발견하고 강력한 공격을 가하여 사단은 주간이동을 멈추지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여기 내용에서 우리 기마부대에 대한 내용이 없으며 유구리전투가 아니라 예산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구리에서 적 1개 대대를 섬멸했다면 그 사실을 이곳 주민들이 까마득히 모를리 없을진데 많은 노력에도 사실 나는 기마부대의 전투흔적을 찾지 못했다.
"오룡리-태봉동에는 전투흔적이 남아 있지않았다"
미군 포병부대가 포 한방 못쏘고 무너진 곳이다. 우린 공주에서 우금고개를 넘는다. 동학혁명군이 대패하여 농민전쟁 실패의 결정적 계기가 된 곳이다. 우린 이곳에 들러 영혼들에게 묵념을 올리고 10여 분을 달려 오곡천이 있는 세다리에 왔다.
"혹시 전쟁때 기병부대 보셨습니까?"
"미군들이 이 일대에서 많이 전사했다는데 본 적이 있습니까?"
동네마다 다니며 물어보는 단골 질문이다. 하지만 시원한 답은 얻지를 못했다. 들은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미군이 발가벗고 목욕한다는 말과 까만 얼굴이 나타났는데 무서웠다는 것, 북한군이 사전에 침투하여 있었고 주민들은 무슨 전쟁인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밭이나 길 주변에 죽어있는 모습이 마치 돼지농장에 불이나서 타 죽은 것처럼 까맣게 널려있는데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소지품을 다 가져갔다고 한다.
혹시나 눈에 띄지않아 산속이나 풀속에 있는 경우에는 동네사람들이 사실 알게모르게 시계같은 것을 가져갔고 전투화도 베껴 싣었다.
동네 사람들이 당시 치안대의 통제하에 여기저기 파묻기도 했는데 전쟁 중에 미군들이 올라와 다 발굴하여 갔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호 굴토 지역이나 전방 고지에 수북히 남아있는 탄피나 탄알같은 전투 유품도 찾지 못했다. 이유는 먹고살게 없어서 모두 주어서 다 돈과 바꾸던가 엿하고 바궈 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곳 공주방면의 제34연대는 사실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포병이 당하였고 보병도 측방이 뚫려 허겁지겁 논산지역으로 철수하기 급급했다.
반면 북한군도 도하장비의 부족과 미 공군의 폭격에 엄청난 인원 장비가 파괴됨에 따라 주눅이 들어 주간기동을 못하고 야간을 기다려야 하는 제한된 공격으로 미군의 제1기병사단의 전개를 보장하게 되었다.
나는 기병부대의 전투공과를 무시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제보나 전투흔적을 얻지 못했다.
2. 대평리 방면
대평리 지역은 북한군 제3사단이 7월 16일에 미 제19연대를 정면과 측방에서 공격하였다. 제19연대는 예비대도 투입하고 후방에 있는 사단장도 연대보급로를 개척하기 위해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투입하였으나 공격 하룻만에 방어선이 붕괴되어 소규모 또는 각 개인별로 야간에 산악소로를 이용하여 후방으로 철수하게 된다.
제21연대는 7월 12일에 대평리에 도착하고 대구에서 정비중이던 제19연대가 7월 13일 들어와 진지를 교대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3사단은 수원에서부터 제4사단을 후속하다 7월 9일 전의에서 초월하여 7월 10일부터 전의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전의 및 조치원에서 미 제21연대의 철수를 강요했으나 미군의 7월 7일부터 감행된 공중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 진출속도가 둔화되었다.
여기서 우리 전사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부강리전투에 대해 다시한번 기술한다.(북한군 제3사단과 105전차사단의 진격관련 소련 라주바에프의 보고서 1권 202p))
"7월 9일부터 11일까지 제105전차사단과 제3보병사단은 조치원부근에서 미 제24사단 부대들과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7월 12일 밤 9시 무렵에야 도시를 점령하였다.
적이 부강리(조치원 동남쪽 10km)지역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조치원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도로상에 지뢰를 매설하였기 때문에, 제3보병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은 부강리 방면에서 1개 땅크연대에 의한 엄호를 받으면서 조치원에서 금강을 도하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3일 오전에 부강리, 금강 뿍쪽 강변으로 진출하여 도하를 시도하였지만 남쪽 강변에 전개한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도하하지 못하였다.
7월 14일 하룻동안 적정과 도하 지점을 정찰하고 포병을 재배치하고 7월 15일 오전 9시 30분에 포병.박격포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도하가 개시 되었으나 적 포병 및 항공기의 강력한 저항으로 도하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6일 새벽 2시에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오후 늦게 남쪽의 도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7월 17일 105전차사단 203연대는 부강리에서 점령전을 벌였다."
7월 17~18일까지의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병사 및 장교 1,600명을 상실하였고 105mm야포 21문, 155mm 8문, 차량 197대 등이 노획 당하였으며 18~20일까지의 대전 전투에서는 2,000명이 넘는 미군 및 남조선 병사와 장교들이 전사하였고 각종 구경 포 17문, 전차 6대가 파괴되고 각종 구경포 70문, 전차 8대, 차량 320대를 노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이 금강북쪽 강변으로 진출하자 전의 지역에 집결해 있던 제6사단은 서해 연안의 해방을 위한 기동을 살시하여 7월 14일부터 이동을 개시하여 7월 17일 오후 늦게 강경 북방 2km 지역까지 진출하여 아군 여단급 병력과 조우하고 격파하고 18일 강경을 점령하고 그 우측의 제13연대는 별 저항없이 서천을 점령한다.
또한 진천으로 7월 10일 진출한 적 제2사단은 국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11~12일간 점령을 못하고 있다 조치원이 점령되자 후방차단을 우려한 수도사단이 뒤로 물러나 13일부터 다시 진격을 개시하여 13일 오후 늦게 청주를 점령하였으나 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고 22일 밤에야 보은을 점령한다.
대평리 지역은 우측 제34연대가 7월 14일 대대적인 공격을 당하는 시기에 부강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며 미군의 강력한 공군과 포병화력에 공격을 이곳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금성교에 남겨진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라"
대평리 정면에 있던 다리다. 적은 '50. 7. 16일 야간에 YAK기 2대가 금강 상공에 나타나 조명탄을 투하 하면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도 몇번의 시도에서 실패한 적들은 치밀한 게확아례 도하준비와 포병화력을 집중하며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미군의 강력한 포병하력에 움칫하던 그들은 미군의 조명탄이 20여분 밝혀지지않는 상항에서 차안상으로 올라붙게 되었다.
대평리전투는 북한군이 정면공격과 측방공격을 병행하고 침투부대들이 내륙 깊숙히 들어와 후방보급로를 차단해버린 가운데 3개의 포병대대가 봉암리에서안산리 사이에 도로상에서 뒤엉켜 오도가도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적들은 위장을 잘하고 엄폐된 곳을 잘 이용하여 자동화기를 배치함으로써 F-51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사단장이 직접 대전에서 전차 2대를 가지고 와서 퇴로를 열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많은 피해를 남긴체 7월 16일 대평리에서 대전으로 철수하게 된다. 제19연대는 총 3,401명중 650명의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7월 16일 야간을 기해 북한군 제4사단은 논산을 점령하고 그 일부가 강경을 장악한 다음 대전으로의 공격준비에 들어가고 제3사단은 16일 대평리에서 밤을 세우고 유성으로 직접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제32사단 신교대 뒷산(영곡~국곡리일대 300고지선), 발산리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
공주정면 검상리와는 달리 대평리전역은 많은 전투흔적이 남아있다. 이미 괴화산이나 매방산, 그리고 대평리 금강 남안에 굴토 되어 있는 개인호와 M1탄피나 파편 등을 수 없이 찾아냈다.
지역 주민들의 제보 또한 많이 남아 있어 '02년에 10구, '10년도에 7구 등의 유해가 발굴 발굴 되었다. 모두 지역주민의 제보에서 얻어낸 정보에서다.
하지만 포병부대의 기습 침투에의한 피해는 대포와 차량이 대부분으로 적에게 넘어가고 적에게 넘겨주지않으려 아군의 장비를 파괴하는 포구파열이 진행되고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많은 인원이 포로가 되었으며 발산리일대는 차량과 장비들이 엉켜 아수랑이었다.
그런데 금강을 끼고 남안에는 지금의 신교대 딋산으로 올라서면 개인호가 즐비하게 굴토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이곳은 미군이 점령했다는 증거가 되는데 하필 전방 대대와 좌측의 수색중대 사이로 적이 침투하여 실제 전방에서 전투는 해 보지도 못하고 측방이 노출된다. 그러나 도하장비가 부족하고 미군의 비행기 폭격 등이 불을 뿜어 북한군은 쉽게 도하를 못하였으며 지금 금성교(금남교 우측)의 파괴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서 그 날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3. 대전방면
대전전투는 7월 16일 야간에 미 제34연대가 갑천선에 배치되면서 7월 20일 야간에 대전에서 철수할 때까지 북한군 제3.4사단과 대전시내에서 실시한 전투다.
북한군은 금강교두보를 확보한 이후 7월 19일 오전에 유성지역에서 제일 먼저 공격이 시작되고 7월 20일 03:00에 유성지역에서 공격준비사격과 이어 전차와 함께 보병이 제34연대 제1대대의 방어진지를 통과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침투부대들이 금산 및 옥천방향 세천터널까지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제34연대의 철수를 방해하여 무력화 시켜버렸다.
딘소장의 한국전 이래 최초의 3.5"로켓포의 사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하는 등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철수과정에 미군 역사상 초유의 사단장 실종과 포로가 되는 엄청난 사건을 격으면서 영동북방으로 진출하는 제1기병사단과 바톤 터치를 하고 오산 죽미령에서의 전투붙터 시작하여 7월 20일까지 15일간이라는 시간을 획득하였다.
가. 유성-대전 가도
북한군 제4사단이 7월 19일 오전에 유성 방향에서 미 제34연대 1대대 주진지와 대전비행장에 있는 연대 지휘소에 포병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대대의 철수를 건의 하지만 20일까지 방어하라는 명령만 있었다.
그 후 야간에 벌써 적 전차가 대전시내로 기동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대대는 공황이 발생하게 된다. 연대장이 직접 3,5"로켓포로 진내에 들어온 적전차를 파괴하여 개전이래 최초로 3.5"로켓포가 전차를 격파하였다.
나. 논산-대전가도
이 지역은 사실 7월 19일 오전까지 제34연대 1개 소대가 갑천의 가수원교에 대한 경비를 맡았을 뿐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다 적 제4사단에게 189고지(지금의 배재대학교 를 폴함한 탄천을 끼고있는 남-북능선)가 피탈 되자 예비대인 제19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탈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북한군은 제4사단 제18연대 일부병력을 경무장시켜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내륙으로 침투하여 마달령과 세천터널을 확보한 상황이되었다.
여기서 미 제34연대장 보챔프 대령은 7월 19일 북한군 침투부대가 대전 후방지역에 활동하는 징후를 포착하였으나 무시하고 사단장에게 보고않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된다.
"포도밭 우리집에 북한군 여군관이 살았다."
사실 이미 둔산지구 도마동이나 갈마동, 정림동 일대는 주택지 개발로 원형이 보존된 곳은 없다. 그러나 배재대학교를 기고 형성된 200m 미만의 낮은 구릉성 야산이 존재하고 우리가 간 곳에 포도밭이 있었다.
"혹시 이곳에서 오래 사셨습니까?"
"조상대대로 살아왔으니 오래 살았다고 봐야지요. 뭘 알고 싶으십니까?"
건강한 사회인으로 판단되는 분이 공터로 우리 안내하고 안에서 따뜻한 차가 우리앞에 왔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어르신이 황당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때 10살로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우리집이 가수원이라 부자요. 이 일대 땅이 전부 우리집 소유였지요. 전쟁이 났다는데 사실 이곳은 그 당시에는 야산밑이고 개발이 않된 상태라서 가옥이 별로 없었는데 이 집만 한옥이었어요. 하지만 제대로 연락수단도 없는 마당에 우리가 전쟁을 알고 피난이라느 것을 가려고 준비하는데 이미 북한군이 여길 들어왔어요."
"그럼 미군은 안들어왔습니까?"
"나는 처음에는 미군을 몰랐어요. 그런데 북한군이 데리고 들어와 우리 광에 가둬두고 밥을 갔다 주는데 그때 알았어요. 얼굴이 까만 사람이 미군이라는 것을."
"주변에서 탱크나 총소리같은 것은 못들었습니까?"
"나가면 죽는다고 하니 실제 보질 못하고 조명탄같은 것이 하늘에 터지는 것은 보았어요."
