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후군
by.crazy…
"미안하네, 모수안 군."
"뭐가요? 괜찮으니까 좀 앉아있으세요."
"그럼 부탁 좀 하겠네."
교수님은 방금 전, 거실 바닥에 떨어트린 찻 잔 파편을 한 조각씩 줍고 있는 모수안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홧김에 든 불길한 생각에 한숨부터 나온 교수님은 모수안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박사님의 연구소에 모수안을 보냈다는 생각에 교수님은 죄책감이 크게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평소대로 행동을 하는 모수안의 모습을 보자 서글펐다. 차라리 자신에게 화라도 냈으면 이렇게 죄책감이라도 안 들었을텐데, 교수님 탓이 아니라며 다독이는 모수안 때문에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 그런 교수님의 심정도 모른 채, 모수안은 찻 잔 파편을 모아 쓰레기통에 우루루 집어 넣었다.
"교수님, 녹차 잘 마실게요."
"아닐세, 고작 녹차밖에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구만."
"뭐가 그렇게 미안한 게 많으세요? 제가 더 미안하죠."
모수안은 혹시라도 자신의 손에 찻 잔 파편이 묻어있을까 봐, 손을 탈탈 털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교수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일어선 채로 모수안은 녹차가 담긴 찻 잔을 들어올렸다.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았지만, 벌써 다 식어버린 녹차를 아쉽다는 듯이 쳐다본 모수안은 그대로 찻 잔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가 원샷을 했다.
알게 모르게 교수님과의 무거운 공기에 목이 탔던 모수안은 미지근한 녹차를 다 마심으로서 갈증 해소가 되었다. 텅텅 빈 찻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나서 모수안은 교수님에게 감사의 의미로 목례를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소파에 파묻었던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모수안은 갑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교수님의 행동에 흠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마주보는 교수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교수님은 직선으로 딱 마주치는 모수안의 시선에 굳은 입술을 움직여 겨우 말을 꺼냈다.
"박사와의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나?"
"솔직히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내가 자네라도 그렇게 말하겠어."
"그럼 교수님은 제가 내기에서 이길 것 같아요?"
교수님은 예상하지 못한 모수안의 당돌한 질문에 바로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조금이라도 시선이 빗겨나가지 않고, 자신을 올곧게 응시하는 모수안의 시선에 교수님은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것 마냥 착잡했다. 교수님은 모수안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수안의 내기 상대는 만만치 않은 박사님이었다. 비록 박사님이 대대로 연구소를 물려 받았다고는 했으나 전에 있었던 유능한 박사님들마저 아이들의 지독한 증후군을 고쳐내지 못했다. 그런 박사님과 비교를 해봤자 한낱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모수안이 3년 안에 아이들의 증후군을 고쳐낸다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확률이다.
물론 모수안도 아이들처럼 증후군에 걸리긴 했으나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증후군에 걸린 한 남자가 연구소에서 만나게 된 나머지 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을 치료한다라, 어떻게 보면 간단해보이는 이야기지만, 그 실체를 알게 된다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겠지. 자신도 모르게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한 머리를 털어내듯이 옆으로 흔들고나서 교수님은 모수안에게 각인시키듯이 말했다.
"솔직히 자네가 그 증후군을 고쳐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군요, 저도 사실은 알고 있어요. 무리일 수도 있겠다는 거."
"하지만, 자네가 박사의 실험체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고."
"……."
모수안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교수님의 말과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교수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한순간 자신의 눈 앞에 내밀어진 교수님의 손에 모수안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흘겨봤지만, 웃고 있는 교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교수님의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교수님은 자신의 손 사이로 모수안의 손이 잡히자 따스한 온기를 느끼는 것처럼 얼굴에는 온화한 웃음이 피어났다. 교수님의 활짝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본 모수안은 놀란 듯이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리고는 교수님의 웃음이 전염된 것처럼 칙칙했던 모수안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희미하게 지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갈 때까지 가보세나."
*
"어머, 박사님 괜찮으세요?!"
"음, 민경 씨가 옆에서 치료를 해주니 괜찮네."
"많이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예요."
"허허, 다치자마자 민경 씨가 먼저 생각이 나서 내 방으로 불렀네."
