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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드룩에서의 일박
나의 시를 말한다, 송재학
<한겨레> 2016-03-25
적막 / 송재학
빙하가 있는 산의 밤하늘에서 백만 개의 눈동자를 헤아렸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별과 나를 쏘아보는 별똥별들을 눈 부릅뜨고 바라보았으니 별의 높이에서 나도 예민한 눈빛의 별이다 별과 별이 부딪치는 찰랑거리는 패물 소리는 백만 년 만에 내 귀에 닿았다 별의 발자국 소리가 새겨졌다 적막이라는 두근거림이다 별은 별을 이해하니까 나를 비롯한 모든 별은 서로 식구들이다
-시집 <날짜들> 수록
졸시 ‘적막’은 네팔 산간마을의 체험이다. 파키스탄의 훈자에서 본 밤하늘이 시작이긴 했지만 초고였던 ‘적막’은 십 년 동안 숨죽이면서 난드룩의 밤하늘을 기다렸다.
네팔의 산간 마을 담푸스에서 출발하여 꼬박 8시간 걸어 난드룩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의 들끓는 마음은 몇 시간 지나 산과 길에 적응하면서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산비탈 속속들이 다랑이 밭이니까 촘롱 가는 이 길은 거의 문명과 자연이 서로 깍지끼고 순응한 풍광이기도 하다. 산 아랫자락부터 산정상까지 죄다 다랑이 밭이다. 가축도 자주 보인다. 빼곡한 다랑이 밭들이 꿈틀거리는 느낌은 소의 되새김질처럼 선과 면이 다정하기 때문이다. 선은 간결하고 면은 다채롭다. 손발이 뭉툭하지만 곰살맞은 다랑이 밭 또한 가축의 느낌이다. 밭고랑마다 햇빛이 따사로워 눕고 싶다. 비좁아 서로 부대끼는 가축의 모가지에 풍경(風磬)이 매달렸다. 산비탈을 물들이는 계절의 색조, 빛과 색이 일치하는 산색이다. 올해의 풍년을 따지는 귀갑문이 다랑이 밭과 가축의 등에서 균열을 시작한 것도 보인다. 그리하여 종일 걸어서 도착한 곳이 난드룩이었다.
난드룩의 로지가 반가운 것은 첫날의 숙박지이기 때문이겠다. 저녁을 먹고 로지의 마당에 앉아 차를 마신다. 노을이 시작된다. 북해의 거대한 곤(鯤)이 변하여 붕(鵬)이 되었고 다시 변하여 첩(鯜)이니, 흔히 우리가 노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짐승의 내부인지 외부인지 여기서는 분명치 않다. 꾸역꾸역 붉어지는 서쪽 하늘의 비린내도 싫지 않다. 계곡 건너편 산록의 마을은 간드룩이다. 간드룩의 ㄱ과 난드룩의 ㄴ이 나란하여 짝이 된다. 간드룩 역시 해발 1500여 미터의 산간 마을이다. 간드룩에게 난드룩은 계곡 건너편 마을이다. 아마 간드룩은 난드룩이 없었다면 그냥 흔한 마을이고 말았을 터인데 난드룩이 있었기에 두 마을은 옹기종기 삶을 얻는다. 마당의 어스름 속에서 별이 돋아나는데 지상의 불빛이 먼저이다. 처음 그 별은 간드룩의 어느 집 마당에서 히말라야바람꽃처럼 깜빡 졸기 시작했는데 결국 하늘의 별들과 같은 마당을 사용했다. 밤하늘이 넓어졌다. 팔다리가 없는 별이 별빛으로 서로 포옹하는 평화가 넓어졌다. 문득 마음껏 달리는 별똥별이 밤의 모서리에 빗금을 긋는 평화 속의 난드룩은 내가 오래전에 도착한 곳, 또는 내가 오래전에 태어난 해발 1500여 미터의 히말라야 마을처럼 여겨진다. 난드룩에서 간드룩으로 시집간 처녀와 시집온 처녀가 올망졸망 몇 대를 넘나들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드룩 마을이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경사가 심한 개울물을 이용한 발전기 덕분이다. 사람들은 처마 밑 전등을 밤새 켜놓는다. 더 많은 별은 풍년의 약속이기에 별빛과 전깃불을 구별하지 않는다. 별빛이 전깃불을 토닥거리는 것처럼 난드룩과 간드룩이 바람이나 구름이나 여하간 무언가의 손바닥을 빌려 밤새 서로 토닥거리는 풍경은 흔하디흔하다.