"그럼 집에서 함께 살으셨는데 다른 문제점이 없었습니까?"
"몇일이 지났는데 요즘 TV에 나오는 북한군 여군복장으로 여자 한명이 들어오고 남자군인들 몇이 들어와 우리는 할아버지부터 3대가 살았는데 모두 집밖에 있는 비어있던 오두막집같은 곳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런데 먹을 것은 걱정말라고 하며 그놈들이 갔다주어 배고픈 줄은 몰랐어요."
"광에 붙협혀 있는 미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 반동이라며 수시로 끌어다 뭘 하는지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곤 하더니 언젠가는 보이질 않는데 얼마 있어 미군이 들이닥쳐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알고보니 미군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럼 9월 중순이 넘어서인데 그때까지 북한군 여군이 집에 머물고 있었나요?"
"그 여군은 미군이 오기전에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밤에 떠난지 몇일 되었지요 아마~."
"미군이 들어와 우리 누나, 어머니는 꽁꽁 숨어있고 할머니가 밖을 나갔지요."
북한군이 있는 동안에 어르신은 북한군을 졸졸 따라다녔고 여성군인이 귀엽게 여겨 안방에도 들어갔다고 한다. 아니 본래 본인의 집이며 방인데 이상한 느낌은 안들었고 방에 가면 맛있는 옥수수나 감자를 주어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밖에는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장난도 하고 장백산가 노래도 가르쳐 주고 형처럼 따르니 아무런 통제는 없었단다. 다만 밤에는 못나오게 하여 오두막집에 있어야 했다.
어느날에는 아버지가 어딜 가야한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짐을 지고 전선으로 가는 부역이였다. 이제 곧 죽게 된다며 집안이 난리가 났는데 할아버지가 여군을 만나고 나왔는데 아버지가 안가게 되었다 한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나 미군이 들어오는데 북한군은 하룻밤사이에 다 떠나고 말았다. 어르신 집도 짐을 꾸려 북한군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다가 어떻게 떠나지않았다.
그런데 나쁜 소문이 돌아 미군이 여자만 보면 다 잡아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나가 한 명 있는데 14살이고 어머니가 있어 벽장속으로 숨어서 얼마동안 지냈다. 그런데 미군이 들어오고 국군이경찰과 함께 들어와서는 다시 우리집을 무슨 지휘부로 쓴다며 비워다라고 해서 다시 오두막집에서 보냈다. 이때는 먹을 것도 안주고 오히려 북한군 여군이 있을 때가 좋았다.
"붙잡혀 가는 아버지, 그리고 그 순경이 저기 지금 땅주인이다?"
얼마있어 순경이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그때 아버지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가 생채기를 구하러 갔다. 할아버지가 나가서 순경을 만났는데 북한군을 도와줬다고 밀고가 들어와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도 어린 나이지만 순경이 별로 좋지않게 인식되어 있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와 순경을 따라 갔는데 7일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 매일 할아버지가 지서에 갔다오곤 했다고 기억된다. 아버지가 갔다온 이후로 말씀이 없이 살다 젊은 나이에 운명했다. 요즘 말로 가혹한 취조를 당했는지 아니면 인격모독을 당했는지 분명한데 그 당시는 순경이란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한다. 졸지에 북한군 부역자 집안이 되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아니 남의 집에 들어와 진을 치고 있으면서 보상은 못할망정 부역자집안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소리내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버리는 세상이니 어쩔수 없이 살려달라는 조건으로 땅문서 일부를 넘겨주었다고 지금에야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 저기 땅임자가 당시 경찰가족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곳에 땅이 없던 집안이며 솔직히 당시에 순경이라야 일본놈 짭세라는 평만큼이나 별거 아니였는데 전쟁통에 힘쓰는 꼴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수작을 꾸몄는지 우리 땅을 일부 본인들 소유로 등기 이전해 버렸다. 어르신은 "나쁜놈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도둑놈 집안이다."며 눈동자를 돌렸다.
"도로공사('00년8월)중 대전시내 복판에서 나온 유해는 누구?"
'00년 전반기 유해발굴 사업이 7월 끝나고 우기철인 8월에는 전문 발굴병 집체교육과 후반기 발굴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느날 지역 방송에 대전 복판에서 도로보수 공사중 유해가 나왔다고 보도가 되었다.
그래서 보니 모시나칸트총 탄피와 탄알, 전투화, 철모, 모시나칸트총 대검등이 나왔다. 솔직히 그때는 나는 아무것도 분별력이 없었다. 우리는 국군 유해발굴이었지 북한군이나 미군이 그 대상에 들어있지않았다. 그러기에 지금같아서야 일단 우리 팀이 수습하여 정밀감식을 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당시는 국군이 아니라고 경찰에 넘기고 말았다.
"너무 죄송스럽고 미안합니다."
해당 유해는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일반적인 화장과 일정장소의 납골당에 모셔졌다가 지금은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셨으리라 본다.
다. 갑천 방어선 전투
결국 7월 19일 야간을 기해 모든 전투력이 갑천 대안상에 집결되고 7월 20일 03:00에 공격이 개시되어 대전시내에 적 전차가 들어오게 된다.
유성-대전가도는 7월 20일 적이 제1대대에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미 적 침투부대가 깊숙하게 들어와 도로의 여러 곳을 차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 급하게 제34연대 예비대인 제3대대를 투입하려 했지만 이미 요소에 적이 포진하여 출동하다말고 오합지졸이 되어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야 했다.
이미 논산-대전가도에서도 제19-2대대가 7월 19일 적과 밤새도록 전투를 하고 보문산으로 밀리고 20일 13:00부로 논산가도는 개방되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라. 대전 시가지 전투
이 전투는 갑천방어선 전투와 거의 동시에 이르어 진다. 20일 10시경 대전 비행장이 점령되고 적전차가 연대 치중대가 있던 곳으로 밀어닥쳐 150여 명이 살상 되는데 사실 그곳에 3.5"로켓포가 있었지만 있는지도 몰랐고 정신을 차려 포를 들고 적전차를 찾았을 때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다시 적전차가 의무중대 있는 곳으로 나타나 부상자를 만재한 차량에 주포 사격을 가하여 그 부상자 모두를 살상하고 길바닥에 부상을 입고 방치된 생존자를 그대로 깔아뭉갰다.
당일 10대의 적 전차가 파괴되는데 8대가 3.5"로켓포였으며 제공군도 적전차 15대 이상을 격파하였다. 여기에는 사단장이 직접 사격조를 통제하여 파괴한 것이 3대나 된다.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유는 정면의 적들이 전차가 파괴되며 멈칫하는 것을 보고 갑천방어선이 무너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포위하기 위해 지금 우회하고 있는 부대들이 주요 목을 차단하는 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계속되는오보에 사단장은 철수시기를 놓치게 되고 논산-대전가도 차단과 대전-옥천가도의 세천터널을 적이 선점함으로써 제34연대는 완전 봉쇄되고 만다.
대전 시내에 남아 있는 연대장 ,사단장 모두 연락두절이 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각자 도생의 길로 들어서 옥천으로 철수하는 과정에 사단장은 금산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
이미 모든 도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사단장은 길거리에 헤매고 있는 부상병이나 낙오병 들을 추수려 이동 중에 적의 사격을 받고 야간후퇴 중 산속을 헤매다 부상병을 살리려 물을 뜨러 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8월 4일 실종처리 된다.
그러나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 박종구 등의 도움으로 진안까지 남하하였으나 8월 25일 자위대에 잡히어 포로가 되고 만다.
마. 부대의 수습
미 제34연대는 대전 전투에서 7월 20일 일몰과 함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무려 7월 19~20일 전투에 참가한 병력 3,933명 중 1,150명이 손실을 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48명이 전사로 확인되고 228명이 부사을 입었으며 사단장을 비롯한 874명이 ㅣㄹ종된 것으로 밝혀졌다.
유성-대전가도의 제1대대는 보문산을 우회하여 금산-전주를 거쳐 열차편으로 23일 남원에 도착하여 25일 여수에서 해군 함정으로 부산으로 가서 대구로 집결한다.
논산-대전가도의 제19연대 2대대는 보문산ㅇ에서 금산으로 남하하였다가 산길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7월 21일에 영동에 도착한다.
연대 본대는 시내의 동쪽끝에서 산길로 들어서 7월 22일 영동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옥천도로 들어서던 많은 인원이 판암동 부근과 세천터널에서 적의 사격으로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살아난 인원은 7월 23일 영동에 다다랐다.
"세천터널의 비극-제19연대 2대대 H화기중대"
대전역 광장에서 빠져나와 옥천가도로 달리려던 부대는 세천터널에 이르러 좌우에 포진한 적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았다. M-2반궤도 차량 등을 이용해 적지늘 돌파하는 방법으로 적진을 뚫으려 했지만 운전자가 전사하여 길에 그대로 차들이 서버려 진퇴양난이 되기도 했다.
몇번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은 산으로 올라서 옥천방향으로 빠져 나갔지만 그 숫자는 많치못했다.
"하얀 소금꽃, 너는 영혼이려니~"
나는 2011년도에 이곳 일대를 면밀히 탐사 및 탐문을 했다. 지금 구 세천터널은 출입구를 막아서 봉쇄되어 있다. 한구의 유해라도 숨져간 미군 유해를 찾아서 이억만리 남의 땅 대한민국을 지키려 태평양을 건너온 20살 청년의 넋을 지키려 간 곳이다.
대전 외곽으로 그렇게 번잡스럽지않은 이곳 세천동, 판암동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한여름이라 얼마나 땀이 쏟아지는지 벅찬 기대감으로 일대의 모든 산은 다 올라섰다. 하지만 전투흔적은 다수 찾았으나 유해를 찾는데는 실패하고 안타까운 제보는 많은 것을 발굴했다.
터널 앞에는 당시의 영혼의 한을 표시하듯 쑥부쟁이꽃이 만발하여 마치 염전의 소금인양 우리를 반겼다. 찾아와준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살랑이는 바람에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어서오라 손짓을 하고 있다.
"세천동 마을회관 간담회
1)송내현(85세, '14)의 제보다
중약터널 일대에서 미군이 많이 전사한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나 얼마 지난 후에 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했다. 당시에 미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이미 북한군이 먼저 좋은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다.
2)송인성(82)의 제보다
산내 낭월 지역 마을 교회 안쪽 골짜기로 수천명을 죽여 매장되어 있다.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은 물론 대전교도소 수감인원도 죽고 미군이나 국군 포로 들도 북한군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죽었고 묻혔다. 우익인사들도 끌려와 죽었다. 대전 교도소 안 우물에 수십구의 우익인사를 프락치들이 집어넣어 죽이고 도망갔다.
3)여연옥(83세)의 제보다
옥천 군서초등학교 인근에서 북한군이 미군.국군.경찰을 끌고 와서 자 골짜기에서 죽였다.
"소외양간에 숨어 있는 미군-배추잎으로 연명했다."
판암동 야산에 올라서면 개인호가 산재해 있다. 사실 이곳은 미군이 점령한 것이 아니라 북한군 침투부대가 들어와 선점하고 있던 곳이다.
지역에서 한 어르신을 찾아갔다. 이곳도 전쟁의 상처가 그래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대전을 벗어나려는 미군을 엄호하기 위해 엄청난 비행기 폭격과 포병화력이 불을 뿜었던 곳이라 민간인 피해가 컸다. 어르신은 국민학교 3학년으로 전쟁을 맞이했다.
"어떻게 미군을 위해 먹을 것을갔다 주셨어요?"
"우리 집이 그 당시에도 여기요. 그리고 바로 저 밑에 집이 우리 외양간이라. 그런데 전쟁이 났다고 난리가 나서 대부분 피난갔는데 우리집은 아버지 어머니하고 형이 ㄴ내 위로 한명 있는데 피난을 시장산으로 가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는 어리니까 남았지"
"그러면 북한군도 보고 미군도 보았습니까?"
"다 보았지. 미군 한명이 우리 집에 외양간에서 거의 1주일 이상을 숨어 지냈어요."
"네? 어떻게 내무서원들이 찾아 다니고 숨겨주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지 않았나요?"
"어려서 거기까지는 잘모르고 밥을 갔다주니 매워서 먹지못해요. 몇일 지났는데 가죽만 남았어. 그래서 지금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참 기특하게 들에 나가서 여름이라 배추가 자라는데 그걸 갔다 주었더니 잘 먹어. 그래서 수시로 모르는척 하고 구해서 주었지."