몇 시간 전, 회의실에서 모든 연구원들을 다 물리고나서 잠깐 모수안의 유혹에 눈이 혹했던 박사님은 그대로 모수안에게 속아 마이크로 얻어 맞은 후에 잠깐 쓰러졌던 자신의 한심함에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모수안이 혼자서 독백하듯이 지껄일 때, 정신이 돌아와 두 눈이 떠지긴 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박사님은 나서지 않았다. 나중에 올 큰 기회를 위해 그렇게 도망치듯 벗어나는 모수안을 잡지 않고, 놓아주었다.
어차피 3년 안에 모수안은 자신의 실험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박사님은 투명한 와인 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의 달콤한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넓적한 두 다리 사이에 끼듯이 앉아있는 연구원 김민경의 낭창한 허리를 한 손으로 잡아채 쓰다듬었다. 그러자 김민경은 자신의 허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박사님의 농밀한 손놀림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최대한 박사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도록 박사님의 넓직한 가슴 부근을 손으로 밀쳐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박사님의 손길에 김민경은 이런 상황이 내심 부끄러웠다.
"아이참, 부끄럽게 왜그러세요?"
"어허, 지금 날 거부하는 건가?"
"제가 어떻게 박사님을 거부하겠어요? 전 그저 사모님이 걱정되서."
"그런 멍청한 여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박사님은 자신의 품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바스락거리는 김민경의 굴곡있는 몸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을 시키고는 그대로 김민경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매마른 입술을 가져다댔다. 김민경은 갑자기 자신의 입술에 박사님의 온기가 느껴지자 약간 움찔했지만 깊숙히 파고드는 박사님의 입술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박사님은 두 눈을 감고, 자신에게 몸을 맡긴 김민경의 모습에 드디어 자신을 허락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박사님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아있던 김민경의 몸을 잡아채 두 손으로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박사님의 개인 방에 위치한 넓은 소파로 들고가서 김민경을 소파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한 순간 소파로 내던져진 김민경은 모서리에 부딪힌 자신의 허리를 부여잡을 새도 없이 자신의 몸 위로 박사님의 검은 그림자가 겹쳐지자 두 눈이 일렁일 정도로 커졌다.
몇 시간 전, 박사님한테 개인 호출을 받았을 때부터 뭔가 낌새를 차리긴 했었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닥쳐오자 김민경은 거부하고 싶을 만큼 꺼림칙했다. 강제로 소파에 눕혀진 김민경은 자신의 흰 가운이 벗겨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는 박사님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박사님은 미리 힘 빼게 하지 말라며 김민경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갔다.
"어차피 좀 있으면 힘이 빠질텐데, 미리 고생 시키지 말게나."
"이러지 말아요, 박사님!"
"어허,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구먼?"
"더 이상 제 몸을 만지시면, 사모님한테 다 말할 거예요!"
김민경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경고하듯이 날카롭게 외쳤지만 박사님은 어디 해볼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계속 와이셔츠 단추를 나른하게 풀어갔다. 어느새 김민경의 와이셔츠 단추가 다 풀려가고, 그 위로 속옷이 간간히 비치자 박사님은 입 안에 한가득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박사님은 그 전부터 모수안에게 풀고 싶었던 욕망을 계속 참아오다가 지금에서야 김민경에게로 풀 수가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솔직히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모수안이었지만 모수안이 어디 그렇게 쉽게 당할 인간이던가? 회의실에서도 많은 연구원들 앞에서 자신에게 망신을 주고나서는 나중에 뒤통수까지 때려 자신을 기절시키지 않았던가.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에 이가 빠드득 갈린 박사님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김민경에게로 손을 뻗쳤다. 김민경은 자신의 몸 위로 빠르게 다가오는 박사님의 검은 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김민경은 감은 두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줄은 알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말도 안되는 생각에 헛웃음부터 나온 김민경은 자신의 몸 위로 박사님의 손이 농밀하게 움직이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하기로 생각한 김민경은 마지막으로 박사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두 눈을 떴다.
그 순간 갑자기 굳게 닫혀져있던 박사님의 개인 방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기계가 작동하는 인위적인 소리에 흠칫 놀란 김민경과 박사님은 하던 행위를 멈추고, 열려진 문 틈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을 쳐다봤다. 박사님은 이런 상황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나타나자 주름으로 가득한 작은 두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더러운 짓 그만하시죠, 아버지."
*
"시체, 운전 좀 똑바로 해."
"그렇게 불만이면, 니가 하시던지!"
