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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살리다
행 20:1-12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행 20:1-12 / [마게도냐와 헬라의 2차 방문]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바울은 신도들을 불러 마지막 설교를 하고 마게도냐로 떠났다. 2) 가는 도중에도 지나가는 여러 도시에 들러서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헬라에 도착하여 3) 석 달을 거기서 지낸 뒤 배를 타고 수리아로 건너가려고 준비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북쪽 마게도냐로 먼저 가기로 결정하였다. 4) 바울과 같이 아시아까지 동행한 사람은 베뢰아 출신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에서 온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 디모데였다.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자기들의 고향인 아시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5) 그들은 드로아에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6) 우리는 무교절 기간이 끝나는 즉시로 헬라의 북쪽에 있는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 후에 드로아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한 주일을 지냈다. 7) [드로아에서 한 고별 설교] 주일에 우리는 성만찬을 나누려고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그 다음날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바울은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였다. 8) 우리가 모인 3층방에는 등불을 많이 켜두었다. 9) 그런데 바울의 설교가 오래 계속되자 창문에 걸터 앉아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깊이 잠이 들어 그만 3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달려가 일으켰으나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10-12) 바울이 내려가서 그 청년을 팔에 안고 `걱정하지 마시오. 이 사람은 살아 있소' 하고 말하였다. 과연 그는 살아났다. 사람들은 두려움 반 기쁨 반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청년이 살아나 사람들은 적지않이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다시 3층 방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만찬을 나누며 바울의 긴 설교를 들었다. 일행은 새벽이 되어 길을 떠났다.
바울은 아데미상의 소요가 끝나자 바로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드로아에서 기도 중에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립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가다(1-6)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 교회를 세운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고 아가야 지역으로 이동하여 3개월간 머물면서 사역을 한 후,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암살 음모가 있음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마케도니아로 돌아서 가기로 했습니다. 아시아까지 동행 할 각 지역의 대표 일곱 사람이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바울과 함께 한 일행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낸 후 배를 타고 5일 만에 드로아 항구에 도착합니다. 빌립보를 떠난 시점을 무교절 이후라고 밝히는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데 걸리는 날짜를 고려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것입니다(16).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에 오는데 5일이 걸렸고, 드로아에서 일주일 동안 체류한 것은 배의 출항 시간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7, 11).
바울이 드로아에서 죽은 자를 살리다(7-12) 드로아에서 주일을 맞습니다. 주일 예배와 성찬 그리고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바울과는 고별의 날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별의 밤 모임이 끝나면 이튿날 아침에 배를 타고 떠나야 합니다. 바울의 강론은 밤중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3층에 있는 다락방에 많은 등불이 켜있다는 것은 모인 장소가 크고 많은 신자들이 모였음을 말해줍니다. 이때 청년 유두고가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3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9) 사람들이 유두고가 죽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바울은 강론을 중단하고 죽은 유두고가 있는 곳으로 가서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 팔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생명이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말을 곡해하여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고 여긴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인 누가는 명백하게 밝혀 줍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적용: 당신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세상의 방법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기도로 산다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계속 되어지는 것이 축복이고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문제가 생기면 끈질기게 기도하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교제이지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교제가 이루어지면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호크마 주석
=====20:1
소요가 그치매 - 여기서 소요란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일어난 소동을 말한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이제 소동이 진정되자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것이 그자신의 안전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두려움 속에서 소요가 그치는 틈을 타서 서둘러 도망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요가 그치매'라는 문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이유나 동기를 진술하고 있다기 보다는 떠나가게 된 시간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R.C.H. Lenski).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 이것은 바울이 놀라움에 가득차서 갑작스럽게 야간 도주하듯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작별의 의식을 다 갖추고 그들과 진지하게 헤어졌음을 뜻한다. '권한 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사스'(* )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권면한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전도 계획에 의해서 떠나려는 바울은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또한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권한다는 말 속에는 기독교 설교의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작별하고'(* , 아스파사메노스)는 권함이 끝난 후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작별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은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7절).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 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다. 람세이(Ramsay)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을 탔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고린도 교회의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파견했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 보고를 들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고후 2:12, 13)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 때문에 곧장 마게도냐로 향하였다.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 '지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 )란 말은 특정한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는 낱말로서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도를 다 망라(網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했을 것이며 이 기간 중에 바울이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같이 일루리곤(Illyricum)까지도 갔을 것이다. 또한 이때 그가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하여 그 길의 끝인아르리아 해의 두로하키움(Dyrrhachium)에까지 여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F.F. Bruce). 고린도 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본다(고후 7:6). 바울의 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困窮)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다(Tyndale).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이다(롬 15:25-32;고전 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20:3
석달을 있다가 - 그곳은 헬라, 즉 아가야 지방이었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였다. 체류 기간은 삼개월로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Bruce).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방문에 대한 준비도 시키고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바을이 이처럼 로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장차 로마를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롬 15:17-23).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돌아가기를 작정하니 -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제 어느 정도 자기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헬라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원하는 자들이 타고 가는 순례선(Pilgerschiff)을 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8:18). 그런데 바울을 박해해 오던 유대인들이 그가 배에 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또는 배 밖으로 밀쳐 버림으로써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노정을 변경하여 해상보다 훨씬 늦은 육로를 통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공모'의 헬라어 '에피불레스'( )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필사적인 음모를 뜻한다. 그리고 '작정하니'의 헬라어 '에게네토 그노메스' (* )는 '결단을 내렸다'(He decided)라는 뜻으로서 그의 생각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나타낸다(Bruce).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두기고와 드로비모라 - '함께 가는'의 헬라어 '쉬네이페토아우토'(* )는 '그와 동행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바울을 수행(隨行)하는 것을 말한다(E. Haenchen). 이 일곱 사람은 지난 2년 동 안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보롤 냈던 것을 맡아 가지고 가는 사명을 받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손으로 이 연보를 관할하지 않고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결정을 따른 행위로서 매우 지혜로운 일이었다(행 6:1-6). 그러면 이제 바울과 함께 동행한 각 교회의 대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바더 -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다. 롬 16:21에 나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아리스다고 - 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다(27:2;골 4:10;몬 24절). 세군도 -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이다. 가이오 - 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다(19:29). 디모데 - 루스드라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16:1-3). 두기고 - 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한다(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드로비모 - 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한다(딤후 4:20).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기(고후 1:1) 때문이다(R.C.H. Lenski). 하지만 고후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디도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주장(Ramsay)에서 신빙성 있는 답변을 찾는다. 따라서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수령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F.F. Bruce).
=====20:5
그들은 먼저 가서 - 여기서 그들이란 앞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 드로아로 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으나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合流)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곱 사람보다 후에 드로아로 가기로 여정을 짰던 것으로 추측된다(Lenski, Pulpit). 우리를 기다리더라 - '우리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만 우리 가운데 누가가 들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16:10). 따라서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한다.
=====20:6
무교절 후에 - 누가와 바울이 뒤에 남아 디아스포라의 관습에 따라 유월절 절기를 조용히 지켰다.특히 바울은 유월절 양처럼 희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하고빌립보에서 무교절 주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F.F. Bruce). 닷새 만에 바울은1주간이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생각하면서 서둘러 에베소를 향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닷새나 걸리는 오랜 항해를 하였다. 16:11에 보면 전에 드로아에서빌립보까지 배를 타고 이틀밖에 안 걸렸는데 여기서는 닷새가 소요된 사실에 대해서는, 역풍으로 인해 항해가 순조롭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A.C. Hervey).
=====20:7
안식 후 첫날에 - '엔 데 테 미아 톤삽바톤'(* ) 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E. Haenchen, 요 20:19, 26;고전 16:2;계 1:1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하다(히 10:25).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떡을 떼려 - '클라사이'(* )는 '클라오'(* )의 제 1부정과거 능동 부정사이며 목적을 나타낸다.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 , 아르토스, 2:42;고전 10:16)을 가리킨다는 견해. '떡'의 헬라어 '아르톤'(* )에 정관사 '톤'(* )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말한다(R.C.H. Lenski).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 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고전 11:20-22)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본문의 '아르톤'(* )에는 정관사 '톤' (* )이 없는 반면에 11절의 '아르톤'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떡을 뗀다는 것이 애찬겸 성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1절의 '톤 아르톤'은 단지 7절의 '아르톤'을 가리킨다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고전 10:16, 18과 11:17-34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주의 거룩한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뒷받침된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진 관습임을 알 수 있다(McGarvey). 그리고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음이 성경(20:7-11)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유스틴 마터의 둘째 해명서(Apology)에 나타나 있다(pulpit).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 데 그 이유가 있다(R.C.H. Lenski).
=====20:8
윗다락에 - '휘페로오'(* )는 9절과 1:13에도 나타났듯이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적을 위하여 제공한 것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다(Tyndale). 그들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일 망정 모이기를 힘썼다(Matthew Henry). 등불을 많이 켰는데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모임에 어두움 속에서의 제의적 매음 행위가 있다고 의심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등불을 많이 켜서 장소 전체를 환하게 했다(Ernst Haenchen). 모임의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다(Kuinoel). 사람이 많이 모인 밤중의 집회에 잡담을 방지하기 위해서다(Bengle). 단순한 장식적인 효과라고 본다(Olshausen). 누군가가 떨어지는 것을 즉시 알아보기 위해서다(Meyer). 한 젊은이가 졸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다(Alford). 모인 수가 많았기 때문에 밤중 집회에 알맞게 많은 등불을 설치하였다는 견해(John Calvin). 혹자는 다락방 자체가 많은 회중이 모일 수가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만일 그 다락방에 많은 무리가 모여 비좁지 않았다면 유두고(Eutychus)가 구태여 창에 걸터 앉지는 않았으리라는 논리로 반박을 한다. 사치스럽게 허식적으로 꾸며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기 보다는 밤중 집회의 필요성(必要性) 때문에 모임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20:9
창에 걸터 앉았다가 - 건방지기 때문에 창에 걸터 앉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지만(Matthew Henry), 그보다는 방이 회중으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다는 것과(McGarvey)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 앉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Bruce).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meeting)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Tyndale).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고 또한 그 가르침에 부착해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능력있게 증시(證示)하였다. 강론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오늘의 교회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상깊은 구절이다.
깊이 졸더니...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 '깊이 졸더니'의 헬라어 '카타페로메노스' (* )는 '카타페로'(* )의 현재분사로서 점차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의 헬라어 '카테네크데이스'(* )는 부정 과거분사로서 계속되는 졸음의 결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진 객관적인 상태를 진술한다(Robertson). 그렇다면 거룩한 모임에,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신성한 시간에 왜 이런 현상이 생겼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그것에 압도되어서 졸다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Bruce, McGarvey). 또한 많은 등불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을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을 일으키므로 졸음이 가중되었다고 본다(Alford, Bruce). 따라서 앞의 8절에서 등불을 많이 켰다고 기술한 것은 유두고가 떨어진 사건에 대한 복선(伏線)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Meyer). 그리고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혹자는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한다(Metthew Henry). 그러나 칼빈(J. Calvin)의 경우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유두고의 졸음을 질타하는데 초점을 둔 주석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로 본문에서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함로써 이미 유두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더욱이 바울이 유두고를 책망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John Calvin, Brece, McGarvey). 그렇다면 이 사건의 기록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고 있는가에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꼭 죽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I.B.C.)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기를 '죽은 것 같이'라는 뜻의 '호세이 네크로스'(* ;막 9:26)가 아니라 '네크로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Thomas Whitelaw).
=====20:10
내려가서 - '에페페센'(* )은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라는뜻이다.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 여기서 '안고'를 가리키는 '쉼페릴라본'(* )은 '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서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 35)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냈다기 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의 즉각적인 표현이며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자세이다(J. Calvin). 떠들지 말라 - '메 도뤼베이스데'(* )란 말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 불고하는 회중들을 진정(鎭靜)시키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Thomas Whitelaw). 일찍이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끼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막 5:38ff.) '티 도뤼베이스데'(* , '어찌하여 환화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생명이 저에게 있다 - 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청년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까무라쳐 기절한 것을 바울이 현대의 인공 호흡법을 써서 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Ramsay, Wendt, Zoeckler). 그러나 이는 바울이 그를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Bruce)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20:11
오래 동안...이야기하고 -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의 헬라어 '호밀레사스'(* )는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음을 뜻한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이다.
=====20:12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마 28:18-20)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된 임마누엘 신앙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겠는가 !
< 설 교 >
성공하는 사람의 4대 요소
사도행전 20:1-6 / 이한규 목사
1. 때를 아는 지혜
에베소에서 벌어진 은장색들의 난동이 서기장의 침착한 대처로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떠났다(1절). 두려워서 에베소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제자들의 안위를 염려했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여겼기에 떠났다. 그는 때를 알고 때에 순응하는 지혜가 있었다.
올 때와 갈 때를 잘 분별해야 기회가 올 때 잡을 수 있고 갈 때도 당당하게 갈 수 있다. 가을에 지는 낙엽은 갈 때를 아는 모습이다. 겨울을 대비해 스스로 활동을 최소화해야 활기찬 봄을 맞이한다. 인생의 겨울을 잘 준비하라. 거추장스러운 세속의 옷을 낙엽처럼 벗겨내고 고요히 나를 돌아보고 말을 줄이며 인간관계의 얽힌 매듭을 풀라. 갈 데를 알고 갈 때를 준비하면 삶이 단순해지고 힘이 모이면서 능력 있는 삶이 펼쳐진다. 욕심의 옷을 벗으면 능력이 입혀진다. 올 때와 갈 때를 잘 알아야 진리를 따라 당당하게 살 수 있다.
2. 큰마음과 큰 손
마게도냐로 떠난 바울은 거기서 육로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등에 있는 그동안 개척했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신앙을 권하고 어려움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도 권하면서 마침내 헬라의 대표 도시 고린도에 이르렀다(2절). 바울은 자기도 힘들게 살았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소식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인색하게 굴면 작은 성공은 해도 큰 성공은 하지 못하고 가짜 성공은 해도 진짜 성공은 하지 못한다. 큰마음을 가지고 나눌 줄 알아야 참된 성공이 주어진다. 담을 넘어 손길을 내밀 때 담을 넘는 풍성한 축복을 얻는다. 선교의 큰손이 되라. 행복하려면 사랑의 폭이 넓어야 한다. 거룩한 큰손의 꿈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자녀를 키울 때도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저의 자녀가 거룩한 큰손이 되게 하소서.”
3. 전략적인 용기
바울은 고린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결국 육로로 마게도냐로 올라가서 아시아로 들어가는 한참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3절). 그는 용기와 믿음을 앞세운다고 해서 무리하게 위험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무조건 “고!” 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다. 어떤 때는 전진이 용기지만 어떤 때는 후퇴가 용기다. 용기가 지나쳐서 만용이 되면 돌이키기 힘든 화가 임한다.
때로는 후퇴하거나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 특히 평화를 위한 후퇴는 부끄러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평화를 위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다. 그때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을 그에게 약속하셨다. 평화를 위해 물러서면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의 길로 이끄신다. 통제되지 않는 야성이 야만으로 변해 힘없는 영혼들을 짓누를 때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에 진리와 자유의 새싹이 트게 하는 평화의 봄바람 역할을 하라고 도전하신다. 내가 평화를 위해 어려운 길로 용기 있게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 길에 동행해 주신다.
4. 섬김의 리더십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끝내고 각 지역에서 거둔 헌금을 가지고 아시아로 돌아갈 때 헌금을 맡은 교회 대표 7명이 함께 갔다. 그 7명의 대표가 드로아에서 바울과 누가를 기다리고 있었다(5절).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드로아에서 기다리던 7명의 헌금을 맡은 교회 대표들과 만난 후 거기서 7일간 머물렀다(6절). 이 장면을 보면 바울이 섬김의 리더십을 가진 중간 리더들을 조직적으로 잘 세웠음을 느낄 수 있다.
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로 헌금을 전달하는 일에 거창하게 각 교회 대표를 동원했는가? 예루살렘에 헌금을 많이 보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 아니었다. 바울은 리더에게 필요한 핵심 요소인 자기를 비우는 능력을 키워주려고 중간 리더들을 헌금 전달에 동참시켰을 것이다. 좋은 리더는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잘 비워내는 사람이다. 결국 성령충만한 삶이란 나를 비우고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모시며 사는 삶이다.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
서금석 목사 / 행 20장 1~12절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에서 3년간을 에베소에서 전도했습니다. 그 중에 석달을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했고 두란노 서원에서는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2년 동안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흩어져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소요가 그친 후 바울은 도망치듯 에베소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일이 권면한 후에 정식으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에서 드로아에 오기까지 10개월 간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마게도냐는 2차 전도여행 중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을 받고 건너갔던 유럽 최초의 선교지였습니다.
마게도냐에서 어디를 방문했는지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지를 방문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 다음으로 헬라에서 석달을 머물렀다고 했는데(2…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달을 있다가…) 헬라는 아가야 지방을 말하고 아가야 지방의 수도는 고린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을 머물렀다고 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석달 머물면서 중요한 일 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 때 로마서를 썼습니다. 아는대로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서(代書)했고 고린도 외항이었던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를 통하여 로마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오늘 본문, 10개월 간의 바울의 여행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한 가지는 본문에 분명하게 나와 있고 한가지는 학자들이 미루어 짐작하는 내용인데 그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첫째 다니면서 제자들을 권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여러 말로'란 '여러 가지 말로', '많은 말로' 성도들을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자기가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었으니 얼마나 애정이 갔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바울의 위로와 격려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예수 믿기가 쉬웠겠습니까? 어려웠겠습니까? 쉽지 않았어요. 사회적인 분위기, 집안의 분위기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쉽게 왕따 당하고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생명을 건 핍박도 받아야 했습니다. 시련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단순하게 '예수 믿겠다' 고백하고 세례받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싹이 자라기도 전에 부러질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자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권면해 주어야 자신의 믿음을 지켜낼 수가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복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자기가 전했던 곳을 다시 돌아보면서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일에 힘썼습니다.
아기 낳는 것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이 아기를 잘 키우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으로 부모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지 않으면 그 아기는 고아가 됩니다. 아기가 성장하여 제 일을 스스로 해 나갈 때까지 부모는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오늘 본문 10개월의 전도 여행은 바로 이 양육을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또 하나,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모금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4절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는 바로 지역 교회와 대표자들로 연보 모금을 위한 책임자들이었다고 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타고 닷새만에 드디어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1.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 - 발견되는 세 가지 사실(7-8절)
1. '안식 후 첫날'이라는 구절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18:4에서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식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 독립적으로 주일 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의 안식 후 첫 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지 않았습니까? 사도시대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규칙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독립적인 예배일이 시작되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세상에 드러날 것이기에 자신들의 소속감도 분명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정기적이고 독립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2. 또 하나 볼 것은 7절을 보면 예배에 대한 두 가지 형식과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과 말씀을 강론한다는 바로 두 가지입니다. 떡을 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에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는 '애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21-22을 보면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먼저 먹기 시작하니 후에 오는 사람은 먹을 것이 없게 되고, 절제 없이 포도주를 먹게 되니 취하기도 하는 폐단 때문에 점차 약화되었고 그리고 남게 된 제도가 '성찬'(the Lord's Supper)입니다. 본문에 떡을 뗀다는 것은 바로 '주의 거룩한 만찬'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초대 교회의 예배에는 '성찬'이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두 달에 한번 하는 성찬이 매 예배마다 드려졌다는 말씀입니다.
떡을 떼는 것과 함께 말씀 강론이 있었는데 본문에 보면 떡을 떼는 일은 말씀 강론 후에 있었습니다.
