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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1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우리는 좋은 땅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 어른들이 들려주었던 재미있던 옛날 얘기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성과 한음의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한음이 일곱 살이 되던 여름이었는데 오성과 같이 시골 외갓집에 갔다가 동네 친구들과 같이 이웃 마을의 구두쇠 영감네 수박밭에 수박을 서리하러 갔답니다. 먹음직한 수박을 찾았어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제일 좋아 보이는 수박도 너무 맛이 없어서 뱉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같이 수박서리를 간 친구들은 구두쇠 영감이 거름 줄 돈도 아끼느라고 밭이 메말라서 수박이 맛이 없고, 변변하게 크지도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리한 수박을 전부 메 때려 깨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성과 한음은 그날 밤에 수박 밭에 다시 가서 수박에 모두 말뚝을 박았다고 합니다. 구두쇠 영감은 대감 집 도련님들이 그런 장난을 하였다고 말은 많이 했지만 대들지는 못했답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다음 해 여름에 다시 외갓집을 찾은 두 도련님께 구두쇠 영감은 큰 수박을 지게로 져서 가지고와 애기 도련님께 바친다고 하더랍니다. 작년에 말뚝 박은 수박이 거름이 되어 금년에는 대풍이 되었다고 하면서 땅을 거름지게 해 줘 늙은이를 가르쳐 준 애기 도련님들에게 감사드린다고 하더랍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주 자주 당신을 농부로 표현하시고, 농사를 짓는 방법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깨닫는 것은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정말 좋은 흙을 만드는 것은 순전히 농부의 탓이며, 복음 말씀을 듣고 복음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좋은 땅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많은 수확을 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좋은 땅의 조건에 대하여 잠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1. 흙이 부드럽고 모래나 참흙이 적당하게 섞여 있어 물의 관수가 잘 되어야 합니다. 물을 오래 보관해야 하는 논은 흙이 부드럽고 찰 져야 하며, 밭 흙은 모래가 적당히 들어있어야 곡식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잘 자랄 수 있습니다. 돌을 골라내고, 단단한 흙은 부수어 곱게 하고, 바위는 빼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도 너무 경직되게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일만 생각하면 돌덩어리처럼 굳어져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생활이 건조하고 각박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물기를 적당히 머금을 줄 아는 흙이어야 많은 소출을 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아주 적절한 물기이며 우리의 삶도 정말 부드러워야 한답니다.
2. 거름기가 많아서 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지만 흙은 더럽다고 하지 않고, 생명을 키우는 양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거름기가 없으면 작물은 클 수가 없습니다. 성장의 절대적인 요소가 거름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을 키우고 하느님 말씀에 따라서 사는 데에도 영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피정, 미사참례, 영적지도, 묵상, 영적독서, 신앙상담, 성경공부, 기도 등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많은 영양분을 끊임없이 섭취해야 합니다.
3. 흙 속에 좋은 생물이 많아서 병해충을 방제해 주어야 합니다. 흙 속에 있는 많은 미생물은 병해충을 잡아먹기도 하고, 지렁이는 땅 속을 부드럽게 해준답니다. 이런 모든 생물들은 흙과 공생을 하며, 서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답니다. 척박한 땅에는 콩과 식물을 심어서 뿌리혹박테리아를 키워야 한답니다. 지렁이가 있는 흙은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희망이 있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우렁이가 살고 있는 논은 희망이 있는 논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복음말씀을 받아들이는 사회는 서로 협력하고 병해충을 서로 없애가는 사회입니다. 농약을 쳐서 모든 생물을 죽이면 그 곡식을 먹는 인간도 결국 그 농약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극약처방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서로 공생 공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서로 협력하는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 돌이나 가시덤불이 없고, 잡초가 없어 영양분을 곡식에게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께 매달려 사는 우리는 세상의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잡초와 가시덤불 때문에 곡식을 메마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주고, 가시덤불을 잘라주어야 합니다. 밭농사나 논농사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김매기입니다. 그런 것이 모든 영양분을 다 잡아먹어버립니다. 내 마음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정리해 나가야 한답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은 세상사에 치중한 삶이며 그건 악마와 타협하는 길입니다. 마치 파우스트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얻음과 같습니다.
