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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를 부르다
행 20:13-24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설 교 >
나의 생명조차
행 20장 22~25절 / 김광일목사
16세기 초, 영국인들은 중세 카톨릭의 지배 아래 영적인 노예 상태로 허덕였습니다.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이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토마스 빌니(Thomas Bilney)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이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새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그에게 소개해 준 다음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바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빌니는 지칠 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며 예수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지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기존 교회를 격노시키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빌니는 교회를 거스리는 이단자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화형대를 향해 걸어가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빌리는 죽음을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불꽃이 나를 삼킬 때 나는 그 열기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몸은 불에 타 없어지겠지만, 그 고통 뒤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따를 것입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빌니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많은 영혼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도 이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주의 길을 가리’를 찬양합니다.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늘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본문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이 진하게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은 고난을 당하면서 전도사역을 감당해 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성도들에게도 온갖 박해와 환난이 곧 닥칠 것인데 잘 견디어 내기를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의 ‘나의 생명조차’는 원어로 ‘우데노스 포이우마이 텐 프쉬켄’인데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 기꺼이 내놓기로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위해 나의 생명조차 바치겠다고 선포하였습니까?
첫째로 예수를 위하여 바치리라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설교하였던 ‘오 종목의 나의 기원’의 내용입니다. “나는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이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본문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의 ‘예수께 받은’은 원어로 ‘엘라본 파라 투 퀴리우 이에수’인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오직 주를 향해 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초대 교회의 힘이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예수를 위해 죽겠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주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살도록 구별된 자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정체성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예수를 위해 바치리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명을 위하여 바치리라
한국형 앰뷸런스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외국인 의사 인요한(John A. Linton)박사입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입니다. 중증 외상외과 전문의 이국종 교수도 인요한 교수로부터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요한 교수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턴(William A. Linton)은 22세 때 조선에 와서 48년 동안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3.1 운동을 해외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인요한의 아버지 휴 린턴(Hugh M. Linton)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지방 도서 촌 지역에 600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인요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1984년, 38년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났다. 하지만 아버지를 옮길 구급차가 없어 순천에서 광주로 옮기다가 아버지는 택시 뒤에서 운명하셨다. 1992년도에 아버지 친구들이 기부한 돈으로 한국형 앰뷸런스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원래 있던 구급차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장비를 싣기에 너무 작았다. 앰뷸런스라고 하지만 누워서 가는 택시여서 새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요한은 택시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장비가 완전히 구비된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앰뷸런스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인요한은 아버지의 죽음처럼 다른 사람들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명으로 앰뷸런스를 만들었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의 ‘사명’은 원어로 ‘디아코니안’인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 때문에 사명을 버려서는 결코 안 됩니다. 자신의 기분, 감정, 생각, 경험, 계산에 어긋난다고 사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방해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오직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 뜨겁게 예배하고 앞장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복음을 위하여 바치리라
릭 웨렌 (Richard D. Warren)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이렇게 전합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무렵, 나와 아내와 조카는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오셨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셨습니다. 놀란 아내가 아버지를 다시 눕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쓰셔서 아내가 여쭤보았습니다. “아버님, 무얼 하고 싶으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를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를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를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아버지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셨습니다. 한 시간 동안 아버지는 그 말을 백 번 정도 하셨습니다. “예수를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듯이 약한 손을 내 머리에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위해 한 명을 더 구하라! 예수를 위해 한 영혼을 더 구하여라!” 그 후 나는 그것을 인생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영생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 두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것은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복음 증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은 원어로 ‘디아마르튀라스다이 토 유앙겔리온’인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식을 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고백합니다.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복음보다 더 자랑할 것이 많아도 겸손합니까? 지식이 많아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까? 시험을 이기고 굳세게 주님을 섬기십니까? 오늘을 일사 각오로 사는 자가 내일도 일사 각오로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전라남도 영광에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순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염산교회 77명, 야월교회 65명의 교인들이 6.25 전쟁 당시 순교하였습니다. 염산교회 성도 77명은 마을 앞 수문에서 목에 돌이 매달린 채 수장되었고, 야월교회는 어린아이 하나까지 달아나지 않고 염산 앞바다 갯벌에서 공산군에게 총살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순교자 중에 임신부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는 공산군에게 ‘마지막 소원 두 가지만 들어 달라’며 간절한 기도와 함께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들을 죽인 공산군은 ‘정말 감동적이다. 믿음이란 대단한 것’이라며 놀랐다고 합니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였습니까? 나의 생명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혹한 핍박자들을 향해 “내 몸은 죽일 수 있어도 내 영혼은 어찌할 수 없으리라! 내게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외치는 담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순교자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사도 바울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일사 각오의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행 20장 22~24절 / 문기태목사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장 22-27절)
얼마 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오징어 게임]에 노인이 주인공 이정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 없다는 거야."
오늘 물질 문명에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상대적 빈곤과 결핍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 시달립니다. 반면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많은 부를 가진 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고통이라기보다 권태입니다. 권태는 빈곤과 결핍으로 겪는 고통보다도 더 큰 스트레스를 안겨 줍니다. 삶이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사람들은 돈을 내걸고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오징어게임을 만들어 내고 공감을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탁월한 인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입니다. 당대에 최고의 권력과 부와 화려함을 쥐고 있던 로마의 총독과 분봉 왕인 베스도, 버니게, 아그립바 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게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행복했습니다. 당대에 최고의 권력과 부와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바울을 행복으로 이끈 원천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상대적 빈곤과 결핍에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소유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권태에 시달리지 않고 재미있게 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1. 성령에 붙잡혀 살면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22)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실력을 갖추는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성품을 훈련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은 자신의 의지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을 하고 수고를 해도 인생은 온갖 변수가 있습니다. 잘 될 줄 알았는데 한 순간에 무너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됩니다. 하나님이 붙잡고 이끌어 주셔야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붙잡으시고 아름답게 인도하십니까?