어떤 예배학자는 예배는 반드시 떡의 성찬과 말씀의 성찬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현대 예배에서 약화된 성찬식 부분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미국 교회들 중에 매주 성찬을 꼭 나누는 교회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의 예배는 한시간 반에서 두 시간 드려지고 성찬 분급도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성도들끼리 둘러서서 분급하고 서로 기도해줍니다. 실제로 개 교회가 주일 낮 예배마다 성찬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과 복잡함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많이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쨌든 주의 성찬과 말씀이 함께 예배에 드려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3. 세 번째 볼 것은 개인집 다락방이 예배 장소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2월 소아시아 지역 성지 순례 때 갑바도기아 지역을 돌아보았던 일이 머리에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친절하고 사랑스런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갑바도기아는 앙카라 동남쪽으로 320km 지점에 해발평균 1000m의 소아시아 반도 중앙 고원에 있습니다. 이 갑바도기아는 지하교회(동굴교회)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250여 년 동안 피신 은둔 생활을 했는데, 바로 이 지하교회(동굴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땅 속에 주거지도 있고, 교회도 있고, 학교도 있고, 후에는 이슬람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가 AD 70년경부터 박해가 시작돼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AD 313년까지 계속되었기에 갑바도기아 땅굴 사람들 중엔 그 땅굴에서 태어나 한번도 햇볕을 못보고 땅굴 속에서 죽은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데린구유라는 곳에는 지하 20층까지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8층까지만 개발되어 순례객들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첫 주일 2월 4일 주일에 바로 그 지하 동굴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옛날 믿음 가졌던 성도들이 보이는 것도 없는 캄캄한 동굴에서 부모에게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지하 동굴 교회라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예배드렸겠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편하고 행복하게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당시 믿는 성도들도 함께 예배드릴 성전도 없었고 회당도 없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불편했을망정 모이기에 힘썼어요. 개인집 다락방이 넓기야 했겠습니까? 유두고는 창에 걸터앉아야 했을 정도로 모인 사람들에 비해 장소는 비좁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감사드리며 열심히 모이고 귀하고 뜨거운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2. 유두고의 문제 - 깊이 잠든 한 청년(9절)
드디어 오늘 중심이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쉽게 설교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먼저 생각해 봅시다. 잠이란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이요 은혜중 하나입니다. 시편 127편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때로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수면제 먹어야 잠을 자기도 하고. 단잠, 꿀잠이라는 말이 있지요? 잠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속도로 사고 중 가장 많은 것이 과속과 졸음 운전이라고 합니다. 졸면서 일하다가 기계에 다치기도 합니다. 자다가, 졸다가 인생 망친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유두고는 왜 졸았을까요? 오늘 졸다가 떨어진 유두고를 보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유두고가 졸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들으면서 졸면 되느냐고 하는 책망으로 결론지을 문제는 아닙니다.
가만히 보니깐 그날 따라 바울의 설교가 길었어요. 9절 보니까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설교가 긴 것이 좋습니까? 짧은 것이 좋습니까? 설교도 설교 나름이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짧은 것 좋아합니다. 설교시간 30분만 넘으면 슬금슬금 시계보지요. 몸을 좌우로 비틉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유두고는 비록 졸다가 3층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말씀을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사방에 등불을 밝히고 다락방에 가득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떠날 줄 몰랐습니다.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물론 7절에 보니까 바울은 다음날 드로아를 떠나야 할 형편이었기에 가르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들어줘야 가르칠 것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어요. 11절 보니까 강론마치고 성찬 나누고 그리고 다시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11절은 미루어 짐작하기는 설교가 끝나고 집으로 곧장 헤어지지 않고 다시 설교에 대하여 서로 나눈 것 같습니다. 공식 예배의 설교의 이어진 대화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 교회도 설교 후에 설교를 중심하여 대화를 나누어 보면 어떨까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역사상 교회가 부흥할 때 설교가 / 성경 말씀이 길었습니다.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는 10시간 동안 설교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 하나 부흥하는 교회는 설교가 좀 긴 편입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권목사 설교가 짧은 탓입니다) 설교가 30분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좀 깨어져야 합니다. 당시 밤새워 말씀 듣는 드로아 사람들 보세요.
밤새워 찬양해 보신 적 있으세요? 밤새워 기도해 보신 적 있으세요? 밤새워 말씀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밤새워 고스톱 칠 때는 무릎 관절염도 통증도 없지 않습니까? 깊이 생각해 봅시다.
유두고가 졸았던 이유는 피곤했기 때문일 겁니다. 성서 주석가들은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일 때문에 피곤했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 많은 등불로 인해(8절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방안이 더워졌을 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등불 때문에 산소부족 현상이 나타나 졸음을 가중시켰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래저래 피곤했기 때문에 졸았을 것입니다. 집에 가서 그냥 자지 않고 그곳까지 왔으니 유두고 믿음도 대단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 예배드리기 전에 할 수만 있으면 피곤하지 않게 좀 잘 쉬자는 것입니다. 토요일 일찍 주무세요. 텔레비전 일찍 끄세요. 지금 우리가 한 밤중에 밤새워 예배드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잠잔다. -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자니 집에 있는 것 보다 낫잖아?' 그래요. 그런데 자지 않으면 더 좋지요. 예배는 토요일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토요일은 일찍 쉬자' 원칙을 세우세요.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이유는 자리 문제도 있습니다. 유두고가 건방져서 창가에 걸터앉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방에 사람이 꽉 찼으니까 유두고는 청년이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을 겁니다. 더구나 졸리기도 하고 등불로 혼탁해진 공기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창문에 걸터앉았을 것입니다. 유두고 책망하려는 생각은 사도행전을 쓴 사람도 없었고, 저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졸리더라도 창문턱에 걸터앉지만 않았다면 그런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자리입니다. 만일 유두고가 바울의 바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더라도 피곤하다고 졸았겠는가? 모르긴 해도 쉽게 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와 가까운 자리는 금(金)자리, 조금 먼 자리는 은(銀)자리, 아주 먼 자리는 잠자리. 앞에 앉으세요. 졸 위험이 많은 사람은 꼭 앞에 앉으세요. 훨씬 덜 졸릴 겁니다. 유두고가 반듯하게 앉지 않고 비스듬히 걸터앉았던 것도 추락사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깨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盜賊)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 바울의 사랑과 믿음(10-12절)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의사 누가인데 의사가 죽은 것과 기절한 것 쯤은 구별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 몸(시체)을 안았습니다. 여기서 무엇 생각나는 것 없으십니까?
열왕기상 17장에 가뭄에서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여 먹을 것을 주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바울이나 엘리야나 사랑이 있었습니다. 말씀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의 부모의 심정, 과부로 홀로 살면서 키웠던 아들이 죽었을 때의 어머니의 심정. 어떻겠습니까? 바울이나 엘리야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내 탓이냐?'고 회피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죽은 것을 낸들 어떻게 한단 말이냐?'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끌어안았습니다. 시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고통과 역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성도와 함께 하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제 기도 제목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❶ 어떤 상황에서도-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바울의 사랑을 배웁니다. ❷ 바울의 믿음입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떠들지 말라는 말은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쩌자고 의사 누가도 죽었다고 판정을 내린 유두고를 끌어안았던 것일까요? 죽은 자를 살려낸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시체에 손을 대고 살려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체마다 기도하면 살아난다면 장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바울의 믿음을 봅니다. 어떤 경우라도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기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엄청난 능력의 보고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능력의 보고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의 원천이 우리 중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원하실 때 역사는 나타납니다.
빈자리가 보이십니까? '언제 채우나?' 걱정이 되십니까? '내가 채우리라'는 의지와 믿음이 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채워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믿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빈자리 채워지면 누가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믿으세요" 의지와 믿음으로 외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 중에 아이가 이층에서 떨어졌다 -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끄럽게 되고, 야단날 것입니다. 예배 망칠 것입니다. 제가 설교원고 끝까지 읽을 수 있겠습니까? "주기도문으로 예배 마치겠습니다"하고는 사태 수습하려고 바쁘게 나갔을 것입니다. 본문에 바울은 어떻게 했어요?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고는 올라가서 성찬식하고 그리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설교하고 대화하고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난 사람 때문에 개역성경에는 '적지 않게' 표준 새번역에는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 리
초대교회 성도들은 장소 탓하지 않고, 시간 탓하지 않고 열심히 모였습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하여 믿음을 굳세게 세워나갔습니다.
유두고를 통하여 내가 찾아내어 행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어떤 경우라도 예배시간에는 졸지 맙시다. - 형편과 이유야 다 있겠지만 매일같이 졸아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한 말씀, 성경 한 구절이 내 평생 잊혀지지 않고 나를 사로잡는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기대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받읍시다. 집중합시다. 할 수만 있으면 관객의 자리가 아니라 드리는 자리에 앉읍시다.
바울을 통하여 배우고 행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합시다. 어떤 경우라도 성령의 역사에 삶을 열고 기대하며 나아갑시다. 나는 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도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환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 구경만 하시겠습니까?
전도합시다. 왜 교회 크게 지었습니까? 왜 교회 아름답게 지었습니까? 영혼 구원-전도하려고.
일주일 전도해 보세요.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확신하고 전도해 보세요. 다음주일 혼자 오지 마세요.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행 20:1-16 / 김 조 목사
전력이 부족하여 야간에만 TV를 켜서 볼 때에도 극소소의 미국인과 군인을 위해 낮 시간에도 미국 방송을 하므로 미국 국민은 세계 어디를 가도 특권을 누리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시민권자 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에 시민권 갖고 사는(빌3:20) 천국의 시민권자 이기에 누려야 할복을 받는 성도되시기를 원합니다.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하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구약 성경에는 모세(신33:1), 다윗(대하8:14), 엘리야(왕하1:9), 엘리사(왕하4:7), 사무엘(삼상9:8) 같은 특별한 인물에게만 붙여졌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신 이후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람이라(롬1:17 벧전2:9 빌4:21)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께 소속된, 소유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소속된 사람답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능력자요 승리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1-6절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마게도냐와 아야가 지방의 교회를 방문하는 것과 7-12절은 드로아에서 설교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해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려주웠고 8-16절은 여러 지방 교회를 재방문하여 교회를 굳게 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되어 지기를 원하여 바울 사도의 모습 속에서 몇 가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씀 제목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사명을 깨닫고 다하는 사람입니다(1-6절).
행13 이후에 계속해서 복음 전하기 위해 1, 2, 3차전도 여행 중에 숫한 고생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의 전도의 열정은 끊일 줄 몰랐다. 에베소에 소동이 진정되자 그곳을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여러 교회를 다시 방문한 약 10개월의 걸친 전도가 1-6절에 짧게 기록되었으나 예루살렘과 로마에 가서 세계복음화를 계획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22-24절에는 결박과 환란이 있음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으니 바울사도는 사명 다하기 위해 생명을 포기 했던 것이요 고전9:16에도 복음증거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바로 깨닫고 그 일을 다 하는 성도 되어야 합니다. 바울사도처럼 말이나 설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진술한 삶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을 전하는 것이요 내가 작은 예수가 되어 우리의 말 한마디 얼굴 빛 하나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이것이 사명을 다하는 것이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사도가 축복받고 능력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맡겨 주신 것에 최선 다 한 것 같이 사명 깨닫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7-12절).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 만들어 잔치집의 기적을 이루심부터(요2) 수많은 병 든 자 고쳐주시고 귀신 내에 쫓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으로 나타냈습니다. 베드로 통해 성전 미문가에 앉은뱅이 고치신 것(행3)과 바울사도가 그 동안 전도여행에 구브로, 이고니온, 루스드라 같은 데서는 앉은뱅이 고침으로 신이 오셨다고 허메, 쓰스하기도 했습니다.(14:8-13) 오늘 말씀 듣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를 살려냄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바울사도의 자기의 기술이나 재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유두고의 죽음에서 잠깐 생각하면 사람이 많아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다가 떨어져 죽었으니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책망치 아니했으니 졸기는 해도 참여한 것만도 귀합니다. 또 바울사도의 설교가 왜 졸게 했을까? 바울사도는 말이 좀 시원치 아니했다 했습니다.(고후10:10, 11:6) 그러나 하나님이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고후4:10)했습니다. 사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자 되어 하나님의 능력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됩니다. 꼭 병든 자 고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좌절된 자 소망 갖는 것,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로, 심령의 변화를 믿음으로 기도는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능력 나타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력자 되시기 원합니다.
3. 세상에 지도자가 됩니다(1-6, 13-17절).
바울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이틀 동안 세운 교회를 다시 방문하면서 권면하고 가르치며 특히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 교육합니다. 이렇게 교회의 지도자였고 세상을 바르게 이끄는 지도자였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사회 각계 각 층에서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직위가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양심을 바로 하여 부정과 부패된 세상을 이기며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입니다. 수많은 반대자와 핍박자 있어도 성령의 인도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 세워 간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었습니다. 어려서 남에 나라에 팔려 잡혀 갔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세계 최강대국의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나 바벨론의 총리가 된 다니엘을 대적자나 환경이나 조건을 이기고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헌신하며 믿음 굳게 지킨 자는 세상을 이기는 지도자가 됩니다. 세상에 소금되고 빛이 되어라 하신 예수님은 사회를 밝게 하고 살 맛 있고 썩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먼저 내가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며 사는 지도자 되시기를 원합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있고 잘 생겨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셨습니다.(요15:16)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우리에게 맡겨 준 사명을 바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을 증거 하는 능력자 되시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세상을 바르게 하는 지도자 역할 바르게 해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들을 격려함
행 20:1-6 / 김영규 목사
성도들을 격려 함
에베소 전도를 마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방문의 목적은 성도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1-2)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권하다”는 말입니다. 권하다는 말은 격려한다는 뜻입니다. 마게도냐와 헬라 지방은 지금의 그리스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지역입니다. 이 지역을 방문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 지역에 개척한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아마 첫 번째 이유보다는 두 번째 이유가 더 컸을 겁니다. 모금도 모금이지만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격려자가 필요합니다. 평생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 사람을 멘토라고 합니다. 신앙에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창조 때에 흙으로 만드셔서 그런지 육체가 연약합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육체만 연약한 게 아닙니다. 마음도 약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세요. 여러 가지 마음 밭이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밟혀서 딱딱해진 땅처럼 굳어진 마음이 있습니다. 암반 위에 얹혀 있는 흙처럼 깊이가 얕고 연약한 마음이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오면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에 햇빛이 가리워진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 염려를 이기지 못하고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마음입니다. 이런 연약한 마음들은 상처 받기 쉽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도 낙심을 잘 합니다. 이상하지요? 세상 나쁜 사람들을 보세요. 오히려 낙심하지 않습니다. 살인강도가 낙심하는 것 봤습니까? 강도질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가면 더 열심히 배워서(?) 또 합니다. 도적놈이 낙심하는 것 봤습니까? 도적질 하다가 붙잡히면 심기일전(?) 해서 다시 도적질 합니다. 사기꾼이 낙심하는 것 봤습니까? 더 갈고 닦아서 다시 사기 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쉽게 낙심합니까? 아마 세상 사람들의 두목은 마귀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마귀는 절대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거든요. 우리는 피차간 연약한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난 26년 동안 뇌 세포가 많이 깨졌습니다. 놀라 자빠질 일을 많이 겪다보니 그 때마다 메모리 장치가 손상됩니다. 한 번 놀랠 때마다 아이큐가 얼마씩 떨어진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쯤 제 아이큐는 두 자리 수 아래일지도 모릅니다. 병원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몸보다도 마음이 더 위축됩니다. 세상살이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건강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천재지변의 문제, 전쟁과 사회적 혼란의 문제 등등.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뭔가 한두 가지 이상 고민거리가 다 있을 겁니다. 이런 고난은 사람의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불안하게 하고 삶을 위축시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멘토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란 말은 “parakalevw”입니다. 곁으로 부르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exhort, embrace, encourage 등으로 번역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워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서로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를 세워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의 반대편에 낙심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결코 남을 낙심하게 만들고, 마음 상하게 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 시절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신 것이 뭔지 아세요. 백성들을 낙심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세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 명의 지도자들 중에 열 명이 악평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좋은 땅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우리가 당하지 못할 강한 족속들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의 성벽은 난공불락이고, 철로 만든 수레가 있습니다. 그들은 키가 거인이고 숫자가 많습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만도 못합니다. 만일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백전백패 할 겁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온 백성이 낙심했어요. 밤새도록 모세를 원망하면서 통곡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크게 운 곳이 바로 여깁니다. 엉엉 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40일을 40년으로 환산하여 광야를 헤매게 하셨습니다. 60만 3550명의 장정들 중에 단 두 사람만 제외하고 전부가 광야 생활 중에 죽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을 낙심케 만든 정탐군 10명은 재앙으로 죽었습니다. 남을 낙심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서로 북돋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남을 실망시키거나 낙심케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사람의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과도한 비판과 책망은 사람의 자신감을 빼앗아갑니다.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마세요. “좋은 목표입니다. 한 번 해 봅시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될 겁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언제나 이런 말이 습관이 되도록 하세요. 그래야 진정한 격려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들끼리 서로 격려자가 되세요. 부부 사이에도 탓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신 왜 그래?” 하지 말고, “당신 참 잘 했어! 수고했어! 고생 했어!” 격려하세요. 여자들이 갱년기가 지나면 혀의 감각이 무뎌진다고 합니다. 음식 간이 잘 안 맞아요. 그럴 때에 “어, 찌개가 왜 이렇게 짜지?” 하지 말고, “어제는 싱거우면서 맛있더니 오늘은 짭짤한 게 맛있네!” 하세요. 자녀들에게, “너는 그것 밖에 안 되니?” 하지 말고, “너 참 잘했다. 틀린 것보다 맞은 게 더 많네! 앞으로 올라갈 여지가 참 많구나! 너는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격려하세요.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수고하는 일군들 많찮아요? 차량 안내,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식당 봉사 등등. 일하는 사람에게 “참 수고하셨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격려하세요. 제가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남의 얘기 하는 겁니다. 여러분, 아내나 남편이 밤낮 “남의 집은 이런데” 하면서 얘기하면 좋습니까? 남의 집은 남의 집이고, 우리 집은 우리 집입니다. 형편이 다르고 구성원이 달라요. “남은 이런데”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적인 겁니다. 내 처지에서 잘 하도록 도와주세요. 모세가 상처한 후에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론과 미리암이 비난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너 참 잘났다!” 하셨습니까? “모세는 나와 대화하는 파트너다! 모세를 욕하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운 나를 욕하는 것 아니냐? 모세를 비난하는 것은 부모 얼굴에 침뱉기다!”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나병이 들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군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나병에 걸리게 하실 만큼 실망스런 일입니다.
우리 서로 격려합시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앞으로 잘 하실 겁니다!” 낙심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게 합시다. 실망한 사람이 다시 용기를 갖게 합시다. 시험에 든 사람이 시험을 이기게 합시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일이 모두 내게 달렸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남을 일으키는 격려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나 있는 반대자들
격려자가 있는 반면에 반대자가 있습니다. 반대자를 극복하는 것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반대자 없는 세상이 있을까요?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 반대자들을 극복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3) 바울의 길목을 가로막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지 최소한 3년은 지났을 텐데 여전히 바울을 괴롭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백성들 옆에 항상 반대자들이 있습니다. 광야 시절 모세에게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라와 그 일당들이 모세를 반대했습니다.(민16:1) 백성들은 틈만 나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사사 시대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삿8:1) 왜 전쟁에 나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부를 때는 제 때에 오지 않고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니까 시비를 겁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습성이 나빠요. 그 다음에 입다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올 때에도 똑같이 따지고 대들었습니다.(삿12:1)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왕과 백성이 다 신앙의 반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반대자들은 항상 예수님을 죽임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반대자들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대적자가 되었고, 사도 바울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이 훼방했습니다.