"하지만 계속 숨어 버틸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은혜를 잊지않고 찾아온 미군
"그렇지요. 얼마를 지냈는데 내무서원들인지 완장을 차고 다니는 놈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집도 불안했어. 그런데 밤에 미군이 떠나갔어. 고맙다고 탱큐 탱큐하고 갔는데 그 다음 미군이 올라가는데 글쎄 찾아온거야.
"예? 그 미군이 찾아왔다고요?"
"그래요, 빵이며 소세지등 듬뿍 들고 찾아 왔어요. 얼마나 반가운지. 그런데 본대들과 함께 올라가며 다시 온다고 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어요."
"5인의 미군은 어디로?"
"일대에서 미군이 엄청나게 죽었다는데 혹시 시신을 본적이 없나요?"
"지금은 있는지 모르지만 소깔을 먹이러 저기 야산 산소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더니 미군이 죽어 있었는데 얼마후 다시 가니 없더더라고."
"그 장소를 아세요? 그곳에 묻혀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요. 한번 가보실래요. 그리 멀지않아서 찻길에서 한 20분 올라가면 돼요."
더운 여름날 우리는 그곳을 미군 탐사팀과 함께 가지로 하고 할아버지와 별도 약속날짜를 잡았다. 어르신은 형이 당시에 장티푸스인지 괴질에 걸려 먼저 죽고 본인이 장남역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다뜻한 커피를 한잔식 갔다 주신다.
"미군들이 전쟁후에 와서 유해를 찾지 않았나요?"
"이곳은 온 적이 없어요."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과 같이 다 찾아다녀도 가지 않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미군에 연락하여 함께 제보자를 만나서 현장을 가기로 했다.
그러부터 한 한달이 지나서 미군 조사팀이 들어왔다. 우리는 큰 기대감을 들고 판암동을로 가서 어르신을 모시고 현장을 올랐다. 이미 우리야 사전 탐사로 한번정도는 올라간 장소이기에 낯설지는 않은데 막상 올라서서 어르신이 지목하는 장소를 보니 묘와 묘 사이에 잡목이 있는 곳이다.
"어르신 그 당시에 모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군이 질문했다.
"소를 저 밑에다 메어놓고 올라와 보니 호가 파있는데 미군 5명이 죽어서 있었지. 총이며 수류탄 같은 것이 옆에 있었어서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어요. 죽은 군인들 알굴은 모두 검정색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 입니까?"
"그것은 잘 기억에 없어요. 왜냐면 어린나이에 보았고 수시로 가보면 있었는데 언제 보니까 호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더라고."
"북한군이 있을 때는 그대로 있었나요?"
"그건 확실히 맞아요. 우리집에 미군이 한명 숨어서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미군의 유해수습 일지에 이곳에서 수습된 현황이 없다고 한다. 이곳 판암동과 세천도 일대에서 20여 명이 실종되었고 찾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8,000여 명을 찾지 못했고 2,000여 명이 남한에 6,000여 명이 북한지역에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산내여 산내여"
우리는 세천터널을 찾아가 현재 모습을 미군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4번국도와 세천터널 남죽에 형성된 고지군을 탐사하였다. 역시니 이곳의 개인호는 우리나 미군이 판것이 아니라 침투부대가 들어와 판 것으로 도로를 두고 좌우측에 굴토되어 "인디언의 가혹한 형벌인 태형의 계곡"처럼 완전히 걸려든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미군이 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군의 일부 용감한 전사들의 분전과 비행기 폭격으로 사실 북한군도 치명적인 인명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어르신과 탐사를 마치고 내려와 점심을 우리는 가오동에서 손짜장면으로 해결했다. 어르신이 원하는 음식이다. 그리고 다시 모셔다 들이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려는데 길가에 웬 아주머니들이 몇이 모여 있다.
"뭐하러 다니는 군인이어요?"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팀입니다. 저분들은 미국에서 온 같은 이무를 하는 분들인데 오늘 먼저 가신 할아버지가 미군을 보았다하여 그곳에 갔다 왔습니다."
"아니 산내에 가봤어요? 피가 스며들어 울렁울렁 거리고 길까지 흘러 나왔다던데~"
"아 그렇습니까?"
"혹시 가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가보았지요. 난 여자얘가 무섭지도 않아서 두세번을 가본 것 같은데."
"그럼 목격은 안하셨습니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민간인이 아니고 군인인지 경찰인지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고 양키도 가는 것 보았지. 그런데 얼마 있어 드륵드륵하는 총소리가 나요. 헌데 가면 없어"
"여러 제보에 의하면 국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많이 죽였다고 하는데 못들으셨습니까?"
"잘 몰라요. 어느날인가 비온 뒤에 가보니 정말 피가 좁은 길바닥에 조금 흘러내리는 것은 보았어요. 하지만 사람이 안살고 있는 동네라 귀신이 산다고 했어요."
옆에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혹시나 소문이나 본 것이 없는지 하지만 답은 같았다.
"전쟁이 났다는데 어느날 트럭들이 사람을 싣고 들어가는 모습을 본적은 있는데 잘 몰라요."
우린 곤룡재를 향하여 출발했다.
6.25전쟁 당시에 있던 길을 따라 한번 산너머 군서까지 내려가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사실 현재 민간인 학살자가 묻혀 있는 바울교회 바로 옆 땅은 과거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조사 및 유해를 발굴하여 가매장되어 있는 곳이기에 우리가 쉽게 그곳을 들어가 보기는 조금 꺼리낌스러웠다. 현역의 신분으로 그 당시의 인식은 마치 그 행위를 인정하는 모양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같은 국민으로써 전쟁의 피해자라는 사실에 광주 망월동 묘지도 가보았고 말없이 보도연맹이 끌려와 죽었다는 곳을 가서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욱이 할버니들의 이야기가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도 보았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금 조사길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주변부터 파악하기 위해 낭월동의 모든 집은 다 들어가 보았다. 낭월에서 군서에 이르는 12번도로 좌우측에는 포도밭이 많았다. 교회에 가보니 신자는 별로 없고 목사님도 안보이고 전도사인지 건물 관리하는 분이 있었다.
"죽은자의 영혼, 그리고 자주 바뀌는 교회 주인!"
대별동에서 만난 어느 분이 상당히 이곳 산내 낭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6.25 전쟁 당시에 수천명의 인원이 죽어 묻혔다고 하며 언제부턴가 어느 교인이 이 일대 땅을 사서 교회를 신축 했다고 한다. 사실 이곳 땅은사람이 죽어있어 매매가 되지도 않고 사람이 오가는 것도 뜸했다 한다. 군서에서 혹시나 대전에 오려면 옥천 경유해서 들어오는 37번도로를 이용한단다.
그런데 어느날 언론에서 민간인 학살 장소로 한번 뜨더니 누가 땅을 사서 교회를 지었는데 오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현재까지 몇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로 노무현시절에 이곳을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발굴하려 했는데 땅값을 무리하게 요구해 일부분만 발굴 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저희는 유해발굴단인데 지나는 길에 들렸습니다. 혹시 관련 사실을 아신다면 어느 곳에 집단으로 묻혀있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일부분이고 이 지역일대가 모두 묻혀 있다고 보면 됩니다."
먼저 오석으로 추모비를 조그맣게 세워논 자리에 가서 묵념을 올리고 안내를 받아 발굴된 유해가 다시 가매장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일대에서 몇십 구를 발굴하였으나 유족이 나타나지 안했고 차후 발굴을 고려하여 발굴 장소에 다시 가매장되었다 한다.
발굴을 할 당시에 유해감식을 맡았던 박교수님을 전화로 연결하여 실태를 물어보았다.
"박교수, 소문으로 7,000여구가 묻혔다."
근거는 없다. 다만 6.25전쟁 당시에 이런저런 사유로 끌려가 오지않는 사람의 유족들이 던지는 말을 모은 것이란다. 그러나 내가 주변을 보기에는 그건 너무 과한 숫자로 보였다. 식장산의 작은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개울의 바로 옆이고 곤룡재를 따라 오르면서 좌우에는 밭이나 일부 논이 있기도 하지만 폭이 좁다.
우리는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이 교회의 관리인은 본인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럼 왜 추가적으로 발굴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잘 모른단다.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일대 땅을 산 주인이 터무니없는 보상금을 요구하여 발굴을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포도밭 주인을 만나 보았다. 하지만 3년전에 사서 들어와 아무것도 모른다. 가능한 이곳 주민들은 모른다고 답변을 한다. 판암동이나 대성동 사람도 아는데 모른다니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시에 이곳은 골짜기라 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상여집이나 있고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한 두 가옥 이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곤룡재를 넘었다.
마령골에 들러 한두집을 찾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걸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기막힌 제보자를 만났다.
"내가 직접 나무하고 지켜본 장본인이요!"
90이 다 되어가는 할아버지가 인민군의 지시로 마른나무를 해서 직접 현장에 갔다놓은 장본인이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적어도 이곳은 6번이상 총기로 사살하고 일부는 불로 태워버렸다고 한다. 본인이 참가할 때는 한번은 우리 군인들과 경찰도 있고 미군같은 양키들도 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죄수들이 끌려와 땅을 스스로 파고 그곳에 꿇어앉아 총맞고 죽었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인원들이 묻는 형식으로 이루어 졌다 한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나무하러 참가하게 되었어요?"
"우리 집이 그때도 여기야. 그런데 전쟁이 난지는 모르는데 산 넘어에서 드르륵거리는 총소리가 나고 군인 차들이 군서쪽으로 빠져 나가. 그래서 가 보니까 바로 길 옆에 땅을 판 흔적이 있는데 뭐가 꿈틀거려요."
"묻힌 죽음의 호속에 살아남은 민간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됐어요. 먼저 도착한 인원이 길게 쭉쭉 땅을 파고 다음에 들어온 인원은 그속으로 들어가면 총을 갈기고 묻어버리고 그 다음 조가 오기전 다시 땅을 파고 이번엔 제1조가 들어가 대기하면 총을 갈려 죽이고 그 다음조가 묻고 반복하면서 몇백명이 죽었지."
"그런 곳을 보도록 하지는 않했을 것인데 참 용기있게 가 보셨네요?"
"나는 키가 쪼그만해서 잡혀가지 안했어요. 그때야 전부 산에서 나무를 해서 불을 태우는 시절이라 산에 자주 갔어요. 소먹이 풀이 낭월지역 개울가에 많아서 쉽게 넘어와 지게에 지고 나오기도 했어요. 소를 몰고 가서 놀기도 해 낯설지는 않는 곳이였어요."
"묻힌 사람중에 어쩌다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맞아요. 정말 안타까운 모습인데 가보니 바로 직전이였는지 땅이 울렁울렁거려요."
"그럼 파보지 않으셨어요?"
"그건 못했어요. 왜냐하면 곧 또 차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모르잖아요."
"그럼 결국 다 죽고 말았겠네요."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누가 살아나서 식장산에 숨어들었다 집으로 가고 나중에 이 사실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아까 질문인데 할아버지는 나무를 해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겁니까?"
"나도 피해자중 한명인데 북한군이 들어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는데 할아버지와 내가 끌려나와 이곳에 와서 한 일이 마른 나무를 몇다발씩 해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갔지."
"그런데 나중에 북한군이 올라갔는데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 동네에서 부역에 참가한 사람들을 잡아 가는데 우린 아는 사람이 있어 빠져 나왔어요."
"그럼 이동네 사람들도 죽었습니까?"
"그럼요, 북한군에 가서 돌아오지않은 사람도 많고 경찰에 끌려가서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병들어 곧 죽어버린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2020년 정초에 발굴 당시에 현장에서 유해감식을 했던 박교수와 전화로 연락을 했다. 해보니 지금 자녀들이 미국에 거주중인데 바로 미국에 가 있었다.
"박사님, 산내지역 발굴 안합니까?"
"여기 미국이야. 곧 들어가고 발굴이 올해 계속 될겁니다."
"박사님, 민간인만 죽은 것이 아니고 국군 및 경찰, 미군도 있었고 죄수도 있고 인민군이 붙잡아온 유력인사 및 지역주민들도 있습니다. 고려하셔야 합니다."
"들어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종군 위안부 피하려 바보에게 시집가다"
대별동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길가에 앉아서 별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몇몇의 할머니들이 증손자들의 유모차를 밀며 다가섰다.
"할머니 혹시 여기서 오래 살으셨어요?"
"여기는 아니어도 중촌동 옛날 대전교도소 근처에 살았고 죽어간 사람들을 보았어요"
"뭘 찾는데요?"
"예, 낭월지역에 6.25전쟁 당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갔다 왔어요."
"그래서 찾아서 뭐해요? 돈줘요?"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위해 전사했으므로 유해를 발굴하여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입니다."