새벽에 잠이 깨어 밖으로 나왔다. 설산들이 희고 검은 얼굴을 하고 무너지듯 치솟아 나를 덮쳤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밤하늘이 보여주는 백만 개의 눈동자와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별과 별똥별들은 예민했고 나도 밤하늘에 민감해졌다. 서로 감정을 섞어서 긴장하는 대치 상태이다. 먼저 별과 별이 부딪치는 금은의 소리가 내 심장에서 들리고 별과 내가 부딪치는 소리 혹은 나와 별이 부딪치는 패물 소리도 순서 없이 들렸다. 별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라 별의 발소리이다. 흔적을 남기는 무거운 소리이다. 적막이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너무 거대했기에 임계를 지나버린 것이다. 적막은 우주로부터 온 소리가 바탕이다. 별을 이해하는 것들 혹은 별들이 모두 같은 공간에 모인 셈이다. 설산과 별들의 새벽 풍경은 초월의 감정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자 아침이 왔다. 나뿐만 아니라 마당에는 일행들이 모두 그렇게 물끄러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졸시 ‘적막’은 내 안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에게 존재했던 감정이다.
송재학
송재학 /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등을, 산문집으로는 <풍경의 비밀> <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를 냈다.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경
송재학은 풍경의 고고학자이며 철학자다. 송재학은 풍경의 궁극과 궁극의 풍경에 닿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시공간을 잘라낸 단면의 그림이 아니며, 생생하고 입체적인 모사(模寫)의 이미지의 총합도 아니다. 송재학이 필사하는 풍경은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흘러와 다시 아득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두께와, 우주의 끝에서 끝에 이르는 공간의 넓이를 갖고 있으며, 그가 ‘검은색’이라고 부르는 대자연의 섭리로서 심연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가령, 모래 한 알과 바람 한 자락도 우주 전체의 서사를 제각기 응집하고 있으며, 그 정점의 한 지점을 온전히 살아내는 중에 있다.
송재학이 우주 전체의 서사와 운동성을 품은 풍경들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는 “뭉클하고 도저한 필기구인 생(生)”이다(‘낙엽 밟기는 밟는다만’). 아무리 오래고 드넓은 우주적 연대 속에서도 모든 생명체에게는 홀로 감당해야 할 생멸과 고독의 몫이 있다. 송재학은 저마다의 갈급하고 쓰라린 ‘생’을 압착한 염료로, 지상과 허공, 탄생과 적멸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존재와 세계의 풍경을 그린다. 푸른색, 붉은색, 흰색, 초록, 분홍, 검은색 등은 송재학이 자신과 타자들의 생을 원료로 하여 추출한 존재적 염료의 이름이며,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우주적 질료의 이름이다. 송재학의 ‘색’은 그가 시적으로 구사하는 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언어와 화법(畵法)의 근본 재료가 되는 것으로서 우주의 실재를 의미한다.