22절 -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바울의 인생은 한마디로 성령님께 붙잡혀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갑니까?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끄셔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난 것도 성령님의 지시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이 선교여행 중 소아시아로 가려다가 마게도냐 즉 그리스로 방향을 바꾼 것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해를 당할 것을 뻔합니다. 투옥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음이 명확합니다. 그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령님께 붙잡혀 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가라고 하시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성령님에 붙잡혀 지배 받는 바울은 손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순종합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모르지만 꿋꿋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성령께 사로잡혀 이끌려가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위대하게 쓰임 받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그때 내가 성령 충만해서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자원했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이것저것 따져보니까 아닌 것 같아요. 바꾸어 주세요."
성령 충만할 때 결정한 것이 최선입니다. 최고로 잘한 결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후회가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번복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감동하실 때 순종하면 결국 행복해집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곧 사단이 그 감동을 빼앗으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헛갈리게 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면 바울과 같이 성령에 붙잡혀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면 이것 저것 계산하지 말고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혹 고난을 만나거나 위험에 처하게 되어도 흔들리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최선의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2. 사명에 붙잡혀 살면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24)
아름다운 인생은 성령에 붙잡혀 살 뿐 아니라 사명에 붙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이 재미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신나고 짜릿한 쾌감을 주는 무언가 화끈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명확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재미 없습니다.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역을 방해하는 악랄한 방해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사역비가 언제나 넉넉하고 풍족하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총독이나 분봉 왕 심지어 황제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권력자들과 부자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4절 -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다할 수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다한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만큼 분명하게 사명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잠시도 잊지 않고 붙잡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바울의 삶의 이유요, 목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보여 주셨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맞바꿀 수 있다고 하며 비장한 각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 받고 복을 많이 받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만하고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복을 주신 목적인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방의 빛으로 삼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려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지향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사명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지난 후, 주님을 섬기던 많은 이들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전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지체들이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때에 목자, 목녀를 자원하는 이들이 있어서 참 기쁩니다. 주님께서 사명에 붙잡혀 사는 우리들을 보시며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결핍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까? 가진 것이 많아 결핍은 느끼지 못하나 권태에 시달리며 재미 없는 인생을 살아가며 쩔쩔 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답고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적든지, 많든지 의미 있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하고 성령님께 붙잡혀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에 붙잡혀 살아가야 합니다. 목숨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분명한 사명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님께 사로잡히고 예수님이 주신 사명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바울처럼 성령 충만하고 사명감이 충만하여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자, 목숨을 건 사람들
행 20장 22-24절 / 성홍모목사
주일이 되면, 거리에 나가보면 찬송가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다녀오시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는 이들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멀거나 가까운 본 교회에 다녀옵니다. 주일에 교회에 다녀오시는 성도들이 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예배당이 세워지기 전에 이스라엘 나라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있기 전에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이란 구별된 천막, 거룩한 천막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쉽게 장막(帳幕)이라고도 했습니다. 장막이란 “한데에서 볕이나 비를 막고 사람이 들어가 있도록 둘러치는 막”을 장막이라고 합니다. 장막이라고 하면 단순한 천막이라는 말이나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 장막을 ‘회막’(會幕)이라고도 했습니다. 회막은 “모에드 오헬”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성막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총회라는 카할과 성막 곧 회막, 성전, 회당이 교회로 정착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 예배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아주 중요한 것, 필수적인 것,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믿어 그 분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요, 이것을 하지 않으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인간의 기본명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른 것이 많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을 참으로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어디입니까? 해남의 진도에 가면 서해로 낙조가 지는 세방으로 가는 길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산과 바다와 들이 어우러지면서 정말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어느 길입니까? 교회로 나오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우리 집을 떠나서 교회로 오시는 그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어떤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까? 우리 영주교회로 오시는 길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 중에 수지 신봉지구에서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일찍부터 서둘러야 시간 전에 오실 수 있습니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주일에 허둥대게 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집을 나와야 교회에 오실 수 있습니다. 집에서 나와 수지에서 판교까지 나옵니다. 수지나 판교는 신도시입니다. 저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새집을 마련하여 살고 있습니다. 판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옵니다. 올림픽 대로로 접어들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반포대교로 올라타서 강북으로 넘어옵니다. 이태원에서 삼각지를 돌아 숙대입구에서 후암동 종점으로 우회전하여 용산중학교 운동장에 차를 파킹하고 교회를 바라면서 걸어 올라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자기가 즐겨 오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고 오는 길이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신봉지구에 사시는 성도님들은 그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예배드릴 것을 생각하니, 교회로 오시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입니다. 우리 교회보다 더 넓고, 쓸모 있고, 화려하게 지은 예배당이 많아도 우리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왜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타락한 죄인들이 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집이기에 아름다운 집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성적으로 타락하여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들이 다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주셔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는 것을 보면서 모든 죄인을 용서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로 그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송하게 하셨으니, 예배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흉악한 죄인이요, 죄인 중에도 악질적인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임입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수많은 박해 중에 살아남은 종말적인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처음 교회가 태동할 때에 유대교회의 박해를 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이단의 무리,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박해하였습니다. ‘노쯔림’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나사렛 이단의 무리라는 뜻입니다.