"넌 차에서 내리자마자 죽었어."
운전 면허증이 없는 유랑은 윤키아루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게 불만이면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하던가, 왜 자꾸 죄 없는 자동차의 부속품을 발로 짓밟고, 부수는지 모르겠다.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하던 유랑은 옆 좌석에 앉아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는 윤키아루의 난잡한 행동에 한숨부터 나왔다. 유랑에게 칭찬을 해도 모자랄 판에 비난부터 하기 바쁜 윤키아루는 갑자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밝은 빛으로 인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길, 벌써 날이 밝아오다니."
"무슨 문제있어, 멍충아?"
"넌 알 거 없고, 운전이나 계속해."
"하여간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렇게 날이 밝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아침이 다가오자 윤키아루는 뱀파이어 증후군의 특성인 날카로운 송곳니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안그래도 하얗던 윤키아루의 얼굴이 점점 창백한 색을 띄어가자 유랑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대로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자칫하면 앞에 있는 전봇대에 차가 충돌할 뻔 했지만, 유랑이 핸들까지 같이 꺾어버리자 위험천만한 사고는 겨우 면했다. 유랑은 자동차 앞 유리가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는 충격으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들어올려 유랑은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식은 땀을 닦아냈다. 유랑이 그러거나 말거나 예고도 없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세게 밟는 바람에 윤키아루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옆 창문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너, 너 미쳤냐?"
"아니, 유감이지만 난 정상이야."
"미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면 어쩌냐고!"
윤키아루는 아직까지 아릿하게 울리는 머리통을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마터면 시체같은 저 자식이나 자신이나 한 순간 골로 갈 뻔 했다는 사실이 윤키아루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윤키아루는 지금 자신의 머리통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혼자 고상한 척을 하면서 핸들을 잡고 있는 유랑의 행동도 눈에 거슬릴 만큼 짜증이 났다. 아직까지 자신의 말에 대답이 없는 유랑에게 윤키아루는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악을 써가며 외쳤지만 끝끝내 유랑은 윤키아루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말없이 유랑은 핸들에서 서서히 손을 놓고, 자동차 바닥을 손으로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기에 급급했다. 유랑이 무엇을 하던지 말던지 전혀 관심이 없는 윤키아루는 점점 더 강해지는 햇빛으로 인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더 이상 유랑에게 잔소리를 하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어진 윤키아루는 지끈거리는 자신의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그대로 자동차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시간이 계속 흘러갈수록 햇빛의 강도는 더욱 더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만큼 윤키아루는 햇빛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쩍 말라가는 자신의 몸에서는 수분을 갈망하고 있었다. 어느새 입 안이 다 말라버린 윤키아루는 매마른 입술을 달싹여 유랑에게 말을 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실패했다. 유랑은 자신의 옆에서 죽을 것처럼 말라가는 윤키아루의 모습에 마음이 초조해져 재빨리 손을 놀렸다. 아무렇게나 바닥을 헤집던 유랑의 손에서는 자그마한 물 통이 덥석 잡혔다.
"이것만 있으면, 저 자식이 다시 돌아오겠지."
"……."
"이 빌어먹을 놈아, 정신 차려!"
유랑은 점점 눈이 감기려고 하는 윤키아루의 눈꺼풀을 쳐다보며 물 통의 입구를 열어 그대로 윤키아루에게 물을 촤르륵 뿌렸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 탈탈 털어낸 유랑은 비어버린 물 통을 아무렇게나 뒷 좌석에 던지고나서 물에 젖어버린 윤키아루의 촉촉한 뺨을 사정없이 손으로 갈겼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증후군의 증상이 나타난단 말인가! 머리에서는 침착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막상 위급한 상황에 닥치자 유랑은 다급할 정도로 윤키아루의 양쪽 볼을 번갈아가며 세게 후려쳤다.
"멍청아, 빨리 눈 뜨라고!"
물로 인해 마찰력이 생겨 손바닥이 화끈할 정도로 아팠지만 지금은 윤키아루가 빨리 정신을 차리는 것에 대해 급급했다. 어느새 윤키아루의 두 볼은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붉게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키아루가 제정신을 못차리자 유랑은 최후의 수단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윤키아루의 부은 얼굴에 스트레이트로 주먹을 꽂아버렸다.
