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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땅에서 싹이 돋아나게 한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8-23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23<또는 13,1-9>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비나 눈이 땅을 적시어 싹이 돋아나게 하듯, 주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뜻하는 바를 이룬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우리 자신도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풀이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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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를 전한 뒤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가르친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는 법이 없으며,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앞으로 계시될 영광에 비하면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속량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이 아니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하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세상 걱정이나 자신의 안락, 재물의 유혹에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결실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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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땅을 적시고 기름지게 하며 싹을 돋아나게 하여 씨앗과 양식을 준다. 곧 하느님 말씀이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와 움트고 자라서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제1독서). 피조물은 허무해하고 탄식하며 살지만, 성령께서 나약한 우리의 속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신다(제2독서).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이런 곳에 떨어진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돋아 많은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은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삶의 밭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독특하게 해설이 달려 있습니다. 씨는 말씀을, 씨가 뿌려진 땅은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땅은 네 종류로 나누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같은 씨, 곧 같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거나 영향을 주고 열매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나는 어떤 땅인가?’입니다. 나는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오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주로 쓰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나 듣는 것에 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꺼이 받아들여 말씀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사람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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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내용에 씨 뿌리는 사람은 한번 밖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씨나 씨가 뿌려진 땅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당신이십니다. 비유의 시작에 표현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씨, 곧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에게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입니다. 씨가 다양한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말씀은 다양한 우리에게 씨처럼 뿌려집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땅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씨는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씨를 품고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땅의 역할이고, 좋은 땅은 몇 배의 열매를 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옵니다. 씨가 열매를 맺듯,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를 통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가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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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지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으로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첫째는 농부가 직접 밭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한, 노새를 이용해 씨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씨앗이 담긴 자루를 노새의 등에 얹고, 그 자루 한 귀퉁이를 조금 찢어 구멍을 냅니다. 그러면 노새가 밭을 걸어가는 동안 씨가 저절로 자루 속에서 흘러나와, 밭에 뿌려지게 되지요.
따라서 씨앗이 떨어진 곳에 따라 결실이 다르듯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따라 말씀이 맺는 열매는 천차만별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없지요. 따라서 길과 같은 마음은 편견이나 선입관을 갖고 남을 대하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은 쉽게 달궈졌다가 쉽게 식는 마음입니다.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엇을 계획한 뒤, 어떤 위기가 찾아오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열정을 다해 하느님의 길을 걷다가도 시련이 닥치면 이내 하느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은 세상 여러 일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실천하는 신앙인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늘 마음을 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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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비극과 의지를 노래하다가 옥사한 시인 이육사의 명시 ‘광야’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시인이기도 한 교사가 오랫동안 어린 학생들과 함께한 문학 수업 시간에 느낀 것을 전하는 책을 읽었는데, 이 시구에 관하여 토론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며 문득 이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 시를 가르치며 일제 암흑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이육사 시인의 고귀한 삶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그는 이육사 시인에 대하여 ‘스스로의 삶을 씨앗으로 뿌린 이’였고, 자신의 삶 자체를 뒤에 올 이들을 위한 헌신이자 투신으로서 마흔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도 이렇게 씨앗을 뿌릴 수 있겠니?”
이에 대한 한 학생의 솔직한 반응이 흥미 있는 토론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됩니다. “대뜸 은수가 ‘저는 안 뿌릴 거예요.’ 한다. 툭 던지듯 목소리도 컸다. 그 도발적인 대답에 내 마음이 출렁했다. 씨앗을 ‘못’ 뿌리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안’ 뿌리겠다고? 그것을 이리 당당하게 말한단 말이지? ‘씨앗을 안 뿌리겠다는 말은 용기가 없어서 못 뿌리는 것이 아니라 뿌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말이네?’ ‘내가 열매를 다 먹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뿌려요?’ ‘흠, 그래? 그럼 네가 지금 따 먹고 있는 열매들은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니?’ 아이는 순간 멈칫한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한 아이들은 다행히 이어지는 토론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 올바른 일, 가치 있는 일의 씨를 뿌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삶인지를 조금씩 발견하고 인정해 갑니다. 교사인 저자도 아이들과 가진 이 대화 뒤 이러한 확신을 더해 갑니다.
조향미 시인의 『시인의 교실』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옥한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새로이 깨닫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 시인이 그러했듯 다른 이들과 앞날을 위하여 묵묵히 ‘씨 뿌리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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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에서 2천 년 전 대추야자 씨앗이 발견되어 이것을 발아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는 발표를 기사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씨앗은 이스라엘의 사라 샐런 박사가 그의 연구진과 함께 발아시킨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씨앗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씨앗은 그동안 발아의 조건이 맞지 않아 2천 년을 기다리다 조건이 되자 움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가 땅을 적시어 싹을 움트게 해서 양식을 주듯이 주님의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그 사명을 완수한다고 했지요(이사 55,10-11 참조). 생명을 받은 이 씨앗도 그 사명을 완수하는 데 2천 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죽은 것 같은 씨앗이지만 생명이 그 안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 년이 되어도 2천 년이 되어도, 아니 세상 끝 날까지 말씀은 생명을 품고서 씨앗처럼 우리 삶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 삶에 숱하게 뿌려지고 있지만 말씀의 씨앗이 움트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는 ‘돌바닥 같은 마음’, 세상 것으로 온통 가득 차 있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 때문입니다.
마음 밭에 돌을 골라내고 온갖 잡풀을 뽑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며, 미사에 자주 참석하면서 밭갈이를 하듯 마음가짐을 맑고 정결하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열매를 내는 그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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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좋은 땅’이 그 결론입니다. 유혹이 없고 삭막함과 가시덤불이 사라지는 땅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땅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고, 사도들도, 훗날의 성인들도 모두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만났기에 더욱 자주 기도하였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니 좋은 땅은 만들어진 땅입니다. 누구나 같은 땅과 씨앗을 받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이 됩니다. 정성을 들여야 바라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이 사실이 좋은 땅의 비결입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막연하게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를 바치고 선행을 실천하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면 또 다른 느낌으로 주일을 맞게 됩니다. 은총의 체험인 것이지요.
믿음 역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뛰어넘고 도약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것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작하면 늘 새 땅이 됩니다. 이것이 좋은 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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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가을에 풍작을 기대하고 봄에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마음의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마음의 밭이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이들만이 마지막 날에 구원될 것입니다.
어느 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눴으면 해서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도무지 의욕 없이 살아가는 아이의 변화를 위해 대화를 나눠 달라는 것이었지요. 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렸을 때는 뭘 하고 싶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되고 싶었죠.”라고 말합니다. 곧바로 “그렇다면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보았니?”라고 질문을 하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이제까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학생만 그럴까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되고 싶은 모습은 있지만 이를 위한 노력이 없습니다. 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를 원하지만 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사랑 주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그 나라에 가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농부도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면 농부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해서 뿌린 것이라면, 농부의 잘못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룰 가능성, 그래서 커다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가능한 이유만을 찾으면서, 자신의 모습이 변경 불가능한 돌밭이고 가시덤불의 모습처럼 생각합니다. 씨를 뿌리신 주님의 잘못이 아니라, 변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잘못입니다.
따라서 막연히 ‘어떻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떠올리면서 적극적으로 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은 거룩한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러운 영들을 위해 잘 다져진 길이 됩니다.
공기가 창문을 통해 이동하며 서로를 환기해주듯 삶의 가장 존귀한 것이 나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내가 남기는 유산이길 바란다(마크 네포).
불행한 사람
예전에 아는 지인들과 함께 동남아에 있는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나라이고, 이제야 겨우 경제적인 성장을 조금씩 이루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이드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와주면 계속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니까 처음부터 그냥 무시하세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가이드의 말을 따라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이 지갑을 열어 1달러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가이드가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라고 했잖아.”라고 핀잔을 주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 돼 보이는 얼굴이 계속 밟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도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데도 돕지 않으니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함께 있던 사람 모두가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음에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서로 나서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돈이 없고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 절정기에 사목활동에 전념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은혜롭고 감미로웠던지 구름같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종래 그 어떤 예언자나 지도자도 흉내낼수 없는 흥미진진하고 풍요로운 가르침에 사람들은 깊이 매료되어 에수님 가시는 곳 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엄청난 인파를 보신 타고난 교육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포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으셨습니다. 청중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삥 둘러앉았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호숫가에 매어진 어선에 올라타 앉으셨습니다.
마침 호수 중심에서 호숫가로 불어오는 미풍에 실려 예수님의 말씀은 청중의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습니다.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에 굶주린 당신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이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으로부터 선포되는 말씀은 기존 예언자들이나 지도자들의 말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고리타분하거나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구름잡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구체적인 말씀, 백성들의 구체적인 일상과 연결되는 현장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만 해도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이었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오 복음 13장 3~8절)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이 정해지면 머리와 몸은 봉사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살다 보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을 판단해놓고 그 판단이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경우를 오늘 복음에서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은” 마음이 무딘 사람입니다. 이들 마음 안에 아무리 진리의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 안에 증거 자체 조작 기능이 내재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해줄 근거를 찾는데 그 근거는 사실 그들 주장을 조작해 줄 도구밖에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믿음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이지, 보인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2004년 5월 미국 FBI 요원들이 들이닥쳐 변호사이자 미군 전직 장교였던 ‘브랜던 메이필드’를 마드리드 폭탄테러 용의자로 체포하였습니다. 그해 3월 11일 192명이 사망하고 2천 명이 다친 끔찍한 마드리드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이슬람으로 전향했고 이집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FBI에 계속 감시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FBI는 마드리드 현장에서 폭발물이 담긴 파란색 쇼핑백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서 메이필드의 지문이 나온 것입니다. FBI는 그 지문이 100% 일치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것이 틀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지문이 미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8700㎞ 떨어진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날 아침, 스페인 경찰청이 폭탄 공격과 관련 있는 인물로 알제리 남성 ‘우나네 다우드’를 체포하였습니다. 메이필드보다 그의 지문이 FBI가 무시했던 애매한 영역을 포함한 검지 지문에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그의 엄지 지문도 쇼핑백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메이필드는 다음 날 풀려났고 FBI는 굴욕적인 사과를 공개적으로 해야 했습니다. 물론 2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2001년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여 있어 아랍인들에게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판단을 맹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 최고 지문 감식반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참조: ‘지능의 함정’, 데이브드 롭슨,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람들은 증거가 믿음을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눈과 귀를 막아놓고 보고 듣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들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버리면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고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인정해주는 전문가들에게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1920년대에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었던 ‘루이스 터먼’이라는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도 자신의 편견을 배열하며 과학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IQ가 삶과 직결되고 IQ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 학급에서 IQ가 140 이상인 아이들을 골라내어 그 아이들의 인생을 수십 년 동안 수집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차이가 없었습니다. IQ가 높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주 조금 좋은 성과를 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그 실험을 하며 터먼이 그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가 좋은 아이들에게만 특별한 지원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집 식구들의 IQ를 재서 지능이 높은 순서대로 식탁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데이브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이란 책에서는 이런 사례가 아인슈타인, 에디슨, 스티브 잡스 등 모든 고집불통인 뛰어난 천재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고집은 한마디로 하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가 뿌리는 말씀의 씨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로 우리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교만과 육욕과 탐욕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없게 우리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이 줄어들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합시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봅시다. 그러면 눈이 열려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두운 소굴로 과감히 발을 들여놓으면 케리(Kery)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바꿀 해안을 가졌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나바로 강 근처에서 몸에서 빛이 나는 너구리같이 생긴 물체를 만나 외계인에 납치되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점성술을 절대적으로 믿고 에이즈 바이러스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는 믿음은 다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케리가 정신이상자처럼 보입니까? 케리 멀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입니다. 다만 자신 안에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믿으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모른 상태로 하는 과학적 연구는 모두 자체 증거 조작 기능에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멀고 귀먹은 마음이 무딘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또 눈과 귀는 머리가 찾는 것만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완고해진 마음은 외부의 것들로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려면 내가 아닌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텃밭에 상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주어도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추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삼겹살을 먹었어도, 여전히 텃밭에는 상추가 한 가득입니다. 옆에 있는 본당 사제관에도 나누어 드렸습니다. 방울토마토도, 고추도, 오이도 쑥쑥 자라는 걸 보니 참 신기합니다. 열배, 스무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물을 준 보람도 느낍니다. 텃밭의 야채가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고, 인재로 키우는 기쁨은 더 할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좋은 재목을 만나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의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중3 학생들을 면담하고 예비 신학생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들이 묵주기도를 함께하고, 아침기도와 미사를 함께하는 걸 보았습니다. 저녁에는 양심성찰을 하고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3년 동안 키도 커지고, 마음도 성숙해진 아이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걸 보는 것은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신부님들과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니 다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팠습니다. 부르클린 다리 밑에서 햄버거를 먹고 강 건너 맨해튼을 보았습니다. 뉴욕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메고 갔던 가방을 놓고 온 걸 알았습니다. 다시 가보았지만 가방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습니다. 이어폰, 보조 배터리, 차키, 안경이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은 핸드폰과 지갑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키는 여분이 하나 더 있어서 큰 문제가 없었고, 이어폰은 함께 가신 신부님이 새로 구해 주신다고 하니 더 잘 되었습니다. 안경은 한국에서 여유로 하나 더 가져왔으니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보조 배터리야 새로 구하면 됩니다.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했는데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온 것만도 감사 할 일입니다. 엉덩이가 아팠는데 가방을 잃어버렸더니 엉덩이 아픈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통은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한걸음 더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도 삶의 방법입니다.
코로나19로 3달 동안 공동체 미사가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하면서 공동체 미사를 재개하는 교구가 있습니다. 제가 속한 부르클린 교구도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어떤 분에게는 길가에 떨어진 씨일지 모르겠습니다. 의무적으로 나왔던 성당을 안 나오게 되고, 신앙의 싹이 시들어갈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돌밭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방송미사를 참석했지만 그것도 점점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방송미사도 참례하고, 가족들이 기도했지만 날씨가 좋아지면서 깜빡 잊어버렸는지 모릅니다. 락다운(Lockdown)이 조금씩 해제 되면서 다른 것들에 마음이 갔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코로나19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집에 머물면서 성경책을 통독하기도 합니다. 미사 강론을 요약해서 이웃들에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성당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가서 성체조배를 하기도 합니다. 박해시대에 사제 없이 공소예절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이 순교의 길이 될 수 있을지라도 성체를 모시던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제 공동체의 미사가 재개되고 우리는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나의 모습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더 풍성해지고,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하느님을 더 깊이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내리고,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부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시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이 내게 오시어
당신의 시간을 맡기시니
나의 시간이 시작되었네
마치 아니 계신 듯
계시는 그분께서
나만을 바라보는 시간
나를 향한 그분의 믿음이
그분을 향한 나의 믿음으로
열매 맺어야 할 시간
나를 향한 그분의 바람이
그분을 향한 나의 바람으로
열매 맺어야 할 시간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그분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열매 맺어야 할 시간
마치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듯
모든 것을 하시는 그분께서
나만을 바라보는 시간
결코 피할 수 없는
결코 떠넘길 수 없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내가 몸소 안아야할
내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오로지 나에게 맡겨진 시간
나의 시간이 곧
당신의 시간이 되기를
그분은 바라시며 기다리시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텃밭을 얻었다. 버려진 땅이었다. 땅을 로타리치며 몇번이고 쟁기질을 했지만 땅이 돌같이 딱딱해 쟁기발이 깊이있게 박히질을 않았다. 농부는 밭을 갈다 말고 우리게 이 땅은 ‘땅심’이 없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으려고 하느냐며 걱정을 했다.
‘땅심’이란 말이 마음에 닿아 깊이있게 생각해 본다. 땅심이 없는 텃밭이라도 얻었으니 밭을 옥토를 만들자는 우리들의 각오가 있었다. 우리가 밭에 땅심을 만들지 못한다면 어떤 힘을 써서라도 꼭 밭다운 밭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삽질을 하며 딱딱한 땅을 뒤엎고 고랑을 파서 밭이랑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어린묘를 심고 씨를 뿌리니 옥토에서 작물이 너울거리며 잘 자라남을 본다. 밭이 우리를 잘 만난 셈이다.
잘 자라난 작물들을 보며 우리들 마음이 흐믓하다. 그런 우리가 밭에 나타나면 토마토, 당귀, 고추, 상추, 가지, 오이, 들깨, 열무가 춤추듯 우리를 반긴다. 씨뿌리는 농부는 밭에 씨를 뿌린다. 밭같지도 않은 땅에 씨가 닿을 수 있다. 문제는 밭이 문제가 아니라 씨뿌리는 농부가 문제이다. 밭을 양질의 밭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농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농부는 농사를 지으며 밭의 상태를 본다. 마찬가지로 사람 농사를 지으려면 씨를 뿌리는 선생님들의 마음의 밭 상태가 중요하다. 사람은 성격과 성품으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퍼스널리티(성격)가 드러나는데, 이는 외적이어서 잘 드러난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이는 중요하지 않운 것 처럼 보이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캐릭터(성품)라고 하는데 본질의 내용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밭에서 지니는 ‘땅심(땅의 깊이)이나 마음이 지니는 ‘심심’(마음의 깊이)은 어린이나 학생의 성품이 아니라 선생님의 성품에 해당된다. 이 심심의 정도에 따라 어린이와 학생의 인격의 질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선생님들의 심심은 사람에게 무한대의 가능성을 갖게 한다. 뛰어난 리더십을 지닌 성품의 소유자인 씨뿌리는 사람을 만나면 어린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건강하게 자라나게 된다.
‘놀체인 양업’은 선생님들과 함께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하고 지낸다. 좋은 성품을 갖는 삶의 동력을 지니게 함으로 어린이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회적 기업으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씨뿌리는 농부는 박토의 텃밭을 불평하지 않으며 참고 함께하고 수준을 고려해 뿌리는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잘 자라나도록 좋은 인재를 키워내고 있다. 예수님은 좋은 땅과 나쁜 땅을 비교하는 말씀처럼 보이나 모두가 좋은 땅에서 잘 자라나도록 바라시는 씨뿌리는 분이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13,23)
‘열매 맺는 옥토의 과정’ (마태 13,1-23)
박현창 베드로 신부님
가족들의 예기치 못한 방문을 미련 없이 뒤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자 애쓰는 이들을 가리켜 오히려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 말씀하신 예수님(마태 12,50 참조).
그날 예수님은 또 다른 ‘새 가족들’을 찾아 잔잔한 호숫가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모여든 군중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씨앗과 그가 자랄 수 있는 여러 토양’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본말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이 핵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군중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신앙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단순히 호기심이나 외형적인 표징만을 뒤쫓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네 가지 서로 다른 토양은 뿌려진 말씀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마음 밭’의 상태가 누구에게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씨가 길에 뿌려진 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였을 뿐 깨달음조차 얻지 못하여 악한 자에게 말씀을 모조리 빼앗기고 마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씨가 돌밭에 뿌려진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하여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루카 8,13) 사람의 처지입니다. 씨가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것은 말씀을 듣고 잘 생활하다가도 “세상 걱정과 제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마르 4,19) 사람의 형편입니다. 씨가 옥토에 떨어진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착한 마음으로 듣고 깨달아 간직하여’(마태 13,23; 루카 8,15 참조) 인내로써 수십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네 가지 토양 가운데 ‘주로’ 어디에 속할까 생각해봅니다. 세례 받은 후 1~2년 이내에는 냉담의 유혹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신앙에 안착했다 하더라도 신자들이 신앙과 삶을 조화롭게 유지하기엔 매일 ‘피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지만 갈수록 근심 걱정은 늘어만 가고, 한 주간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결국 다른 것에서 재미와 대리만족을 찾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두 번째 토양(돌밭)과 세 번째 토양(가시덤불)이 현재 우리의 형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희망도 자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수십 배 열매 맺게 하는 옥토는 처음부터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빈약한 땅 위 한 줌의 흙에서 시작하여(메마른 땅), 그다음은 흙과 자갈이 뒤섞인 투박한 밭으로(돌밭), 이후 지속적인 경작을 통해 가시덤불도 함께 자랄 만한 밭으로(가시덤불), 그리고 가시덤불의 악전고투를 겪어내며 서서히 기름진 땅으로(옥토) 변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품고 있는 우리는 어느 상태에 영원히 멈춰버린 것이 아니라, 열매 맺는 옥토가 되기 위한 ‘의미 있는 몸부림의 과정’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와 밭과 예수님
박인호 베드로 신부님
씨를 뿌리는 이가 도대체 어떻게 뿌렸기에, 아깝게도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길바닥에,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단 말인가요?
이스라엘 땅은 동쪽과 남쪽에 있는 사막에서 보면 비옥한 토지입니다. 그래서 반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서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논밭과 비교하면 대부분이 척박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바위와 자갈이 많고 가시나무들이 잘 자랍니다. 그리고 농지 개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흔히 밭 한가운데로 길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밭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아무데서나 볼 수 있던 밭입니다. 길과 자갈이나 바위가 있고, 가시나무도, 또 좋은 흙도 있는 평범한 밭입니다.
밭은 대부분의 것을 위로부터 받는 수용자입니다. 햇볕과 비와 거름을 받고 씨앗도 받습니다.
받는 자에게는 수용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것에 따라 어떤 소출을 내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밭이 씨앗을 받음은 결실을 내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하나의 밭이고, 씨앗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나 둘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 전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십니다. 우리의 이 밭은 비유에 나오는 말처럼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발길에 다져진 단단한 길바닥, 흙보다 자갈이 많은 부분, 곡식을 눌러 질식시켜버리는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토양으로 이루어진 곳 등입니다. 우리의 밭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밭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기에 이 밭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과 이 요소들의 구성 비율이 늘 변합니다. 때로는 좋은 흙이 많아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길바닥이나 자갈이나 가시가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기도 합니다.
밭은 수용자입니다. 그런데 밭은 수용자로서 받기만 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받을 자리를 부단히 넓혀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밭이 가만히 있으면, 좋은 땅은 점점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길바닥은 넓어지고 가시덤불은 더 기승을 부립니다. 그래서 자칫 그야말로 돌밭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밭에 있는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때문에 일어나는 환난과 박해, 또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예로 드십니다. 이것들은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밖에도 사람에 따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밭에 자리를 잡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밀쳐내고 질식시키는 것들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내 밭에 자리 잡은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은 무엇입니까? 나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키우는 데에 장애를 일으키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속적으로 말씀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계속 장애물들을 찾아내고 없앨 때,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현대 신앙사회! 하느님은 다 계획이 있습니다.
정다운 프란체스카(방송 작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뭐가 제일 좋냐? 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럴 때마다 저의 대답은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경제적 자유까지 보장되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는 것 같다”입니다. 하지만 이 일의 치명적인 단점은 ‘시간’으로부터의 자유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내 시간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뜻인데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방송국의 특성상, 모든 스케줄이 프로그램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돌아가면서 그 일정에 개인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은 너무 불규칙적이어서, 너무 바빠서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라는 핑계를 대기에 딱 좋은 구실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작년에 견진성사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언론인교리’ 제도는 그동안 냉담의 이유로 내세웠던 ‘바빠서 못해’라는 얄팍한 핑계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낼 수 없는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방송국으로 찾아오셔서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만큼 견진성사에 필요한 교리를 가르쳐주시는 방식이었는데요. 외부의 성당에 시간 맞춰 교리를 받으러 다닐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였습니다.
관심을 갖고 찾아보니 견진교리뿐만 아니라 예비신자 교리반도 운영되고 있었고, 언론사뿐만 아니라 가톨릭 재단의 학교나 병원, 사제가 파견되어 있는 기관들, 혹은 신우회나 교우회가 형성된 곳, 심지어 태릉이나 진천 선수촌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2008년 ‘무릎 팍 도사’라는 프로그램을 할 때 만났던 김연아 선수도 그런 과정을 통해 세례를 받았고, 항상 시합 전에 묵주반지에 친구(親口)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린다는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렇듯 아무리 우리가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외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곳곳에 안배해 놓고 계셨습니다. “너희가 바쁘면 내가 자리를 마련해 볼게”라고 하시는 것처럼 말이죠.
바쁘다는 것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인해 한동안 미사가 중단되고, 성당에 가는 게 쉽지 않았던 적도 있었죠. 지금도 완전히 회복한 상태는 아니지만, “너희가 못 오면 또 내가 자리를 마련해 볼게”라고 하시며 TV나 스마트폰 중계로도, 심지어 바티칸에서 교황님이 집전하시는 미사까지 볼 수 있게 하느님은 조치를 다 취해주십니다.
하느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니까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5주일>(2020. 7. 12.)(마태 13,1-23)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마태 13,3-4).”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길’에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로 길에 뿌리는 것도 아닙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백지 상태와 같은 ‘땅’에 씨를 뿌리는데, 어떤 땅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땅은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됩니다. (그 당시의 농사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선포됩니다. 누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모두가 다 처음에는 백지 상태와 같습니다. 본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사람은 ‘길, 돌밭, 가시덤불’이 됩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은, “믿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듣고서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 즉 사탄이 와서 빼앗아 간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버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자기가 들은 ‘말씀’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안 믿으려고 하고, 자기가 정한 어떤 기준으로 복음을 판단하려고 하고......
