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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형제님
집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게
지혜로운 것일까?
충돌을 피해서 안 가는게 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까?
아도나이 자매님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기도하며 가고
또 가면 악한 영의 세력이 무너질 날이 올것이라 여긴다.
제사날이 아닌 다른 잔치날에 교류하며 찾아뵙는 것도 좋을 것 같다.
ApostlePaul 자매님
한 발 양보하면 또 다른 발을 양보하도록 강요당할 수가 있으니까
물러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겠다.
paul21 형제님
제사에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네가 집안의 기업을 물려받고
경제적 이득을 더 취하려면 집안에 들어와야지
왜 예수쟁이가 되어 그러고 있냐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파수꾼 형제님
호다는 돈을 중요시하게 여긴다. 열심히 벌고 저축하라고 한다.
paul21 형제경우처럼 돈 유혹이 제일 먼저 오지 않는가.
내가 경제적으로 풍요하면 아무 문제 없지만
굶주리면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 큰 문제이다.
유혹과 시험에 가장 큰 부문은 돈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도 돈에 대해 자유할 수 없는데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의 성공을
성도 숫자, 교회 크기, 재정으로 평가를 받는다.
미국교회는 선교후원금을 주고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교회가 직접주지 않고 각 교단선교부에서 후원하여
한국에서처럼 교회에서 목사님이 바뀐다고 선교후원이 끊어지거나 변화되는 일이 없다.
미국이나 유럽교회에서 변함없이 재정 후원과 혜택을 많이 입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초창기 기독교선교로 인해 병원, 교회, 학교 등 혜택이 많이 주어졌다.
우리는 돈에 자유할 수 없고 먹고 사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에 기독교와 카톨릭이 많이 퍼저 있어 외형적으로 발전은 했으나
초창기때 처럼 순수성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안타까움이 든다.
지난주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보며 하나님아버지의 마음과 계획, 애틋한 심정을 보았고
오늘은 사랑을 받는 대상자 입장인 양, 드라크마, 두 아들의 입장과 상태, 처한 상황,
친밀성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지길 원한다.
현재 예수님이 누구와 같이 있는가?
-세리와 죄인들 곁에 계시다
죄인은 누구를 일컬는다 했는가?
우리 입장이 아닌 유대인 입장에서 본 죄인이란 누구인가?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 율법에서 벗어난 자, 부도덕적인 생활을 하는자, 불명예스런 직업을 가진 자듵, 즉 창기와 세리들, 도적질 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속이는 자들, 목동, 행상인까지도 죄인취급했다
예수님이 이 죄인들과 같이 계신 장소가 어디인가?
보니까 무대가 사마리아라고 되어 있다.
말씀을 강론하시다가 허기지셔서 그들과 같이 먹는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업신여김 받은 자들과 식사를 많이 하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 조차 금기시하고 있어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상대하는 것을 보고 코너로 몰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하시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닫혀 있어서
비유로 설명을 하신다.
양의 속성이 어떨까?
-두려움이 많고 눈도 잘 안보인다,
근시안이라 한 마리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줄줄이 떨어진다,
목자 없이는 양이 있을 수가 없다.
개나 말은 거리가 멀어도 주인을 찾아가고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한다.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늑대는 먹이 냄새를 수 km밖에서도 맡고 찾아간다.
그런데 양은 특징적으로 풀냄새도 못 맡고 풀을 찾아서 가지를 못한다고 한다.
아도나이 자매님
성경에서 목자없는 양같다고 마음 아파하시고 우리를 양으로 표현한게
우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다.
파수꾼 형제님
양을 표현할 때 미련하다.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다.
자기 먹을 풀을 찾아가지 못한다. 고집스럽다. 둔하다고 한다.
그런데 양이 어떻게 되었나? 길을 잃었다.
왜 양이 길을 잃었을까?
성령의 불 자매님
보통 양 3마리에 염소 1마리를 섞어서 키운다고 한다.
목초지에 올라갈때 목자가 앞서고 영리한 염소가 따르는데
양은 염소를 보고 따라 올라간다고 한다.
먹을때도 양은 뿌리까지 다 뽑아먹어서 다음 해에 자랄 풀이 없게 만드는데
염소는 잎만 뜯어먹기 때문에 양이 염소를 보고 똑같이 따라 먹는다.
양이 편히 먹이를 먹을수 있는건 목자가 나팔소리를 계속 불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들려주어 그럴수 있다는 거다.
도살장에서 양이 얌전히 있는 것도 너무 무서워서 정신을 완전히 놔버려서 그렇다고 한다.
혼자 제 갈길로 간 양은 똑똑한 양이었나? 그 생각이 들었다.
파수꾼 형제님
성경에 양이 나온 여러 구절을 보자.
[이사야 53장 6 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갔거늘이라는 말씀이 양의 속성중 하나라는 것을 본다.