이때 또 한명의 할머니는 대전 구 KBS방송국(목동)옆에 살았다며 안에 야산이 있는데 그 당시에 많은 군인들이 죽어 있었다 한다.
"혹시 할아버지께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 질문이 할머니를 분하게 만들었다.
들어보니 기막힌 내용이다. 글쎄 일제시대 말기에 여성들이 전선으로 가는데 시집을 간 여자는 대상이 아니였다한다. 할머니는 외동딸이었다. 어떻게 몇번의 모집에서는 피했는데 점점 그 숫자가 늘면서 위기가 다가서고 있었다. 전쟁터에 몸종으로 안가는 방법은 결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에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목동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와서 보니 나이가 무려 20살 차이다. 아니 아저씨와 결혼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은 부모님들이 결정하면 따라야 한다. 아니 이게 무슨 결혼인가.
그런데 어떻하랴. 하룻밤을 지내고 이틀밤을 지내고 그러다 보니 어쩔수 없이 살게 되고 자식을 낳게 되더란다. 지금같으면 범죄행위란다. 아마 살 여자도 없을 거란다. 부모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차라리 동남아로 친구들 따라 가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많이도 울었단다.
"할머니 가수 유현상이와 앗아의 인어라는 수영선수 최누군가도 15살인가 차이나도 잘 살아요."
"에이 이 양반아, 그건 좋앙서 사는 거고. 나는 강제로 산거야."
결국 남편분이 자식 둘 두고 60도 못먹고 꼴딱해버려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데 그 아들이 하나는 선생님이고 한명은 자영업을 한다고 한다. "불쌍한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다..."
"우린 중촌동 대전 교도소로 갔다."
바로 주도로 옆에 있어 찾기도 쉽다. 들어가니 당시를 기억하라고 조그만 스토리역사관도 있다. 이미 이곳의 내용은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다. 무려 아군이 반격으로 올라사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500여 명이 죽어 있었다. 지역 양민과 점령지 여러곳에서 잡아온 유력 인사들을 교도소 안에 있는 우물에 살아 있는체로 여러명을 묶어서 집어넣어 수복 당시에 시체 꺼내는데만 3일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교도소 운동장 등 공터를 이용하여 2,000여 명을 생매장하여 죽였으며 국군이 미군과 들이닥쳤을 때는 그 생매장 구덩이에서 꿈틀거려 바로 파내서 살아난 민간인도 여럿이고 국군이나 미군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우리가 남으로 내려갈 때는 이곳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 이들 중에는 보도연맹도 있고 프락치도 있고 4.3사건이나 여수.순천사건에 연루된 죄인들이 포함 되어 있는데 1,800여 명이 바로 산내지역으로 실려가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전 교도소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 여운형 선생, 김창숙 선생 등이 수감된 곳이고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망루를 4개나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도 있다. 우리는 우물 앞에 서서 묵념을 올렸다.
"구 KBS터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
지금 우리의 전사기록에는 국군이 대전지구 전투에 참여한 기록을 보지못했다. 그러나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조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국군 2개 연대규모를 소멸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나도 자신있게 말 할수는 없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직접 보았다고 한다. 또 우리가 들어가 보니 교통호의 흔적이 있고 몇개의 탄피도 발견했다. 당시에 교통호에 시신이 들어가 있었지만 국군이 진격하면서 대부분 발굴하여 화장도 현지에서 했다고 한다.
"시신 타는 냄새가 너무 심했다."
우린 대전 교도소 자리와 KBS 자리에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많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현장에서 나중에 발굴하면서 화장도 하여 냄새가 독했다. 특히 대전 교도소 자리에서는 죄수들만이 아닌 북한군이 들어와 국군포로와 경찰, 때로는 지역 유력인사를 붙잡아 인민재판으로 프락치들이 직접 죽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식장산(598m)에 핀 진달래"
나는 식장산을 올랐다. 대전지구에서 철수하는 병력이 퇴로가 모두 북한군이 점령하여 도로를 따라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산악을 이용하는 것이다. 식장산을 넘으면 옥천이다. 세천터널 일대가 적의 수중에 놓여 17번 도로를 사용하면서 또한 마달령 고개 앞에 적이 기가리고 있는 상황이라 산으로 올라야 하는데 이게 식장산이다.
제보자의 이야기에도 낭월지역에서 어쩌다 살아난 인원들은 식장산으로 숨어들었고 판암동에서 포위된 미군도 산으로 올라섰다.
5월이 오고 있는데 2000년은 뜨거웠다. 우리의 전쟁역사 50년만에 최초로 유해발굴 작전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단 한구의 유해라도 정중히 찾아서 모시려는 발굴팀의 노력은 열심히 그 자체였다. 발굴 팀은 지금 다부동 일대에서 발굴을 1차 종료하고 안강.기계지역으로 옮겨가려는 상황이었다.
식장산 위에는 방송국들 중계탑과 군 중계소가 위치해 있어 방위목표인 모양이였다. 빙 둘러서 철조망이 설치 되어 있는데 그 철조망을 따라 등산객들이 다니는 길이 생겼다. 전설따라 삼천리를 알아보면 삼국시대에 백제의 땅으로 이곳에 성을 쌓고 군량미를 보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우리가 올라간 싯점에 주변이 철쪽으로 가득차 있어 꽃속에 파묻힌 벌같은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꿀을 얻으러 다니지만 실제 몇방울의 꿀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꽃을 옮겨 다녀야 한다.
우리도 지금까지 결과를 부석해 보면 개인호 150개를 굴토해야 한구의 유해를 찾았다. 물론 집단 매장지에서는 영광 삼학리처럼 한구덩에서 30여구가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다.
눈을 크게 뜨고 울타리 주변을 탐사하고 개인호가 있으면 금속 탐지기를 대여 보고 한나절을 조사했으나 별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능선을 따라 망경대- 독수리봉(586m)-국사봉 능선을 따라 대전-옥천경게능선을 달려 세천공원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역시 땀은 흘렸지만 원하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세천공원 인근의 구정골 야산에 남겨진 개인호를 발견했다. 물론 우리가 판 것이 아니라 북한군 침투부대가 판 것으로 추정되고 몇개의 굴토를 해 본 결과 모시나칸트 탄피가 몇 개나왔다.
독수리봉에서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시대에 무학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는 구절사(구절사)에 들어가니 아담한 절에 신도들도 별로 보이질 않는다. 마침 주지스님이 계셔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니 전쟁관련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전쟁 전에 이미 페허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와 워낙 깊은 곳에 절이 있어 먹을 것도 없고하니 빨치산도 아군도 머물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마달령에는 전투가 없었다"
마달령은 17번 국도상 대전과 금산의 경계령이다. 우회하는 북한군을 차단하기 위해 미 제24-21연대에서 대대병력이 방어작전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적은 그 보다 북쪽으로 지금의 ㅅ산내지역인 낭월을 차단함으로서 실제 미군은 엉뚱한 곳에서 경계임무를 하게 된다. 조금만 앞으로 정찰대를 보냈으면 이곳의 퇴로를 학보하여 조직적인 철수를 보장할 수도 있었는데 안타까웠다. 우리가 실제 마달령 고개에 탐사팀을 투입하여 조사했지만호를 판 흔적은 있으나 전투유품은 확인하지 못했다.
"강경 화산리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
2015년 봄에 전북지역 신문에 군과 경찰이 금강변에서 노출된 유해 처리에 대해 서로 핑퐁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은 이런 기사에 민간하여 곧 본인들의 자릭 떨어지는양 호들갑을 떨게 된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는다고 솔직한 업무처리면 하위직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문제의 발단은 익산 경찰서 과학수사대의 한명이 벌인 쇼에 언론이 춤추고 거짓(?)을 기사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사건을 알지도 못했고 제보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마치 군이 과거에 잘못된 일에 책임을 회피하려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처럼 기사가 났다.
나는 사실관계를 확인하라는 임무를 받고 먼저 화산리로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압려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지역 주민이 바로 이 사건의 열쇠를 주고 있는 장본인인데 누구도 찾아와서 물어본 적이 없던 인물이다.
"어르신은 어떻게 저기 강변에 묻혀 있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요. 밤에 차로 실어오고 일부는 저 밑에 길게 땅을 파고 하는 것 다 봤지요."
"그럼 누가 누구를 죽인겁니까?"
"경찰이 어디서 사람을 데려다 빨갱이로 죽였는데 죽으면서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러요."
강변에 도착해서 보니 옛날에 수로공사를 한 자리였다. 10여년 전에 준설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낚시꾼이 이곳에서 났시를 하다 물이 쭉 바진 상태서 공사를 바닥을 보니 뭔가 이상한 것이 보여 들여다 보니 사람의 두개골이 보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있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고 달려온 경찰이 가만히 보니 매우 오래된 물속에 칼빈 탄피가 보이고 한 두구가 아닌 여럿이 보여 혹시니 강경경찰서 경찰이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인원을 이곳에 버린 것이 아닌가 해서 전쟁 때에 발생한 것이고 지금 국방부가 유해 발굴을 하니 군에 이첩하려 제35사단 헌병에 상황을 넘겨벌렸다.
"경찰의 꼼수, 아무것도 모르는 헌병은 자체적으로 조사한다고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몇일이 지났는데 여기서 경찰의 꼼수가 시작된 것이다. 살짝 전북지역 모 신문기자에게 정보를 흘려 마치 본인이 국군 전사자를 확인한 것처럼, 그런데 군이 늑장을 부리고 있다고 기사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나는 최초 신고자인 아저씨를 만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경찰과 마주했다. 이 경찰은 충남채운지서에서 나왔는데 익산 경찰 과학수사대 모경정과 동기였다.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구 두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유해가 이곳에 있을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노출되었는지 궁금했다.
"준설공사한다고 강변을 파서 그 속에 있던 유해가 물살에 씻기면서 들어난 것이고 아마 쭉 같은 수준의 강바닥에 더 많이 있을거요" 할아버지 이야기다.
"밤에 투닥투닥하는 소리가 들리면 또 누가 땅을 판다. 그리고 드르륵~"
그해는 유독히 비가 자주 오는데 어느 순간 비가 그치고 달빛이 올라 강가에 비추는데 어디서 수근수근 소리가 들려 나와보면 할아버지가 당시에 살아계셨는데 빨리 들어가라고 난리를 치셨다. 벌써 저기 강경읍쪽에서 트럭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알고보니 사람을 데려다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국군은 남으로 내려갔다 다시 들어와서 한 일이고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시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대체 가해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가해자는 북한군과 이유야 어쨌든 경찰이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다. 지역 유지들과 지주라는 잘 사는 사람들이 타켓이 되었고 북한군에 동조한 부역자나 주로 죽어갔다. 물론 북한군에 포로가 된 경찰도 있을 수 있고 군인도 있을 수는 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익산경찰서 과학수사대가 왔다. 꼼수를 두고 있는 경찰이 있다. 하지만 지금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더니 입문이 막혔다.
"경찰아저씨, 이렇게 하면 안되지요. 이게 군인이 할 입니까?"
"듣고 보니 꼭 경찰이 해야 할 일도 아닌듯 한데 책임소재는 따져봐야겠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 군에서 책임회피하고 책임을 떠넘겼습니까?"
"그건 언론에서 가정해서쓴거니까 제가 정정하도록 하지요."
"아니 그 전북 매일신문인가 담당 기자와 통화 이미 다 해봤어요. 본인이 마치 진실을 규명하는 것처럼 미화하여 글을 쓰게 하고 뭐 이득이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별도로 이야기 합시다."
꼬리를 내리며 둘만의 대화를 요구하여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본인이 그 해당 기자에게 전화하여 정정을 부탁했다. 군이 의도적으로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절차를 잘못알아 비져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도 체면은 지키려 용쓰는 모습이 역역했다. 죄송하다고 한다.
결국 유해처리는 군과 경찰이 협력하여 민원처리차원에서 발굴은 군이 지원하고 유해처리는 경찰이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거의 2주일을 발굴을 했다.
"길게 펼쳐진 수로변에서 나온 50여구의 시신은 누구의 형제일까?
현장을 목격하지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그 당시에 집단으로 끌려와 묶인체로 일렬로 정연하게 숨져가고 그 위에 흙이 덮어졌으리.
그러다 세월의 흐름에 강은 역사를 기억하고 강물은 흘러 이 사실을 알리며 쌓였던 흙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고 그 현장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그러니 수로공사하면서 얼마나 많은 유해가 유실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지키려 숨져가기도 하고 공산주의자 총에 죽기도 하고 못나고 못배워서 일시적으로 불온사상에 현혹되어 추종하다 자유의 총에 죽기도 하고 별별 이유가 다 있으리~.