믿음이란,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또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기가 들은 복음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마태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의지가 부족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경우, 또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마음도 없고, 자신을 버리려는 노력을 할 마음도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라는 말은, 처음에는, 또는 편안한 시기에는 ‘돌밭’과 ‘좋은 땅’에 차이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시기에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선천적으로 의지가 부족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는 경우라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의지, 인내, 끈기가 선천적인 문제인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든 신앙생활에서는 의지, 인내, 끈기는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도 부족해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인내와 끈기도 부족해집니다. (순교자들은 ‘남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분’들입니다. 그 강한 믿음에서 ‘남들보다 더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강하게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가시덤불’은 현세에서 먹고사는 일을 ‘영혼 구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린다는 말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점점 커져서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할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신앙생활의 목표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먹고사는 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먹고사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 말씀들을 이 질문의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빵도 필요하지만, 말씀이 더 필요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영원한 것은 잊어버리고 허무한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 그것이 허무하게 사라질 때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2테살 3,10).”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노동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숨’이 막힐 정도로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팬데믹, 인류가 탄 기차를 급정거 시키다!!!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올까요?-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팬데믹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에 대해 당신의 의견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가정은 물론 전세계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 보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희망의 문이 열릴것을 확신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유대관계, 경제활동 그리고 종교 집회 등 대대적인 봉쇄 조치와 함께 큰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팬데믹이 마치 온 인류를 싣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기차를 급정거 시켜버린 듯, 단호히 “NO”를 외치며 갖가지 활동을 마비시켜 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대 유행병의 제동에 대해 어느 누구도 완벽한 답을 할 수 없지만, 오히려 “무엇을 위해?”라고 자문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큰 의미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여 결국에는 우리의 믿음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교회의 첫 번째 박해를 비추어보며 지금 우리의 상황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팬데믹 역시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의존하며 거행되는 성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들, 특히 가정과 디지털 시대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대중 신심 그리고 자선 행위를 중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하시며,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씨앗이 예수님 자신인 것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시고 땅에 떨어져 육화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14 참조)
하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에 따라 열매의 수확이 달라집니다. 즉,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어떤 밭에 더 가까운지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밭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입니다.여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밭은 돌밭으로, 말씀을 기쁘게 듣고 받아들이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여, 지속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환난과 박해에 곧바로 쓰러지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밭은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으로, 재물의 유혹과 세상 걱정으로 가득 찬 사람을 상징하는데(1티모 6,9-10 참조),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여 말씀이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반면, 네 번째 밭은 비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을 상징하며, 씨앗을 받아들이고 잘 보존하여 많은 열매를 맺도록 실천을 통해 열심히 잘 성장시키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 실제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 1,3 참조)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뜻을 지닌 말이 아니라 실제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귓속말로 당신에게 속삭이시는 하느님, 제2위격이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할 문제가 아니며, 그분과 그분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또는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변화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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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팬데믹에 처한 이 현실은 우리에게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재확인 시킵니다( letio 강론…. 참조). 구원은 믿음을 통해 오며,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참조).실제로 바오로 성인의 가장 큰 사명은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모든 단계 중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는 목자들과 동행하는 각 가정들과 젊은이들로 구성된 평신도들이 앞장서서 모든 사람들이 많은 열매와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기쁜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쉽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 불행의 시기가 행운의 시기로 탈바꿈하도록, “사고 전환과 사목 체계의 회개”를 위한 은총의 시간으로 전환되도록 힘을 모으시겠습니까? 팬데믹으로 심각한 타격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는 하느님께 은총을 간청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여러분들 곁에서 동행하겠습니다.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이 알아듣는 만큼만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만큼만 알아듣는 경우가 있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 잘 못 들은 경우도 있고, 제대로 알아듣기는 해도 그 말을 듣고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영화나 작품을 바라보듯이 한 걸음 떨어져 평가하고 분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3-8)
그러시고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9절)라고 덧붙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을 해 주실 때 다 똑같이 좋은 말씀으로 들려주시도록 전해주시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처럼 형편없이 들리도록 전해 주시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군중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러시고는 제자들에게 따로 이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19절)
어떤 사람은 좋은 집에 살면서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출세를 해서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웬 딴 나라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오히려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20-21절)
어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기고 그 말씀에서 새생명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과 감격은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뿐 현실의 각박함이나 이해관계 속에서 곧 묻혀지고 맙니다. 하늘 나라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절박함이 없거나 간절함이 없으면 예수닝의 말씀은 그저 값비싼 골동품이요 도서관의 귀중한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을 말을 무시하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모든 말들과 문화들과 사상들을 존중하지만, 선택의 귀로에서 상대화되거나 열등의 순위에 머무르시기는 원치 않으십니다. 다른 아버지가 그럴싸해 보인다고, 우리 아버지를 다른 아버지와 바꿀 수 없은 것처럼 말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세상 경험이 많다고 여기고,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들 중에는 ’적당히‘라는 말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세상에 사람을 감격하게 하고 혹하게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좋은 명언 중의 하나로만 여기고 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일단 나 먹고 산 다음에 여유가 있어야 선택할 만한 이웃 사랑이니,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양보니,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이니 거론할 단계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살다 보면, 활동하다 보면 적당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마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한 번에 한 사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싹 하루 아침에 다 바꾸시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반쯤 허리를 빼고 예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거나, 다리를 반만 걸치고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비교만 하면서 어떻게 다가올지도 모를 안 좋은 상황을 미리 가정하고 걱정하며 지레짐작으로 주저앉고 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19-23절)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나니,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 생명의 빛이더라.”고 선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기 저기 그럴싸한 것들과 곳들을 다 거치고 나서, 결론적으로 찾는 주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배냇신자로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심이나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곧게 살아온 순수하고 충실한 주님과 교회의 사람으로서 묵묵히 걸어가며 성취해가는 복음의 길도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새생명의 말씀이라는 같은 선물을 받으면서도, 어떤 이는 자신에게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 감격하여 받을 수 있고, 어떤 이는 그렇게 귀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학자는 행복이 기대와 욕망 분의 성취도라고도 말합니다.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크면 클수록 행복이라는 성취도는 작아질 수 밖에 없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복음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향과 목적에 있다면, 영적인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헤매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우리 인류를 구하시고 이끄시는 주 하느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길을 찾고 진리를 발견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로 접어들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입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에 큰 감동을 받으십니까?
여러분은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니까?
주님의 복음 말씀이 여러분 삶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길 바랍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새생명의 빛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이시고, 그 씨앗은 말씀이며, 그 씨앗이 뿌려지는 장소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내 마음의 땅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중동지역 파종법은 우리나라처럼 밭고랑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는 것 방식이 아니라 그냥 씨앗을 바람에 날리면서 뿌리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지게 되지만 또 어떤 씨들은 길가나,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 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혹시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았었는지…….곧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하기 보다는 세상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그리고 혹시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었는지…….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싹을 틔우지 못해서 결국 세상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걸려 넘어가지는 않았었는지.......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처럼 일단 뿌리는 내렸지만 다른 걱정과 유혹에 휩싸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올해도 역시 사제관 정원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씨를 뿌리고 길러서 신선한 야채를 잘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씨를 뿌리고 나서 그냥 놔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자랄 수 있도록 관리가 필요합니다. 일단은 잘 자랄 수 있도록 퇴비도 줘야하고, 매일 매일 물을 주어야 하고, 다른 잡풀들도 걷어 내주어야 합니다. 곧 사람의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 그것이 자라게 하려면 그 관리가 참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늘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늘 살아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말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랑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바쁜 일상 속에서 무관심으로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좋은 땅의 모습처럼 주님의 말씀을 고이 받아들이고 키워나가면서 주님 안에 수많은 열매를 맺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서 영원히 피어날 하늘 씨앗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씨 뿌리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곧 하느님 뜻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씨앗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 씨앗은 세상 살며 하늘 햇빛 받고 단비 맞으며 피어 열매 맺습니다.
그러나 하늘 씨앗 심을 귀한 흙 인간이라 하늘비료 자유를 뿌렸습니다.
자유라는 하늘비료 줬더니 하늘과 대자연까지 무시하며 잘났다 합니다.
자유 비료 없이 나무 꽃 동물은 대자연질서 따라 변함없이 진행합니다.
자유라는 비료 뿌려진 우리 하늘서 영원히 피어날 하늘 씨앗 받읍시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랑하는 제네바의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한국에서 가서 치료 받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맞이하는 첫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당시 당시 같은 지구 젊은 신부님들과 신학생들이 대천 요나 성당에 모여서 새 학기가 되면 수단을 입는 신학생들을 축하해주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선배 신학생이 선배 신부님들과 선후배 신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제게 하느님은 미련한 목수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에 좋은 못이 많은데, 하고 많은 좋은 못들 중에, 하필이면 이렇게 휘고 못생긴 못을 선택하시니... 그러다가 자기 손이 다칠 수도 있는데도 하느님께서 이 구부정한 못을 선택하신다면, 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 자신을 봉헌해드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군중들은 이 말을 듣고 의아해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메마른 이스라엘에서는 씨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농부도 이렇게 밭을 미리 살펴보지도 않고 무차별적으로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는 너무나 넘쳐서 인간인 우리가 보기에는 하느님이 낭비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넘치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인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항상 넘치는 행동을 합니다. 줘도 줘도 아깝지 않고,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혼은 하느님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기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이 좋은 밭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름답게 만들어진 문이라도 관리해주지 않으면 녹이 슬듯, 어떤 사람의 본래의 아름다운 본성은 그의 엇나간 욕망과 죄로 인해 가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구제불능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사회에 위험이 되는 인물로 보고 사회에서 제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하느님은 그 못난 사람 위에도 씨를 뿌리십니다. 이것이 셈에 빠른 우리에게는 미련해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1코린 1:25).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이 어리석음 덕분에 마음을 놓고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관리자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닙니다. 하물며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도 동물이 구덩이에 빠지면 불쌍히 여기고 건져줍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와 악습의 구덩이에 빠지면 어떻게든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지 혼내거나 훈화를 늘어놓는 분이 아니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귀한 씨를 아낌없이 뿌렸지만,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서 새들의 먹이가 되었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떨어져서 해가 솟아 오르자 타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또 다시 우리 영혼에 귀한 당신 말씀의 씨를 우리가 보기에 낭비라고 할 만큼 아끼지 않고 뿌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누리는 모든 영적 축복은 낭비처럼 보일만큼 풍요한 그분의 인내와 자비 덕분입니다.
자기는 자기 스스로를 단죄하고 모자란 사람으로 깎아내릴 수 있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귀하고 존엄합니다. 그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못났다고 생각하는 그 한 사람(자기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교정신으로 마음 밭을 가꾸기 - 순교의 씨앗이 뿌려진 후 ⓵ 우상숭배에 맞서는 영성과 의식
이기우 신부님
⒈ 지난 주일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생애와 신앙을 기리는 강론을 말씀드렸고, 그 후 주간 평일에는 이 사제 순교자가 배출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으로서의 천진암 강학회와 명례방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그 후 박해가 시작되자 생겨난 교우촌, 그리고 여기서 그가 사제성소를 키울 수 있었던 신앙 환경, 그와 함께 사제성소를 받고 사제가 되었지만 순교하는 대신에 12년 동안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이 교우촌들을 돌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활약, 교우촌이 백 년이나 버틸 수 있게 사상적으로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선비들의 공헌에다가, 그리고 실제로 교우촌의 주역이 되어 숨은 꽃처럼 신앙을 지키고 물려준 수많은 교우들의 눈물겨운 노력 등 순교자들을 배출한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와 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⒉ 박해시대였던 조선 후기의 상황이 아예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우상숭배적인 분위기였다면 그 후에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어도 그것은 헌법상으로만 주어진 것일 뿐 나라 전체에 우상숭배적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즉, 지금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통해서 우상과 싸우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며 그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과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때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교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순교할 각오로 우상과 맞서서 복음적 가치를 증거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렇게 되어야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교우촌에서 신앙을 물려준 보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순교할 각오로 복음적 가치를 증거하려는 마음가짐이 순교정신인데, 이 정신으로 살아야 순교자 현양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바리사이들이 옛 예언자들을 현양하려고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예언자들처럼 신앙을 증거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매섭게 질타하셨음을 기억해 본다면, 순교정신을 실천하는 일은 이 시대에 미룰 수 없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⒊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던 아모스의 예언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정의로워지지는 못했으며, 또한 우리 교회가 “헛된 경신례보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라”던 호세아의 예언도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성숙하지도 못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경신례를 경건하게 올리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힘의 형태로 우상이 군림하고 있고, 이에 따라서 힘 없는 이들이 짓밟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복한 개별 신앙인들이 이런 시대상황에는 아랑곳없이 자기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현세적인 복을 기원하려는 기복신앙의 경향에 빠지면 자칫 형식적으로는 정상적으로 경신례를 올리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우상숭배에 물들어 마귀의 하수인 노릇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하느님 흠숭 사이의 긴장은 세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 긴장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밭을 어떻게 잘 일구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을 섬기는 열매를 얻을 수도 있고 우상을 숭배하고 마는 결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⒋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은 박해가 한창이던 2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떼르뚤리아누스가 남긴 말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초창기에도 명례방 공동체에 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러했듯이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을 전국으로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고, 급기야 천주교를 없애려고 신자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오히려 방방곡곡의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간 신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교우촌들이 세워져서 신자들은 더 늘어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순교는 복음의 씨앗처럼 교회라는 꽃을 피우고 복음화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증거한 순교자를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느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렇듯 하느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상을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우상은 마귀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짜 하느님의 모습이요 거짓 하느님의 상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정신으로 살아가는 일은 우상숭배에 맞서면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됩니다.
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공생활 중에 겪으신 다양한 인간관계의 사례를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앗 에 빗대어 군중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여러 엇갈린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회상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공생활 동안 만나셨던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⒍ 첫 번째 부류는 마치 바닥이 단단한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버리는 씨앗의 운명처럼 복음을 들어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고 심지어 기적을 목격했어도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먹고 사는 세상 걱정에 치여서 하느님이 들어가실 마음자리가 없고 복음 진리를 깨달아보겠다는 지향도 없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사두가이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마귀의 조종을 당한 것처럼 무죄하신 예수님을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종교적 혐의를 뒤집어씌운 다음 반역을 꾀했다는 정치적 누명까지 덮어씌워서는 로마총독의 권세를 빌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⒎ 두 번째 부류는 흙이 깊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뿌리를 내릴 수 없어서 씨앗 속에 들어있는 양분으로 겨우 싹은 낼 수 있었지만 햇볕에 곧 말라버리는 씨앗의 운명처럼,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내치지 않고 다 받아들여서 돌보아주시던 시절에는 호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다가왔으나 그분이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시면서 당신께서도 십자가를 짊어질 것임을 예고하시자 지지하던 마음을 거두어들인 군중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열렬히 환영하던 이 무리는 힘을 지닌 메시아로 화려하게 등장하기는커녕 예수님께서 정말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매달리는 무기력한 처지가 되시자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그리고 열성당원들의 선동에 속아 넘어가서 그분의 십자가 처형에 찬동하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⒏ 세 번째 부류는 제자들인데 네 번째 부류인 사도들과 겹칩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제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더 빨리 자라나는 가시 탓에 숨이 막혀 버리듯이, 예수님으로부터 들려온 하늘 나라의 소식에 끌리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모순된 이중의 목표를 추구하다가 번번이 걸려 넘어졌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열두 명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방방곡곡으로 파견되었던 일흔두 명의 제자들(루카 10,1)도 포함됩니다. 이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고, 어린이에게 들어간 마귀를 쫓아내지 못해서 핀잔을 받기도 했으며, 누가 더 높으냐 하는 서열 다툼을 벌이다가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가시덤불이 싹의 숨을 막아 버린 경우처럼 떨어져나간 제자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들 수 있겠고,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경우로는 클레오파스와 그의 한 동료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낙담하여 제자 성소를 포기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엠마오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당시 좌절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⒐ 그래서 네 번째 부류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변화된 사도들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마티아를 뽑을 때 모였던 제자들만 해도 백 스무 명 가량 되었는데(사도 1,15), 이들도 군중 속에서 제자로 선발되어 사도로 양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많이 다듬어지는 정화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좌절하기도 했고 빈 무덤 앞에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즉, 믿음이 굳세어져서 목숨을 바치거나 또는 일생을 바쳐서라도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제자들만 초대교회에서 사도라고 불리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처럼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중에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나 되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⒌ 교회는 사도들이 뿌린 씨앗으로 거둔 열매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자신의 사도직 활동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복음을 자발적으로 이 땅에 들여온 선각자들도 따지고 보면 서양에서 중국에까지 와서 연구와 저술활동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 덕분에 맺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선각자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교우촌이라는 열매가 박해 속에서도 풍성히 맺힐 수 있었고, 그들 교우촌의 신앙선조들이 뿌린 순교라는 씨앗과 신앙 증거라는 씨앗으로 맺을 수 있었던 복음화의 열매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전해지는 경로는 씨앗과 열매처럼 퍼져나갑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이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며 열매를 맺고 씨앗을 뿌리게 하듯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마음 밭을 어떻게 일구느냐에 따라서 복음이라는 씨앗의 운명이 결정되고 또 그 씨앗이 우리 삶에서 맺을 열매도 정해집니다. 이 마음 밭을 자아라고도 하는데 이 자아를 성찰하는 가운데 우상을 향하려는 성향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과정이 영성생활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뜻보다도 자기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경우에는 자기 자아가 우상이 되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자기 성찰은 꼭 필요한 영성생활의 일부입니다. 이는 땅에 떨어진 밀알이 썩는 과정과도 같아서, 우상과의 싸움에서 부딪치며 정화되고 성숙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합니다. 그 고난은 장차 맺게 될 복음의 열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고난을 잘 견디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고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들로 이루어진 설교 말씀으로 이루어진 마태오 복음 13장에 들어 있는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농부,어부,상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만나고 겪게 되는 소박한 소재들로 이루어진 비유들로서 하늘나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하늘나라는 씨 뿌리는 사람이 넉넉하게 뿌리는 씨와 비슷하지만,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육십 배,삼십 배 열매를 맺는 것, 조그만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고,좋은 곡식과 잡초가 어울려 자라면서도 때가 될 때까지는 잡초를 뽑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도 같아서 반죽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안에서 부풀어 올라 빵이 되게 하고,귀한 진주와도 어떤 값으로든 그것을 사는 것이며,좋은 것들을 모두 담는 그물과도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나라가 바로 하늘나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구조적으로 복음서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비유들은,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11-12장에 대하여 다양 한 설명을 제공하는 구실을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석(13,1-23)은 하늘 나라의 선포와 그 다양한 결과를 설명합니다.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 문이다”(13,13)는 구절은 “저 바깥 사람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1-12)는 마르코 복음의 역설적인 말씀을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어떠한 시련과 갈등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사람들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라고 믿으신 예수님의 신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란 본래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법인데,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아크티프)와 아람어(마틀라)가 본래 ‘수수께끼’를 뜻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수수께끼는 그것을 애써 풀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 답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스무고개의 경우 처음 몇 고개는 힌트만 줄 뿐입니다. 본인이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지 않으면 해답에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선문답의 화두처럼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올바로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열매를 맺는 충실한 신앙에 강조점이 주어집니다. 비유에서처럼 신앙은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일회적 결단이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항구함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며 하늘나라를 지금 현세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례 전 예식들에 대한 가르침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의 시작 (Nn. 1-7: SCh 25 bis, 156-158)
성조들의 행적이나 잠언의 교훈을 읽으면서 윤리 문제에 대해 여러분께 매일 강론해 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여러분이 이런 교훈으로 교육을 받아 우리 성조들의 경지에 들어가 그들의 도를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세례로써 새사람이 될 때 세례 받은 이들에게 맞는 그런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신비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성사의 의미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세례 전에, 아직 입문 성사의 체험이 없을 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여러분에게 성사의 의미를 알게 해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오해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사들이 지니는 빛은 성사들에 대해 미리 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보다 그것을 모르고 받는 사람들에게 더 밝게 빛납니다.
여러분은 귀를 열어 듣고 또 성사들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부어 준 영원한 생명이 지닌 달콤한 향기를 맡으십시오. 여러분의 귀를 열게 하는 예식에서 “에페타” 즉 “열려라.” 하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이 뜻한 것입니다. 이 예식을 거행한 것은 성사의 은총을 받으러 나오는 여러분들이 받게 되는 질문의 뜻을 깨닫고 또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도 벙어리를 고쳐 주실 때 이와 같은 신비의 예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이 예식이 끝난 다음 지성소의 문이 열려 여러분은 재생의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받은 질문을 상기하고 여러분이 대답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와 그 행실을 끊어 버리고 세속과 그 허례 허식 및 쾌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한 약속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 아닌 생명의 책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레위와 사제들과 주교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외모를 생각지 말고 그들의 직분이 부여받은 은총을 생각하십시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여러분은 천사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제들의 입술만 쳐다보면서 인생을 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려 한다. 사제들은 전능하신 주님의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속임이 없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이는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직분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전수해 준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직능을 존중하며 또 그 품위를 인식하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와 맞서기 위해 들어가서 그가 있는 앞에서 그를 끊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동쪽을 향했습니다. 마귀를 끊어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하고서 그분을 똑바로 바라봅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바탕.< 마태 13/1-2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야 많은 결실을 맺는 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같이 한생명도 좋은 조건에 성장의 원리를 따라 유익한 존재가 되고 무익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같이 믿음도 어떤 바탕에 있은지 안 있는지에 따라 빛을 받아 빛이됩니다. 이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무수한 하느님의 말씀이 씨처럼 사람의 마음에 내려오지만 바탕이 잘된 사람과 잘못된 사람과는 전혀다른 결괴를 보게 됩니다.
하느미의 말씀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들어도 이렇게 듣고 저렇게 들어 서로 다른 상태로 받아 들어져 생며이되기도 하고 죽음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잘 알아듣게 설명해주시지만 이 말씀도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멈추지 않은 시간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의미 있게 알아들으려면 자신이가지고 있는 오관을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생각으로 바꾸려면 하느님 편에 서 있고 하느님 과 함께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느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묵상 하기전에 내오관을 십자가로 축복하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제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생명을 누리는 것 몸으로 실천하는 것 주님이 하시듯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고 하루를 시작하기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것도 시간을 쫒아가기 위해 한 시간 전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날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묵상하고 정한 복음의 내용을 보고 다시 생각하고 행동을 시작합니다. 아침 공동 기도를 하기위하여 성당으로 종치기전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알이 듣고 마음깊이 색이고 이해하고 깨우치고 실천할 은혜를 구하고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모든 것을 자기 입장에서 보면 내 것이 되지만 하느님의 편에서 보면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 누구든지 하늘나라의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하심 같이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눈으로 보아야 하느님처럼 알고 실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인간적 생각에 잠겨있으면 믿음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깨닫는 다는 말은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이해하고 마음 깊은데서 느끼고 감사와 찬미의 정신으로 받아드리며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나다는 말씀입니다. 어제 베네딕도 성인 축일을 지내며 성인은 “ 몸서 체험하신 것만 말하고 가르치셨다.” 고 합니다.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지나가는 바람 같으면 흩어지고 말지만 몸속으로 들어오면 머물고 싹이 트고 결실을 내 안에 맺게 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이 저의 참 생명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구원의 삶. -희망하라, 항구하라, 겸손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요셉수도원 신부님
참 열심한 분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납니다. 새로운 힘을 얻는 기분입니다. 어제의 예수성심형제회 모임이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니 어제 2020.7.11.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은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요셉 수도원에 부임한지 만32주년(1988.7.11.)이 되는 날이자 사제서품 만31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 대축일 미사때는 정아브라함 수사의 유기서원 갱신 예식이 있었습니다. 어제 모임을 가진 7명의 형제자매들도 참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꼭 예수님 제자들이 앉아 있는 모습같습니다.”
미사는 물론 강의에 앞서 배치된 책상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고 나눈 덕담입니다. 시종일관 진지한 참여 자세는 얼마나 든든했는지요. 책임을 맡은 형제의 아침 카톡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베네딕도 성인 축일 축하드립니다. 어제 저녁에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연령회장하라고 임명하셨습니다. 아침에 매일미사 읽다가 베네딕도 성인 축일 전야에 임명받았으니 큰 축복을 주셨나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주변에서 뜻밖의 변고나 죽음을 대하며 깨닫는 바이기도 합니다. 한 치도 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해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후 알뜰히 모임을 끝내고 떠날 때는 함께 수도원 정원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참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들에 덕담 메시지와 더불어 사진도 전송했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예수성심의 성덕으로 아름답게 빛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런 믿는 형제들의 모임은 말그대로 광야 세상에 구원의 오아시스입니다. 참으로 요즘 저절로 자주 바치는 행복기도문중 일부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구원의 하루입니다. 구원도, 행복도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깊고 아름다운 한 폭의 인생 그림이 완성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구원의 삶일까요?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알려 드립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을, 꿈을, 비전을 잃을 때 인간성도 황폐화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품위 유지에도 결정적인 희망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건강에 필수인 희망입니다. 광야인생에 피어난 희망의 꽃이요, 광야의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항구한 인내의 믿음이, 사랑이 가능합니다.
궁극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둔 자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자포자기의 절망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정말 절망이 대죄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자에게 저는 “하느님이 미래요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런 희망을 고백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피조물들도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희망이 있어 구원을 앞당겨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세요.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참으로 믿는 이들의 항구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에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물론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그러니 절망의 자살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항구하라”입니다.
제 삶의 자리에 한결같은 항구함이 구원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도 항구한 인내를 뜻합니다. 제가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평생 가장 많이 바라본 , 또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상이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항구한 인내의 정주의 모범이 불암산입니다.