퍼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윤키아루의 얼굴은 반대편으로 돌아갔고, 유랑은 자신의 주먹에서 살갗이 까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안그래도 윤키아루의 날카로운 손톱 때문에 이미 뼈마디가 다 보이는데, 또 다시 그 위로 살갗이 까지자 따끔했다. 유랑은 어떻게든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다시 한 번 윤키아루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에 갑자기 유랑의 주먹 위로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어, 어라?"
"하아, 이제 그만해."
"드디어 정신이 들었어?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머리 울리니까 닥치고 빨리 출발해."
유랑은 드디어 윤키아루가 일어났다는 생각에 웃음부터 나왔다. 자신의 주먹 위로 윤키아루의 날카로운 손톱이 닿자 드디어 증후군의 증상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구나라는 생각에 유랑은 괜스레 뿌듯해졌다. 윤키아루는 거친 숨을 내쉬며 갑자기 밀려오는 얼굴의 고통에 이가 빠드득 갈렸다. 분명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 행동은 맞았으나 왜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알리가 없는 윤키아루는 애꿎은 자동차 시트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아직까지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유랑에게 빨리 운전을 하라며 신경질을 냈지만 유랑은 들은 척 만 척하며 자신의 티셔츠 위로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윤키아루의 얼굴에 휙 던졌다. 순식간에 날라온 유랑의 가디건으로 인해 시야가 어두컴컴해진 윤키아루는 자신의 얼굴 위로 덮힌 가디건을 얼굴 밑으로 끌어내리며 유랑에게 말했다.
"야, 이 가디건은 또 뭔데?"
"입 닥치고, 그대로 얼굴 위에 덮고 있어."
"미쳤냐? 내가 왜?"
"몰라서 물어? 못 생긴 니 얼굴 보기 싫어서 그런다."
유랑은 또 다시 자신의 말을 되받아치려고 하는 윤키아루의 입 모양을 보고는 그대로 윤키아루의 손에 들려있는 가디건을 빼앗아 그대로 윤키아루의 얼굴에 덮었다. 그리고는 가디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윤키아루의 모양새를 본 유랑은 더 이상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손에 힘을 가했다. 윤키아루는 숨도 못 쉴 만큼 자신의 얼굴을 옭아매는 유랑의 행동에 발작하듯이 움직이던 몸을 멈췄다.
윤키아루의 행동이 멈추자마자 유랑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윤키아루는 유랑의 가디건으로 인해 자신의 얼굴 쪽으로 햇빛이 차단되자 줄어들었던 송곳니도 다시 자라기 시작했고,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도 다시 생기있게 돌아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배려해주는 듯한 유랑의 행동에 윤키아루는 괜스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명히 유랑은 쑥스러워서 자신에게 얼굴이 못 생겼다는 핑계를 대며 가디건을 던져준 것이 틀림없었다.
윤키아루는 자신의 코로 스며드는 유랑의 달짝지근한 냄새에 기분이 좋아져 가디건에 얼굴을 푹 묻었다. 유랑은 윤키아루의 귀여운 행동에 웃음이 터져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윤키아루의 행동이 잠잠해진 것을 본 유랑은 그제야 자동차를 출발했다. 가디건 속에 가려져있던 윤키아루의 올라간 입꼬리를 유랑은 미처 보지 못했다. 윤키아루는 아련한 느낌에 두 눈을 감고는 유랑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즈막히 속삭였다.
"이렇게 귀여운 짓하면 곤란한데."
*
'YSY 뉴스, 이하은입니다. 요즘 성폭력 범죄자와 사이코패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데요. 최근 초등학생들이 현장학습으로 떠나는 수학 여행이나 야영 장소에서 많이 출몰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많은 학생들이 있는 점을 이용해 폭행이나 살인을 저지른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세상이 흉흉해져 낮이나 밤이나 모두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말세다, 세상이 말세야."
"엄마, 뉴스 그만 보고 짐 챙기는 거 도와줘!"
