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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이씨 시조 고려 명종때 이재술(李在述)
시조: 이재술(李在述)
<氏族의 연원>
덕산이씨(德山李氏)의 시조는 이재술(李在述)이다. 고려 명종 때 덕풍(德豊, 지금의 충남 禮山郡 德山面) 호장(戶長)을 지내면서 별아산(別鵝山) 아래에 터를 잡고 덕산(德山)을 관향으로 가문을 열었다.
<本貫地 연혁>
덕산(德山)은 충남 예산군(禮山郡)에 있는 지명이다. 덕풍(德豊)·이산(伊山)의 합명(合名)으로, 덕풍은 백제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금무(今武)로 고쳤고, 고려 때 덕풍(德豊)으로 바꿨다.
이산현은 백제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이산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5년에 덕풍과 이산을 합쳐 덕산으로 한 뒤 헌종13년에 군(郡)으로 승격시켰는데, 1914년 예산군에 병합시켰다.
주요성씨로는 李, 黃, 宋, 尹, 高, 吳, 文, 蔣씨 등이 있었다.
<派名錄>
칠곡반송파(漆谷般松派), 칠곡봉계파(漆谷鳳溪派), 칠곡상지파(漆谷上枝派), 칠곡지당파(漆谷芝塘派), 칠곡남산파(漆谷南山派), 칠곡동일파(漆谷東日派), 평남양덕파(陽德派), 순흥구미파(順興龜尾派), 충주노은파(忠州老隱派), 전주추동파(全州楸洞派), 전주정동파(全州旌洞派), 전주봉강파(全州鳳崗派), 전주우림파(全州雨林派)
<주요 世居地와 변천>
경북 칠곡군(漆谷郡) 동명면(東明面) 봉암동(鳳岩洞).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말끔히 단장되어 고풍스런 옛 정취를 찾을 수는 없으나, 154가구 중 121가구 덕산이씨(德山李氏)가 5백여년 터 잡아 사는 옛 마을이다.
천혜의 요새인 대봉산성(臺峯山城)이 북방을 가로막고 있는 이곳에 덕산이씨(德山李氏)가 뿌리를 내린 것은 조선조 단종1년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 중신들을 학살한 정변 때 만경현령(萬頃縣令)으로 있던 이운현(李云顯)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당초 순흥(順興)외가에서 지내던 중 다시 세조3년 순흥부(順興府)변란이 일어나 피의 숙청이 단행되자 난(亂)을 피해 이곳 대봉산(臺峯山) 아래 터를 잡았다.
그의 아들 이?· 이분(李昐) 형제 중 첫째 이?은 일찍이 대봉(臺峯)에서 서쪽으로 30리 길인 왜관읍(倭館邑) 봉계동(鳳溪洞)에 자리잡아 오늘날 이곳에 80여 가구가 있고, 봉암동(鳳岩洞) 대봉산(臺峯山) 아래엔 이분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5백년 역사를 이었다.
벼슬을 멀리하고 한낱 숨은 선비로 여생을 마친 입향조 이운현(李云顯)은 자신이 터 잡았던 대봉산(臺峯山)에 묻혔다.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그의 뜻을 기려, 대봉재(臺峯齋)를 세우고 향사를 받들며 조상 섬기는 전통을 잇고 있다.
<氏族史의 개요>
이재술(李在述)의 아들 이언후(李彦厚)는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랐고, 손자 이극보(李克甫)도 고려조 원종 때 역시 대장군(大將軍)으로 몽고병란(蒙古兵亂)을 당할 때마다 정벌에 앞장서 혁혁한 부공을 세웠으며, 증손 이핵(李翮)도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는 등, '고려사(高麗史)' 중 참담한 시대에 3代 장수를 내며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초기에 덕산이씨(德山李氏)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李瑜實(殿中內給事) · 李謙(典理判書) · 李思牧(集賢殿大提學) · 李英(版圖判書) 등이 있다.
득성(得姓) 이래 벼슬과 도덕과 학문을 면면히 이어 가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 발상지 덕산(德山)을 중심으로 전국에 널리 퍼졌다.
