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초심닦기(13) / 위선환 (시인)
ㅇ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써지는 거라고 믿고 있고, 쓸 때마다 그걸 실감하거든요. 그냥 따라가다 보면 제 자신의 흐름이 멈추는 어떤 한계상황, 문턱이 오는 거죠. 자기가 쓰는 시가 스스로 지겨워지는 시점이라고나 할까요. 그걸 넘어가면 다른 시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두부나 무를 썰듯 확연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어서, 이쪽과 저쪽에 느슨하게 걸쳐있는 시들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문턱이라는 게 한쪽으로는 이쪽과 저쪽을 경계짓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거죠. 누구나 자신에게는 일관된 흐름이라는 것이 있는 거잖아요?
- 권혁웅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 9-10월호/ 대담에서
ㅇ .... '시적인 것'은 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나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어떤 현상이나, 아직 시가 되지 못한 시 이외의 것들까지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개념으로 시를 정의하자면, 시는 다양한 사물과 관념이 미세한 언어의 씨줄과 날줄로 만나서 이루어진 한 필의 천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시는 일정한 무늬로 고정되어 있는 옷감으로서의 천보다는 수시로 출렁거리며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물결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것은 시간이 지니고 있는 내적 유동성에 기인한다. 살아 있는 시는 스스로의 관습에 묶여 있거나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시를 이렇듯 유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시의 내부에 이미 '시적인 것'으로서의 열린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스스로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매우 다양한 주체와 대상을 향해 열려 있다. 따라서 시인이 시를 쓸 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적인 틀에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그런 시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좋은 시는 뚜렷한 이미지나 주체를 향해 응집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 다양한 의미와 상상력의 지평으로 스스로를 열어두는 문을 내장하고 있다.
- 박남희 / '현대시' 2008년 9월호
ㅇ 시는 당나라 시가 있고 그 다음에 송나라 시가 있다. 가령 당나라 이백이 있은 다음에 송나라에 와서 소동파가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시는 죽어버립니다. 당나라가 없어도 소동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태초성(太初性)이 있습니다. 애비가 없는 것입니다, 에미도 없고. 우주의 고아로 떨어진 것이 시인이고 시입니다. 그에게 애비가 있고 과거의 유산이 있다면, 유산의 흔적으로 머물 수 밖에 없겠습니다. 반영론으로서 시가 있다면, 그 시를 뭐하러 씁니까? 시는 그런 점에서 아주 거센 발기의 혁명이죠.
내 시가 연구대상이 되든 망각의 대상이 되든 개의치 않습니다. 인간의 문학은 유한한 행위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있는데, 이런 격려도 사실은 유치합니다. 철부지 같은 소리이지요. 그래서 내 시가 어떤 텍스트이기를 바랄 까닭이 없습니다. 박사논문, 석사논문들이 있지만 그것에 구애받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개작문제인데, 시사를 살펴보면 어떤 시인은 수십 번 고친 사람도 있습니다. 시집 자체를 여러 번 손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 개고행위를 그런 실례에 비추어서 견강부회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예술은 완성품이 아니라 예술의 미완성성, 거의 영원한 미완성성, 이게 무한한 매혹입니다. 모든 창조행위 자체의 미완성은 완성에 대한 허상을 성찰하게 만들 것입니다.
- 고 은 /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대담에서
ㅇ 이육사의 〈광야〉가 한국시단의 현단계에 시사하는 것이 있다면 특히 1990년대 이후의 길고 긴 내면주의가 그밖의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가능성을 습관적으로 막고 시인 각자의 상상한계에 의존하는 여러 실태에 대한 것이다. 세계는 언제나 또다른 세계를 찾는 역량에 의해서 넘어설 불안인 것. 결코 개인의 정서적 의식적 배설에만 안주할 수 없다. 시인은 한갓 티끌의 내면도 포착해야 하지만 그런 일로 화자(話者)의 닫힌 감옥에서 영영 길들여질 수 없다.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내면 만성에서 뛰쳐나오거라. 비록 사해(死海)라 하더라도 그대가 견디어낼 커다란 외부의 거친 파도를 헤엄쳐라.