12살의 유랑, 유랑은 꼭두 새벽부터 소파에 누워 뉴스를 챙겨 보는 엄마의 모습을 쳐다보며 외쳤다. 유랑이 부르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엄마는 TV에서 계속 방영되는 뉴스의 내용에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런 정신병자들은 싸그리 잡아 사형을 시켜야 한다며 혼자 열을 올리면서 소리를 친 엄마는 급기야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까지 바닥으로 내팽겨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랑은 TV를 볼 때마다 항상 자신이 처한 입장인 것 마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엄마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써 엄마에게서 고개를 돌린 유랑은 멈추었던 손을 계속 움직여 챙기다 만 짐을 가방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 위로 둘러맸다. 고작 1박 2일의 야영이었지만 이것 저것 챙기느라 많은 짐으로 인해 유랑의 가방은 두둑해졌다. 유랑은 무거운 짐을 애써 괜찮은 척하며 다시 소파에 앉아 TV 드라마 재방송을 챙겨 보는 엄마의 옆 얼굴을 쳐다보며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는 이제 밖을 나서기 위해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엄마, 나 이제 간다."
"벌써 다 챙겼어?"
"TV 좀 작작 보라니까, 신발 신고 있을게."
"아차, 까먹고 있었네! 도시락 여기 있어."
유랑이 현관문 앞에 앉아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엄마는 이제야 생각이 났던건지 자신의 이마를 탁 치고나서 싱크대 쪽에 미리 만들어 놓은 도시락을 들고, 유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신발 끈까지 꼼꼼하게 다 묶은 유랑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유랑이 일어나자마자 엄마는 도시락을 떠밀 듯이 유랑의 품에 안겨줬다. 유랑은 얼떨결에 자신의 품에 안겨져 있는 도시락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뿌듯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엄마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엄마, 도시락은 무거워서 가져가기 싫은데."
"어머, 얘 좀 봐! 기껏 새벽부터 도시락을 만들어 줬더니 그게 엄마한테 할 말이야?"
"있잖아, 지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나 안가면 안돼?"
"너 또 그런다, 절대 안돼. 이번 한 번만 다녀와."
유랑의 품에는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한 도시락의 온기가 전해졌고, 유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가방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유랑이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 전부터 학교에서 야영에 관한 프린터물을 받아올 때에도 유랑은 가기 싫다며 계속 떼를 쓰며 거부했었다. 다른 아이들과 유달리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던 유랑이었기에 더 더욱 걱정이 앞선 엄마는 두 손을 깍지 껴 기도를 했다.
"제발 아무런 일이 없어야 할텐데."
엄마의 걱정어린 말을 뒤로 하고, 유랑은 자꾸 어깨 밑으로 흘러내리는 가방을 다시 한 번 추스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과 얼마 멀지 않은 학교로 향했다. 몇 분이 지나고, 유랑은 학교 교문을 무사히 지나쳐 학교 운동장으로 가로질렀다. 넓은 운동장에는 각 반의 담임 선생님들과 각 반 학생들이 차례대로 줄을 선 채로 출석 체크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지각을 면한 유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반으로 추정되는 곳에 가서 섰다.
"자신의 짝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없으면 출발합니다!"
반 아이들이 다 온 것을 확인한 담임 선생님, 유은영은 아이들을 통솔해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광 버스에 태웠다. 줄을 선 순서대로 관광 버스 안에 탑승한 아이들은 서로 좋은 뒷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티격태격했고, 유랑은 그런 아이들을 유치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에 아무렇게나 띈 빈 자리에 털썩 앉은 유랑은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뻐근한 뒷 목을 주물렀다. 어느정도 목 근육이 풀린 것을 느낀 유랑은 좌 우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이 찢어질 만큼 하품을 쩌억 했다.
"흐음, 흥분되서 잠을 제대로 못 잤나봐?"
"아씨, 깜짝이야! 이 빌어먹을 신용재 자식이!"
"뭘 그렇게 놀래? 내가 더 놀랐구만."
"시끄럽고, 도대체 언제 내 옆에 앉은 거야?"
유랑은 은근슬쩍 자신의 얼굴 쪽으로 뻗어오는 신용재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러자 신용재는 쉽게 뒤로 물러났고, 자신의 가방을 뒤적여 과자 한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과자 봉지를 뜯은 신용재는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유랑에게로 내밀었다. 딱 봐도 먹음직한 모양새와 달짝지근한 냄새가 훅 풍기자 유랑은 자신의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신용재가 들고 있는 과자 봉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볼이 터지도록 꾸역꾸역 과자를 집어 넣은 유랑은 눈을 빛내며 먹는데 집중했다. 그런 유랑이 귀여웠는지 신용재는 피식 웃으며 유랑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러분, 이제 곧 도착하니까 모두 짐 챙겨서 내릴 준비합시다."