유대교회의 박해를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로마황제의 박해를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데, 로마제국에서는 오직 황제가 우리의 구주가 된다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니 화형을 시키고, 짐승에게 물려죽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박해를 피하고, 로마황제의 박해를 피하고, 무서운 이슬람교회의 박해를 피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믿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유대교회의 교권자들은 사도를 공회로 불러다가 문초하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채찍질이란 말이 본래는 ‘가죽을 벗긴다’는 말이었습니다. 채찍에 맞다보면 살가죽이 찢겨나가고 온 몸은 만신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채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신앙을 지켜나간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그런 끔찍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주님이시며,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었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기뻐하면서, 전도자로 살아갔습니다. 행5:42에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따르면 우리도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신다고 가르치고 전도해야 합니다.
미국 애플컴퓨터 공동창시자인 스티브잡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췌장암을 이기고 불굴의 의지로 재기하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회사를 창업하고는 회사가 제자리걸음하고 있었고, 사업은 정말 지지부진하였습니다. 요는 제품은 좋은데 마케팅이 문제였습니다.
효율적인 마케팅전략이 부족하였습니다. 스티브잡스는 회사를 살리기 위하여 한 사람을 영입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케팅이란 영업이고, 장사인데, 마케팅의 귀재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펩시콜라의 CEO였던 존 스컬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존 스컬리는 38살에 펩시콜라회사의 사장이 된 사람으로 당시 세계제일의 코카콜라를 끌어내리고 펩시콜라를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콜라병을 만드는데, 코카콜라 병보다 더 크게 만들고 병들도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어떤 콜라가 맛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콜라를 선택하였는데, 펩시 콜라라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들고 가기 편하게 다양한 크기의 패키지 상품들을 내놓았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던 코카콜라의 아성을 무너뜨릴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애플컴퓨터에서는 그런 마케팅의 귀재를 영입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잡스는 존 스컬리를 공동경영자로 영입하려고 백방으로 힘을 썼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한 명예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와서 모험할 것도 없었습니다. 스티브잡스는 충분한 보상과 지위를 약속해도 움직이지도 않는 존 스컬리에게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면서 도전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설탕물이나 팔면서 당신의 생애를 허비하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지겠습니까?” "Do you want to spend the rest of your life selling sugared water, or do you want a chance to change the world?" 이 말에 존 스컬리는 마음을 바꾸어 애플사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스티브잡스와 존 스컬리의 관계는 나중에 아주 복잡하게 얽히지만, 스티브잡스의 말은 아마 영원한 명언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다가 떠날 것인가?” 우리 생활 관습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의미와 가치는 매일 달라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에게 붙잡힌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그렇게 죽어라고 미워하고 박해하는 예수님에게 붙잡혔습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자기를 죽어라고 미워하고 박해하는 그런 사람을 단칼에 죽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데, 살려주시면서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아나니아라는 신실한 종을 통하여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는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명자였습니다. 오늘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행20: 24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살펴보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밀레도라는 항구에서 마지막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에배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권면하였습니다. 그동안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목회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선교의 거점으로 육성한 에배소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불타는 구령의 열정과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란 사람은 원래부터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시민권자라고 하면 세계 모든 나라를 활보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학문의 도시인 길리기아주의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 되었고,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이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고, 공회의 대제사장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배교를 강요하고 심지어 주의 제자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이 그 가는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주의 부르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그가 누리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내어놓았습니다. 빌3:7-9a 에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계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떠났고, 그리고 땅끝까지 전도하기 위하여 당시 땅끝이라고 부르는 스페인 포르투갈까지 복음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명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죽어도 안 되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 일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빌2:13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큰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 기쁘게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소원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사느냐에 따라 4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편리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쾌락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중심으로, 편리함을 따라,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에 살고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겨우 연명하지 말고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독자적인 경영과 이노베이션」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야타 와하키로가 지은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원점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점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평생 살면서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는 날까지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하고,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을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엘케고오르’는 “나의 사명을 깨닫는 것이 문제다. 내가 정말 무엇을 하기를 신이 바라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서 진리인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고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또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란 이념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리더십을 훈련하는 분들이 사명선언문이라는 것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날마다 반복하여 외우게 합니다. 존 맥스웰 리더십 훈련을 받을 때에 사명선언문을 쓴 것이 있었는데, 성경에 붙여놓고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성홍모의 사명선언 “나의 사명은 구원하시는 말씀 전파와 주의 형상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으로 많은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이끄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따르며,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여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성경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부르심에 오직 충성한다.”라고 썼습니다.
오늘 바울은 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미쳤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세상을 좀 더 밝게 변화시킬 수 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고 쇠사슬에 묶였으나, 이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 때문임을 자랑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길이 되어도, 거기에서 잡혀 죽음에 처해질 수 있어도 그 길을 가려고 합니다.
22-23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지금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앞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는 달려갈 길을 다하려고 합니다.
