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화포천에서
입동을 하루 앞둔 십일월 초순이다. 어제는 아침까지 강수량은 많지 않아도 바람이 요란스럽게 불며 비가 내렸다. 아직 단풍이 채 물들지 않은 거리의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든 잎만 우선 떨어져 길바닥 뒹굴었다. 갈색으로 물들어가던 느티나무 잎은 상당수 낙하해 보도를 뒤덮었다. 가로수 가운데 가장 일찍 단풍이 물든 벚나무는 이번 비바람과 무관하게 진작 나목이 된 게 많다.
화요일 새벽녘 잠을 깨 산야에서 채집해둔 건재로 평소 음용하는 약차를 달이면서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을 펼쳐 읽었다. 조선시대 관직을 지낸 사대부들이 명산대천을 찾아 유람한 기록을 전송열과 허경진이 우리글로 엮어 옮긴 책이었다. 두 사람은 이 책 말고도 한문 서적 다수를 우리글로 풀어낸 학자였는데 아직 강단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현역이었다.
날이 밝아온 이른 아침 산책 차림으로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보도에는 환경미화원이 강풍에 헝클어진 마른 나뭇가지를 치우느라 고생해 수고 많으시다는 인사를 건넸다. 퇴촌삼거리에서 창원천 천변을 따라 창원대학 앞으로 가니 냇가에는 이삭이 팬 물억새가 바람이 부니 은빛으로 일렁였다. 도청 뒷길에서 역세권 상가를 지난 창원중앙역에서 닿아 매표구를 찾았다.
역무원에게 진영역까지 표를 한 장 구해 마산역을 출발해 정한 시각에 동대구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열차는 비음산 터널을 통과해 진례역 대피 선로로 들어 서울행 KTX 산천을 앞세우고 진영역에 정차했을 때 내렸다. 역사를 빠져나가 화포천 아우름길로 들어 노무현 생가도 아니고 화포천 생태학습관도 아닌 황무지 같은 길이 없는 습지를 택해 개척 산행하듯 정글을 헤쳐갔다.
진영역에서 한림정역으로 가는 경전선 철길과 나란한 화포천 습지 바닥을 따라 걸었다. 농지가 아닌 습지였기에 농기계나 농부가 다니지 않아 농로가 없었다. 건너야 할 물웅덩이는 만나지 않아 신발이 젖을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이삭이 나와 은빛으로 일렁이는 억새꽃 사이에 쑥부쟁이꽃이 시들고 있었다. 갯버들은 이번 비바람에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가 드러났다.
머리 위 하늘에는 북녘에서 날아오는 선발대 기러기들이 선회 비행하고 있었다. 올가을은 여태 이상 고온을 보여 압록강이나 임진강을 건너오던 철새들이 중간 기착지서 잠시 머물다 내려와도 될 듯했다. 입동이 지나면 늦가을다운 기온으로 돌아가 주남저수지나 낙동강 하구는 겨울 철새들이 날아들지 싶다. 정글 구간을 벗어나 화포천 탐방로가 나와 쉼터에서 고구마를 꺼내 먹었다.
화포천 냇바닥 물웅덩이는 텃새인지 척후병으로 내려온 녀석인지 여러 마리 오리들이 먹이활동에 열중하다 날갯짓을 푸덕거리기도 했다. 맞은편 둑에는 화포천 생태학습관이 보였으나 건너가질 않고 장방리 갈대집 입구에서 국궁을 쏘는 봉화정을 지나 한림면 소재지 행정복지센터를 지니자 한림정역이 나왔다. 창원으로 복귀하는 열차는 점심나절 이후에 정차해 시간 여유가 있었다.
주택지서 들녘으로 나가니 생림으로 뚫리는 신설도로가 철로 구간은 높다란 주탑을 세워 사장교 형식으로 건너갔다. 물길이 흘러온 언덕에 절로 자란 머위 순이 파릇해 가던 길을 멈추고 뜯어 모았다. 머위는 이른 봄 움이 돋는 새순이 쌉싸름하게 입맛을 돋우었다. 여름엔 머윗대로 먹지만 가을철 머위 순도 찬거리로 삼을 수 있다. 짧은 시간 채집한 머위 순은 비닐봉지를 쉽게 채웠다.
몇 차례 들린 ‘아씨밥상’에서 고등어가 구워져 나온 점심상을 받았다. 별당 아씨가 아닌, 여사장 동생이 주방에서 일하다가 성질나면 스트레스 풀려 내지른 ‘아~씨!’에서 따서 붙였다는 상호가 이채로웠다. 식후에 한림정역으로 가니 창원행 열차 시각은 여유가 있어 머위 순을 채운 봉지를 꺼내 잎줄기 껍질을 벗겼다. 뒷마무리를 짓고 나니 손가락엔 풀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았다. 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