[에스겔서 34장 12절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양은 근시안의 특성상 앞의 양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나팔을 불어주지 않은면 다 제 갈길로 가는 거다.
그리고 개나 말처럼 돌아오는 게 아니라 미련해서 그 길이 맞는줄 알고 계속 이탈한다.
풀있는곳으로 가면 다행이다.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니 물을 찾으러 3일 길을 간다.
초지도 많지 않아 계속 양을 몰고 풀 찾아 돌아다니는 목자의 수고가 있다.
나는 잃은 양처럼 잃어버린 신세다. 또는 그런 모습이였다 하시는 분?
성령의 불 자매님
예전에는 돌진적이고 삶과 사람과의 관계성에 똑똑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정내에서 지시하고 리더인 것처럼 행동했다.
예수님을 믿고나서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알게 하신 게 감사하다.
예를 들어 아무리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고 똑똑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순리와 법칙에서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권위에 순복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로마서를 읽어보니
권위자를 두신 이유는 나를 바른길로 가게 함이고 권위자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신다.
가정의 체계가 바뀌면서 아이들이 밝아지고 변화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옳다고 여기고 내 길로 나갔을때 원인 모를 병까지 얻어서 돌이키게 되었는데
나를 안아주시고 옳게 이끌어 가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얼마전에 쓴 간증이 열매를 잘못 맺어도 붙어있기만 하면 다른 가지에 얹혀서
열매를 맺도록 도와준다고 썼다.
예수님께 붙어있고 목자의 음성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감사임을 깨닫는다.
파수꾼 형제님
양의 속성 중 하나가 벌러덩 뒤집어지면 못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다 죽는다. 그래서 목자가 할 일이 참 많다.
또 나는 이런 양의 모습이 있었다 하는 분?
주님의 백합화 자매님
말씀하신 모든게 다 나의 얘기였다.
20살에 뛰쳐나가 13년만에 돌아왔는데 돌아올려면 빨리 와야지
오래 나가 있어서 영이 죽을 때까지 다 죽어 목자의 음성을 못 들을 정도까지 갔다.
양의 속성 중 고집이 쎄고 자기 길이 맞는줄 알고 멈추지 않고 가는데
내 경우 '이게 맞아 이걸 믿고 살꺼야' 할 때마다 벽을 딱 만드시는게 느껴졌다.
'결혼해서 남편 믿고 살꺼야, 돈 믿고 살고 내가 돈 벌꺼야, 내 몸 믿고 살꺼야'하는 모든 것에
벽을 다 쳐서 숨쉴 구멍도 없었는데 마지막 숨쉴 구멍이 한 번 있을 때 터져 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사방이 막혔던 그 때 이 길만이 보여서 안거지 그렇지 않고
안 막으셨으면 끝까지 여기가 맞아 하고 길을 못 돌렸을 것이다.
파수꾼 형제님
양이 길을 못 찾아 뱅뱅 돌때 목자가 양을 찾아와 주었다.
또 나는 이런 양이다 하는 분, 실패담 가지셨던 분?
드라크마는 자기가 발이 있어서 갔나?
아도나이 자매님
결혼전 예물로 받은 드라크마를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파혼당할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온 집안을 다 찾았던 걸 알았다.
이스라엘에서는 달란트, 로마에서는 드라크마라고 불리운 동전인데
예물로 받으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목걸이로 만들던가 머리에 장식품으로 했다.
파수꾼 형제님
드라크마(은전)만 생각하면 이게 어디에 숨어 있었나?
집안에 있었다.
여러 해석과 풀이가 있는데 은전인 드라크마는 사물이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만약 은전을 의인화시키면 은전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할까?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고 했으니까 어두운데서 먼지에 덮여 숨겨있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잊혀져서 색도 바래서 은전으로서 가치도 떨어지고
녹슬어서 빛도 안나는 존재이다. 잊어버리고 잊혀졌다.
은전 자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마치 죽은 것 같은 존재이다.
아무도 생각못한 무가치한 상황이라 보여진다.
영적으로 재해석하면 본인 스스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누가 은전을 위해 일해주는가?
여주인만이 은전의 가치를 알고 일해준다.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비유해서 얘기하시는가?
그 당시 지탄받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고 스스로 죄인인 것을 알았겠는가?
스스로 거기서 헤어날 수 있는가?
빠져나올 힘이 없고 인정도 안해준다.
건져주기는 커녕 무가치하고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양은 제 길로 열심히 가다가 잃어버림이 되었지만
드라크마 처럼 자기 스스로도 어쩔수 없는 경우 부모로부터 낮은 신분을 물려받았든지
그런 상황에 던져져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 하신다.
마지막예화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이 아직 장가 안갔으니까 15-20세 미만 이라 얘기한다.
설정에 아버지가 돈이 많다. 둘째 아들은 무엇을 하고 싶어하나,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자.
