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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되는 두 리더십
행 19:32-41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3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35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36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37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행 19:32-41 극장 안은 군중들이 저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떠들고 저 사람은 저렇게 떠들어댔기 때문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33) 알렉산더가 유대인들에게 떠밀려 군중 앞에 섰다. 그는 조용히 해줄 것을 부탁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34) 그러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안 군중은 다시 소리 지르며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 하고 두 시간 가깝게 떠들어댔다. 35) 결국 에베소 시장이 군중을 겨우 진정시킨 뒤 말하였다. `에베소 시민 여러분, 에베소가 위대한 여신 아데미와 하늘에서 내려온 신상을 숭배하는 도시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36)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진정하고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37) 여러분들이 여기에 데리고 온 이 두 사람은 여신의 신전에서 무엇을 훔쳐 내치도 않았고 또 여신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직공들이 이 두 사람을 고소할 생각이 있으면 법정이 열려 있으니까 재판관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러면 즉시 처리해 줄 것입니다.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39) 만일 그 밖에 또 다른 불평이 있으면 정기 시의회에 내놓으면 됩니다. 40) 오늘의 이 소동은 정당한 이유가 한 가지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만일 로마 정부로부터 문책이라도 당한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41) 그러고 나서 시장이 군중을 해산시키자 그들은 다 흩어졌다.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을 선동해 불법 모임을 주도합니다. 이에 이끌리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소리치는 무리들이 태반이나 되었습니다. 반면, 에베소시의 최고 행정 지도자 서기장은 흥분한 사람들을 지혜롭게 달래고 합법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음을 제시하며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이끕니다. 대조되는 두 리더의 모습입니다.
연극장에 몰려든 사람들(32-34) 연극장에는 데메드리오처럼 바울이 선포한 복음으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저항자들 뿐 아니라, 무슨 일인지 영문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나 몰려들었습니다. 여론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앞세워 이 분노를 진정시키고자 하나 알렉산더가 유대인인 이유를 들어 더 크게 소리칩니다. 이들의 외침은 두 시간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이 불법 모임을 주도하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서기장의 대응(35-41) 이 소요를 지켜보던 에베소의 행정책임관인 서기장은 지혜롭고 공평하게 이 일을 해결해 나갑니다. 우선 서기관은 에베소가 신의 도시로서 여전히 명예로움을 강조합니다. 아데미와 제우스는 바울의 주장처럼 ‘손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6). 에베소인들의 종교적 자부심을 세워주고자 함입니다. 그 후 에베소인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갑니다. 바울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비항하지도 않았으며, 로마의 법을 어긴 적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에베소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재판 날이 있고, 총독들에게 피차 고소 할 수 있는 제도도 있으며, 정식 민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합법적인 방법을 이용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 사건을 비교적 세세하게 기록합니다. 복음은 하늘의 것이며 초문화적인 실체이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세상의 문화와 법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훼방과 반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속해 있지만 땅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누구보다도 법을 존중하고 시민의식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야 할 이유는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가 거침없이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적용: 복음만을 위해 산다며 나라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일들은 없습니까? 오늘 당신이 지혜롭게 행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가장 잘 사는 삶은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삶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시니 옛 습관이 남아있지만 결코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실패한 순간 다시 예수가 사시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주인 되어 사는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호크마 주석
=====19:32
태반이나...알지 못하더라 - 이 집회는 불법 집회(40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는 채 모여있었다. 소요를 선동한 데메드리오는 결정적인 순간에 슬그머니 뒤로 빠져버렸고 그와 함께 행동하던 동료들도 특별히 나서지 않는다. 군중들은 분노 가운데 하나로 뭉쳤으며 아데미에 대해 불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켰지만 일의 자초 지종을 알지 못해 혼선을 빚고 있었다. 분노에 찬 사람들 대부분이 영문을 몰라한다는 본 구절의 표현은 저자 누가가 지니고 있는 헬라의 풍자적인 유우머 감각을 잘 반영해 준다(Bruce).