- 고은 /2008. 8. 6, 창비주간논평 중에서
ㅇ 미래파 논쟁 중에서 아쉽게 생각했던 것은 반미래파들의 논점들 가운데 '어렵다' '모르겠다'라는 식의 언사였어. 시가 어려우면 나쁜 것인지, 평자가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사악한 것인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일군의 시인들을 묶어 놓고서 좋다/나쁘다로 구분 짓는 비평 양태가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알고 싶어. 세대론적이었든, 중앙과 지방의 권력 분쟁이었든, 지배 담론과 유통과정에 개입된 학연을 바탕에 둔 구시대적이었든 일종의 '쑈'였다고 봐. 미래파로 불린 개별 시인들의 미학적 성취도는 무시되었고, 그것이 일단의 패거리 구획하기 과정에 사장시킨 논자들을 기억해야 해. 나는 이천 년대 이후에 등단한 일군의 시인들이 보여준 활화산 같은 에너지의 분출이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 1930년대 시인들이 1920년대 시인들과 격절의 양태를 보이며 비약한 것처럼 이천 년대 시인들도 이전 시대의 시인들과는 절단면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진화의 점프를 보여준 사례로 기억되겠지.
- 장석원 / '현대시' 2008년 7월호 대담 중에서
ㅇ 우리가 기억하는 '제대로 된 파괴'는 전복에 매달리는 집착에서가 아니라 즉, 부정적 모멘트로부터가 아니라 창조에 여념이 없는 몰두에서, 즉 긍정의 모멘트로부터 오는 것들이 아닐까요? 제 아무리 독창적 시인이라 해도 암묵적으로 추수하거나 반목하는 시적 관습 없이 마냥 새로운 시를 써나가기는 대단히 어려운 노릇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시인의 곤경이란 미적 관습으로부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갱신하느냐 하는 것일 텐데, 역시 전복에 메달리는 '두뇌적' 계산보다는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가 결과적으로 파격을 낳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모든 파괴가 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파괴라는 말도 조금 지나친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복에 집착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겠지만 그나마 그것은 한없이 지루한 자기모방보다는 오히려 더 나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은 그것보다도 결국은, 새로운 대상의 발견과 그것에 대한 인식 가능성, 표현 가능성에서 오는 파격이, 비록 향수자에게 항상 적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복이나 해체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과 그에 적합한 방법을 찾으려는 모색이, 새것을 옛 틀에 담으려는 시도를 상대적으로 진부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파괴'에 버금가는 충격을 준다는 것입니다.
시에 산문성이 적극 도입되는 것은,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삶의 계기들을 한 순간의 음영으로 포착하려는 직관이, 이를 찰나적으로 응축하려는 언어와, 그 계기에 얽힌 다양한 의미연관들을 세세히 풀어내 보여주려는 언어 사이에서 진동하고 방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 자체가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 응축이 미진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거꾸로 확산은 나태해 보입니다. 결국 문제는 카오스적 삶의 양상을 충분히 풀어내려는 욕망과 이를 응축하려는 욕망의 충돌일 텐데요. 아마 '현대적 생활의 시인'이라면 응축과 확산의 임계에 대한 고민이 클 것이되, 그것을 또한 감당해야 하는 것도 자신의 일이겠지요.
- 조강석 / <현대한국시> 창간호(2008. 여름호)/ 대담에서.
ㅇ 저로서는 산문시라는 개념을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줄을 붙여 쓴 시를 산문시라고 하는데, 이건 편이적인 용법이지 정확한 용법이 아닙니다. 율독이 불가능한 시가 산문시죠. 줄이 붙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산문이 아닙니다. 운율이 살아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제게 보기에 음악을 낳는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음운적 자질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음상(音相)과 의미의 대응, 둘째로 같은 수의 음절 모음이 만들어 내는 소리 토막의 흐름, 셋째로 동일한 구문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느슨한 형태의 회귀, 이 세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의미와 관련지어 각 시에서 활용한 압운을 짚어내야 한다는 것, 정형성으로서의 음보가 아니라 한 편의 시 안에서도 자유롭게 변환되는 음절들의 묶음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부연, 삽입, 생략, 비약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구문의 틀 내에서의 변화로 살펴야 한다는 것, 이 세가지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산문시는 이런 운율적 요소를 갈래낼 수 없는 시를 말합니다.
- 권혁웅 /<현대한국시> 창간호(2008. 여름호)/ 대담에서.
