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산 자락 표충사를 가다
흔히 밀양 표충사라고 부르는 절은 대구에서 멀지 않다. 지난 날에 표충사는 여러번이나 들렸다. 밀양지역의 문화 유산을 답사가는 길에는 반드시 들렸다. 절 마당에 서 있는 신라 석탑은 유명하다기보다는 신라 탑이 변화하는 한 과정을 보여준다 하여, 탑을 보려고도 들렸다. 뿐만이 아니고 제약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표충사에서 시작 함으로, 산행길에도 들렸다.
그러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는 이만저만 불편한 곳이 아니다. 그래서 ‘백팔사 답사’ 계획을 세울 때부터 찾아가야 한다면서 마음으로 꼽고 있으면서도 오늘까지 차일피일 미뤘다. 이제 100사가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찾아가지 못했다.
부산의 아들에게 들렸더니 대구까지 자기 차로 모셔드리겠다고 했다. 대구 가는 길을 조금만 돌아서 가면 갈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석남사와 표충사를 거쳐서 가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래서 표충사에 들렸다. 나로서는 다행이고, 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석남사에서 표충사 가는 길은---, 예전에 산행을 다니거나, 답사를 다니면서 넘었던 고갯길이리라. 내 기억 속의 길이다. 아들의 차를 타고 내가 아는 길이라면서 석남사에서 가지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을 안내하였더니, 아들은 네비를 툭툭 두드리면서 ‘아닌데요, 한다. 그렇다고 다른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냥 고개를 넘는 옛길로 가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이 험하긴 하였지만, 산은 온통 푸른 물감을 칠한 듯하고, 산 야래의 개울을 따라 울긋불긋한 지붕들이 나무들 속에 숨어 있다. 정말 멋진 경치이다. 아내와 나는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잘 산다는 유럽으로 여행가서도 보기 힘든 경치라는 말을 주고 받았다.
한참이나 달리고 나니, 길 자체가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래도 아들은 용하게도 찾아간다. 산 고개를 넘으니 저수지인지, 호수인지 이름 붙이기가 애매하다. 잔잔한 물결에 산도, 산 자락의 아름다운 집들도 잠겨 있다. 낯선 곳이다. 여기에 살면 경치는 좋지만, 정말 생활하면 사는 곳일까 하니, 아내는 관광지의 팬션이라고 하였다. 팬션이 맞을 듯하다.
골짜기가 끝나자 차는 우회전하여 다시 깊은 골짜가로 들어간다. 길은 한없이 조용하다. 간간이 갈가에 노란 색 꽃도 보인다.
표충사 이야기를 한다면서 엉뚱하게 찾아가는 길 이야기며, 길가의 집들이며, 호수를 이야기했다. 너무 아름다운 경관이어서 내 이야기가 옆길로 들어갔다.
표충사는 밀양의 제약사 자락에 있는 고찰이다. 대한 불교 조계종 15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특색이라면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왜군과 싸운 사명대사 유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를 기리는 뜻으로 절의 이름도 표충사가 되었다고 하니, 사명대사와 깊은 관게를 맺고 있다.
신라 무열왕 1년(654년)에 삼국통일을 기원하면서 원효대사가 죽림정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고 하나. 믿기가 어렵지만, 하여간에 ’忠‘자와 연관성은 있다. 흥덕왕 때 인도 스님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져와서 현재의 절 자리에 터를 잡고, 사리 1과를 모신 탑을 세웠다고 한다. 전설적인 이야기이긴 하더라도 탑의 양식으로 보아서 흥덕왕 때 세웠으리라는 말은 어느 만큼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고려 시대에는 여러 국사가 주재할 만큼 번성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절 안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에 오르기 전의 저쪽 자리에 表忠祠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보인다. 건물 앞에는 안내판이 보이지 않았다. 사명대사의 가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은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祠‘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사명대사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를 올리는 집이라는 뜻이니, 불교와는 관계가 멀다하여 안내문을 달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든다.
表忠祠는 원래 영축산의 백화암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나라에서 사명대사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서, 表忠書院을 세워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이 사당을 영정사(사찰)에서 관리하게 함으로 祠를 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1838년에 사명대사의 8세 법세손인 천유가 예조에 보고한 뒤인 1839년에 나라의 도움으로 폐사가 된 영정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지은 절이 표충사이다.
표충사는 사명대사를 유학의 관점에서 그를 기리던 사당이 사찰로 바뀌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길게 설명하였다.
유명 사칠이면 으레 사람들이 북적이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깊은 산골의 암자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주차장에서 절로 올라가는 길은 숲속 길이어서 조용하면서도 신비감이 느껴진다. 사방은 온통 푸른데 개울물 소리는 자연의 소리 너머에 있는 숭고함을 느끼게 해준다. 아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도 분위기 때문인지 조금은 엄숙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 나누면서 절로 올라갔다. 내가 소아과를 전공한 직업병이 발동한 것인가. 요즘은 젊은이들의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풍조가 이해되지 않는다. 내 아들은 아이들을 낳아서 잘 키우고 있으므로 나를 흐뭇하게 해준다. 내 아이의 대답은 요즘은 아이를 양육하는데 돈이 너무 들어서 ---, 라고 한다. 지금 우리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자연의 너머에 신비로운 셰계가 있는데. 그 세계는 믿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아이 양육도 돈 너머에 무엇이 있는데. 그 무엇을 느끼지 못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절 뒤에 우뚝 솟은 제약산의 필봉이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밝게 보인다. 예전에 소아과 동문 선생님과 산행길에 올라 사자봉을 지나, 사자평을 거쳐, 계곡 따라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아파서 절룩거렸던 기억이 난다. 후배 선생님이 나를 부축해주어서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절 마당은 다른 절과 비교하여 많이 넓어 보인다. 그 가운데에 표충사 삼층 석탑이 있다. 답사 팀을 따라 여러 번이나 이 절을 찾았지만 답사팀들은 탑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혼자서 오래 탑 주위를 돌면서 여기저기를 살펴 보았다. 그냥 탑으로만 보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로 보일까. 모를 일이다. 탑파 신앙에서 불상 신앙으로 신앙 형태가 바뀌어서인지, 탑은 절의 장식품이 되어버렸고, 절을 찾는 사람도 탑에는 관심이 줄어들었다.
표충사는 절이면서도 유학의 의미들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6월의 햇님이 꼬리가 길어서 얼른 떠나지를 않는다고 하지만, 그 햇님도 서쪽 능선 위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표충사를 벗어나서 밀양 인터체인지까지는 금방이었다. 고속도를 만나니 차의 속도가 빨라진다. 이내 어둠살이 길바닥에 내려 않는다. 아내나 나나, 노년이 되고 나서 우리는 늘상 빠른 속도를 느낀다. 종착지인 대구가 가까워지니, 차의 속도도, 해가 가라앉는 속도도, 모두가 빨라진다. 우리 부부가 빠름은 느끼는 것은 우리도 종착지점이 가까워져서 일 것이다.
2023.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