고대 중국 전국시대에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의 일입니다. 한나라의 유방의 부하 장수 가운데 번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번괘가 이끄는 부대가 항우의 부대에게 포위되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번괘의 부대가 전멸하면 한나라는 초나라에 이길 수 없었습니다. 번괘는 전령을 세우고, 그로 하여금 우군에게 위급하다는 정보와 함께 구원을 요청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 막중한 책임을 맡은 전령은 미친 광인으로 가장을 하고 발각되었을 때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입 속에 불덩어리가 된 숯덩이를 집어넣어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령은 얼마 가지 않아서 적에게 발각되었고,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벙어리, 미친놈으로 인정되어 무사히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였고, 이로 인하여 번괘장군은 원군을 받아 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천하를 통일시켰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소중한 혀를 불태우면서까지 책임을 완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의 사람은 그렇게 충성을 다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새생명축제를 계획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온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택하신 자녀인 줄 믿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한 번 나온 것으로 인생이 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도한 그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미국의 애즈베리 대학에서 채플 시간에 생긴 일입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열정적으로 설교합니다. 그런데 전에나 지금이나 대학에서 채플 시간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앉아 있거나, 절반은 낙서하고 소곤거리며, 아예 많은 학생들이 자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강사목사님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몇몇 학생들이 잠자고 있는 한 학생을 깨우면서 “목사님이 너 나오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자던 학생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로 하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한 인도에 평생을 바친 선교사 스탠리 존스 목사입니다. 1920년대에 마하트마 간디와 시성 타고르와 함께 기독교 피정의 집 ‘애슈람 공동체’를 일으켰으며, 1938년에는 미국 타임지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었고, 2회나 노벨평화상의 후보자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갔으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쓴 책이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원탁의 예수”라는 책이 번역되었습니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에서 스탠리 존스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른 삶 그 자체가 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들은 삶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영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삶을 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껍데기를 버리고 본질을 추구하라. 진정한 종교는 몸을 구부려 겸손히 섬기고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며, 약해진 영혼과 대화하고 그 영혼을 다시 살려내어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선교사요, 목사님을 채플에서 얼떨결에 앞에 나가게 하였는데, 그가 그렇게도 위대한 선교사로 일생을 살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사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입니다. 한 영혼은 위대한 영혼입니다. 영혼구원에 최선을 다하셔서 주님 앞에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
행 20장 22~24절 / 피종진목사
이 세상에 많은 종류의 일들이 있지만 가장 귀한 일은 ‘복음 증거하는 일’(24절) 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선택을 받아 유대인의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더 귀중히 여겨 복음을 증거하는 일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육체의 평안함이 아니라 복음의 확산과 진보였고,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빌 1:20)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아름다운 인격과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 전파의 사명의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겸손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행 20:19a) 사도 바울은 겸손과 눈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10에도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행 20:31). 시편 126:6에 보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간절한 호소가 있는 곳에는 눈물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복음의 여정에는 겸손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겸손과 눈물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영혼이 주께 돌아오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어떤 환난과 시험에서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19b) 바울은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많은 시련들이 있었습니다(고후 1:8). 그러나 그는 극한 시련 가운데서도 참고 주를 변함없이 섬기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의 발자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환난과 박해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핍박이 따랐고, 사도들의 시대에도 핍박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항상 안일 속에서 신앙이 이어져 온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 신앙이 성장해 온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12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 신앙이 더 견고해지고, 환난과 핍박이 없이 편안할 때 신앙이 나태해지고 해이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환난과 시련이 있어도 넘어지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그들에게 악감을 품게도 하고(행 14:2),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핍박(행 14:5)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신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아야 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여기에서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거기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는 수난의 길이었습니다(23절). 그러나 그가 그 길을 당당히 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았기 때문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을 때에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넷째, 생명보다 복음을 더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 바울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더 귀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이 복음이 있는 곳에 구원과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과 눈물로, 환난과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서 생명보다 복음을 더 귀중히 여겨 복음 증거하는 일을 완수한 사도 바울처럼 복음 증거하는 일의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행 20장 22~24절 / 정필도목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천국 시민이 된 우리는 “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나는 아직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인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인가?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일꾼 신자인가,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인가?”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났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회개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다 장성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젖먹이 신자입니다. 젖먹이 신자는 아직도 옛 사람이 살아있고 옛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시기와 분쟁이 있는 교회는 바로 이런 젖먹이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육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들은 하루속히 은혜를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를 가리켜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게 되며, 거룩한 자가 되고 겸손한 자가 됩니다. 늘 감사가 넘치고, 예수 믿는 기쁨이 있으며, 행복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충성하는 일꾼이 됩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어린 성도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성도입니까? 사명을 알고 충성하며 사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아무쪼록 장성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지내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가 자리를 들고 걷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선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11~12을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이 죽기 전에 속히 살려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안식일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1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명이 중요한 이유는?
1.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지상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라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2. 우리의 사명은 위대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6:1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20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천국의 대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3:2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나눠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며, 옷가지를 나누고 안식처를 제공하며 여러 가지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4. 영원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느냐, 아니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느냐가 결정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한 순간의 복락이나 고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복락이냐 영원한 고통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결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5.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머지 않은 장래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 믿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을 알고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은 천국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라도 이 사명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자신의 결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날이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되고 이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몇월 몇일에 이 세상에 오시는지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일단은 복음이 전파되고 나서 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더 죄악이 관영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환난과 재난이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년보다 금년이, 해가 갈수록 더 험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을 굳게 먹고 사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어질 것입니다. 더욱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몇 천명씩 모입니다만, 전국적으로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서 주일학교를 하지 못하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손주가 컴퓨터로 게임을 하며 또 인터넷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 “할아버지 보세요”하는 것을 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이 더 악해지기 전에 하루 빨리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속히 재림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루 빨리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영혼구원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늘 이기적이 아니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걱정 없이 먹고 살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처럼 밤낮 잘 살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 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송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로 한창 젊은 나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곳까지 들어가 전도사역에 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의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습니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날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은 사명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 선교를 강행했습니다.
