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89yWuDZT4Q?si=ognV1khyQGj9crkJ
생애
1월 31일 교사이며 견실한 가톨릭교도인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와, 슐레지엔지방 출신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운 뒤, 리히텐탈교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 M. 홀처에게 사사하였다. 홀처는 슈베르트의 재능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 해도 이 아이는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1808년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황실왕립신학교의 합창대원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A. 살리에리 등 당시 일류작곡가의 가르침을 받음과 동시에 친구 J. 슈파운이 조직한 학생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뒤에 지휘자를 지냈다. 또 방학 때는 아버지·형들과 현악 4 중주곡을 즐기며 여러 음악체험을 쌓았다. 13년 신학교를 떠나기까지, 이미 도이치번호 82(이하 D로 약칭)의 교향곡 제 1 번, 현악 4 중주곡, 가곡 등을 작곡하였다. 집에 돌아온 슈베르트는 사범학교를 다닌 뒤, 16년까지 아버지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내성적이어서 교직은 힘들었으나 작곡면에서는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814년 리히텐탈교회에서 작곡자 지휘 아래 연주된 미사곡 F장조(D105),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D 118)》, 15년에는 가곡 《방랑자의 밤의 노래 Ⅰ(D 224)》 《들장미(D 257)》 《마왕(D 328)》 등이 있다. 슈베르트의 작품에 반한 친구들이 모여, 그의 음악을 즐기는 슈베르티아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8년과 24년 2회에 걸쳐서 J. 에스터하지백작의 집 음악가정교사로서 헝가리의 젤리츠에 초대되었다. 백작의 딸 마리와 칼로리네를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헝가리에 체류하는 동안 연탄용(連彈用)피아노곡 《헝가리의 디베르티멘토(D 815, 작품 54)》를 작곡하였다.
1816년 친구 F. 쇼버로부터 당시 유명한 오페라가수 M. 포글을 소개받았고, 이로 인해 슈베르트는 19년 오페레타 《쌍둥이(D 647)》를 작곡했다. 그러나 다른 극장작품과 같이 이것도 몇 회 공연되었을 뿐 잊혀져 버렸다. 그의 이름은 오히려 21년 《마왕》이 작품 1로 출판되자 가곡작곡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포글은 이 시기, 슈베르트의 가곡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22년 작곡된 《미완성교향곡(D 759)》은, 보통 교향곡이 4악장인 데 비해 제 2 악장까지밖에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왜 미완성으로 끝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최근에는 22년 말에 발병한 매독 때문이라고 본다.
23년 병고 가운데 작곡된 가곡집이, 물레방앗간 직인의 슬픈 이야기인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D 795, 작품 25)》이다. 그를 괴롭히는 병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명성은 차츰 오스트리아 국외로도 퍼져갔다. 25년에는 베를린에서 당시의 유명한 여성가수 A.M. 하우프트만이 《마왕》을 노래했으며, 슈베르트는 영국 작가 W. 스콧의 시 《호수의 숙녀》를 작곡한 《엘렌의 노래(D 837∼839, 작품 52)》(제 3 곡이 유명한 《아베마리아》에 영어 가사를 붙여 출판했다.
27년 제 5 곡의 《보리수》를 포함한 가곡집 《겨울나그네(D 911, 작품 89)》를 작곡, 28년 3월에는 자작만으로 콘서트를 열어 성공을 거두고, 그 후 교향곡 《그레이트(D 944)》, 현악5중주곡(D 956), 가곡집 《백조의 노래(D 957)》 등의 대작을 완성시켰지만, 그해 11월 19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유해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빈의 베링묘지 L. 베토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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