‘색’과 함께 송재학이 통찰한 우주의 실재는 ‘적막’이다. 소리가 가청의 음역을 벗어난 차원인 ‘적막’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부여한다. 송재학의 시는 “고요의 음역(音域)”을 섬세하게 구별하고 기록하며(‘나무의 대화록’), 이로써 적막한 “허공을 실천”(‘공중’)하는 중에 있다. 송재학이 근원의 색과 소리(적막)를 언어로 번역하는 불가능한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덕에 우리시는, 우주의 원리이자 질료로서 더할 수 없이 깊은 ‘색’(色)과 ‘적막’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갖게 되었다.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경을.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나무의 대화록 / 송재학
사람의 말과 나무의 말은 다르다 사람의 말이 공중에 번지는 소리의 양각이라면 나무의 말은 소리를 흡입하여 소리의 음각을 만든다 공중의 소리 일부를 흡입하면서 만들어낸 펀칭 카드를 통한 나무의 대화법은 고요의 음역音域이다 성대가 없는 나무들에게 잎과 수피의 자잘한 구멍을 통한 소리의 들숨이야말로 맞춤한 점자법이라면 나이테는 소리에 대한 지문이겠다 나무의 음각 소리는 무늬에 가까워서 소리의 요철은 바스락거리지만 너무 희미하여 잎들이 소리를 먼저 확인하기도 한다 주변에 소리가 없다면 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전사前事이겠다 나무에게 와서 언틀먼틀 소리는 홀연 어눌하고 홀연 비밀스럽다 나무들이 새긴 소리의 지형은 쉬이 사라지지 않기에 나무의 대화는 명상록으로 유전된다 책으로 묶은 소리책은 낙엽과 함께 퇴적된다 목간에 고이는 소리는 나무의 발전에 보태어진다 그 소리 또한 나무 속에서 묵언을 배운다 그러고도 남은 소리는 잎들이 서로 부빌 때 혹은 잎들이 바람에 일렁일 때 사용된다 나뭇잎들이 자주 겹치는 것은 소리의 아가미에 해당되는 것이다
<검은색> 문학과지성사, 2015년
나무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뭇잎과 물고기가 겹치던 때보다 훨씬 뒷날, 사람과 나무가 윤곽 없이 생을 이룬 시절이 있었다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돋아 나오고 사람은 나무 속에서 죄를 고백했다. 나무와 사람은 결이라는 고운 이음매가 있었다 나무의 별자리가 사람의 그림자에도 스몄던 화석이 나왔다 점차 사람이 이목구비라는 예의를 갖추고, 나무는 잎을 매달면서 이진법이 시작되었다 나뭇가지 점독은 사람과 나무의 간격에 대한 예언이다 나무가 사람을 그리워할 때 사람도 두 팔 벌리고 나무의 불 켜진 지층이 보고 싶었던 날짜는 구석기 이전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
지금 나무가 비어 있다.(송재학)
공중 / 송재학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란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목덜미와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 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샛과 곤줄박이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 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 수이다 새점(占)을 배워야겠다.
* 2010년 (제25회) 소월시문학상대상수상작
https://naver.me/xjgmwO8c
[비하인드 스토리]
송재학 시인이 2, 3편만이 오르는 최종심사에서 10회나 떨어진 것에 대해 시인들은 ‘아마 그가 치과의사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수상자에게 거액의 상금이 주어지는 만큼 기왕이면 전업시인(따로 직업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인)에게 상금을 주자는 마음이 작용한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 외에도 ‘송 시인이 교류 없이 틀어박혀 시만 쓰는 사람이니 그것도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사위원도 사람인 만큼 작품이 엇비슷하다면 자주 만나는 사람,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시감상 - 살아 숨 쉴 수 있는 거처
고분임
2015년 「시와사람」 등단.
공중은 온갖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며 생명체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거처가 되어준다. 백지가 저를 닦고 닦아서 모든 그림과 글자를 다 받아 내듯 어떤 물체가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해도 제 몸을 쭈그러뜨리거나 부풀리는 법 없이 오롯이 받아 안는다. 채워지면 스스로 물러나고 비워지면 그 자리에 들어가 흔적을 메워주는 공중, 애시당초 욕심이 없었기에 색도 소리도 버리고 투명만 남았나 보다.
허공이란 말이 막막한 추상어라면 공중은 촉각과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친근한 구체성을 띈 언어라 할 수 있다.
빈 곳에서 날아와 비에 젖어 할딱거리는 곤줄박이 한 마리 손바닥에 얹어두고 공중의 안감을 만져보는 시인, 공중 일가들이 모두 새의 울음과 깃털에 나누어 서식하기에 공중은 그다지도 투명하고 고요할 거라고 단정하는 시인, 허공이 색이 없는 줄 알았더니 허공 한 줌 움켜쥐니 온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이 뚝뚝 듣는다고 말하는 시인.
그는 누구인가?
풍부한 지적 통찰과 대상에 대한 애착은 생태주의적 관심으로 이어지고, 미세한 감각과 행간 속의 숨결이 잡힐 듯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송재학 시인의 작품을 만날 때면 아늑한 공간에 갇혀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시적 대상에 스스로 녹아들어 한 몸이 된 시인이 대상이 불러 주는 노래를 받아 적기 위해 갱 속 깊이 캐낸 단어 하나하나를 제자리에 앉히는 솜씨는 참으로 놀랍다.
시인은 대부분 산문장시를 즐겨 쓰는데 시 한 편 안에 소재와 감성을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처럼 압축 돼 있어, 푸짐하게 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 끈기가 몸 안에 남는다. 자꾸 눈이 밝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