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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인문학 답사 1>
망우(忘憂)란 이름은 조선 태조가 자신이 죽어묻힐 터 (건원릉)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오랜 근심을 잊게 됐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 경성은 이태원, 신사리, 수철리(현재 성동구), 홍제내리, 아현리, 미아리 등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주로 도심에서 가깝고 규모도 가장 큰 이태원 공동묘지를 많이 사용했다.
1930년대 경성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주택이 턱없이 부족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부는 이태원 묘지를 재개발해 주택으로 공급할 계획을 잡는다. 또한 곧 만장이 될 미아리 공동묘지를 대체할 공동묘지를 이곳 52만 평에 조성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동구릉이 조성된 산줄기에 평민의 공동묘지를 만든 의도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40년간 서민의 공동묘지로 쓰여지다가 1973년 매장이 금지될 때까지 묘소 28,500기가 자리 잡았으나 이후 이장(移葬)이 꾸준히 진행돼 2018년 12월말 현재 7,425기만 남았다.
동대문에 버스터미널이 있던 60~70년대 시절,
버스차장의 속사포 랩 소리는 이랬다.
'차라리 죽을라고 망우리 갑니다'
뭔 소린가 자세히 들으니 ' 청량리 중량교 망우리 갑니다'
이전에는 죽는다는 비유를 '나무코트를 입고 망우리에 간다' 였는데 망우리는 북망산천의 대명사요, 월하의 공동묘지 납량특집의 단골소재였다.지금은 장례방법도 변하고 도시가 팽창하여 상전벽해가 이뤄졌다.
남들이 기피하던 망우리가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런데 소중한 유산이 사라지고 있다.
몇 년 전 작곡가 채동선(1901 ~1953)과 화신백화점 등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의 묘소가 유족들의 뜻에 따라 이장됐다. 안창호, 나운규, 김영랑, 김동명, 임방울, 송진우 묘소도 원래 이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한데 모여 있어야 더욱 가치를 발하는 망우리묘지공원의 유산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묘지 관리는 유족들이 맡고 있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도산 안창호의 조카사위 김봉성의 묘소는 유족들이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2016년 현충원 납골당으로 옮겼다. 소파 방정환의 후배 최신복의 묘소는 벌초하는 사람도 없다. 소설가 최학송의 묘소는 한 문인이 사비를 들여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노력으로
돌보지 않던 묘와 잊혀진 묘지를 찾아내어 성역화하여
이곳에 안장되어 있는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15명에 대한 연보비를 망우리 5.2km의 산책로에 조성하였다.
지금 망우리 묘지공원 답사를가면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있고 연보비를 읽으며 답사하는 재미가 쏘쏠하다. 오비는 사색의 길 중심으로 일반적인 코스를 소개한다. 출발은 관리사무소 지나서 순환코스 북측사면 갈림길로부터 시작된다
코스는...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 민속학자 송석하 - 서양화가 이중섭- 빈궁문학 서해최학송 - 백치아다다의 계용묵- 체육인 이영민 - 낙엽따라 가버린사랑의 가수 차중락- 영화감독 노필 - 식목일을 제정한 일본인 사이토오토사쿠- 진보당 조봉암- 님의침묵 한용운- 민족대표 박희도 - 사학자 문일평- 서예가 오세창-어린이날 방정환- 순조의 딸 명온공주(김현근)- 조선민예연구가 아사가와 다쿠미-안창호와 유상규- 종두의학자 지석영-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경서노고산천장비-이태원무연고분묘
사색의 길을 걸을 때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훨씬 풍부한 여행길이 된다. 안내 표지판에 찍힌 QR 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하거나 ‘망우리 뮤지엄’ 애플리케이션을 내려 받으면 묘역이 자리한 공원 지도와 인물에 대한 상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처음으로 들린곳은 박인환의 묘다.
묘지비석에는 '세월이가면' 첫구절이 새겨져 있고
스마트알림판에 QR코드를 찍으면 대표작 목마와 숙녀의 전문이 나온다. 묘역에서 시 낭송을 해 보는것도 아취가 있다.
박인환시인은 강원도 인제군 출생의 미남시인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하자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으로 유명한 시인.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 귀퉁이 막걸릿집. 몇몇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백치 아다다'의 가수 나애심도 함께였다. 취기가 돌자 노래를 청했는데 나애심은 마땅한 것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박인환이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고 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언론인이자 극작가였던 이진섭이 단숨에 악보를 그려 냈단다. 나애심이 악보를 보고 노래를 흥얼거렸고 한 시간쯤 뒤 테너 임만섭이 합석한 뒤 정식으로 노래를 부르니 그걸 듣고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술집으로 몰려들어 왔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박인희의 노래로 더 유명한 '세월이 가면'의 탄생 비화이다.
막걸릿집은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라는 곳이고 나애심은 DDD를 부른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다. 박인환은 이날 낮에 망우리에 있던 첫사랑 여인의 묘지에 다녀왔단다.
