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까지 이곳은 중요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1241-2년 몽고가 침입한 이후, 이전 수도 ‘에스테르곰’에서 피신해온 ‘벨라 4세’가 이곳 언덕에 성을 쌓았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게 되었다.
이 곳이 영구적인 왕실이 된 것인 룩셈브르그 가문의 왕 ‘지기시문트’ 기간(14세기 말-15세기 초)에 만든 새로운 왕궁이 만들어 지면서였다.
15세기에 마티아스는 고딕양식의 건물을 넓혔고 르네상스양식을 가미 시켰다.
이런 인간적인 왕궁은 크게 발전하여, 중부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와 헝가리 황금기를 맞이 했다.
마티아스 왕이 죽은 뒤 국가가 쇠퇴하게 되었다.
1541년 터키가 헝가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으며 부자들 대부분은 쫓겨났고, 집들은 폐허가 되었다.
1686년 교황 '이너센트 11세’가 지원하는 기독교 연합군이 이곳을 다시 차지하였다.
터키를 물리친 것을 유럽에 알렸고 그 기념으로 모든 기독교 국가가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터키의 오랜 지배로 성은 폐허가 되었다.
마티아스 시절 8,000명이 성에 거주 했었지만 터키 이후 6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다음 세기에 재건을 하기 시작했다. 고딕 스타일이었던 거주지들을 바로크 스타일로 만들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 많이 볼 수 있는데, 고딕 스타일의 문 위에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올려진 건물들이다.
1703년 부다는 왕이 없는 도시가 되었으며 ‘합스부르크’가 비엔나에서 이곳을 유지해 나갔다.
반면에 헝가리의 중요한 기관들은 ‘브라티슬라바’(현 슬로바키아 수도)에 있었다.
1848-49년 독립전쟁으로 왕궁을 헝가리 인들이 차지 하였으나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다시 차지하였다.
많은 집들이 심한 손상을 입었다.
지난 시기에 지어진 왕궁의 일부는 불에 탔다.
1873년 부다, 오부다, 페스트 지역이 통합 되면서 부다성은 다시 한번 번성하게 되었다.
새 왕궁과 정부 건물들이 들어 섰으며 마티아스 교회도 재건축 하고, 왕궁도 넓혔다.
2차대전 때인 1944-45년 겨울은 이전보다 많은 파괴가 있었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에게 독일이 패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물러 갔을 때 성에 사람이 사는 집은 없었다.
그 뒤 40년 동안 뼈아픈 재건이 있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건물은 문화재가 되었다.
부다페스트는 과거 3개의 작은 도시인 부다(BUDA) 오부다(OBUDA) 페스트(PEST)가 하나로 합해져서 이루어진 매머드 도시이다.
다뉴브를 중심으로 동쪽이 페스트 지구이며 주요 볼만한 곳과 쇼핑거리이며 국회 의사당과 국립 박물관이 있다.
한편 서쪽의 부다 지구에는 어부의 요새, 국립미술관, 치타델라성이 자리잡고 있다.
개혁의 물결이 넘치고 있는 헝가리. 그 중에서도 이곳 부다페스트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느껴볼 수 있다.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공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있는 동구권국가 중 개혁의 바람이 가장 거칠게 불고 있는 곳이다.
부다와 페스트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과 여기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8개의 다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축양식,
아름다운 자연환경 등은 부다페스트를 '다뉴브의 진주'로 불리게 하며 아름다운 관광지로 만들고 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1873년 3개의 지역이 통합되어 생겨난 도시로서,
한때 중세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만큼 합스부크 왕조의 궁전 등 옛 건축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 마티아스 성당 (Matyas Templom)
13세기에 건축된 고딕 양식의 건물로 부다 지구의 상징이다.
헝가리 왕의 대관식이 열리던 곳인데 마티아스라는 이름은 1470년 마티아스 왕의 명령으로 뽀족탑이 증축되면서 붙여졌다.
오스만투르크 통치시절 모슼크로 사용되다가 17세기 가톨릭 교회로 환원되면서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 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고딕 양식으로 복원됐으며 뽀족탑도 원래보다 8M 낮게 만들어졌다.
세밀한 정식과 화려한 모자이크로 구성된 지붕은 눈여겨 볼만 하다.
내부의 프레스코화도 독특한 느낌을 주는데 증개축을 하면서 오스만투르크 느낌의 색상을 갖게 되었다.