ㅇ 김지녀 : 미래파라고 명명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기존의 시들과 정말 다르다, 새롭다, 혁신적이고 획기적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하위문화로 분류되었던 문화적 담론과 현상들을 시에서 적극적으로 얘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들의 시가 현실과 비현실, 진실과 거짓, 의미와 무의미, 의식과 무의식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시의 중심 그러니까 시를 짓는 기존의 문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분명히 있었다고봐요. 좀 다른 얘기겠지만, 미래파 담론에서 도출된 서정, 환상, 감각의 문제들이 저는 어쩌면 시를 담아내는 형식과도 연관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문 시형은 한국에서 근대시가 형성될 무렵부터 존재했지만, 시가 산문적인 형식으로 훨씬 노골화되면서 미래파 논쟁의 특징들이 전면화된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서 오래전에 토도로프가 환상을 이야기할 때, 시에서는 환상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했잖아요. 그 이유가 시에 리듬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최근의 시에는 리듬이 크게 고려되지 않고 시에 이야기가 삽입된다는 점에서 최근의 시에 환상이 개입할 여지가 커진 건 아닐까 싶거든요. 리듬을 고려하면서 말의 어감을 살려 쓰는 시 하고는 굉장히 다른 맥락인 것 같아요.
정한아 : 아마도 우리는 서사성이라기 보다는 극적인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슈타이거가 '문제적인 것'으로서 이야기하는 그 '극적인 것' 말이에요. 사실상 한국시사에는 외국시론에서 이야기하는 사물시의 전범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 힘들잖아요. 제 생각에는 대개 한국시에는 어떤 유형으로든 서사가 들어가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서사라고 하는 것은 담담하게 흘러가는 식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나 푸근하고 따뜻한 이야기, 모험에 관한 서사가 아니라, 80년대의 폭발적인 시의 범람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듯, 시 한 편 안에서 충격적인 장면이나 사실을 향해 달려가는 극적인 것, 그게 어떤 문제적인 것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지금은 다른 의미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사적인 문제들이 폭발하고 있죠.
- '현대시' 2008년 6월호 대담에서
ㅇ 시인은 누구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단어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경험하며 사유화하여야 한다. 시인이 정말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는 단어가 아니라 약간 면식이 있는 말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마치 외국어로 시를 쓴 것과 같을 것이다. 엇비슷하게 하려는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의미가 명확하지 않거나 잘못 표현되거나 유치해지기 십상이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명사나 형용사들은 비교적 쉽게 소유할 수 있다. 시인들이 추상명사를 사용하기 보다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과 감각적인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리라. 명사 형용사도 별로 가지지 못한 필자로서는 '부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시인이라면 부사, 조사까지도 하나하나 사유하고 경험하여 소유해야하지 않을까. 우연한 기회에 '곧'이라는 부사어를 갖게 되어 드는 생각이다.
- 이수정 /'시와 정신' 2008년 여름호
ㅇ 오늘날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의 대부분을 우리는 시가 자본의 논리와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찾는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시를 시되게 하는 것이다. 시가 영화의 기법을 도입하고, 만화나 사진을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언어 예술이라는 속성을 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문자를 매체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영상 매체 시대에 문자 매치는 그 위력을 발휘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러니까 시는 운명적으로 기술자본시대에 취약하게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쓰고 읽는 우리는 '시'에는 자본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신념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주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시의 시다움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다.
- 한명희 / '현대시' 2008년 여름호
ㅇ 객쩍은 항간의 희화적인 음담을 시로 쓴 것도 보였는데 도대체 '시정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런 언어유희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인지, 물론 유희본능에서 예술이 기원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가 단순히 유희 자체로 끝날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시는 언어의 보석이며,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라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더러는 시의 제목을 영어로 쓴 것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무조건적 경제 우선이라는 해괴한 세태 속에 휩쓸려 산다 할지라도 시인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서야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시의 본문을 영어로 쓰지 않는 것을 차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름지기 시인은 우리말의 최전선을 사수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 강인한 /2008년 포엠토피아 신인상 심사평 에서 / '시와시학' 2008년 여름호
* 위선환 시인 전남 장흥 출생 1960년에 서정주, 박두진이 선選한 용아문학상으로 등단 1970년부터 이후 30년간 시 절필하다가, 1999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 시집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탐진강』 『수평을 가리키다』 『시작하는 빛』 외, 합본시집 『나무 뒤에 기대면 어두워진다』 시 에세이집 『비늘들』 현대시작품상, 현대시학작품상, 이상화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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