방탕기도 있고 불순종의 영도 있다.
대비 자매님
성경에 아버지만 있는데 탕자의 어머니를 생각해보았다.
내 경우 객지에 나와서 생활을 하는데 어머니가 스덴 밥그릇에다가 밥을 넣어놓고
아랫목에다가 두고 해가 지나 다음날이 되면 그 밥을 먹으셨다고 들었다.
집 떠나있는 자식들 생각에 그렇게 하셨단다.
탕자가 돌아왔을때 큰 아들이 불평을 했는데 내가 큰 아들을 계속 다독거리고 있다.
'탕자는 그래도 니 동생이지'라고 말하는 모습이 마음에 떠올랐고
또 탕자를 생각하니 그 탕자를 뱃속에 품고 있었을때 얼마나 기뻐했었고
집을 나갔을때 얼마나 아파하고 기도했을지 그 상황들이 생각이 났다.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있는데 탕자와 관련된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탕자를 안은 어깨에 한 손은 우직한 남자 손인데 한 손은 고운 여자 손이었다.
내 생각에 한 손은 아버지의 손,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인것 같았다.
렘브란트는 카톨릭 신자이고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이 돌아온 탕자의 그림이였는데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림에 여자 두 명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다.
큰 아들의 표정은 매우 무표정하다. 그 그림에 부모의 마음이 너무나 많이 느껴졌다.
성경에 엄마는 등장하지 않지만 내가 항상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화가도 엄마를 표현해놨다.
그림을 다 어둡게 그려놨는데 탕자를 안은 두 손은 빛이 강하게 그려놓았다.
화가가 왜 두 손을 강하게 표현했을까?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엄마를 표현하기 위해 그러지 않았을까 여겼다.
파수꾼 형제님
아버지를 속썩힌 탕자의 마음속에 깔려있는 욕망, 반항을 표현해 보자.
썩은 밀알 자매님
탕자가 둘째 아들이고 자신에게 상속권이 없으니까 큰 아들보다
아버지 눈치보는게 적었을꺼 같다.
크면서 아버지밑에 있는게 구속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내 경우 성인이 되었는데도 집에는 통금시간이 있어서 구속감에 반항심이 들었다.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것 같았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것이 해를 끼칠려고 한 게 아닌데도 구속으로 느껴졌을것이다.
깊이 생각하다 알게 된 것은 돌아온 아들이란 표현에서 탕자가 자기 의지를 드린 것 같은데
이걸 통해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왔어도 아버지가 죽일 수도 살릴수도 있으니까
나를 죽이고 살리는 것도 하나님께 있다를 알수 있고
은전도 주인이 찾고, 양도 주인이 찾았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줄 알았는데 3가지 비유를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찾으셨구나를 깨달았다.
사랑의 증거 자매님
나는 8남매중 막내이고 어렸을 적에 물려받은게 많아서 내 것이 별로 없었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새 것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됨을 알았다.
큰 자녀들은 장자니까 대우를 잘 해주는데 상대적으로 둘째들은 그만큼 못 받은 것에 대해
욕심이 있고 상대적 열등감을 갖아 장자만큼 받고 싶어한다.
그만큼 부모가 채워주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이 커서
탕자가 다른 것을 찾을려고 하지 않았을까 라고 내 경험으로 생각해보았다.
부모로부터 자유함이 더 있지만 반면에 욕심, 갈망함이 더 클것 같다.
대비 자매님
나도 딸 다섯에 둘째인데 언니와 동생사이에서 항상 양보하고 희생을 했다.
학교에 다닐때 언니와 동생이 하숙을 하면 나는 자취를 하고
옷을 입어도 언니꺼 물려입고 둘째로서 받은 혜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받은 혜택은 없었어도 열심히 생활하니까 부모님의 신임을 가장 얻었던 것 같다.
성령의 불 자매님
내 생각에는 대비자매님이 둘째라서가 아니라 저 자녀가 그럴만하니까 믿었던 것 같다.
예화로 딸인 예지는 시키면 빨리 해주니까 아들인 예찬이보다도 심부름을 많이 시켜서
입에 예지이름이 붙었는데 하루는 예지가 울면서 자기만 심부름시킨 것을 얘기해서 사과한 적이 있다.
자녀가 어려도 신속히 하고 잘 해주고 감당할만 하니까 신뢰가 가는것 같다.
나이가 어려도 신임이 가고 엇나가지 않을 것을 믿고 나의 상황을 이해해줄 자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장녀였는데 유교가정이어서 밥도 무릎꿇고 먹었다.
성격이 자유분방해서 지나가면 물이 엎어지거나 깨지거나 했고 탐구능력이 왕성했다.
호기심도 커서 물건을 분해하고 살펴보고 하니 집에서 나를 힘들어 했다.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서 학창시절에 파마도 하고 싶고 화장도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 이해를 못해주니 집을 나갔었다.
