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 - 무지개와 십자가
2023.2.16.연중 제6주간 목요일 창세9,1-13 마르8,27-33
언젠가 허겁지겁 저를 찾아와 무지개를 보라 하던 수도형제가 생각납니다. 이젠 오염과 공해로 무지개 보기 참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구나 나이 불문하고 무지개를 볼 때면 지상과 하늘을 잇는 곡선의 하늘길 같은 모습에 마음 설레는 동심을 느낄 것입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만 아니라 때로는 수도권에서 모두 보았다는 말에는 참 신비스런 느낌도 들었습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1770-1850)의 유명한 ‘무지개’란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 뛰노라.
나 어려서도 그러했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고
나 늙어서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네.
만약 그러하지 아니하다면 신이시여
지금이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생애 하루하루
타고난 그대로 경건한 마음 이어지기를
빌고 바라네.”
시의 원문 제목은 ‘무지개(Rainbow)’가 아니라 “내 마음 뛰노라(My Heart Leaps Up)”입니다. 읽을 때 마다 마음 설레게 하는 명시입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무지개’가 아닌가 하는 재미있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온세상에 보여주신 영원한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 지상과 하늘을 잇는 하늘길이 바로 무지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며 새롭게 출발하시는 모습이 참 장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신후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약하시며 그 계약의 표징으로 무지개를 선물하십니다. 이 대목을 다시 인용하여 나눕니다.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무지개라는 영원한 구원의 표징, 계약의 표징으로 스스로 한계를 정하시며 확약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롭고 겸손한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하느님께서는 사람은 물론 살아 있는 모든 지상 생물들 모두에게 차별없이 영원하고 보적인 구원의 표징이자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를 선물하시니 여기서 제외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제 한겨레 신문은 이해인 수녀님의 인터뷰 기사로 한면을 가득채우고 있었습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의 “안아만 주기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 모자라요” 제하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시인일뿐 아니라 수도자인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유명세에 주눅이 들지만 스스럼없는 그의 천진함에 금세 놀라게 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같은 파릇함은 여전하다. 그가 2008년 대장암에 걸려 항암 주사를 30번이나 맞고, 방사선 치료를 28번이나 할 만큼 지독한 투병과정을 거쳐 지금도 암세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제 포옹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못난 모습마저도 다그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안아주는듯한 넉넉한 성모상을 닮아가는 그가 건네주는 마지막 말이 봄햇살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필 거예요.”-
언젠가 “사람은 꽃이다. 살아 있는,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이다”라는 제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인생, 매일 꽃처럼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 일입니다. 안아 주라 있는 가슴의 품입니다. 안아 주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상입니다. 모두에게 영원하고 보편적인 구원의 표징, 계약의 표징은 무지개를 선물하신 하느님은 모두를 안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처인 그분의 품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바라보는 눈이신 분
하느님은
모두에 귀를 기울이는 귀이신 분
하느님은
모두를 안아주시는 품이신 분”
저절로 참 넉넉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날이면 날마다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 품안에서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구약의 영원한 계약의 표징에 이어 신약의 영원한 계약의 표징이 바로 파스카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간혹 하늘에 무지개처럼 십자가의 형상이 보였다는 기적같은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종파를 떠나 십자가는 누구나의 보편적 구원의 표징이된 느낌이 듭니다.
보편적이란 뜻의 가톨릭catholic인 천주교를 그대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십자가 고상입니다. 참으로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보편적인 종교가 가톨릭입니다. 언젠가 피정집 제의방에서 인사하고 미사차 입장하려는 순간의 난감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인사할 십자가 고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새삼 파스카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삶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 역사의 중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면에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영광송 기도는 얼마나 좋은 구원의 표징인지요! 제가 가톨릭 수도사제에서가 아니라 정말 이보다 짧고 좋은 기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파스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이,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란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을 생활화할 때 말 그대로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안정과 평화의 삶이요 두려움과 불안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파스카의 구원에 방해가 된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열화와 같은 분노도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수제자 베드로뿐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파스카의 구원의 길에 장애가 되는 이들에게는 차별없이 분노하실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옳고 멋지게 주님을 고백했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 메시아의 깊은 뜻에 무지했음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을 때 격렬한 저항으로 여지없이 탄로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호된, 충격적 질책을 하십니다. 충직한 반석같은 수제자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이, 걸림돌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기억해야 할 영원한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에 누구나 사탄으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베드로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평생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을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의 예수님이자 십자가임을 통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영원한 표징인 무지개가 신약의 파스카 십자가를 통해 더 확실히 구체화된 느낌입니다. 파스카의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마다 무지개를 연상하며 동심을 새롭게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답고 신비로운 ‘파스카의 꽃’이 되어, ‘무지개 하늘길’이 되어 살게 하시니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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