마티아스 성당은 1255-1269년 벨라 4세가 건립한 이후, 15세기 때 마티아스 1세가 88m 높이의 첨탑을 증축한 후
성당의 이름은 마티아스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3-14세기때는 프랑스식 고딕식으로 건축된 독일계 시민성당 이었고, 16세기에 부다가 터키에 점령당하면서
모스크로 변형되었다가 17세기에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고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 되었다.
마티아스 성당은 13세기에 건축이 시작되어 15세기에 완성된 고딕식 건물로서, 1873~96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보수가 진행되었다.
헝가리의 가장 위대한 왕인 마티아스 왕의 대관식이 이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1916년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제인
KARL 4세의 대관식을 포함하여 3번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성당의 2층 부속실에는 칼 황제 대관식 당시 사용되었던 의자와 황제복이 전시되어 있으며, 옆방의 소 성당에는 헝가리에
카톨릭을 받아들인 스테판왕의 두개골이 전시되어있다.
■ 부다 왕궁 (Kiralyi Palota)
부다페스트 상징 1호인 이곳은 웅장하며 우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왕궁과 어부의 요세, 마티아스 성당은
누구나 발길을 향하게 만들고 밤에 보는 경관은 세체니다리, 국회 의사당과 더불어 단연 유럽에서 최고를 꼽는 다고 할 수 있겠다.
13세기에 건축되었으며 17세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을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궁으로도 이용되었다.
현재는 국립박물관과 화랑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소장품으로는 헝가리의 주요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베르헤기(Varhegy)언덕 위에 자리한 네오 바로크 양식의 부다 왕궁은 부다페스트의 상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초기의 실내장식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1950년대에 현대식으로 복구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이 유물들은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부다 언덕에 처음 왕궁을 만들었던 사람은 벨라4세로 몽고 침입 이후에 에스테르곰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온 후에
방어적인 기능을 잘 갖출 수 있는 높은 지역에 만들었다. 지금은 당시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14세기에 여러 왕들이 새로운 왕궁을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룩셈부르크의 지기시문트 때에 고딕형태로 왕궁을 넓혔다. 그리고 성벽도 쌓았다.
마티아스 왕 시절(1458-90)엔 부다 지역과 왕궁이 황금기였다.
그는 고딕양식의 건물들을 르네상스 스타일로 변형했고 새로운 건물들도 가미했다.
궁전은 중부유럽의 문화, 예술,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거대한 도서관을 만들면서 학자들과 문필가들이 모여들었다.
오스만 제국시절 왕궁은 피해를 입었으며 도서와 궁전 내부의 물건들이 없어졌다.
1686년 기독교 연합국이 3개월간 포위했을 때 왕궁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부다에서 터키를 물러가게 만들어다. 그 뒤 오스트리아 합스브르크가 헝가리를 다스렸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는 203개의 방을 가진 큰 왕궁을 건설 했다.
그 후 이곳은 오스트리아 왕실에서 차지 하게 되었다.
186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형성 되었을 때 이곳에 지금의 세체니 도서관 건물을 설계 했고 1893년에 완성 했다.
그리고 돔을 올렸으며 지금과 같은 대칭형 건물은 1905년에 완성 한 것이다.
그러나 1944-45년에 공습으로 완전히 불에 탔다. 1950년대에 복구를 시작 했으며 복구하는 동안 묻혀 있었던 중세 왕궁 터가 드러났다.
그리고 내부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신 고전주의 양식의 돔을 올리고 다른 지붕들을 단순하게 하면서 1980년대에 완성했다.
현재 왕궁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헝가리 출신 화가들이 그린 역사적인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과 헝가리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 중 뭉카시의 작품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견줄 만큼 튀어난 솜씨로 그려져 있다.
또한 오래된 왕궁의 지하와 왕실에서 사용했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 일반에게 공개 하고 있다.
■ 세인트 이슈트반 대성당 (Szent Istvan Bazilika)
가톨릭 전파에 크게 기여해 성인의 반열에 오른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를 기념하여 세운 성당으로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이다.
1851-1905년에 걸쳐 약 150년이 소요되어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내부의 성모상 회화가 유명하다.
성당에는 성 시슈트반의 오른손이 보존되어 았다.
■ 어부의 성채 (Halaszbastya)
어부의 성채는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의 타워로 설계되어 있고 각 타워들은 수천년전에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하얀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차시 성당까지 뻗어있는 계단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어부의 성채는 1901년-1903년에 건축된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다뉴브강 요새로는 가장 오랜 것 중의 하나이다.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의 타워로 설계되어 있고 각 타워들은 수천년 전에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하얀색의 화려한 성벽과 마차시 성당까지 뻗어있는 계단은 아름답다.