죽음에 대한 어떤 영감같은 것이 있었을까? 박인환은 이 시를 남기고 사흘 뒤 만취한 상태로 숨져 망우리 그녀의 곁으로 갔다. 향년 30세. 심장마비였다. 6·25 한국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했던 시인이었다.
양복이 더없이 어울리는 말쑥한 외모로도 유명하며, 생전에 김수영과 등단시기도 비슷해 막역한 사이였으나 후에 성향차이로 멀어진다. 2004년에 방영한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 주인공 3인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다음으로 들린곳은 이중섭의 묘다
이중섭은 작품 '황소'로 유명한 화가다.궁핍한 생활을 한 화가는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를 쌌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야 했을 정도였다고한다. 이른바 은지화다. 이런 형편에 온 식구가 함께 살 수 없어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는 평생 이들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중섭 그림에는 유난히 어린이, 가족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결국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는데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반쪽이나마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후배 차근호가 만든 조각에도 두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 '소'는 최근 경매에 나와 47억원에 낙찰되었는데 김환기의 추상화에 이은 우리나라 그림 중 두 번째 고액이라고. 만약 생전에 조금만 일찍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생활고만 해결되었더라면 우리는 더더욱 훌륭한 세계적 거장의 작품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전에 독일민요 '소나무'를 즐겨 불렀다더니 과연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그의 묘를 지키고 있다.
이중섭의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중섭이 일본 유학중 미술실기 수업이 끝나고 우연히 수돗가에서 나란히 서서 그와 붓을 빨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으로 2년 선배인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운동과 노래까지 잘해 당시 여학생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수돗가에서 붓을 빨던 일을 계기로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그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조선땅으로 귀국해야 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해방이 채 되기도 전인 1945년 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월, 그의 고향인 원산에서 결혼했다. 아들을 둘 두었으나 나뭇군과 선녀처럼 애들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이중섭은 근대 3대화가에 속한다. 3대 화가란, 이중섭.김환기.박수근을 말한다.
불우한 가족관계를 상징하듯 묘소입구에는 후배 조각가 차근호의 작품으로 이중섭 1주기 때 친구들이 갹출해 만든 것이다. 조각 받침돌엔 화가 한묵이 쓴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는 글씨가 음각되어있다.
조각아랫쪽에 화병기능을 하도록 해 놓으니
탐방객들은 야생화를 꺾어 꽂아 놓는다.국민화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다. 망우리 최고의 명품실용비석이다.
다시 순환도로로 올라가야 한다.
눈을 돌려 옆을 보니 약수터가 있다. 유명한 용마천 약수터이다. 이곳 망우산에는 유난히 약수터가 많다.
망자의 해골을 씻은 물을 마시면 해탈한다.
원효대사가 일찍경험하고 후세에 전했다.
이곳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답사를 이어간다.
국민 강녕탑을지나 길 옆에 서해 최학송의 묘가있다.
예술가는 무조건 가난해야 하는지 빈궁문학자의 대표인 소설가 최학송의 묘가 있었다. 묘 옆에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학송은 평생 가난했다. 북간도에서 방랑 생활도 했으며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가족도 없고 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뤘다. 지금은 가족이 아닌 후배 문인이 묘지 관리인으로 되어있다. <탈출기> <홍염> 등은 가난했던 그의 인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다음에 들린곳은 계용묵의 묘소다. 이곳은 전순이 없어서 묘역 전체 사진찍기도 어렵다.
계용묵의 본명은 하태영이 본명이다.
이 시대의 문인들이 본명과 전혀 다른 필명을 쓰는 바람에
수험생들은 이걸 외우느라 개고생을 하였다.특히 오비는 IQ가 두자리숫자라 이런부류를 정말 싫어했다.
조지훈의 류는 애교로 봐 주겠으나 이상(김해경)과 계용묵(하태영)에 오면 머리가 돌아버린다.
계용묵의의 작품세계는 과작(寡作)인데다가 문장에 대한 엄격한 수련과 통제는 특출한 바가 있다. 그에 있어 작품이란 인생의 반영이 아니라, 언어로 조각된 창조물이다, 이러한 태도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신념이 실상은 한국의 선비 기질에 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심월(心月)>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워낙 과작이고 또 지나치게 예술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장편이 되지 못하고 단편으로 일관되었으며, 그 단편도 <이불> <물> <매미> 등 매우 짧은 콩트로 된 것도 적지 않다. 매사에서의 엄격성이 이처럼 소재와 작품의 길이를 한정한 것이다.
다음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체육계에서는 전설이 된 야구인 이영민의 묘지터이다.
이영민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지금의 박찬호나 류현진 보다 한 수 위다. 당시 경성운동장(동대문구장) 1호 홈런의 주인공이며, 3할에서 6할대를 넘나들며 국내 각종 대회 타격상을 휩쓴 이영민은 1934년 11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올스타(일본 자이언츠의 전신)로 뽑혀 일본에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이끈 미국 프로야구 선발팀과의 경기에 외야수로 나섰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대한야구협회는 그의 공적을 기려 이영민 타격상을 아마추어 최우수 타자에게 시상해오고 있다.
