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군복을 입은 사람의 흉상을 사관학교에 세우면 안 된다. 사회주의자였던 홍범도, 국군뿌리 될 수 없어. 태영호(국회의원) 페이스북
현재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독립운동가 흉상 중에서 홍범도 흉상만은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홍범도가 일본군과 싸운 공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홍범도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와 대전현충원에 모신 것을 환영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단지 일본군과 싸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 국군의 뿌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 남과 북의 대결은 이념·체제 대결이다. 이러한 대결의 전초선에 서 있는 우리 군 지휘관들을 키워내는 교육기관에 홍범도 흉상을 세워놓고 생도들이 경의를 표하게 하는 것 자체가 우리 국군의 정체성을 흔들고 생도들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 그의 행적을 보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소련군에 복무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미국, 중국 등에서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으나 그는 생의 말기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했다. 소련 공산당 주도의 자유시 참변에서 홍범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논란거리다.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에는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공산주의자들도 계파로 갈라져 있었다. 소련 공산당은 독립군 부대들을 철저히 소련 공산당의 휘하에 넣으려 했고 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숙청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다. 북한에서는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당시 독립군과 소련군 사이 전투에서 홍범도가 소련군 편에 서서 독립군 동지들을 사살했는지는 증명된 것이 없다. 일부 자료들은 홍범도가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자료도 있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재판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에 대해 홍범도가 재판에 회부된 독립군 부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판관으로 참석한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동시에 재판위원 참여 후 홍범도가 레닌을 만나 재정지원을 받고 권총을 받은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자유시 참변 후 상해임시정부의 여러 사람들이 홍범도를 배신자라고 규탄했고 일부는 홍범도 살해 시도까지 했었다. 자유시 참변 후 만주에서 독립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의 주도권이 자유우파로부터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로 옮겨 갔다. 소련 공산당은 우리의 항일투쟁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반(反) 나치 저항운동 때도 소련 공산당과 반대에 서있는 진영은 철저히 숙청했다. 대표적인 예가 1944년 8월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이다. 당시 소련군이 바르사뱌 근처에 오자 바르사뱌에 있는 자유우파가 지도하는 지하 국가는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오히려 진격을 멈추고 나치군이 폴란드 자유우파군을 전멸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렇게 소련 공산당은 다른 나라들을 철저히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자유시 참변도 그런 견지에서 바라봐야 하며 우리 민족의 비극 중의 비극이다. 물론 홍범도가 활동할 당시 독립군의 힘이 일본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에 맞설 타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현실론을 홍범도가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홍범도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인사들에게는 그 대상이 소련이었다. 그러나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승만 등은 외교독립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들이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믿었고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상해에서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다. 우리 국군의 뿌리를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에게서 찾아야지, 홍범도 같은 사회주의계열 인사를 국군의 뿌리에 넣으면 안 된다. 6·25 전쟁이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으로 일으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소련 군복을 입은 사람의 흉상을 사관학교에 세우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