그 경찰은 그 후에도 본인의 영달을 위해 나에게 빅딜을 요구에 왔다. 세월의 사건의 유병언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 이야기도 해주며 본인이 마치 이 유해를 발굴하여 처리되는 것처럼 유공자로 해달라는 부탁아닌 부탁이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길을 떠났다.
"강경 경찰의 산화"
나는 이런 사건에 대한 사실 규명을 위해 찾아다니는 것이 보람이었다. 지금 미확인 자료 등에 6.25전쟁 당시에 숨져간 인원이 군인을 제외하고 민간인이 100만이 넘고 300만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단 가매장지를 많이도 보았다.
실제로 박교수팀이 참여하는 발굴 현장에도 가보고 묵념을 올리기도 했다. 정말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 이곳도 하천변에서 발굴되는 최초의 민간인 유해의 집단 매장지다.
나는 화산리와 채운리 등에서 지역주민 간단회를 5회에 걸쳐 실시했다. 혹시라도 원하는 제보를 들을 수 있을지 노력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화산리에서는 2회에 걸쳐 실시 되었다."
하지만 이 강변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는지를 아는 분이 아무도 없다. 다만 옛날에는 포구 이곳이었고 맞은편 부여의 세도면 청포리에 배가 몇십척이나 정박해 있었다는 사실과 이곳에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아 있어 강경평야의 쌀이 군산으로 실려나갔다는 이야기와 그 당시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났던 어르신은 당시는 화산리 나암천 위에 살았는데 이곳이 강경과 익산의 경계선이고 지금은 강경에 들어가 살고 있어 간단회에는 미참가 했다.
채운리는 강경경찰 충혼 묘지가 있는 곳이다. 서장이하 무려 67명의 인원이 전사했고 당시에 시신 모아서 한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전후에 유족들에 의해서 대부분 찾아가고 일부가 지금도 묘소에 남아 있다고 한다. 문제는 화장되어 있느지 그렇다면 발굴해야 DNA 감식이 불가하다. 당시에 경찰로서 살아남은 경찰 할아버지가 있어서 조회를 해본 결과 전쟁 당시에 이곳에 없어서 화를 면한 것으로 들었다.
현재 묘 내부에는 시신의 흔적이 있을까 없을까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70여 년을 유가족이 그렇게 믿었고 영혼 또한 그렇게 이 하늘을 지켜왔으니 말이다. 채산리 용암사 입구에 경찰관이 죽어서 그대로 방치되어 동네 개들이 물어뜯고 난리였다는 한 제보를 받아 현장을 답사했으나 이미 도로가 확장되고 찾을 길이 없다.
경찰서 앞에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경찰 유가족 몇분과 당시 경찰을 한 유공자를 대상으로 간담회를 가졌다. 경찰관이 알려준 내용은 "첩자에 당했어요. 우리는 처음에는 이겼는데 첩자가 들어와 무너졌어요"라는 한맺힌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전사내용은 전사책에는 7월 17일 서해안지구 사령부(신태영 소장)를 편성했으나 유명무실하고 신편 제7사단 예하의 독립대대(김병화 수령) 300여 명과 경찰 700여 명이 강경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군산에서 장항으로는 해병대 고길훈부대가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강경경찰서가 적에게 포위되어 67명 전원이 전사했다고 한다.(한국전쟁사 상권 275~276p)
신편 한국전쟁사 4권 서남부지역 지연작전 편(p438~441, p450)에는 경찰이 강경에 1개 대대 규모, 제성,웅포,서포나루에는 독립 대대의 각 1개중대가 저지 임무를 했다고 기록 되어있다.
하지만 소련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는 강경 전방 2km에서 7월 17일 여단급 규모의 병력과 조우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우리 기록은 왜 경찰만 전투행위를 기록 되고 있을까?"
신편 전사에는 제7사단 병력인 독립대대(김병화소령)는 규모가 300여 명인데 무기도 변변찮고 탄약도 별로 없었지만 전북편성관구사령관 원용덕 준장의 지시로 17일 10:00에 웅포로 진출 금강 남안을 경계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하고 18일 07:00에 적 제6사단 일부병력이 웅포 대안상에서 도하를 시도하였다고 기록한다.
한편 강경 경찰은 7월 15일 전주부근으로 물러났다 서해사로부터 명령을 받고 다시 강경을 탈환하기 위해 16일 17:00에 강경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적 편의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결국 처음에는 공비도 5명을 생포하고 무장괴한도 10명을 포획하는듯 했지만 17일 03:00부터 적 대대급의 공격에 서장 이하 67명 전원이 산화한다.
강경 서쪽 교동리에 충남혼성경찰 1개 대대가 대기중에 있었는데 18일 05:00에 강경 남쪽으로 진출중인 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여 35명을 사살하였으며 일시적으로 적은 물러났다 다시 전력을 증강하여 공격해 옮으로써 경찰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곳 일대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한 제보 활동에서 국군이 싸운 것을 목격한 분은 못찾았다. 그러나 경찰이 적과 전투했다는 것은 많이 들었고 실제 충남 경찰관도 만났다.
"우리 국군은 어디서 싸웠을까?" 함열지역에도서 그 답은 찾지 못했다.
"조선의 모스크바 논산 성동, 이곳에 전투지가 있다"
나는 소련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 의하면 강경 북방 2km에서 우리 2개여단 규모와 격전을 했다고 하여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차를 몰아 강경읍을 지나 북쪽으로 달렸다. 바로 올라가니 논산 성동면이 나왔다. 이곳에 과거 공주에 있던 교도소가 이곳에 와 있었다.
동네를 들러 탐문을 하는 과정에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와 실제 그 현장을 찾아가서 개인호를 확인했다. 소규모였지만 전투지임에는 명확하고 실제 죽어있는 경찰시신을 묻었다는 곳도 제보를 받아 찾았다.
그러나 언제인가 누군가가 그 지역을 파서 가져갔다는 이야기와 지금 묘는 그 후에 다른 사람이 묻혀있는 주인이 있는 묘라 한다. 동네의 공동 묘지처럼 되어 있는데 이곳에 여럿 묻혀 있다는 이야기와 유족이 찾아와서 발굴해간 곳도 있다는 이야기 속에 분명 경찰이 전투한 사실은 알았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살고 권위있는 분이 살아 있다하여 그 집을 찾았다. 마침 집에 있어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 갔는데 갑작스레 질문을 던져 놀랐다.
"아니 높은 분들이 어떻게 빨갱이 집안을 찾아왔소?"
갑작스런 질문에 잠깐 머뭇거리다 내가 대답을 해야 했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이기지않습니까. 그래서 어르신이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거듭나신 것 아닙니까?"
"아아 그런가요. 찾아주셔서 감사 합니다."
사실 이 어르신 집안에 사연이 많다. 6남2녀의 집안이며 막내이신데 제일 큰형이 당시에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고 충남 지역 남로당 재무부장이었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은 공통이다. 돈줄을 잡고 있으니 빨갱이란 집단에 상당한 발언권을 갔고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나서 인민군이 들어 오는데 이 지역 우곤리나 병촌리에는 많은 민간인과 교인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화정리는 입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재무부장이 막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이곳주민들이 탄원서를 내 수복이후 부역자 색출하여 처단하는 과정에 형제들이 살아 남았고 그 형은 북으로 넘어가 생사를 모르고 지내다 한다. 전쟁 종료 후에도 상당기간 형제들이 공부를 잘해도 집중 관리대상이였으며 공무원이나 군인도 못되었단다.
하지만 여기에 개의치않고 생전에 아버지는 없는 분들께 먹을 것을 나눠주었고 또한 지금의 어르신은 반공 응변가가 되어 당당하게 집안내력을 이야기 하고 남들보다 잘나지도 않게 조용히 잘았단다. 그렇게 살기를 한 30년 지나니 동네분들이 진정성을 인정하여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전국에서 최우수 동네도 되고 인생 후반부를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병촌리 성결교회 교인 66명 순교지 : 6.25 당시 지역 빨갱이들이 돌로 쳐 죽이다."
어르신이 한 곳을 안내하겠다고 하여 따라 나섰다. 간 곳이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 바로 강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강경에서 석성에 이르는 799번 지방도로 변에 교회가 있는데 이곳에 안내되어 담임 목사를 만났다. 조선시대부터 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를 가진 성결교회였다.
그런데 바로 교회 좌측에 순교자 비가 서 있어 가보니 6.25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에 지역 프락치들이 반동이라고 이 교회 교인들을 붙잡아, 어느 교인은 한집안에 10명이나 죽기도 하는데 돌로 치고 몽둥이로 패고 삽과 괭이로 찍고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만행으로 죽여버렸단다. 아마 교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집단 학살지라고 한다.
"왜 이곳을 조선의 모스크바라 하는지요?" 내가 질문한다.
일정시대에 조선땅에 공산주의자(겉으로는 민족주의자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지만 그 세력의 중심이 사상적으로 마르크스-레린주의에 물들어 공산당 독제를 신봉하는 자)들이 태생하게 되는데 이때 성동지역이 잘 살아 일본이나 한양에 유학을 많이 갔고 그 학생그룹이 주로 공산당 우두머리역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성동이 떠오르게 되었다 한다. 여기에 여운형이란 중도 공산주의자(?), 독립 운동가의 "여씨"들이 이곳에 많이 실제 살기도 했다고 한다.(생가는 양평 신원리, 충북 단양에서 임신되어 옴))
"우곤리. 월성리의 제삿날 : 18가정이 같다."
나는 병촌 입구 은행나무 밑에서 햇빛을 피하고 잠시 하늘을 보고 있다. 이곳에 교도소가 들어서게 된 것도 아닌말로 풍수지리와 연관도 있으리라 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얼마 지나니 오토바이를 타고 한 어른이 앞에 오셨다.
"어르신 이 동네에 혹시 6.25 당시에 전쟁이 없었나요?"
"전쟁은 모르겠고 억수로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갔소. 집에일이 있어 가니 마을 창고 앞으로 오쇼."
나는 헐레벌떡 옷을 추수리고 어르신을 따라 창고 앞에 대기했다. 이윽고 어르신이 나타났다.
"뭘 알려고 그려슈. 여긴 민간인이 다 죽었지."
"민간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혹시 아시나요?" 나는 지금 황산대교 밑의 화산리 집단 매장지역에 나타난 유해들의 뿌리를 찾고 있었다.
"말마유. 북한군이 와서는 머슴놈들이 날뛰며 지 상전들을 잡아다 죽이는데 내가 13살인데 죽이는 곳이 저 앞산 계곡이요. 거기서 울부짓는 소리가 밤마다 나요. 비참했어유."
"아니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다면서요."
"말마요. 아들보고 아버지를 죽이라 하고 새파란 부인보고 남편을 죽이라 하고 주로 형제지간이나 일가친척들끼리 죽이게 하는 패륜행위를 했지요. 집주인을 내쫒고 자기집이라고 들어앉고 글씨도 못쓰는 주제에 문패도 거꾸로 달아놓고 이곳이 무법 천지였어요." 그러시면서 죽어갔다는 계곡으로 나를 안내한다. 사실 계곡도 아니다. 낮은 야산이라 집에서 저 너머가 안보일 뿐이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죽이고 나면 시신을 가져와야 하는데 처음에는 무서워 얼씬도 못했단다. 빨갱이가 무섭다 한다. 인정사정도 없이 막무가내로 파리 목숨보다 더 쉽게 사람을 죽이는데 아주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인다고 한다.
"그럼 그 빨갱이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 후에?"
어르신이 어느 기와집 대문 앞에 앉으시며 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대신다. 말문이 막혀 눈물도 않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죽어간 인원이 하룻밤에 18명이 죽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제삿날이 모두 갔아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한다. 담배를 쭈욱 들이키시고 내뱉으신다.
"세상이 인과응보 아니겠어요?"
"네 그렇지요. 하지만 잘 속이고 또는 남에게 뒤집어 씌우고 잘 사는 놈들도 많아요."
"아니요. 그렇지않아요. 언젠가는 벌 받아요."
"그럼 여기 그 날뛰던 빨갱이들이 벌 받았습니까?"
"다시 수복이 되어 군인도 오고 미군도 오고 경찰도 오고 다 왔어요. 그래서 쓰리꼬타에 그놈들을 실어가는데 집식구들 다 잡아가버렸어요."
"그럼 어린애도 다 잡아갔습니까?"
"부모가 가는데 애들이야 뭐 별 수 있어 따라 나섰지."
"어디로 갔습니까?"