=====19:33
알렉산더를 권하여...발명하려 하나 - 알렉산더라는 이름은 유대인 사회나 헬라인 사회에서 흔했다. 본 구절의 알렉산더가 딤전 1:19, 20이나 딤후 4:14의 알렉산더와 동일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군중들은 유대인의 신분인 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어냈다. 그는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해서 변명하려고 온 사람이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배척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 양자는 모두 우상 숭배를 배격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가 자신들에게까지 파급될 것을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알렉산더를 보냈던 것이다(Bruce, Longenecker).
=====19:34
유대인인줄 알고...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 군중들은 알렉산더가 자신들 앞에서 변명을 시작하려 하자 큰 소리로 외쳐됨로써 그를 저지하였다. 군중들은 그가 유대인로서 자신들을 변명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군중들의 외침 때문에 유대교의 입장을 변론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에베소 사회 내에서 유대교가 얼마나 무력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Haenchen). 한편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군중들의 외침은 한번 시작되면 거침없이 휩쓸려 버리는 전형적인 군중 심리를 보여줌과(Lenski) 아울러 이러한 광신성은 아데미 신전의 제사장 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아데미 신전의 대제사장이나 그 밑의 제사장들은 모두 환관(宦官)이어야 했다.
=====19:35
서기장 - 로마의 임명을 받은 관리는 아니었지만 자유 도시 의회롤 통해 선출된 의회의 최고 서기이며 최고 행정 관리였다. 이 서기장은 본토 출신의 관리이기 때문에 담당 지역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래서 본문의 서기장은 이번 소요 사태가 앞으로 에베소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일단 진정시킬 방안을 모색하였다. 에베소 사람들아...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 '전각지기'란 뜻의 헬라어 '네오코로스'(* )는 '신전 청소부'라는 뜻을 지니나 '신전과 신을 섬기는 의식을 담당하는 수호자'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당시 에베소 사람들에게 매우 명예와 자부심을 반영하는 말이었다. 서기장은 무리를 안정시키고자 군중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그들의 자부심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서기장의 이 말 가운데는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아데미 여신상으로 섬기는 에베소 사람들의 몽매한 신관(神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19:36
너희가...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 에베소인들이 그 도시가 아데미와 쓰스의 전각지기라는 사실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서기장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에베소는 이미 아시아 전역에 아데미의 도시로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 아데미를 숭배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군중들의 행동은 근거없는 경솔한 행동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서기관이 기독교에 대한 변호자로 나선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단지 로마범과 질서의 수호를 위해 개입하였다고 이해된다. 그는 에베소가 무질서하고 불법 행동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행여나 생겨날까봐 우려하였다(Howard Marshall).
=====19:37
도적질하지도...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 - 이 사람들은 곧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가리킨다(29절). 서기장은 이들이 잡혀온 데 대한 구체적 혐의가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논지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성전에서의 도적질이나 신성 모독은 당시 이방 사회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제일 많은 고발 사유였다고 한다. 한편 롬 2:22에서 바울은 이방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19:38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 당시 재판은 회기(session)에 따라 열리든지 기타 정규적인 개시일에 열렸다. 그리고 아시아는 당시에 총독의 주재 하에 있었으며 간혹 총독이 주재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때때로 로마 총독이 출장하여 재판을 주재하거나 기타 사무 일체를 보고받곤 하였다. 따라서 서기장의 주장은, 사적인 문제로 소송건이 생길 때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한편 '총독들' ( , 안뒤파토이)이라는 복수형은 예외적이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관할 지역의 총독은 1인이기 때문이다. 이를 혹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총독 유니우스 실라우스(Junius Silaus)를 암살한 두 사람(Helius, Celer)이 아시아에서 권력을 행사한 사실과 연결시킨다(G.S. Duncan). 하지만 이 복수형의 표현은 단지 '총독들같은 사람'이라는 정도의 일반화된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Howard Marshall).
=====19:39
그 외에 무엇을...민회에서 결단할지라 - 당시 이 민회는 시의원들과 평의원들로 구성되었으며 시민들에게는 합법적으로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 민회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세 번 열렸으며 모일 때마다 도시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며 그 도시의 행정 사무 일체를 논하였다.