결코 배경의 하늘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불암산입니다. 하늘 배경이 흐리던 맑던, 어둡던 밝던 언제나 한결같이 크고 깊고 고요한 불암산입니다. 참으로 항구한 사람들은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이 그러했고 그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한결같이, 기쁘게, 자발적으로 순교적 삶에 항구했고 충실했습니다.
길가에 떨어졌다하여 돌밭에 떨어졌다하여 가시덤불에 떨어 졌다하여 좌절하지 않고, 어떤 환경이든 환경에 일희일비 좌우되지 않고 항구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끝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씨뿌리는 삶에 항구했습니다. 희망과 함께 가는 항구함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삶은 과정입니다. 길고 넓고 깊게 삶을 조망하다 보면 객관적 시야도, 하느님의 시야도 지니는 법입니다.
어찌 보면 삶은 리듬입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 관상과 활동, 쉼과 휴식이 리듬처럼 펼쳐집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삶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좁게 보면 실패인생 같아도 지금 어디선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잘 자라 열매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13,8)
저 역시 사제서품후 만 31년 동안,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씨뿌리는 마음으로 과정에 충실하여 항구히 날마다 하루하루 강론을 써서 나누었고 매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잘 쓰든 못 쓰든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며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항구한 인내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전반부의 중심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다면 후반부 초대교회의 비유의 해설은 씨가 뿌려지는 땅이 중심입니다. 말씀의 씨가 아무리 좋아도 밭이 문제입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내 마음밭 관리에 소홀하고 태만했기 때문입니다. 추호도 하느님 말씀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줍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이렇듯 좋은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고배도 끊임없이 잘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돌배가 됩니다. 물도 주어야 하고 거름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주어야 좋은 땅에 좋은 나무입니다. 그냥 방치하면 신고 배나무는 돌배나무가 되고 땅은 잡초雜草 우거진 박토가 되고, 잡목雜木 우거진 야산이 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수행의 노력입니다. 수행에 게을러지면 온갖 잡초들 우거진 밭처럼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됩니다. 길바닥이 돌밭도 가시덤불밭도 될 수 있고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자라지 못합니다. 영적성장도 성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의 ‘경청(傾聽, 敬聽)’과 실천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여전히 부족한 경청이요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래야 겸손한 마음의 좋은 땅입니다.
인간homo과 겸손humitas의 어원은 흙humus에서 기인합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겸손의 수행으로 좋은 땅의 마음밭을 만드는 것이 모든 수행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수행에 항구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마음밭도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합니다.
사실 변모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냥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겸손한 자세로 과정에 항구할 때 주님은 분명 풍성한 결실을 주실 것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결론이 주님 말씀의 경청과 겸손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지금도 정치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마디입니다. 농부는 한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고 봄날에 씨뿌리는 것을 잊지 않고 한 여름 폭염속에도 가을걷이를 준비합니다. 날씨도 탓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오늘에 충실하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도 환경도 아닌 내탓입니다. 참으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이들은 절망, 실망, 원망의 삼망이 없고 늘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삶은 단순명쾌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루하루 한결같은 노력으로 겸손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 마음밭에 뿌려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에서는 '말씀과 우리의 상호성'을 이야기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먼저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당신 말씀의 성취에 대한 주님의 확신을 듣습니다. 사람이야 '말 따로 행동 따로'이기 일쑤지만 하느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의지가 그분 입을 통해 발설되니까요. 말씀이 곧 그분 의지의 표현이고, 성취는 그 의지의 완성입니다. 그분의 의지와 말씀과 성취는 일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토양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4).
말씀을 듣는 영혼의 땅이 "길바닥"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정보나 이념이든 아무것이나 내 영혼을 함부로 짓밟고 다니며 점령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깨어서 내 땅의 주권, 그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마태 13,5-6).
마찬가지로 내 영혼의 땅이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가득한 돌들이 부서지고 갈아져 흙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딱딱하고 물기 없는 돌인 채로는 생명의 말씀을 품기 어렵지요.
돌이 흙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시간도 걸리지요. 더 작아지고 미약해지고 무력해지는 과정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산산이 부서지고 짓이겨지고 으깨진 흙이 되어서라도 말씀을 품을 수 있다면 인내와 견딤, 기다림은 가치가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말씀의 숨을 막는 가시덤불은 사실 내가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장마 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잡풀처럼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지요. 영혼이 가시덤불 땅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서로 덩굴을 엮기 전에 잘라내어야 합니다. 걱정과 유혹에 한치의 땅도 허용해서는 안 되지요.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마태 13,3).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 맺습니다. 들음과 깨달음과 실행이 하나입니다. 이는 그의 들으려는 '의지'와, 깨달음이라는 '앎'과, 열매 맺는 '사랑'이 일체일 때 가능합니다. 그는 이미 의지와 말씀과 완성이 하나인 주님을 닮았습니다.
우리 영혼이 말씀을 품기 적합한 좋은 땅으로 유지되려면, 지향의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바라는 바와 아는 바와 움직이는 바가 하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곧 주님의 뜻이지요. 이런 영혼이 지닌 통합성이 곧 인격적 영적 성숙의 표지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지향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로마 8,23).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 진정한 원의에서 우리 지향이 들음과 깨달음과 실행으로 구체화되고 방향을 잡고 성장해 나가지요. 결국 우리의 구원은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마음 밭, 영혼의 토양을 잘 가꾸시는 한 주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땅이 말씀을 잘 품어야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즐겨 이루실 것입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길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마태오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신앙인이 겪는 세 가지 걸림돌을 비유로 말해줍니다.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고, 돌밭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가시덤불 속에서 숨이 막혀버리는 모습들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기는 해도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버려 마음에 담지 못하는 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신앙의 위기가 닥치면 낙담하고 좌절하고마는 나, 누군가의 험담과 교회의 악표양에 걸려 넘어져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하는 나를 봅니다. 탐욕과 위선, 거짓과 악의는 하느님의 진리와 선, 아름다움의 영적 가치들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우리의 눈과 귀를 막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헛된 가치들에 빼앗긴 우리 마음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속된 감각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성령께서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영적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자리,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땅입니다.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사람들, 내가 보람을 느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봉사하는 교회,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를 내어주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내 가정, 내가 속한 직장,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이사 55,10-11)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초대합니다.
좋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즐기라고 하느님께서 초대해도 응답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다고 탓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이사 55,1-9) 제2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비처럼 마른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을 돋아나게 하는 고마운 빗방울처럼 자비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기”(이사 40,8) 때문에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새로 태어나게 하고, 기쁨의 삶을 이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비로 비유하면서 비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듯이, 한 번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의 내용이 실현된다고 합니다.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거부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데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느냐고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제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헛되이 떠도는 메아리가 되지 않고, 우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우리 마음의 밭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싹틔워(말씀대로 살아)보라고 합니다. 화답송(시편 65장)도 하느님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묘사하고, 인간을 땅으로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농사꾼으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초목으로 표현합니다. 비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부드럽게 하시며”, “풍요롭게 하시고”, “영글게 하시고”, “복을 내리시는데”, 이 모든 것을 그분께서 “장만해주신다”고 합니다.
복음(마태 13,1-9)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가지 마음(공동체)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찾아왔지만 밖에 서 있었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신 뒤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경청하는 사람들과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무슨 씨를 언제 뿌리는지, 기후가 어떤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소개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3ㄴ-9절)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절), 그리고 비유의 핵심인 “설명”(18-23절)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는 하늘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정성과 지향에 대한 설명도 없이 씨앗을 뿌렸는데, 그 씨들이 떨어진 네 가지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농부라면 씨가 아무데나 뿌려지게 하지 않으며, 새들이 쪼아 먹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농사기법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이해한 사람들의 체험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는 씨가 떨어진 네 가지 상황을 우리의 마음(공동체)에 비유하면서 단순하게 씨가 뿌려졌다는 것에 집중하게 합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뿌려질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마태 13,19). 마음은 나름대로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들여 신앙의 신비를 포착하고 파헤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4절)은 그야말로 싹을 틔우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리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아무리 많이 들어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지도 못하는 이들을 말합니다(마태 13,14-15).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은총과 진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건만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한 1,11.17).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5절)은 싹은 틔웠지만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즉시 말라버리듯이 신앙이 없는 사람은 돌 같은 마음이라서 비록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와 닿았지만 그 말씀을 사는 것보다 다른 일들이 더 중요하고, 핑계가 많고, 게을러서 신앙이 성숙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휘둘리기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즉시 걸려 넘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쉽게 식어갈 것입니다(마태 13,21; 24,12).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7절)은 싹은 제대로 틔웠고 뿌리를 내렸지만 울창하게 자란 가시덤불이 숨통을 막아버려 햇빛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랄 수 없듯이, 세상 걱정과 재물에 의한 유혹(마태 13,22) 때문에 말씀이 풍요로워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이 뿌리는 내렸지만 함께 해주려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아니 도와주려는 이들을 거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생활을 못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한 번 하느님의 말씀을 싹틔운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8절)은 싹이 잘 터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꾸준히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되새기고, 잘 깨달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을 말합니다(마태 13,23). 좋은 땅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열린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사람이며(시편 1,2), 하늘나라의 신비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마태 7,21)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제2독서(로마 8,18-23)는 말씀의 씨앗을 싹 틔우면서 느끼는 아픔을 이겨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로마 8,17)고 강조한 뒤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미래에 닥칠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겨내라고 합니다. 지금 겪는 고통 때문에 우리 자신을 마치 땅에 버려진 씨앗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를 얻도록 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로봇처럼 조종하신다는 예정론적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수확할 수 있는 열매를 미리 마련해놓으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하나의 씨앗처럼 뿌려주신 것이며, 동시에 땅을 기름지게 할 빗방울까지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자유라는 열매를 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땅에서 말씀의 씨앗을 싹틔워야 하는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싹을 틔우는 것은 우리 몫이지 하느님께서 싹을 틔워주시는 일까지 손수해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 싹을 틔우는 일이 힘겹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탄식과 진통을 마치 고통의 바다에서 멸망의 종살이를 하도록 하느님께서 내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며, 세례성사의 선물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인내를 가지고 이겨내야만 하는 과정(종말론적)입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에 견준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탄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모진 풍파를 이겨내야 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2)고 할 수 있으려면 세상을 이겨내야 합니다.
인간(땅)은 하느님의 자비(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말씀)를 싹틔워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딱딱한 길과 사막과 언덕뿐인 황량한 곳(회색)에 비가 뿌려지면, 기름진 땅이 되기 때문에 풀밭(초록)으로 바뀌어 윤기가 흐르고, 아무것도 자랄 수 없었던 언덕들도 기쁨의 띠를 두릅니다. 비로 인해 풀이 많아진 목장들은 양 떼로 뒤덮이고(흰색), 끝내는 골짜기에 곡식이 가득 쌓여(황금색), 환성을 올리며 노래한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비유하는 것입니다(화답송).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하느님의 말씀이 파고 들어가 싹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내 마음의 밭은 어떤 상황입니까? 땅이 비를 거부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마음속에서 말씀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분명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어 풍요롭게 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 한다면, 비록 자주는 아닐지라도 가끔, 말씀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행복조차도 맛 볼 수 없다면, 그리스도라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내 마음이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며, 눈을 감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3,13-17).
말씀 수용의 단계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음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헛되이 돌아가는 일이 없고 뜻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아무리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 밭이 어떠냐에 따라 아무 결실이 없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순矛盾이란 창이란 뜻의 모와 방패라는 뜻의 순이 합쳐진 말로서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자기가 파는 창은 모든 것을 뚫는다고 하고, 동시에 자기의 방패는 모든 것을 막는다고 한 데서 유래된 거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모순된 하느님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모순될 리가 없겠지요. 이런 믿음으로 두 말씀을 묵상해보니 제게는 이런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생기라는 말씀대로 다 생겨났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우리 인간도 다 그렇게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고 난 뒤에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당신 말씀을 받아들일 건지 거부할 건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에서 이 땅 저 땅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셨지만 어떤 땅이냐에 따라 결실을 달리 맺는다는 것의 뜻입니다.
하느님은 폭군이나 조폭 두목처럼 말을 안 들으면 절단 내는 분이 아니시고, 당신이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우리 인간이 사랑으로 받아들이길 바라시고 그래서 선택의 자유도 주시고 시간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여유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길바닥과 같을 때는 하느님께서 벽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치 않아 그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수없이 그리고 간절히 말씀하셔도 와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깨닫지 못해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사랑치 않아서입니다.
이보다 나아진 단계로서 우리가 돌밭과 같을 때도 있습니다. 돌밭이란 돌과 흙이 같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흙이 있기에 일단 씨를 받아들이지만 돌들로 인해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오늘 비유 풀이에서 말씀을 처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 닥치면 걸려 넘어지는 단계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주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싫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말씀만 들으려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 단계는 씨가 뿌리는 잘 내렸는데 가시덤불에 덮인 단계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그래서 열매를 변변히 맺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한동안 많은 교회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합니까?'라는 글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걸었던 것처럼 믿음이 부족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걱정에 싸이거나 유혹에 흔들리는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하느님 말씀의 열매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느님 말씀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행복하며, 생기와 활기가 넘치고, 그래서 남도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함승수 신부님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세계 꽃박람회에 갔다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꽃은 어디서 태어나는 거야?"
"응, 꽃씨에서 태어나는 거야."
"꽃씨 속에 꽃이 있어?"
"응."
아이는 엄마를 졸라 나팔꽃 꽃씨 하나를 얻었다. 아이는 얼른 꽃이 보고 싶어 연필 깎는 칼로 꽃씨를 깠다. 그러나 그 속에는 꽃이 없었다. 꽃도 없고 잎도 없었다. 아이는 급히 엄마한테 달려갔다.
"엄마, 꽃씨 속에 꽃이 없어. 엄만 거짓말쟁이야."
아이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엄마는 가만히 아이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꽃씨 속에 꽃은 분명히 있어. 다만 하늘의 바람과 햇살, 땅의 흙과 물이 한데 마음을 합쳐야만 꽃은 피어날 수 있는 거야. 꽃을 피우는 것은 우리 사람이 아니란다."]
정호승 시인이 쓴 <꽃씨>라는 글입니다. 꽃씨 속에 생명을, 크고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즉 꽃씨를 잘 가꾸는 우리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씨앗'처럼 심어주시는 그분 말씀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도 "생겨라"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하셨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을 곧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지니고 계시는 '전능하심'이라는 본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자유의지'를 주시며 존중해주신 하느님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이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이라도,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그 결실을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이 비유에 나오는 땅의 세 가지 '상태'에 대해 말씀을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처음부터 '길바닥'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땅은 없습니다. 원래는 하느님께서 씨앗을 심고 가꾸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신 '밭'이었습니다. 그것을 인간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본인의 욕심에 따라 자기 맘대로 '길'로 만든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길바닥'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본인의 주관이 지나치게 뚜렷하고 고집이 세서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그분의 뜻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권하면 '신앙이 밥 먹여주느냐'고, 그런건 좋아하는 사람이나 하면 돼지 나한테는 그런 얘기하지 마라'고 차갑게 외면하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 밭에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진다고 해도 싹이 틀수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두번째는 말씀의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저변이 부족한 '돌밭'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길바닥' 사람들과는 달리 일단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의지'라는 토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씨앗을 키우기 위해 고통과 손해를 감당할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작은 시련, 사소한 갈등만 생겨도 금방 상처받고 쉽게 신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성당 다닌다는 사람이 왜 저래?', '왜 내가 이런 일까지 겪어가며 신앙생활을 해야해?' 이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입니다. 작물을 잘 키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인데 그것이 부족하니 말씀의 씨앗을 제대로 키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마음이 '가시덤불'같은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였음에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그만큼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에 쉽게 흔들립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 바빠서, 하느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온전히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또한 걱정이 많아 마음이 항상 산란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니,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니, 그만큼 신경쓰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욕심'이 바로 '가시덤불'의 정체입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금방 자란다는 겁니다. 뽑는 일을 조금만 소홀히 해도 어느 새 크게 자라 나무가 자랄 자리를 다 차지해 버립니다. 말씀의 씨앗이 우리 욕심 때문에 숨이 막혀 제대로 자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각자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 얻는 결실도 그만큼 커지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길'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좋은 땅'인지를 확인해보라고 이런 비유를 드신 게 아닙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입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지어 만드신게 우리인데 그 중에 '나쁜 땅'이 있을 수가 없지요. 문제는 그 땅을 본래의 목적에 맞게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데에 있습니다. 내 마음밭이 '길'로 잘못 쓰이고 있다면 본래의 목적에 맞게 쓰이도록 마음가짐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내 마음밭에 크고 작은 돌덩이들과 가시덤불이 가득하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더 강인한 의지를 주시기를 청하면서 내 욕심을 비워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주님께서 처음에 주신 '좋은 땅'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키운 삶의 열매를 직접 주시지 않고 키워야 할 '씨앗'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더해질 때 비로소 우리 삶은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좋은 땅'이기에 '하느님 탓'도 '환경 탓'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뿌려주신 은총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내 책임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
뿌린 말씀의
씨앗입니다.
주님의
씨앗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끝까지
말씀으로
살길 원하십니다.
씨앗에서
열매까지
말씀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만나게되는
주님이십니다.
씨앗도 열매도
말씀이 만들어가는
말씀의 시간입니다.
마음만 있고
말씀이 없으면
삶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음안에
있어야 할
말씀입니다.
마음은 말씀과
함께 가야합니다.
말씀은
씨앗과 열매를
닮았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줄 수
있는 삶이
되게하소서.
말씀으로
낮아지고
말씀으로
고개숙이는
씨앗과
열매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신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본당의 보좌신부님께서는 “이제 신학생이 되었으니 본당 행사도 함께 해야지. 이번에 중고등부 캠프에 가도록 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입학도 하지 않았지만, 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강원도의 설악산에 갔습니다. 솔직히 난생 처음 겨울 산에 간 것입니다. 어떤 장비를 갖춰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편한 청바지에 평상시에 신던 운동화를 차림으로 설악산에 갔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은 처음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화가 이렇게 미끄러운 신발인지 처음 알았고, 청바지는 산을 오르는데 많은 불편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더군다나 산은 왜 이렇게 험한지 혹시라도 미끄러져서 사고가 나지 않을까 싶더군요. 힘들었지만 합격 통지서를 받았으니 이제 신학생이라고 하는데, 차마 힘들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정상이 어디야? 다시 내려올 산을 꼭 올라가야 하나? 아이들도 힘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냥 내려오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었지요. 그리고 산 정상에 오를 때 즈음에는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완전히 지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산 정상에 올랐지만, 힘들어서 무엇을 볼 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어서 빨리 내려가서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등반을 모두 마치고 다시 산 아래 저희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그때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산이 정말 아름답지 않니?”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다시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산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힘들다, 짜증난다, 두렵다’ 등의 마음만 간직했지,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생각을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서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로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름다운 경관을 전혀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힘들다고만 외쳤던 저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뿌려진 씨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씨가 어떤 곳에 뿌려지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당연히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은 당연히 최고의 씨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은 좋은 땅일까요? 아니면 나쁜 땅일까요? 많은 열매를 맺을까요? 아니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마음을 옥토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의 밭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설혹 나쁜 시간이라 해도 그건 좋은 걸 선택한 것 못지않은 의미가 있어. 삶의 모든 시간은 똑같이 삶의 기회니까(전경린).
연필
이것은 배터리, 전선, 충전기가 필요 없습니다. 또한 사용하기 쉽고 휴대하기 편하지요. 공항의 안전장치를 작동시키지도 않으며 어디에서나 쓸 수 있고 무엇보다도 저렴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정답은 연필입니다.
맞지요? 요즘에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연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쉽게 쓸 수 있는 도구들도 많고, 더군다나 스마트폰의 발달로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이나 음성 녹음 기능으로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가장 정감 가는 것은 연필입니다. 연필을 이용해서 글을 쓸 때의 사각사각하는 느낌은 기분도 좋게 하고 새로운 생각도 더 잘 떠올려집니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아직도 연필을 이용하더군요.
연필은 1564년에 영국에서 처음 발명되었습니다. 당시에 많이 사용하던 잉크의 대안으로 이 연필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우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우기 쉽다는 특징이 세상을 바꾼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호칭을 얻게 했던 것이지요.
지금 현재 연필의 대용품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지우기 쉽다는 특징으로 오랜 시간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단 한 가지의 특징만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단 한 가지의 고유한 특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자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 고유의 특징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좁은 시야로 스스로를 쉽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연필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의 고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형적인 한 농촌 본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라고는 인근 대도시나 서울로 빠져나간 지 오래입니다. 주일 중심 미사 참석자 수는 다 합해봐야 100명도 채 안됩니다. 참석자들도 대부분 연로하신 어르신들입니다. 본당 예산이 소규모다보니 본당 사무실 운영이며, 기본적 연례행사도 불가능하며, 수녀님들을 초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젊은 주임 신부님께서는 사목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사무장, 관리인, 제의방지기, 어르신들의 돌보미 역할까지 다 하십니다. 사목자 입장에서 뭔가 해보려고 해도, 인적자원, 경제적인 측면 등, 기본적인 동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번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점점 기울어져가는 농촌 시골 본당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일이 없겠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도시 본당과 시골 본당에서 이미 시도하고 있는 일입니다. 도시 본당과 농촌 본당의 자매결연입니다.
준비된 서류에 그저 사인만 하는 자매결연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자매결연 말입니다. 정기적인 합동 교중 미사 봉헌, 합동 연수나 피정 실시, 친환경 농법 시도, 도시 본당 내 도농직거래장터 개설, 농번기 도시 본당 신자들의 단체봉사활동, 농촌 본당 인근 소규모 피정센터 마련 등등.
물론 안하던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다보면 부담스런 측면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통해 밋밋하던 도시 본당이 활성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막하던 농촌 본당이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시 본당이든 시골 본당이든 우리는 하나의 교회란 열린 인식입니다. 너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이란 공유의식입니다. 도시와 시골 사이의 장벽, 교구와 교구 사이의 장벽, 본당과 본당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는 보편되고 관대한 가톨릭적 사고입니다.
언젠가 젊은 수도자들과 멋모르고 농사를 조금 지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10명 정도가 달라붙으면 300평 정도는 충분히 경작할 수 있겠지, 장담했다가 일 년 내내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절기 마다, 단계 마다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잡초들은 또 얼마나 끈질기든지? 병충해는 왜 그리 종류가 많던지? 여름 햇살을 얼마나 뜨겁던지? 이랑은 왜 그리 길던지...
존경하는 우리 농민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매일 땀을 흘리며,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존중하며 그렇게 열심히 살아들 가십니다.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매일을 맡기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정말이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헌신의 대가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전면적인 농산물 시장 개방, 세계화로 인해 우리 농부들께서 설 자리가 점점 줄어만 갑니다. 각 방송사마다 농사와 관련해서 성공 사례들만 줄기차게 틀어주니, ‘농부들 살기가 괜찮은가보다’ 생각하지만 현실을 전혀 다릅니다.
죽어라고 농사를 지어보지만 가구당 연간 소득은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더구나 대세 품목인 쌀 시장까지 전면 개방되어 주 소득원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농민들의 빚은 점점 늘어갑니다. 농민들의 노령화가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 농부들은 묵묵히 논으로 나가셔서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밭으로 나가서 잡초를 뽑고 있습니다. 갖은 도전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수확을 희망하며 굵은 비지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농사를 통하여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농민들의 노고에 큰 박수와 격려를 보냅니다. 고마우신 우리 농민들의 희생과 땀방울에 큰 감사를 드리며, 어떻게 하면 그분들이 좀 더 신명나게 그 신성하고 고귀한 주님의 일, 곧 농사일을 해나갈 수 있겠는지 같이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열매 맺는 말씀의 씨앗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춰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 27년경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을 선포하실 때 많은 호응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비난과 저항에 부딪쳤고 떠나가는 제자들도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 30년 4월 초순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는 열두 제자와 갈릴래아 여자 몇 사람만이 그분을 동행합니다. 그토록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셨으나 그 결과는 초라했던 것입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보면 허탕을 친 셈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본 제자들은 쓰라린 좌절과 허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그만 두자고 청한 이들도 있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요, 그 씨를 뿌리는 이는 하느님이시며, 씨앗이 뿌려지는 곳은 인간과 피조물과 세상입니다. 말씀의 씨앗은 언제 어디든 가리지 않고 뿌려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실패한 듯 보이고 희망이 사라져버린 듯한 상황에서조차도 멈추지 않으시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는 그 어떤 반대와 저항이 있어도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난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신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씨를 뿌리시는 농부이십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씨를 뿌린다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니 내 기준과 기대치가 중심이 되고, 거기에 맞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분노하거나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을 지향하고 사랑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 않습니까?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씨앗은 하느님의 영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선이요 애정이며 사랑이지요. 씨앗은 지혜요 진리이며, 겸손이요 인내입니다. 씨앗은 즐거움이며 기쁨입니다. 씨앗은 희망이요 절제이며 정의입니다. 씨앗은 온화요 믿음이며, 아름다움이요 모든 감미로움입니다.
