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와 꽃 이야기
십일월 첫째 토요일이다. 새벽녘 잠을 깨 한문학자 심경호의 ‘옛 그림과 시문’을 마저 읽었다. 저자는 한문학자로 명성이 드러난 만큼 우리나라 고서화 귀퉁이 적힌 시문의 해석에도 아주 밝았다. 이와 같은 성격의 서책을 몇 권 읽은 바 있지만 이 책을 계기로 선인이 남긴 그림에서 당시 풍류객의 멋을 곁눈으로나마 한 번 더 엿보게 되었다. 옛 그림에는 그에 걸맞은 시문이 따랐다.
날이 밝아올 때 음용하는 약차를 달여 놓고 엊그제 고향에서 보내온 대봉감 홍시를 소재로 시조를 남겨 지기들에게 날렸다. “풋감이 여물어서 맛 들면 단감 되고 / 떨감은 홍시로나 깎아서 곶감 말려 / 겨우내 간식거리로 두고두고 먹는다 // 대봉감 산지로는 덕실도 이름 난데 / 올 작황 부진해도 홍시가 보내져 와 / 물커덩 입으로 베자 꿀맛처럼 달았다” ‘대봉감 홍시’ 전문이다.
강수가 예보된 날이라 하루 내내 도서관 보낼 작정인데 집을 일찍 나서기 미적댔다. 토요일은 집 근처 농협 마트에서 알뜰 장터가 열려 거기로 나가 시장을 봐 둘 게 있어서다. 집에서 간식으로 먹는 고구마가 동이 나서 한 박스 사 옮겨 놓아야 했다. 장터로 가니 매대 진열이 덜 되어 한동안 뜸 들여 기다렸다가 고구마 한 박스와 신선해 보이는 시금치와 윤이 나는 가지를 사 왔다.
집으로 짐을 옮겨 놓고 배낭에 든 책을 둘러메고 반송 소하천 따라 걸어 원이대로를 건너 폴리텍대학을 캠퍼스를 거쳐 갔다. 교육단지 공업 전문계 학교와 나란한 창원도서관으로 들었다. 이전에 도서관으로 나갔던 때보다 1시간 가량 늦어 지정석으로 앉았던 창가 자리는 한 소년이 차지해 나는 그 곁 자리로 밀려났다. 배낭을 벗어두고 신간 코너 서가로 가서 읽을 책을 살펴봤다.
전번에 봐둔 이극로 전집은 모두 4권인데 첫 번째가 대출 중이라 다음에 들러 읽을까 했다. 그러면서 2권을 꺼내 중간의 한 페이지를 열람했더니 1920년대 말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일시 귀국했다는 조선일보 기사가 발췌 소개되어 있었다. 이극로 전집은 대출된 1권이 돌아오면 앞부분부터 읽으려고 미루어 두고 다른 책들을 살펴봤다.
현직 중견 언론인으로 문학 작품에 나오는 꽃에 해박한 김민철의 ‘꽃으로 토지를 읽다’를 먼저 골라냈다. 그는 야생화와 문학을 사랑하는 기자로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 외 다수 저서를 남기고 있다. 김민철의 책 외에도 원철 스님이 쓴 책과 한시를 풀어 놓은 책 외에 최근 간행된 두 권의 시집도 뽑아 아까 정해둔 자리로 와 김민철의 토지에 나오는 우리 꽃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토지’는 5부 25권의 대하소설로 나는 여태 완독하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함에도 지난날 교단에서 고3 문학 시간 수능 대비 지문으로 수록된 문제를 분석 지도하기도 했다. 저자는 바쁜 직장 생활에도 토지를 완독하고 작가가 등장인물과 결부시켜 엮어낸 꽃 이야기를 현장감 있게 풀어내 감탄했다. 길상이를 상징하는 파초와 용이와 월선이 사랑에는 섬진강 키 큰 버드나무도 나왔다.
점심때가 다가와 집으로 가져가 읽은 하기주의 ‘목숨’ 1·2권과 심경호의 ‘옛 그림과 시문’은 반납시켰다. 별관 책담에서 본관 휴게실로 건너가 점심은 컵라면을 불려 간단히 때웠다. 지난번 도서관 걸음에는 삶은 고구마도 가져와 먹었는데 어쩐지 허전해 자판기 커피를 내려 마셨다. 주말을 맞아 아이를 대동한 젊은 부모와 청소년들도 도서관을 찾아온 이가 보여 믿음직스러웠다.
점심 식후도 별관 책담으로 올라 토지 속에 나오는 김민철의 꽃 이야기에 빨려들어 계속 홀렸다.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서희는 탱자나무 같은 여인에 비유되기도 했다. 능소화가 최참판댁을 상징하는 꽃이긴 하지만 작품 결말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감격한 서희는 가시 범벅인 해당화를 휘어잡고 주저앉았다. 등장인물과 결부시킨 풀꽃과 나무는 죄다 내게 익숙한 자연물이었다. 23.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