=====19:40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 서기장은 본토 출신의 관리였기 때문에 그 지역의 소요에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엄하게 져야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식의 이유없는 불법 집회로 인하여 집회에 참석치 않은 사람들과 로마 당국의 미움을 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실 이 소요와 집회는 개인적인 이기심과 음모에 의해서 비롯된 것으로서 구체적 이유나 근거도 없는 충동적인 소요 사태였으며 군중 심리에 의해서 모이게 된 불법 집회였다. 결론적으로 데메드리오의 음모와 요구는 거부되었으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41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 서기장의 논리적이고 합당한 연설은 군중들을 자진 해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위기적인 상황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무사히 끝났다. 바울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으면서도 다급한 상황은 진정되었다. 한편 저자 누가는 이방 세계 가운데서 기독교의 호교적(護敎的)인 요소를 매우 비중있게 다루는데 여기서도 그는 서기장의 연설을 심도있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누가의 집필 태도는 다섯 차례에 걸친 바울의 호교적 변론에 대한 기록에서도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 설 교 >
경솔히 아니 하여야 하리라
신성종 목사 / 행 19장 33~41절
금년 갑신녀의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경솔함으로 인해서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는 성공적인 한해가 되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전도로 인해서 에베소가 소동이 일어나서 온통 시가 요란하게 되었을 때에 서기장이 무리의 소요를 경솔히 처리하지 않고, 저들을 안돈시켜 마침내 41절의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는 말씀대로 평정을 회복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3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경솔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한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경솔하다는 말은 원문의 뜻을 보면 ‘성급하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영어에서도 경솔하다는 말은 ‘rash’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영어의 ‘rush’ 재촉한다, 서두른다는 말과도 어원이 같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성급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빨리빨리’란 말을 많이 쓰는지 ‘빨리빨리’ 라는 말은 이제 세계적으로 쓰이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빨리빨리’란 말이 우리 민족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업도 빨리빨리, 건축도 빨리빨리, 밥 먹는 것도 빨리빨리, 모든 것이 빨리빨리 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길들을 보면 일년 사철 다시 수리하다 맙니다. 전화선 깐다고 길을 파고, 지하수가 막혔다고 길을 파고, 가스관을 묻는다고 또 파고, 수도관이 막혔다고 또 길을 파고, 그래서 일년 내내 길을 파고 수리하다가 시간만 다 보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합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 경솔함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경솔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한 성경의 경우
1. 먼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경솔하여 실수한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으면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는데 그는 아내의 말대로 하갈을 첩으로 맞아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결국 오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의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창세기 12장에 보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생겼을 때에 기도하고 결정하지 않고, 경솔하게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하였고, 20장에 보면 그랄에 갔을 때에도 일시의 위험을 피하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지어 하나님이 아비멜렉 왕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다 아브라함의 경솔함 때문이었습니다.
2. ‘에서가 경솔히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경우’(창 25:34)를 먼저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장자권은 크게 두 가지의 권리를 가집니다. 첫째는 물권입니다. 장자는 다른 자녀들보다도 두 배나 많은 재산을 받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장자가 다른 자녀들의 몇 배가되는 재산을 가집니다. 소위 종주가 되면 조상들의 제사와 상속된 선산과 재산을 관리합니다. 게다가 둘째로 장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녀들을 축복하는 영권을 가집니다. 이렇게 물권과 영권의 두 가지를 가지기 때문에 장자가 되는 것을 야곱은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런 장자의 권한에 대해서 무지했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을 경솔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동생에게 장자권을 경솔하게 팥죽 한 그릇에 빼앗기는 불행을 맞게 된 것입니다.
3. ‘사울 왕이 경솔하게 번제를 드린 경우’(삼상 13:13)도 경솔함의 한 경우가 됩니다.
사울 왕의 죄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과 솔로몬도 번제를 드렸지만 그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울 왕이 비난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울 왕이 사무엘 선지자가 7일 동안을 기다리라고 한 명령을 거역한데 있습니다. 요컨대 사울 왕이 책망을 받은 것은 그의 참지 못함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참지 못하고 번제를 드린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신앙심이 부족한 데 있었습니다.