주님께서는 밭이 어떤 상태이든 이런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내 마음이, 이 세상이 좋은 땅이 아닌 길이나 흙이 없는 돌밭, 가시덤불 같아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도 그분을 따라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포기하기 말고 하느님의 씨앗을 뿌려야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55,11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일은 당장은 고통스럽고 헛된 일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너와 나, 공동체, 이 세상이라는 밭에 하느님의 선과 생명과 사랑, 인내와 기쁨과 정의의 씨앗을 뿌리기를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반대와 박해가 닥쳐와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할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하느님의 씨앗을 뿌리고, 아울러 나는 주님께서 뿌려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씨앗, 선과 정의의 씨앗, 기쁨과 아름다움의 씨앗이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기에 좋은 밭인지 돌아보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땅의 마음을 느끼는 농부
정연정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복자이신 존 헨리 뉴먼 추기경님의 문장(紋章)에는 “마음이 마음에게 말씀하십니다(Cor ad cor loquitur)”라는 사목표어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과 함께하고 계심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말은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이사 55,11 참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서는 「신심생활 입문」의 머리말에서 “바닷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진주조개 속의 진주가 한 방울의 짠물도 삼키지 않는 것처럼, 인내심 많고 용감한 사람은 세속에 살면서도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고, 세기의 파란만장하고 쓰라린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신심의 샘을 찾아내며 지상의 온갖 욕망 속에서도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하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냥) 그리로 되돌아가지 않듯이,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도 (그냥) 헛되이 되돌아가지 않는다”(이사 55,10-11 참조)는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인내하는 사랑’을 다시금 헤아리게 합니다. 결국 우리는 구원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유를 얻는다(로마 8,21 참조)
마르코 이반 루프니크는 「식별」에서 “교부들은 ‘필아우토이(philautoi)’, 곧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자신의 친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관심과 요구 사항에 몰두하는 생각들로 드러나는 자기애(自己愛)는 고립되고 산산이 부서지는 상태로 끝나게 합니다”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희망, 해방, 영광, 자유, 속량’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곧이어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Spe salvi facti sumus, 로마 8,24)라는 장엄한 고백을 선포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은 당연한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든든한 희망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고 새겨 주셨습니다.(「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1항)
서른 배와 예순 배와 백 배(마태 13,8 참조)
성서학자 요아힘 그닐카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8; 마르 4,1-9; 루카 8,4-8)와 관련해서 “적어도 우리에게 더욱 생소하게 보이는 것은 파종(播種) 방식이다. 조심성이라고는 없어 보인다”는 분석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지금 일어나는 일과 맺어 준다”고 풀이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씨앗처럼 뿌려졌다”(마태 13,3 참조)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씨를 쪼아먹는 새들, 싹을 태워 버리는 해, 숨을 막아 버리는 가시덤불’(마태 13,4-7 참조)과 같은 모습을 떨쳐내고 ‘좋은 땅’의 모습을 살도록 권고하십니다. 때문에 ‘좋은 땅’은 우리들이 일상 안에서 자신을 성찰케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찬미받으소서」 75항)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
지금은 직장에서 은퇴하고 시골에서 사시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농사를 하다보니, 이제는 땅의 느낌을 알게 됐습니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참 농부에게 땅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격체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게”(로마 8,21 참조) 됐습니다. 그 삶을 위해 예수의 성녀 데레사께서는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셨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땅’의 모습으로 충만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풍성한 열매 주시는 하느님
염철호 요한 신부님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세상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로마 1,19-20) 하지만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세상은 하느님의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고 우둔해 허무의 지배 아래 있었고, 멸망의 종살이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로마 1,21-22) 이런 세상에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신비, 곧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이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3,13) 그들은 하늘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는 것을 막고자 하지만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1독서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뜻하는 바를 반드시 완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신비는 드러날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로 봉독한 이사 55,10-11는 제2 이사야서(이사 40-55장)를 마무리하는 대목으로 오늘 대목에 앞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느님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마치고 약속된 땅으로 되돌아가 모든 것이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실제 키루스라는 임금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듯 보입니다. 화답송으로 읽은 시편 65장이 노래하듯이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땅이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키루스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다시 혼란스러워졌고, 이스라엘은 다시 어려운 삶에 떨어집니다. 유배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회복은 더디기만 했고, 하느님의 성전을 재건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신 분이 나자렛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는 분, 하느님 말씀 자체이심을 밝히십니다. 이제 세상은 당신을 통해 하늘나라의 신비를 올바로 깨닫게 될 것이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통해 그분의 말씀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평화가 가득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나라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그 나라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온갖 피조물이 이때를 기다려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을 알지 못했지만 항상 영광의 자유를 갈망해 왔습니다. 이런 세상에 성령을 첫 선물로 받게 되어 하늘나라 신비를 깨닫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희망이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인해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는 못했음을 절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 편에서의 믿음과 충실함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 손에 이끌려 온갖 피조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뿌린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마음의 밭
김정욱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듣습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지는 비유를 통하여 똑같은 씨앗이 아주 다양하게 뿌려지고 그 결과가 아주 다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씨앗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말씀 가운데 하나, 둘이 아니라 그분 말씀 전체이며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밭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이 밭은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길바닥이, 돌밭이, 가시덤불이, 좋은 토양이 될 수 있는 밭입니다.
다시 말하여 밭은 모든 조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밭입니다. 살아 있기에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모습의 신앙인들을 만나고 살아갑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내가 닮고 배우고 싶은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왜? 저런 삶을 살아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끔 하는 신앙인이 있고, 또 마지못하여 자신의 체면이나 겉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지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똑같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데 그 삶의 변화가 서로 다름을 종종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면서 과거에 연연하거나 아직도 자신의 삶을 중요시하거나 사랑과 용서의 삶보다는 이득을 먼저 따지며 살아간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보다 두리뭉실하게 살아가는, 그래서 좋은 토양이 되지 못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밭은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부족함에서, 죄 속에서, 게으름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좋은 토양의 밭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는‘돌 같은 마음’,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시덤불 같은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 밭에 돌을 골라내고 온갖 잡풀들을 뽑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좋은 땅을 만드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며 미사에 자주 참례하면서 밭갈이를 하듯 마음가짐을 정결하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열매를 내는 그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인 정호승은 ‘꽃씨’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꽃은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에서 태어났단다. 꽃씨를 잘라본 아이가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꽃이 없는데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꽃씨 안에 꽃은 분명 있단다. 그러나 바람, 햇살, 비, 구름이 도와주어야 한단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책을 읽고, 음식을 먹으면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을 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나쁜 토양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결실을 기대하기 때문에 씨를 뿌릴 것입니다. 땅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둠 속에서 싹이 트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릴 것입니다. 적당한 햇빛이 씨앗을 자라게 하리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씨 뿌리는 사람은 인내를 가지고, 수양을 쌓으며 희망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록 지금 당장은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려움과 시련이 있더라도 우리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고 씨를 뿌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을 하는 사제는 본인이 하는 강론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말은 그럴싸하지만 삶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린다면, 시련과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가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도하고, 확신에 차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록 척박한 토양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순교의 시대에도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도 교회는 활력을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 아닙니다. 그 토양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입니다. 사목의 장소와 조건을 따지는 것은 토양을 먼저 생각하려는 것이고,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아프리카에서도, 먼 남미에서도 복음의 씨앗은 꽃이 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씨뿌리는 사람처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흥겹게 노래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었도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여러분의 좋은땅 마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장차 좋은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평화의 열매, 정의의 열매, 온유의 열매, 겸손의 열매, 찬미의 열매, 감사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주옥같은 하늘나라의 비유가 7가지 나옵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만 비유의 주제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역시 원래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에 걸맞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농민보다는 농부란 호칭이 더 호감이 갑니다.
농부에 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약 50년전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 백일장 대회에서 입선된 수필 제목이 농부였습니다. 선생님들의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당시 저희 아버지는 농부가 아니었는데 농부처럼 소개한 것을 알게 되어 당선작이 못되었다는 후일담도 들었습니다.
‘농부란 어감부터 호감이 간다.’로 시작되는 수필의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농부란 호칭은 언제 들어도 호감이 갑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예수님 자부심 가득한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농사에 애정이 많으신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농부의 대표적 이미지는 씨뿌리는 모습입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감동적인 소설책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이 상징하는바 농부 하느님이시자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씨뿌리는 과정에 충실하며 씨뿌리는 농부의 자세로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실 농부보다 하느님을 잘 이해하는 이도 드물 것입니다. 우리 농장 수사님도 농사의 80%는 하느님의 지으신다며 하느님의 최고의 농사꾼이라 말했던 기억도 생각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문득 떠오른 오늘 강론의 주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답은 단 하나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처럼’ 살면 됩니다. 씨뿌리는 삶자체가 치유와 구원입니다. ‘좋은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결코 땅을,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환경에 개의치 않고 씨뿌리는 삶으로 상징되는 복음 선포의 삶에 항구합니다.
삶은 변화합니다. 한결같이 좋은 땅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길바닥같은 환경도 있고 돌밭같은 환경도 있도 가시덤불 같은 환경도 있고 좋은 땅의 환경도 있습니다. 환경만 그러합니까? 우리 마음밭 또한 한결같기가 힘듭니다. 길바닥같은 마음밭일 때도 있고 돌밭같이 완고한 마음밭일 때도 있고 가시덤불 같은 거칠고 사나운 마음밭일 때도 있고 좋은땅의 마음밭일 때도 있습니다. 하루 중 시간도 다 똑같은 시간이 아니라 다양한 시간들이 펼쳐집니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변화무쌍한 다양한 마음밭을 체험하셨겠는지요.
예수님이야 말로 참 좋은 농부의 전형입니다. 밭의 상태에 좌우되지 않고 평생 끊임없이 씨뿌리는 복음선포의 삶에 항구하셨기 때문입니다. 환경탓, 사람탓, 일탓하면 끝이 없습니다. 탓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입니다. 좋은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항구히 씨부리는 삶을 사랑합니다. 좋은 신자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고 항구합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합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다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라운 기적이 발생합니다. 점차 길바닥같은 마음이나 환경도 돌밭같은 마음이나 환경도 가시덤불 밭같은 마음이나 환경도 점차 좋은 밭으로 변하고 놀라운 수확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씀의 씨앗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씨앗을 받아 들이는 내 마음밭에 있습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내탓입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점차 하느님의 은총으로 마음도 환경도 좋은밭으로 변한다는 것이며 실패인생같은 삶도 성공인생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실패인생인듯하나 지금도 끊임없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통해 성공인생이었음이 입증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결론은 ‘절망은 없다.’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을 다하고 하늘에 맡긴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과정의 충실성이자 결과의 성과물이 아닙니다. 결과의 열매는 하느님께 맡기고 하루하루의 과정에 충실하는 자세가 바로 진인사대천명의 씨뿌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성공이며 숭고한 참 사람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한결같이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보십니다. 모래위의 인생집이 아니라 주님 반석위에 짓는 인생집입니다.
지금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들이 떨어지는 여러분의 마음밭 상태는 어떻습니까?
길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입니까 혹은 돌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입니까?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들입니까 혹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입니까?
타고난 좋은땅은 없습니다. 그런때 기다린다해도 결코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땅도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잡초들 우거진 박토로 변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고 배나무도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돌배나무로 변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수행생활입니다. 좋은땅의 마음밭때를 기다려 강론 쓰기로 한다면 결코 하나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환경에 개의치 않고 씨뿌리는 삶에 충실함이 성공인생의 지름길입니다. 저 또한 이런 자세로 강론을 씁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외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안팎의 환경도 좋은땅으로 변화하며 보이지 않는 열매들의 수확도 이뤄집니다. 인생가을에 믿음, 희망, 사랑의 풍성한 수확이 뒤따릅니다. 바로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13,23).
바로 우리 수사님들은 이런 씨뿌리는 삶의 자세로 충실히, 항구히,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죽을 때까지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를 바치고 노동을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수도원의 모토는 평생 씨뿌리는 삶을 요약합니다. 하여 요셉수도원의 영적 밭도 참 좋은땅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씨뿌리는 삶의 자세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첫 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30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어떻게 이런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덕분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밥을 먹어야 삽니다. 말씀은 생명과 빛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이사야 예언자 역시 이런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씨뿌리는 예언자의 삶에 충실하고 항구했음을 봅니다. 새삼 자연도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인 성경책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이사야 예언자는 자연성경책을 부단히 렉시오 디비나 한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믿는 이들의 궁극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씨뿌리는 삶의 모범이 제2독서 로마서의 주인공 바오로 사도입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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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8,18-19, 22-23)
이런 원대한 하느님의 시야와 희망이 우리를 배절불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게 합니다. 왜 로마서 8.23절로 끝맺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8.24-25절 말씀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24-25).
이런 희망이 있어 우리 모두 씨뿌리는 삶에 자발적 기쁨으로 항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역시 참 좋은 농부이십니다. 농사는 1년이지만 우리 삶의 농사는 평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좋은땅의 마음밭을 만들어 주시고 하루하루 씨뿌리는 삶에 충실함으로 성공적 ‘삶의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멘.
열매를 맺어야 하는 당위성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늘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뿌린 씨가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밭을 갈고 나서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먼저 씨를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가지고 보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의 다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 중에는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는 배움이 많거나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사람이나 믿으면 되지. 나에게는 얘지 마라’하고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딱딱한 흙덩어리로는 도자기를 빚을 수 없습니다. 물렁하게 반죽을 해야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혹 들어도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듣고 맙니다.
창세기2장16-17절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늘 복음은 길에 떨어진 씨앗을‘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장 19절에는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부려진 것을 빼앗아간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은 적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제 악한 사람이 되느냐? 그야말로 사탄이 되느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길바닥 같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돌밭과 같은 딱딱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그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시련, 갈등이 있으면 성당을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범적이지 못한 신자분을 만났을 때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하며 상처 받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가도 자신이 손해를 보고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돼. 생색도 안 나는 일을! 굿은 일을 ….서운한 소리 들으면 금방 성당 안 나와요, 내가 왜 저런 미운 사람을 바라봐야 하냐고…..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꿔놓죠. 앙갚음을 하는데 얄미울 정도로 사랑으로 앙갚음을 해요.‘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더 잘해요.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재물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신앙의 정신대로 나누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꼬박 꼬박 지키고 자기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에는 충실하지만 단체활동이나 봉사활동 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는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매사를 자기 위주로 계획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니까
쓸데 없는 데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자라나는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금방 큽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소유, 지배, 권력, 명예욕은 뽑아도 뽑아도 쑥쑥자라요.
네 번째의 부류의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땅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 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나쁜 땅이 어디 있어요, 다 좋은 땅인데 가꾸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주시는 겁니다. 열매를 직접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우리가 가꾸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어우러져서 수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하고 싹이 돋게 하듯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이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뤄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네 손을 펴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시며 죄 많은 여인에게 ‘네 죄를 묻지 않겠다.’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하자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요, 치유의 말씀이고 창조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긴 여름동안 여러 번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가을의 추수를 기대합니다. 열매를 거둘 때에는 한 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고 잘 가꾸는 이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적게 거두며 아무 것도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지 않는데 배부를 수 있습니까? 공부를 안 하는데 성적이 좋아집니까? 우리는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거두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열매를 기다리고, 노력하지 않고 행복해 지려 한다면 뻔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돌밭,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듣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푀멘).
주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고 하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숙달된 자동차 정비사는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있는가를 알아냅니다. 훌륭한 지휘자는 수많은 악기 소리 중에서도 잘못된 음을 금방 잡아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우리의 귀는 어디에 훈련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영어, 수학, 과학에 관한 말은 잘 알아듣는데 하느님께 관한 말씀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은 얼마나 잘 듣고 또 많이 아는 줄 몰라요,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우고 그의 경력, 활동..등등, 언제 무엇을 했는지 까지…스포츠 신문, 잡지는 꿰차고 앉아 있으면서도 성경말씀에는 아주 강통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배움이 많지 않은 분인데도 성경 말씀을 장, 절까지 외우고 그 뜻을 잘 알아듣는 분도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부제 서품식에서 수품자는 복음서를 수여 받는데 그때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읽는 바를 믿으며, 믿는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귀 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시죠?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가끔 익사하는 오리가 있답니다. 오리는 날개 바로 밑에서 특별한 방수기름이 분비되는데 이것을 온 몸에 발라야 물에 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오리는 게을러서 이 일을 하지 않아 물속에 들어갔다가 깃털이 물에 빨려 들어가 가라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주어져도 받아들이고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9)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혹 마이너스 서른 배, 마이너스 예순 배, 마이너스 백배는 아닌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렇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사실,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내가 좋은 땅인가 아닌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 씨앗이 떨어질 때 좋은 땅 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보다도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씨앗이 뿌려진 땅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나 자신의 밭과 세상의 밭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의 사람은 땅을 지배하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밭에서 일할 줄 알며 하늘을 쳐다보고,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품은 농심입니다. 곧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 그 씨앗이 뿌려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저들에게는 하늘나라를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그런데, 먼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늘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허락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똑같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이 하늘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분명, 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들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여주는 것을 보았고, 들려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음은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곧 당신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둠이 초래한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도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5; 이사 6,10)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지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 주어가“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5)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고서 빛이신 진리 보기를 거부하고, 알아들으려 하지 않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 이처럼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이는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이며,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바로 백 배,예순 배의 열매를 맺는 이들인 것입니다. 아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유광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뿌린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의 나라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싶으면 하느님의 나라인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잘 가꾸어 많은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열매는 하루 아침에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뿌린 씨를 잘 가꾸는 이의 정성과 사랑에 달려 있다.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려도 우리가 그 씨를 잘 가꾸지 않으면 마치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처럼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우리가 매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일 뿌리시는 말씀의 씨앗을 가꾸어 나가는 생활이다.
열매를 맺고 안 맺는 것은 그 씨를 가꾸는 자의 자세에 달려 있다.
예수님이 뿌리신 씨는 분명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씨지만 그 씨를 받아들여 가꾸는 자의 자세에 따라 작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지금 내 안에 예수님이 뿌린 씨가 있는가?
나는 그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의 영적 성장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떨어진 씨앗이 자람으로서 나의 영적 생활도 자라는 것이다.
즉 나의 영적 생활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려진 씨앗에 달려 있다.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나의 영성생활이 열매를 맺는 것이요, 아무리 예수님이 씨를 뿌렸어도 내 안에서 자라는 씨앗이 없으면 내 영성생활은 자라지 않는 것이다.
열 매
세상의 열매는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 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오세영
좋은 땅
최원석
오늘 복음에서 좋은 땅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에 의하면 씨앗은 주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이 말씀을 하시면 이말씀을 사람에 귀에는 들어가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나의 삶은 나의 삶이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씀이 가시덤불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긴 들어가지만 자신의 온갖 생각으로 말씀이 질식하고 마는 경우를 말하지요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사람을 말합니다. 어찌보면 쉽기도 하고 어려운 말씀이세요. 열매를 맺는 삶이 무엇인가? 온전히 나의 삶의 자리를 비우고 당신의 것으로 체우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어려운것이 인간사이의 관계가 어렵다고 하지요 ..그것은 외부로 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에게 들어오는것을 나의 감정 나의 생각으로 가득차면 그것은 오늘 나오는 가시덤불 혹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혹은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내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묵묵히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것이 아마도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안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함께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주님의 관점으로 돌리고 그분의 뜻을 찾는 것도 그것도 좋은 땅에 떨어진 것과 같은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은 나와 주님과의 밀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것을 체우면 그것은 돌과 가시덤불과 같은 곳에 뿌려진 씨앗이고 나의 것을 비우는 삶..내안에 주님이 기거하는 삶은 풍성한 열매뿐만 아니라 주변도 하늘나라로 만들어가는 삶일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내 속에서 내속을 끌이기 보다는 곰곰히 주님 관점에서 바라보고 주님의 것으로 돌릴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아멘
관계가 깊어질수록 버려야 하는 것
전삼용 요셉 신부님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지만, 오랜 시간 사귀어도, 오랜 시간 함께 살아도 여전히 먼 거리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부부로 평생 살아도 남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짧게 사귀었어도 그보다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엔 많은 수수께끼가 있지만 관계란 수수께끼는 참으로 풀기 어렵고 신비롭기만 합니다.
어떤 분의 증언 중 위암으로 죽어가던 한 남자가 자신을 부르러 온 어떤 영적인 존재들을 보고 두려워 떨며 아내의 이름을 목청이 터져라 불렀고, 그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온 아내의 목을 끌어안고 너무 무섭다며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입도 움직이지도 못했던 그 사람의 그러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아마 그런 힘으로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에 노력했다면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만날 수 있을 만큼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 맺고 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른 데 바빠서 그 시간을 다 흘려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깊이에 관한 비유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농부가 말씀의 씨를 뿌렸는데 어떤 사람은 길과 같아서 아예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돌밭과 같아서 처음엔 뜨겁게 받아들이지만 이내 식어버리고 또 어떤 사람은 잘 받아들이다가도 세상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의 욕망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관계의 깊이에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그분과의 관계를 이루어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인 것입니다.
반면 말씀의 열매가 맺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같은 수준으로 맺는 거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은 육십 배, 어떤 사람은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수준차이가 있을 텐데 이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의 깊이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관계의 깊이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관계에서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야할까요? 관계의 깊이에는 단순한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히든 피겨스’란 영화는 1960년대 러시아와의 우주개척 경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세 명의 미국 흑인 여성들에 대한 실화를 담았습니다. 당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컸었는데 그보다 컸던 것은 인종에 대한 차별이었습니다. 직장 내 유색인종만 사용해야 하는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흑인 여성으로 ‘미국 항공 우주국’(NASA)에 취직한 것만으로도 보통 일은 아니지만 더 나아가 이들은 로켓을 지구 밖으로 쏘아 올리는데 백인 남성들보다도 훨씬 큰 역할을 하여 나사의 전설로 남게 됩니다.
흑인 여자들이 나사에 들어와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보통 흑인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국 노예제도가 폐지되고서도 노예생활을 꽤 오래 해 왔던 흑인들은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백인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흑인은 백인에게 굽실거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차별을 받으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감히 넘어서지 말아야 하는 선 안에 머물렀습니다. 인종차별은 백인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자신들 스스로 스스로를 차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 세 명의 영웅들은 자신들도 똑같이 세금을 내는 시민이기에 백인들만 가는 대학에 재판을 하면서까지 당당하게 입학하여 첫 여성 엔지니어가 되기도 하고 나사의 첫 여성 컴퓨터 부서 팀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흑인 여성으로서 나사의 최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수학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백인들과 섞이기 위해 자신들이 지니고 있었던 노예근성을 벗어던졌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유하자면 이들은 자신들을 아무 밭에나 내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백인들이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끼어들어오는 검은 색 여자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커피도 같은 포트에서 뽑아먹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그녀들이 쓰는 유색인종용 커피포트를 따로 놓고 화장실도 다른 건물까지 뛰어갔다 와야 하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러시아가 우주선을 지구 밖으로 내보내 지구를 돌고 또 가가린이란 사람을 태워 최초의 우주인을 만들어 내는 반면 미국은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미국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뿌려진 그 씨를 싹틔우고 열매를 맺게 만들 좋은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그들의 능력을 알아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사의 최고 권력자였던 것입니다. “천리마는 그것이 천리마임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존재할 때 비로소 천리마일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케서린 존슨은 수학 및 그 분파인 해석학에 비범하고, 도로시 본은 업무 관리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비범하며, 메리 잭슨은 기계 공학 겸 엔저니어링에 타의 추종을 불허함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인종이나 성에 상관없이 그녀들의 능력을 키워줄 방법은 그녀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유색인종 화장실’이란 명패를 해머로 쳐서 부숴버립니다. 유색인종이란 말이 들어간 모든 것을 백인들과 흑인들이 보는 앞에서 다 부숩니다. 자신이 권력을 지니고 있는 한 나사에서 유색인종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녀들 덕분으로 첫 우주인을 지구 밖으로 보냈다가 정확히 구조하여 러시아와 같은 기술을 가진 자리까지 올라오게 됩니다.
관계는 마치 소금인형이 바다 깊숙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인형은 바다 속 깊이 들어갈수록 자신이 녹아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지구인이 우주로 나가려면 최소한의 몸통만 남겨놓고는 다 떨어뜨려 가볍게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농부가 뿌린 씨가 땅 속에서 죽어 그 땅과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타인만 자신에게 맞춰달라고 하면 관계는 그 거리에서 멈추게 됩니다. 관계는 아버지가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이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서로’ 상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명만 자신을 버린다고 해서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는 쌍방의 옷 벗음이요 쌍방의 죽음입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는 그분께서 이미 하느님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실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 안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벗어던져야합니다.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복어를 먹을 때 복어가 그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독이 든 부분을 빼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가진 채 그분 안에 들어가면 그분이 위험하게 되시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가진 채 그분과 친밀해지겠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분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그 죄를 계속 품고 있다면 그 죄까지 당신 품안에 받아들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서 길과 같은 사람이란 너무나 교만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는 죄를 품은 사람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해도 조금만 잘못한 사람까지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더 옳기 때문에 말씀을 실천할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이란 육체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감정은 마치 봄 날씨처럼 종잡을 수 없이 변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쁘고 뜨거우면 좋은 결심을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삶은 나아지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가시밭과 같은 사람은 버렸지만 덜 버린 사람입니다. 고민은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지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종교를 바꿀 결심까지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더 안타까워하시는 사람들은 위 두 부류가 아니라 거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다가 세상 걱정 때문에 포기하고 마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끊지 않으면 그 걱정 때문에 십일조나 이웃을 돕는 가난함의 행복은 느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삼구(三仇)’, 즉 세속-육신-마귀(교만)를 끊지 않으면 당신과의 어떤 친밀한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벗어야 할 옷이고 죽여야 할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건 이웃에게 다가가건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지 않으면 친밀한 관계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관계의 친밀함은 나를 벗어던진 만큼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주 만난다고 관계가 깊어지지 않고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얼마나 벗어던졌느냐에 따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이런 관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맺히는 열매들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의에서 들은 내용인데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구타했다고 합니다. 임신한 아내를 구타하여 아기까지 뱃속에서 검게 죽었고 유리창으로 내려쳐서 수십 바늘을 꿰매야 했다고 합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믿고 참았는데 한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자신이 이혼하는 것이 이젠 절대적으로 남편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혼 전 마지막으로 해외에 있는 성모님 성지에 다녀왔습니다. 고행의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신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힘을 얻고 공항에 도착할 때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술과 도박을 끊고 며칠 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두 분은 아주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미국에서 뇌종양인 아기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암 세포들이 거의 사라졌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상대가 아니라 내가 관계 맺을 준비가 안 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벗어던지지 못해서 상대도 움츠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내 자아를 먼저 벗어던져야합니다. 먼저 내가 좋은 땅이 되어야 관계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친밀함은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내 자신을 온전히 깨어버린 얼마나 비옥한 땅인지의 의해 결정됩니다. 나는 하느님에게나 이웃에게나 깊이 들어가기 위해 그 속에 몸을 던진 소금인형과 같습니다. 소금인형만이 바다와 하나가 됩니다. 바다는 소금인형을 품고 소금인형은 바다가 됩니다. 이런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많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농촌에서 생명산업인 농업을 지키며 수고하는 농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시와 농촌이 더불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실천을 생각하는 농민주일입니다.