집에 다시 돌아왔을때 동생이 내게 하는 말이
나도 언니처럼 하고 싶었는데 힘들어하는 엄마 때문에 참았었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고 못하게하는게 구속이라 생각했고 내가 사랑받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집을 나갔다.
만약에 어떤 구속과 엄격함이 있었어도 기본적으로 부모님과 나의 관계속에 신뢰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았다면 아마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학생시절에 아버지가 해외노동자로 파견나가 일하시고
어머니가 자녀를 키우시는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구속하려고만 한다는 반항심이 들었다.
파수꾼 형제님
탕자의 심정을 잘 표현해 준것 같다.
아마 둘째 아들이 해보고 싶었던게 많았을 것 같다.
큰 아들은 마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행실로는 모범생이었고
둘째 아들은 그런 형을 보면서 질렸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부자인데 자유롭게 살면 안되나?
모험심과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다.
아버지가 부자니까 풍족하게 살고 밖에 나가면 더 재미있는게 있는 것 같고
체험할 것도 많을 것 같고 새로운 문화를 접해보고 싶을 것이다.
만약 가난한 집 아들같으면 하루 먹고 사는게 코앞인데 위의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탕자같은 경우 너무 풍족하니까 삶이 무료하고 그렇다고 자신이 일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동경하였을 것이다.
둘째 아들의 마음가운데 가족을 떠나서 재산으로 다른 삶을 즐기고
또 가져간 돈으로 한 판 큰 돈 벌여서 더 부자가 되어 아버지께 돌아가야지 하는 맘도 있었겠다.
둘째 아들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큰 아들이 들었을까?
흥청망청 즐기고 망해서 온 소식을 알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들었을까?
아버지는 탕자에게 유산을 미리 상속해준 그 순간에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자기 몫을 달라고 한 것부터 상식에 벗어나고 또 그 유산을 탕진할 것도 어느정도 짐작했을 거다.
만약 아버지가 탕자를 믿었다면 동네 어귀에서부터 매일 탕자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보면 아버지는 아들의 속성, 성격, 기질을 다 알고 있었다.
이기는 자 형제님은 유산을 100억 받으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요?
이기는 자 형제님
만약 로또가 당첨된다면 일부는 비자금으로 해놓을까 생각도 해보고
차도 사고 집도 사겠다. 제일 하고 싶은건 여행이다.
일부는 사업도 구상하겠다. 사람도 만나고 친구도 많이 만나겠다.
다사랑 전신갑주 형제님
몇십억 생기면 예전에 했던 거 다시 해보고 싶다.
대학교때까지 교회에서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했었다.
사회생활하면서 d회사에 연봉을 많이 받고 들어가면서 세상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가 안들려서 말을 할때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얘기를 한다.
그러면 자매들이 본인을 좋아하는 줄 알고 내게 잘 넘어왔다.
돈을 많이 버니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신형 자동차를 사고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다가 안좋은 길로 빠지고 그 중에 도박에도 빠졌는데
술, 담배, 여자, 도박 중 가장 끊기 힘들었던게 도박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장어 파동이 나서 장어 가격이 급상승해 사업이 힘들어졌다.
세상 때를 다 묻히고 미국에 가서 여호수아 형제님을 만났을때
내가 더러운 것을 너무 많이 묻히고 있는걸 깨닫고 눈물을 많이 흘리며 내가 탕자였구나를 깨달았다.
파수꾼 형제님
탕자의 삶은 영화나 뉴스에도 나온다.
배우Y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결국에는 예수님없이 사니까 삶이 그렇다.
예수님을 떠난 대부분의 삶이 탕자라고 보면 된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없으면 대부분 삶의 모양이 탕자를 좇아 간다.
우리 마음 저변에는 이런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어느 것에 우리 마음이 더 가있는가
예수님이 세가지 비유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양들이 제 갈길을 사는 것처럼 아버지 그늘에 있기보다도
자기 욕망, 마음대로 살았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혼이 이끄는 대로 사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탕자를 통해 하고 있다.
우리 영이 누구에 의해 지배받는냐에 따라 혼과 육도 따라간다고 하는데
예수님이냐 사단의 지배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남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자들 안에도 그 안에 욕망이 크게 작용한다.
여기 앉아계시는 분들은 그 욕망을 예수님때문에 없애셨든지 누르고 계시든지
다 뽑아버렸든지 하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걸 듣는다.
세상사람들이 이야기하는걸 들으면 물욕과 정욕에 끌려사는 이야기뿐이다.
목자의 음성을 못 듣고 제 갈 길 간 어린 양,
제 의지와 관계없이 버림받은 은전,
자기 욕망에 끌려 가는 탕자.
그런데 아버지는 이 사람들을 한 명도 잃지 않고 찾고 계신다는 것을
큰 아들같은 바리새인에게 얘기하고 있다.