세상에는 반대자들이 항상 있습니다. 정치 판을 보세요. 여당와 야당은 반대가 아니면 일이 없습니다. 세종시 문제, 미디어 문제, 노동법 문제, 사사건건 서로 반대입니다. 이건 무슨 진리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한 정책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갈 데까지 갑니다. 생각과 사상도 반대자들이 대립합니다. 진보적인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이 서로 상대를 무식하다고 몰아붙입니다. 다 배울 만큼 배웠습니다. 아이큐도 다 거기서 거기에요. 그런데도 서로 무식하다고 합니다. 사사건건 같은 일을 놓고 해석이 다릅니다. 교육 문제를 놓고 서로 반대합니다. 문화의 문제, 윤리의 문제, 모든 방면에서 서로 대립하고 반대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반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에 좌초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를 극복하고 선한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진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시고,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선이시고, 절대적인 정의이십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사상도 절대적 진리는 아닙니다. 하물며 어떤 정책을 놓고 사생결단을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아무리 좋은 일에도 반드시 반대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반대에 직면할 때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과 반대는 사단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긍정과 화합, 일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반대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반대 때문에 할 일을 못해서는 안 됩니다. 선한 일이라면 누가 뭐래든지 상관 말고 계속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 성령 충만을 구하는 일, 예배드리는 일, 기도하는 일, 말씀에 경청하는 일, 성도 구제하는 일, 전도하는 일, 하나님이 명하신 선한 일들입니다. 누가 뭐래든지 선한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곁의 동지들
반대자들이 있으면 동지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곁에 항상 동지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반대자가 아니라 동지들입니다. 반대자가 몇 명이 되었든지 동지들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동지들 때문에 일이 됩니다. 오늘 내게 반대자들이 있습니까? 동지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계속하세요! 이것이 세상 반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바울의 동지들이 누구인지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4-6)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는 바울의 친척인 소시바더(롬16:21)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는 19장에서 데메드리오 폭동 때에 바울 대신 붙잡혀 수모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마지막 여행에 같이 했고(행27:2), 로마에서도 같이 있었습니다.(골4:10, 몬24) 세군도(SECUNDUS)는 영어로 second의 뜻입니다. 두 번째란 뜻인데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더베 사람 가이오는 루스드라 출신의 디모데와 친구지간으로 봅니다. 아시아 사람 두기고는 바울이 매우 신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바울이 로마에서 옥중 생활을 할 때에 함께 있었고, 바울이 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친히 전달했습니다.(엡6:21, 골4:7, 딤후4:12, 딛3:12) 드로비모는 에베소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인물입니다.
오늘 내 삶에 반대자들 때문에 힘드십니까? 반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들도 있습니다. 반대자를 보지 말고 동지들을 보세요. 동지들과 함께 하세요. 어떤 사람들을 보면 반대자 한 두 사람이 있다고 동지들까지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동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협력자들입니다. 오늘 내 곁에 어떤 동지들이 있습니까? 오늘 나의 평생 동지가 누구입니까? 명단을 한 번 만들어 보세요! 동지를 구하려면 내가 먼저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멘토를 구하십니까? 먼저 내 자신이 멘토가 되세요. 격려자가 되세요.
우리는 복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살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세워줄 힘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 낙심한 사람들을 주 안에서 위로하세요. 용기를 주세요. 그러면 먼저 내 자신이 평생토록 힘 있는 인생길을 가게 될 겁니다. 성공적인 삶이 될 겁니다. 반대자들이 어떻게 역사하든지 상관없이 목표를 이루는 삶이 될 겁니다. 격려하고 격려 받으면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두고 사건
행 20:7-12 / 김영규 목사
주일 예배와 애찬
바울은 헬라 지역을 순방하고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아시아로 건너왔습니다. 바울의 동행자 중에는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 머물던 누가도 함께 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에게해를 건너 아시아의 드로아 도착하여 칠일 간 머물렀습니다. 드로아는 무시아 지역의 서쪽 항구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정확한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인데, 알렉산더 대왕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드로아에서 약 6km 떨어진 곳에 유명한 트로이가 있습니다. 칠일 간의 체류 기간이 끝나는 마지막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주일날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7) 이 구절에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두 가지 전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 예배이고, 둘째는 애찬입니다.
첫째는 주일 예배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토요일에 모이지 않고 주일에 모였습니다. 토요일은 구약의 안식일입니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충돌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이 지키던 구약의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에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 주간의 첫날”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영문판도 그 주간의 첫째 날(the first day of the week)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종전의 개역 한글판에는 “안식 후 첫째 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En de; th'/ mia'/ tw'n sabbavtwn” 사도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은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째 날입니다. 달력에 보면 주일이 매주 첫째 날입니다. 주일이 첫째 날이기 때문에 토요일은 주말이 됩니다. 요즘 수첩들을 보면 월요일을 첫째 날로 만든 수첩이 꽤 많은데 잘못 만든 겁니다. “주일”이란 말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란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일요일”이란 말보다 “주일”이란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일은 초대교회부터 예배 드리는 날입니다.(고전16:2,계1:10)
둘째는 애찬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떡을 떼려고 모였다고 합니다. 떡을 뗀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애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때마다 모여서 애찬을 나눴습니다. 처음에는 애찬과 성찬이 큰 구별 없이 진행되었던 같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분명하게 구별이 되었습니다. 성찬은 예배 의식으로 정착된 반면, 애찬은 여러 가지 폐단 때문에(고전11:20-22) 카르타고 회의(주후397년)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애찬은 사랑의 음식이란 뜻입니다. 당시 애찬의 음식은 오늘날처럼 교회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집에서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일 예배가 끝나면 식사를 함께 나눕니다. 교회가 제공하고 많은 성도들이 식사 준비를 위해 봉사하십니다. 이 식사는 성도들이 사랑을 나누는 애찬입니다. 매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식사와 함께 서로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는 은혜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계속된 바울의 설교와 유두고의 죽음
다음 장면은 바울의 설교와 유두고 청년에 대한 얘기입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7) 이 당시 주일 예배는 오늘날처럼 예배 시간이나 예배 격식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에 모여서 설교를 듣고 애찬을 나누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드로아 교인들은 해가 지고 어두워진 저녁 시간에 모였습니다. 주인에게 매인 노예들이나, 일반인들이 일과에서 자유로운 시간은 저녁 시간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날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행선지로 떠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밤늦게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자나 듣는 사람이나 다 고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유두고의 죽음입니다.
유두고는 청년(neaniva",9절)입니다. 아마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피곤한 몸으로 말씀을 들으려 하니 졸음이 쏟아졌을 겁니다. 당시 예배 장소는 삼층입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8-9상) 삼층은 살림집이라기보다는 벽과 기둥으로 이루어진 다용도의의 공간입니다. 창문이라고 했지만 문이 달리지 않은 트인 벽면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전기가 없었습니다. 어두운 3층에 횃불을 여기 저기 달아 놓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골조 공사만 끝낸 빌딩에 횃불만 달아 놓은 모양새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횃불 연기로 인해 실내 공기가 탁했습니다. 유두고는 처음부터 시원한 창가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말씀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피곤하여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저는 매주 주일 예배 설교를 하면서 성도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한 주간 내내 일터에서 고생하다가 모처럼 예배당에 와서 평안히 쉬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깨소금 같은 졸음이 옵니다. 그런 분들에게 잠이 확 깨는 설교를 해야 되는데, 매주 안타를 칠 수는 없고, 수면제 같은 설교를 합니다. 듣는 분들은 내가 몸 밖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신령한 경지(?)로 들어가십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 가서 보니까,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데 목사님들은 상을 별로 받지 못하더랍니다. 설교 때마다 성도들을 자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뜻 밖에도 총알택시 운전사들이 상을 많이 받더랍니다. 태우는 손님마다 기도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졸았는데, 내 설교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성령님의 은혜만 바랄 뿐입니다. 아무튼 바울의 설교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졸음에 빠졌던 유두고는 그만 삼층 창문에서 떨어졌습니다. 놀라서 뛰어 내려가 보니 죽었어요.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9) 설교 듣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역사상 처음입니다. 유두고가 누구인지 몰라도 역사상 처음 설교 듣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 하면 다 압니다. 성경에 기록 되어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얘기 할 겁니다. 정말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 인사가 되는구나! 성령께서 성경에 그 이름을 기록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기억하게 하셨잖아요? 여러분! 졸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말씀을 들으세요.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저는 예배 시간에 조는 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얼마나 평안하시면 주님 품에 와서 주무시겠습니까?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그렇다고 다 주무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설교 말씀을 경청해야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성도 삶의 토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은 하늘 어디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아무 얘기나 듣는다고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매주 주보에 게재 된 설교를 읽으시나요? 저는 주일 설교가 끝나면 원고를 교정하여 주보에 싣습니다. 주일 설교 말씀을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매일성경 묵상도 그렇습니다. 매일매일 말씀을 보면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살립니다. 지혜를 줍니다. 용기와 담력을 줍니다. 내가 그날그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분명한 길을 보여주십니다. 말씀을 듣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듣는 자를 살리신 하나님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냥 설교 중단하고 장례식 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유두고를 살려주셨습니다.
유두고가 떨어지자마자 사도 바울이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갔습니다. 유두고 위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후에 바울은 유두고를 품에 안았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0) 마치 구약에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려낼 때의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엘리야가)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왕상17:21-22)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하4:33-34) 바울 사도는 유두고를 품에 안았습니다. 품에 안은 것은 사랑과 자비의 표시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소란 떨지 마라. 그의 생명이 저에게 있다! “Do not be troubled, for his life is in him”(NASB) 바울의 말은 유두고가 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바울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여 이때에 유두고가 그냥 기절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두고가 죽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의 판단에 죽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죽은 유두고를 하나님이 살리시리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유두고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성령의 계시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기도하고 곧바로 살려냈습니다. 할렐루야! 유두고(Eu[tuco")란 이름은 “좋게 달성했다”는 뜻으로 행운, 운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이름대로 되었습니다. 이름 잘 지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름이 좋아 살아난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살려 주신 겁니다. 유두고는 피곤한 몸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졸음을 참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유두고를 죽게 놔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로 살려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는 죽어도 사는 구나! 할렐루야! 하나님은 말씀 듣는 자를 살려내십니다. 죽어도 살아나게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을 살립니다. 영혼을 살립니다. 죽음 몸도 살립니다. 병을 고칩니다. 말씀이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변함없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은 유언집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이 성도 여러분을 살려내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 듣는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모든 육체의 병이 깨끗이 치유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살고, 육신이 살고, 모든 삶이 살아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날 피곤하다고 예배 빠지고 쉬면 조금은 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두고와 같은 생명 부활의 체험은 할 수 없습니다. 한 주간 내내 열심히 일하고 고단하더라도 예배당을 향해 나오세요. 졸리면 창가에 앉아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 듣는 여러분을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드로아에서 성도들은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했습니다. 아마 그 경험으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서 더 힘 있게 일을 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산다는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12) 유두고는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졸다가 죽은 증인이 아닙니다. 말씀 듣다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살리신 증인입니다. 죽은 증인이 아니라 산 증인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예배를 통하여 매주일 특별히 살아나는 체험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볼 때에 산 증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것이 바울의 주된 사역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래서 유두고를 살린 후에도 바울의 설교는 계속되었습니다. 10절에 보세요.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11) 유두고는 살아난 후에도 얼마간 수면 상태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애찬을 나눴습니다. 올라가서 떡을 떼어 먹었다고 했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입니다. 날짜가 바뀌었습니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식으로 날짜를 계산하지 않고 로마식으로 계산을 했습니다. 유대식으로 하면 하루는 저녁 해질 때 시작해서 다음날 해 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한 밤중 자정에서 시작해서 다음날 자정까지를 하루로 계산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설교하는 중에 자정이 되었기 때문에 날이 바뀐 겁니다.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애찬을 나눴습니다. 너무 이른 새날의 아침 식사를 한 셈입니다. 이 식사가 끝나고 동이 틀 때까지 바울의 설교가 계속되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바울은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바울은 밤을 꼬박 새워 말씀을 전했고, 성도들은 피곤한 몸이지만 밤새도록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정도의 열심을 갖고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겠습니까? 날을 새고 밤을 새우면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양향모목사 / 행 20:1-6
옛날에는 카메라 같은 것이 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어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보는 것이 귀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좋은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어서 셀카도 찍어서 볼 수 있고 동영상도 찍어서 내 모습이 어떤지 잘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가끔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면 걸음걸이나 말하는 모습이나 어색해서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꼭 보아야 할 나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사는지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가 남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나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데 바르게 믿는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과연 나의 믿음을 바른 믿음으로 인정을 해 주실지 나의 신앙생활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인정해 주실지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한교회의 가족으로서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함도 있습니다. 함께 설교를 들으면서,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진리를 바르게 알아가고, 신앙생활을 배워가고 점점 더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배우면서 특별히 사도바울의 세계 전도여행을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가 구약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구약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가 세계만방에 다니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것이며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오늘부터 사도행전 20장을 공부하게 되는데 20장은 19장에 이어 사도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3차 전도여행 가운데 에베소에서의 전도를 끝내고 그 다음으로 마게도냐를 거쳐서 드로아에 이르는 여행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짧은 기록이지만 여러 도시들을 약 10개월에 걸쳐서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확장을 위한 바울의 사역
본문에는 많은 도시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게도냐, 헬라, 수리아, 아시아, 베뢰아, 데살로니가, 더베, 드로아 등의 도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도시들이 바울이 이때 다 방문한 도시는 아니지만 바울이 1, 2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진 도시들입니다.
수리아는 이스라엘 복부지방에 있고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에서 바울이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파송을 받았습니다. 아시아는 소아시아로 지금의 터키지방을 말하고 더베와 드로아도 그 소아시아 지방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헬라, 베뢰아, 데살로니가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면 유럽의 초입에 위치한 도시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수리아에서 출발하여 소아시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한 도시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쪽으로 진행하여서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이자 명령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나갈 것임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제자들이 그 일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그 예언과 그 명령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지금도 계속 이루어져가고 있으며 우리가 그 일에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일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특별하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알게 해 주신 일입니다. 복음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그 비밀을 맡은 자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특별히 알게 된 사람들의 사명은 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려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목숨까지 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복음을 알고 믿는 일에 열심을 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새해에는 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돌아보는 바울의 사역
본문 1-3절에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친 바울이 유럽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다시 그를 파송한 지역인 수리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헬라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건너가려고 할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을 포기하고 육로를 통하여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각 도시를 지날 때 그냥 거쳐 가는 것이 아니라 각 도시에 들러 그곳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믿음을 확인하고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하는 일을 1절과 2절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는 에베소를 떠나면서 거기 있는 제자들을 불러서 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도 마게도냐 지방으로 다니면서 제자들에게 권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권하였다는 말은 권면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권면이라는 말에는 격려라는 말과 위로라는 말도 포함이 되어 있는 말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타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훤하게 알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여 복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교리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신에게 복을 빌고 신이 원하는 것을 바치고 신에게 맹종해야 했던 사람들이 믿음의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바울의 말이 옳은 것 같아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바울이 떠나고 나면 금방 복음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을 따릅니다.
다른 종교를 신봉하던 거짓선생들이 와서 복음을 비웃습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행이나 고행도 없이 믿음으로만 엄청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란 이 세상에서 좀 더 행복하게 살자고 따르는 것인데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는 고생만 하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지금이 좋아야지 지금은 고생하고 나중에 죽은 후에나 그 보상이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교회를 찾아가서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그 복음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이야기하고 힘들더라도 복음을 믿고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따르기가 너무나 힘이 들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반대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니까 마음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틈이 나는 대로 지나온 교회들을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특별히 다른 복음을 따르려고 하는 교회들을 향하여 편지를 써서 다른 복음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믿음의 원리를 자세하게 기록해서 전했습니다. 그런 편지들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서신서들입니다. 로마서 에베소서를 비롯한 13-14편의 바울서신서들이 그런 내용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도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복을 받아서 잘 사는 것이 좋지 먼 미래를 위해서 지금 고생하라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영원한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보다도 지금 이 세상에서 바로바로 복을 받는 다른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천국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즉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설교를 좋아하고 그런 설교를 하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중요하게 살펴볼 것은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른 복음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거짓선생들이 퍼트린 가짜 복음, 다른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제가 그냥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형편에서의 신앙생활과, 다양한 공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너무나 확실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성경전체의 핵심이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모든 성경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그 외의 모든 사도들이 확신하고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복음의 핵심을 잘 모르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변질된 복음을 가지고 있고 변질된 복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도 외형적으로 더 성장을 합니다. 외형적인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그런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을 따르다가 보니까 교회의 본질인 복음을 놓치고 엉뚱한 길로 가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변질된 교회들을 찾아가서 다시 복음을 전하고 다시 서신을 기록해서 보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교회도 이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른 교회들도 바른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바른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의 동역자들
본문 4-5절에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수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교회로 가고자 할 때 바울과 동행하려고 했던 몇몇 사람의 이름을 본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출신지명을 기록한 것은 아마도 이 사람들이 그 지역교회의 대표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지역교회의 대표들이 바울이 가는 길에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동역자이었을 것이며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로 갈 때도 동역자로 동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행을 하는 목적은 아마도 바울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에도 유대인들이 바울 해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했고 후일 바울의 고백에도 전도여행길에 많은 위험을 당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가 당한 어려움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6-27)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전도 여행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여러 동역자들이 동행을 하면서 그런 위험에서 바울을 보호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동역자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각 교회에서 모금한 연보를 가지고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와주기 위해서 헌금을 하여서 가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큰 교회는 너무 돈이 넘쳐서 돈으로 인해 시험이 들고 작은 교회는 돈이 없어서 시험이 듭니다. 큰 교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작은 교회들을 도우면 좋을 것인데 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라고 할지라도 더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교회들을 도울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지역교회들도 넉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막 시작을 한 작은 교회였지만 더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교회를 도우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어려운 교회지만 더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를 돌보아야 합니다. 어려운 교회를 돌아보는 일에 우리 성도님들이 다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을 통하여 우리가 행할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파하는 일에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따르는 참된 성도들을 위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귀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역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페소에서 밀레도스까지
정용섭목사 / 행 20:1-16
사도행전 읽기의 흐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이쯤해서 앞서의 전체 구도를 잠시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일정한 편집 목표에 따라서 진술되고 있다. 그 목표는 성령이 초기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사도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복음 선포의 성과가 크게 나타났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아주 강력한 속도로 확장되던 복음이 유대교와 헤롯왕의 박해를 받았지만, 그 박해로 인해서 복음은 훨씬 넓은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런 격랑기에 바울이 등장한다. 복음을 박해하던 바울의 회심은 이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율법과 복음의 자리에서 오직 복음의 자리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지역적으로는 이방인 첫 교회라 할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인물의 관점에서는 바울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의 시대로 들어선다. 그는 1,2차 선교에서 갈라디아,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지역에 복음을 선포했으며, 3차에는 갈라디아 서안의 에페소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오늘의 말씀은 이 에페소에서 한바탕 난리를 겪은 다음부터 진행된 바울의 여행 일지이다.
에페소에서 드로아까지
더 이상 에페소에서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울은 2차 선교여행에서 개척한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기로 했다. 20장1절은 이것을 축약해서 묘사한다. “그 소동이 가라앉은 뒤에 바울로는 신도들을 불러 격려한 다음,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 저자의 감정과 판단이 일절 중지된 문장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이 몹시 어려웠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의 선교는 늘 안팎으로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유대교로부터의 노골적인 박해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복음 공동체를 지향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어떤 근본적인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는 사실을 시나브로 깨닫고 있었을지 모른다. 에페소에서 일어난 소동은 그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이 에페소에서 당한 시련은 롬 15:30,31절, 그리고 고후 1:8-10절에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울은 다시는 에페소에 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자들을 격려하고 떠났다.
마케도니아 지역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 여러 유명한 도시들이 있는데도 누가는 구체적인 도시 이름을 거명하지 않는다. 바울이 도착한 아카이아(그리스) 지역에도 아덴, 고린도, 겐크레아 등의 도시가 있지만 역시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한 도시들, 그리고 그곳에 형성되어 있는 교회를 누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누가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 큰 싸움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현재 에페소에서 일어난 소동과 그 인근의 나쁜 분위기 때문에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가 하는 게 의심스러운 마당에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에서 활동한 내용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울의 쫓기는 심리가 3절에 드러난다. “거기에서 석 달을 지낸 뒤에 배를 타고 시리아로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자기를 해치려는 유다인들의 음모를 알아채고 다시 마케도니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의 항구 도시인 겐크레아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에 들렸다가 예루살렘을 거쳐 시리아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던 2차 선교여행과 비슷한 일정을 계획했지만 신상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걸 포기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그들은 두 패로 갈라섰다. 디모데를 비롯한 7명이 먼저 드로아로 떠났고, 누가를 비롯한 나머지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다음에 필립비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했다. 먼저 떠난 7명은 아마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선교비를 지참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어쨌든지 그들은 아주 위험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길을 통해 예루살렘까지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중이다. 그곳에서 다시 합류한 그들은 일주일 동안 함께 지냈다(6절).
