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의 책을 골라
사흘 뒤 입동인 십일월 첫째 일요일이다. 어제부터 흐린 하늘에 성근 빗방울이 듣는 날씨로 기온은 예년보다 훨씬 웃돌고 있다. 강수 현상은 내일 오전까지 유지하다가 날이 개면 늦가을답게 기온은 제자리를 찾아 내려갈 듯하다. 비가 오면 도서관에서 보냄이 야외 학습보다 실속 있는 시간 관리임은 여태 내 경험칙이렷다. 토요일 이어 일요일도 도서관이 열려 고마울 따름이다.
지기들에게 보내는 아침 시조는 한 달 전 당항포 연안을 트레킹하면서 봐둔 아낙이 하던 낚시를 시상에 담아 사진과 보냈다. 아침 식후 배낭에 대출 도서를 넣어 현관을 나섰다. 웃비는 내리지 않아도 우산은 챙겼다. 엘리베이터를 나서 이웃 동 뜰의 꽃대감이 가꾸는 꽃밭으로 가니 친구는 내려오지 않고 밀양댁 안 씨 할머니만 보여 먼발치서 인사만 나누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났다.
도서관이 위치한 교육단지로 가려고 외동반림로를 따라 걸으니 반송 소하천에는 귀향하지 않고 텃새로 머문 새들이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름 철새로 남녘으로 내려가야 할 중대백로가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녀석 곁에 주둥이로 바닥을 뒤지는 흰뺨검둥오리는 지난봄 북녘으로 올라가지 않고 여름을 여기서 머물며 새끼를 쳐 곧 본향에서 내려올 친구들과 합류를 앞둔 때지 싶다.
철새들이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려면 먼 비행에서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는 대신 감수하는 선택지는 기후에 대한 적응이었다. 여름 철새 백로나 왜가리는 겨울을 넘기려면 추위를 견뎌내야 하고 동토나 빙판에서 먹이를 해결해야 한다. 겨울 철새 흰뺨검둥오리는 더운 여름 날씨에 적응해야 하고 알을 품어 까는 새끼들을 뱀이나 들고양이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이다.
실내 학습으로 전환된 자연학교 등굣길에도 반송 소하천 냇바닥에 늦가을을 장식하는 고마리가 피운 꽃과 함께 철새들의 먹이활동을 관찰하는 성과가 있었다. 원이대로를 건너 창원 스포츠파크 동문에서 폴리텍대학 후문으로 들어 캠퍼스를 관통해 교육단지에서 도서관에 닿았더니 9시 이전이었다. 업무가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도서관 바깥에서 문이 열리기를 얼마간 기다렸다.
정한 시간에 직원이 출근해 문을 열어줘 2층 열람실로 올라가 어제 빌린 책과 함께 오늘 더 보태 읽을 책으로 ‘조선 선비의 산수 기행’을 골랐다. 도서관에는 내가 제1착으로 왔기에 바깥 풍광이 트인 창가 자리를 차지했다. 오전 읽을 책은 어제 대출해 배낭에 챙겨간 원철 스님의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였다. 글쓰기로 명성이 난 원철은 학승이며 이판승인 듯했다.
올가을이 성철 스님 입적 30주기인데, 생전 여럿 둔 제자들은 ‘원’자 돌림 법명을 스승한테 받았던 것으로 어느 기회 알게 된 바 있어 원탁이나 원영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 원철도 성철 문하로 여겨졌는데 산중 수행 생활이 아닌 안거 해제 이후인지 전국을 두루 방랑하며 보고 들은 순례기를 적어둔 듯했다. 특히 유림이나 한학자들과 교류가 눈길을 끌었다.
첫 장 첫 꼭지 ‘아버지가 생각나면 냇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네’는 500년 전 조선 중기 성리학자 김성일 집안 초상화를 얘기하면서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이 남긴 한시를 인용했다. 연암은 어려서 부친이 별세해 아버지가 생각나면 형님 얼굴을 봤는데 어느 날 그 형님마저 타계했다. 그래서 형님이 그리우면 두건을 쓰고 물가에 나가 냇물에 비친 내 얼굴을 봐야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수의 저서를 남긴 원철은 해인사 승가대학장과 조계종 불학연구소장과 포교연구실장을 지낸 이력은 소개되어도 속가의 성씨나 출생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의 후반부 생육신 조려가 은둔했던 군북 채미정과 향사하는 서산서원과 그의 손자 삼이 세운 무진정을 언급한 내용에서 함안 조 씨 후손으로 짐작되었다. 무진정에서 식음을 건너뛰며 책을 읽은 조삼은 독서광이었다. 2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