"그걸 몰라요. 해질라해서 실려 나갔는데 차량 3대에 실어 이동네에서만 한 50명은 갔을거요."
"그럼 부역했다는 집도 다 포함되어 갔겠네요. 피해 본 사람들이 다 신고했을거 아니예요?"
"그렇습니다. 일부는 어떻게 국군이 올라오느지 알았는지 서울로 가족을 데리고 내뺀 놈도 있는데 경찰이 추적해서 몇 놈은 잡아 왔다고 해요. 아예 북으로 도망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집도 있어요. 그래서 그 재산을 몰 수해서 다른 사람이 부리고 있어요."
"결국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고 마을사람만 다 죽었네요?"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해요. 북한군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정말 이웃집이 무서워요."
나는 지금 화산리 금강변에 나오는 유해가 혹시 이동네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우회하는 부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분명 이곳 사람들은 국군을 보았다는 사람은 9월에야 보았지 7월에는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전사에는 국군이 금강변에 방어선을 구축을 했으나 총도 없고 실탄도 없는 독립대대가 제대로 진지편성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하고, 기병중대도 활동 했다, 경찰도 활동 했다고 한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은 강경 북방에서 우리 군 2개여단과 격전을 하였다 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통상 북한군 제6사단이 천안에서 서해안으로 우회한 것을 일정기간 몰랐다고 하지만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의 이야기는 비행기가 따라 다니며 폭격을 해서 주간 이동을 못하고 야간에만 기동했다 하는데 이것 또한 미스테리다.
"망성 강경천 둑에 묻힌 경찰관 :1구 발굴 되다."
계룡대에 근무하고 있던 '00년 6월에 익산 망성에서 본인이 직접 경찰관이 전사하여 묻힌 장소를 안다는 제보가 왔다. 나는 평일을 피해 주말에 한번 자가용을 끌고 망성에 가서 제보를 만나 현장을 확인해 보았다. 가서 보니 갈대가 완전히 뒤덮어 한 삽도 들어가기 힘든 곳인데 분명 맡단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으세요?"
"내가 어량리에 살았는데 바로 여기 밑에 논이 우리 것이요. 전쟁난지도 모르고 논에 물대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왔는데 이 둑에 한명, 저기 논 속에 한명이 죽어 있는데 북한군이 총을 들고 다니며 소리를 치는데 빨리 들어가라는 내용이라. 그래서 무슨 일인가 얼른 집으로 돌아왔는데 동네에 북한군이 총을 들고 다니고 있어요. 아버지를 세우더니 어디갔다 오느냐고 따져 물어서 논에 갔다 온다고 하니 집으로 들어가라는 거야. 그래서 집에 왔지."
"그럼 죽은 유해는 그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도 있잖아요?"
"그야 논에 한번 가고 안가나. 또 갔지. 그랬는데 논속의 경찰은 없어지고 이 곳은 그대로 있어서 씨꺼멓게 변해가는데 보기 흉해서 아버지가 묻었어요. 그러니 내가 정확히 알지."
"그 뒤에 경찰에서 찾지 안했나요?"
"그건 내가 군대에 갔다 온 것이 '61년도 박정희 5.16혁명이였는데 그 기간을 빼고는 없었어요."
'00년도에 우리는 35사단 병력을 지원받아서 발굴을 1차로 했으나 찾지 못했다. 어량천이나 강경천이 복개공사는 되었지만 수로 강바닥 위주로 수로를 넓힌 것이지 강둑은 그대로라는 지역주민의 안내도 받으며 발굴을 했으나 실패했다. 혹시라도 깊게 묻혀 있을 수 있어서 1m 깊이까지 굴토를 했으나 찾지를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그 제보자로부터 연락이 와서 찾아가 보니 발굴 위치가 조금 어긋났다며 당시 위치에서 약 30m정도 차이나는 곳을 알려주어 발굴작전을 다시 해서 결국 1구의 유해를 찾았다. 하지만 유품은 없다. 아마도 부상으로 후퇴하며 신분이 될만한 것은 다 처리해 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일대에서 경찰 병력이 전투를 했다는 사실을 우린 검증하게 되었다.
"대둔산 월성봉(651m)에 부는 바람"
논산 참전전우회에서 나를 보자고 한다. 유법사가 아마 과대 선전을 한 모양이다.
양촌면으로 오라해서 한 10여 명의 참전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서너명은 참전 경찰이었다. 하시는 이야기가 대둔산 영은사 계곡과 법계사 계곡에 많은 전투가 있었고 당시의 전투경찰이 수없이 전사했는데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둔산은 사실 정규전보다는 비정규전으로 공비토벌작전이 벌어진 곳인데 우리 제9사단이 주로 토벌작전을 한 곳이다. 이 말은 전쟁 초기에 이곳에서 전투는 실제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와서 들으니 여러가지 의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 병력중 일부가 민복으로 무장하고 산속에 숨어들어 다시 국군이 올라오기전까지 게릴라전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군도 전선이 자기들 맘대로 안되니 이곳에 병력을 집중하여 소탕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경찰을 한 분도 생존하여 그 당시를 이야기한다.
나는 짧은 지식으로 이야기하기 곤란하여 그저 '예 예'만하다 결국은 "어디에 묻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용사님을 따라 현장에 갔다.
현장은 면에서 멀지않은 신기리라는 곳과 월성봉인데 산악지형은 참전용사님들이 갈 수 없기에 그 곳은 차후에 우리끼리 확인하기로 하고 신기리 입구로 갔다. 바로 길 위에 올라가니 앞에 양촌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에서 함께 매복을 하던 동료 3명이 전사해서 현장 개인호에 묻고 떠났다는 것이다.
"용사님, 아니 전우가 전사했는데 그냥 지금까지 그 자리에다 두었다니 좀 이상합니다?"
"그 이야기는 복잡하니 묻지말고 탐지기나 돌려보소. 그리고 소주 한 잔 올려야지!"
"그럼 혹시 이름은 아시나요?"
"전시에 여기저기에서 모인 사람들인데 같은 동네면 몰라도 기억못하지. 무슨 김동뭐하고 채인식인지 뭐 잘 몰라요."
우린 위패카드에 금산이나 논산지역의 현황을 확인해야 했다. 결과는 금산 복수에 무려 307명명, 보령 월사리에 241명, 태안에 167명이 있다. 현충원 묘비는 천안16위, 금산 14위, 강경 10위, 공주 16위, 논산 16위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수는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많은 위패카드가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복수는 산내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란 것 밖에는 아직 밝혀지지않고 있는 미스테리다.
우린 간단한 약식제례를 올리고 '09년 3월 말에 발굴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무려 6구의 유해가 나오고 전투화, 수류탄, 탄피등 수십점의 유품이 발견 되었다.
"용사님 3명이라더니 6명이나 전사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용사님들은 말을 못했다. 무언가 사연은 있어 보인다. 모두가 9사단 참전용사라는데 정말 이곳에서 매복작전을 하다 전사한 것인지 아니면 월성봉이나 바랑산에 있다 무슨 이유로 마을에 내려왔다 이곳에서 게릴라 매복에 걸려들은 것인지. 용사님들은 매복근무중 산에서 내려온 게릴라에게 당했다는데 왜 유해를 처리하지 못했을까~?
다시 대둔산 월성봉과 바랑산을 발굴했다. 산 위에 올라서니 평원처럼 넓다. 주변에 교통호가 구축되어 있고 탐지기를 돌려보니 유품들이 많이 나온다. 교통호를 파내려 가니 불을 질렀는지 검게 탄 숯들이 일부 나오고 이곳에 누가 오래 머물렀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다. 결국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 했으나 완전 유해는 없고 일부는 동물뼈도 있고 어수선한 지역의 발굴은 끝이 났다.
"내가 석천암에서 권총도 보았고 실탄도 보았는데?"
대둔산 탐사중에 가장 높은 고지인 마천대에 올랐다. 주변은 아직 얼음이 덜 녹아 길은 미끄러운데 등산객이 상당히 많았다. 이곳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한 젊은이를 만났다. 알고보니 아버지가 하는데 본인이 잠깐 도우러 올라 왔다며 아버지가 한 이야기들 들었다고 아는 곳이 있다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전화로 바꿔주었다.
"사장님, 저희는 유해 발굴단인데 사장님이 한 곳을 안다고 아드님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예 석천암 아시죠. 그곳으로 한 100번은 오르내렸는데 한 10년전에는 그곳에서 권총도 보고 철모도 보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불이 난 뒤로는 안보이던데요."
"알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바로 우린 조사에 착수하여 석천암 주변을 탐지기로 정밀 조사하였으나 어떤 유품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조사하는 과정에 지나는 등산객들로부터 바로 옆에 계곡물이 흐르는데 그곳에 옛날에는 바위틈에 유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 수해가 나고 절도 불이 나서 타버렸는데 보이지않는다고 한다. 우린 다시 석천암에서 마천대 방향으로 올라 그 더운 여름에 땀으로 목욕을 하고 케이불카를 타고 내려서 건천리로 갔다.
"금산 건천리 돌 무덤에 나온 유해 : 고, 일병 조달수님"
해는 긴 여름낮을 헤엄쳐 서서히붉은 노을이 서쪽에 일기 시작한다. 이곳은 남쪽이라고 온통 산뿐이다. 이런 곳은 강원도보다 훨씬 산이 많다. 우린 진산을 거쳐 차를 건천리로 달렸다. 예비군 면대장이 제보를 받았다고 와서 빨리 확인을 해 달라고 보챘다.
현장에 가니 산도 아니고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다. 바로 길 위에 산과 언저리에 수풀이 있고 돌무덤이 있다. 누가봐도 도로 공사중에 나온 돌을 져 놓은 곳이다.
사연은 이렇다. 당시 16살인 제보자 분이 키기 작아서 아군도 안잡아 가고 북한군도 안잡아 가 집에 그대로 있었다. 때는 '5년 9월경이란다. 갑작스레 완장찬 프락치가 동네를 휘저으며 동네사람을 다 모아 데리고 이곳 밑에 있는 논으로 왔다. 이미 추수를 마친 논에는 어떤 군인이 꿇어앉아 있고 인민군이 모여서 지켜보며 닥달을 하고 있다.
"간나새끼 너 소속이 어니니?"
"모른다."
"니 어디서 살기냐?"
"포항에서 사는 조달수다."
"누가 니를 숨겨줬지비?"
"내가 혼자 숨어다녔다."
"간나새끼 독하구만. 그래 죽어도 말않하것지?"
"뭘 말하리. 나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수령동지 만세 삼창하라우. 그럼 목숨은 살려준다."
"그런데 갑짜기 꿇어 엎드린 용사가 일어서 "대한민국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러면서 총이 당겨지고 죽었는데 하루는 이곳에 그대로 있었지요."
"누가 옮겨서 묻었습니까?"
"개들이 물어뜯고 늑대나 여우들이 산에서 내려와 난리라 냄새가 나니 완장찬 놈들이 동네사람을 시켜 치우라 해서 묻은 곳이 여기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군부대가 지나갔는데 어느부대인지는 모르는데 아마도 9사단 30연대일 것이라 한다. 여기 분들은 9사단을 잘 알고 있다. 제9사단이 '50년 10월에 창설되어 11월부터 12월 어간에 이곳 대둔산일대와 김천 상주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감행한 적이 있다. 그 후에도 제11사단이 '50. 10월에서 '51년 4월까지, 8사단도'51.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공비토벌 작전을 이 일대에서 했는데 지역주민들은 9사단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부대던지 후방지역 작전을 하는 과정에 주도권은 국군에게 있었고 북한군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은 '50년 7월부터 9월 중순이다. 주민들의 기억하고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고 계속하여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떨감을 먹다 기도 노출로 전사한 군인"
"누군가 본 사람도 있을거 같은데 모르십니까?"
"그 군인이 어느날 야간에 숨어 들어와서 어느집에 있다가 인민군들이 냄새를 맡고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찾아내라고 윽박지르고 다니다 보니 어느 집에 있을 수도 없고 하니 여기저기 숨어 있다가 배가 고파 떨감을 먹고 목이 매여서 그만 콜록콜록 하는 바람에 신고가 되고 잡혔다고 합니다."
"그럼 신고한 그 집은 별일 없었나요?"
"아니지요. 나중에 군인이 오면 다 죽는다고 하는바람에 북한군이 물러날 때에 온 집안이 짐싸고 가서 소식이 없어요."
"황금 유해를 발굴하다."
발굴이 시작 되었다. 나는 정중히 약식 제례를 올리고 직접 현장에서 돌을 들어냈다. 어느 순간 황금 빛 물체가 돌안에서 빛난다.