드로아에서
드로아는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드로아는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상징성이 높은 장소였다. 갈라디아 지역에서 별로 이렇다 할 복음 선포의 기회를 찾지 못하던 바울이 드로아 항구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케도니아 사람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외치는 환상을 그곳에서 경험했다(행 16:6-10). 이런 점에서 드로아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비상하게 된 항구 도시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이제 바울의 선교 역사가 끝나는 바로 이 순간에 다시 드로아를 언급한다.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비전이 싹텄던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은 모든 선교 역사를 정리하는 신앙적 세리모니를 갖게 되었다. 7절 말씀을 보자. “안식일 다음 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 바울로는 그 이튿날 떠나기로 되어 모인 사람들과 밤이 깊도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식일 다음 날이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주일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중요했으며, 또한 그들은 수시로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그들은 오늘의 성찬식을 나누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의 성찬식은 원래 2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사랑의 만찬으로서 모든 신자들의 공동식사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식사로 인해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에 관해서 바울이 경고한 적도 있다. 다른 하나는 세례 받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식(儀式)으로서의 성찬식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성찬식은 예배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으니까, 그것의 영적인 의미만 한 가지 짚도록 하자. 성찬식은 기본적으로 물(物)의 영성화가 그 핵심이다. 비록 빵과 포도주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그 사실은 이 세상의 물질과 영이 기본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물의 도구화, 몸의 도구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세계관은 이런 성만찬적 신앙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뜻하지 않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바울의 설교가 재미없었든지 아니면 유디코라는 청년이 하루 종일 노동한 까닭에 피곤했는지 모르지만 3층 창문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디코는 졸음을 참지 못해서 결국 창문 밖 밑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청년을 부둥켜안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살아 있소.”(10). 바울의 말대로 유디코는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누가는 왜 유디코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까? 바울이 떠난 다음에 사람들이 이 청년의 일로 인해서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는 표현을 미루어볼 때 이런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드로아에서 밀레도스까지
그들은 소아시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밀레도스까지 내려왔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아쏘까지 육로를 택했지만 그 뒤로 그들은 배를 이용했다. 누가가 여기서 강조하는 있는 것은 바울 일행이 서둘러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16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바울로가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페소에는 들르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바울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비교적 중요했던 에페소에 바울이 들리지 않은 이유는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단지 시간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에서 한번 지적한대로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주로 에페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본다면 시간문제라는 것도 틀린 건 아니다. 에페소에 들렸다가 공연히 시시비비가 붙으면 이미 빌립비를 거쳐 드로아에 오기 전에 무교절을 지낸(6절) 그들에게 오순절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보내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을지 모른다는 염려는 당연하다.
바울은 무슨 이유로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려고 한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그 이유를 해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누가 자신도 이후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으며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서만 언급할 뿐이지 오순절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표현은 아무래도 저자인 누가의 문학적 구성력이 다소 소홀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분석할 수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체를 놓고 볼 때 바울의 운명을 예수의 그것과 대조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당하신 것처럼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그런 운명을 말렸던 것처럼 바울의 제자들도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을 극구 말린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처럼 바울도 역시 그렇다. 이런 구조라고 한다면 예수가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처럼 바울도 그 유월절과 연장선상에 있는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구도는 자연스럽다.
어쨌든지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조급한 심정으로 올라가고 있는 바울의 마음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지금 무엇 때문에 올라가는가? 그가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하는 것만이 목적인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바울의 비장한 설교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국 체포당하고 피의자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 당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내면에 매우 심각한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 전체를 배경에 놓고 그 상황을 추정한다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일정한 부분에서 율법으로 결탁해 있는 유대교와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 온 몸으로 맞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발을 들여놓는 중이다. 예루살렘 교회와는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유대교 신학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 바울에게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 은밀한 사태를 폭로하려는 것이다.
말씀이 잘 들리십니까?
전승문목사(교문교회) / 행 20:1~6
교회에서 역사하는 3대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가 교회를 공격하는 대표적인 3가지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는 섭섭마귀입니다. 이 마귀는 주로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마귀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섭섭한 마음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목사님에게 섭섭할 수도 있고 성도들에게 섭섭할 수도 있고 심지어 어떤 분은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 목사님이나 성도들이 알아주지 않고 하나님도 알아주시지 않는 것 같은 겁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일할 맛이 안 납니다. 열심히 충성할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마는 겁니다. 그게 섭섭마귀입니다. 섭섭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겁니다. 이 마귀, 정말 많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중에 이 마귀에게 한두 번 당하지 않는 분들이 없습니다.
두 번째 마귀는 깐족마귀입니다. 깐쪽 깐족,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마귀입니다. 말은 맞는 말인데, 분명 바른 말인데, 문제는 그 말을 깐족거리면서 하는 겁니다. 그건 바른말이라서 그러는 겁니다. 바른 말은 마귀의 말입니다.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죄하는 말은 다 바른말입니다. 아무리 마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옳은 말, 맞는 말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죽이는 말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고 지옥에 보내는 말입니다. 그게 마귀의 말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말씀은 좋은 말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주님이 받으셨다는 겁니다. 그게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지은 죄는 내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맞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내가 지은 죄를 대신 감당하셨다고 하십니다. 내 대신에 주님이 그 벌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세 번째 마귀는 졸음마귀입니다. 예배시간에 졸게 만드는 마귀입니다. 졸게마귀! 사실은 이 졸게마귀가 제일 많습니다. 물론 졸음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피곤하면 누구든 졸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누구나 불면증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밤새 잠을 못자고 뒤척이기 십상인 겁니다. 그러다 예배당에 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면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졸면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3대 마귀입니다. 섭섭마귀 깐족마귀 그리고 졸음마귀입니다. 물론 이 마귀 말고도 많은 마귀들이 있지만 주로 이 3가지 마귀가 성도들을 가장 괴롭히는 마귀입니다.
이 마귀들을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은혜 받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시간에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겁니다. 은혜 받으면 섭섭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은혜 받으면 감사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섭섭마귀는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지 못합니다. 감사의 마음이 회복되면 물러가는 겁니다. 또한 은혜 받으면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그러면 말도 변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로운 말을 하게 마련입니다. 은혜로운 말 바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 받으면 졸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있는데 졸음이 올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은혜를 받지 못하니까 졸린 겁니다. 물론 너무 피곤해서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졸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은혜 받으면 깨어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혜 받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임하는 시간에, 은혜가 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 받고 그래야 제대로 설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명 감당하고 그래야 열매 맺고 그래야 새로운 인생을 거듭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에베소교회가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바울이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결과 큰 은혜가 임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겁니다. 이제 바울은 다시는 에베소를 찾지 않습니다. 다시는 에베소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을 만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만 에베소교회의 장로들만 한 번 더 만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만나지 못합니다. 바울이 3년 동안 매일 복음을 전할 때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 때가, 바울이 매일매일 복음을 전해주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그걸 아는 사람들은,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 때 은혜를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영원히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분들입니까?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시간 시간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은혜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시험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은혜의 때가 지나고 나면 언제나 시험의 때가 찾아옵니다. 은혜의 때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 받을 기회를 놓친 사람은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기회는 절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특히 은혜 받는 기회는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겁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은혜 받는 기회를,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에베소교회도 그 기회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3년이나 머물렀던 바울이었지만 결국 떠날 때가 찾아온 겁니다. 사실 에베소의 3년은 정말 엄청난 은혜가 임하는 너무너무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때 받은 그 은혜로 신약시대 2천년 동안 교회가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되었고, 그때 은혜 받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갔습니다.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부, 발칸반도 북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바울이 다시 찾은 겁니다. 이것은 거의 6년 만의 방문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곳의 교회들은 잘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그 모든 핍박을 잘 견뎌내며 훌륭하게 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겁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을 비롯해 여러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물론 교회들을 돌아보며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나누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겁니다. 또한 그와 더불어 바울은 그 교회들을 통해 구제헌금을 모금하는 중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재정적 압박이 심해져서 그를 위해 헌금을 모으는 중이었던 겁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았으면 또한 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색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헌금을 드리는 것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또한 그래야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고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빌립보교회는 물론이고 데살로니가교회도 베뢰아교회도 기꺼이 헌금에 동참했습니다. 그렇게 마게도냐를 돌아본 바울은 이어 고린도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사실 그동안 고린도교회에는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일단 교회가 여러 분파로 나눠져서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예수파’ 그러면서 극심하게 대립했습니다. 또한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대립하고 갖가지 지저분한 문제들로 엄청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를 받은 후에는 문제가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제는 바울에게도 대적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바울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에베소에서의 3년 동안 어쩌면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해 더 많이 기도했을 겁니다. 다행히 디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고린도교회가 시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쁜 마음으로 다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된 겁니다. 물론 고린도교회도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에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그 기간 동안에 그 석 달 동안에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했다는 겁니다. 그 위대한 말씀 로마서가 바로 그 기간에,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집필된 말씀인 겁니다. 로마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킨 능력의 말씀입니다. 유명한 인물만 열거해도 어거스틴이 로마서 말씀을 읽고 회심했고, 마틴 루터가 회심했으며,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역시 누군가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듣다가 회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 회심하고 변화되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로마서를 많이 읽으십시오. 읽고 또 읽고 최소한 100번 이상 읽으십시오. 그러면 엄청난 은혜를 받을 겁니다. 정말 여러분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이 로마서와 함께 찾아올 겁니다. 그 로마서가 바로 이 기간에 집필된 말씀입니다. 고린도에서 집필한 말씀인 겁니다.
그렇게 로마서를 집필하며 겨울을 보낸 바울이 마침내 모든 일정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헌금을 각 교회의 대표자들과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 :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이방인들의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동행한 겁니다. 이 명단에는 없지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이 여행을 함께했습니다. 누가는 이때부터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동행하게 됩니다.
바울은 원래 배를 타고 수리아까지 단 번에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배에 바울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탑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다시 육로로, 그러니까 마게도냐와 소아시아를 거쳐 가는 길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멀리 돌아가야 하는 힘겨운 길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바울이 그렇게 돌아가는 덕분에 들리게 된 곳 그곳이 바로 드로아입니다. 드로아(Τρωάς), 일찍이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던 그 드로아를 찾게 된 겁니다. 사실 그동안 바울은 몇 번 드로아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드로아는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했을 뿐 제대로 복음을 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드로아에도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겁니다.
바울은 7일 동안 드로아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7일 동안 바울이 특별 부흥성회를 드로아에서 열었다는 겁니다. 그 마지막 날,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그 마지막 집회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드로아 교인 중에 유두고(Εὔτυχος)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겁니다. 바울의 마지막 집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드로아교회는 다락방에서 모이곤 했습니다. 다락방은 2층 혹은 3층에 있는 넓은 홀을 뜻하는 말입니다. 드로아교회에 중요한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틀림없이 은혜가 충만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틀림없이 은혜가 충만한 자리였을 겁니다. 또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무너무 중요한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충만했는지 바울이 밤늦게까지 말씀을 계속 전했습니다. 그러자 드로아 교인들은 많은 등불을 켜고 말씀을 더 잘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 유두고는 말씀을 듣다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창가에 앉아있었는데 그만 졸다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다행이 바울이 그 청년을 안고 기도하자 생명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그 일로 인해 드로아교회에는 오히려 더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유두고는 왜 졸았을까요? 물론 너무 피곤해서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졸았을 겁니다. 또한 집회에 오지 않는 것보다는 졸더라도 오는 것이 분명히 더 나은 것일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졸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든 졸면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들을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잘 들려야 합니다. 말씀이 잘 들려야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잘 듣는 분이었습니다 :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드로아 집회를 마친 후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혼자서 걸어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바울에게는 일행이 많았습니다. 누가를 비롯해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할 각 교회 대표자들이 함께 동행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배에 태워 보내고 바울은 혼자서 앗소까지 걸었다는 말씀입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30Km가 넘는 길입니다. 걸어서는 최소한 이틀이상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그 길을 홀로 걸었을까요? 말씀을 들으려고! 홀로 걸으면서 기도하려고! 그렇습니다. 기도하려고 홀로 간 겁니다. 이분이 바울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잘 들었던 분입니다.
그때 바울은 무슨 말씀을 들었을까요? 사실 그 길은 바울이 자유롭게 걷는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바울은 체포당할 겁니다. 그리고 로마로 압송될 겁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앞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환난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핍박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결국은 순교할 줄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려고, 더 잘 들으려고, 그래서 큰 은혜를 받으려고 걷는 겁니다. 은혜를 받아야 이길 수 있으니까, 은혜를 받아야 시험을 이겨낼 수 있으니까, 은혜 받으려고 걸은 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말씀을 들어야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성도는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산을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이 잘 들리십니까? 그래서 시간 시간 은혜 받고 있습니까? 혹시 유두고처럼 졸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안 됩니다. 졸면 안 됩니다. 졸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성도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은혜 받고 은혜 받아야 승리합니다. 귀를 여십시오. 들을 귀를 여십시오. 그래서 말씀을 잘 듣고 은혜 받아 승리하는 교문교회가 되십시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상웅목사 / 행 20:1-12
지난 12월, 바울의 에베소 사역까지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와 이후 기록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오늘부터 전하게 될 말씀은 바울이 로마까지 이르게 되는 긴 여정을 기록한 마지막 단원입니다. 이 마지막 단원은 지금까지의 기록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한 지역에 들어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워간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원에서는 교회를 새롭게 세운 기록이 없습니다. 그동안 세웠던 교회를 돌아보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체포되어 2년간 감금되고,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에 가게 되는 긴 여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로마까지 가는 과정을 통해서 바울의 성품과 내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의 사역에서 이런 변화가 왜 있었을까요? 이것은 바울의 사역 철학 때문입니다. 로마서 15:20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미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는 사역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철학대로라면 당시 헬라지역에는 모두 복음이 들어갔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도 설명. 바울의 1차 전도여행, 2차 전도여행, 3차 전도여행, 아볼로를 통한 북아프리카 전도)
바울이 이런 판단을 하도록 했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19:21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이 일이 있은 후에’ 이런 판단을 하였는데, 그 일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에서 마술을 하던 책을 모아 불사른 사건입니다. 2년여동안 두란노에서 말씀을 가르쳤더니 분별력이 생기고, 자신들의 삶에 들어와 있던 미신적 관습을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계기로 에베소 지역에도 자생할 수 있는 교회가 생겼으니 떠나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헬라지역에 바울이 복음 전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연스럽게 그 너머를 본 것입니다.
1. 바울의 계획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의 마음에는 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기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땅끝이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땅끝인 서바나에 가고자 했습니다. 로마서 15:23-24입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바울의 궁극적인 목표는 땅끝인데, 로마를 거쳐 로마교회의 파송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서쪽은 헬라의 문명이 들어가지 않은 미개한 곳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언어가 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역한 곳은 헬라문명이 들어가 헬라어가 통용되는 곳이었지만, 로마 서쪽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바바바’하는 것처럼 들려서 이들을 ‘바바리안’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했기에 로마에는 이를 도울 사람이 있었기에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시 19:21을 보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땅끝까지 가기 위해 로마를 보아야 합니다. 로마없이 서바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어디로 가기로 작정했습니까? 예루살렘입니다. 그것도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가는 것입니다. 로마로 가기 전에 더 시급하게 선행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6:1,3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하고, 그것을 모아 전달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연합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둘을 이어주는 접합체는 은혜였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깊은 유대관계를 보일 길은 이방인 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사랑의 증표를 건네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세웠던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교회를 거쳐 이들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바울의 궁극적 목표는 땅끝, 서바나였습니다. 이를 위한 중간 목표는 로마였습니다. 그러나 시급하게 선행할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숲만 보고 나무를 못본 것도 아니고, 나무만 보느냐고 숲을 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런 계획이 있습니까? 그저 하루하루 급급하게 살고 있습니까?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고, 이를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마중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곧 창립 13주년이 돌아옵니다. 14살이 되면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한 단계 성숙하고 전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방해물
바울은 이런 계획 가운데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1-2절입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원래의 계획대로 마게도냐로 갔고, 아가야가 있는 헬라로 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3절입니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헬라, 즉 아가야의 고린도에서 바울은 석 달을 머물렀습니다. 겨울에는 배 운행을 하지 않았기에 봄이 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간동안 바울과 갈등을 겪었던 고린도교회를 권면하고 위로했으며, 로마서를 기록하여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계획에 방해물이 생겼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유월절을 지키려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바울도 그 배를 통해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증오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수리아로 가는 배에서 바울을 죽이려 공모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배 안에서 사람을 죽일 계획을 할 수 있을까 놀랍게 여겨졌습니다. 아마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고, 예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며 세운 계획인데 방해물이 등장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계획대로 배를 타야 합니까? 바울은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육로로 마게도냐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각 교회에서 모아진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5절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각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은 배로 먼저 보냈습니다. 드로아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계획대로 되신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초조해하고, 실망하고, 때로는 계획 자체를 포기해버립니다. 어떤 분은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그때그때 순종하면 되지 굳이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니요. 계획도 필요하고, 망가진 계획에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망가진 계획은 위장된 선물일 수 있습니다. 물론 나의 게으름으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돌아가게 하시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되 너무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의 변화로 계획을 수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이요, 인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3. 드로아의 집회
원래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이방인 교회의 사랑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무교절이 지나서 겨우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일주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 계획대로라면 그 시간에 예루살렘에 있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과 만나 드로아에서 7일을 보냈습니다. 7절입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주간의 첫날이라는 것은 일요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떡을 떼려 모였다는 것은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안식일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이날 있었던 사건을 다루기 전에, 이 집회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집회였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에게 드로아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6:6-8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바울이 터키의 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하나님이 막아서 할 수 없이 머문 곳이 드로아였습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막막한 마음으로 드로아에 있었습니다. 드로아에서 머무는 동안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떠난 곳이 마게도냐였습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미지의 땅을 향해 첫걸음을 했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세워진 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교회에 보낼 헌금을 가지고 모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한 결과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수년 전에는 막막함만이 있었던 드로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은혜로운 드로아의 집회가 밤중까지 이어졌습니다. 등불을 많이 켰기에 산소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창에 걸터앉은 유두고라는 청년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만 3층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의사 누가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드로아에서 한창 타오르는 복음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드로아 교회에 심각한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사탄의 방해 공작은 있습니다. 이 감격을 한순간에 깨려 했던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바울은 자신의 몸으로 죽은 유두고의 몸을 덮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행동은 아이를 살린 엘리야와 엘리사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사도였던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렸던 것처럼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도 생명을 살린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로써 드로아 교회는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드로아 교회는 유두고를 볼 때마다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헬라 사역을 마무리하고, 서버나로 가야겠다 판단했습니다. 이를 위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로 가기에 앞서서 선행과제로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이 목표를 가졌다 할지라도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과정과 실행 과제가 없다면 이는 외치는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중물에서는 다음 달 1호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창립 13주년을 맞으며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또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속 목표를 잃지 않고 다음 단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워진 계획이 장애물을 만났을 때, 실망하기보다는 그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각 개인이 깨어있고, 교회가 더욱 하나될 때,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
행 20장 1~27절 / 이동휘목사
1. 사도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에서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 등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13:4-18), 제2차 전도여행은 마게도냐 환상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했지만 한 밤에 성령께서 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환상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게도냐(유럽)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행16:9-10)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이렇게 해서 아시아로 가려던 선교 여행이 유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럽 선교의 시작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그리고 고린도가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행16:6-18:23). 또한 약 3년간에 걸친 제3차 전도여행은 대부분 소아시아 서부 지방에서 이루어졌던 바, 바울은 주로 에베소의 복음화에 주력했습니다(19:1-21:16). 바울은 3차에 걸친 자유로운 전도 여행을 통하여 눈부신 이방 전도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사도 바울로 인하여 복음의 불길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강력하게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라틴 세계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며(롬 15:24), 로마를 그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본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체류지였던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계 선교를 위한 전도자로서 “예수께 받은 사명” 감당을 위해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희생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역설함으로 후세대를 위한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20:18-31)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부딪치는 역경이 어떤 것이든, 예상되는 위험이 어떤 것이든, 바울의 선교사명의 행진은 멈추지 않습니다. 태산이 막으면 돌아갑니다(3절).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전진했습니다.(22-24절) 걸어서 가기 어려우면 무릎으로 갑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성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자 사도 바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란과 역경이 어떤 것이든, 앞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신앙생활과 순례의 길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부름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처음부터 신앙생활의 역경은 예상한 것입니다. 공짜로 십자가를 자가용처럼 편안히 타고 천국으로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택한 길, “예수께 받은 사명”의 길은 처음부터 좁은 길이요 험한 길입니다. 찾는 이가 적은 길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멈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나가는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은 분명합니다.