큰 아들이 누구인가? 아버지 말씀을 열심히 지킨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가 주인과 종과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을 얘기한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어울리는게
내가 목자가 되어 그 사람을 만나고 부르러 왔다고 얘기하는 거고
자기가 잊혀졌는지도 모르고 죽은 목숨처럼 사는 은전같은 사람들, 죄인중에서도 창기들,
둘째 아들같이 욕망을 택해서 다른 길로 간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고 계신다.
우리 안에 현재일 수도 있고 과거일 수도 있고 다 이런 모습들이 각각 있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온 상태보다는 예수님이 직접 찾으셨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탕자가 스스로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궁핍한 상황에 처해있으니까 알았지 승승장구 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탕자 스스로 다시 돌아오도록 마음을 부어주셨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관심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본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 마음, 욕망을 다 보고 계신다.
보호와 주목하심 아래서 예수님이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순간순간 보호하심 속에서도 가끔 의심들거나, 소외감, 외로움을 안 느낀다고 할수 없지만
그 때부터는 우리의 몫인 것 같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신 후에 소외감을 느끼느냐,
친밀감을 느끼느냐, 보호하심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우리의 몫인 것 같다.
아까 여러 자매님들이 간증했듯이 방황을 접고 되돌아올 시기를 느꼈다고 했다.
그 때가 예수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터치해주신 것이다.
그 시기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시기다. 그 시기를 우리 스스로 아는가?
우리가 알도록 마음에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상태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포도주 자매님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왔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찬양을 좋아했었는데 서울로 올라와서는 교회를 딱 끊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의문이 들며 알바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어느 날 금요일에 나도 모르게 교회에 찾아갔는데 마침 집회중이었고
신기하게 말씀이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근데 그게 둘째 아들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어디에 계실까 그리웠던 것 같다.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까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왜 나를 안도와 주시는거야?
다른 친구들은 알바 안 해도 공부할 수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알바까지 해야되지
쭝얼거리고 계속 갈등이 일며 하나님을 찾았다.
큰 아들은 매일 보는 아버지가 하나도 안 그리웠을 것 같다.
있으니까 좋다좋다 하는 마음만 들었겠다 여겼다.
주님의 심장을 가진자 자매님
큰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비슷한것 같고 내 경우는 큰 아들이었다가 둘째 아들이었다가 한다.
큰 아들의 마음도 되었다가 둘째 아들의 마음도 되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성령의 불 자매님
큰 아들, 둘째 아들을 봤을 때 각자 자기들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공급자이신 아버지에 대한 살핌도 없다.
공급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소중함을 느껴서 아버지 마음을 생각할수 있게 되었을 것 같다.
호다에 오면서 설교를 듣고 왔는데 완악해졌다는 말이 살이 쪄서 몸이 둔하여졌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마음이 없고 풍족하니까 감사함도 별로 없는 부분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이미 갖고 있고 누리고 있고 주님이 다 주시고 생명까지 주셨는데
문제는 우리가 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있고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인 것 같다.
파수꾼 형제님
호다에 친형제, 자매가 오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겠다.
아이 된 자 자매님
호다에 온 것이 감사하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잘 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호다에 언제 오나요?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시기질투가 아니라 안타까움에
저 사람들은 왜 빨리 못 쫓아오나요? 질문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내가 감사를 잊고 뭐가 좋은지 잊고 있었단 깨달음이 들었다.
k세미나에서 교육이 있어서 1박을 하고 호다로 왔는데 그 곳은 4년동안 1달에 1번씩 간 곳이다.
5년만에 다시 가서 좋았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데
'내가 과거를 다 잊었구나'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k세미나를 다녔을 때는 고통가운데 다녔기 때문이다.
집에 가기가 너무 싫고 지옥같았다.
근데 오늘은 천국 지옥 할 것없이 누리고만 왔다.
거기 가면 과거에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하고 뭔가 떠오르고 그래야 되는데
오늘 왜 이렇게 자유롭지?하는 이 마음조차도 없었다.
과거를 다 잊어버렸구나, 내가 언제 고통을 당했었나? 힘들었나? 생각조차도 없고 누리고만 왔다.
그래서 감사만 하고 왔구나, 여기 앉아있는 것도 감사구나 알아졌다.
정말 내가 치유가 많이 되었고 다 치유해주셨구나. 큰 게 다 해결되었구나.행복하다.
그리고 동생 주향기 자매와 호다에 같이 나오는데 사실 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호다에 있으면서 주님이 동생에 대한 사랑을 다 부어주셨다.
그래서 주님이 너는 평신도고 네 동생은 기름부은 종이야 라는 마음을 주셔서 동생을
목사님으로 보는 시각으로 올해 바꿔주셨다.
주님이 너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목사님을 내 동생으로 주셨네 라는 감격이 들었다.