유은영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반 학생들을 차례대로 둘러보며 말했고, 어느 순간 관광 버스가 멈추자 아이들은 기쁨의 환호를 내지르며 몇 초라도 빨리 내리기 위해 바쁘게 설쳤다. 반 아이들이 우루루 내리는 것을 지켜본 유랑은 그제야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신용재와 같이 내렸다. 관광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유은영은 학생들을 차례대로 정렬하느라 무척이나 바빠보였다.
마지막으로 내린 유랑과 신용재는 아이들이 서있는 곳으로 가서 맨 뒷 자리에 두 줄로 섰다. 모든 아이들이 관광 버스에서 내린 것을 다 확인한 유은영은 그제야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두 줄로 차례대로 선 아이들을 통솔해 설악산 흘림골 쪽으로 향했다.
"유랑, 너 여기 와본 적 있어?"
"……."
"난 예전에 여기 와봤는데, 풍경이 정말로 좋더라."
"……."
"야, 내 말에 왜 대답을 안해?!"
신용재는 자신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무시하는 유랑의 행동에 짜증이 나 고개를 홱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는 유랑의 모습이었다. 그런 유랑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신용재는 유랑의 두 어깨를 부여잡으며 괜찮냐며 물었다. 그러자 유랑은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온 신용재의 두 손을 내리치고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바닥에 주저 앉았다. 유랑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오는 배를 부여잡고, 신음 소리를 삼켰다. 애써 고통을 참아보려고 하는 유랑의 행동에 신용재는 안절부절하며 저 멀리 앞서가는 담임 선생님을 부르기 위해 소리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유랑이 신용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 그러지 마! 나 때문에 곤란해지기 싫다고."
"그래도 선생님께 알릴 의무가 있어!"
"화, 화장실에 가면 괜찮아 질 거야."
"화장실?"
유랑의 애처로운 말에 신용재는 흔들리는 눈으로 바닥에 주저 앉은 유랑과 점점 자신들과 멀어지는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뒷 모습을 쳐다봤다. 신용재는 유랑의 간곡한 부탁에 애써 입술을 깨물고, 유랑을 부축해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최대한 화장실을 빨리 들리고 난 후에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뒤쫓아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신용재는 자신을 위로했다.
몇 분이 지난 후, 유랑은 화장실에서 헬쓱한 얼굴로 나왔고, 밖에 서있던 신용재는 황급히 유랑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자 유랑은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까보단 한결 나아보이는 유랑의 얼굴에 안도한 신용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모습이 신용재의 머릿속에 스치자 신용재는 배를 쓰다듬는 유랑의 얇은 손목을 세게 잡아챘다. 유랑은 신용재가 자신의 손목을 붙들자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지만 신용재는 신경쓸 틈도 없다는 듯이 아까 전,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사라졌던 길을 생각해내서 그 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야, 신용재! 너무 빨라!"
"어쩔 수 없어, 아이들의 뒤를 놓쳤기 때문에."
"……."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힘내줘."
유랑은 신용재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달리자 뛰는 속도를 맞추기가 매우 힘들었다. 턱까지 차는 숨으로 인해 힘들어진 유랑은 도중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불찰로 인해 포기할 수가 없었다. 중간에 자신의 배만 아프지만 않았더라도 아이들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신용재에게 괜히 미안해진 유랑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신용재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위해 무뎌진 발을 겨우 놀렸다. 신용재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은 커녕 사람 한 명도 보이지 않자 이상함을 깨닫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런 말없이 갑자기 멈춰선 신용재 때문에 뒤따라 달리던 유랑은 신용재의 등에 코를 박았다.
"허억, 왜 갑자기 멈춰?!"
"유랑,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고, 아무도 없어!"
신용재의 다급한 외침에 유랑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미친듯이 둘러봤다. 정말 신용재의 말처럼 주위에는 사람 한 명 조차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쩍 말라버린 나뭇잎들과 바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못해서 발을 헛딛었다가는 추락사를 당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의 낭떠러지가 존재했다. 괜스레 등골이 오싹해진 유랑은 등에서 흘러 내리는 땀으로 인해 입고 있는 티셔츠가 축축해질 만큼 무서웠다. 혹여나 낭떠러지에 가까이 갔다가는 밑으로 떨어질 거라는 불안한 생각 때문에 온 몸이 떨린 유랑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뒷 걸음질을 쳤다.
