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즐겁게 쟁기질 하는 방법 / 강태승
풀잎마다 이슬방울, 소를 앞세우면 열리는 산길이다
앞도 뒤도 아닌 소와 동행하면 넓어지는 산길이다
개망초 강아지풀 토끼풀 슬슬 뜯는 늙은 소 때문에
구름 머뭇거리는 풍경으로 게을러지는 산길이다
담배 피고 멍에 메운 뒤 깊이도 아닌 얇게도 아니게
대면, 살 차오르는 이랑으로 까치가 벌레 잡는 밭이다
소가 칡넝쿨 호시탐탐 노리면 모르는척 오줌이나 싸고
막걸리 마시고 참나무 그림자로 가슴 누르는 것은
우울을 개울물에 섞이도록 내버려 둔다기보다
개울의 태양이 저승길도 비추도록 하는 요량이다
정오엔 숲으로 소를 풀어 놓으면 멀리도 가깝지도
않는데서, 되새김질 종일 하려는 수작으로 눕는 소
덩달아 낮잠 들면 산그림자 앞서는 저녁이 쉽게 온다
진달래 피면 진달래 먹이고 머루 잎도 나누다 보면
계집애처럼 개울 나풀나풀 건너다니는 늦가을이
밭 가장자리로 어어 하는 사이 마른 발목을 보인다
눈 내리면 외양간에서 퍼질러 두러 누운 소의 엉덩이
소일거리로 빗자루로 쓸어주면 주인인양 눈을 감는 소
군자君子보다
우자牛子로 살고픈 생각이 들면 좋은 농사꾼이겠다.
묵정밭의 비밀 / 강태승
사람이 버린 화전火田 비로소 처음처럼 산다
가시나무 철쭉 진달래 자라니 되찾은 얼굴
산나물 돋는 눈동자 참나무로 짙푸른 눈썹
가을이면 붉은 입술 겨울이면 흰 손목과 발목,
콧수멍에 산도라지 귓구멍엔 개암나무
겨드랑이 살모사 정수리 까치집도 볼만하다
사람 떠나니 머루 다래 허리를 감고 돌아
오히려 줄 것이 많은 밭이다
다람쥐가 구멍을 팔수록 넉넉해지는 얼굴
산돼지 쏘다니면 저절로 생겨나는 우물
비로소 산 되어 더 많은 이야기 베푸는
산그림자도 생겨나는 습습한 밭이 되었다
소나기 쏟아지면 잎사귀마다 굵어지는 손금
색동저고리 죄다 갈아입는 늦가을에
능선 타고 달려드는 첫눈은 가관이다
그것들 품었다가 봄 길에 풀어 놓으면,
방죽으로 노랗게 피는 겨울 이야기
냉이는 이 애기 저 애기 툭하면 엎지른다
쥐라기 너머 원생대 바람도 생겨나는 밭,
그 중 백악기 구름에는 지네가 살판났다.
칼의 노래
一揮掃蕩 血染山河-이순신 / 강태승
불을 먹고도 칼은 차갑다
온몸에 불을 가두고도 식은 칼이다
먹은 불이 칼보다 무거웠는데
불은 칼만 남겨 놓았다
불을 삼키고 싱싱해진 칼
칼에 먹히고 오히려 칼이 된 불,
두드리면 아직도 불꽃이 핀다
살아 있는 한 꺼지지 않고
불이 있는 한 죽지 못하는 천형天刑이
세월 흐를수록 푸릇푸릇하다
돌에 갈 적마다 몸속 깊이깊이
새겨지는 불,
바람을 거슬러 그으면 불이
먼저 달려 나가 칼을 인도한다
공연한 칼질을 하면
불을 놓치는 칼,
침묵이 모든 소음 품은 것처럼
칼집에 있을 때 칼은 불 속에 있다
불을 밴 칼, 칼을 품은 칼집이
지금도 시屍보다 자세가 견고하다.