계속 동생의 좋은 점만 보게 하시고 예전에 볼 때는 쟤는 '주향기야'이랬는데
지금은 '목사님이야'라고 타이틀이 바꼈다.
서로의 사이에 찌꺼기가 없고 주님이 다 태워버리신거 같다.
주향기 자매님 (아이 된 자 자매님 동생)
언니는 타이틀을 말했지만 나는 언니를 보면 함께 있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어떤 상황이 생기거나 얘기할 일이 있을 때 멘토라고 언니에게 말하면
아! 멘토는 거절한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멘토 같은 분이다.
서로 애틋한 마음이 있다.
영적인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데 같은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행복하다.
파수꾼 형제님
본문 성경에 나오는 큰 아들, 둘째 아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과 갈등이 있다.
그 해결책을 두 분 자매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
큰아들과 둘째아들과의 관계가 먼 것에 대해서
율법학자들에게 너희가 말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둘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랑을 똑같이 주는데 형제간에 둘째 아들도 형에 대한 불만으로 뛰쳐나간거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성품이 포악하지 않고 유산을 달라면 줄 줄 알고 달라고 했고
엄격하고 말도 못 붙일정도의 성격이라면 달라고 말 못했을 것이다.
율법학자와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건
너희들이 큰 아들이고 둘째 아들인데 너희들끼리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랑할수 없겠냐는 것,
또 아버지는 잘한다고 생각하는 큰 아들이나
죄악된 몸으로 떠나 있고 멸시받는 둘째아들이나 똑같이 사랑한다는 거다.
나중에 이 형제가 화해했겠는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화해했을꺼라고 하신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가 맺어야 된다. 예수님은 예화를 통해 화두만 던지셨다.
화답을 해야하는건 우리다.
오해하고 떠나버렸던 자녀들이 화해하고 아버지 사랑안에서
하나 된다고 결말을 이끌어가시지 않겠는가?
순종 Kim 형제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이 장자인 내게 그대로 전부 부어질 것이라는
자신감과 확신에 가득차 있지않았나 한다.
그런데 방탕하게 살고 온 동생의 소문을 듣고선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내쳐버릴꺼라 생각하고,
재산도 자신이 전부 차지할꺼란 욕심도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평소에 적극적인 사랑표현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뜻밖에도
탕자에게 사랑을 부어주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
성경에서 보여지는 큰 아들의 모습인 것 같다.
장자는 책임감을 가지고 성장하고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자란다.
내 경우 어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부분을 동생들에게
흘려보내야겠다라고 중학교때부터 생각을 가졌다.
파수꾼 형제님(순종 Kim 형제님 동생)
6-70년대 어려웠던 시절에 장자들의 희생이 컸고 부모님 역할을
동생들에게 했던 때가 있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 집이 부유해서 이 예화와 결부시키기는 그렇지만
영적인 상황을 비교해서 말씀하셨다.
내게도 친형님인 순종Kim 형제님이 삶의 멘토가 되신다.
형제간에 영적인 소통도 잘 되는것 같다.
형제사이에 복음이 들어가려면 먼저 관계성이 좋아야 한다.
관계가 끊겨 있으면 복음이 안들어간다.
어떻게든 관계를 붙잡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언제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복음이 들어가는데 관계가 안 좋은면 뒤끝이 있어서 그때 나한테 잘하지. 이제야? 한다.
그게 복음이 들어가는데 걸림이 된다.
핍박받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관계를 끊지 않으면
어느 순간 진심이 들어가고 복이 들어가니 관계를 절대 끊지 말라.
상대방이 나를 안 좋아한다고 안가면 나중에는 들어갈 틈이 없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형제간에 의절하고 부모님, 시부모님과 관계 끊으면
교회가서 기도할 때 뭐라고 하겠는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특히 부모나 형제 관계는 핍박을 받더라도 끊으면 안된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관계를 끊으면 복음을 언제 전하겠는가?
예수님은 끊어진 관계들을 회복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개개인이 적용하고 더 깊이 묵상하자
썩은 밀알 자매님
본문에 나온 형제들은 각자 사랑의 기준이 달랐던 거 같다.
둘째 아들은 구속이 싫어 떠나고 첫째 아들은 장자는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불만이 있었다.
얘기를 듣다 생각나는 분이 있는데 남매 둘을 키우는데 이 둘이 사이가 너무 좋다.
그래서 비결을 물으니 키울 때 첫째에게
"동생이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얘는 혼자서 밥도 못먹어서 내가 이렇게 주는거야"하고
둘째에게도 가서
"너는 막내인데 오빠가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이래서 남매가 각자 부모님이 자기만 너무 사랑해, 쟤 너무 불쌍하다,
생각이 들 정도로 해서 엄마가 오빠나 동생에게 저 정도 해줘도
괜찮아 하는 마음이 들게 했다고 한다.