새들벡교회의 릭 위렌 목사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50년 이상 목사로 사역하셨고, 대부분 시골 중소 도시의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설교자로 사명감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께서 가장 애착을 보이신 일은,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해외에 작은 교회 건물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전세계에 150개 이상의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께서는 2년 전 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일 동안은 거의 24시간을 의식이 반밖에 없는 상태로 깨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꿈을 꾸시면서 그 꿈에 대해 크게 말씀하시곤 했는데, 숨을 거두실 무렵 갑자기 생기가 돌더니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 상태가 너무 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다시 눕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아버지는 그 말을 백 번 정도 더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마치 명령을 하시듯, 약한 손을 뻗어 내 머리에 얹고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일에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장차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보고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
행 20장 22~24절 / 이재철목사
3월과 함께 사순절이 왔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 부활하시기 40일 전 그 기간을 말합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기도와 묵상, 영혼 구원에 더욱 힘쓰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절기 중 하나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위해 예비하신 기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새벽을 깨워 승리하는 열린문 식구들이 됩시다!!!
부활의 영광과 승리를 기쁨으로 기다리는 열린문 식구들이 됩시다!!!
♬ 찬송하며 살리라 ♬
1. 이 험한 세상 나 살아갈 동안 내 주님가신 길 걸으며 내 주님을 찬양해
십자가 보혈 날 구한 그 사랑 나 매일 찬양을 드려도 늘 부족한 것뿐이니
후렴 나 호흡 있는 동안에 나 생명 있는 동안에 나 주를 찬양 하리라 내게 생명주신 주님을
2. 이 작은 손에 불 밝혀들고서 이 세상 다시 오시는 내 주님을 맞으리
내 무거운 짐 다 벗겨주시며 그 아름다운 금 면류관 날 위해 예비하시리
사람들은 보통 "당신 앞에 죽음이 있습니다"라는 말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 첫째, 죽음을 부인하고 회피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이 겁나기 때문입니다.
▶ 둘째, 자신의 죽음은 인정하지만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컷 즐기고 내 맘대로 살다 죽자'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다가 막상 죽음이 오면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해'라고 반응합니다. 다 즐기지도 못하고 어느 순간에 죽는 것입니다.
▶ 셋째, 받은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명이 있는 사람은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내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이 누군들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그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성령에 사로 잡혀)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22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영광된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에 더 부유하고 편하게 살기 위해 삽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는 주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께 받은 것이기에 고난이 있는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러기에 그 일에 영광이 있었고, 어느 누구도 사도바울을 넘어뜨릴 수 없었으며, 그 곳에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 이것이 사명 받은 사람입니다.
사명을 져버리고 피해 살면 10년전에 후회한 일들을 지금도 후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실 귀한 일을 발견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 '나는 인생 출장 나왔다'라고 생각하십시오.
보통 회사에서 출장을 보내면 해야 할 일들과 함께 교통비, 숙박비, 여행 경비까지 다 주고 보냅니다.
일을 잘 하고 돌아오면 발걸음도 가볍지만 일을 하지 않고 출장비로 다른 일을 하다오면 돌아오는 날이 겁이 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출장을 보내셨습니다. 주신 사명을 잊어버리지 말고 잘 완수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출장을 가면 정해진 출장의 기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출장 보내신 우리 인생의 출장 기간은 왜 잊어버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출장 나온 몸입니다. 돌아갈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을 이뤄 가는 축복된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천국 시민이 된 우리는 “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나는 아직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인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인가?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일꾼 신자인가,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인가?”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났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회개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다 장성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젖먹이 신자입니다. 젖먹이 신자는 아직도 옛 사람이 살아있고 옛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시기와 분쟁이 있는 교회는 바로 이런 젖먹이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육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들은 하루속히 은혜를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를 가리켜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게 되며, 거룩한 자가 되고 겸손한 자가 됩니다. 늘 감사가 넘치고, 예수 믿는 기쁨이 있으며, 행복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충성하는 일꾼이 됩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어린 성도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성도입니까? 사명을 알고 충성하며 사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아무쪼록 장성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지내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가 자리를 들고 걷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선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11~12을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이 죽기 전에 속히 살려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안식일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1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명이 중요한 이유는?