당시 사울 왕은 극한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극한은 항상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한 단 한번도 군대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헌신된 사람들의 용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두려워한 나머지 번제를 드린 것은 그의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었습니다.
4. ‘입다의 경솔한 서원 기도의 경우’(삿 11:30-39)도 잊어서는 안 될 경우입니다.
사사인 입다는 본래 깡패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에 삿 11장 31절의 그의 서원 기도는 이방인들의 방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서원 했습니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제일 먼저 집 문에서 그를 영접하는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무남독녀인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신의 서원대로 딸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입다가 딸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한 것이고, 입다의 경우는 자기의 기분대로 자기가 결정한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 것으로 끝났으나 입다의 경우는 딸을 죽이는 것으로 끝났습니다(삿 11:39).
5. 끝으로 ‘모세가 애굽인을 죽인 경솔한 행동’(출 2:11-12)은 감정에 치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인본주의적인 자체를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의 한 사람을 친다고 그것을 살인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경솔한 행동이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은 전혀 생각지 않고, 사람들이 보는가 안 보는가 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비슷한 행동은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것(요 18:10)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칼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열심 당원들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만약 무력이 필요하다면 내 아버지께서 열 두 영(로마의 6000명에 이르는 군단을 말함)이 더 되는 찬사를 보내시지 않겠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베드로의 인간적 경솔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경솔함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경솔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2. 우리가 경솔히 아니하려면?
1. 경솔하지 않으려면 ‘상식 보다 앞서 가지 않고’, 이성보다 앞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중요한 삶의 표준입니다. 35절에 보면 당시 ‘민회의 장’인 서기장이 바울의 문제를 군중들의 감정에 의해서 해결하지 않고, 송사할 것이 있으면 고소하여 법적으로 해결하고, 그보다 작은 일이면 민회에서 질서 있게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이 모인 것은 마치 인민재판처럼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들이 불법적으로 모여서 감정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강원도 만한 아주 좁은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처럼 모든 일을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2절에 보면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생각도 하고,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하여 반성도 하지만 그러나 대중은 생각을 하지 않고, 대중 심리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경솔해지기 쉽습니다. 데모나 전쟁이 바로 이런 집단적 감정주의로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최근에 ‘파괴’란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윤리파괴, 가격파괴, 성 파괴 등. 요즈음 광고를 들으면 쌀 한 포대에 99cent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물론 때때로 변화를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파괴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빌게이츠가 컴퓨터로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고, 일본 Sony 회사가 세계적이 기업으로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고정관념의 파괴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경솔함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2. 경솔하지 않으려면 ‘기도보다 앞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한 주간 신년 특별 기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 기도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달라고 기도하고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아무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도록 할 때에 그것이 참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론은 하나님께서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감람산에서의 기도가 바로 그런 대표적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네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의 실수도 기도보다 앞서 갔기 때문이고, 에서는 아예 기도한 적이 없고, 사울 왕도 기도하지 않고 했기 때문에 결국 경솔하게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모세 당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결단코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뒤를 따라서 가야지 앞서 가면 안 됩니다.
3. 경솔하지 않으려면 ‘말씀보다 앞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시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빛은 앞에 두고 따라가면 환할 뿐 아니라 그림자가 뒤에 생기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빛 보다 앞서 가면 앞에 큰 그림자가 생겨서 길을 잘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빛인 말씀 뒤를 따라 가야지 앞서 가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 기근이 왔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말씀보다 앞서서 애굽에 갔습니다. 그때에 아내까지 바로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말씀보다 앞서 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를 보면 콜럼버스는 금이 없어서 그의 굶주리는 아이들 위해서 빵을 구걸했습니다. 그는 부족함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향하여 금보다 귀한 새 대륙을 주었습니다. 불란서의 밀레라는 화가는 금도 은도 없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가난으로 쪼들렸지만 그러나 그는 만종과 이삭줍기 같은 아름다운 그림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The Angelus’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줄 금이 없어서 그의 아내와 딸이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은 미국에서 최고의 깊이를 가진 위대한 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금도 은도 없었습니다. 목수로서 생계를 이었고, 때로는 남들에게서 빵을 얻어 잡수셨습니다. 게다가 원수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으나 그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말씀을 통해서 영원한 진리를 남기셨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영원한 발자국이 되었습니다.