(히10:37-39)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진실로 예수 믿는 성도들은 복음 전도에서 뒤로 물러가 후퇴할 것이 아니라, 전진하는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한 번 지기로 결심한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눅17:32)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유황불 심판을 받아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다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죽었습니다. 예수 믿고 세상을 향해 미련을 가지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위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을 계속해서 달려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이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여러 날을 머물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 다음날 배를 타고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당연히 드로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참석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짧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정까지 계속 설교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목사가 밤 12시까지 설교한다면 몽땅 다 집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가 자정에 설교를 멈춘 이유는 그 교회 청년 중의 한 사람인 유두고가 설교 중 졸다가 창문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대단히 무더운 여름밤이었을 것입니다. 바람이 들어오도록 모든 창문을 다 열어 놓았습니다. 유두고는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점점 눈이 무거워지더니 끝내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3층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가서 유두고 위에 엎드려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유두고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그토록 기다렸던 사도 바울의 설교에 한 말씀 한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있는데 유두고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개인적인 일들과 문제를 생각하거나, 혹은 세상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을 꿈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두고처럼 영적으로 잠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졸거나 자겠습니까? 얼마나 사회생활이 힘들고 고단하면 설교 시간에 자겠습니까? 안식일인데 좀 그 시간이라도 편히 안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요. 그 모습을 두고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잠자리에 들지도 모르지만 사탄은 잠자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일을 합니다. 굶주린 사자처럼 항상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예배시간에 교회에 들어와서 각 사람들의 마음에 속삭이며 유혹합니다. 어느 책에 이런 재미있는 글귀가 있었는데, 모두 영적으로 병들고 잠들어 있는 교인의 모습을 나타낸 글입니다.
나팔꽃 신자 : 주일 아침에만 잠깐 얼굴을 비치고 나머지 모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춘 교인,
해바라기 신자 : 시대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감투교인 : 감투를 주어야 교회에 나오는 교인.
벙어리 교인 : 친구끼리 모이면 그렇게도 말 잘 하는 사람이 예배시간에는 입꽉 다물고 있는 교인.
시험 채점관 교인 : 설교 비평이나 하고 남의 흠이나 잡는데 이골 난 교인.
유람선 교인 : 이 교회 저 교회 왔다 갔다 하며 정착하지 못하는 교인.
묵상 교인 : 집에서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 예배만 시작하면 조는 교인.
국회의원 교인 : 한 가정에서 대표자로 나오는 교인 등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설교 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조는 그런 사람은 달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맛을 모를 것입니다. 물론 재미없는 설교를 하기 때문에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많은 시간과 기도 가운데 설교를 준비하지만 주일 설교를 엉망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후 강단을 내려올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무척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말하고 있다면 비록 듣기에 달콤하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반드시 배우고 깨달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 빠져 있어서 마음에 평안이 없거나, 귀신에게 잡힌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흔히 딴 생각에 빠질 때 곧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경은 잠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여러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어느 때 주님이 오실지 어느 때 순간적으로 오실지 몰라서 아무 준비 없다가 덜컥 가신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귀하고 지혜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일본 라디오 제작 회사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생산 제품에 하자가 많이 생기고 그 물건을 구입한 고객들로부터 불평이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우리 제품에 하자가 있을 수 없는데........” 하면서 제품을 수거했습니다. 검사해 본 결과 특히 점심 식사 이후에 만든 제품이 그렇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공장의 많은 직원들이 졸면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공장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즉 30초 하품 휴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심 식사 후에 가장 졸음이 많이 올 때쯤 되어 모든 공장 직원들이 다 함께 두 팔을 머리 뒤로 하고 30초 동안 큰 소리로 하품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후로부터 생산성이 훨씬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해 영적으로 깨어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때에 맞지 않는 잠은 실수를 범하게 되지만 알맞은 휴식은 우리에게 생기를 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활짝 깨어 있어야 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3. 유두고 사건 이후 바울의 선교 사역은 쉬지 아니하고 계속되었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현재의 불안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갈망을 마음에 안고, 사도 바울은 조용히 묵상하며 20마일(32km)을 혼자 걸어서 여행했습니다. 그는 앗소에서 제자의 무리와 다시 합류한 후 배를 타고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 마침내 밀레도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30마일 떨어진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그들을 만나게 됩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그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오직 선교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을 두고 이렇게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딤후4:5-8)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위한 삶을 두고 “달려갈 길”, 즉 마라톤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정해진 거리, 42.195 km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처럼 그렇게 선교 여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온갖 속박의 끈을 다 끊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빌립보로, 다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향했다가 그곳에서 헬라로 가서 3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다시 그는 마게도냐로 다녀서 누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앗소까지 20마일을 혼자 걸어서 여행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혁신적인 전도의 여정을 볼 때 우리는 그의 삶을 지배한 열정을 표현한 그의 고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시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는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자신의 환경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환경(그것이 역경이든 순경이든)을 변화시켜서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으로 불탔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무리 앞에서나 홀로 있을 때에나, 헬라에서의 위험한 적대 앞에서나 드로아에서 사랑스런 형제들 앞에서나 그는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굳은 신앙을 갖게 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굳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평안이 넘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 감당을 위한 뜨거운 열심과 충성 속에서 심령의 안식과 평안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쉬지 않고 무던히 애썼습니다. 자기의 주인,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그는 결코 시간을 낭비하며 꾸물거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는 그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경우에라도 그는 자신이 사랑과 봉사를 베풀어야 한다고 느낄 때에는 기꺼이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쉬지아니하고 전진하면서 목전의 일들을 철저히 수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렸으나,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있어서는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에 매임을 받아” 일하지만 “은혜의 말씀”을 전하려 하는데는 전혀 매이지 않았습니다.
(행20:23-24)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어느 부인이 남편의 지나간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지만요. 예수믿기 전에는요. 밥 먹다가도 자기 기분만 조금 나쁘면 ‘야’ 하고 밥상을 대문짝에 집어던지기를 일주일에도 두세번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미안하고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이 새빨개져서 “목사님 오셨는데, 그건 다 지나간 이야긴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나오다가 무슨 이야기까지 나왔느냐 하면, 깡패 대장을 지낸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깡패 두목하면 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떡 벌어지고, 덩치가 있고,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눈이 우락부락해서 눈만 부릅뜨면 우리같은 사람은 기절해 나가자빠질 정도로 그런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얌전해뵈고, 체구도 작고 얼굴이 가마잡잡한 분이 얌젼하게 생겨서 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서면 일대에서 두목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선생님, 생각보다 다르네요?” “뭐가 달라요?” “깡패 두목하면 인상이 이렇게 이렇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전혀 안그렇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두목까지 할 수 있었나요? 두목하면 주먹이 무기인데 주먹을 쓸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두목을 하셨어요?” “아이 참 목사님, 이것 참 창피한데 목사님이 물으시니까 말하지요. 대장 노릇하는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기술로 하세요?” “기술도 아니에요. 뭐 기술이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그럼 힘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뭘로 하세요?” “이걸 (목을)내놓으면 돼요.” 그러면서 그는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하고 싸울 때 내가 이 놈하고 싸워서 죽는다 죽는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결사적으로 붙어놓으면 키 큰 사람이 느낀다고 합니다. ‘이 놈이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붙었구나’ 그것을 알면 덩치 큰 사람이 무릎을 딱 꿇는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전에는 자기 목을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두려운 환경 속에서도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을 받은 자는 비록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하나, 끝까지 사명감당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박해 시절에 로마 외곽의 어느 지하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살던 엄청난 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카타콤베(catacomb)라고 하는 지하굴입니다. 이 굴의 길이는 960km로서 서울 부산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이 굴은 약 300년간 10세대를 이어 오면서 작게는 175만 명, 많게는 400만 명이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굴 속의 여기저기에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가장 많은 그림은 물고기 표시였습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Ιησoυs,예수. Χχριστοs,그리스도.Θεοs데오스,하나님.Υιοs휘오스,아들.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구세주-이들 단어의 첫 글자를 모으면 ΙΧΘΥΣ잌투스.물고기가 된다.)라는 말의 약자가 “물고기”(ιχθυs)라는 단어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선명한 문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묶이지 않는다.”라고 쓴 것입니다. 우리들은 숨어 살고, 묶여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그 지하 동굴, 카타콤베(catacomb)에서 대를 이어 가며 햇빛도 없이 살아간 그들에게 참 자유가 있었으며, 참 은혜가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소리없는 찬송이 얼마나 가득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빛과 복음의 빛만 의지하고 산 것입니다. 그래도 그 굴 속에 찬송과 감사와 기도가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명자는 그의 사명을 마치려함에 모름지기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울 수 있어야 참된 사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백성이 파멸할 것을 생각하며 슬피 통곡했습니다.
(사22:4)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예레미야는 자기 눈이 눈물의 근원이 될 만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울었기 때문에 그를 울보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렘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이런 많은 눈물이 우리들에게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도 겸손에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결도 겸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의 눈물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끓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으며 배척하는 사실로 인하여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롬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1절에 포함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러분이 “예수께 받은 사명”은 오직 성령의 매임바 되어 불타는 선교의 열정으로, 어떠한 위험과 환난과 역경이 있다할지라도 사명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께 받은 사명, 복음 전도에 마음과 힘을 다하시므로, 장차 영광스러운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되살아난 유두고
박종광목사 / 행 20장 1~12절
교회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중 하나는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자신들의 양떼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할 때 이다. 리더가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죽으려 할 때, 사람들도 그들이 속한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죽으려 한다. 리더가 앞장서고, 리더가 먼저 헌신할 때 함께 속한 성도들이 따라오는 것이다. 작아도 이런 교회에 소망이 있다. 저는 교회를 위해 아주 많은 성도들을 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좋은 씨앗을 달라고 기도한다. 왜 이렇게 기도하느냐 하면 이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씨앗으로 인해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씨앗은 곧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그 사람으로 인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성장한 교회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같이 이런 헌신된 사람들이 기둥처럼 있다는 것이다.
옛날 부전교회에 백남조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 장로님은 부전교회 시무 장로로 있으면서 광목을 표백하는 기업을 운영했었다. 그런데 이 분이 교단 신학교인 총신대가 어려웠던 1963년 당시 총신대 이사장이셨던 노진현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목사님, 누군가 신학교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텐데 미력하지만 제가 학교 부지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사당동 부지 2만 평을 구입하여 합동 총회에 헌납했다. 그때 부지 구입 비용으로 돈 2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금액이 얼마나 큰 금액이었느냐 하면, 당시 사당동 캠퍼스 건축을 위해 전국의 노회들이 모았던 헌금이 12만원에 불과했다. 백 장로님은 기업체를 운영하면서도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지 않고 공장 안에 있는 작은 판자집에 기거하면서 노모를 모시고 살았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인색하고 교회를 위해서는 풍성하신 분이 백남조 장로이셨다. 그분이 총신대 부지 마련에 사용한 재원은 노모에게 집을 드리려고 모아 왔었던 돈이었다. 장로님은 당시 채플실조차 없어 학생들이 복도에서 설교를 들어야 했던 시절, 민족과 세계 복음화를 위해 훌륭한 기독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며 이런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백남조 장로는 부전교회 건축에 헌신하셨을 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수 많은 교회에 땅을 헌납하고 많은 교회당을 건축해주었다. 그런 백남조 장로는 또한 기도의 용사였다. 생전에는 매일 오전 6시, 낮 12시, 저녁 6시 가정 기도회에서 하루도 총신대를 빼놓지 않고 기도했었다.
대구 서현교회의 정규만 장로님도 그런 분이었다. 정규만 장로는 예수님을 믿기 전 술주정뱅이였다. 그저 돈 한푼 생기면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고, 집에 가면 불쌍한 아내를 두드려 패곤 했다. 그러다 ‘깡패 목사’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집회에 참석한 후, 예수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정규만 장로는 급격히 변화되었다. 바로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갔고, 집에 조그만 함을 만들어 10원을 벌면 1원을 넣어 십일조 생활을 했다. 또한 새벽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가서 기도생활을 했다. 이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다. 이후 하나님이 이 정규만 장로에게 복을 주시는데, 풀 뜯어 장사 하던 사람이 약 장사를 하게 되었고 약점 골목에서 제일 잘 되는 약국주인이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이 집에 와서 약을 지어먹으면 병이 잘 나았다고 한다. 희안한 일이었다. 어떻게 다른 약국에서 지어준 약으로는 안 나았는데, 이 정 장로의 약국에서 지어준 약은 분명한 효능이 있는 걸까? 소문이 돌고, 그래서 다른 약국 주인들이 와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약을 짓길래, 우리 약을 먹으면 안 낫고, 당신 약을 먹으면 낫습니까?” “특별한 재료가 하나 들어갑니다.” “그것이 뭡니까?” “기도라는 재료가 들어갑니다.” 그는 약 봉지 하나를 지을 때마다 기도를 한 것이었다. 이 장로님은 그렇게 해서 벌었던 수익으로 대구 주변에 있는 어려운 교회 50-60곳을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었다. 또 공부는 하고 싶은데 집이 가난한 수 백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어려운 가정 수백, 수천 가정이 정장로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정 장로는 또한 농촌 교회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대구에 일이 있어 올라오면 꼭 약국에 들러라 했다. 그래서 찾아오면 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주고 갈 때는 여비를 주는데 한 번도 세어서 준 적이 없었다. 세어서 주면 인색해진다고 주머니를 벌리라 해 놓고 그냥 넣어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면 버럭 화를 내었다.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시오. 오늘 이 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늘 이렇게 하니 어떤 분들은 미안해서 대구에 갔다 안 들리고 가는데, 그러면 또 화를 내었다 한다. “왜 남의 복 받는 길을 못 받게 하시나, 나는 저기 앉아서 풀 장수 하던 술주정뱅이 정규만이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갚을수 있도록 꼭 나한테 들러주시오.” 이 분이 나중 신앙이 좋아져 장로가 되어 소문이 나니 수많은 사람들이 대구 서현교회로 몰려 왔다. 이런 분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을 할 때, 대구가 생긴 이래 정규만 장로님 같은 장례식이 지금도 없었다고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세상에 태어났으면 정규만이처럼 살다 가야지라며 존경했다고 한다.
우리 부영교회도 앞으로 이런 인물들이 일어나야 한다. 양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두루 살필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양떼를 위해 목숨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했다. 교회의 리더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죽어야 한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더러 죽으라 명하신다. 리더가 죽으려 하지 않으면 교회가 죽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리더들이 자신의 이익에 몰입하고, 자신의 편의와 만족. 인정만을 구하고 살면 교회가 점차적으로 망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양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한 사람과, 그런 헌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너무 허망한 죽음을 당한 한 청년이 나온다. 사도 바울의 헌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위험을 지나왔는지 모른다.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번이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었고, 동족들의 배신과 수많은 우상숭배자들과의 싸움과 논쟁으로 그는 항상 위험한 상황에서 목숨 내놓고 사역했다. 오늘 20장 3절에도 보면 유대인들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장면이 나온다.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 하는 장면은 이제 거의 매장 마다 나온다. 바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위험에 처해 가는 것이다. 그는 이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오늘 20장만 보아도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에베소에서 3년 동안 헌신적으로 사역했던 바울은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강론하고 평일에는 일을 하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었다. 그러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곤궁을 보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지를 다니면서 구제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중이다. 바울은 이 와중에도 잠시의 시간을 내어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제자들을 권하고 가르쳤다. 특히, 바울은 드로아에서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배를 기다리기 위해 한 주간을 머물렀다. 바울은 이곳에서 기독교 공동체와 교제를 나누었는데, 출발하기 전날인 ‘안식후 첫날’ 곧 주일에 성도들과 더불어 성찬을 하고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하였다. 아마, 바울로서는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이제 여기를 떠나면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 있는지 알 수 없는데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떠나야겠다.’ 그래서 바울은 한밤중 늦게까지 계속 강론을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함께 합쳐졌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배우고자 눈이 반짝 반짝 할 때 목사는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고 졸고, 안 듣고, 하품 하고, 딴짓 하고, 그러면 설교나 강의 원고가 팍 줄어든다. 교제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목회를 해보니 목사 혼자 기도하고 성령충만하여 말씀 잘 전할 수 있는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성도들을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 가운데 전해지는 것이다. 설교 잘 못하는 것이 목사만의 잘못은 아니고, 설교 잘 하는 것도 목사의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성도의 협력이 이 일들을 좌우한다. 아마, 그 밤에 바울도 성도들도 가르치는 열정과 배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후끈하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 밤중 늦게까지 강론한 것이고, 나중에는 성찬을 한 후, 날이 새기까지 성도들과 이야기하고 한 숨도 자지 않고 드로아를 떠난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자기의 온 몸을 불살라 양떼를 돌보았던 헌신적인 리더였다.
그에 반해, 오늘 본문에는 이런 바울과 상반된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유두고’이다. 유두고는 ‘운이 좋은’이란 뜻이다. 학자들은 이 유두고란 이름이 예수님 당시 하층민들에게서 많이 사용되던 이름으로, 이 유두고가 노예나 하인의 신분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이 청년은 바울이 강론할 때 창에 걸터앉아 있다 깊이 졸다 마침내는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바울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가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바울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것은 복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유두고란 인물에 대해 분석해 보면, 사실 그의 이름은 성경에서 오늘 딱 한번 등장한다. 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말씀을 듣는 중 졸다가 죽은 인물로 다소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메튜 헨리는 이 유두고에 대해 그가 성경에 나오는 이유가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졸면 죽는다!) 실제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유두고를 이런 관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아, 우리는 말씀 듣다가 졸지 않아야 겠구나’ 그런다. 유두고에 대해 조금 더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주는 학자들도 있다. 칼빈은 유두고가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질타하는 학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 학자들은 유두고의 졸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침 그 때가 한 밤중이었고, 낮에 고단한 일을 하여 피곤하였고, 더욱이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고, 등불도 많이 켜져 산소가 부적하였으니 조는게 당연하다고도 보았다. 더욱이 브루스라는 학자는 유두고가 졸았다고 하여 바울이 책망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자, 우리는 이 유두고를 어떤 관점에서 봐야할까?