1.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지상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라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2. 우리의 사명은 위대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6:1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20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천국의 대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3:2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나눠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며, 옷가지를 나누고 안식처를 제공하며 여러 가지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4. 영원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느냐, 아니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느냐가 결정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한 순간의 복락이나 고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복락이냐 영원한 고통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결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5.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머지 않은 장래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 믿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을 알고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은 천국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라도 이 사명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자신의 결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날이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되고 이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몇월 몇일에 이 세상에 오시는지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일단은 복음이 전파되고 나서 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더 죄악이 관영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환난과 재난이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년보다 금년이, 해가 갈수록 더 험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을 굳게 먹고 사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어질 것입니다. 더욱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몇 천명씩 모입니다만, 전국적으로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서 주일학교를 하지 못하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손주가 컴퓨터로 게임을 하며 또 인터넷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 “할아버지 보세요”하는 것을 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이 더 악해지기 전에 하루 빨리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속히 재림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루 빨리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영혼구원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늘 이기적이 아니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걱정 없이 먹고 살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처럼 밤낮 잘 살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 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송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로 한창 젊은 나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곳까지 들어가 전도사역에 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의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습니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날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은 사명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 선교를 강행했습니다.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그 사명
행 20장 22~24절 / 조상호목사
헨리 나우웬이 쓴 책에 <마음의 문을 열고>라는 책에 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어느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발작을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간호사 두 사람을 불러서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 후에 진료를 시작하려던 의사는 환자가 오른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손을 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가 없어,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손가락을 하나 둘씩 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을 펴니까, ‘땡그랑’ 하며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퍼렇게 녹이 슨 1센트짜리 동전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1센트짜리 동전을 자기 목숨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그 동전을 잃어버리면 자기 존재가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와서 이 동전을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지? 이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라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매일매일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1센트짜리 동전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1센트짜리 동전이 여자의 인생의 핵심가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1센트짜리 동전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그 여자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로 삼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명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입만 열면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건강’을 인생의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오래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오래 사는 것‘을 인생의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날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돈을 인생의 최고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오래 사는 것‘을, ’돈 많이 버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회복 시리즈 네 번째로 진정한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한 사람, 사도 바울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썩어져 없어질 것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가슴에 ‘인생의 사명’(Lifelong Mission)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삶을 통해서 사명의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사명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첫째로 사명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한 가지 사명이 생겼습니다. 바로 복음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사명이 생기고 나서 그의 삶의 방향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지파 중, 베냐민의 지파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5~6)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그가, 빌립보서 3장 7절과 8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던 과거의 학문도,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수호했던 과거의 경력도, 당시 세계를 호령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시민권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 사명인 복음을 위하여 나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다메섹에서 변화된 후 바울이 추구했던 것은 세상의 평안이나 개인적인 성공, 안정된 삶, 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 그런 것들이었다면, 그는 과거에 자기가 누리고 있던 특권이나 높은 지위, 그리고 안정된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움직였던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움직였던 것은 그를 변화시키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 주신 삶의 목표였고, 또한 가슴 속에 간직한 사명이었습니다(행9:15). 그는 그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1997년에 세계를 슬픔에 잠기게 했던 두 여인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테레사 수녀입니다. 당시 온 세계는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 때문에 큰 충격과 함께 무성한 화제에 휩싸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선망 속에서도 끝내 불행했던 한 여인과, 온갖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베풀며 행복했던 한 여인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다이애나는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찰스 황태자와 결혼하여 궁전에서 호화찬란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불화로 인해서 다섯 번 자살을 시도했고, 대식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는가하면, 이혼한 후에는 국적을 초월해서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 행각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교통사고로 애인과 함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물론그녀가 황태자비로써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그녀의 삶은 결코 존경받을만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테레사 수녀는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이미 12살 때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가 6년 후인 18세 때에 부모 친척과 고국을 떠나 인도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주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1948년 어느 날 기차 여행 중에 기도하다가 수녀원을 떠나 버려진 사람, 집 없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기거하며 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테레사는 이 수녀원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에게 고침을 주고, 집 없는 자들에게 잘 곳을 제공하였습니다. 테레사는 캘커타에서만 3만 6천명의 부랑자들을 돌보았으며, 어린이집을 세워 버려진 고아들과 미혼모들, 그리고 불구아들과 정신박약아들을 돌보았으며, 나환자촌을 세워 150명의 나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녀가 1948년 세운 '사랑의 선교회'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캘커타를 중심으로 인도 전역에 분원이 설치되었고, 남미,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각처에 67개소에 이르는 분원이 설치되었습니다. 이 일로 테레사는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평생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 사명을 따라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갔지만, 그녀는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달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 줄 아십니까?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건강도 있는데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돈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는 사람, 건강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을까,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은 어디 가서 먹을까,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은 어디에 가서 떼울까 고민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과소비하고 사치하고 낭비합니다. 유명한 명품이나 사러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명이 없을 때 사람은 타락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사명을 위해 살지 말고 욕망을 쫓아 살라고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식욕을 채우기 위해 먹으라고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라고 유혹합니다. 성공을 위해 공부하라고 합니다. 출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뛰라고 유혹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사명을 위해 살지 말고, 본능적 욕망을 쫒아 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는 사람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명이 있는 사람은 명품에 쓸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위해 쓸 돈이 빠듯하고, 사명을 위해 쓸 시간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명 없이 살다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치하기 위하여 살지 않고, 사명을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명이 있는 곳에 절망은 없다