"잠깐 멈춰라. 뒤로 물러나 있어?"
그 순간이 명확히 떠오른다. 얼마나 빛이 찬란하게 나는지 나는 황금이 있는줄 알았다. 아니면 황룡이 버티고 있는줄 착각하여 모두 뒤로 물렸다. 하지만 돌틈에 아무런 반응이 없이 빛만 솟아나와 가까이 접근하여 내부를 바라보니 길게 뻗어 내린 사람형상이였다. 다시금 돌을 모두 들어내니 아뿔싸 이렇게 황금색을 띄고 있는 유해는 처음 보았다.
묻히지도 않고 동네사람들이 던진 돌 속에 용사님이 황금용사님으로 변신한 것이다. 어떻게 미라도 아닌데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발가락까지 남아 있는 완벽한 유해로 총을 맞은 두개골 부분만 함몰 되어 있었다.
우린 전사자 명부에서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포항에 조달수란 분이 없다. 9사단이나 11사단 8사단에도 없고 정읍에 연고지 있는 집이 있어 유전자 조사를 했지만 틀리다라고 한다. 우린 많은 노력에도 결국 유족을 찾지 못해 결국 발굴단 유해 보관소에 남아 계시다.
"용사님 편히 쉬소서."
"00사에 오른 용사님"
부여의 유법사님으로부터 제보전화가 왔다. 대둔산 00사에 올라 바로 좌측에 국군이 묻혀 있다는 제보다. 벌곡 도산리에서 올라서면 수락계곡 위에 승전탑이 있다. 주차장에서 한 20분 걸어서 오르면 승전탑이 나오는데 '50. 10월부터 공비토벌 작전이 종료된'55년 1월초까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숨져간 경찰, 군인, 애국청년단 등 1,37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남 지방경찰에서 건립한 추모탑이 있다.
이곳에 올라 묵념을 하고 계속 올라서면공비 토벌작전시 제9사단 제28연대 병력이 전사하여 3명을 묻었다는 내용인데 참전용사가 명확하게 증언했다는 내용이다. 이 참전용사님이 제28연대 부연대장이었던 그 유명한 홍천 말고개 전투 제6사단 대대장을 했던 고 김 주영 예비역 장군이다.
우린 먼저 사전조사를 위해 00사에 올랐다. 절이 6.25전쟁 당시에 포격으로 페허가되어 아직 제대로 복구가 안되어 있는 상태로 관리가 되고 있었다. 우린 땀을 흘리며 올라서 주지스님이 주시는 점심을 먹고 현장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탐지결과 금속성 물질의 신호음이 걸리지 않는데 유법사의 이야기가 워낙 강하여 발굴을 해 보기로 했다.
발굴 당일에는 제32사단 병력이 지원나와 땅을 굴토하고 우리는 탐지기를 들고 현장을 점검했다. 유법사님도 현장에 위치하여 해당 지역을 실제 크기보다 넓게 큰 소나무 사이를 굴토했다. 하지만 흔적이 없다. 만약에 이곳에서 화장을 했다면 까만 숯의 흔적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 마저 없다.
"법계사에 남겨진 숙제"
논산 채광리에서 오산리로 들어서면 6.25참전 유공자 탑이 먼저 우릴 맞는다. 이 산골에 유공자탑이 세워진 이유는 당연히 대둔산지역에서 그 만큼 많은 인원이 공비토벌 작전간 숨져갔기에 세워졌다. 오늘 우리가 이곳을 오르는 이유는 바로 법계사 윗쪽 좌측계곡에 수 많은 사람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 제보에서다.
전쟁 당시에 민간인뿐만 아니고 지역의 유력인사, 미쳐 후퇴하지 못하고 숨어지내던 군인이나 경찰을 빨개이 들이 색출하여 이곳으로 끌고 와서 집단으로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제보자와 양촌 참전용사회 2명, 유법사 이렇게 올랐다. 절에 도착하니 무척이나 깨끗한 최근에 지어진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특히 전국 유일의 비구니 노스님의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는 노승 복지사찰이란다.
찾아온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절을 돌아 집단학살 했다는 계곡으로 갔다. 저기 위의 고지가 바랑산으로 "어느 노스님이 바람을 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산이름인데 그 너머에 국군 제9사단의 충혼탑이 있는 영주사가 있다. 한때는 이 대둔산에 남부군 빨치산 대장 이현상이 머물고(그 아내의 고향이 금산) 공비숫자가 2,000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토벌작전이 있었는지 '50년 말부터 '55년 초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 논산이나 금산이 알게모르게 빨치산의 소굴처럼 되어 전쟁직후에는 인식이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찾으러 가본 현장은 몇번에 걸쳐 산사태가 나서 휩쓸고 내려간 모습이 뚜렸했다. 비록 큰 나무들은 없지만 활엽수가 그리크지않게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유해를 발굴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우린 현장을 떠나기 전에 사찰 스님께 인사를 드리며 영혼들을 위해 지장기도를 열심히 해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논산 양촌 반암리의 진혼곡"
이곳은 4번 도로변에서 농로길을 따라 바로 산밑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은 제보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몇십명의 지역 청방대를 빨갱이들이 끌고와 집단학살하고 산 능선의 흙을 밀어서 계곡을 아예 메꿔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이곳 양촌은 인구가 얼마나 되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에게 죽고 군경에게 죽고 기막힌 곳이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곳으로 꿀고 들어가고 총소리가 요란했으며 나중에 가보니 산등성이 흙이 까내려간 흔적이 역역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그 유족들이 찾아가지 않았나요?"
"알면 찾아가지요. 하지만 여기 사람이 아니고 인접 면에서 잡아온 사람일 경우 어떻게 알아야 찾아 가지요. 전쟁 중에도 이곳은 빨치산이 우굴거려 경찰도 사실 낮에난 들랄거렸지 해지기 시작하면 나타나지도 않고 그놈들 세상이였어요."
제 6 절 민간인 패해 현황(옥천, 노근리 위주 기록) 192페이지부터~
1. 옥천 평산리 보도연맹 학살('50.7.14) : 경찰이 평산리 보도연맹원 100여 명 학살
'50.7.10일경 평산리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에 의해 옥천창공에서 4~5일간 구금됐다가 7.14일 경부터 수십 명씩 3~4차례에 나누어 트럭에 실려 평산리 들미마을 성골에서 학살됐다. '77년 수해로 유골이 드러났으며 유골은 군서면 월전리 말무덤재 군 동동묘지에 안장됐다.
2. 옥천 금구리 보도연맹 학살('50.7월) : 경찰이 보도연맹원 200여 명 학살
경찰은 옥천경찰서에 관할하는 각 면의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구금했다. 그 후 옥천군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 200여 명을 금구리 골짜기에서 학살했다.
3. 옥천 월전리 보도연맹 학살('50.7.9,12, 13일) : 경찰이 보도연맹원 600여 명 학살
월전리에만 말무덤재, 용머리바위, 용머리바위 부근 500미터 지점 등 세 곳의 학살지가 있다. 말무덤재는 경찰이 철사줄로 묶인 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와 미리 파놓은 가로 세로 5미터의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총살했으며 겹겹이 포개 매장했다고 한다. 목격자의 진술로는 말무덤재에 100여 명이다. 용머리바위 학살자는 구덩이 크기가 가로 세로 2~3미터정도이며 이곳ㅇ데서는 약 500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해방일보('50.7) : '50.7.8일 옥천읍내에 경찰들이 보도연맹 관련자를 전부 소집시켜 2킬로미터 밖에는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하니 꼼짝말고 있으라 더들고 가더니 다음날 9일 새벽 3시경 30여 명의 보도연맹원을 군소면 앞산으로 끌고 갔다... . 7월 12일 부락민을 동원해 두개의 큰 구덩이를 파게한 후 다음날 아침 인민들을 태운 트럭 두 대를 그곳으로 끌고 갔다... . 5명씩 팔을 묶어 차례차레로 구덩이 앞에 세워 놓고서 5연발 총으로 사살해 구덩이에 쓸어 넣었다.
정병선 (목겨자) 증언 : 전쟁이 터진 직후인 7월 초경 여러 날에 걸쳐 옥천군 일대 보도연맹 가입자로 보이는 주민 수백 명이 끌려와 총살당했다.
4. 옥천 청룡리 부역혐의자 학살('50. 9~10월) : 국군이 부역혐의자, 피난가지 않은 주민 다수 학살
'50. 9~10월경 1차 수복과정에서 마을에 들어온 국군이 "한번이라도 부역한 사람은 나와"라고 ㅏ여 피난가지 않고 있었던 주빈들 중 부역자들을 색출했다. 재판이나 별도의 절차없이 마을 입구 및 주변에서 총살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학교를 지키거나, 인민군에게 불려다닌 것밖에 없던 사람이다.
5. 옥천 노루목재 미군 폭격('50. 10.5일) : 미군이 피난민과 장작을 나르던 경찰부역자 36명 사상
교평리 마을주민 36명이 경찰과 군인의 밥을 해주기 위한 장작을 하예곡리로부터 가져오던 중 노무목에서 미군기의 폭격으로 희생됐으며, 이때 함께 있던 피난민들도 목숨을 잃었다.
6. 노근리 학살('50.7.26~29) : 미군 제1기갑사단 7기갑연대 제2대대가 지역 주민과 피난민 248명(유족 주장 400명) 피해
영군 일대와 대전 지역에서 피난 온 많은 사람들이 부근 금광굴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7월 25일 전쟁을 피해 마을 뒷산에 피신해 있거나 집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었ㄷ다. 7월 26일 한낮이 되자 미군이 일본인 통역을 대동하고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으며 500여 명의 피난민이 경부선 열차의 철길을 따라 인근 마을인 노근리로 향했다.
피난민들이 노근리에 도착하자 미군들의 무전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피난민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이와 동시에 지상의 미군들도 일제히 피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피난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죽고 일부는 철길아래 굴다리로 숨었으나 미군은 계속하여 굴다리로 총격을 가했다. 피난민들이 공포와 한여름의 갈증을 이기지 못해 굴다라 밖으로 나오자 어김없이 총격을 가했다. 일부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총알막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로버트 앤 캐롤(퇴역 대령, 당시 중위) : 이 사건은 우리가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말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에 있은 일이다. 한 사람도 전선을 넘어 오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어 오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에 미군은 한국전에 참전하여 최초 수원 죽미령전투에서 큰 피해를 받고 축차적으로 경ㄹ부선을 따라 철수하고 있었ㅎ다. 북한군은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오열들을 침투시켜 미군의 진지를 파악하여 공격부대에 연락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요시설을 파괴하거나 통신선의 절단, 도청 등을 하여 유엔군의 지연전을 조직적으로 방해하였다.
특히 오열들이 피난민 속에 파고들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미군이 피난민을 통제하게 되자 피난민을 인간방패러 앞세워 미군이 설정한 통제선을 넘도록 뒤에서 총으로 협박하였다.
그러니 피난민은 앞으로 나가면 미군이 총을 쏘고, 뒤로 물러나면 오열들이 총을 쏘니 진퇴양란의 상태에서 빚어진 비극인 것이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세력이 미군이 고의적으로 유도하여 학살한 것처럼 주민들을 선동하여 전후에 많은 트러불이 발생한다.
그러나 2004년 2월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에 관한특별법"이 제정돼 시행되었다. 나는 이사건과 관련하여 주민과 조사위원회의 간담회에 유해발굴관련 참여하여 증언을 청취하였고 현장을 수회 정찰하였다. 하고 싶은 말은 역사에 맡기도록 한다.
7. 영동 석쟁이재 보도연맹 학살('50.7우러 중순) : 경찰이 보도연맹원 300~400명을 학살
7월 중순경 영동경찰서로 소집된 산막리, 양정리 등 인근지역 보도연맹원들이 영동읍 근교 설계리 야산으로 끌려가 2~3군데로 나뉘어 학살당했다.
8. 영동 어서살 보도연맹 학실('50.7월) : 경찰이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학살했다.
영동 부용리 보도연맹원 100여 명이 경찰에 의해 소집돼 구금당했으며, 며칠 후 둥구나무 입구 부근에서 학살당했다. 경찰들은 큰 구덩이 두 개를 파 놓은 후 사람들의 손을 엮어 놓고 총을 소았다.