나는 너무 사랑을 받고 있는데 쟤는 사랑을 못 받고 있구나. 불쌍하다. 여기게 했다.
순종 Kim 형제님얘기를 들으며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동생에게 그렇게 해줘야 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 얘기가 떠올랐다.
나도 하나님께 불평이 있고 피해의식이 들때면
하나님 저 사랑하셨잖아요,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잖아요하는데
하나님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이나 느낌이 들 때는 내 기준을 들어서
하나님이 날 사랑하면 이렇게 해 줘야지, 그렇게 해줬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과 친밀감이 클 때는 불평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가 잘 되는 것을 보면 불만이 생기더라도 하나님 사랑이 크게 느껴지면
괜찮아, 쟤 잘 되어야 해. 그렇게 된다.
내 사랑에 기준이 있었고 몰랐던거구나를 알았다.
파수꾼 형제님
우리가 사랑을 보이느냐 안보이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냐 신부이냐 드러난다.
사랑을 받아 누리고 체험했으면 되돌려 주는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명령이고 가르침이다.
어려운 자녀에 대해서는 더 관심과 마음이 가는것을 이야기 하신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주변 사람을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셨다.
우리는 미리 선택받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니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 평가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사랑의 눈으로 본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보고 포용하라고 하시는 것 같다.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 자매님
나는 엄마 말 안듣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사람으로 자랐고
4살 밑의 여동생은 엄마말도 안듣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장자고 동생은 탕자같은 애야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엄마와 동생이 미국에 가서 살면서 동생이 엄마를 힘들게 하고 본인도 힘들어하고
하나님께도 날 어떻게 해봐하고 도전적으로 방황을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동생 간증쓰는 것을 지켜보면서
얘는 나보다 더 확실하고 간절하고 주님께 매달리는 애구나 마음이 들다가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모범생으로 자랐는데 그럼 난? 하는 의문과 함께 비교의식이 들었다.
다행히 서운함이 들었던게 이번에 미국 가면서 많이 풀렸다.
나도 예수님 사랑 체험하고 그 사랑이 나에게 들어오니 괜찮았다.
동생이 소리지르고 부르짖어 기도해도 자랑스럽고 좋아서 그걸 왜 이제야 알았지! 했다.
동생이 아름답고 귀한 걸 알고 바뀌게 되면서 동생에게 넌 엄마를 힘들게 했던 아이야
하고 야속하게 생각했던 부분도 인간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내가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하며 동생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파수꾼 형제님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가기 전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의 모습에
아버지가 껴안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두 아들도 아버지 사랑에 흠뻑 젖으면
두 사이도 화해가 될 것이다. 그 후의 스토리는 우리 몫이라는 거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것은 아버지는 너나 네 동생이나 똑같애. 다 네 꺼야. 누리고 살면 돼.
그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흘려보내는 것이 장녀나 장남의 특성이 된다.
그 사랑이 큰 아들에게 들어가면 동생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백합화 자매님
작년에 사랑의 증거 자매님과 이 돌아온 탕자와 큰 아들얘기를 많이 나눴었다.
사랑의 증거 자매는 30년간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고 나는 세상에서 다 놀고 왔는데
아버지 사랑이 너무 새롭고 좋아서 감정 표현이 컸을때
사랑의 증거 자매의 반응이 "응, 그렇지"하며 덤덤했다.
모르는게 있을 때 물어볼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와 오래 있었던
사랑의 증거 자매밖에 주위에 없었고 또 잘 들어주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잘 모르는 자매를 보고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 때 호다에 왔는데 자매에게 30년 신앙내공 무시할수 없어 라는 말도 들었는데
나도 탕자였던지라 상황에 마음이 흔들릴 때
막상 또 잡아주었던 사람은 아버지와 같이 있던 큰 아들같은 사람이었다.
서로 나누면서 같이 성장하고 있구나 같은 공동체에 있게 하신게 감사했다.
성령의 검 자매님
사람들은 나를 참하게 본다. 학생때도 열심히 티 안나게 놀면서 공부했다.
동생인 물 댄 동산과는 기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현실적인 부분이 컸고 동생은 감성적인 부분이 컸다.
아들 하원이를 임신하면서부터 같이 동생과 살게 되었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대화도 잘 안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아버지가 신문배달을 자녀인 우리들에게 시켜서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호다에 와서도 동생보고 '쟤는 이상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 이랬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안쓰러움이 동시에 올라왔다.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것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고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고
쟤 안에 보석같은 좋은 부분이 많은데 드러나지 않고 사용되어지지 못할 때 화가 나는 부분도 있었다.
동생을 사랑하고 귀하게 보는 마음과 저건 안그랬으면 좋겠다는 판단의 마음을
동생의 기질을 알고 있었기 떄문에 굳이 말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생에게 일하시고 그 과정에서 내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긴장하며 사는 모습도 보게 하셨다.