둘째로 사명이 있는 곳에 절망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27절을 보면 그의 삶은 고난과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상황 속에 빠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할 것입니다. 아니 절망하다 못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건강이 나빠진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교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그 동안 세워놓은 모든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특징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안디옥에서 출발했던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이제 거의 여정을 마쳐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원래 이 에베소는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을 떠나 이곳에 도착해 약 2년간을 머물며,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에베소는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이었지만, 그곳을 그냥 통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순절 절기를 맞이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모이게 될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서둘러 떠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은 바울에게 있어서 희망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23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이 매우 위험한 곳임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자기를 잡기 위한 모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결박과 환난뿐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메섹에서 변화된 후 바울이 추구했던 것은 세상의 평안이나 개인적인 성공, 안정된 삶, 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 그런 것들이었다면,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사랑을 쏟았던 에베소에 그대로 머물러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움직였던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움직였던 것은 그를 변화시키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고, 또한 그가 가슴 속에 간직한 사명이었습니다(행9:15).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예루살렘과 더 나아가 로마에 까지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박이나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요소가 또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을 지켜주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부름 받고 일을 할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그를 대적하던 사람은 다 죽었을지언정 민족이 멸망당하는 혼란기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늘 함께 하셨습니다. 다윗을 부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만나는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다가 만나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사명자로 부르셨다면,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방치시키지 않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가정을 지켜주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사업을 지켜주시고, 자녀들을 지켜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3) 사명이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셋째로 사명이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중국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허드슨 테일러는 “사명이 함께 있는 곳에 하나님의 공급이 중단된 적은 없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또 영국 출신으로 목숨 걸고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한 적이 있는 리빙스톤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그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으신다.”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의 본향에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남기신 것은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바로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십니다. 사명이 함께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아도 그의 사명이 다하기 전까지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죄수의 신분으로 타고 있던 배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4) 로마황제 가이사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전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사명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도 사명 때문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명이 없었다면 벌써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어느새 5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1999년 7월13일입니다. 청년수련회 첫째 날 저녁집회를 마치고 새벽기도를 인도하려고 자정을 넘긴 시간에 Akaroa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오다가 졸면서 100Km 구간을 운전하던 끝에, 제가 운전하던 차가 도로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자동차가 뒤집어져 바퀴가 하늘로 향하고 지붕이 땅바닥에 처박혔습니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 사고면 죽든지,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중상을 입든지, 머리가 깨지든지, 다리가 부러지든지 할 텐데, 저는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사고가 난 자동차에서 어렵게 기어서 빠져 나온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를 아직까지 데려가시지 않은 것은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구나!’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제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믿음은 ‘사명자는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명을 다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면 끝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쓰고 애쓰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을 따라 가지 말고, 사람을 따라 가지 말고, 권력을 따라 가지 마십시오. 사명을 따라 가십시오. 사명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물질도 허락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건강도 붙여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사명을 위하여 살아서 주님의 동행과 축복과 기적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리해보면 사명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명이 있는 곳에 절망은 없습니다. 사명이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인생의 사명’을 품고 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야 헛수고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경상도 양반집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하인 하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양반집의 주인이 그 하인을 불러 “애야, 도련님이 한양에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알고 있지? 너 오늘 한양 좀 다녀 오거라.”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이것저것 먹거리를 잔뜩 준비해서 그 종에게 들려 한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 하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양에 있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하인이 중도에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또 다른 하인을 보냈습니다. 며칠 후 늦게 출발했던 하인이 먼저 출발했던 하인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주인은 너무 화가 나서 “너 이놈,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느냐? 이놈”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 그 하인은 “한양 다녀왔습니다. 주인님이 시켰잖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주인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그러냐? 그럼 도련님은 만나고 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은 “아뇨? 주인님께서 한양에 다녀오라고 해서, 저는 한양 땅만 밟고 왔습니다.”라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아이구, 이 멍청한 놈아! 누가 너더러 그냥 다녀오라 했느냐?“하고 다른 종을 시켜 그 종을 힘껏 매질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인이 받은 사명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인은 주인으로부터 무슨 사명을 받았습니까? 한양에 구경하고 오라는 사명입니까? 아니면 한양 땅이 얼마나 경상도 땅과 차이가 있는지 밟고 오라는 사명입니까? 아닙니다. 주인이 하인에게 내려준 사명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도련님의 안부를 물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 사명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내가 누구로부터 사명을 받았어야 사명을 감당할게 아니야?”라고 반문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각각 고유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사명이 있다
사명 없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과거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모든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사명도 없이 태어났겟습니까? 우리는 사명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살아갑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안는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밥그릇이 왜 만들어졌을까요? 밥 담기 위해서입니다. 밥 담는 것이 밥그릇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밥그릇에 밥을 담지 아니하고 동전을 담으면 그때부터 그것은 밥그릇이 아니라, 동전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가위가 왜 만들어졌을까요? 가위는 무언가를 자르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종이를 자르거나, 어떤 물건을 자르는 것이 가위의 사명입니다. 만약 가위가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게 되면 가위는 쓰레기통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볼펜이 왜 만들어졌을까요? 이 볼펜은 글씨 쓰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볼펜은 가위처럼 물건을 자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볼펜이 물건을 자르지 못한다고 불평하거나,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볼펜은 자르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글씨 쓰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볼펜이 쓰레기통 신세를 지게 되는 때는 잉크가 떨어져 더 이상 아무 글씨를 쓸 수 없을 때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각각의 독특한 사명이 있습니다. 밥그릇은 밥그릇대로, 변기통은 변기통대로, 볼펜은 볼펜대로 독특한 사명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걸레에게도 걸레만의 독특한 사명이 있습니다. 무슨 사명입니까? 더러운 바닥을 깨끗이 닦아내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 사명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스스로 “나는 사명이 없습니다. 나는 사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명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나 평신도나,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나 연세 드신 분들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사명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다 독특한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명자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까? 아니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얼짱, 몸짱이 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부럽지 않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가 목표로 할 평생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까?