다음 코스는 여심을 훔친 요절가수 차중락의 묘소다.
차중락은 당시 보기 드물게 엘리트였다.
차중락은 시인 김수영과는 이종사촌간이다.대학생 시절에는 보디빌딩을 하여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키 보이스에 합류했다. 그는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시민회관 공연때는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나갔는데 이 모습까지 비슷하다하여 '한국의 엘비스'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차중락의 애인은 이화여자대학교 메이퀸 이었다고도 한다. 여자쪽에서 딴따라에게 딸을 줄수없다고 하여 여자가 떠났다. 실연의 아픔을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 하여 부른노래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다.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크게 히트하였다. 차중락은 서울의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뇌막염으로 쓰러졌다.
묘비의 글 <낙엽의 뜻>은 조병화 시인이 짓고, 글씨는 그의 맏형 차중경이 썼다. 묘비의 아랫부분에는 당시의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의 이름이 나와 있으며, 그 다음 해부터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그 해 가장 뛰어난 신인들에게 이 상이 주어졌다. 낙엽상 제정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가 수상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라이벌이 있지만 차중락의 라이벌은 배호다. 둘 다 20대에 요절했고 동갑내기다.
차중락의 묘지는 사색의 길로 가다가 아래로 500m쯤 내려가야 있다. 묘를 둘러보고 올라오는 길이 힘드니
로맨스를 얘기하면 된다. 차중락을 따라다닌 여자팬이 한 두명 이었을까만 그 중 외국인 여성 알렌의 순애보가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망우리 전망대
서울근교산을 섭렵하는사람은 이곳에서 조망해보길 바란다. 불수사도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색의길 반환점 끄트머리에 있는 현포 이병홍선생의 묘소를 찾는다
이병홍 선생이 본인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덜 알려진 이유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매스콤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분은 중앙무대에서 활동했지만 지역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때 지방에서 올라가 탑골공원에서 행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가 진주지역의 독립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산청 단성인인 이병홍선생은 진주 정촌면 미천면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해방후 이승만의 줄을 거부하고 재야의 길을 걸었다.
척박한 선거상황에서 무소속으로 1.2대 민의원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고 반민특위의 조사부장을 역임했다 지금으로 치면 특별검사아래의 조사팀장역할을 한 셈이니 작은 역할이 아니었다.
현포 이병홍선생의 묘비석 글씨는 해공 신익희선생이 썼다. 이동네 망우리묘역 최고의 활달한 글씨다.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여 숨이 차오를 무렵
능선 조금 못미친 지점에 키 높이의 돌에 '독립투사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란 이름과 그가 동아일보 창간사로 쓴 '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라고 새긴 글이 보인다.
장덕수 선생은 와세다대학 시절 전일본 대학생 웅변대회서 일등을 한 전력이 있다.
이 대목에서 김삿갓이 자기 할아버지를 욕하고 장원급제한 것이 창피하여 평생 삿갓을 쓰고 다닌것과
느낌이 비슷하다. 장덕수 4형제의 생애도 드라마틱하다.
덕주 덕준 덕수 덕진 4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뛰어난 말과 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백형 덕주는 일경의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중형 덕준은 1921년 훈춘 사변 취재중 일경에 피살당해 우리나라 최초 순직기자가 되었다. 동생 덕진은 상해에서 독립운동비 조달 중 피살되었다. 셋째 덕수도 독립운동 중 생을 마감했다면 독립운동사에 명예로운 가문으로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인데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
미국 유학 중 김활란 박사에게 청혼하였지만 딱지 맞고
박은혜와 재혼하여 망우리공원 더불어 잠들어 있다.
부인인 난곡 박은혜는 이화여고 교장을 지냈고 은석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다.
장덕수 박은혜 부부의 합장묘에는 6.25 한국전쟁 망우전투 흔적을 망주석에 총탄 자국을 남겼다
동아일보 창간 때 쓴 사시(社是) 3대 주지가
연보비에 새겨졌다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부하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해방공간 정치적 암살사건 희생자중의 한사람이다.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설산 장덕수는
제기동 집에서 같은 당 재정부장 이영준 등
몇 몇 동지와 술상을 앞에 두고 담화를 나누다 두 청년 중
경찰관 복장을 한 청년의 카빈총에 생을 마감했다.
정당연합 사회장을 치뤄 이곳 망우리에 안당되었다.
망우리 공동묘지 공원의 사색의 길 북쪽사면에 위치한 유명인사들의 묘인데 완만한 오르막 경사길로 되어있다. 대체로 낭만가객들이 묻혀있는데 이곳에 들러 술 한잔 따라놓고 추념한다면 그 참배객 또한 휴매니스트임이 틀림없다. 오비가 보증한다.
이 시대의 임제(林悌)를 위하여 건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오비 최이락
★ 2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