조창연(유족, 약목리) : 우리가 죽인지 한달 만에 피닌갔다가 돌아와 나는 어리니께 여긴 못오고 삼촌이 와서 보니까 가죽허리띠를 보고 이름이 있으니까 아버지 시체를 찾아간 거야"
[대전, 충남]
1. 서산 매죽골 보도연맹 학살('50.7월 10~13일) : 경찰이 서산읍내 성연면 가는 쪽 뒷산인 메지골(매죽골)에서 400여 명 학살
6월 28일 면사무소에 모이게 했는데 모두를 별다른 사정을 모르고 모였다가 그후 7월에 서산읍내 뒷산인 메지골에서 모두 총살했다. 사산군 전체 22개 면(태안이 분리 되기전)에서 모여온 400여 명이었다.
2. 당진 우강면 인민군에의한 학살('50.9월말 국군의 수복직전) : 남로당계 좌익인사들이 마을이장과 의용소대원 등 37명 학살
합덕, 우강 지역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지주, 소작인간의 갈등이 심했다. 일본 둥에서 유학한 지주 아들 중 상당수가 식민지 극복방안으로 좌익에 가담했고, 우강면 강문리,부포리를 통한 외지 인구유입으로 각종 정치, 정당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48년 정부 수립후 좌익 탄압이 심해지자 일부는 월북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했다.
북한군이 진주하여 모인 주믽 중에서 마을이장과 의용소방ㄴ대원 등 친정부측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을 골라 손을 뒤로 묶고 우강면 창리 야산으로 데려갔다. 구덩이에 밀어넣고 대장간에서 제작한 쇠창으로 찔러 살해했다.
3. 홍성 폐광 보도연맹 학살('50.7월초) : 경찰, 특무대(CIC)가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학살
홍성 지방에서 인민위원회, 민전, 민청, 여맹, 농민조합 등에 관계했다고 해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의 수는 1백여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농민조합원이었다. 전재이 발발하자 6월 28일에서 29일경 보도연맹원들을 각 면 지서별로 검속해 2,3일 후 홍성경찰서 내 보도연맹 사무실로 이송되었고, 이후 경찰과 특무대에 의하여 트럭에 태워져 이들은 홍복면 상하리 용봉산 골짜기 광산이 있던 자리 옆의 응덩이에서 시체로 발견됐다.직후 83구의 시신을 발굴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7월 12일 이후에 홍성에 북한군이 들어 오면서, 이어 다시 국군이 진주하면서 희생자 유가족이 중심이 된 상호간의 유혈보복극이 전개됐다.
박헌교(당시 홍성 경찰서장)증언 : 지서별로 예비감속한 이들을 군에 집결시켜 놓으니 특무대에서 1차로 거물급을 포함 20~30명을 트럭에 실어 이송했소. 이 때 보도연맹 임원들이 주로 떠났지. 후퇴하는 과정에 선무공작원으로 이용하려고 잘 알고 지내던 3명을 빼내고, 다음 날 2차로 남은 사람들 모두를 트럭 두 대에 실어 특무대에 이관하고 경찰은 보도연맹원에서 손을 뗐소"
4. 아산 배방면 부역혐의자 학살('51.1.4이후) ) 경ㅊ팔, 우익청년단이 부역혐의자 300여 명 학살
1.4후퇴 후에 돔빈증을 준다고 부역혐의자 가족들을 모두 면사무소에 나오게 해 근처 창고에 가둔 후 학살했다. 부역혐의자들은 이미 월북했거나 처형된 후였으므로 학살됝 사람들은 주로 노이나 부녀자, 아기들이었고 온 가족이 몰살당한 경우가 많다. 피학살자의 수는 300명에 달했다. 학살을 담당한 경찰과 우익청년단원이었다.
5. 보령 보도연맹 / 경찰 학살('50.7월초) : 경찰이 보도연맹원 200여 명 학살 / 지역민이 경찰 10명 학살
인민군 제6사단이 들어올 때, 주산지서와 옹천지서 등에서 교전이 있었다. 경찰이 보령에서 퇴각하기 직전, 6월말 미리 예비검속했던 보도연맹원을 트럭에 싣고 계곡에 데려갔다. 몇 명씩 철사로 묶어 총살한 후 매장했는데, 피해자 수는 200여 명이다. 면장등 유지가 잊히했다. 이어니재에서 총살이 있기 며칠 전에 1차 심사해 핵심자 50여 명을 공주 또는 대전으로 이송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북한군과 교전에서 포로가 된 경찰 10명을 지역민에게 넘기자 지역민이 보도연맹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니재에서 경찰 10명을 학살했다.
6. 공주형무소 왕촌 학살('50.7.13~14일) : 국군. 경찰이 재소자 / 보도연맹원 700~800여 명, 또는 1천여 명 학살
전쟁 발발 직후인 '50.7월 초경 공주 금강변 완촌리 말머리재에서 경찰이 그 지역을 아무도 지나가지 목하게 경비한 상태에서 소총소리와 기관총을 나나사하는 소리가 하루 종일 계속됐다. 6.25 당시의 발행된 북한의 해방일보는 이를 '50.7. 7일로 적고 있다.
목격자에 따르면 국군, 경찰이 트럭 15대로 옮겨진 700~800명 이상의 사람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됐다.대한청년단 사람들이 와서 부역했다.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은 모두 4구덩이며, 각각 길이 30미터, 폭 2.5미터 정도다. 이들은 공주 형무소의 사상범과 공주지역 민간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001년 6월에 유골이 암매장된 곳을 발견도 했다.
7. 연기군 은고개 보도연맹 학살('50.7.7~8일) : 경찰이 보도연맹 250~300명 학살
전쟁 발발 직후에 조치원 경찰서에서 소집명령을 내려 약 250~300명을 예비검속했다. 7월 7.8일경에 은고개에 참호를 판다는 명목으로 파게 한 구덩이에 군용차로 싣고 와서 철사로 10명씩 묶어 총살했다. 후퇴가 급해서 채 시신을 묻지도 못하고 떠났으며 한 명은 학살현장에서 생존해 있다가 사망했다.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으며, 연고없는 일부 시신은 봉분표시만 해두었다. 제사 일자가 같은 분들이 많다.
8. 부여 백마강 학살('50.6.29) : 경찰이 문인회 관련자 50여 명 학살
전쟁발발 직후인 6월 27일 경에 금강문인회(일명 충남 공산협의회) 관련자들을 경찰이 예비검속하거나 경찰서로 오게 하여 가둔후, 6월 29일 백마강 구두레나루 근처에서 2명을 한 조로 새끼줄에 묶어 총살했다.
유항열(유족) 증언 : 그 때 16세로 구두레나루에서 등 뒤에서 총탄이 나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는데, 비슷한 경우로 추정되는 30여 구의 시신들이 백마강에 떠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일제 때 일본 놈의 앞잡이들이 해방 후 또 다시 정권을 잡을며 자신들의친일행각의 죄를 감추기 위해 더욱 맹렬히 학살을 자행했고, 연좌제를 만들어 자기들 이익을 꾀했다.그 지극지긋한 과거 50여 년 빨갱이로 몰려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
9. 서천 판교면 미군 기총소사 학살('50.9. 10일) : 오전 11시 경, 미군이(일명 호주기) 2대가 옹천 쪽에서 날아오더니 임시장터 뒤편ㄴ지나 다시 돌아와 서는 장터에 있던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소아댔다. 장터인근이 피로 물들고 신체 일부가 흩어져 아수라장이 됐다. 사망자만 18명이고 사상자가 50여 명 넘었다.
10. 대전 형무소 산내 학살('50. 7.8~10일 또는 7월 초부터 7월 17일 아침까지, '50. 9월중순) ; 국군 ,경찰이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초등교 근방의 산기슭의 산내 골령골에서 1천 800 또는 3천여 명 학살, 이어서 '50. 9월 퇴각하던 북한군이 1천 300여 반공, 우익인사 보복학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학살예정지는 2일 전부터 동원된 부역자들과 의용소방대가 미리 시체 묻을 구덩이를 팠다. 학살은 지휘게통을 모두 거쳐 이루어졌다.
형무소 직원이 사상범으로 분류된 사람을 불러내서 헌병대에 넘기면, 헌병들은 이들의 눈을 가린 채 광목 또는 전깃줄로 몇 사람람씩 팔을 묶어 트럭에다 실었다. 트럭에 오르는 순간 죽음이 임박한 것을 트끼고 뭄부림치는 이들에게 헌병들은 개머리판을 마구 휘드르며 총 근으로 내리 찍었다.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 트럭 적재함에 쭈구려 앉힌 후 그 위에 2중 3중으로 포개 실었다. 산내 골령골에 도착해 내리라고 해도 앞이 보이지않아 내리지 못하면, 개머리판으로 대리고 발로 차 굴러 떨어뜨렸다.
총살 집행장에는 경비헌병이 능선을 둘러서 있었고, 미군과 사회유지들도 포진해있었다. 7미터 전방에 사형목인 둥을 박아 놓고 눈으 ㄹ가린 뒤에서 손을 묶어 매달아 세운 다음 M-1총을 발사하고 뒤에서 확인사살 후, 소방대원이 손을 풀고 장작더미에 던져 50~60명씩 화장했다. 사흘은 그렇게 했으나 이후에는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집행했고, 나중에는 더 여유가 없으니까 길이 5미터, 너비 3미터터쯤 되는 구덩이를 파놓은 뒤 트럭이 그 앞에 와서 묶인 사람을 쏟아 부어 앉히거나 뉘어 놓으면 M-1 총을 들고 대각선으로 사격했다. 확인사살 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어 가득차면 흙으로 덮었다.
학살된 사망자 수 및 학살시기는 크게 세가지로 견해가 다르다.
첫째, 미국의 비밀헤제된 문건과 대전형무소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50.7.8~10일사이에 사상범 약 1천 800명이 선별돼 학살됐다.
둘째, 당시를 목격한 인군 주민들은 10일 이상 학살이 계속됐다는 중언과 무덤의 규모에 비추어 3천여 명이라는 것이다.
셋째, 2002년 4월 발굴된 영국데일리워커 지 한국전쟁 종군기자 위닝턴의 증언과 산내 골령골 인근 주민들의 증언및 유족들의 제사 역시 10여일에 걸쳐 있다는 점에 의하면 , 약 7천~8천 명의 학살이 있었다(위닝턴은 7월 16일 북한군이 미군의 금강방어선을 돌파하자, 7월 17일 새벽에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어,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백명식 37대 트럭분, 3천 700명여 명이 죽었다고 날짜와 학살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헌병대가 에워싼 가운데 6일부터 대전형무소에서 이루어진 재소자 성향 분류에서 사상범은 10년 이상을 기주을로 했으나 적용법령이 국방경비법, 특별조치법, 포고령 위반죄는 기결과 미결에 관게없이 모두 사상범의 반열에 올려졌다. 이들 중에는 제주 4.3항쟁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이 많았다.
다른 증언 중에는 대전지역 보도연맹원과 청주교도소 등 전국 각지의 정치범들이 실려와 산내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만일 피해자가 7천여 명이라면 재소자만이 아니라 보도연맹원등 민간인도 다수 학살되었고, 이들 중에는 여성들과 10대들도 적지않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당시 형무관들 증언은 사상범 처형만을 증언하고 나머지는 부정하고 있다.
이 학살은 '50년 9월에는 퇴각하는 북한군이 1천 300여 명의 반공, 우익인사를 보복학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준영(당시 형무소 특별경비대 부대장) : 사상범으로 분류된 재소자들은 여순사건 관련자가 많았고 사상이 무언지도 모르고 잡혀온 보도연맹원이나 예비검속자들도 많았다.미결수도 많았다.
변홍명(가명, 당시 도경찰국 사랄주민. 현장 총살책임자중 한사람) : 대전형무소학살이 끝난 뒤 3일 동안 대전보도연맹원과 죄익불순자라는 죄목으로 연행돼 온 500여 명을 같은 방법으로 계속 처형했다.
11. 대전 유성 미군 폭격('50.7.20, '51.1.15) : 미군폭격으로 피난민과 지역주민 50여 명, 피난민 300여 명이 죽거나 부상
'50.7.20일에 미군 정찰기 한 대가 나타나 동네 앞에 천막 친 걸 보고 급히 돌아갔다가 잠시 후에 전투기 4대가 나타나 기관총ㅇ을 소아 지역 주민 50여 명이 죽고 10여 며이 부상했다. 아산군ㄴ 둔포에서는 '51. 1. 15일에 피닌민 300여 명이 폭탄 투하로 사망했다.
미군 제35전투비행대 "작전 후 보고서('50.7.20) : 유성 남쪽 4.86.4km 지점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을 기총소사했다. 정찰기가 발포를 지시했다
김인태(지역 목사) : 아산군 둔포의 어느 창고에 숨어 있던 피난민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창고 앞에 불을 지핀 직후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