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충무관중앙현관에 있는 이회영, 이범석 김좌진 지청천 홍범도 등 5인의 독립유공자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논란이 일자 홍범도장군만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기로 했으나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혹자들은 육사생도들에게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흉상을 논란을 부르며 이전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국방부가 왜 이전하려 했는지 근본원인부터 알아야 이해 할 수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산주주의 사상을 갖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논란의 발단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간 미 군정청(軍政廳) 하에 있었다. 미 군정청은 치안과 국토방위를 위해 1945년 10월21일 경무국을 설치 경찰을 창설하고 1946년1월14일 미군정 법령 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 '국방경비대'를 창설 했다. 1948년 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조선이 망한지 39년만에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정부는 미 군정청으로부터 행정사무와 경찰 국방경비대 등을 인수 받았다. 국방경비대는 국방군으로 변경했다가 오늘에 국군이되었다.
문재인은 대한민국 건국원년을 일제강점기인 1919년 임시정부라고 주장하며 국민총선으로 세운 건국을 부정한다. 또 항일 무장활동을한 공산주의 전력자들을 국군의 뿌리라고한다. 2018년 현충일기념사에서 북한군 창설자이자 김일성 포상을 받은 김원봉을 항일운동을 이끈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라며 서훈(건국훈장)을 시도하다가 반대여론에 실패하자 '꿩대신닭'으로 소련공산당 전력 있는 홍범도장군을 띄우기 위해 육사에 이범석 지청천 김좌진 장군 등의 무관들을 들러리로 함께세운 것이다. 근본목표는 한미동맹에 근간을 둔 우리국군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문재인은 대통령에 취임한 2017년 8월 28일 국방부 초도순시 업무 보고 받는 자리에서 전례가 없는 육사 교과 과정개편 지시를 했다. 이에 따라 1919년부터 육사 생도의 필수과목인 6,25 전쟁사, 북한의 이해, 북한의 전략 등을 선택과목으로 개편했다. 국군장교가 북한의 실 체도 모르고 6,25 전쟁도 모르고 북한이 침략하면 어떻게 싸우겠다는 군사전략도 모르고 70%의 생도가 3과목을 배우지 않고 졸업했다. 이는 있을지도 모르는 북한과의 전쟁이 벌어질경우 장교들의 전술전략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 군의 엘리트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있어야 할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동상이든, 흉상이든 육사에 세우려면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백선엽 김종호 김홍일 장군이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1951년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와 동일한 육군사관학교(11기 전두환 노태우)를만든 벤프리트장군 같은 전쟁영웅들을 롤모델로 삼아야 한다. 국방부가 홍범도장군을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려는 데는 나라의 간성(干城)을 육성하는 교육기관에 공산당 전력자는 적절치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홍범도장군은 1920년 독립군의 최대전적으로 꼽는 봉호동 전투와 김좌진 이범석 장군부대 와 함께 청산리 대첩에 참여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여기까지다. 일본군은 대대적인 항일무장단체 소탕작전에 나섰고 독립무장단체들은 일본군에쫏겨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자유시)로 피신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부대를 비롯한 대한의용군등 다른 부대들도 모두 모였다.
1921년 고려혁명군은 러시아적군파(공산당)와 협정을 맺고 무기공급등 지원을 받었다. 홍범도부대도 고려혁명군에 합류하고 대한의용군부대는 이를 거부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소련에 조선독립군 무장해제시킬 것을 요구했고 혁명으로 내란이 발생 불안한 러시아는 1921년 6월 22일 연해주에 주둔한 독립군무장해제를 지시했다.
"독립군이 무장해제하면 무엇으로 일본군에 대항하는냐"며 이에 저항한 대한의용군부대에 무참히 총격을 가해 수십 명이 죽고 8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러시아에 지원을 받는 고려혁명군의 가담으로 홍범도의 연루설이 나온다. 홍범도는 체포된 대한의용군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사실도 밝혀졌다.
1922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극동 피 압박민족의 문제를 다룬 극동민족대회가 개최되어 홍범도장군도 고려혁명군 대표자격으로 참여했다. 레닌은 대회를 마치고 홍범도장군을 따로 불러 러시아군에 협력을 치하하고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과 금화를 선물했다. 대한의용군이었던 김창숙이 홍범도의 처신에 항의하자 권총으로 김창숙과 김호남 2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홍범도는 20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레닌이 사망하고 2028년 소련의 스탈린시대가 열린다. 홍범도는 '소련적군 제5군단 직속 조선인여단 제1대대장(대위)에 임명된다. 그 후 홍범도는 소련에 남아 살았지만 일본군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한인에 대한 적대정책이 강화되던 중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의 야욕을 두려워한 스탈린이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인 들을 중앙아시아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켰다.
홍범도장군은 1943년 75세로 사망했다. 문재인은 2021년 8월 카자흐스탄에 묻힌 홍범도장군의 유해를 송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했다. 홍범도장군은 독립군으로 활동한 공적도 있지만 연해주에서 러시아군과 고려혁명군이 강제무장해제를 거부한 대한의용군을 무참히 사살하는데 참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소련공산당 스탈린에 의해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들어섰고 스탈린의 승낙과 무기지원으로 6,25 전쟁은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국민들의 많은희생이 있었다. 그런 소련 공산당 전력이 있는 홍범도를 독립군으로 만 미화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공(反共)국가인 대한민국의 간성(干城)을 육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공산주의 전력자 홍범도 흉상은 국민의 상식으로도 적절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