이 곳에서는 다뉴브 강변의 아름다운 페스트 지구의 도시와 후방의 헝가리 평야가 넓게 펼쳐진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완성된 신 고딕양식의 어부의 요세는 마티아스 성당 재건 일환으로 만들어 졌다.
전해져 오는 것에 따르면 이곳 중세 방어벽은 어부 협동조합이 방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벽의 이름은 근처에 어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오늘날 이곳의 기능은 장식적인 기능과 다뉴브강을 바라 보기위한 것이 되었다.
이곳의 경관과 자연미와 건축미는 압권이다.
특히 동양적인 색깔이 짙은 꼬깔모자 모양의 첩탑들은 헝가리 조상들이 아시아 유목민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곳에선 국회의사당, 체인 브리지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페스트지역의 다양한 모습과 부다지역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1988년 이곳에서 보이는 부다페스트의 전체 모습은 유네스코가 제정하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어부의 요새에서 경관을 보는 것도 좋지만 어부의 요새를 멀리서 바라 보는 것 역시 좋다.
■ 영웅 광장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인 엥겔스 광장에서 영웅광장으로 이어지는 공화국거리를 걷다보면
헝가리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영웅광장에 도착하게 된다.
광장 중간에는 가브리엘 천사상이 높이 솟아 있으며 이 천사상 아래로 9세기 말엽에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었던
핀우르족의 일부인 마자르족을 이곳에 정착 시킨 아르파트의 조각상과 6명의 부족대표의 조각이 서있다.
■ 겔레르트 언덕 (Gellert hegy)
서울의 남산처럼 부다페스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왕궁의 언덕 남쪽에 있는 해발 235m의 바위산이다.
언덕 중턱에는 이 이탈리아의 선교사로서 이 언덕에서 순교한 겔레르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페스트 쪽에서 올려다보면 잘 보인다.
또 1848년 혁명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돌의 성체가 있던 곳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독립을 기념하는 뜻으로
14m 높이의 모스크바쪽을 향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기도 했다.
■ 국회의사당 (Orszaghaz)
부다페스트 엽서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건물 중 하나로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1884-1902년에 건축되었다.
뾰족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으며 건물 벽에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에는 691개의 방이 있고 광장 앞에는 헝가리의 영웅인 코슈트(Kossuth)와 라코지(Rakoczi)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부다 구 시청건물
건물지붕에 시계탑이 있는 것이 구 시청 건물은 이태리 건축가가 만들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었었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알 수가 없다.
2차 대전 때 폭격을 당해서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부다, 오부다, 페스트가 합쳐진 1873년 까지 부다 지역의 시청사였다.
시청 모퉁이에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다.
이 여신 방패엔 헝가리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왼손에 창을 들고 있다.
이것은 현재 모조품이며 진짜는 근처에 세워 졌었는데 지금은 페스트 지역에 있는 부다페스트 시의회 남문에 있다.
그런데 창이 손상되거나 심지어 누군가 훔쳐 가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조각상이 유명하게 되었는데
바로 헝가리 TV에 고용된 한 젊은 사람 때문이다.
그는 1980년 TV 프로그램 주제를 조각과 잃어버린 창에 대해서 만들어서 쇠퇴해가는 건축문화재에 대해 방영했다.
그 뒤 그는 정기적으로 같은 주재를 시리즈로 만들어 방영 함으로써 문화재 보호운동을 일으켰다.
이 아테네 조각이 운동의 주역이다.
■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1663-1736) 동상
1697년 젠타 (지금은 세르비아에 있음) 전투에서 오이겐 왕자가 터키와의 전쟁에 승리 해서 200년간 터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젠타 사람들은 기념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동상 건립을 위해서 복권을 발행하여 돈을 모았다.
동상제작은 1년 안에 완성되었지만 돈이 모자랐다.
그래서 이 조각 기획자가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자 황제는 동상을 구입 했고 부다 성에 세울 것을 명했다.
동상 밑에는 1697년 전쟁을 보여주는 모습이 있고 이동상을 조각한 Rona는 “이 동상이 새워진 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라고 썼다.
부다 성에서 보는 페스트 지역은 다 훌륭하지만 이 곳 역시 뛰어난 경관을 가진 곳으로 국회의사당과 체인 브리지 마가레트 섬 등을 감상하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