4. 경솔하지 않으려면 ‘주님보다 앞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따라 가면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377장 1절).
(예 화) 여러분 세계에서 제일 가는 하버드 대학의 규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규칙입니다. 1646년에 결정된 규범입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은 그의 삶과 연구의 목적을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두어야 한다.
둘째로 주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알고, 기도로 주님께 간절히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셋째로 하루에 두 번씩 성경을 읽어서 거기에서 이론적, 영적 참된 진리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17세기에서 하버드를 졸업하는 52%의 학생들이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맺는 말
“성급함이 일을 그르친다”는 영미의 격언도 있고, “작은 그릇이 쉬 끓는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민족의 단점인 경솔함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 되고, 말씀이나 주님보다 앞서서는 안 되고, 말씀이나 주님보다 앞서 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치 에베소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처럼 감정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경솔히 갈 위험성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없어 아무리 급해도 열 달도 되기 전에 아기를 엄마의 배에서 끄집어내면 결국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고, 아이의 생명은 위험한 것처럼 우리도 경솔히 일을 처리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솔히 하지 않고, 모든 것은 기도한 뒤에 결정하고, 오직 말씀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종하므로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가는 자는
신성종 목사 / 행 19장 33~41절
한국 정계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하나는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치만은 아니고, 인생도 줄을 잘서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소속을 잘해야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선후배 관계의 소속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은 영적으로도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과 함께 가는 자가 되자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대로 에베소의 소요가 끝난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를 지나 수리아로 가려고 할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는 공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 속에서도 바울과 함께 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요절은 바로 4절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4절에 나오는 일곱 사람의 이름은 교회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중에 우리가 아는 사람은 디모데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다 무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 역사 상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고, 또 천국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소바더’라는 사람은 로마서에 보면 ‘소바시더’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베뢰아 교회의 높은 직위를 갖게 되었고,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을 위임받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나오는 ‘아리스다고’는 빌레몬서 14절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마가와 나란히 이름이 나올 정도로 큰 일군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나오는 ‘세군도’라는 인물은 다른 어떤 곳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본문의 내용을 볼 때에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로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네 번째 ‘가이오’란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으로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로 ‘디모데’는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제자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여섯 번째는 ‘두기고’란 사람입니다. 에베소 6장 21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드로비모’가 나옵니다. 그는 에베소 출신으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사람입니다. 딤후 4장 20절에 보면 그가 병들므로 바울은 그를 밀레도에 그냥 두었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죽은 자도 살리는 권능이 있는 사람인데 그의 제자인 드로비모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보면 신유의 은사는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때만 역사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오늘은 이들을 중심으로 ‘함께 가는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먼저 주님과 함께 가는 자는 ‘행복하고, 성공’합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456장 1절). 한분의 사람 ‘인’자(인)를 보면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글자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주님과 함께 할 때에 행복하고 성공합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마슬로우는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존의 욕구, 둘째는 안전의 욕구, 셋째는 소속의 욕구, 넷째는 존귀함의 욕구, 마지막으로 자아 성취의 욕구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제목인 함께 가는 자란 말은 바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속의 욕구’를 말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 속하여 주님과 함께 가면 우리는 행복하고 성공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성공한 기록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넘치도록 있습니다. 하와는 ‘아담과 함께 하지 않는 동안에’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또 가인은 부모와 함께 하지 않는 동안에 들에서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영성을 상실하여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홍수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형통하였고,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애굽에 갔을 때에는 위험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경우를 보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에는 많은 샘물을 팠습니다. 목축업자들에게는 샘은 생명선입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이 우물을 네 번이나 팠다고 했습니다. 18절에 한번 팠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매웠습니다. 21절에 보면 또 우물을 봤는데 다투는 것을 보고 포기했습니다. 22절에 보면 또 우물을 팝니다. “다른 우물을 팠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장소를 넓게 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했습니다. 그 인내와 관용은 그로 하여금 큰 목축 기업가로 성장시켜주었습니다.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부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결혼은 차라리 혼자 사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21장 9절에 보면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는 것이 항상 나은 것은 아닙니다. 또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친구요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서 싸우는 입장이라면 차라리 헤어지는 것만 못합니다.