오늘날 농업과 농촌, 농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인식은 어떻습니까? 농업은 경쟁력 없는 산업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값싼 농산물을 들여오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농촌은 불편하며 쓸쓸하고 떠나고 싶은 곳처럼 보기도 합니다. 농민들은 수입개방에 반대하는 시위나 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산업화와 더불어 탈농촌화가 시작된 지 반세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농촌의 문화와 정서에 낯선 세대들도 많아졌습니다.
농민주일을 맞아 농업과 우리 자신의 삶이 어떤 관계 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식량안보 – 수입쌀 문제
현시점에서 전 세계 식량생산량으로 120억 인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5초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 기아로 죽어갑니다.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섭씨 1도 상승할수록 곡물생산량은 7-10%씩 감소합니다. 미국, 영국, 스웨덴, 독일 등의 식량자급률이 100%를 웃돌며 프랑스는 무려 300%가 넘는 반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2%, 쌀을 제외하면 5%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2017년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8일, 농식품부는 밥쌀용 쌀 수입 입찰공고를 냈습니다. 폭락한 산지쌀값을 조금이라도 지지하기 위해 밥쌀용 쌀 수입을 전면 중단해도 모자랄 판에, 밥쌀용 쌀 수입을 강행하여 현재 80kg쌀 한 가마의 가격은 12만원 대로 20년 전 쌀값으로 내려갔습니다. 국내 쌀 생산은 줄이면서 밥쌀용 쌀을 수입하는 정부정책으로 농민들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안전한 먹거리 – 유전자 조작 농산물 (GMO)문제
지난해, 전북 완주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GMO 쌀과 GMO 작물을 시험 재배했습니다. 올해 5월에는 강원도 태백, 충남 홍성 등 전국에서 LM0(유전자조작생명체) 유채가 대규모로 발견되었습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GMO)이란 농산물의 생산량 증대, 유통, 가공 과정의 편의를 위해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기존 육종방법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자를 지니도록 개발된 농산물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제초제에 죽지 않는 콩, 해충을 죽이는 독소를 스스로 만드는 옥수수, 면화 등이 있습니다. 이를 개발하고 수입하는 기업들은 생산과 소득에 도움을 주며 안전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GMO가 처음 등장한 1994년 이래 지금까지 안전성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질의 작물이 인간과 자연 생태계에 미칠 영향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GMO 작물 제초제에 들어있는 발암물질이 우울증, 면역력 저하 등 여러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유전자 조작 농산물 수입국입니다. 전체수입량은 일본이 더 많지만 일본은 사료용으로만 소비합니다. 식용 수입은 우리나라가 1위로 개인당 연간 44kg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수입된 GMO 농산물들은 주로 가공품으로 제조되고 있습니다. 면화, 콩, 옥수수, 유채 등의 원재료가 수입되어 간장, 두부 유화제, 탈지대두, 콩기름, 간장, 고추장, 된장, 올리고당, 빵, 음료, 주류감미료, 참치 캔의 면실유 등으로 생산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미 우리 밥상에 올라와 있습니다.
농업은 우리 삶의 근본 – 교회의 농민사목
한국 교회는 농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50년 전 ‘가톨릭 농민회’를 창립했습니다. 농민들의 인권과 농업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자는 방향을 설정하였습니다. 소득을 올리기 위해 땅을 약탈하듯 뽑아내는 화학농법이 아니라, 온갖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고 후대에도 지속될 수 있는 농업과 환경을 물려주기 위한 생명의 농업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1994년부터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농민과 도시민이 상생하기 위한 도농 교류, 생명 농산물 나눔 등의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농촌이라는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가톨릭 농민회라는 잎이 돋아났다면, 그 영양을 바탕으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이라는 꽃이 피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세상을 일구어 우리 삶의 근본인 농업, 사람과 모든 생명이 건강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기 순환적 농법이 더욱 넓게 자리 잡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농촌 살리기 –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
농업의 문제가 더 이상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업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생명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교회의 농민사목,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합시다.
먼저 생명 농산물들을 이용한 생명의 밥상 차리기를 적극 실천합시다. 다른 농법보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과 생산량 저하를 감수하면서도 생명의 농업을 지키는 가톨릭 농민회 회원들의 유기농 농산물을 구매합시다. 불편하고 비싸다는 인식을 버리고, 농업 생명과 우리 밥상 생명을 위하여 노력합시다.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교류를 실천합시다.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커다란 세상과 단절된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 기술과 자본에 대한 믿음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 기회를 가져봅시다. 농촌을 살리고 생태적 회개를 시도하며, 생산과 소비를 넘어 생명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납시다. 그리고 올바른 식생활 문화를 이루기 위해 교육과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갑시다.
한동안 우리는 성장과 경쟁, 기술과 자본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허상을 좇아 정신 없이 살아왔지만 생명이라는 가치, 농업이라는 문명은 소중하고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우리의 삶은 농촌의 현실, 농업의 위기, 농민들의 처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농촌이 병들고 농업이 무너지면 우리 전체가 심각한 손실을 입습니다.
우리 본당의 가정 생명분과에서도 펼치고 있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에 참여하여, 도농이 더불어 살아가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 모든 생명이 어울리며 자신의 삶을 꽃피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창피한 일들
김성근 요셉 신부님
살다보면 창피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 다른 아이들은 계란에 소시지 반찬을 싸오는데, 나는 늘 풀죽은 김치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야 했을 때 왠지 점심시간에 도시락 내놓기가 부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7남매 키우시느라 정신없으신 어머니께서 그렇게 새벽처럼 일어나 정성스럽게 싸주신 도시락을 감사하게 먹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신학생 시절, 제가 소위 말하는 ‘개발’이라 축구를 잘 못했습니다.
그게 창피스러워 일부러 아프다고 빠진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개발’ 축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지, 나도 웃으면서 공을 찰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학교 소임을 맡아 학생들에게 첫 강의를 할 때, 하도 긴장해서 말도 더듬고 학생들 질문에 거의 울상이 되어 수업을 마치고 나서, 너무도 부끄러워 그날 저녁 술을 진창 마신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니 학생들을 야단치며 공부하라고 독려하기도 했지만, 처음 강의를 할 땐 정말 하루하루가 두렵고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즘도 부끄럽고 창피스러울 때가 있습니다만, 허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고 나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어릴 적 혹은 젊었을 때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 나의 모습, 행동이 없었는지요?
우리 모두는 단점 많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숨거나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 때론 돌밭 같고 때론 가시덤불 같으며 때론 태양 아래 아스팔트 같은 부족한 우리들에게 당신 능력의 씨앗을 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돌밭을 고르고 가시덤불을 쳐내고 우리가 좋은 땅이 되었을 때 당신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모습 안에서 활동하시고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해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들을 극복해 나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을 치유해 나가듯,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밭 같은 나의 마음에 씨앗이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의 어린 영혼의 체험을 통해 용서와 이해의 폭을 또 키워나갑니다.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반대로 나태하게 쉬지 않으면서 우리의 영적인 체험들을 통해 한걸음씩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도 어느덧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잘하지 못한다는 것’,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겸손하게 손을 내밀고, 온전히 당신이 내 안에서 활동하시길 간절히 청하도록 합시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시편 121,2)
말씀의 결실을 위하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사랑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느끼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해보셨나요?
그러셨다면 예수님께서 형제 자매님 안에 계신다는 것을 강하게 체험하며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한 주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은 연중제15주일이면서 농민주일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우리들의 먹거리를 위해서 이렇게 무더운 날에도 땀흘리며 애쓰는 농민들의 노고를 한번쯤은 생각해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를 끌고 가는 소재도 씨앗입니다.
정확하게 농부들의 생활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농부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씨앗의 비유를 들으면서 농부들의 마음도 함께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을 적시고 싹이 돋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빌론에서 유배중인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줄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고국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으고자 하셨지만 호응하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한 공동체는 이렇게 작은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래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앗은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의 구분이 없습니다.
똑 같은 능력을 지닌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잘 살펴보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을 농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 농부 같았으면 씨앗을 아무 곳에나 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설명하시듯이 씨앗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당신의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회개시키고 교회 공동체로 나아오게 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결실을 맺기도 하고 못 맺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실을 맺는 것도 100배, 60배 혹은 30배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면 우리가 받아들인 말씀이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살펴봅시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잘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이 좋은 땅에 잘 묻혀야 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고랑을 파고 그 고랑 안에다가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잘 덮어줍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도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잘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딱딱한 마음을 깨고 말씀이 스며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미사 중에 모두가 똑 같은 복음말씀을 듣고 본당신부님의 강론을 듣겠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소리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의 좁은 머리로 심오한 하느님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말씀을 듣는 우리의 자세는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우선 말씀이 내 마음에 자리 잡도록 말씀을 묵상할 때나 강론을 들을 때는 다른 세상사의 걱정들은 잠시 제쳐두고, 내 마음에 말씀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씨앗이 땅에 묻혔다고 다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와서 땅을 적셔주어야 합니다.
습기는 씨앗이 싹을 틔우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들어온 말씀도 싹이 트고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물을 주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중에서 가장 힘 있는 기도는 미사를 드리는 것이겠죠?
우리는 미사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가장 큰 은총인 성체를 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싹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햇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 안에서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따뜻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야 하고 그 사랑을 내가 계속 실천함으로써 내 마음의 불꽃을 계속 지펴나가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
하느님의 말씀은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뿌리지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100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의 이런 노력들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조금의 수확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김을 매고 북을 돋구고 거름도 주면서 땀 흘려 가꿉니다.
농부들은 가을의 수확을 희망하기 때문에 여름의 무더위에도 땀 흘리며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장차 부활 때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놀라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이 제대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가시덤불 같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내 마음에서 치워냅시다.
그리고 매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내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불꽃을 계속 잘 지펴나가도록 합시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농부에게는
씨앗이 있습니다.
농부의
간절한 기도로
씨앗은 뿌려집니다.
가장 낮은 곳에
씨앗은 뿌려집니다.
농부는 결코
씨앗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씨앗의 일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씨앗이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씨앗은 자신의
뿌리가 들어갈 곳을
찾아야합니다.
씨앗의 고유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을
기억하는
씨앗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 또한
농부의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농민들의 정성과
노력의 열매들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노고의 댓가로
정당한 혜택이
수고한 농민들에게
돌아가길 기도드립니다.
씨앗과 농부는
서로를 향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원주민들은 곡식과 음식 창고를 약탈하는 야생 원숭이를 잡는 독창적인 기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원주민들은 빈 코코넛 껍질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을 만듭니다. 그리고 코코넛 안에는 미끼로 쌀을 집어넣고 그 코코넛을 땅에 묶어 두지요. 원숭이는 냄새를 맡고 이 코코넛 안의 쌀을 집기 위해 손을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쌀을 잡은 주먹 때문에 구멍 밖으로 손을 꺼낼 수가 없지요. 당연히 도망가기 위해서는 쌀을 놓아야 하는데, 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덫에 갇히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인간들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놓아주지 못해서 거기에 갇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항하면 할수록 몸만 아프고 덫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도, 세상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 때문에 차마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들을 한두 번은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얼마나 힘들어 했었는지를……. 때로는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대한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안심이 되고 편안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재물에 대한 소유도 어느 정도까지만 행복을 가져다 줄 뿐, 그 뒤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어떤 신문 기사에서 본 것이 기억납니다. 행복은 재물에 대한 소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며, 씨가 떨어진 장소가 바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떠한지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먼저 ‘길’은 세상의 것은 모두 알지만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는, 이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길은 온갖 사람의 발아래 밟히기 때문에 단단하고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꽉 막힌 자들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자신의 신앙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마음입니다. 이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공경은 얄팍하고 뿌리가 없습니다. ‘가시덤불’은 재물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재물에 대한 관심사들로 인해 주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은 주님의 말씀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참 신앙인의 마음인 것이지요. 좋은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과 같이 필요 없는 곳에도 당신의 기쁜 소식을 뿌리십니다. 좋은 땅만 선택하면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을 내 마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상처는 낫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J. 레이)
진정한 존중이란?
미국 서부에 있는 어떤 여고 농구팀이 장애인 학교 농구팀이랑 게임을 했는데 100대 0으로 이겼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너무 가혹했다는 이유로 코치가 해고되었지요(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틀 후에 한 신문에서 코치를 인터뷰했습니다. 코치가 답하길, “상대를 존중했기에 최선을 다했다.”라는 것입니다. 장애인 팀이라고 봐주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자칫하면 배려가 아니라 값싼 동정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00대 0은 너무한 것 아닐까요? 이것이 과연 진정한 존중일까요? 저는 판단이 잘 되지 않네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야기했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과 세상을 향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둘째 즐거움이고, 똑똑한 제자를 만나서 자신이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즐거움은 어쩌면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3가지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출세해서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부와 재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건강해서 가진 명예와 권력, 부와 재물을 마음껏 쓰는 것입니다. 이 즐거움을 얻기란 참으로 멀고도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진다고 해도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신앙인들의 즐거움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족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주님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신앙인에게 떨어지면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폭력과 야만이 춤을 추는 세상에 용서와 자비를 드러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의 불을 밝혀줍니다. 이 땅에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신앙인들은 모두 말씀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권력과 명예, 재물과 부의 밭에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분이 현실 삶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가족 문제로, 사업 실패로, 이웃과의 갈등으로, 지난날 잘못된 삶 때문에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원하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만병통치약이 있어서 고통과 아픔을 바로 없애 드릴 수는 없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용기와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면, 주님께서 고통 중에 옆에 계심을 믿으면 희망을 얻고, 용기를 얻는 것을 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저주와 분노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고 따르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밭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갈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쌓인 씨, 길가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이야기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많은 사람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심안(心眼)과 혜안(慧眼)이 필요하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아서 마음의 눈으로 지혜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진실과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로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내리고, 시기와 질투의 바람 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
서강진 신부님
지난 가을 하늘공원에 부임하고 추운 겨울을 보냈습니다. 겨우내 메마르고 얼어있던 이곳에 봄이 오고 파릇파릇 돋는 싹을 보면서 자연의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특히 봄을 맞이하며 묘지를 둘러싸고 만개한 벚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환상적이었습니다.“그래서 이곳이 하늘공원이구나!”하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감동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묘지 위로 쑥쑥 솟아나는 잡초는 저의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늘공원에서는 그동안 받지 않던 매장묘 관리비를 작년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가족들의 요구는 분명해졌고 그것은 바로 벌초였습니다.
“이게 뭡니까? 관리비까지 받으면서 왜 우리 묘는 벌초하지 않았어요?”
불만에 찬 항의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죽기 살기로 벌초해야 합니다.
“그래! 이제부터 풀과의 전쟁이다.”
5월부터 4명의 직원들과 함께 5만 평의 묘지를 누비며 풀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초기의 무게와 진동으로 손이 떨려 숟가락조차도 들기가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얼굴은 검게 그을러 가면서 점차 익숙해집니다. 그래도 여전히 인간의 땀보다는 자연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며 오늘도 부쩍부쩍 자라는 잡초를 벱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들의 적(?)인 잡초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잡초에서 핀 이 꽃들이 묘지가 아니라 산이나 들에서 피었더라면, 사람들이 와!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좋아들 할 텐데.’
그렇습니다. 오늘도 베어지는 잡초의 꽃들은 산과 들판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들꽃들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이나 똑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당신의 온갖 정성을 쏟아 우리를 창조하셨고 사랑을 주셨으며 소중히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하더라도 묘지에 피어있다면 베어 버려야 할 잡초꽃이듯, 우리들은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모든 이에게 아름다움과 기쁨을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주님께서 주신 오늘 하루를 은혜롭게 생각하고 감사드리고 있는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지. 그렇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것, 더 나아가 바로 이 자리에서 감사드리고 찬미드릴 수 있을 때, 좋은 땅이며 바로 우리가 서야 할 자리입니다. 지금 비록 자신의 처지가 힘들다 하더라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파이팅!
사람을 죽이는 말과 사람을 살리는 말씀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방송매체와 사회관계망서비스로 대표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생긴 언어의 범람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페이스북과 트윗을 하지만 수없이 올라오는 엄청난 말들로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말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쏟아냅니다. 또 이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자기 말처럼 가장해 쏟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말을 못해 병이 든 사람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남의 것을 옮겨다 올립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말과 말씀은 같은 소리이지만 같지 않습니다. 말은 사라져버리지만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주님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만 듣는 사람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참으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말들 속에서 보석처럼 숨어 있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들의 홍수 속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정녕 자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깨닫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살리지만 말은 사람은 죽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우리 가슴 속에 새기고 생명을 선사하는 말씀의 전파자가 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말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말씀이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마태오13,3)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오늘의 복음으로 읽혀집니다.
이 비유에 관한 설명은 친절하게도 예수님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됩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좋은 땅에 떨어진 씨. 즉, 뿌리를 내려보지도 못하고 없어진 씨, 싹은 났지만 이내 말라버린 씨,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만 씨, 그 열매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은 씨.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이 비유를 통해서 얻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길 위,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과 의지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복음이 관심 있게 들립니까? 그렇지 않다면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다.
복음이 관심 있게는 들리는데 내 삶에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은 돌밭입니다.
복음에 감동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열망은 있는데, 십자가는 안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은 가시덤불입니다.
복음에 감동했고 결단을 내렸고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180도 바꾸었습니다. 그 마음은 좋은 땅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의 땅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께서는 두 번째의 돌밭이나 세 번째의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에 속한다고 속상해 하실 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각도로 생각해봅시다.
이 네 가지의 땅은 어느 누구든 예외 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속에 있는 네 가지의 움직임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입니다.
때로는 척박하고 메마른 마음,
때로는 돌밭 같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
때로는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도 유혹이 정신 없이 밀려들어 넘어지고 마는 마음,
때로는 비옥하여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마음.
이 모두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이라는 여정 안에서 모두가 겪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선 인내하시며 우리를 좋은 땅으로 들어오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상처 속에서 황폐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이 무성해지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느님께서 주신 그 비옥한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땅을 치유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 한 톨 허투루 뿌리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처음부터 엉터리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버려진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해야 하며,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20130130)
초보 농사꾼의 추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애기 수사님들과 같이 지인들의 땅을 빌려 한 5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웃기는지 모릅니다. 밭이랑을 수십 개 만들고 나서 밭이랑 한가운데다가 호박 모종을 심었다가 지나가는 할머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습니다. 고추모종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지지대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줘야 하는데, 그 지지대 값을 아낀다고 부러진 야구방망이, 우산대 같은 걸 쭉 세워놓으니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두 박스나 사서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을 해보니 총 수확량이 두 박스였습니다.
농사 이거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는 하나하나 겸손하게 이웃 농부 할아버지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제가 깨우친 바로는 농사에서 가장 기본이자 키포인트는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토양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엄청 신경을 쓰십니다. 일찌감치 밭 여기저기 겨우내 묵혀둔 퇴비를 왕창 뿌리더군요. 날씨가 조금 풀리면 퇴비와 함께 땅을 완전히 갈아엎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비닐이며 돌들을 골라냅니다. 갖은 정성을 기울인 좋은 토양과 적당한 일조량과 강수량이 합쳐져야 그해 가을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 각자의 마음도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이란 씨앗이 그 좋은 토양 위에 뿌려져 왕성히 성장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전해도 완고하고 닫힌 마음으로 인해 도무지 말씀의 씨가 발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길바닥이나 돌밭과도 같습니다. 영혼의 귀가 닫힌 사람이라 절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발아되고 성장하는 과정이 얼마나 더딘지 모릅니다. 그의 내면은 가시덤불로 가득합니다. 갖은 의혹, 불신을 걷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이해, 수용, 적극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하느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의 삶 전체를 기름지게 만듭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바라보시고 흐뭇한 미소 지을 ‘좋은 토양’을 우리 내면에 일구어야겠습니다. 매일 하느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생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루가복음 다음 율법교사의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10,25ㄴ).
율법교사의 물음의 동기는 불순했지만 질문은 옳았습니다. 옛 구도자들이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것 역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왜소해진 사람들입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많은 사람을 왜소한 속물로 만들었습니다. 하여 청년이든 장년이든 많은 이들이 하느님 비전을,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합니다. 참으로 평생 추구할 비전이자 영원한 화두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런 비전의 뚜렷한 목적의식과 함께가는 정신력이요 삶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바로 고맙게도 오늘 복음 말씀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줍니다. 복음을 요약한 저녁 성무일도 시 다음 '성모의 노래 후렴'에서 오늘 강론의 틀을 찾았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니,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첫째,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니십시오.
모든 수행의 목표가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을 때 눈도 마음도 열립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깨어 눈도, 귀도 열려 있었기에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보는 눈도, 들을 수 있는 귀도 순전히 은총입니다. 진정 청해야 할 은총은 볼 수 있는 눈이요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때 주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빛나는 비전도 계시됩니다. 바로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활짝 열린 눈에 계시되는 이런 '영광의 자유'의 비전 있어, 언제 어디서나 낙관적 긍정적 삶입니다. 현세의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초연한 자유를 누립니다.
둘째,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다음 주님의 말씀 중, 비와 눈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새삼 물은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최고의 덕을 상징하는 물이요, 세상에 물의 덕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화장실에서, 세탁할 때, 샤워할 때, 청소할 때, 음식을 만들 때,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등, 물의 고마움은 끝이 없습니다.
물같이 사는 이가 정말 최고의 덕인입니다. 다양한 쓰임이지만 물의 본질은 변치 않습니다. 바로 영혼에 이런 물 같은 역할을 하는 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영혼의 양식이자 생명수가, 영혼을 깨끗이 정화해 주는 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말씀의 은총으로 영혼을 샤워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비유의 전반부의 주인공,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농부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다."(요한15,1)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요. 하느님은 농부의 원조이십니다. 농부를 천대함은 하느님을 천대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천대하는 나라치고 잘 된 나라는 없습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가까이 있는 이들이 농부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자세가 삶의 모범입니다.
땅을, 밭을 탓하지 않고 씨뿌리는 삶에 항구합니다. 예수님의 낙관적 삶의 비밀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런저런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씨뿌리는 삶에 충실했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결과, 우리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전체를 봤을 때는 성공의 풍작 인생입니다.
넷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비유의 해설에서 주인공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은총이 좋고, 주님이 말씀의 씨를 뿌려도 땅이 척박하면 말씀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응답이 없으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십니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 땅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까?
돌 밭같은 마음입니까?
가시덤불 같은 마음입니까?
혹은 좋은 땅같은 마음입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 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누구나 원하는바 이런 좋은 땅의 마음일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 마음 땅에 좌절하지 않고 수행에 항구할 때 주님의 은총은 우리 마음 땅을 좋은 땅으로 변모시켜 결국은 풍부한 수확을 주십니다. 얼마 전 읽은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4,14).
우리가 주님 때문에 겪게 되는 온갖 모욕적인 상황도 지극한 인내의 겸손으로 잘 견뎌낼 때, 우리 위에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땅을 좋게 변모시켜 주심을 믿습니다. 요즘 깨닫는 바가 '먹기-읽기-걷기-살기'의 밀접한 관계입니다. 건성으로 먹는 이는 건성으로 읽고 건성으로 걷고, 결국은 건성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지하게 먹는 이는 진지하게 읽고 진지하게 걸으니 그 삶 또한 진지합니다. '깨어 바르게' 먹고, 읽고, 걷고, 살기의 수행에 항구할 때 더불어 마음 땅도 비옥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깨달음과 직결되며 깨달음과 더불어 좋은 땅으로 변모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 땅을 '좋은 마음 땅'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우리를 치유하고 정화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이요 성체입니다.
"주님, 저희가 성체를 자주 모시어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늘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뿌린 씨가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든 다음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이해를 가지고 보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의 다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 중에는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는 배움이 많거나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사람이나 믿으면 되지. 나에게는 얘지 마라’ 하고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딱딱한 흙덩어리로는 도자기를 빚을 수 없습니다. 물렁하게 반죽을 해야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혹 들어도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듣고 맙니다.