양떼에 대한 헌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의 헌신적인 행적은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있지만, 이 유두고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헌신도, 충성된 모습도, 교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성경은 다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그가 고의로 졸다 죽었든, 그의 죽음이 자신의 과실이 아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든, 그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러나 바울의 이적을 통해 살아난 이후에 성경 어느 것에서도 유두고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죽었다 살아났으면 교회를 위해 무언가 큰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유두고는 그렇지 않았다.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큰 은혜를 입었는데 반해 그의 삶은 너무나 조용하다. 그에 반해 바울은 최고의 핍박자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360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최고의 복음 전령자가 되었다. 실패한 베드로도 그랬다. 비록 예수님을 부인했던 과거의 행적은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고기 잡으러 돌아갔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유두고는 아니다. 아마도 그는 평범한 삶을 살다 다시 죽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런 유두고의 생애를 살피며 교회를 돌아본다. 교회에는 양 떼를 위해 목숨바쳤던 바울같은 인물, 백남조 장로님, 정규만 장로님 같은 헌신하는 리더들이 있는 반면, 자신의 믿음 외에 아무에게 도전도 주지 못하고 혼자 믿다 쓸쓸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유두고는 그런 사람이다. 무엇보다 부활이라는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유두고는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 만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던 유두고가 양떼를 위해 헌신적인 리더가 되었다면 드로아 교회 역시 초대교회에서 주목받는 기독교 공동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밤새 강론하고 가르쳤던 드로아 교회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초대교회사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여기에 우리 교회의 주소가 있다. 영도에만 해도 100여개 가까운 교회들이 있다. 그 교회들 가운데 어떤 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저는 그 이유 중 하나가 그 교회들 가운데 양떼를 위해 목숨바쳐 헌신하는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좋은 일군들이 배출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어야 한다. 은혜 받고 머물러만 있는 성도가 아니라, 은혜 받고 꿀꺽 삼키고 입 싹 닫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받았으면 양떼를 위해 목숨바쳐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는 좋은 일군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이어야 할 것이다.
기도합시다.
리더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리더의 자존심이, 생각과 편안함, 자아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리더가 먼저 헌신할 때 교회가 변화될 수 있고 비전있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내 자아가 먼저 죽을 때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내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어지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게 기도합시다.
또한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두루 살필 수 있는 헌신적인 인물들이 이 교회를 위해 많이 배출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부영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 교회를 잘 돌아볼뿐더러 하나님이 보내시고 심으신 곳에서 헌신적이고 충성적인 삶을 살고 좋은 모범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좋은 목사와 선교사, 전도자, 교사, 좋은 산업의 일군들, 좋은 중직자들이 많이 배출되게 하옵소서.
함께 가는 자는
행 20장 1~16절 / 신성종목사
한국 정계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하나는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치만은 아니고, 인생도 줄을 잘서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소속을 잘해야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선후배 관계의 소속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은 영적으로도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과 함께 가는 자가 되자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대로 에베소의 소요가 끝난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를 지나 수리아로 가려고 할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는 공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 속에서도 바울과 함께 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요절은 바로 4절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4절에 나오는 일곱 사람의 이름은 교회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중에 우리가 아는 사람은 디모데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다 무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 역사 상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고, 또 천국에서는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소바더’라는 사람은 로마서에 보면 ‘소바시더’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그는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베뢰아 교회의 높은 직위를 갖게 되었고,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을 위임받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나오는 ‘아리스다고’는 빌레몬서 14절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마가와 나란히 이름이 나올 정도로 큰 일군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나오는 ‘세군도’라는 인물은 다른 어떤 곳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본문의 내용을 볼 때에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로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네 번째 ‘가이오’란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으로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로 ‘디모데’는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제자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여섯 번째는 ‘두기고’란 사람입니다. 에베소 6장 21절에 보면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드로비모’가 나옵니다. 그는 에베소 출신으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사람입니다. 딤후 4장 20절에 보면 그가 병들므로 바울은 그를 밀레도에 그냥 두었다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죽은 자도 살리는 권능이 있는 사람인데 그의 제자인 드로비모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보면 신유의 은사는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때만 역사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오늘은 이들을 중심으로 ‘함께 가는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먼저 주님과 함께 가는 자는 ‘행복하고, 성공’합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456장 1절). 한분의 사람 ‘인’자(인)를 보면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글자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주님과 함께 할 때에 행복하고 성공합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마슬로우는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존의 욕구, 둘째는 안전의 욕구, 셋째는 소속의 욕구, 넷째는 존귀함의 욕구, 마지막으로 자아 성취의 욕구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제목인 함께 가는 자란 말은 바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속의 욕구’를 말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 속하여 주님과 함께 가면 우리는 행복하고 성공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성공한 기록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넘치도록 있습니다. 하와는 ‘아담과 함께 하지 않는 동안에’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습니다. 또 가인은 부모와 함께 하지 않는 동안에 들에서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영성을 상실하여 육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홍수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였을 때에는 가는 곳마다 형통하였고,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애굽에 갔을 때에는 위험에 빠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경우를 보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에는 많은 샘물을 팠습니다. 목축업자들에게는 샘은 생명선입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이 우물을 네 번이나 팠다고 했습니다. 18절에 한번 팠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매웠습니다. 21절에 보면 또 우물을 봤는데 다투는 것을 보고 포기했습니다. 22절에 보면 또 우물을 팝니다. “다른 우물을 팠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장소를 넓게 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했습니다. 그 인내와 관용은 그로 하여금 큰 목축 기업가로 성장시켜주었습니다.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부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결혼은 차라리 혼자 사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21장 9절에 보면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는 것이 항상 나은 것은 아닙니다. 또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친구요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서 싸우는 입장이라면 차라리 헤어지는 것만 못합니다.
성경에는 잘못된 사람과 함께 하므로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르호보암 왕은 노인들이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강경책을 결정함으로 결국 아버지가 넘겨준 나라를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또 아합 왕은 이세벨이란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는 두로 왕의 딸인데 신당의 여 선지자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 아합 왕 자신이 바알 숭배자가 되었고, 결국 함께 한 아내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이처럼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왜 성공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인내심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청지기인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고, 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거짓말도 꽤 단수가 높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라고 칭찬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은 그가 선하기 때문도 아니고, 사실 그는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왜 그런데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믿습니까?
3. 주님과 함께 갈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1) 주님과 함께 하면 먼저 ‘영광’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도 우리가 함께 받게 됩니다. 골 3장 4절에 보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영광을 받아 누릴 그릇을 준비케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이란 것입니다. 고난에는 죄로 인한 고난도 있습니다. 이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할 그릇 준비의 고난은 많이 받을수록 복이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함께 고난도 함께 주십니다. 빌 1장 29절에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왜 고난을 주십니까? 영광을 위한 그릇준비와 함께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자로서는 가장 많은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받은 최고의 학위는 박사학위가 아니고, ‘고생 졸업장’입니다.
(2) 주님이 함께 하시면 ‘겁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359장 1절). 저의 집 강아지는 혼자 있을 때에는 큰 개가 오면 도망하고, 피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함께 있을 때에는 얼마나 악착같은지 몇 배 큰 사냥개에게도 덤벼듭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만 함께 있으면 저보다 큰 아이들보고도 겁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굽신거립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모든 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을 때 세상에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믿습니까?
겁만 없습니까? 강성해집니다. 대상 1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3) 영적인 ‘고독’이 없어집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고독이 있습니다. 남녀가 혼자 살면 성적인 면에서 외로움이 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친구가 없을 때 사회적 외로움이 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분들은 하다못해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함께 있어야 외로움이 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외로움은 하나님을 떠날 때 오는 영적 고독입니다. 이 공간은 오직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가지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김이 필요합니다. 창 2장 7절의 말씀처럼 생령이 되어야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은 해결됩니다.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를 영접해” 믿습니까?
(4) 주님과 함께 하면 ‘참 행복’이 옵니다.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인간의 참 행복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면 참 행복은 옵니다. 이 행복의 극치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롬 6장 8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최대 문제가 죽음의 문제인데 주님과 함께 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다시 육체 부활하여 영원한 영광을 누립니다. 할렐루야!
(5)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의롭다함’을 받을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잘 했다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심판하실 때, 잘 했다 칭찬하리니 이러한 상급 받도록 예수를 위해 삽시다.”
4. 그러면 어떻게 주님과 함께 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라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왜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따라서 주님과 함께 가는 첫 번째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인간으로서는 결단코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영성을 회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것은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땅만 바라보는 자연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먼저 거듭나서 육신의 내가 죽고 영적인 내가 살아나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교통을 해야 합니다. 교통은 말씀의 묵상과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셋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삶의 목적을 하나님 영광을 위하고, 방법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제자란 말의 뜻은 “따르는 자”, 혹은 “함께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유명한 지상명령의 핵심을 보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자를 삼습니까? “너희는 먼저 가서” 즉 전도하고, 다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즉 교회 성장시키고, 다음에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요, 제자훈련입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했습니까? 주님의 하시던 일을 승계할 뿐만 아니라 그 중에 하나는 함께 있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이처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끝으로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 1:33). 임마누엘의 삶은 사실은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순종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생은 제 멋대로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체면을 세우려고 하고, 공적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보다는 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왕국보다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줄을 잘서야 합니다. 따라서 승리자이신 주님과 함께 가므로 항상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참 기쁨과 성공과 열매를 맺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주 없이 살 수 없네”(415장)라는 찬송이 진심으로 드리는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을 끄는 사람
행 20장 7-12절 / 강문호목사
베를린에서 2시간 반 내지 3시간을 가면 비텐베르그 성이 있습니다. 바로 루터가 농촌 목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평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귀족들만 다니는 귀족 교회가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그 귀족교회 정문에 종교 개혁을 위하여 95개 조항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그 동안 이 성은 공산권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 곳은 온 세계인들의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일년에 680만명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만도 70만명이 찾아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 강대상 우편에 루터 묘까지 있습니다. 한 명이 이 곳에 와서 루터 책을 사고, 차를 마십니다. 10만원씩만 쓴다고 하여도 일년에 이 곳에서 사용하는 돈은 6,800억원이 됩니다.
이곳은 루터 거리, 루터 대학, 루터 까페, 루터 레스토랑등 모두 루터이름뿐입니다. 이 곳 주민 3만명은 대대로 루터 때문에 먹고 사는 이들입니다.
나는 루터 묘를 붙들고 기도할 때에 <사람을 끄는 사람>이라는 말이 영감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끌 수가 있을 가요?
본문을 보면 바울은 분명히 사람을 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드로아에서 7일을 머믈렀습니다. 그 곳에 있는 성도들과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내일은 바울이 떠나는 날입니다.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끌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였는 지를 암시하는 말씀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8절에 등불을 많이 켰는 데.....등불을 많이 켰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9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라는 말씀속에도 사람이 많았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창가에 걸터 앉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의 설교가 길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 하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떠들었다는 말을 보니 스데반을 죽일 때 수많은 군중이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행22;23)라고 하였는 데 그 군중들의 떠드는 것과 같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떠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받았다고 하였는 데 그 사람들도 무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바울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을 가든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목사는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성도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교회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영화도 사람을 끄는 영화가 성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람을 끄는 사람일까요?
바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사람을 끄는 사람인 지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귀로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바울은 귀로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끈 것은 무엇인가 할 말이 있고 온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무엇인가 들을 것이 있어서 모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칼기를 폭파시켰던 김 현희와 같이 논산지방 감리교 연합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월요일 밤부터 목요일 밤까지 집회인 데 수요일 오후 2시에 김 현희가 오게 되어 있고 나머지는 내가 인도하는 집회입니다. 내가 집회를 인도하는 시간에는 600석 교회가 보기 좋게 찼을 뿐입니다. 가득 차지 못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 현희 오는 시간에는 온통 그 주변에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경찰이 동원되고 난리였습니다.
나는 집회 앞자리에 앉아서 “나는 무엇인가?”라고 허탈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들려 줄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끕니다.
귀에 줄 것이 있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몰려 듭니다. 따뜻한 말을 하여 주는 사람을 사람들은 찾아 갑니다. 용기있는 말을 하여 주는 사람을 사람들은 찾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흠모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조항을 걸어 놓은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다면 1520년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종교 개혁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지금까지 제도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 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선언한 것은 종교개혁의 원자폭탄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책에서 4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1. 모든 성도는 세례받는 순간 제사장이 된다.
2. 성직자와 성도는 같은 제사장이기에 계급이 있을 수 없다
3. 성도는 이제부터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직접 하나님께 비밀 회개가 가능하다
4. 성직자와 성도는 기능면에서 구분될 뿐이다.성직자는 말씀 선포의 직능을,성도는 세속직분을 감당하여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줄 때 온 유럽은 루터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몰려 들었습니다. 유럽의 시선은 루터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갔습니다.
쓸데 없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말을 들려주는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사람들은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일본 최고 제약회사 가네보 회사 회장 미타니야스토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많이 받았기에 그는 제약회사 사장이면서도 일본 전역에서 강사로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들을 것이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난리들입니다.
그는 그 회사의 인사 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출근하기만 하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책상에 성경을 펴놓고 읽었습니다. 회사에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였습니다. 얼마 후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종교 활동을 하지 말아라.”
그는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선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그리고 성경을 읽는 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회사를 쫓겨 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
마음에 평강이 찾아 왔습니다. 그 후 그는 직장에서 더 열심히 전도하고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회사의 경영을 총 책임지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지나온 이야기를 알고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였습니다. 그는 회사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인생을 멋지게 살고 감동있게 산 사람에게는 사람들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2.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바울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끈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울을 따라 다니면 언제나 눈으로 볼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따랐습니다.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른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 데 바울에게는 언제나 표적이 따랐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창가에 걸터 앉았다가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19장 바로 앞장에서는 가는 곳마다 바울이 희안한 기적이 따르고 있음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이렇게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끌게 됩니다. 루터가 500년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끌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도 기적이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따랐습니다.
몇 년전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유럽 연합 집회를 인도할 때 루터가 재판을 받은 웜스 국회에 가본적이 있습니다.그런데 그 국회로 들어가는 길을 <루터 바움 스트라세>라고 부릅니다. 루터가 재판을 받을 때 한 할머니와 천주교인이 길거리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인은 루터는 배반자라고 못박으며 열을 내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루터가 맞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길가운데 꽂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루터가 올바르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
며칠이 지났습니다.길가운데 꽂아둔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그 나무는 세 명의 어른이 팔을 벌려야 잡힐 정도로 굵고 큰 나무가 되어 길 가운데 있습니다. 그 나무를 루터나무라고 말하고 그 거리를 루터 거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따르는 사람은 사람을 끌 수 있습니다.
덴마크에 갔더니 덴마크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국부 영웅은 그룬드비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신성한 직업인 농업을 강조하면서 온 국토에 농산물을 심기를 권하였습니다. 전 국민이 온 농토에 씨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가물어서 모든 땅이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룬드비 목사님은 기도를 선포하고 온 국민이 기도하는 데 1842년 4월 16일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에는 해마다 4월 16일을 기도의 날로 정하고 공휴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기도의 날이 있는 나라를 처음 보았습니다. 덴마크가 35,000불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는 일등국가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끌게 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 큰 교회는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는 ICM교회입니다. 지금 주일낮 45,0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그렇게 많이 모이는 이유도 기적이 늘 따르는 눈으로 볼 것이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카스텔라노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데 중풍병자 12명이 나란히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났는 데 안수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신유의 역사가 한번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카스텔라노스 목사님은 중얼거리며 기도하였습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겠나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중에 세 번째 줄에 앉아 있는 중풍병자가 간절하게 사모하는 눈빛이 닥아 왔습니다. 그는 영감적으로 그 사람을 하나님이 지목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앞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 곳으로 쏠렸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까?”
“걸어서 가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 왔는 데 그가 휠체어를 밀고 나갔습니다. 그 후부터 이 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3. 손에 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본문에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 모인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7절에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떡을 떼러 모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송별파티하러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송별파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일 떠날 것이니까 일찍 쉬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날이니까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였습니다.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밤중까지 설교가 계속 되었습니다. 밤중이 몇 시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유두고 청년이 졸은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래 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진심의 사랑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끌었습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이 신는 구두는 앨런 에드먼드입니다. 이 구두 회사의 경영자 존 스톨렌워크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가지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파악한다.
2. 고급 구두가 아니라 최고 구두를 만든다.
3.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기업이 된다.
이런 철학으로 미국 최고의 구두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구두 회사가 되기까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984년 불이 나서 공장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터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구두를 만들던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허탈함속에 말했습니다.
“다 두 손을 드세요.”
모두가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가 말했습니다.
“구두 만들어 놓은 제품이 다 타버렸습니다. 구두를 만들 가죽도 다 탔습니다. 공장도 탔습니다. 그러나 구두를 만들 두 손은 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그는 사원들에게 분명한 철학을 주었습니다. 용기를 주었습니다. 희망을 주었습니다. 힘을 주었습니다. 그 회사가 최고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그 회사 구두를 사신으려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매장마다 몰리고 있습니다. 대통령까지 끌어당겼습니다. 줄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줄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돈이 아쉬울 때에는 그에게 가서 빌려 쓰고 갚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누구나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항상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으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한 사람만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화가 났습니다. 그를 만나 물었습니다.
“왜 당신만은 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돈을 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그러면 내 재산을 반을 주면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당신 재산의 반을 주면 당신과 내가 재산이 같은 데 무엇 때문에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그러면 다 주면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당신 재산 다 주면 내가 당신보다 부자이고 당신은 빈 털털이인데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당당한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온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신유의 은사로 병든 사람을 살렸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죽은 유드고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두 여자가 출연하였습니다. 사실은 원수지간입니다. 한 여자가 알콜 중독자로 운전을 하다가 마주 앉아 있는 다른 여인의 딸을 치어 죽게 하였습니다. 가해자 여자는 딸을 셋 두었습니다. 그러나 알콜 중독되어 세상을 멋대로 살아가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죽였지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오히려 술을 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주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여야 합니다. 나는 내 딸을 치어 죽인 저 여자를 용서함으로 주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고양이는 따뜻한 곳에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사람, 무엇인가 주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끄는 사람, 사람을 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고 어떤 교회가 사람을 끌 수 있을 가요?
1. 귀에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2. 눈에 볼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3. 손에 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초대 교회 신앙의 특징
양희천목사 / 행 20:7-12
서론: 봉독한 성경 말씀은 초대 교회의 신앙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초대 교회 때부터 주일날 예배를 드렸습니다. 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떡을 떼려 하여 모이고 강론을 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은 구약과 유대교의 안식일 다음 날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주일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둘째,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식(聖餐式)을 행하고 사랑의 애찬(愛餐, 공동식사)을 나눴습니다. 본문에 “떡을 뗐다”는 말은 성찬식과 애찬을 의미합니다. 셋째, 초대 교회는 예배 시간이 매우 길었는데 예배 시간은 대부분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때도 예배 시간이 3시간 정도 됐습니다. 넷째, 초대 교회는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뜨겁고 긴밀했습니다. 11절에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주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를 마친 후, 날이 새도록 이야기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초대 교회 신앙의 특징”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식을 행하고 애찬(愛餐)이라는 공동식사를 나눴습니다.
본문 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려 모였다”고 번역돼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구약의 안식일 다음 날로 오늘날 주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떡을 떼려 모였다”는 말은 주일날 성찬식과 교회의 공동식사인 애찬을 나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19, 마태복음 26:26). 그래서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초대 교회처럼 주일마다 성찬식을 하지는 못해도 성찬식을 자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행하여 주님의 구속(救贖,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냄)의 은혜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은혜로운 성찬식이 되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라고 한 달 전부터 성찬식 광고를 하지만 성도들의 준비와 정성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1:27-29). 그러므로 성찬식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마음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하며 경건한 자세로 참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초대 교회는 예배 후에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사랑의 애찬이라는 공동식사가 있었습니다. 이 애찬은 교회에서 준비하지 않고 조금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집에서 준비해 왔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노예나 하인 같이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가난한 성도들의 몫까지 식사를 준비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노예나 하인 같은 가난한 성도들은 주일날 교회에서 먹는 사랑의 애찬이 유일한 식사다운 식사였습니다. 초대 교회 때 노예나 하인처럼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성도들에게는 주일날보다 복된 날이 없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노예와 하인으로 멸시와 차별을 받지만 교회에 나오면 형제와 친구와 이웃으로 사랑을 받았고 빈부와 귀천의 차별이 없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맛있는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고된 노동에 지치고 굶주린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나 하인 같이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20).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충성되고 진실한 성도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사랑을 나누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오늘날 성도들은 예배가 끝나기가 바쁘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초대 교회는 2세기까지 교회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예배를 성도의 가정에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를 가정교회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는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하나가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가난한 성도들의 몫까지 감당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제2의 도약과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가 청년으로 교회에 다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는 정말 세상과 달랐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중에는 회사 사장과 대학교수와 장관도 있었지만 예배 후에는 담임 목사와 장로와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점심으로 제공하는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몇 시간씩 대화하며 사랑과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와 자매라는 사랑이 실천되었습니다. 얼굴을 몰라도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끼리는 강하고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식을 하고 사랑의 애찬이라는 공동식사를 나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초대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 사랑을 나누고, 가난하고 약한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초대 교회는 성도 간에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의 친교가 있었습니다.