성경에는 잘못된 사람과 함께 하므로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노인들이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강경책을 결정함으로 결국 아버지가 넘겨준 나라를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또 아합 왕은 이세벨이란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는 두로 왕의 딸인데 신당의 여 선지자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 아합 왕 자신이 바알 숭배자가 되었고, 결국 함께 한 아내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왜 성공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인내심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청지기인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고, 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거짓말도 꽤 단수가 높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라고 칭찬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은 그가 선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실 그는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왜 그런데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믿습니까?
2. 주님과 함께 갈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1. 주님과 함께 하면 먼저 ‘영광’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도 우리가 함께 받게 됩니다. 골 3장 4절에 보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영광을 받아 누릴 그릇을 준비케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이란 것입니다. 고난에는 죄로 인한 고난도 있습니다. 이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할 그릇 준비의 고난은 많이 받을수록 복이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함께 고난도 함께 주십니다. 빌 1장 29절에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왜 고난을 주십니까? 영광을 위한 그릇준비와 함께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자로서는 가장 많은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받은 최고의 학위는 박사학위가 아니고, ‘고생 졸업장’입니다.
2. 주님이 함께 하시면 ‘겁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359장 1절). 저의 집 강아지는 혼자 있을 때에는 큰 개가 오면 도망하고, 피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함께 있을 때에는 얼마나 악착같은지 몇 배 큰 사냥개에게도 덤벼듭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만 함께 있으면 저보다 큰 아이들보고도 겁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굽신거립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모든 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을 때 세상에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믿습니까?
겁만 없습니까? 강성해집니다. 대상 1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3. 영적인 ‘고독’이 없어집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고독이 있습니다. 남녀가 혼자 살면 성적인 면에서 외로움이 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친구가 없을 때 사회적 외로움이 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분들은 하다못해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함께 있어야 외로움이 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외로움은 하나님을 떠날 때 오는 영적 고독입니다. 이 공간은 오직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가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김이 필요합니다. 창 2장 7절의 말씀처럼 생령이 되어야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은 해결됩니다.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를 영접해” 믿습니까?
4. 주님과 함께 하면 ‘참 행복’이 옵니다.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인간의 참 행복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면 참 행복은 옵니다. 이 행복의 극치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롬 6장 8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최대 문제가 죽음의 문제인데 주님과 함께 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다시 육체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을 누립니다. 할렐루야!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의롭다함’을 받을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잘 했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심판하실 때, 잘 했다 칭찬하리니 이러한 상급 받도록 예수를 위해 삽시다.”
3. 그러면 어떻게 주님과 함께 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라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왜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따라서 주님과 함께 가는 첫 번째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인간으로서는 결단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영성을 회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것은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땅만 바라보는 자연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먼저 거듭나서 육신의 내가 죽고 영적인 내가 살아나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교통을 해야 합니다. 교통은 말씀의 묵상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셋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삶의 목적을 하나님 영광을 위하고, 방법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제자란 말의 뜻은 “따르는 자”, 혹은 “함께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유명한 지상명령의 핵심을 보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자를 삼습니까? “너희는 먼저 가서” 즉 전도하고, 다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즉 교회 성장시키고, 다음에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요, 제자훈련입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했습니까? 주님의 하시던 일을 승계할 뿐만 아니라 그 중에 하나는 함께 있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이처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끝으로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 1:33). 임마누엘의 삶은 사실은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순종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생은 제 멋대로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체면을 세우려고 하고, 공적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보다는 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왕국보다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줄을 잘서야 합니다. 따라서 승리자이신 주님과 함께 가므로 항상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참 기쁨과 성공과 열매를 맺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주 없이 살 수 없네”(415장)라는 찬송이 진심으로 드리는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행 19:32-41 /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영문을 모른 채 선동된 사람들
테메드리오에게 선동당해 분노한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의 동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모인 무리는 자신들이 왜 모였는지 알지 못했고, 여론에 맹목적으로 휩쓸렸습니다. 알렉산더와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바울의 무리와 다르다고 변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인 무리는 두 시간동안 자신들의 우상을 향한 기도문을 외치며 유대인의 변론을 무시했습니다. 우리는 허무한 것을 소리치는 사람들에 휩쓸리지도, 세상과 타협하여 변명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참된 생명의 진리를 외치고, 진정으로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으로 굳건히 서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거짓된 세상의 여론에 휩쓸린 성도를 만난 적은 언제입니까?