창세기2장16-17절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늘 복음은 길에 떨어진 씨앗을‘새가 와서 먹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장 19절에는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간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은 적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제 악한 사람이 되느냐? 그야말로 사탄이 되느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길바닥 같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돌밭과 같은 딱딱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그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시련, 갈등이 있으면 성당을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하며 상처 받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가도 자신이 손해를 보고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돼. 생색도 안 나는 일을! 궂은 일을 ….서운한 소리 들으면 금방 성당 안 나와요, 내가 왜 저런 미운 사람을 바라봐야 하냐고…..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꿔놓죠. 앙갚음을 하는데 얄미울 정도로 사랑으로 앙갚음을 해요.‘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더 잘해요.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재물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신앙의 정신대로 나누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꼬박 꼬박 지키고 자기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에는 충실하지만 단체활동이나 봉사활동 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는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매사를 자기 위주로 계획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니까
쓸데 없는 데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자라나는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금방 큽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소유, 지배, 권력, 명예욕은 뽑아도 뽑아도 쑥쑥자라요.
네 번째의 부류의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땅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 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나쁜 땅이 어디 있어요, 다 좋은 땅인데 가꾸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주시는 겁니다. 열매를 직접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우리가 가꾸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어우러져서 수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하고 싹이 돋게 하듯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이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뤄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네 손을 펴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시며 죄 많은 여인에게 ‘네 죄를 묻지 않겠다.’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하자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요, 치유의 말씀이고 창조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긴 여름동안 여러 번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가을의 추수를 기대합니다. 열매를 거둘 때에는 한 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고 잘 가꾸는 이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적게 거두며 아무 것도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지 않는데 배부를 수 있습니까? 공부를 안 하는데 성적이 좋아집니까? 우리는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거두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열매를 기다리고, 노력하지 않고 행복해 지려 한다면 뻔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돌밭,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듣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푀멘)
주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고 하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숙달된 자동차 정비사는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있는가를 알아냅니다. 훌륭한 지휘자는 수많은 악기 소리 중에서도 잘못된 음을 금방 잡아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우리의 귀는 어디에 훈련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영어, 수학, 과학에 관한 말은 잘 알아듣는데 하느님께 관한 말씀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은 얼마나 잘 듣고 또 많이 아는 줄 몰라요,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우고 그의 경력, 활동..등등, 언제 무엇을 했는지 까지…스포츠 신문, 잡지는 꿰차고 앉아 있으면서도 성경말씀에는 아주 깡통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배움이 많지 않은 분인데도 성경 말씀을 장, 절까지 외우고 그 뜻을 잘 알아듣는 분도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신부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서를 수여 받는데 그때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읽는 바를 믿으며, 믿는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귀 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시죠?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가끔 익사하는 오리가 있답니다. 오리는 날개 바로 밑에서 특별한 방수기름이 분비되는데 이것을 온 몸에 발라야 물에 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오리는 게을러서 이 일을 하지 않아 물속에 들어갔다가 깃털이 물에 빨려 들어가 가라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주어져도 받아들이고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씨'의 역할
전삼용요셉 신부님
개그콘서트에서 ‘나쁜 사람’이란 코너가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우리는 이 ‘나쁜 사람’이 결국 도둑이 아니고 그를 취조하는 형사들이 더 나쁜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재밌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지막 날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웃을 수 있을까요?
한 도둑이 잡혀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놈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며 무서운 형사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빈집털이범의 멱살을 잡으며 그 집에서 무엇을 훔쳤느냐고 소리 지릅니다.
도둑은 떨면서 잘못했다고 하며, 그 집이 얼마 전까지 자신이 살던 집이었는데,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쫓겨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저 누우셨다고 합니다. 여동생에게는 아버지가 열 밤만 자면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오늘이 아홉 밤 째라고 말합니다. 판잣집에서 사는데 지붕까지 바람에 날아가 비를 맞으며 잤는데, 동생이 자꾸 아빠를 찾아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무 불쌍해서 놓아주려고 하는데, 더 무서운 형사가 또 소리를 지르며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가 훔친 토끼인형을 마구 찢습니다. 그것만 훔치러 들어갔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둑은 그 토끼 인형이 동생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형사는 미안해하며 그것을 물어주겠다고 합니다.
도둑은 그것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것이라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형사들이 모두 자신들이 한 일을 뉘우치며 ‘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하며 끝나는 것입니다.
도둑은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도둑은 나쁜 사람이 됨으로써 그 도둑을 나쁜 사람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의 감추어져 있는 진짜 나쁜 면을 들추어냅니다. 사실 그 도둑을 판단하는 형사들이 나쁜 사람들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지만 많은 경우에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임을 압니다. 자아는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하는 우리 마음을 자신이 주인이라고 처음부터 또아리를 틀고 나가려고 하지 않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게 만드는 뱀이고 바알이고 우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 즉 자아가 강해서 자신은 의인이고 다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을 개요 돼지라고 하시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들보, 즉 죄의 원천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을 빼내어 주겠다고 말하는 이가 바로 개요 돼지이며, 말씀의 씨가 뿌려져봐야 소용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짓밟고 달려드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가 순교하기 직전 하늘나라의 신비를 유다 지도자들에게 말을 할 때,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었다(사도 7,5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고 하실 때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개요 돼지인 이들이 자아가 너무 커 그것의 영향으로 귀가 먹은 이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사도 7,51)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것이고, 자신을 신으로 여겨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들이 바로 교만한 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항상 “네 자신을 버리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는 자아가 아주 강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길과 같은 사람이고, 조금 약해지기는 해서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쁘지만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이들이 돌밭과 같은 이들이고, 자아를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세상 걱정을 하며 자신 안에 찾아온 평화를 스스로 숨 막히게 만드는 이들이 가시밭과 같은 이들인 것입니다.
만약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자신이 어떤 처지의 땅인지 모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씨의 역할은 자신을 죽임으로써 그 땅이 좋은 땅인지 나쁜 땅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땅에 뿌려졌지만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께 달려들어 그분을 살해함으로써 자신들이 어떤 땅인지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즉, 자아가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아예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거나, 평화가 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은 뽑힌 이들이 아닙니다. 만약 뽑힌 이들 대열에 들고 싶다면 빨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자아를 죽을 수 있을까요? 자아를 없애주시는 분도 하느님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말씀을 통해 우리를 정화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제자들처럼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오래 머무르려는 ‘의지’를 보여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유말씀의 풀이를 당신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만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더 좋은 밭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복음말씀은 심판에 관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좋은 밭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라며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죽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바알이 바로 나 자신, 곧 자아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아직까지는 완전히 자아를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이도 바알의 우상, 즉 자아를 죽인 정도만큼 열매를 다르게 맺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깊은 깨달음으로써, 마치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착각했지만 결국 자신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심으로써 자아를 깨부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아가 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아 때문에 희생당하는 분이 있어야합니다. 그 희생을 통해서만 자아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제자가 분노하며 상기된 얼굴로 찾아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대낮 거리에서 여자들을 희롱하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내 탓이네!”
“아랫마을 푸줏간 일꾼이 저울을 속여 파는데 그런 도둑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탓이네!”
“윗마을에 사는 세리가 돈을 떼어 먹는데 그런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탓이네!”
“선생님, 어찌 선생님 탓이라고만 말씀하시는지 저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내 탓이지.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내 탓이 아니겠는가!”
이 마지막 말에야 제자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나의 탓이었구나!”
결국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 빵과 포도주는 우리 자아의 돌로 그분을 깨어버려서 그분이 그렇게 부서지고 으깨져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만듭니다. 내 안에 있는 자아가 그분을 죽였음을 베드로처럼 탕을 치며 깨우치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런 밭이 참으로 좋은 밭인 것입니다. 그런 밭만이 선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체와 성혈이 바로 우리 밭에 뿌려지는 씨인데, 그 열매는 바로 그 씨를 통해 내 자아가 부서지는 것입니다. 만약 성체를 영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계속 판단하고 있다면 아직은 선택받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돌은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간음한 여자를 앞에 놓고 우리는 각자 자아의 돌을 들고 있습니다. 그 돌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우리 죄를 지워지지 않는 책에 기록할 것입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혹은 오늘 복음에서의 딱딱한 길이나 돌들은 우리 자아를 나타냅니다. 돌은 나의 주인인데 참 주인이 그분이 되게 하는 사람만이 비유의 의미를 깨닫고 선택된 백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모든 것이 당신 탓이라고 하시며 결국 우리의 탓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씨앗이 되어 우리 마음 안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 죽는 역할을 통해 결국 그분을 죽인 것이 나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내 자아가 죽어 그분이 나의 참 모퉁이 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돌을 든 사람이 아니라 만인 앞에 가장 큰 죄인으로 무릎 꿇려지지 않는다면 그분은 이미 돌을 들고 있는 우리를 지켜주시는 참다운 모퉁잇돌, 성채가 되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또 죽게 만들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 장본인, 나쁜 사람임을 절대 잊지 않도록 합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씀에 목마른
우리들의 삶입니다.
말씀은 똑같이 뿌려지지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모습은 너무나 다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곁에 왔지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말씀을
거룩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들 믿음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삶이란
하느님을 진정 믿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말씀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실천을 동반할 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최고의 기쁨은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수 있도록
좋은 땅을 청하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
박용식 신부님
한 여인이 상점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계산대에 하느님이 서 계셨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 여쭈었습니다.
"아니 하느님, 여기서 뭘 하고 계셔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팔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여인은 이왕이면 자기가 원하는 최고의 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평화와 사랑, 행복과 지혜, 자유를 사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평화, 사랑, 행복, 지혜, 자유 같은 열매는 팔지 않고 그 씨앗을 팔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이 씨앗을 사가지고 가서 잘 가꾸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청합니다. 때로는 노력 없이 좋은 결과만 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청원을 완성된 결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씨앗의 형태로 우리 마음에 뿌려주십니다. 물고기를 청하면 물고기 잡을 그물을 주시고, 평화를 청하면 평화를 그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주십니다. 그 씨앗을 우리 마음 밭에 심어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워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 밭이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마음 밭이 옥토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천둥, 번개와 벼락을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의 씨앗을 뿌리고, 고통 받는 이웃을 통해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도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수도 없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다면 지금쯤 좋은 열매를 아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밭이라면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를 풍성하게 맺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도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신자들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깊은 감동을 느끼고 생활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지만, 어떤 신자들은 강론을 들으나마나 '소귀에 경 읽기',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신부님이 뭐라고 강론을 하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사제를 통해 아주 좋은 씨앗을 뿌려주셔도 이런 신자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똑같이 피정을 받고, 똑같은 강론을 듣고,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은 훈화를 들어도 열매를 맺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어떤 이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덮인 밭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느님이 내 마음 밭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는데 평화롭지 못하면 그것은 분명 내 마음 밭이 돌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밭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셨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분명 마음 밭이 가시덤불로 덮여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생활 속의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뿌려질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풍성한 열매을 맺는 땅
최인각 신부님
씨 부리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결실을 희망하며, 수고의 땀을 흘립니다. 보통 씨 뿌리는 사람은 땅을 정성스럽게 일군 다음 씨를 뿌립니다. 농사를 지으셨던 저의 아버지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은 씨의 양을 얼마나 심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에서는 농사짓는 자로서의 노력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또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을 어떻게 만들고 가꾸어야 하는지도 다루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뿌린 씨가 어떤 땅에서 어떻게 자라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관심이 ‘씨 뿌리는 사람’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으로 전환되면서, 오늘 복음의 핵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신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좋은 마음의 밭’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마음의 밭을 간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이전에 악한 자가 쪼아 먹는 것,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환난과 박해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는 것 등 밭의 문제가 아닌 외적 방해 요소가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방해 요소들은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악의 요소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의 밭에서 하느님 말씀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면, 우선 그 외적 방해 요소들을 인식하고 이를 제거하거나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악의 작용을 너무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악의 세력과 악마가 저지른 잘못과 죄악은 하느님의 선성(善性)을 이길 수 없고, 예수님 앞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으며, 성령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선성에 참여하여, 그 풍성한 결실을 얻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이 잠시 있더라도 희망을 품고 좋은 마음의 밭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면 반드시 하느님의 선성이 승리하리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악의 요소(악마)와 대적하는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성을 좀먹게 하며 유혹하는 악마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악마는 나의 약점이나 상처, 심지어 나의 장점(교만)을 아주 교묘하고 치사하게 이용하여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1 베드 5,8-9 참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악의 요소를 인식하고 찾아내는 것, 나 자신과 그놈들의 역할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의 밭을 방해하는 악마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악마는 이미 힘을 잃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야, 이 도둑놈아!’라는 소리를 들으면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자빠지듯이 말입니다. 말씀의 결실을 방해하는 악의 요소를 과감히 내쫓거나 물리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않으며 살아간다면,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풍성한 결실을 얻을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저희 집안의 가정 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약한 누이들의 건강 문제, 어머니 모시는 문제, 농사짓는 문제, 식구들끼리의 갈등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 갈등의 내부에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습니다. 유전적인 약함, 경제적 어려움, 마음의 상처와 고통, 가족 간에 드러내기 싫은 자존심의 문제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요소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단정 짓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악의 요소를 물리치려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주 가족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서로 요일을 정하여 묵주기도와 매일 미사 참례를 하는 ‘고리기도’를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 가정의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안에도 성령의 결실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악의 요소와 세력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하느님 말씀이 풍성한 결실을 얻는 좋은 마음의 밭을 일구어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삶은 영원의 씨앗을 잉태한 텃밭
권철호 신부님
어느 수녀님 말처럼 “접촉은 줄어들고 접속”만 늘어간다는 시대, 모니터만 바라보느라 인생의 드라마틱한 세계를 잃어버린 시대에는 영적인 세계마저 접속이 불가능한 시대로 만들어져 갑니다. 자연을 편리함의 장애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은 정신마저 혼미해져 순수한 영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만 더 키우는 삶이 되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그리움만 키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접촉 없는 접속만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이고, 달력에 새겨진 빨간 날, 휴일만 고대한다면 정작 참된 쉼은 간직하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삶이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세상에 던져진, 세상에 뿌려지는 씨앗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원의 씨앗을 잉태한 텃밭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그래서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
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씨는 하느님 말씀이고 땅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고 삶의 태도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지만 그렇지 못한 땅에 떨어진 씨는 빼앗기거나 뿌리가 깊게 박히지 못한 채, 숨이 막혀 끝내 열매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성소란 어떤 직업에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글을 읽고 공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마태 5,45)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는 좋을 씨를 누군가에게는 나쁜 씨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씨도 그 씨를 받아 가꾸는 이의 정성이 없다면 결코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은, 신앙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절대성을 간직하지만 인간의 협조 아래 주어지는 상대성마저 무시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해서 신앙은 하느님 사랑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인간 믿음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삶이란 떨어지는 씨앗을 피할 수 없고 씨앗을 선택할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품고 키우는 선택만은 할 수 있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은 막을 수 없지만 우산을 들고 나갈 것인지 양산을 들고 나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고, 삶의 냉혹한 비바람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디딤돌이 되게 할지, 아니면 절망과 포기의 장벽이 되게 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삶의 조건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만큼은 선택할 수 있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무한대의 방종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인격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만큼은 박탈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 삶이 좋은 밭인지 나쁜 밭인지는 그 밭에 열린 결실로 드러나는 것임을 안다면 씨를 탓하거나 주어진 조건을 탓하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없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이 고통 중에도 인내를 품고 절망 속에도 희망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상의 끝자락에 천상의 첫 계단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면, 이런 세상을 설계해 놓으신 하느님의 뜻이 그래서 신비롭고 신비롭습니다. 오늘도 그 신비가 우리를 가슴 뛰게 하고 세상이라는 놀이터 에서 마구 뛰어 놀게 합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님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영혼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좋은 땅이 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마태오가 13장에 모아놓은 하늘나라의 비유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전달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과 허락되지 않은 사람’ 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10 – 14절)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무딘 마음,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귀, 눈이 있지만 감아버려 보지 못하는 이들’ 이 경계하고 깨어나 참으로 듣고 보고 더 받아 넉넉해지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메시지가 비유에 내포된 것은 아닐까요 ?
오늘 말씀에서 우리와는 다른 이스라엘의 경작법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우기 (11월초) 가 시작되면 먼저 땅에 씨를 뿌린 후 밭을 갈고 흙으로 덮습니다. 농한기의 밭은 사람들이 가로질러 다녀 가름길이 생기고, 가시덤불이 자랄 뿐 아니라 유난히 돌이 많은 박토입니다. 이런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3ㄴ절) 씨를 뿌리는데 그 씨앗이 어떤 토양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수확의 결실을 달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사람의 성공 여부는 곧 토양과 씨의 관계에서 가늠됩니다.
1. 씨 뿌리는 사람
농부가 뿌린 씨는 ‘길, 돌밭, 가시덤불 속’ 그리고 ‘좋은 땅’ 에 떨어졌습니다. (4 – 9절)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 씨” (4절) 가 싹도 내보지 못하고 완전히 실패했다면, ‘돌밭’ 에 떨어져 싹이 돋아났지만 말라버린 것은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5 – 6절) ‘뿌리가 없다.’ 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으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로서, 돌밭은 불임을 상징합니다. (집회 40, 15 참조)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버렸습니다.” (7절) 가시덤불로 인해 씨앗이 죽어버려 더 이상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의 열매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8절) 가 되었다는 것은 이전에 겪은 실패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수확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씨앗의 열매를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로 표현하여 성공의 도가 점점 더 증가함을 나타냅니다. (마르 4, 8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농부의 의기를 꺾을 만한 것이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리라는 확신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열매 맺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 동터온 하느님 나라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실현되리라는 사실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2. 토양과 씨
씨 뿌리는 사람의 우의적 해석 (18 – 23절) 에서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19ㄴ절) 이며, 토양은 그 말씀을 듣는 청중입니다. 토양은 네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대변되는데 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 (18-19절) ②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쁘게 응답하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는 사람 (20-21절) ③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지만 세상에 매여 성숙한 신앙생활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 (22절)④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열매 맺는 사람 (23ㄴ절) 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19ㄱ. 23절) 데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많이 들었다는 것이 곧 신앙은 아니며,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 곧 세상의 유혹이 마음 안에서 말씀을 흩어버려 말씀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습니다. (19절) 그뿐만 아니라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해도 믿음의 뿌리가 하느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내릴 때 말씀은 쉽게 시련이나 탐욕의 숲에 눌려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너희는 행복하다.’ 고 행복선언을 하십니다. (16절) 참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 맺는 ‘좋은 땅’ 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절)
묵상 (Meditatio)
“그는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23ㄴ절) ‘듣고 깨닫는 것’ 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일까요 ? 문득 “듣는 마음을 주시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느님께 청했던 지혜의 왕, 솔로몬이 떠오릅니다. (1열왕 3, 9) 우리의 삶 안에서 ‘듣는 마음’ 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영혼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속을 모면할 길이 없겠지요. 깨달음은 듣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길가의 완고함을 갈아엎어 유혹과 탐욕의 가시덤불을 거두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듣는 마음’ 은 그 폭과 깊이가 얼마나 될까 묵상해 봅니다.
기도 (Oratio)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정의의 놀라운 행적으로 저희에게 응답하십니다. (시편 65, 6)
휴가를 나왔는지 시내를 돌아다니는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들의 투박한 군화를 보면서 문득 옛날 제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가 떠올려 졌습니다(벌써 20년 전이네요).
사실 처음 군대에 들어가서 너무나도 저를 헷갈리게 했던 것이 바로 군화였답니다.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양의 군화가 각자에게 지급되기 때문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자신의 군화를 찾기가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종종 옆 동료의 신발을 바꾸어 신기도 했지요. 그래서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군화 안쪽에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기도 했지만, 그래도 급할 때면 남의 군화를 신었다가 잘못 신은 것을 깨닫고 다시 벗게 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약 한 달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군화를 찾지 못하는 훈련병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회사의 그리고 똑같은 디자인을 가진 군화이지만 한 달만 지나면 이를 신는 사람의 발에 맞추어 적응된 나만의 군화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얼핏 보면 다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지루하다고, 재미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안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살아갈 때 나만의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뒤 나의 삶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지요.
주님은 우리들에게 재미없는 삶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신나게 그리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참 행복의 삶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선물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얼핏 본 것으로 “똑같네 뭐…….”하면서 불평불만만 계속 내 던지는 어리석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바로 내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씨가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길, 흙이 많지 않은 돌밭, 가시덤불 속, 그리고 좋은 땅에 씨가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되었지요.
이 비유 말씀에 등장하는 씨는 바로 주님의 말씀을 뜻하지요. 또한 길, 돌밭, 가시덤불 속, 좋은 땅은 우리들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좋은 씨인 주님 말씀이 열매를 크게 맺을 수도 반대로 싹도 맺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똑같은 군화이지만 내가 계속 신으면서 자신의 군화를 잘 찾을 수 있듯이, 차별 없이 주님의 좋은 씨앗이 주어지지만 나의 마음이 얼마나 잘 받아 들이냐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잘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그 좋은 말씀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별 볼 일 없다고 멀리하는 것은 아닐까요?
인생은 평화와 행복만이 지속될 수는 없다. 고통과 노력이 필요하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슬퍼하지 마라. 참고 인내하면서 노력해 가는 것이 인생이다.(맨스필드)
새벽
“너희는 새벽이 오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한 제자가 답합니다.
“고양이와 양을 구별할 수 있을 때 먼동이 크는 것을 압니다.”
“아니다.”
다른 제자가 답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과 포도나무 잎이 구별될 때 새벽이 오는 것을 압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느 때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랍비가 말합니다.
“이웃이 네 눈에 보일 때가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오는 때이니라.”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으면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 순간이 얼마나 벅찬 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새 생명의 기쁨뿐만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내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과연 새벽이 오고 있습니까? 혹시 나만을 바라보고 있어 새벽을 맞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만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벽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음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간지해야겠습니다.
말씀의 씨앗
안융 신부님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의 밭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씨앗이 자라나기 위해서 햇빛과 물과 영양분이 필요하듯이,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와 친교와 나눔’이라는 세 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살아 있는 성사인 교회 공동체와의 친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나눔을 통해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신학에서는 영적 성장 과정을 정화와 조명과 합일의 세 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합일의 단계는 영성생활의 정점으로서 완덕의 단계를 일컫습니다. 이 ‘완덕에 이르는 길’을 묻는 이들에게 영성신학자 쟝 피에르 까뮈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완덕의 길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랑을 얻는 모든 비밀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부에 의해 공부하기를 배우고, 말로 말하기를 배우며, 달리면서 달리기를 배우고, 일하면서 일하기를 배우듯이,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배웁니다. 만일 다른 방법을 따르려 시도한다면,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어리석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라고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기를 배우고, 친교를 통해 친교의 삶을 배우며, 나눔을 통해 나눔의 풍요로움의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와 친교와 나눔의 실천이 따르는 믿음, 즉 애덕의 실천을 통해서 말씀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으며, 우리를 완덕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흙의 땅처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신다.
오늘 이 말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비와 눈은 내려옵니다.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내려오십니다.
위에 계시지만 않고 내려오시기에 뵙기 위해 올라 갈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말씀도 내려오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기 위해 모세처럼 산 위로 올라 갈 필요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땅과 같으면 되겠습니다.
땅과 같이 낮으면 되겠습니다.
이 땅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이 땅을 포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선포되지 않고 이 땅에서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인 이유입니다.
주님 말씀 들으러 모세처럼 올라갈 필요 없다고 하여 그저 땅처럼 낮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흙처럼 연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물을 그냥 다 흘려버리는 돌처럼 굳고 단단해서는 아니 됩니다.
말씀에 미소 짓고, 말씀에 感動하는, 그런 마음 밭이어야 합니다.
밭은 돌바닥이 아니고 흙의 땅입니다.
어제 저녁 미사 후에 집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좀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운동 삼아서 걸어서 다녀오기 위해 집을 나섰지요. 그런데 비가 내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산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우산이 제 차 안에 있었는데, 그 차를 제 동창신부가 잠시 빌려 갔었거든요. 그래도 지금은 비가 오지 않았고, 만약 비가 오면 가게에 들러서 우산을 사면되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다행히 그 집에 갈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 축복을 하고서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그 집이 아파트였는데, 새 아파트 단지라서 길을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하늘에서는 구멍이 났는지 비가 쏟아 내리지요. 비를 흠뻑 맞으면서 이 길로 가면 막혔고, 또 저 길로 가도 막혔고요. 그래서 아주 잠깐 동안 쏟아지는 비에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아파트 단지를 나온 상태에서 제 모양은 형편없었지요. 이 상황에서 우산을 사기 위해서 가게에 들어선다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당까지 그냥 걸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가 멈춘 상태였거든요. 또한 우산이 있는데, 우산을 사는 것도 낭비인 것 같었고요. 하지만 저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왜 이렇게 아는 분들을 많이 만나는지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제 판단이 틀렸고, 비 오면 가까운 가게에서 우산을 사면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역시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잘못 판단해서 스스로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을 안일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어려움 속에 빠진다는 것이죠.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 말씀을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더욱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곳에 좋은 씨앗을 뿌리십니까?'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곳에서 좋은 씨앗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농부는 좋은 땅을 찾아서, 만약 좋은 땅이 아니라면 자신의 온 힘을 기울여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든 뒤에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농부는 게으른 농부일까요? 귀찮아서 씨앗이 자라지 못하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곳에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비유되는 좋은 씨앗은 올바른 사람의 마음에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고 차별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 씨앗을 어떻게 일구어 나가는가 라는 것이지요. 안일하고 섣부른 생각으로, 또한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내 마음을 길가, 돌밭, 가시덤불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중하게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 나간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내 마음의 밭을 기름지게 하고 풍요롭게 해서 싹틔워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과연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혹시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리 내릴 수 없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은 아니겠지요?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합시다.
꿈은 희망을 낳는다(프리드리히 실러, ‘꿈은 희망을 낳는다’ 중에서)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다.