"어, 어?"
어느 순간 유랑은 자신의 발 쪽으로 딱딱한 물체가 닿자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여나 뒤에 바위라도 있나 싶어 뒤로 휙 돌아본 유랑은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남자의 모습에 두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날카로운 식칼을 확인한 유랑의 두 눈은 미친듯이 일렁였다. 유랑은 아직까지 눈치를 채지 못한 신용재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발걸음을 약간씩 움직였다. 유랑의 발 밑에 쌓여있는 나뭇잎이 바스락거리자 남자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유랑의 행동을 눈치챘는지 식칼을 위협적으로 들이대며 말했다.
"꼬마야,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아."
"가, 가만히 있으면 살려줄 거예요?"
"글쎄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와서 내 눈에 띈 거야?"
남자는 지레 겁을 먹은 유랑의 얼굴을 보며 날카로운 식칼에 붉은 혀를 가져다대며 낼름거렸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온 몸에 소름이 끼친 유랑은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애써 무서움을 없애려 유랑은 자신의 두 손을 주먹으로 말아쥐었지만 점점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행동으로 인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 뛰었다. 그런 유랑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눈질로 슬쩍 본 신용재는 꽤나 힘들었는지 나뭇잎에 쌓여있는 바닥에 주저 앉아 쉬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랑은 그대로 뒤돌아 신용재에게로 달려갔다.
"신용재, 얼른 일어서!"
"응? 혹시 선생님이랑 아이들 찾았어?!"
"여기 살인마가 있다고!"
뒤에서 들려오는 유랑의 다급한 외침에 신용재는 그런 장난하지 말라며 뒤를 돌았다. 신용재는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유랑을 바라봤지만 갑자기 유랑의 뒤를 쫓아오는 식칼을 든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올라갔던 입꼬리가 굳은 것처럼 내려왔다. 그리고는 어느새 유랑의 뒤를 추격한 남자가 망설임없이 식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신용재는 자신의 몸을 날려 유랑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유랑은 갑자기 자신의 몸을 덮쳐오는 신용재의 행동에 왜그러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뒤를 쫓아온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신용재의 등을 향해 식칼을 푹 꽂았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식칼이 신용재의 등을 관통하고나자 신용재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와 함께 붉은 피들이 유랑의 하얀 얼굴로 이리저리 튀었다. 유랑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몸을 기대오는 신용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신용재의 목숨을 확실히 끊어놓기 위해 수차례 신용재의 등에 칼을 꽂았고, 어느 순간부터 신용재의 움직임이 멎어들자 그제야 붉은 피로 물든 식칼을 빼냈다. 남자는 꽤나 힘들었는지 자신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내고나서 식칼에 묻은 붉은 피를 혀로 핥아냈다. 유랑은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온 몸에 뱀이 기어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꼬마야, 이제 놀이는 그만해야겠어."
"무, 무슨 놀이요?"
"너를 사냥하는 놀이 말이야."
유랑의 몸 위에 겹쳐져있던 신용재의 몸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스르륵 밑으로 떨어졌다. 유랑은 자신의 얼굴과 티셔츠에 튄 붉은 핏방울들을 소름 끼치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를 가까스로 밀쳐내고는 낭떠러지 쪽으로 달렸다. 이미 죽어버린 신용재에게는 고맙고, 미안했지만 유랑은 어떻게든 저 남자로부터는 살고 싶었다. 저런 야만적인 살인마의 손에 잡혀 허무하게 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남자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자 더 더욱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유랑은 끊임없이 달렸다.
"제길, 난 살아야 한다고!"
유랑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미친 사람처럼 달렸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유랑의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신용재의 죽음과 또 남자의 살인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은 유랑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는 곳으로 달렸건만 하필이면 그곳이 낭떠러지였다니!
둔기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진 유랑은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위협적인 모습을 쳐다봤다.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유랑의 모습에 독 안에 쥐새끼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입을 다셨다. 아직까지 자신의 입 안에 맴도는 신용재의 붉은 피가 무척이나 달콤했다. 과연 저 꼬마의 피는 어떤 맛일까?
"꼬마야,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
"하, 웃기지 마세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왜 그렇게 발악하나 몰라?"
"당신 말대로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당신 손에는 절대 못 죽어."