주님이 같이 보완하시며 내가 물 댄동산을 통해 배워야 할 점들,
물 댄 동산이 성령의 검을 통해 배워야 할 점들에 관해 많이 일하셨다.
얼마전에는 하나님이 마음을 주셔서 동생에게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동생을 보며 속으로 '이건 아니지'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나도 영이고 너도 영이기 때문에 알았을꺼야' 하며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 날 이후 잔여물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어서 서로 더 편해졌다.
그리고 동생이 내 말을 잘 들어준 것이 깨달아져서 감사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보화같았던 귀한 것들을 서로 돕고 격려하는 상태가 된 것도 감사했다.
아들인 시온이에게도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 .
평상시 부모님께 힘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어서 상처가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호다에서 기도할 때 무의식 중에 아빠에게 힘들었던 기억이 많이 올라왔다.
그 상처가 결혼생활을 하며 부모님을 이해하는 부분이 많이 생겨서 너무 고마웠다.
나는 예수님을 만나도 이렇게 힘들 때가 많은데 아빠는 예수님도 부모님도 없이
고아와 같이 살았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저절로 치유될 수 있었다.
아빠가 가끔 전화를 해서 "네 (하나님)아버지가 돈 많이 줬지? 돈 좀 보내주라"할 때가 있어서
내 처지를 도와주지 못하고 달라고 하니까 어쩔땐 속에서 화도 났다.
10월 30일날 이사를 하는데 이태껏 이사할 때 부모님을 부른 적이 없다가 이번에 모셨다.
부모님을 통해 이사를 돕게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했는데 나머지 안좋은 잔여물도 무릎꿇고
사과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해야되겠다 결심했다.
무릎꿇고 사과하는게 오바인것 같았는데 무릎꿇고 고개 숙이고 사과하는게 정말 다름을 체험했다.
내 영이 육에 담겼기 때문에 동생에게 했을 때 정말 존경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했다.
호다 오기전에도 남편기도를 많이 했는데 8개월간 천국같은 삶을 살다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힘도 안 나고 뭘 기도해야 될 지도 몰랐다.
그 때 여호수아 형제님말씀이 너나 신경써, 다른 사람 기도하지마 이런 거여서
오히려 그말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아니면 내가 기도하지 않았서 그랬다는 죄책감에 묶였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는 남편 기도하며 많이 우는데 내 남편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그 사람안에 주님이 보물로 주신게 너무나 많은데 본인이 그걸 잘 모르니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쓰고 사용하시라고 기도하게 하신다.
물 댄 동산 자매님 (성령의 검 자매님 동생)
항상 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언니를 되게 많이 사랑한다.
초등학교때 수업이 끝나면 항상 먼저 가는 곳이 언니 교실이었다.
창문에 매달려서 언니가 언제 끝나나 보는데 언니 담임 선생님이 안쓰럽게 여기셔서
내 책상을 교실 뒤에 마련해 주셨을 정도 였다.
언니 모습을 보면서 뭐든지 열심히 하고 잘 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늘 든든했다.
내가 언니를 많이 사랑했다는 추억을 옛날부터 많이 끄집어 내게 해주셨다.
중학교 때 언니가 고등학교 진학으로 도시로 갈때 그 시간부터 혼자 많이 외로웠다.
이별이후 단절된 느낌과 갇혀진 시간들이 있었다.
중학교 이후 같이 산 적이 없다가 호다에 와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너무 떨어져 있었고 대화와 소통이 없어서 언니가 많이 힘들었던거 같다.
5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지내게 하시면서 호다에 나와서 있는 시간동안에
언니가 든든한 동역자라는 것을 많이 말씀해 주셨고
하나님은 베스트로 주시는구나의 심정으로 언니가 있어서 좋고 감사할 것이 많다.
날 이해해주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언니에게 잘 해주지 못한 점도 걸리고
지금은 언니 자체로 너무 좋고 조카들도 좋다.
왜 하나님은 더 좋은 가정에서 날 태어나게 하지 않았지 의문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만나게 하셨고 이렇게 영적인 자녀로 동역하라는 부분이 감사하다.
파수꾼 형제님
성경에서 회복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가능한 것을
우리들의 얘기를 통해서 확인하고 공감할수 있었다.
또 표현 못한 부분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관계가 회복 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귀한 나눔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론 성령의 검과 물댄동산 자매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같이 살게 되었는데
내 경우는 큰 형님과 28년간 같이 살아서 이 또한 감사히 여겨야 할 부분임도 알게 되었다.
내가 평상시 관계를 잘 얘기한다.
살아오면서 터득되고 배우게 된 것이 관계가 끊어지면 회복하기가 많이 힘드니까
관계는 내가 끊어선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관계를 맺게 하시면 복음을 위해서 잘 유지해야 되겠다.
오늘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표현은 안하셨지만 마음으로 느껴진 문제와 갈등을 푸는
좋은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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