현명하다는 것은 아름답게 꿈을 꾸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것이요.
꿈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이상이 있다는 것이요,
비전을 지닌다는 것이다.
비전을 지닌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꿈을 상실한 사람은
새가 두 날개를 잃은 것과 같다.
비록 힘없는 하찮은 존재라 하더라도
꿈을 가질 때 얼굴은 밝아지고
생동감이 흐르며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발걸음은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 지는 것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꿈꾸는 자가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참 인생을 아는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사는 듯이 살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윤지종 신부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에모토 마사루가 오랫동안 물의 결정사진을 찍은 것을 소개해 놓은 책입니다. 그에 의하면, 물의 결정은 눈의 결정과 마찬가지로 하나하나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물의 결정은 사람의 말에 반응을 하며 변한다고 합니다. 예컨대, 유리병에 물을 넣고, 그 물을 향해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 그렇게 해주세요, 너 정말 예뻐 등 따뜻하고 긍정적인 말들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이 아주 아름답고 깨끗하고 잘 정돈된 결정을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조건에서 물을 향해 망할 놈, 짜증나, 죽여 버릴거야, 하면 안돼, 니가 싫어 등 차갑고 부정적인 말들을 들려주면 물의 결정은 무질서하게 변하거나 파괴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력적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몸이 70퍼센트가 물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사람의 말이 이처럼 중요하고 위력적이라면 하느님 말씀은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는 물을 향해 성경 말씀을 들려주는 실험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 어떤 말을 들려주는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깨끗하고 정돈된 결정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의 기쁜 소식이고 사랑과 희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1독서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이루어지고야 마는 가장 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성서를 읽거나 미사에 참여해서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들은 우리들 안에는 지금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이 그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이 우리 삶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기쁘게 살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이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의 말씀이고 사랑과 희망의 말씀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진실로 힘이 있다면, 하느님 말씀을 들은 우리에게는 분명히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우리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물도 사람의 말에 반응하고 변화하는데, 어찌 물구디인 사람이 감히 하느님 말씀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솔직히 우리 중에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무언가를 깨닫고 변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달라지는 기색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태도, 곧 마음의 밭의 상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밭은 어떻습니까? 혹 겸손치 못한 길바닥이거나 묵상하고 성찰하지 않는 돌밭이거나 온갖 세상일과 현실적인 욕심에만 사로잡혀 있는 가시덤불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말씀을 좀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며 적극적으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며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되고 희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살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하여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씨앗과 토양과 열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해도 뚜렷한 결과가 없는 때가 있다. 특별히 '신앙농사'에는 투자 한만큼 거둔다는 등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때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내가 기대하지도 못한 결실이 언젠가는 꼭 맺힌다는 것을 . 다만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의 결실이 맺히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투신이 의미 있음을 믿는다.
뿌린 만큼 거두어 지는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 "심은 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인생사에 있어서 성실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게 됨을 믿게 하는 말인 반면, '한강에 돌 던지기'라든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눈에 보이는 결실이 전혀 없음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없고, 모든 것이 공허해 보이는 경험을 예수님께서도 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시대적으로 엮은 것이 아니고 비슷한 내용들을 함께 묶어놓은 것이다. 아마 오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하신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은 온 갈릴레아와 이방인 지역까지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지만, 믿고 따르는 사람들보다는 반대자들과 무관심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밖에 없었다.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처럼 자신의 말씀을, 그 초대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안에 수많은 결실을 맺는 선의의 사람들도 있음을 동시에 인정하신 것이다.
2.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토양이다.
입시 때가 되면 보통 때보다 자녀들을 위해서 미사를 청하는 신자들이 많아진다. "신부님, 저는 우리 본당 신부님께 미사를 청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또 미사 한대 청하려고 왔습니다."하는 신자들이 가끔 있다. 이들은 미사의 은혜가 오로지 미사를 드리는 신부님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미사뿐 아니라 모든 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그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성사를 청하는 (받는) 사람의 믿음과 준비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얼마나 큰 믿음과 준비로 충분히 통회하며 성사를 보느냐에 따라 그 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의 많고 적음이 결정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도 우리에게 뿌려지는 말씀의 씨앗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문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토양이다.
어떤 본당신부님이 주일 저녁에 그 날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복음 말씀이 무엇이며 신부님 강론의 요지는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더니, 강론 말씀은 그만 두고라도 낮 미사 때 들었던 복음의 내용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신자는 10명 중 2명뿐이었다고 한다. 대개의 신자들은 몸은 성당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성당 문밖을 나서면 신앙생활은 끝나고 이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서로 겉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말씀을 마음에 모시고,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인은 드물다. 형식적인,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래도 말씀은 선포해야 한다.
길바닥이나 자갈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씨앗이 많더라도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을 돋아 자라게 하며,.....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사 55,10-11). 말씀의 선포에 몸바친 사람들이나 하느님 자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각 개안의 마음의 토양도 끊임없이 회개의 눈물로 적시고, 속죄의 밭갈이를 계속해야겠지만, 더 넓은 밭인 이 사회와 세상의 토양도 바꾸어야 한다. 불의와 착취와 인권유린 그리고 악법과 구조악(構造惡)이 얽힌 자갈밭과 가시덤불 같은 이 세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로마8,21)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밭이 변화되어 새로워 질 때 인간이 사는 이 세상과 물질계도 구원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세상을 새롭게 할 말씀의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랄 세상의 토양을 일구는 일은 세상에 파견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서공석 신부님
예수님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유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즐겨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농부의 행위에 비유하여 복음 선포를 설명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에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같은 복음을 선포하지만, 받아들이는 땅에 따라 실패와 장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는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을 만나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비유를 회상하면서 그들 자신은 과연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인지를 반성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자로 돌아가셨고, 그 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은 그들이 홀로서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그야말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이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복음 선포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뿌렸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노력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무위로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죽음 후 교회라는 별도의 종교 조직으로 독자적 길을 갈 만큼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신 후 제자들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시던 대로, 유대교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차차 그들의 언행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추방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당국이었고, 그 제자들을 내어 쫓는 유대교 회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 공동체는 안식일 다음날, 곧 오늘의 주일에 따로 모여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 대해 회상하고, 그분의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대단히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건물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집회는 그들 중 주거 공간을 여유 있게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서로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서로 신뢰하고 봉사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함께 나눈 바가 오늘 우리 미사의 말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눈 식사가 형식을 갖추어서 오늘 미사의 성찬전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삶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사는 데 필요한 행동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제물봉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노동의 대가와 자기 이웃을 바라보고 그 노동의 대가를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율법과 제물봉헌은 사람들을 단죄하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을 구실로 사람들을 단죄하고, 제관들은 제물봉헌을 핑계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부담이고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을 버리고 단죄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루가 4,19)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여 자기 한 사람 죄인이 되는 불행을 피하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 사로잡힌 이, 눈먼 이, 억눌린 이들”(4,18)을 위해 은혜로운 사람이 되는 데에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은혜로우신 분이기에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은혜로운 실천을 합니다. 그 실천으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루가 6,21-21)들이 행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잔치는 참여한 모든 이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장소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과 함께 나눕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강요당하는 백성은 목자를 잃은 양들과 같은 측은한 군중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며 측은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9,36). 인간의 슬기로움과 똑똑함은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고 풀을 죽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슬기로움과 똑똑함의 산물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셨다”(마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돌아가셨듯이, 초기 신앙 공동체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 앞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들이 뿌리는 말씀의 씨는 좋은 땅을 만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로마 4,18)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은 권위도 아니고 허세도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은혜로우심을 스스로 실천하여 그 신뢰를 자기 삶의 현실로 만듭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사람들이 대면하게 하는 말씀과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과 실천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일하실 것을 비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55,10-1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여,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말씀과 실천을 우리가 뿌리면. 그것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과 다음 주일 전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는 듣기만 하고 그것을 깊이 통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충분치가 못하다. 여기서 사도들은 군중들과는 달리 통찰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마태 13,11). 이것은 사도들의 자세에 대한 보상이다.
복음: 마태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께서는 비유를 먼저 말씀하시고(3-9절) 나중에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18-23절).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있었다”(2절). 예수께서 이렇게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은, 아마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을 더 가짐으로써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배에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팔레스티나 상황에서 사실에 근거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든 좁은 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거친 땅이지만 모두 죽어버리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씨를 뿌렸다.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시고자 주변상황을 들어 설명해주시고 계시다. 이는 그래서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려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역사 속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나라의 구원적 힘은 힘차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이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우선 신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각별한 정성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는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등에 집착되어있을 때에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23절)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신학적 통찰력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 말씀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밭에 있는 모든 돌과 잡초 가시덤불을 없애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 이 수고가 없으면 수확은 실패할 것이다. 수확이 실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말씀’을 지체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땅’, 즉 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독서: 이사 55,10-11: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처럼...
제1독서에서도 제2 이사야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지혜나(잠언 8,22; 지혜 7,22) 성령(이사 11,2)처럼 인격화되고 있고 오직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야 돌아오는 사자(使者)에 비유되고 있다. 비와 눈의 의미는 그 ‘말씀’의 풍부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이 야훼의 말씀도 구약에서는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사야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의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위험이 있다.
제2독서: 로마 8,18-23: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모든 만물이 생겨 나온(창세 1장)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18.22-23절).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들에게서 그 말씀이 결실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삶을 통한 결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신앙을 가진 나에게서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실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의 씨앗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밭에 있는 자갈이나, 잡초, 가시덤불 같은 장애가 되는 것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수고’가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 수고가 없이는 결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뿌리내리는데 방해가 되는 세상과 세상의 이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토양으로 준비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 13,8-9).
희망별곡
이재희 신부님
삶에 대한 가치관이 우뚝 서 있어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온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으로 하루를 살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희망을 품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시간입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학살 할 때에 시장에서 한 노인이 빈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사 가세요!"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노인장! 아무것도 팔 것이 없지 않소?" 그러자 노인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는 희망을 팔고 있소. 우리 민족의 꿈과 비전을 팔고 있소. 희망을 사가시면 반드시 희망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희망이 무엇이요 나에게 파시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입니다. 희망!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희망의 시작이요 과정이요 영광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는 예수님 공생활 말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떠나고 당신이 행하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열두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중단해야 하지 않느냐는 절망의 이야기가 들려왔고,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꿈을 말씀하십니다.
씨앗은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반대와 거절을 당함으로써 분명한 실패처럼 비춰지지만 성공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씨앗의 생명력을 질식시키려는 반대 세력들도 있지만(길바닥, 새들, 돌밭, 가시덤불) 경험이 풍부한 농부는 그래도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백배의 열매를 맺는 한톨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은 희망입니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그분께 대한 희망이 있다면 그 절망도 비상을 꿈꾸는 희망을 품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로마 8,24)
"나는 매일 몇 톨씩의 씨앗이라도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때가 되면 누군가는 거두게 될 테니까." 요한 23세 교황 <말씀이 나의 두 손에> 중에서
주님의 옥토에 뿌리를 내려라.
배광하 신부님
돌밭 가시덤불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악마를 쫓아내실 때, 악마들이 정확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악마는 알아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무엇이고 그 일을 행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뜻을 관철시키는 일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여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언제 죽느냐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 안에 살기로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같이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빈 껍데기에 불과한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아직 영생의 부활을, 그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이제 막 맺어진 씨앗이 나의 생각과 실천에 따라 뿌려질 밭도 갈리게 됩니다.
하느님을 그저 알아만 보는 것, 내 뜻만을 관철시키는 삶, 평화를 기다리기만 하는 무능하고 게으른 삶, 내가 원하는 바를 기복신앙으로 하느님께 청하기만 하는 믿음, 늘 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할까 전전긍긍하는 일상, 아는 것은 많고 들은 것도 많은데 실천에는 옮기지 않는 무력한 지식, 죽음마저도 승화된 아름다움으로 이승에서 가꾸어 나가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인생, 하느님 안에서 살지 않고 세속에 얽매여 사는 삶은 모두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말씀의 씨앗이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진 불행한 씨앗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씨앗은 가지고 있지만 결국 구원의 밭으로 가지 못하고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까닭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책하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 14~15).
좋은 땅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 8~9).
이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관한 궁극적인 희망으로 사는 이들에게 세상이 주는 환난과 박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씨앗은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좋은 땅에 뿌려졌기 때문에 뿌리가 튼튼하여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의 뿌리와 토양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새벽 빛이 아닙니다. 당신은 새벽 빛을 기다리는 땅입니다. 당신의 하느님께서 새벽 빛이십니다. 조금 있으면 여명이 밝아오고 좀더 있으면 한낮이 됩니다. 당신은 그 빛을 기다리는 땅입니다. 당신은 손에 분필을 들고 당신을 향해 오는 그 설계사의 분필을 기다리는 흑판입니다.
고통과 어둠에 찌든 당신의 마음이 당신이 벗어난 이 땅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걸지 않도록 하십시오. 눈물이 당신의 메마른 신앙을 촉촉이 적시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참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 앞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에게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밭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저 우리는 그분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씨앗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분께 내어 맡기며 참된 믿음을 가지고 그분 좋은 땅에 내 씨앗이 떨어지도록 기다리거나 섭리에 순명할 줄 몰랐습니다. 그분 말씀의 땅은 모두가 옥토였는데, 내가 밭인 줄 착각하였기에 생에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인간적인 욕망에 쏟아 부었던 온갖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뒤에야 내가 씨앗인 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거름이 촉촉한 옥토였는데 내 씨앗이 세상의 욕심을 향하여 떠돌았던 것입니다.
많은 고집의 착오 속에 다시금 주님께 돌아와 이렇게 고백하는 처량한 탕자가 되었습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로다”(코헬 2, 22~23).
우리는 분명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싹을 키우는 작은 몫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열매를 맺는 삶
송봉모 신부님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하늘나라는 한 농부가 씨를 뿌린 것에 비유됩니다. 여기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전혀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이지만 잠시뿐, 그 말씀으로 인해 어떤 곤란이 생기면 말씀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귀담아들으나,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부귀에 대한 집착으로 말씀을 질식시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편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도 우리 대다수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가리키는 씨앗을 마음 밭에 심고 잘 가꾸어 열매를 맺으려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 정신이 팔려 거름 주는 것과 잡초 없애는 것을 태만히 하였고, 그 결과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가 바른 곳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원수 마귀가 뒤에서 우리를 헷갈리게 했음을 의미합니다. 다음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맹수조련사가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들을 조련할 때 몽둥이나 총 대신 네 발 달린 의자를 거꾸로 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맹수 앞에서 의자를 돌립니다. 맹수의 눈에는 네 개의 의자다리가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맹수는 네 개의 다리에 초점을 맞추려고 무지 노력하게 됩니다. 이쪽에 맞추고 저쪽에 맞추고 위에 것에 맞추고 아래 것에 맞추고, 그러다 보면 너무 헷갈리면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어 서서히 유약해지고 온순해집니다.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되고, 섬길 수도 없는데, 우리의 초점을 흐려 놓음으로써 두 주인을 섬기도록 만듭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을 품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쭉정이 농사만을 짓도록 만듭니다.
마태오복음 6장 22-23절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눈이 성하면”이라 할 때 “성하다”는 그리스 말로 “하나의 초점을 갖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하나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은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 삶
이기양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지요. 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서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다가 말라죽었으며,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져서 뿌리는 내렸지만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말씀하시지요.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 말씀을, '밭'은 우리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말씀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옥토는 농부의 피와 땀의 결실입니다. 끊임없이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주고 거름을 주는 등 한여름의 피땀이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어느 고고학 팀이 오래된 무덤을 발굴했는데 관 속에서 약 2000여 년 전의 꽃씨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재미삼아 그 꽃씨를 땅에 심어보았는데 한 달이 지나자 놀랍게도 씨에서 싹이 나고 잎이 자라더니 꽃까지도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면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이치를 여실히 증명해 준 사건이었지요. 이는 또 반대로 아무리 좋은 씨라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어떤 본당의 신부님이 주일 저녁 미사가 끝난 후에 무작위로 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복음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바르게 대답한 사람은 20%밖에 안 됐다는 군요. 미사가 끝나고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성당을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미사에 안 나온 사람은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도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께 전화 한 번 해 볼까요?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이 1독서와 2독서 그리고 복음과 강론을 통해 풍성하게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밭이 기름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토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밭은 길바닥이요, 돌밭일 수밖에 없지요.
바로 이 자리에서 오늘 비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끝나고 뭐하지? 왜 이리 덥나? 오늘 저녁에 비가 오려나?'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뿌려지는 말씀의 씨앗은 뿌리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에 비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한 주 동안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 맺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행실이 형편없던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과거의 삶을 고쳐나가려고 애를 썼지요. 그런데 애를 쓰면 쓸수록 주변 사람들은 '당신이 그래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는가?'하며 조롱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전에 사귀던 친구들을 만났는데 친구들은 그를 보자마자 대뜸 조롱 섞인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너 세례 받았다며? 야, 놀랍다. 그래 네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 좀 해봐라."
우물쭈물하며 마땅히 대답을 못하는 그를 친구들은 계속 괴롭혔지요.
"요즘 우리와는 어울리지도 않고 하느님만 찾더니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도 못해? 정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를 대보게. 나도 좀 믿어보게."
한참 후에 남자가 말했습니다.
"나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네. 나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가 무직자로 거리를 떠돌면서 아내와 아이를 몹시 괴롭히면서 살아왔는데 지금은 술도 끊었고 직업도 구했다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지금은 가족들 모두 나를 좋아하고 있다네."
바로 이것이 말씀이 뿌리를 내려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의 모습입니다. 진정 여러분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여러분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십니다.
농부의 희망
이요한 신부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몰이해와 비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난이 답답하고 힘이 빠질 만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농부는 자신이 뿌린 씨가 잘 자라 많은 소출을 거두기를 바라면서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농부의 바람과 달리 어떤 씨들은 길에,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 씨들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안타까웠겠지요. 그럼에도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잘 자라지 못하는 씨들이 있는 반면에, 많은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이 희망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심지어 비난하고 박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들을 귀가 있어 당신의 말씀을 따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십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 당신의 뜻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는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십니다. 이 희망이, 힘든 공생활 걸어가실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이 희망의 힘으로 오늘도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보면 암담한 현실에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자라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 미안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온갖 걱정과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 성당을 나서자마자 그 말씀들을 잊어버리는 못난 내 모습,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린 정치 지도자들, 사랑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에 절망합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비록 못난 나 자신이지만 내 안에 분명 좋은 땅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디기는 하지만 내 안의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뿌린 씨가 때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도 있지만,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하기에 희망을 가집니다. 이 희망으로 내 안에, 이 사회 안에 복음의 씨를, 하느님의 뜻을 뿌립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좋은 마음의 땅과 풍요로운 결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예수님은 호숫가 배에 올라서 계십니다.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물가 주변에 서 있습니다. 마치 호숫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무대 위에 계시고, 물가에 서 있는 군중들은 원형 경기장 객석에 있는 듯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복음의 미래를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들어 소개합니다.
씨앗의 미래와 운명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은 분명히 비유입니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인 길가,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잘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요롭게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이렇게 다양한 땅의 환경과 결과(미래)를 말합니다. 한 편에서 실패를, 다른 편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비유는 하느님의 숨겨진 신비들과 하느님 계시의 표현 방법이 밝혀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비유들입니다. 비유는 하느님 나라 신비가 숨겨져 있는 그 형태를 발견하게 도와줍니다. 듣지만 이해 못하고, 쳐다보지만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딘 마음을 가졌으며 회심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씨 뿌리는 사람이나 씨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어떤 땅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위에 씨가 떨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복음은 열매를 맺는 수확의 전제 조건을 결국 의지적으로 강조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입니다. 어떤가요? 우리 마음의 땅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 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제가 강의를 하거나 강론을 할 때 잘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순서를 재미로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가 제일 잘 받아들이는가?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수련 수녀님들이었습니다.
말을 시작하면 눈이 초롱초롱하고 조금만 웃겨도 까르르 웃습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입에 있는 사탕 빼 먹으려고 하듯 아직 하지 않은 얘기나 하지 않으려 했던 얘기까지 빼먹으려는 듯 내뱉지 않은 말까기 무슨 말일까 기다리고 있다가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즉시 낚아채듯 받아들이고 즉시 이해했다는 표시로 머리를 끄떡끄떡합니다.
수련 수녀님들은 귀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눈, 코, 귀, 입, 머리, 가슴, 전 존재로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다음은 4-50대 어머니들입니다.
들으려는 의지나 태도나 능력이 수련 수녀님들 못지않게 훌륭하고 아멘 하고 맞장구치는 면에서는 수련 수녀님들보다도 훌륭하나 이해력이 수련 수녀님들보다 떨어지고 성긴 체 마냥 들어왔다 금시 빠져 나갑니다.
그래서 수련 수녀님들은 제가 해 준 말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 눈에 환히 보이는데 엄마들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 다음은 수련 형제들입니다.
이성적, 구도적인 측면에서는 받아들이는 태도와 능력이 수련 수녀님들이나 어머니들보다 훌륭하나 전 존재적으로 받아들이는 면에서 못 미칩니다.
그래서 제가 해 준 말이 어머니들에게보다는 더 살과 피가 되지만 가슴을 키우는 쪽이라기보다는 머리를 키우는 쪽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서를 매긴다면 20대 청년들, 아이와 청소년들, 할머니들, 중년기 이후 수녀님들의 순서가 되고 마지막으로 남자들이 자리합니다.
남자들은 우선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존재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귀로나마 제대로 듣는 것인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귀로 듣지만 말씀이 마음에 전혀 와 닫지 않는 냉철한 사람,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시건방진 사람, 먹고사는 근심걱정으로 말씀이 뜬 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는 고단한 사람, 자기생각과 주장 너무 강하여 어떤 말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완고한 사람, 가르치려 들기에 전혀 들을 구석이 없는 교만한 사람들이 보통의 중년 남자들이고 중년 남자 중에서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더 그러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특별히 나누고 싶은 것은 나이 계층을 불문하고 어떤 말을 들어도 반응하지 않거나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즉 반응체계가 고장 난 사람에 대해서입니다.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상처주고 고통을 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아예 아무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말, '보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는 말이 바로 이 뜻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오늘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듣고 싶은 말에만 반응을 하는 장애도 있습니다.
위로, 칭찬, 축복과 같은 말에는 솔깃하지만 질책, 비난, 저주와 같은 말은 들은 바 없습니다..
가려서 듣는 사람이 아예 듣지 않는 사람보다 더 괜찮은 사람들일 듯하지만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는다는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듣고 싶은 말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박상대 신부님
주지하다시피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일상 가르침과 행적을 묵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철학과 그 정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마지막 수난, 죽음, 부활사건을 뺀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대략 대여섯 개의 군락으로 엮었다. 이를 크게는 다섯 개의 설교집성문과 한 개의 기적사화집성문으로 나눌 수 있다. 마태오는 우선 굵직한 10가지 기적사화를 8-9장에 모아 놓았고, ① 5-7장에는 산상설교를, ② 10장에는 파견설교를, ③ 13장에는 비유설교를, ④ 18장에는 공동체설교를, ⑤ 24-25장에는 종말심판설교를 모아 엮어 놓았다. 오늘 복음은 세 번째 설교집성문인 비유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데, 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② 가라지의 비유, ③ 겨자씨의 비유, ④ 누룩의 비유, ⑤ 보물의 비유, ⑥ 진주의 비유, ⑦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가 집성한 비유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모두 하느님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비유설교에 등장하는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나라의 특성과 성격을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알려준다. 비유설교의 부차적인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나라의 지상 선포자(宣布者)요 구현자(具現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느님나라의 신비(神秘)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란 말 그대로 신비(神秘, mystery)이다. 신비란 인간의 이성적 이론(理論)과 인식(認識)을 초월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주려 하신다. 그러나 신비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도 지식도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자. 여기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이다.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씨가 뿌려진 장소와 그 결과를 비교한다면 비유자체는 쉽게 이해된다. 즉, 길바닥 -> 새의 밥, 돌밭 -> 말라죽음, 가시덤불 -> 숨 막혀 죽음, 좋은 땅 ->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란 표현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보조관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면에 나타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다른 어떤 지식이나 슬기로움이라기보다는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알아들을 귀’(9절)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머리로 깨달아 마음에 심는다면 복음은 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 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을 열매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땅위에 하느님나라를 건설할 씨앗이기 때문이며,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는 텃밭임을 명심해야 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예수님은 나자렛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농사도 짓고 양과 염소도 키우는 평범한 시골 생활에 익숙해서인지, 그분 말씀에는 이런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이 배여 있습니다. 특히 하늘나라를 소개하실 때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야 비유의 심오한 뜻이 생동감 있게 살아나 청중들이 귀를 기울일 테니까요. 예수님께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내면에서 뭔가를 움직이게 하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배에 앉아 말씀하시고 군중은 물가에서 말씀을 경청합니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2절) 처음에는 제자들이 따르고 그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공생활 초반에 인기가 높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에 경탄한 나머지 여기까지 왔지만 모두가 그분한테서 사랑과 정의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뿌린 말씀의 씨앗은 그들 마음의 밭 어딘가에 떨어질 것입니다. 기름진 밭일지 삭막한 가시밭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ㄴ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씨를 뿌리고 나서 땅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뿌린 씨는 좋은 땅은 물론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도 떨어집니다. 이런 식의 씨 뿌리기는 태반이 헛수고입니다. 새들이 와서 쪼아 먹거나 해가 솟아오르자 말라버리고 무성한 가시덤불이 숨 막히게 합니다. 그러나 수확은 훌륭합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절) 겉보기에는 이러한 농사법이 낭비로 보이지만 수확의 결과는 낭비를 능가합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결실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열매를 맺기만 한다면 하나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11절)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 비유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비유는 알려진 것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아듣게 도와줍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11절)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이해하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식별력이 주어집니다. 그분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절) 예수님은 한 번씩 비정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돈이라는 현실을 하늘나라의 신비를 일깨우는 지식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곧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는 더 넉넉해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더 말씀에 굶주려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13절) 저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어려운 말이어서가 아니라 자기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14ㄴ-15ㄱ절; 이사 6,9) 신앙의 귀와 눈을 열어준 예수님의 기적을 만방에 알릴지라도 정작 자신은 하늘나라의 말씀에 마음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 아래 있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16절)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18절) 앞의 비유 속 상징을 하나하나 우의적으로 해석해 주십니다. 씨가 마르코복음에서 ‘말씀’이고, 루카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면,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의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이러한 소소한 일상에서 따온 표상과 연결됩니다. 첫 말씀에서 씨 뿌리는 농부의 자세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씨앗과 씨앗을 받아들이는 토양에 중점을 둡니다.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은 말씀을 전하는 데 따르는 수많은 난관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듣기는 했으나 하늘나라의 깊은 의미를 자신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쉽게 악의 논리에 넘어가 말씀의 씨앗을 빼앗깁니다. 기쁘게 말씀을 받아들였다 해도 말씀이 돌밭에 떨어져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환난이나 박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은 뿌리칠 수 없는 세상 이익의 달콤함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누리게 될 하늘나라의 결실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다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23ㄴ절) 깨닫는 것,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마음을 열고 따르는 것입니다. 온갖 장애물에도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듯이 그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말씀의 열매를 맺습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결과는 놀라울 만큼 훌륭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실패만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결말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대에 적극 응답하라.”