본문 20:11,에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이 샐 때까지 담소하며 사랑과 친교를 나눴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초대 교회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인데 왜 오늘날은 초대 교회와 같은 사랑과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치열한 생존경쟁과 복잡한 사회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성도들의 신앙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초대 교회처럼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지도 않고, 사죄와 구원과 영생을 신앙과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성도도 많지 않습니다. 믿음의 형제가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자기 아버지보다 다윗의 편에 섰던 요나단과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진실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냉정하고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양들이 깜짝 놀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사랑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형제간에 사랑하고 우애할 때 기쁘고 흐뭇합니다.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이 무엇이냐?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가난하고 약한 형제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인 조건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형제자매는 구원의 방주라는 배에 함께 탄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공동운명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바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날은 몰라도 주일날 하루만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부족하고 모자란 형제와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사랑은 모든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성도들 간에 아름답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매우 사모했습니다.
사도행전 20:7, 하반절에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설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저녁 식사 후에 시작해서 늦은 밤중까지 계속된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도 없었고 초대 교회는 목회자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성경도 없고 목회자도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바울 사도 같은 훌륭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번 설교가 시작되면 몇 시간씩 계속됐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기도, 찬송, 헌금,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배의 4대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기도와 헌금과 찬송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은혜와 복을 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해서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바울 사도의 설교를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삼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예배 시간에 졸고 하나님 말씀 듣지 못하면 시험과 어려움을 당한다는 경고와 교훈입니다. 사람이 몸이 피곤해서 잠깐 조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 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졸고 잠을 자는 것은 육신의 피로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에 졸고 잠을 자다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 말씀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영혼이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말씀이 믿음을 낳고, 말씀이 영혼을 소생시키며, 말씀이 우리를 의와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유롭게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양식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기갈을 당할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아모스 8:11-13).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고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할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북한과 공산주의 국가와 이슬람 국가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자유롭게 읽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유롭게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초대 교회 때는 교회건물도 없었고 성경책도 없었고 목회자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또 초대 교회는 교인들의 대부분이 노예나 하인들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초대 교회가 당한 환난과 박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해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부흥시켰습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부흥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의 자리를 되찾으려면, 초대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처럼 성도 간에 사랑과 친교가 회복돼야 합니다. 또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 말씀을 신앙과 인생의 유일한 법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행하고 실천하셔야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친교가 넘친 초대 교회처럼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전도하셔서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졸면서 드린 예배
행 20장 7~12절 / 이필재목사
사람이 참기 어려운 것 가운데 졸린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생명이 위험한줄 알면서도 좁니다. 여러분, 누구나 다 경험하셨을 겁니다. 졸음 운전하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졸잖아요? 저는 운전하면서 꿈을 꾼 적도 있습니다.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교통법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졸리면 길가에 차 세워놓고 차 안에서 자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교통순경들이 잡아놓고 가지 말고 여기서 자라고 지켜줍니다. 물론 도로 사정에 따라 다르기는 해도 교통경찰들이 졸음 운전한다고 생각하면 금방 잡아서 당신의 생명만 위험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위험하니까 우리가 여기서 지켜줄 때까지 자라고 못 가게 합니다. 그래서 자고 갑니다. 저는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을 책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졸더라도 교회 나오는 것이 안 나온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 시작한지 5분 정도가 되면 꼭 졸기 시작해서 끝나기 5분 전에 깨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제가 도움 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앞자리에 앉으시면 훨씬 낫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성가대를 하세요. 그러면 도움이 됩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준다고 하셨으니까 잠은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졸더라도 교회는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교인들이 조는 것은 목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설교를 졸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장가 같이 들리니까 조는 겁니다. 제가 계산해보니까 50년도 더 넘었습니다. 제 손 위에 동서되시는 분이 목사님이신데 저보다 11살 위십니다. 그분이 신학교 다닐 때가 50~55년 전 일인데 신학교 교실에서 경험하신 것을 저에게 이야기해주셔서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익숙지 않은 한국말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여름이라 학생들이 졸려서 꾸벅꾸벅 다 졸았답니다. 그런데 그 날의 강의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의 아시아 전도 여행을 열심히 강의하는데 다른 발음은 정확하지 않아도 사도바울이라는 단어는 똑똑히 말했는데 50년 전, 60년 전 한국사회는 무척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쌀밥을 먹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 보리밥을 먹었습니다. 이 보리밥은 건강에는 좋은데 가끔가다 방귀가 나와서 실례할 때가 많습니다. 가난한 신학생들이 꽁보리밥을 먹고 꾸벅꾸벅 졸다가 어떤 학생이 방귀를 끼니까 학생들이 참을 수가 있습니까? 그냥 “와!”하고 폭소를 참지 못하고 터뜨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인데도 남이 하면 꼭 우습더라고요. 선교사가 화가 난 겁니다. 가득이나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을 안 해서 마음이 상해 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책상을 치면서 “누가 했소?” 그러니까 꾸벅꾸벅 졸던 학생이 깜짝 놀라서 “네, 사도바울이요.” “아니, 방귀를 사도 바울이 했소?” 그러니 얼마나 우스워요? 제 동서 목사님이 그 시절에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두고 청년이 예배 중 졸다가 창밖으로 떨어져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기록입니다. 이 사건을 누가 이렇게 성경에 남긴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의 경건성을 위한 유익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고, 유두고의 사건은 영적으로 크리스찬의 위치에 큰 영향을 주는 말씀으로 조명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의 예배를 우리가 상상해 보면 설교자도 설교를 듣는 자도 모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 첫째 이유는 바울 사도께서 설교를 너무 길게 하셨습니다. 7절에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 하며”라고 했습니다. 몇 시간을 계속 한 겁니다. 우리 교역자들의 교수법 가운데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어떤 일에 집중할 수 있는데 필요한 시간이 60분이라고 과학적으로 계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또, 모든 세상에서 뭘 하든지 모이면 그 정도로 시간을 맞춰서 하고 그 다음에 휴식을 취해야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제가 3시간 이상 설교를 하면 다음 주 교회 출석에 아마 영향이 있을 겁니다. 저도 평생 설교를 하면서 살아왔지만 분위기에 맞게 시간 조절을 하면서 설교를 잘 한다는 것은 그분의 실력입니다. 어렵습니다. 학교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교장 선생님이 누군지 아십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고 하면서 30분 이상 하는 사람이고 교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목사는 축도하러 나와서 설교 한번 더하는 목사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인교회 축구 시합이 열렸습니다. 아주 중요한 축구 시합입니다. 거기서 우수한 선수를 한국의 전국 체전에 보낼 선수로 선발하는 시합입니다. 수십 교회의 축구 잘하는 청년들을 다 모아서 거기서 우수 선수를 골라내는데 교회 청년들이 모였으니 예배드리고 한다고 협의회에서 나에게 설교를 하라는 겁니다. 축구 경기장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축구 경기에 나온 청년들에게 은혜가 되겠느냐?” 이렇게 물었더니 청년들이 “목사님! 간단합니다. 짧게만 하시면 됩니다.” “어느 정도로 짧게 해야 되는데?” “성경만 읽으십시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흥회 다니면서 제일 싫어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내가 설교 다 한 것을 다시 한 번 또 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면 그날 부흥회 헛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다 싫어하는데도 버릇인지 항상 그렇게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어 사고가 생겼는데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뭐냐? 말하는 사람은 시간 조절이 안 됩니다. 듣는 사람은 길고 짧은 것을 다 분간하면서 듣는데 말하는 사람은 조절이 안 되어 그 조절을 분위기에 맞게 잘하는 사람이 실력자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닐 때 함석헌 선생님에게서 동양철학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사상가라서 비판력이 날카롭잖아요? 그분에게 걸렸다 하면 대통령에서 목사까지 신랄하게 비판 대상이 됩니다. 그분이 강의 시간에 목사들을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을 하시는지 그분의 강의를 듣다보면 목사될 마음이 다 없어져 버립니다. “나는 몰랐을 때 장로교회에 나갔었는데 지금은 장로교회 안 나가!” “그러면 예배를 어떻게 드리십니까?” “퀘이커 교도 예배 나간다.” 퀘이커 교도들은 특정한 설교자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모여 앉아서 찬송 부르다가 성령의 지시가 있는 사람이 5분 동안 말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장로교회에 안 나가는 이유는 장로교 목사들이 설교를 너무 길게 한다. 설교 몇 마디 하면 되는 것 가지고 그렇게 길게 하니, 나는 그런 교회 안 나간다.” 그렇게 비판하시거든요? 그런데 이 신학교에서는 강의 중간에 경건 예배를 전체가 모여 30분 동안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는 교수님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되고 어떨 때는 우수 학생이 있으면 교무과에서 그 학생에게 설교 하라고 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함석헌 선생님도 교수이시니까 설교하실 차례가 되었습니다. “와! 오늘은 함석헌 교수님 설교하실 차례니까 5분 안에 끝나겠구나.” 이렇게 기대하고 모두 참석했는데 2시간 5분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학생들이 막 공격하는 겁니다. “어휴! 교수님! 함 교수님이 목사가 안 되신 것은 하나님 뜻입니다. 함 교수님 목사 되었다면 그렇게 짧게 하라고 하시면서 2시간 5분을 하셨으니 교회에서는 5시간 설교하시겠습니다.” 그랬더니 시계를 보시면서 “어? 시간이 그렇게 됐어?” “이 다음부터 너무 목사들 비판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비판하기는 쉬워도 실제 해보면 어렵다는 것을 함 교수님 좀 아세요!” “그러게 말이야.” 비판은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세요. 어렵습니다.
영적 의미로 오늘 말씀을 조명하면 유두고 청년이 예배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위험한 것임이 나타납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장소는 3층이라고 했습니다. 3층 꼭대기에 유두고가 앉아있는 자리는 창문에 걸터앉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3층 창문에 걸터앉은 자세는 이유가 어찌되었든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유리창 닦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도 안전장치를 하고 일하는데 예배드리는 사람이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다니 이것은 위험의 노출입니다. 예배는 절대 안전감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만 이상하게 굴어도 이 예배는 다 망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으로 위험한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함이 이 말씀의 암시적 교훈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경 제일 처음의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위치 설정을 어떻게 했나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늘 성가대가 불렀잖아요? 유대 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읽는 시편의 첫 머리에 이것부터 말했습니다. “너는 어디 앉아있는 거야? 네 위치는 어디야?” 앉아야 할 자리가 있고 앉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맹자의 어머니, 정몽주의 어머니 모두 자기 아들이 앉는 자리 때문에 교육하신 분들로 유명합니다. “너는 학자 아니냐? 너 같은 학자요 선비가 왜 정치판에 뛰어들어서 온갖 위험스런 삶을 사느냐? 까마귀 싸움에서 백로야 가지 마라.” 결국 갔기 때문에 끝났잖아요? 성경에도 많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스라엘 과도기 역사의 통치자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들릴라’라고 하는 기생집에 자주 앉아 있다가 비참한 인생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신앙상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자리는 피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됨을 이 말씀이 암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갔더니 원숭이가 얼마나 많은지 예배드리는 바로 옆 창문에 와서 먹을 것아 없나 기웃거리면서 주변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들이 머리가 참 영리하답니다. 사람을 닮아 영리한지 아마 동물 중에 제일 영리한 것이 원숭이라고 말하는데 이 원숭이를 어떻게 잡느냐 원숭이 잡는 방법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말하는 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원숭이 잡는 것 아주 쉽습니다.” 원숭이 못 잡잖아요? 얼마나 날쌘지 나무를 훌훌 날아다니는데 어떻게 잡아요?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답니다. 큼직한 항아리를 갖다 놓고 거기에 술을 부어놓으면 된답니다. 이 원숭이들도 사람을 닮아서 그런지 술을 좋아한답니다. 술 냄새가 나면 새까맣게 몰려옵니다. 그런데 머리가 영리하기 때문에 안답니다. ‘이 인간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알고 주변에 모여서 앉아있기만 하는데 이 냄새가 솔솔 올라오니까 처음에는 냄새들만 맡다가 그 중에 한 놈이 “도무지 안 되겠다.” 이렇게 기웃거리며 돌아보다가 팔이 기니까 길게 팔을 내려서 맛을 보니까 맛이 기막힙니다. “에라, 모르겠다.” 뛰어들어서 그냥 막 마시니까 다른 원숭이들도 뛰어 들어가서 서로 마시는데 이게 알코올이니까 원숭이도 취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서 곤드레만드레 되어서 한참 있다가 사람이 가서 들고 오면 된답니다. 아주 쉽답니다. 유두고의 이 사고는 예배 자리 선정의 처음부터 위험스런 선택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듣는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창가에 걸터앉은 그 자체가 겸손해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 걸터앉아 무슨 은혜를 받겠습니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같은 말씀을 들어도 자리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창문에 위험스럽게 걸터앉은 자세로 말씀의 은혜를 받겠습니까? 성경에 보세요.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나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의 백부장이라고 했습니다. 현역 군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청해 온 집안 식구들, 아는 사람들을 다 오라고 해서 베드로 앞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말씀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 앞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자연인 베드로이지만 당신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말씀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있나이다.” 그리고 설교를 듣더니 그 시간으로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례 받았다고 그랬잖아요? 주님은 일에 분주한 마르다보다 말씀을 열심히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해당되시는 분은 좀 죄송한 말인데 우리나라에 ‘치맛바람’이란 말이 있잖아요? 엄마들이 돈 써가면서 왜 자기 아이들을 교실 앞자리에 앉히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앞자리와 뒷자리의 학습 효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앞자리에 앉히려고 애쓰는 겁니다. 창문에 걸터앉으면 자연히 바깥세상이 시야에 들어오게 마련이고 그러면 마음도 집중력도 떨어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세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가장 훌륭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배의 모범을 그렇게 중요시합니다. 예배에 충실하지 않으면 교회는 오나마나 입니다.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왜 중세기에 교회들이 그렇게 내리막길을 걸었는가? 왜 교회들이 몰락했는가? 예배의 모범이 잘못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하는 시간을 거의 없애고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몇 마디하고 의식 중심의 예배 모범을 가졌다가 교인이 다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걸터앉은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하나의 문화생활을 즐기는 액세서리 정도로 걸터 앉아있으면 신앙생활의 향상이고 신앙생활 하나마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기억해 봐요. 2000년 전 유대 나라는 생활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열악해 사회 전체가 다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러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먹고 마시는 문제 해결이 곧 복음이요 구원이 됩니다.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문제가 민주화보다도 더 앞선 가치가 있고 도덕 윤리보다도 앞서갑니다. 가장 심각한 가치관이 먹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그들을 향해 예수님의 설교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주여! 우리들의 최상의 가치관은 지금 그것입니다. 그 문제를 좀 해결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무시해버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치관이 뭡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먼저 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그럭저럭 걸터앉은 자세로, 하다 말면 그만두고….’ 이렇게 합니까? 성경 말씀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런 가치관을 구약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입니다. 중간에 걸터앉아서 이쪽저쪽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전력,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나님을 믿으라 이겁니다. 성경에 졸다가 인생이 크게 고난스러워진 사건이 있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1시간의 졸음 때문에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인 함께 기도하는 일에 동참하지 못했다가 그날 밤에 베드로는 시험에 들잖아요?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 아무 상관이 없다.”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말을 합니다. 일평생 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자기가 만들었잖아요? 기도했더라면 물리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졸다가 신랑을 저버리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사데성은 졸다가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격언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부탁 “깨어서 기도하라.” 시편 121편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중간에 걸터앉아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배와 같도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불면 저쪽으로 밀려가는 이런 사람은 주께 얻기를 희망하지 말라.” 결국 이 청년 때문에 예배는 중단되고 수라장이 되고 온 교회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생명은 소생하여서 다행히 마무리는 잘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믿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 일 때문에 다른 것을 다소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믿고 사는 집이 내 인생의 최대의 가치관이요 마치 ‘나는 이것을 위해서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많이 있는 가운데 주일날도 ‘오늘 골프 치러 갈까, 어디 놀러갈까? 에이, 그냥 교회 가자.’ 그런 식으로 걸터앉아서 이쪽저쪽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 우선권이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 섬기고 나서 그 다음을 뭐든지 생각해야 합니다. 비겁한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 믿는 것을 감추는 신자입니다. 이것은 걸터앉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믿고 사는 것이 삶의 제일주의로 살라는 말은 손해가 나는가? 그 반대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사는 길입니다. “너는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충성하라.” 여러분, 기독교 복음이 먼저 들어간 나라들은 왜 다 선진국이 되었습니까? 우리나라도 복음이 안 들어왔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이 길은 인간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너희는 다른 것을 하기 전에 하나님 먼저 하라. 뭐든지 예배 먼저 드리고 물질도 하나님께 헌금 먼저 드리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먼저 하라.” 구약에 그렇게 많이 첫 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을 어디 가든지 밝히세요. “차든지 덥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내 입에서 내치리라.”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간증할 것이 있는데 한때 우리나라 대학들이 ‘리서치 팰로우’ 라는 과목을 만들어서 사회인들에게 대학원 공부하는 길을 열어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청년 때 이런 것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로 출세한 사람들이 학창시절이 생각나 학원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학교로 많이 몰려들었는데 저도 전도사시절에 야간으로 행정대학원에 가서 ‘성경만 공부하다가 세상에 대해 너무 어두울 수 있으니까 배워야 되겠다.’ 생각해서 행정대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한 반에 들어온 사람들이 “야! 우리 학창시절과 같이 되돌아가서 아주 재미있게 지내자.” 그래서 모여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쟁쟁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보니까 나이가 제가 제일 어려요. 저는 20대 중반인데 다른 사람들은 40대들도 많이 왔고 50대들도 있고 자기소개를 하는데 청와대 누구, 법제처장, 기업 회장, 영화배우, 사장, 병원장, 유명 언론인 등 저마다 명함을 내놓고 자랑스럽게 소개를 하는데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 전도사입니다.” 그리고 어울려서 공부를 했는데, 이분들이 공부를 하면 밤 9시에 그냥 집에 가지 않아요. 반드시 거치는 데가 있습니다. 술집에 가서 거기서 한바탕 재미나게 시간을 보내고 밤 11시쯤 되어 집에 갑니다. 저는 술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안 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중에 몇 사람이 기어코 저를 끌고 가는 겁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이 우리같이 못된 사람들에게 와서 전도를 해야지! 살살 혼자 빠져나가면 돼? 전도사 가짜인가 봐. 전도사는 아무데서나 전도를 할 수 있어야지 동기생인데 우리라고 피해가면 돼? 빨리 와!” “제가 술을 못하니까 분위기 깰까봐 일부러 안가는 겁니다.” “거기 다른 거 먹을 것도 많아. 가자!” 끝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가서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다들 조용히 해! 우리 비록 술 먹고 있지만 전도사님 축복 기도한 다음에 먹어!”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이가 제일 어리니까 ‘에이 모르겠다. 기도하자. 기도는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이상한 데서 기도를 했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내 옆에 살짝 오더니 “전도사님! 저도 교회 나가요. 그런데 이런 데서 기도하는 전도사님 처음 봤어요.” “나도 처음입니다.” 이럭저럭 졸업 때가 되었잖아요? 보니까 나를 끌고 갔던 사람들이 교회 집사님들입니다. 숨기고 있었던 겁니다. 저한테 졸업 때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정말 전도사님입니다. 존경합니다. 나 교회 집사인데 목사된 다음에 우리 교회 와서 목회할 지도 모르는데 만날지도 몰라. 그때 이거 말 안하기요!”