시조의 8세손인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영(李英)의 네 아들 이유(李愉) · 이조(李慥) · 이성(李惺) · 이각(李恪) 형제는 모두 고려말에 등과했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쿠데타로 조선을 열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한때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 이유(李愉)는 조선개국공신인 하윤(河崙)의 간청에 못 이겨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벼슬길에 나선다.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태종5년엔 대호군(大護軍)으로 동북여진족(東北女眞族) 정벌의 임무를 맡게 된다. 그는 사나운 오랑캐를 다스리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 오음회(五音會)의 여진(女眞) 추장을 설득해 국경을 침범치 못하도록 선무하고 조선국토를 두만강(豆滿江)까지 개척, 계방을 튼튼히 했다. 이를 계기로 태종조에 형조참의(刑曹參議),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고 태종18년에는 동지총제(同知摠制)를 봉명(奉命), 사은사(謝恩使)로 明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明나라에서 가져온 비단 옷감으로 조정 중신들의 옷 색깔을 구분, 그 직위를 알 수 있도록 조복(朝服)을 지어 입도록 했다고 전한다. 그 이듬해엔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다시 함길도도찰사(咸吉道都察使)로 빈번한 여진족의 침범을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다가 세종5년에 세상을 떴다. 장례 때 세종임금이 제관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아우 이조(李慥)는 고려 말 문과에 장원급제해 이름을 떨쳤으나, 조선건국 후 초야에 묻혀 있다가 태조2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각산(角山)으로 귀양을 갔으며, 조선조에 출사한 후인 태조6년에는 이조의랑(吏曹議郞)으로 다시 귀양살이를 하는 등 두 차례나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태종7년에 조정에서 유례상정소(儒禮詳定所)를 설치하면서 그를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발탁했고, 그 이듬해엔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태조10년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그후 당시 세자이던 세종의 사부(師傅)로서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뜨자, 태종 임금은 예관(禮官)을 보내 관(棺)을 하사하고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성(李惺) · 이각(李恪) 두 아우 중 이성(李惺)은 세종조 문신으로 중추부사(中樞副使),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이각(李恪)은 무과에 급제해 경기수군첨절제사(京畿水軍僉節制使), 경상우도병마절제사(慶尙右道兵馬節制使), 병조참판(兵曹參判),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 등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까지 올랐다.
이유(李愉)의 아들 이사맹(李師孟)은 청렴강직으로 일간한 청백리다. 태종14년 문과에 급제,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에 오르고 세종18년에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돼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과 더불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저작에 참여했으며, '치평요현(治平要賢)' 편찬에도 간여했다. 당대의 명재상 황보인(皇甫仁), 성리학의 대가 김권자(金權滋) 등과 학문과 도의로 교우하는 등 문사가 크게 빛났다.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재직 중 명으로 세상을 뜨니, 세종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 사제(賜祭)하고 온혜공(溫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우 李師仲(觀察使 · 白川郡守), 李師程(都護副使), 李師曾(兵曹參議), 李師季(兵曹判書) 형제도 조선조에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특히 막내 이사계(李師季)는 세종조에 문과 급제,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있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성주(星州, 지금의 漆谷)에서 은거했다. 성종3년 어명을 맡고 입시(入侍)하면서 승정원에 당대의 폐습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며 바른 정사를 펼 것을 간하자, 왕이 그의 재기(才器)를 인정해 예조참판(禮曹參判)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 벼슬마저 사양하자 그 뜻을 가상히 여긴 성종이 다시 예조판서(禮曹判書)의 벼슬로 예우했다고 한다. 성종의 이같은 후의에 답하는 그의 상소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기록됐다.
태종조의 명신 이조(李慥)의 아들 이익박(李益朴)도 청백리로 이름난 인물이다. 황희(黃喜)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문장과 학행이 일세사종(一世師宗)이었다고 한다. 세종22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황해도·충청도 관찰사(觀察使) 등을 지내고, 세종31년에는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가 됐다.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관곡을 풀어 난민을 구제하는 등 구휼에 힘써 칭송받았으며, 사후 용진서원(龍津書院)에 배향됐다.
세종조의 병조참의(兵曹參議) 이사증(李師曾)의 아들 이귀미(李貴美)는 문신이 대부분인 덕산이씨(德山李氏) 가문에선 드물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홍주(洪州)·고성현(固城縣) 등을 지냈으며 선치선정(善治善政)에 공이 많아 '명현록(名賢錄)'에 기록됐다. 그는 성종4년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농사 장려, 부역(賦役)공평, 안업(安業)종사 등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수령의 3대 애민(愛民)원칙을 진언키도 했다. 만년에는 향리에서 오로회(五老會)를 조직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니, 오늘날 후손들이 그를 오로(五老)선생으로 추앙하고 있다. 문집(文集)이 전해진다.
중종조의 문신이던 이번(李蕃)은 예조정랑(禮曹正郞)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중종1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봄철에 눈이 내리고 겨울철에 천둥과 벼락이 치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음양이 조화를 잃고 천재지변이 겹치자, "인간의 일이 잘못 되면 하늘의 변이 나타난다"며 황천(皇天)은 오직 덕 있는 사람을 도우니 인애(仁愛)하는 마음으로 하늘과 땅을 부모처럼 섬기며 백성을 자식처럼 다스려 달라는 상소를 올려 임금을 감복케 한 것은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기록된 유명한 일화이다. 1545년 인종 즉위 후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으로 추록됐다.
그의 아들 이증영(李增榮) 역시 학행이 뛰어나 일찍이 인종과 명종의 사부(師傅)를 지내면서 가문을 빛냈다. 그는 인종이 등극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첫째가 어진 이를 존중하는 것이요, 둘째는 마음은 바르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의 끝장을 삼가하여 미치지 못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요, 넷째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케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집안간에 화목하게 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서당을 세워 학문을 닦을 것이며, 여덟째는 인재를 등용할 것이요, 아홉째는 기질과 절의를 숭상할 것"이라는 이른바 9조 상소문을 올려 유명하다.