유랑은 식칼의 묻은 신용재의 피를 핥는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새겨넣고는 그대로 낭떠러지에 몸을 날렸다. TV에서는 다이빙을 할 때,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고 하던데 그것은 아마 거짓말이었나 보다. 유랑은 자신의 몸이 공기 중의 빠른 속도로 아찔하게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몇 초 후면 내 몸은 산산조각이 나 모든 장기들이 터지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유랑은 그 남자가 서있던 곳을 쳐다봤다. 그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식칼을 낭떠러지 쪽으로 던지는 것을 본 유랑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아쉽겠지.
"아직 교복도 못 입어봤는데, 벌써 죽는구나."
유랑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낭떠러지 밑으로 급격히 추락했다. 고깃덩어리가 터지는 것처럼 유랑의 몸에서는 붉은 피들이 바닥으로 천천히 흘렀다. 애써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힘겹게 들어올린 유랑은 새파랗게 물들은 하늘을 보며 눈물 한줄기가 흘렀다. 자신의 불찰로 인해 신용재가 살인마에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싸준 신용재가 살인마에게 죽임을 당했어도 자신은 그저 살고 싶어서 신용재의 시체를 떨쳐내며 죽기 살기로 도망을 쳤었다. 차라리 화장실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살인마를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시간을 탓하며 유랑은 떨리는 손을 바닥으로 내팽겨쳤다. 유랑은 이제 한계라는 것을 느끼며 반 쯤 희미하게 감긴 두 눈을 닫아버리고, 중간 중간 끊기는 의식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이래서 오기 싫었어, 엄마."
걷는 시체 증후군 :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증상. 증상의 심각도에 따라 다양한 증상을 보일 수 있는데, 자신의 내장이 모두 없어졌다고 믿는 사람도 있으며 자신의 신체가 없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죽었지만 몸이 남아있어 아직 썩어가고 있다고 믿는 경우이다. 환자의 경우 자기 신체를 훼손하거나 환각, 자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여 주로 중년에 갑작스럽게 발생한다.
*****
Thanks To.
바가지소녀님,일라이라님,ABWLRQODZM★님,poker님(비록 질문이지만..^o^)
댓글 달아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기다려주신 분들♥
모두모두모두 감사감사감사해요! ლ( ╹ ◡ ╹ ლ)
하루 빨리 이 칙칙한 증후군을 완결내고나서
상큼한 소설을 쓰고 싶네융ㅠㅠ...
첫댓글 드디어 유랑 과거편이 나왔네요. 담편도 기대할께융^^
일라이라 님, 이번에도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o^// 저번편에 일라이라 님께서 암시하신 것처럼 시체같은 아이, 유랑의 과거편이 나왔네요!ㅎㅎ 유랑의 과거편은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요즘 범죄가 많다보니 그걸 바탕으로 해서 유랑의 과거편에 집어 넣었어요~!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간 것을 경험 삼아 적어봤습니다~ㅋㅋ 아무래도 제가 직접 경험을 해봤으니 이번 유랑의 과거편에도 손쉽게 적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ㅎㅎ 개인적으로 아이들의 과거 중에서 유랑의 과거편이 제일 마음에 든답니다! 일라이라 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재미있게 봐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려요!>< 그럼 다음편에서 봐요^^*
엄훠~///>_<어쩌다오랜만에들어온카페에이리글을들고와주시면기쁘고황홀하고행복해요|>_</흐아오늘도여전히재밋고신선한글을가지고와주셔서저는기쁘지아니할수없답니다!!!^^crazy님의소설은뭔가심오하면서매력적이라서끌린답니다!!ㅎㅎ오늘도너무재밌게잘봤어요~다음화도빨리데리고와주세요!!
바가지소녀 님, 이번에도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o^// 이번에도 바가지소녀 님이 첫 댓글을 다실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 제 예상을 깼네요~!ㅎㅎ 그래도 언제나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번에도 많이 늦었죠?ㅠㅠ 에휴... 기다려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증후군을 빨리 데리고 와야할텐데...ㅋㅋ 언제나 저에게 힘을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바가지소녀 님의 댓글에 무척이나 힘이 난답니다!ㅎㅎ 그리고 제 소설을 칭찬해주셔서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이번편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다음편은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증후군 얼마 남지 않았어요~^ㅇ^ 그럼 다음편에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