우리 신앙생활은 걸터앉을 때 영적 추락사고, 위험 노출이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내 인생은 여기에다 생명을 걸어보자.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일에 열심을 두고서 거기에 충성을 해보자. 이것저것 해봐도 안 되니까 주님께 충성하자.’ 손해가 나는지 해보세요. 제일 첫째로 예배에 충실하세요. 주일 예배뿐만 아니고 ‘수요예배도 나가서 강해 설교를 들어야지.’ 일주일에 한번이니까 아침, 저녁 가능한 시간에 나오셔서 수요 예배드리시고, ‘새벽기도 내가 한 번도 안 나갔는데 금년에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새벽기도회 나가보자.’ 새벽기도회도 하시고 지역 식구들 모임에도 ‘아, 우리 교회 교인들이 누군지 서로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 한번 가보세요. 절대 손해 안 납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희생 부분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채워집니다. 여러분, 2009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역사의 새 현장을 허락해주셨잖아요? 우리 모두 1년 동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졸음을 이기려면
행 20장 7~12절 / 이재철목사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2. 나의 생명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 되시니 내가 따를 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드로아를 떠나려는 전날 밤 말씀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이번에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드로아에 못 올 것 같아서 하나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밤새 말씀을 전하는데 유두고란 청년이 졸다가 떨어집니다. 유두고란 다행이다라는 뜻입니다. 유두고는 바울의 설교 중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예배 중간에 이런 일이 있으면 예배가 아수라장이 될텐데 사도 바울이 내려가서 기도하였더니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 유두고가 졸았던 이유
① 사도바울의 설교가 길었기 때문입니다.(7절)
바울은 한마디라도 더 해서 복음을 확실하게 심어놓기 위해 말을 밤중까지 계속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예배시간, 설교시간이 짧아졌습니다. 더불어 변화되지 않고 건성으로 믿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② 통풍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8절)
좁은 다락에 사람도 많고, 등불까지 켜놓아서 졸 수 밖에 없었습니다.
③ 온종일 고된 일을 하고 참석했기 때문입니다.(12절)
12절 말씀에 '살아난 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아이란 하인, 종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유두고는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낮 동안 일을 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온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졸면 믿음이 떨어집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예배가 나옵니다.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말씀이 삶에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수험생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만 자면 공부를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운전자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운전을 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습관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어떻게 하면 졸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① 내가 평상시 앉았던 자리를 새롭게 옮겨서 앉으십시오.
유두고는 창에 걸터 앉았다가 떨어졌습니다.(9절) 자신이 졸 것 같아서 뒤에 앉았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이 익숙해지면 긴장이 풀리기 마련입니다. 익숙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익숙은 안정을 지나 안일에 빠지게 됩니다.
앞 자리가 비었는데도 뒤에 앉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② 건성으로 듣지 말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건성으로 기도하고, 봉사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받으면 삶이 건조해집니다.
드로아 교회 교인이 다 졸았던 것은 아니라 유두고만 졸았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졸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모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요?
㉠ 한 주 동안 기도했던 것을 말씀을 통해 응답해 주시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3-18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하늘 나라의 비밀에 대해 제자들에게 설교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만 있어서 이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서 기도할 때 제자들을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게 말씀으로 응답하리라는 마음을 가지면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예수님 발 아래 앉아있었고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할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르다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를 원망하며 예수님께 불평합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김의 우선 순위가 틀린 것입니다.
말씀을 받지 않고 사역을 하면 얼마 못 가서 지칩니다. 얄미운 사람들만 눈에 띕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뿌리고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를 보시며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이 여인도 증거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생전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③ 위 두 가지 방법으로도 안되면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조십시오. 언젠가는 변화됩니다.
졸면 신앙의 파문을 가져옵니다
행 20장 7~12절 / 이일기목사
우리나라의 경우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이 졸음운전이라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해 본 운전자는 누구나 경험했을 것입니다만 주행 중 조는 시간은 불과 한 2~3초 사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정말 졸음운전은 운전자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끔찍한 일임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졸음이란 게 일종의 생리 현상이지만 졸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조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졸릴 때 잠자고 깨어야 할 때 깨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졸고만 있다면 그것 역시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짓궂은 카메라맨이 국회의원들의 조는 모습을 가끔은 방송매체에 흘리는 모습을 볼 때면 공적인 자리에서 조는 것이 얼마나 흉한 것인 줄 새삼스레 알게 됩니다.
일전에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각료회의에서 장관이 끄떡거리며 졸은 일로 인해 상당히 말이 많았지 않습니까?
성도들도 예배 시간에 육신의 과로로 인해 졸음에 드는 경우를 제가 가끔은 보는데 상당히 안쓰럽기도 합니다. 얼마나 일이 고되었으면 저렇게 조는가 하는 안쓰러운 모습 말입니다
때로는 조시는 분들 중에 졸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런 성경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지요?
시 127:02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예 맞습니다. 한 주간 동안 성도 여러분이 열심히 일을 하다 주일날 아버지 집에 오니 마음이 포근해서 잠도 잘 올 수가 있습니다.
성경대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잠이 오기도 하겠지만 매번 그렇게 잠이 온다면 한 번쯤 고려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요? 어쩌면 잠이 다 좋은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말씀에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서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죽은 사건을 저자 누가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니 유두고가 졸다가 땅에 떨어져 죽은 그 민망한 사건을 무엇이 그리 좋다고 특별 기록을 남겼겠습니까?
이러한 기록을 남긴 데는 적어도 유두고를 통해 우리에게 육적인 잠보다 영적인 잠을 자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진 이유를 봅시다.
1. 앉아서는 안 될 창문에 걸터앉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이 3차 전도여행 중 연초의 무교절 절기가 지난 어느날 드로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일 주일을 머물며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주일예배는 주로 가정의 다락방에서 모였는데 다락방이란 1층이 주거 공간이고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윗 다락은 다락방 위의 또 다른 다락방으로서 이 윗 다락은 그리 넓지는 않은 하나의 작은 공간으로서 3층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예배 처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로 빌린 장소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이때 유두고라는 청년은 예배 장소에 아마 조금 늦게 들어온 까닭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겨우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앉아서 깊이 졸다가 그만 창 밖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으니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어떻게 수습해야겠습니까? 정말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유두고의 잘 못 된 점을 지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두고는 누가보고 판단하여도 잘못 된 자리에 앉아 있음으로 인하여 사고를 내었는데 유두고가 앉았던 삼층 누 창틀은 대단히 위험한 자리인 셈이지요.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았고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기에 떨어졌는데 어쩌면 그 자리는 애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자리로 정해진 곳입니다.
유두고가 비좁고 덥고 냄새나는 곳에서 인내하기보다는 그곳을 떠나 바람이 들어오는 시원한 창틀이라고 그곳에 가서 앉았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위험한 곳에 앉아서는 안 되죠.
덥고 냄새나며 비좁고 비록 불편한 곳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들려오는 곳이라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시원하고 구미에 당기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추구하다가는 사망의 길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유두고가 앉은 자리는 분명히 자만과 우월감의 자리로서 나는 똑똑하고 젊기 때문에 다소 위험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시원한 창틀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만과 우월감의 자리는 분명히 죽음의 자리인 것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착안해 냈고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똑똑하고 잘났다는 교만함이 그를 죽게 한 것이지요.
바울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보다는 자기의 교만 때문에 창틀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으니 좋은 곳 기분 내는 곳 찾아다니다가는 결국 떨어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시 1:0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삶의 자리가 죄인의 길이 아니고 오만한 자리가 아닌 사람이 복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삶의 자리가 바로 되어있는 사람이 복 있는 자라면 우리는 복 있는 자리에서 생활하십니까?
허세와 자기과시 스스로 완전하다는 자기 우월감 등 이런 자리에 빠지면 이내 떨어지고 말 것이며 교만과 아집과 방종에 떨어지면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떨어지면 죽고 주위에 소란과 혼란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에요.
신앙의 자리는 우월감과 자만의 자리 얕은꾀를 내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울고 깨닫는 자리입니다.
유두고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보다는 시원한 창틀위로 올라가 앉았는데 그 자만이 그로 하여금 떨어지게 했습니다. 떨어지면 죽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김해삼일교회 여러분!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자리를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믿음의 자리를 점검해 보고 만일 그 자리가 믿음에서 이탈한 위험한 자리라면 속히 자리를 바꾸도록 하십시오. 그래야만 내가 살고 이웃이 살고 공동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이 세상이 살아나는 겁니다.
2. 졸아서는 안 될 현장에서 졸았기 때문입니다.
07절에 말(설교)을 밤중까지 계속한다는 뜻은 요즘으로 말하면 철야집회라는 말입니다. 철야집회라면 몸과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두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계속 졸고 있었습니다. 귀한 말씀이기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듣는데 유독 유두고만이 계속 졸고 있으니 이미 은혜의 등불, 마음의 등불, 영혼의 등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실 잡담하고 노닥거리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만 진리를 탐구하고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때로는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 생각 내 마음의 태도에 잘못이 있는 줄로 여기십시오.
마귀는 성도가 말씀의 은혜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왜냐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야 신앙의 흥정을 하기 쉽고 다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혹 여러분은 해당되는 곳이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① 말씀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② 말씀에 대해 의심을 일으킵니다.
③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스러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④ 교회를 등지게 만듭니다.
⑤ 졸도록 유도합니다.
시험 중에 가장 심각한 시험은 말씀을 듣다가 걸려 넘어지는 것으로서 더 쉽게 말하자면 설교를 듣다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그날 그날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받아 드리도록 노력하십시오. 유두고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졸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설교자의 마음을 조금만 알았더라도 그 위험한 자리에 올라가지도, 졸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방해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①첫째는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나 아이들의 장난이고 ②둘째는 잡된 생각으로서 몸은 교회에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③셋째는 졸음으로서 이것은 목사가 졸게 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특별히 피곤해서 어쩌다 조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습관이지요.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 중 설교만 시작하면 눈동자가 서서히 풀려서 조는 습관을 가진 분이 가끔은 있는데 이런 경우는 말씀의 맛과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 아닐까요?
이런 분들은 목사의 설교 톤이 좀 높아지면 눈을 뜨고 목사와 옆 사람을 대강 흩어보고는 마치 안 졸은 것처럼 눈을 뜨고 한 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또 졸음으로 들어갑니다.
잠자는 신앙은 우리를 시험 들게 하고, 잠자는 신앙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충성도 잠자고, 봉사도 잠자고, 기도도 잠을 자고 감사도 상실되어 믿음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됨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주님의 은혜는 다 잃어버리고 당연히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만 가득하여 성도답게 살지 못하고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요나가 배 밑창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가 망했고, 삼손도 여인의 무릎에서 졸다가 망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역시 졸다가 주님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 왔습니다.
3. 신앙의 잠을 자면은 결국은 파문을 가져옵니다.
유두고가 졸다보니 자기 자신이 위험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었고 자신이 그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졸음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졸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 영적 졸음은 내가 한 번 점령당하면 정신상태가 무너지고 육체도 흔들리게 되는데 이 영적 긴장상태가 무너져 내리면 그때는 파문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08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가 떨어진 것은 등불이 없어 어두워서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하였으니 겉은 대단히 밝았다는 말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유두고의 추락 원인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는 말입니다.
겉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속이 어두운 것이지요. 그러니까 뜨거운 예배분위기, 좋은 말씀, 찬송의 열정, 기도의 역사가 있다 하여도 그 영적 즐거움을 내가 받지 못하면 추락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내려가서(ejpevpesen) 라는 말은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 라는 뜻이고 떠들지 말라 라는 말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는 성도들을 진정시키는 말입니다. 갑자기 일어나 사망 사고는 당연히 사람들을 술렁거리게 할 만 하지요. 유두고 한 사람의 졸음과 이로 인한 죽음은 이미 공동체의 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는데 보십시오.
① 저 열심히 말씀 듣는 성도들의 은혜를 무너뜨렸고 ② 다음으로 설교자 말씀을 중단하게 하였고 ③ 그리고 자신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에게 근심과 두려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유두고 한 사람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였으니 얼마나 민망한 일입니까? 이와 같이 성도들 중에도 언제나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더 큰 문제로 만들고, 교회를 평화롭지 못하게 하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교회를 문제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분들입니다.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반면 성도들 중에는 항상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이 와도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인내하여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데 가령 구약의 요셉 같은 사람 말입니다.
요셉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7년의 흉년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해결하여 자신도 살고 국가도 살고 하나님의 영광도 잘 나타내었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큰 일은 아니더라도 내가 속한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에 때로는 예기치 않는 어려운 문제가 찾아올 때 그 일들을 능히 극복해내는 역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유두고의 이름 뜻 그대로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그가 살아났으니 자신도 다행이고 거기에 모인 성도들도 안도의 숨을 내 쉬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아마 유두고는 다시는 예배 시간에 졸지는 않았겠지요? 위험한 창문 가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고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지금 앉아 있는 자리가 어딘지 살펴보십시오?
창문 가라면 내려 와야 하며 위험한 자리 구경꾼의 자리라면 즉시 자리바꿈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납시다!
벧전 05:0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유두고하 하는 청년
행 20장 7~12절 / 신성종목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두고는 현대 청년들의 얼굴이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유두고란 말은 “운이 좋은”, “행운의”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흔한 노예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보면 옛날에는 그 사람의 직업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목수는 Carpenter, 대장쟁이는 Smith, 농부는 Farmer 등 직업을 성으로 정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두고란 이름도 노예들이 흔히 쓰는 이름인 것으로 보아 그는 당시 노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은 노예출신의 유두고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왜 유두고는 창에서 떨어졌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유두고란 청년은 예배보다가 졸아서 창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조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조는 형태도 참 다양합니다.
첫째 ‘아멘형’의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좁니다. 얼마나 신앙적입니까? 처음에는 저도 이런 분들에게 많이 속았습니다.
두번째는 ‘노멘형’의 조는 사람들입니다. 옆으로 고개를 저의면서 왔다갔다합니다. 금방 표가 납니다.
세번째는 옆에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조는 ‘의지형’이 있습니다. 주로 여자들의 경우입니다.
네번째는 똑바로 앞을 보면서 움직이지 않고 조는 ‘자립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구별하기 힘든 사람은 눈을 뜨고 자는 ‘달달 봉사형’입니다. 오래된 교인 중에 많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 가운데 많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유두고처럼 창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창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없겠지만 신앙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유두고는 창에서 떨어졌을까요?
(1)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입니다.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7절 하). 아마 요즈음에 이렇게 너덧 시간씩 길게 설교를 하면 다 졸 것이고, 목회자는 그 교회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저는 길게 설교하는 편은 아닌데도 가끔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눈을 뜨고 조는 분들입니다. 남이 보면 설교를 듣는 것 같은데 사실은 졸고 있는 것입니다. 주로 뒤에서 좁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은 감화를 준 분의 하나가 서울대학의 신사훈 박사님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2시간반 정도 길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길다고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설교 하나가 작은 노트 한 권씩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찬송을 조금만 부르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할 때 특별히 이 날은 성찬식을 겸해서 하였기 때문에 밤이 늦도록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찬식 때에 애찬식을 겸해서 하였기 때문에 몇 시간씩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도 예배 시간은 한 두 시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설교할 때 부탁하는 것은 항상 같은 말인데 그것은 “좀 길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길게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제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좀 짧게 해달라”는 부탁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으로 배가 불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풍성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에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왜 유두고가 창에서 떨어졌습니까?
(2) 유두고가 ‘깊이 졸았기 때문’입니다(9절).
“깊이 졸 더니”(9절 상).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9절 하). 졸음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생리현상입니다. 사실 유두고는 노예였기 때문에 온종일 고된 일을 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피곤하여 졸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세상에서 돈벌고, 비즈니스 하다가 교회에 오면 잠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텔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경찰이 지키는 것도 아니니 규율부장이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마음놓고 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졸면 유두고처럼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시설은 창에서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믿음에서 떨어지고, 예배 보다가 꿈이라도 꾸면 그것을 계시로 착각하여 이단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또 유두고의 문제점은 ‘창에 걸터앉았는데’ 있습니다(9절 상).
창은 본래 걸터앉으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서도 보면 가정 교회에서는 창문에 걸터앉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보통 집에서도 3-40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것을 보면 유두고가 창문에 꼭 앉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삼층 누각에서 위험하게 앉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편리하게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창문에 앉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구나 방은 좁고 사람들은 많아서 공기 유통은 원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기주의 내지는 편리주의적 사고에서 창문에 걸터앉은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유두고는 사람들은 많고 키는 작아서 뽕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처럼 볼려고 창문에 걸터앉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앞에 앉는 것을 싫어합니다. ‘인간의 숲에 숨으려는 심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와 눈이 마주쳐서 혹시나 너무 감동을 받아 재산을 바치거나 봉사하는 일에 빠질까봐 두려워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목사와 눈이 마주쳐서 얼굴이 노출되면 결석할 때 곤란하고, 적당히 믿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석은 은혜 받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맨 앞쪽은 은혜가 충만한 금 자리이고, 가운데는 약간의 은혜를 받는 은 자리이고, 뒤쪽은 구경이나 하다가 별 볼일 없이 가는 동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앞자리로 앉으시기 바랍니다.
(4) 유두고가 창에서 덜어진 네번째 이유는 ‘너무 피곤’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예출신이라면 온종일 많은 일을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피곤한 것은 당연하고,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피곤합니다. 한 주간 내내 일터에서 일하다가 교회에 와서까지 부서에서 일하면 피곤한 것은 당연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저도 예배 볼 때 정신 통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잡념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갈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한 일을 할 때에도 피곤하면 시험에 빠집니다.
2. 어떻게 죽은 유두고가 살아나게 되었는가?
(1) 바울이 내려갔을 때입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그렇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내려가야 삽니다. 교회에서도 은혜 받으려면 내려가야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능하면 장로나 권사 같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위에 있으면 은혜받는 것이 아주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가대원들에게 말씀을 들을 때 밑으로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려갈수록 깊어지고, 많습니다. 믿습니까?
(2) 다음은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창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했습니다. 엎드려 몸을 안는 것은 일치감을 뜻하는 표현이요, 또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눅 19장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바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얻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말하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바로 살리는 일을 합니다. 히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마른 뼈들이 큰 군대를 형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골짜기에 뼈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다음에는 뼈가 심히 말랐더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아시나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때에 말씀을 대언 했습니다. 그러자 생기가 들어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으로 덮이면서 살아나 큰 군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장래를 예언한 것입니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되면 지금도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3. 청년 유두고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과 ‘예배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화나 연극이나 운동을 참관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는 영성이 중요합니다. 영성이 없으면 사람 냄새만 피우다가 은혜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특별히 교회에 익숙하신 분들 가운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바로 예배를 하나의 습관적으로, 형식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에 구역질을 하실 것입니다.
(2)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헌신’입니다.
예배를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예배의 근본은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도 드리고, 몸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는 것이고, 시간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다른 것은 드리면 모든 것이 변하여 되돌아옵니다. 마음을 드리면 깨끗하게 변하여 돌아오고, 몸을 드리면 영적으로 건강해서 돌아오고, 물질을 드리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돌아오고, 마치 헌 자동차를 자동차 수리공에 맡기면 새 것이 되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변화시켜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유두고처럼 졸다가 가지 마시고, 변화되어 큰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3) 끝으로 중요한 것은 유두고처럼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는 marginal being이라고 부릅니다. 여자들이 주변에 맴돌면 인신매매단에 잡혀가고, 남자들이 주변에 맴돌면 마피아단에 끌려가고 교인들이 주변에서 맴돌면 사탄에게 유혹되어 잡혀가 사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창에 걸터앉았다는 것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 있으면서 형편에 따라 나가려고 하는 기회주의적 자세입니다.
교회도 주변에서 맴돌면 개인적으로 희생은 안 하겠지만 그러나 참여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헌신하고, 참여하는 자를 쓰시지 주변으로 맴도는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참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