세상이 자랑하며 소리치는 우상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문제를 해결한 서기장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잡아온 사람들에게 명백한 범법 사실이 있다면 고발과 재판을 통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아무 까닭 없이 소요를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누구도 책망을 받지 않도록 지혜로운 말로 모임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바울의 동료들은 세상의 지도자와 사회의 법을 통해 안전하게 구출받았습니다.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놀라운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내십니다. 진리의 말씀에 중심이 있는 성도는 모든 권세를 세우시고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이 이루실 화평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의 만나
뜻밖의 사람과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된 적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은 어떻게 다릅니까?
한국 교회와 함께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밴드왜건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밴드왜건은 어떤 곡예나 퍼레이드가 있을 때 가장 앞서 나가며 음악을 연주하는 차량을 뜻합니다. 행렬의 가장 앞에서 요란하게 음악을 울리며 나아가는 차량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오게 되죠. 이러한 모습을 밴드왜건효과라고 말합니다. 더 친숙한 예로는 “야! 요즘은 이게 유행이래, 다들 이거 하나씩은 갖고 있어”라고 말하면 왠지 모르게 나도 하나쯤은 사야할 것 같은, 함께 따라가야할 것 같은 그런 심리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많은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아데미 여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모두 격분한 상태였죠. 그러나 정작 ‘왜 이곳에 모였는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 채 그저 아데미의 이름만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헛된 것을 외치며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가 되길 위해서는
첫째,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분노하여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모인 이들 중 태반이 왜 모였는지도 모른 채 그곳에 있었던 겁니다. 32절입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많은 사람이 모여 어수선한데, 왜 모였는지를 모릅니다. 34절도 한 번 볼까요? ‘…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무려 두 시간이나 “크다 아데미 여신이여”를 외쳤는데, 무슨 일인지 모른 채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세상은 우리를 분주하게 만듭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분주한지도 모른 채,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살아가게 만듭니다. 본문 속에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혹 우리 역시 세상의 것을 외치고 있진 않습니까? 성도는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죠. 한 번 뿐인 인생 그것을 즐기는데 집중하라고 외쳐댑니다. 즉,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이 아닌 헛된 것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휘몰아치는 세상의 시류 속에 말씀의 안전벨트를 더욱 든든히 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세상의 위협은 성도를 해하지 못합니다. 성난 군중들로 인해 온 시내가 요란했습니다. 앞선 31절에서 바울의 친구였던 한 관리는, 혹 바울이 폭동에 휘말리게 될까 염려하며 그를 만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혼란한 중에도 성도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35절에 한 서기장이 등장합니다. 서기장은 공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도시의 최고 행정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서기장은 성난 군중들 앞에서 ‘지금 이 모임은 불법 집회이며, 로마 정부로부터 문책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다’라고 외치죠. 40-41절입니다.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서기장의 말 한마디에 성난 군중이 즉시로 잠잠해지고, 집회가 해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국가의 권력과 이 땅의 법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하나님 손에 붙들린 도구가 됩니다. 로마라는 그 거대한 세력도 하나님께는 한낱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로마 정부에 문책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두려워하며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로마보다도 크고 두렵고 능하신 분이시죠. 그렇기에 사탄이 제아무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 할지라도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공중의 권세를 뛰어넘어 성도를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혹 성난 군중들처럼, 내 앞에 있는 거대한 문제와 위협으로 인해 두려움 중에 계신 분 있으십니까?
눈앞의 문제가 아닌, 그 문제보다 크고 능하신 하나님을 보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세상에 속지 않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담대히 살아가게 하소서. 크고 능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