허성 신부님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다른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져서 싹이 돋아나기는 했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솟아 오르자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고 또 다른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서 가시덤불이 우거지자 그 숲이 막혀 버렸지? 그러나 또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배, 어떤 것은 삼십배의 열매를 맺었으니 귀가 있는 사람은 새겨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당시 이스라엘의 농경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밭을 갈고 나서 풀과 돌들을 골라내고 씨를 뿌리고 흙으로 씨를 덮지만은 그 당시 그곳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고 풀과 돌을 골라내었으므로 우리와는 완전히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길가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본래는 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길이 있어도 빨리 가기 위해 질러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같은 곳으로 질러가다 보면 자연히 밭이 길같이 굳어져 밭을 갈아도 쟁기가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길같이 남아있는 곳이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밭을 간 다음에 작은 돌을 골라낼 수 있지만 깊이 박힌 큰 돌은 골라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위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릴 수 없어 햇볕에 마를 수 밖에 없다. 가시덤불은 일반적으로 뿌리가 깊고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밭을 간 다음에 추려낸다 하더라도 일부 남아 있는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떨어진 씨앗에서 새싹이 나서 곡식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잘 자라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비록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셨건만 주님의 초대 보다는 엉뚱한 곳에 더 관심과 집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차려놓은 잔치상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세례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수계 신자들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 중에는 바쁘다는 이유가 가장 많다. 바쁘다는 내용 중에는 정말 생계유지를 위한 일과 직장 때문에 바쁜 사람들도 많지만, 너무 잘 먹고 편안한 생활을 한 까닭에 불어난 체중을 주체할 수 없어 돈주고 살 빼러다니느라고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주5일 근무제가 늘어나면서 바쁜 사람들은 더 늘어나서 성당은 점점 더 썰렁해지고 있다.
주일학교 사정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부모들 조차도 주일학교 보다는 학원에 비중을 더 두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주일학교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의 신앙에 정성을 기울여도 장성한 다음에 신앙이 식는 경우가 많은데 어려서 부터 그 모양으로 방치해 버린다면 자녀들이 성장한 다음에 과연 신앙의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구미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가톨릭국가에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톨릭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옛날의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들은 기도하는 사람들보다는 관광객들이 더 많은 것을 볼때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 많은 신자들 중에는 일생에 세번만 성당에 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첫번째는 태어난 후에 부모의 품에 안겨 세례 받으러 가고, 두번째는 애인과 함께 결혼하러 가고, 마지막에는 죽은 다음에 관에 담겨져 다른 사람들 손에 운구되어 장례미사를 치르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웃은 적이 있다.
그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헌신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우선순위가 저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사업과 영광을 빙자해 자기의 사업과 영광을 찾는데 더 심혈을 기울이는 이들도 있다.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에 음식 시중을 드는데 정신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님의 발치에 한가롭게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던 동생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자기 동생을 시켜 자기의 일을 거들게 해달라는 청을 드렸을 때 예수님은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분주하다만은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서른 번의 가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려움에 처한 여자청소년들을 위해 사목하시는 존경하는 수녀님께서 체험하신 일입니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엄청 많은 상처를 받아온 아이였겠지요. 아무리 기를 써도 그 상처가,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필요 했던가 봅니다. 아이는 적응하지 못하고 가출을 거듭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악영향, 가출할 때 마다 파생되는 심각한 문제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 성가시기도 할텐데, 수녀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가출한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수녀님, 저예요.”
“응, 너구나. 지금 어디니?”
“**예요.”
“거기 가만 있거라. 내가 바로 나갈게.”
수녀님께서는 아이에게 왜 나갔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왜 거기 있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데려오는 것,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는 것, 그것만 하십니다. 수녀님은 어떤 면에서 씨 뿌리는 농부이십니다. 살아계신 돈보스코이십니다.
농사 중에 가장 큰 농사, 가장 중요한 농사는 사람농사입니다. 언제나 물이 새는 것 같습니다. 무의미한 투자 같습니다. 도저히 싹이 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람농사의 특징은 그 속도가 아주 느리다는 것입니다. 아주 천천히 씨앗이 발아됩니다. 싹이 올라오는 속도가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립니다. 성장도 어찌 그리 더딘지요. 그래서 사람농사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저희 수도원 뒷마당에는 꽤 넓은 밭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그 밭은 당시 저희 아이들과 수사님들 삶의 일부였습니다. 이른 봄부터 저희는 그곳에 매달렸지요.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농약도 치고 잡초도 뽑으면서 땀도 많이 흘렸지요. 그 오랜 투자 끝에 가을이 오면 저희 모두는 얼마나 흐뭇해했는지 모릅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던 탐스런 가을의 결실들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정말 신기해했지요.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습니다. 봄에는 우리들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는 씨앗 하나, 키가 한 뼘도 되지 않던 가냘픈 묘목 하나가 자라고 또 자라서 마침내 아이들의 키를 넘어섰습니다. 가을이 되면 뒷마당은 얼마나 풍성했는지, 그 그늘에서 아이들은 숨바꼭질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씨앗의 수백 배 수천 배 크기로 성장한 가지들에서는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열매들이 수도 없이 계속 결실을 맺었습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변화는 씨 뿌리는 사람들-부모나 교사-들의 인내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아무리 부족해보이고, 아무리 맛이 갔다 하더라도 수확하실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꾸준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의 변화에 가장 좋은 밑거름입니다.
풍성한 인생의 결실을 위해 기나긴 겨울날들을 잘 견딜 필요가 있겠습니다. 봄날의 투자도 필요하며, 여름날의 땀은 더욱 중요합니다. 풍성한 결실은 좋은 생각이나 계획만으로는 불가능하지요. 하루 온종일 빈둥거리며 공상만 하면서 지내다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회색빛 가을뿐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릴 곳을 달린 바오로 사도의 황혼이 그리도 아름다웠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잘 견뎌낸 우리의 가을 역시 가슴 설레고 흐뭇한 가을이 될 것입니다.
고유석 신부님
만약 내 아이가 밖에서 얻어맞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의 모습이 나타나리라 여겨집니다.
1) 장 중심(의지 중심)
힘없이 맞고서 울며 들어온 아이에게 우선 화가 난다. 그리고 거칠게 아이 손목을 잡고 자기 아이를 울린 상대 아이를 쫓아가 혼을 내주는 행동파.
2) 가슴 중심(감성 중심)
우는 아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저리고 아프다. 우선 억울하고 분한 느낌을 가진 아이를 품에 안아주면서 달랜다.
3) 머리 중심(이성 중심)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서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보다 먼저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눈물 뚝!”하고 말한 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이 글을 읽는 님께서는 어떤 모습이십니까? 우리는 태중에서부터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그리고 장년 시절을 보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또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성(理性)과 감성(感性) 그리고 의지(意志)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면서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드러냅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복음말씀을 들었을 때 각 사람의 반응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말씀에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토양이 모두가 같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말씀을 해석하고, 분석하기보다 선포된 주님 말씀을 굳건히 믿고 묵묵히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요, 또 다른 사람은 “오! 주님 오직 당신만이 나의 구세주요, 나의 희망이십니다!”하며 행동보다는 감성적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도 할것입니다. 끝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보다, 마음으로 주님과 통교하기보다 “왜, 어떤 상황이었기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건네셨을까?”하며 학문적·이론적으로 다가서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조화롭게 균형 잡을 때 가능해 지리라 여겨집니다.
신앙의 여정 안에서 공부하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을 함께 만들어 가기를 청해봅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이형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믿음의 씨를 어떻게 꽃피워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로 매일의 삶을 기도와 희생, 베푸는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신 선물을 잘 키워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선물로 받은 몇 개의 작은 화분이 있습니다. 그냥 물만 주면 잘 자라는 줄 알았습니다. 물을 자주 주면 안 되고 화분의 흙이 마를 때쯤 물을 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자라지 않고 모양도 이상하게 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또 물을 주는 것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방에 두었을 때는 가끔 물이라도 주면서 신경을 썼는데 바깥에 두면서는 신경도 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화분의 식물을 가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의 씨앗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을 때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합니다. 관심과 노력 없이는 꽃을 피울 수 없고 시들어서 보기 흉한 모습만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믿음의 씨앗을 키워나가는 것은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매일의 기도와 희생, 봉사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물만 주고 알아서 크라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강하게 키운다는 것도 어쩌면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일미사만 나온다고 우리의 믿음이 커지지는 않습니다. 또 마음으로 기도드리지 못하고 입으로만 기도드린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씨앗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음의 씨앗에 사랑을 통해서 빛을 주고, 기도와 희생, 봉사를 통해서 물과 거름을 주어 꽃을 피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또 하나의 화분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미 예쁘게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또 다시 다짐을 합니다. 잘 키워보겠다고. 그동안 받았던 것들과 함께 잘 가꾸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타고난 명강사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적절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잘 갖춰진 강의실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한 지자체에서 준비한 대규모 행사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전시실 저 전시실 둘러보는 가운데, 한 코너에서 한 작가께서 특강을 하였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산만한 가운데서 강의하느라 강사께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강의를 듣고 있는 대상도 중요하지요. 예비군 훈련이나, 민방위 훈련, 자동차 면허 재취득을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것, 참으로 힘겹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 마지못해 앉아있는 사람들,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앞에서 하는 강의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또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습니다. 효과적 전달을 위한 음향설비입니다. 아무리 강사가 출중하다 하더라도, 강의 내용이 좋다하더라도 잘 안 들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측면들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교육자, 명강사셨나 봅니다.
음향설비가 전무하던 시절, 수많은 수효의 군중들을 가르친다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가장 좋은 장소, 가장 좋은 시점이 언제인지 사전답사를 하셨겠지요.
예수님께서 선택한 강의실은 천연 강의실이었습니다. 카파르나움 근처에 있는 호숫가 동북해안이었습니다. 그곳은 해안이 마치 반원형 극장처럼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호수는 때마침 잔잔했고,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맑았습니다. 바닥은 모래와 돌들로 이루어져 백성들이 서 있기에 적당했습니다. 천혜의 강의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연 강의실에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작은 배를 하나 호수에 띄어 그 위에 앉으셨습니다.
때마침 바람은 호수 중앙에서 해안가로 잔잔히 불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 바람을 타고 청중들의 귀에 쏙쏙 전달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마치도 한 폭의 그림이라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수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의 감동을 화폭에 담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던지는 강의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그 내용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삶과 조금도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매일 만나는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서 말씀의 소재를 찾으셨습니다. 그분의 육화강생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도 철저하게 육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현 상황을 고려한 잘 준비된 말씀 선포가 필요합니다. 청중들의 삶에 근간을 둔 살아있는 말씀 선포가 필요합니다.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이 너무 감미로워 식사시간까지 놓칠 정도로 제대로 준비된 말씀 선포, 나그네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하느님 백성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말씀 선포, 그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반영하는 말씀의 선포가 필요합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학창시절 때에는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100m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턱걸이, 윗몸 일으키기, 던지기, 오래 달리기 라는 종목을 통해서 등급을 매겼고, 이 등급을 통해서 나온 점수가 학력고사에 반영되었지요. 저는 늘 특급을 받았습니다. 6개 항목 총점이 88점 이상이 되면 특급이었는데, 마지막 테스트인 오래 달리기를 하기도 전에 모든 종목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 놓았거든요. 그래서 굳이 오래 달리기를 열심히 뛸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래 달리기에서 0점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특급 점수에 도달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저는 다른 종목은 모두 자신 있었는데, 이 오래 달리기만큼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1000m. 생각해보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왜 그렇게도 힘들던지요. 그래서 뛰다가 포기하고 걸어서 들어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오래 달리기를 하자고 하면 괜히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로 갔다 오는 거리는 20Km입니다. 즉, 제가 그렇게 멀다고 느꼈던 1Km의 자그마치 20배나 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가 오지 않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그 거리를 자전거로 다녀옵니다. 물론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시절 1000m 달리기를 하면서 느꼈던 죽을 정도로 힘들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1000m 보다 20배나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힘들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전거를 타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서 예전에 멀고 힘들다고 생각했던 1000m라는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삶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들에게는 늘 한계점이라는 것이 함께 따라다닌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한계점을 자기 혼자 극복하려 할 때 얼마나 힘든가요? 너무나 힘들어서 ‘이것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야.’라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점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앞서 자전거를 통해서 저의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힘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말씀을 좋은 열매를 맺게끔 하는 하나의 씨앗으로 비유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실망하거나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하려는 그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이런 주님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주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로 만들어서 그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극복하고 싶어 하는 한계점. 그 극복의 길은 바로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한계점에서 벗어나,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립시다.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 때(김영수, '기도가 그리운 날에는' 중에서)
주님, 저는 지금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주가 텅 빈 듯한 슬픔에 젖고 있습니다.
이웃도, 대지도, 하늘도 문을 닫은 채로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경한 표정으로 멀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숨결은
허무의 한가운데에서 힘없이 식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주님, 제 영혼에다 그 옛날 천지창조 때처럼
싱그런 숨결을 다시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허무의 단단한 껍질을 벗으며 기도 속으로
들어가 탄생의 울음을 울게 해주십시오.
그 눈물의 바다 속에서 저의 영혼이 부활의 새 옷을 갈아입게 하시고,
저는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러니까 보좌신부 때 운전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서 얼마나 운전을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직접 운전을 해서 어디를 놀러가는 것이 저의 꿈이었거든요. 하지만 보좌신부라 차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때는 보좌신부가 운전을 하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일 때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운전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 동창 신부 중 한 명이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차를 가지고 있었고, 이 신부의 휴가 기간 동안 제가 차를 빌리기로 했던 것이지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빌린 첫 날, 설레임과 두려움을 갖고 저는 시동을 걸어 차를 운전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조금 운전을 해보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조금 멀리 나가보려고 우선 동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운 뒤 출발했습니다. 물론 차 뒤에는 이런 글씨를 붙여 놓았지요.
“왕초보”
어느 정도 가고 있는데 차 안에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납니다. 분명 정비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리고 기름도 가득 채웠는데……. 처음 운전하는 저로써는 이 냄새의 원인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차는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데 반해 무엇인가 타는 냄새는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이었던 저는 두려움에 결국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야 그 냄새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핸드 브레이크’가 내내 채워져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저는 핸드 브레이크가 채워져 있으면 차가 안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도 차는 움직이더군요.
많은 성인 성녀들은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마치 핸드 브레이크를 채우듯이, 내 마음을 채우면 주님 앞에 나아가기 힘든 것입니다. 물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완전히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혹시 내 마음이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움, 다툼, 질투, 욕심, 분노,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자물쇠로 마음을 채우면 그만큼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는 힘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지요.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으로써 배려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 가득한 배려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만 참 행복이 있기에…….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라. 그것이 힘의 원천이다. 노는 시간을 가져라. 그것이 영원한 젊음의 비결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이다. 남에게 주는 시간을 만들어라. 자기 중심적이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아일랜드격언).
수고하지 않고 얻는 기쁨이란 없습니다(‘좋은 글’ 중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두기 위한 것으로만
열매가 맺지는 않습니다.
길쌈과 각종 수고가 있을 때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평안의 가치는
전쟁의 비참함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죽음이 우리 곁에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장마는 햇볕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가뭄의 목마름은
단비의 소중함을 잊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미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불청객들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달콤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장과 성실한 일상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고단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해도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압니다.
기쁨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우리 자신의 수고는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오늘 발걸음이 가벼울 것입니다.
눈 떠서 만나는, 눈 감고서 떠올리는 모든 것들에 하느님의
빛과 향기가 돌게 하시어, 저로 하여금 감사함의 물결에
아득히 들게 하소서.
주님, 허무감에 떨고 있는 저를 사랑으로 깨어나게 하시고,
건너 하느님의 언덕에서 빛나고 있는 영원을 바라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 피가 돌게 하시어 저의 작은 것들에도 햇살이 넘치고 있음을
바라보게 하시고, 허무를 다스릴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오직
사랑뿐임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좋은 이웃이 되어야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이웃은 언제나 좋은 땅처럼 자신을 낮춥니다.
자신을 낮추면 모두가 소중한 열매가 됩니다.
좋은 땅도 좋은 열매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믿는 만큼 좋아지는 땅과 열매입니다.
좋은 땅은 고통속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평화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앗은 땅을 향해 뿌리를 내리고
땅은 씨앗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는 열매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좋은 땅은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겸손한 마리아처럼 주님께 언제나 청합니다.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마다 좋은 땅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마음이라는 땅을 주신 이유는
열매를 맺기위함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겸손해지고
모든 것 안에서 낮아지는
좋은 땅이 되는
기분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땅은 언제나 말씀의 씨앗
말씀의 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열매를 키워나갑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신비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라져가기에 신비이며
소중하기에 신비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면을 만나는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
신비의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단 한순간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으로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없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을
주님께서는 아프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신비와 비유는
욕망을 뛰어넘는
참된 사랑의 선물입니다.
참된 사랑은
낮음과 높음에 관계없이
사랑입니다.
신비한 언어는
언제나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지금 이순간이
오늘의 이 하루가
주님께서 주신
신비의 시간이며
감사의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의 눈물없이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신비를
일깨워 주십니다.
욕심이 아니라
감사라는 것을
사랑의 신비로
가르쳐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은총이며
신비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부모님의 그늘에서 우리가 성장했듯이
말씀의 그늘에서 우리는 무한한 사랑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성모님께 하느님 사랑을 가득 일깨워 준
요아킴과 안나 축일입니다.
이렇듯 부모는 평생 자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말씀의 마음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말씀의 사랑입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오늘을 시작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언제나 말씀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창조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깊게하는 것은 언제나 말씀입니다.
말씀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모두가 고마운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부모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말씀을 향하고
말씀은 부모를 향합니다.
생명을 나누는 것이 탄생이듯
말씀을 나누는 것이 탄생입니다.
자식을 올바르게 기르기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부모님의 사랑처럼
그렇게 주님 말씀을 깨닫는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부모님 사랑에 고개 숙여 감사하듯
말씀에 고개 숙여
듣고 깨닫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말씀을 일깨워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주님 말씀을 일깨워 주는 부모 되시길 바랍니다.
학창 시절에 보면 인기를 끌어 모으는 친구들이 꼭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춰서 오락시간에 무대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친구, 싸움을 잘해서 약자의 편에 서던 멋진 친구, 운동을 잘하는 친구, 말 잘하는 친구, 글을 잘 쓰는 친구…….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친구들이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는?’이라는 의문을 갖게 되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기가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춤과 노래로 오락시간을 휘어잡지도, 싸움을 잘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말을 잘하는 것도, 또 글을 잘 쓰지도 못했습니다. 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이 없었던 저의 모습이었지요. 그래서 인기를 누리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었고,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는 저의 모습에 스스로 한탄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기(저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창시절 때보다는 분명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를 나름대로 느끼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저의 능력이 갑자기 생긴 것일까요? 신부가 된 뒤, 하느님께서 “너 그동안 재주 하나 없이 사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특별한 능력을 주마.” 하면서 저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여전히 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신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즉, 저의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가 ‘신부’이기 때문에 사랑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저의 부족한 능력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치 제 능력이 특출해서 그런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질 때도 종종 있지 않았나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차별 없이 하느님 사랑의 씨앗이 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들 마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지요. 즉,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소출을 낼 수도 있고, 반대로 싹도 트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 하느님 사랑의 씨앗은 우리들의 작은 능력도 크게 만드는 아주 신기한 효과를 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밭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시기심과 욕심,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한 밭은 나의 능력을 조그맣게 만들어 버립니다.
지금 나의 마음 밭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우리 모두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전에, 주님께 감사합시다.
사랑이란 씨앗을 심게하소서 (‘좋은 글’ 중에서)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메마르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메마르고 차가운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불안하고 답답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외로울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버리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외롭고 허전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만스럽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내 기쁨을 빼앗아 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기쁨과 평화가 없는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에서 희망이 사라질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낙심시키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낙심하고 좌절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강영구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그대에게
당신의 가슴은 밭입니다.
콩을 심을 수도 있고, 벼를 심을 수도 있고, 감자나 고구마를 심을 수도 있고,
상추나 배추 혹은 무 따위 채소도 심을 수 있습니다.
잔디를 심고 정원수와 갖가지 꽃나무를 심어서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꿀 수도 있겠군요.
무엇을 심던 밭은 가꾸어야 합니다.
쟁기질을 하지 않아서 길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밭, 자갈과 돌멩이로 가득 찬 밭, 잡초 무성하고 가시나무까지 자라고 있는 밭에서 어떤 소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수고로움 없이 밭을 가꿀 수 없습니다.
쟁기질을 하면 파이고 뒤집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돌멩이들을 집어내고 잡초를 뽑으려면 땀 흘리는 노고와 끊어질듯 아픈 허리통증도 참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잘 가꾸어진 당신 가슴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싶어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리4,12).
그러나 무관심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밭, 미움과 증오, 원한과 원망, 시기질투의 돌멩이 가득한 밭, 돈과 재물에 대한 탐욕(貪慾)과 권력과 향락을 탐닉(耽溺)하는 욕망의 가시덤불 가득한 밭에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별수 없이 시들어버립니다.
한 여름 더위를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논밭을 가꾸는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얻습니다.
당신의 오늘도 부지런히 마음 밭 가꾸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척 더운 날씨입니다. 건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一明)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강영구 신부님
+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그대에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같은 사물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각(視角)이나 시야(視野)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보입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모두를 사랑스럽게 봅니다.
세상과 사물을 예수님처럼 보고 서로 사랑을 나누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따로 없습니다.
탐욕을 가슴 가득 담고 사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입니다.
미움과 증오로 이글거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밉게 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채울 길 없는 욕망(慾望)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훔치고 빼앗고 사기치고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망과 원한을 쌓고
다투고 싸우고 죽이며 지옥(地獄)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이 멀었고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당신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당신은 행복합니다.
부디 당신의 열린 눈과 가슴을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으로 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一明)
어떤 선비가 좀 배웠다고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상스러운 말보다는 고상한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상스러운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늘 고상한 말만을 하는 자신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지요.
어느 날, 이 선비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중에 강을 건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지고 만 것이에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 선비는 허우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사람 살려”라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내가 이런 상스러운 말을 부끄럽게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죽더라도 이렇게 상스러운 말은 할 수 없지.’
그러면서는 그는 “사람 살려”라는 말보다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인간 구제! 인간 구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서 이 선비를 구하러 왔을까요? 가까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 구제’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한 사람도 달려오지 않았답니다. 결국 이 교만한 선비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선비가 그냥 쉽게 “사람 살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농부들이 즉각 와서 구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상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끝까지 교만하게 “인간 구제”라는 어려운 말을 고집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이 체면이라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은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라면 자신을 낮추는 말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 그것 역시 커다란 용기가 아닐까 싶네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처럼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늘 어려운 말로써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지요. 이러한 차이 때문에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듣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려운 말로써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지요.
앞서 그 선비가 고상한 말만을 하다가 결국 망해버렸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다가는 이렇게 쫄딱 망할 수 있습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어 나갈 때, 우리들은 주님께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미워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최효섭, '사랑밭 편지' 중에서)
미국 역사에 특이한 인물이 있다. 로버트 리(Robert Lee)이다. 그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군의 사령관이었으나 북군과 남군이 모두 좋아했고 남부인과 북부인에게 모두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역사가인 로퍼(Roper)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장군의 편지, 일기, 연설, 성명서, 기타 작은 노트까지 면밀히 조사했는데 그는 북군이나 북부인을 향하여 적(enemy)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는 미워하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이 점이 미국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를 존경하는 이유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흑과 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편에 서기를 요구합니다.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지만 마음의 미움이나 판단으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진리에 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미움이 사라질 때 판단하는 마음이 없어질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쉽지 않는 일이나 하루에 한번씩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충분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