격렬한 대화 / 강태승
사자가 목을 물자 네 발로 허공을 걸어가는 물소
물소의 눈빛 추억 이념 가족의 근황도 묻지 않고
뱃속에 저장된 수만 송이 꽃과 풀잎 속의 햇빛
달빛의 무게에 춘하추동 화인은 보지 않고,
사자는 물소의 목숨에 이빨을 박고 매달렸다
단지 배고플 뿐이고 고픈 이전으로 가야한다
목숨이 아니라 부른 배이고 싶다는 사자와
네가 문 것은 아들이 기다리는 어미의 목이라는
풍경을 경치로 저물고 있는 세렝게티
침묵 이전의 이전으로 가라앉고 있는 벌판
무슨 대화가 노을이 배경으로 깔리고 서늘한가
죽어야 하는 살아야 하는 시간이 저리 아늑한가
물소는 제 몸을 버리고 아들에게 돌아갔다
소가 던지고 간 고기로 배고픔을 잊은 사자
물소와 끝내 한마디 대화하지 못하고
사자에게 끝끝내 한마디 건네지 못한 하루가,
물소의 뼈만 벌판에 남긴 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강둑에선 하마를 질문하듯이 물어뜯는 하이에나
정답인 양 남은 코끼리의 뼈를 탐색하는 독수리
표범은 나무 위에서 발톱을 슬슬 긁고 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1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 강태승
칼을 가는 동안 대나무 바람에 갈리는 소리 떨어지는 물통에
보름달 둥그렇게 떠올라 칼 갈리는 소릴 엿듣는지 웃으면서
말이 없다가 달처럼 둥그렇게 하라는 훈계인지 대나무 사이로
다른
보름달이 다시 내려다보는 밤은 막다른 데로 가을이 걸려 있어
서릿발 쑥쑥 자라나는 대나무 밭은 적막하면서 수상한 소리
혓바닥 날름거리는 날선 침묵에 소름이 금세 대오를 치는 손목
굳게 쥐고 오히려 고요한 바닥에 냉정한 자세를 밑바닥에 깔면
대나무 소리는 청량하고 만다
칼 갈 적마다 감나무 그림자 등짝으로 다가와 발자국 검지만
무덤의 꽃처럼 차갑지 않은 무게로 노는 듯 있고 멈추면서
슬슬 울타리 넘어가는 솜씨를 눈치 채지 못하고 마르는
호박넝쿨은
서리가 몇 번 다녀가서 덩그러니 늙은 호박은 제자리보다
한 발짝 물러나 있어 칼 가는 소리 돌아오지 않고 저승으로
곧장 무너지는지 서늘하다가 쓸쓸하고 막막하다 안온해지는 것
수직으로 쓰이길 바라는 칼이지만 다시 불을 넣으면
보름달처럼 환해지는 칼이라는 문장이 물통에 달처럼 뜬다
칼을 만나는 것은 울돌목에 머무는 시간
비바람 눈보라에 보이지 않을 때 지면(紙面) 구겨져 있을 때
칼을 만나러 가면 억만년 전의 다시 억만년 전으로 있는
바다에 대면 보인다 칼을 만나는 것은 죽음의 선물
길이 길로 가로막고 바다 한 가운데로 질문이 풀어졌을 때
칼을 만나면 마중 나오는 해안선이 있다 그 물결에 뉘이면
겨울의 수평선과 일치하며 길을 내며 앞서는 산 그림자를
만나는 것은 뜨거운 낙화 쓸쓸할 때 빈손으로 가도
돌아온 길과 돌아갈 길이 풀어져 칼이 된 하늘이 있는,
칼을 가는 밤은 환하다 못해 비어 있어 빈 데가 없고
빈 데가 없으면서 돌아가 있어 대나무 숲은 적막하다
대나무들이 서로에게 몸을 비비는 것 같지만 서로의 칼을
갈아주는 소리 자기의 칼로 자기를 갈지 않고 갈아주느라
서로 베이면서
벌건 피를 감쪽같이 감추곤 하늘 높이 한 마장 높이 보이는
푸른 하늘이 명량으로 가깝게 다가와 대나무 숲에 머무는,
숫돌에
칼 가는 시간은 그래서 잠깐은 대나무가 되는 시간이다.
[ 강태승 시인 약력 ]
* 1961년 충북 진천 백곡 출생.
* 2014년《문예바다》로 등단.
* 시집 : 『칼의 노래』.『격렬한 대화』『울음의 기원』
* 수상 : 김만중문학상, 포항 소재 문학상, 『머니투데이』 신춘문예, 백교문학상, 한국해양재단 해양문학상, 추보문학상,
해동공자 최충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
*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문예바다와 시마을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