5. 흙의 표층의 깊이가 깊어 뿌리가 내려 열매를 많이 맺게 하고 나무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깊이는 햇수로 말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얼마나 갈고 다듬고, 북을 돋워주고, 새 흙을 많이 덮어서 객토를 해야 하고, 많이 뒤집어 주어야 하는지에 달려 있답니다. 그래서 곡식이나 나무가 자라는 만큼 뿌리는 더 땅 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뿌리의 모습은 나무의 모습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의 뿌리도 깊어져야 한답니다.
6.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고 통풍이 잘되어야 한답니다. 햇볕을 받지 못하면 곡식이나 과일은 자라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통풍이 잘 되는 것처럼 이웃과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답니다. 흙 속에 산소를 많이 집어넣어주어야 한답니다. 햇볕이 잘 들도록 가지치기를 하고, 흙에 볕이 잘 들도록 온도를 맞추어주어야 한답니다. 주님은 햇볕처럼 은총을 주시고, 구석에 갇혀서 어둡게 살지 않도록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자극해 주십니다. 좋은 흙은 우리가 만들 나름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만들어 가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탕으로 신앙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그 밭을 일구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간의 삶이 좋은 흙을 만들기 위한 삶이었는지 반성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그 무렵 주님께서
1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축일7월 23일 성녀 비르지타 (Birgitta)
신분 :과부, 설립자
활동 지역 :스웨덴(Sweden)
활동 연도 :1303-1373년
같은 이름 :브리지따, 브리지타, 브리짓다, 비르지따, 비르짓다, 비리시다
1303년 스웨덴 우플란드(Uppland)의 총독이며 부유한 지주인 비르거(Birger)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인게보르크(Ingeborg) 사이에서 태어난 성녀 비르지타는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는데, 그때부터 계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훗날 네레시아 지방의 총독이 된 18세의 귀족 울프 구드마르손(Ulf Gudmarsson)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이다.
1335년 그녀는 스웨덴의 왕 마뉴스 2세와 막 결혼한 왕비 나무르의 불랑쉬(Blanche)의 시녀가 되었다. 비르지타의 큰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또 그녀의 막내아들 구드마르(Gudmar)가 1340년에 죽게 되자, 그녀는 노르웨이 트론디엠의 성 올리프 경당으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궁중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재차 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라스에서 병을 얻었고, 이때 그녀는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환시를 보았다.
1344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알바스트라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4년을 지냈다. 이때에도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고, 고해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이러한 계시에 따라 그녀는 1346년에 바드스테나(Vadstena)에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를 세웠고, 마뉴스 왕도 여기에 거처하였다. 이것이 '삼위일체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다. 바드스테나는 15세기 스웨덴의 지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그녀는 라트비아(Latvia)와 에스토니아(Estonia)의 이교도들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려는 국왕 마뉴스의 지원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당시 아비뇽(Avignon)에 유배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의 환시 내용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교황은 안전하게 로마(Roma)로 돌아올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에 교황이 중재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빈민구제에 온 정열을 쏟았으며, 당시의 심각한 교회와 정치사이의 제 문제에 대하여 기탄없는 충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 자신의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및 교황의 로마 귀환에 대한 노력 등이 로마 전체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로마 주변의 수도원을 개혁하였고, 그녀의 예언과 고위직책에 대한 탄핵은 유명하였다. 그녀는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는 문제를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으나, 우르바누스(Urbanus) 교황만이 잠시 귀향하였고 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는 여전히 아비뇽에 있었다.
그녀의 구술로 적은 “계시”라는 책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내용으로 당대에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그녀의 시성과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서 그러하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역설한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의 체험들은 모두가 진실하며 교리와도 부합된다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녀의 사후 트렌토(Trento) 공의회는 그녀의 “계시”를 세심히 검토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신자들이 읽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녀는 스웨덴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비르지타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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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