조선조 5현(賢)의 한 사람인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교우하며 명종7년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낼 때는 청백리로 뽑혀 이황(李滉), 주세붕(周世鵬),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녹선됐다. 명종14년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광주목사(光州牧使)를 거쳐 명종18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재임 중 세상을 뜨니, 임금이 "사부(師傅) 이증영(李增榮)이 운명을 달리하니 애통하기 그지없다"며 관(棺)을 하사하고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이순(李純)은 중종20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있으면서 시천기목윤(視天器目輪)을 제작, 천체연구에 기여했다. 학문이 뛰어나 이황(李滉),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우했고, 인주목사(麟州牧使) 시절 전국의 선비들이 역방문학(歷訪問學)할 정도로 문명을 떨쳤다.
그밖의 조선조 인물로는 李之幹(寶文閣提學), 이?(吏曹正郞), 이조?(慶尙左道兵馬虞侯)등이 있다.
덕산이씨(德山李氏)의 큰집인 중시조 이유(李愉)의 후손들이 경북 칠곡(漆谷)에 정착, 뿌리를 내린 것은 세조 초기이다. 이유(李愉)의 손자 이운현(李云顯)이 계유정란(癸酉政亂) 때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사직, 순흥(順興)에 가서 칩거했다. 그러나 세조3년 순흥(順興)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밀모하다 발각, 사사(賜死)된 이른바 순흥부(順興府)변란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됨을 피하기 위해 처가인 칠곡(漆谷)으로 낙향, 이후 5백여년의 기업을 닦았다.
난세(亂世)를 피해 벼슬을 멀리한 이운현(李云顯)의 직계 후손들은 거의가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 외직으로 그쳤으나, 현현(玄縣) 이규문(李奎文)은 임란(壬亂) 당시 전라좌도수군절사(全羅左道水軍節使)로 크게 공을 세워 임진 훈수 녹권에 이등공신으로 기록됐다.
덕산이씨(德山李氏)는 문·무과 급제, 음사 등을 통해 40여명이 벼슬길에 올라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굳건히 지켜왔다. 특히 중시조 이유(李愉)의 4형제와 그 아들 이사맹(李師孟)의 5형제가 모두 조선조 초기부터 국록을 먹고 충절을 마쳐 벼슬을 하니, 세종이 이 가문을 가상히 여겨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를 하사한 것이 가문의 큰 자랑으로 전해진다.
"高門詵柱列朝翊近日宣麻轉可視"(높은 집안의 많은 자손들이 반열에 참여하여 정사가 맑게 펼쳐진다)
덕산이씨(德山李氏)네는 또 널리 알려진 효자, 효우, 열녀이므로 10여명을 헤아리는 효열의 가문이기도 하다.
그중 이윤승(李潤承)은 4살 때 조실부모하고 어린나이에 3년을 집상했으나 부모 생전에 찢어지게 가난한 탓으로 잘 봉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와, 장성한 뒤 "혼백이나마 편안히 모시겠다"며 20여년 간에 부모의 묘터를 20여 차례나 명당을 찾아 옮기고, 그럴 때마다 장례를 치르는 등 효행이 지극했다. 또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남편 李炳奎(同中樞)가 신병이 악화돼 사경을 헤매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살과 손가락을 베어 수혈, 목숨을 구하고 자신은 세상을 뜬 당대의 열부로 '정려기(旌閭記)'에 기록됐다.
근세에 들면, 철종조에 혜민원참서관(惠民院參書官)을 지낸 이조수(李兆壽)의 아들 이상만(李尙萬)이 눈에 띄는 인물이다. 고종28년 부산항(釜山港) 개항 초기에 부산항(釜山港) 서기관을 지낸 그는 고종32년 동래부(東萊府) 참사관을 거쳐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내는 등 풍운의 한말에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1897년 일본(日本)과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하던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을 황제라 일컬었다. 이 무렵 재야에서는 정치, 사회, 교육단체들이 생겨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나 국운은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大韓帝國) 중추원관(中樞院官)이던 이상만(李尙萬)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 경향 주지에 선시선서(善詩善書)를 보내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는데, 선서(善書) 한 편이 오늘날 동대문에 남아 있다.
이상만(李尙萬)의 아들 이종원(李宗源)은 덕산이문(德山李門)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다. 광무9년(1905),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乙巳)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른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13년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했다. 그의 무덤과 묘비가 아직도 하와이에 남아 있다고 한다.
덕산이씨(德山李氏)는 영남지방에 2백여 호, 호남지방에 3백여호, 서울충청지방에 2백여호 등 전국에 2천여호가 흩어져 살고 있으나, 그동안 서로 내왕이 끊겼다가 최근 후손들이 가장 번창한 영남화수회(嶺南花樹會)가 '숭모록(崇慕錄)' 간행하면서 일가간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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