주님의 선한 일이 우리의 사명이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선한 일’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인 줄로 믿습니다. 이 ‘선한 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가 가슴 깊이 품어야 할 ‘인생의 사명’(Lifelong Mission)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이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은 왜 삽니까? 당신의 삶의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삽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은 왜 돈을 법니까?“ ”당신은 왜 공부합니까?“ ”당신은 왜 운동을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당신은 왜 다이어트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날씬한 몸매를 만들어 몸짱이 되기 위해서 다이어트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다이어트 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속에 이 ‘하나님의 목적’을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프랑스의 한 병사가 전투 중에 총을 맞아 가슴에 총알이 박히게 되어 급하게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시도하던 의사가 수술을 하다 말고, 그 병사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박혔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그러자 병사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아니오, 내 가슴을 조금만 더 깊이 파보면, 내 심장 중심에 내 조국 프랑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마디를 통해 젊은 병사가 자기 조국 프랑스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 속에도 ‘하나님의 목적’으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가슴을 조금만 더 깊이 파 보세요. 내 심장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입만 열면, 다이어트 이야기, 맛있는 음식 이야기, 건강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중심에는 하나님의 목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인생의 사명을 알고 살아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행한다는 이 사명의식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에 생명을 바친 삶
행 20장 22~24절 / 이수영목사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19:21에서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했다"고 썼습니다. 여기서 "이 일이 있은 후"란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두 해 동안 날마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셔서 병든 이들의 병도 고치며 악귀 들린 사람에게서 악귀도 내쫓자, 에베소에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마술책들을 모아다 불사르는 일이 벌어질 만큼 에베소에서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된(Cf. 행19:8-20) 후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이 이렇게 성공을 거두며 튼튼히 자리를 잡자 바울은 이제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갈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새 사역을 위해 로마로 가고자 했으며, 로마로 향하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로마로 가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을 때에 에베소에서 한 차례 큰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상당한 돈벌이를 하던 데메드리오라 하는 한 은장색이 바울의 전도 때문에 자기의 영업이 큰 타격을 받자 그를 위해 일하던 직공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비방하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체포하여 관가에 끌고 가는 등 바울을 반대하도록 에베소 사람들을 선동하고 격분케 하여 온 시내를 시끄럽게 한 것이었습니다(행19:23-41). 이 사건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의 항구도시이며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가깝게 위치한 밀레도에서 바울과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일을 전하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본문보다 몇 절 앞서는 20:15-18 사이를 먼저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행20:18-35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놓고 행한 에베소교인들을 향한 고별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이 개척선교로서는 성공적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중해지역의 동쪽에서는 복음이 계속적으로 확산되기 위한 튼튼한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거기서는 이제 다른 사람이 맡아도 잘 할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아직 복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국의 수도 로마는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온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발기지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애초에 로마에 정착하고 거기서 복음전도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서있었고 그는 남이 닦은 터전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곳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이 지중해지역의 서쪽 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페인 선교를 위해서 바울은 후원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로마교회가 그의 마지막 스페인선교의 후원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한 것은 이미 여러 차례였지만 그 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롬1:13, 15:22). 그러나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바울이 지중해지역의 동쪽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여길(롬15:23) 바로 그 때에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비방하고 배척하는 큰 소요를 일으켜서 바울을 떠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로 향하는 길을 재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고 성령의 강권하시는 역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에베소에서 로마로 곧바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인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다시 그 정반대편인 로마로 가려 했겠습니까? 본문의 기자인 누가는 바울의 이 예루살렘행의 목적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 가운데서 어렵게 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교회들로부터 걷은 연보를 먼저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바울 자신이 그의 편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모교회와 바울이 세운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교회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유익한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선교사역을 마무리하고는 로마제국의 서쪽 끝으로 가는 마지막 선교사역에 전념하려는 것이 바울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 자신이 써 보낸 편지인 로마서입니다. 롬15:22-28을 봅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스페인으로 나아가기 위해 로마로 가려는 뜻을 실현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이 성공적으로 정착된 시점에 뜻하지 않게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동때문에 에베소를 떠나게 되고, 그래서 그간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교회들로부터 걷은 연보를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한 후에는 홀가분하게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나아갈 전망이 생기는 것, 이 모든 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요 인도하심으로 확신하며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는 하려고 해도 되지 않던 일이지만, 이제는 하지 않으려고 해도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움직이심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22절에서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한 것은 바로 그러한 바울의 확신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에 매여 가는 것이라면 가는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 좋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그것을 예고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겪어온 일들을 돌이켜보면 결국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에게 잡혀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기 위한 길이라는 확신을 성령 자신이 주셔온 것이었습니다. 23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신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내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은 성령의 모순된 활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소명을 재확인하게 하시고 고난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예루살렘에서의 결박과 환난의 예고를 그 이후 여정 속에서도 반복하셨습니다. 바울 일행이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떠나 두로에 상륙하여 머물 때에 제자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했습니다(행21:1-4). 또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머무를 때에도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했습니다(행21:711).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눈물로 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이 결국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당하게 하였고, 그래서 로마로 가게 했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피를 뿌리게 했고, 그리하여 온 세계로 복음의 씨앗들이 퍼져나가 놀라운 결실을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순종은 불확실성을 안고 사는 결단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장래의 일이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죄 때문에, 특히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맹렬히 핍박한 그 죄를 생각하면, 벌써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하나님의 그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은혜로 아직까지 살아있으며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위대한 선교사역을 행할 수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더 바랄 것, 아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 귀한 것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조차도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 24절에서 한 말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 앞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이끄심에 기꺼이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는 안전한 것이나 확실한 것만을 좇고, 불확실한 것이나 위험한 것은 피하는 데에 지나치게 익숙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우리의 생명을 우리만을 위해 아끼고 있지는 않는가?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쉽게 잊고 지내지는 않는가?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 앞에서 내 생명은 물론이고 너무나 많은 것을 아끼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시간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물질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관심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체력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정성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즐거움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삶의 귀한 것들의 목록에서 제일 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도 바울에게서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동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위해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달려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그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그가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가치 있게 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는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뜻과 삶을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사순절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물음입니다.
당신의 묘비문은?
조상호목사 / 행 20장 22~24절
교회성장연구소를 운영하며 한국교회에 새바람을 불어넣으시는 명성훈목사님이 계십니다. 명 목사님을 선교대회에 갈 때마다 만나 뵈는데, 요즘 굉장히 유익한 한 권의 책을 쓰셨습니다. <빛나는 평신도>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 책에서 사람들이 삶을 사는 세가지 단계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생존단계(Survival Level)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사는 수준입니다.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급급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그저 돈 벌어서 잘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공단계(Success Level)입니다. 이 단계는 첫 번째의 생존단계를 넘어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수준입니다. 이 단계의 사람은 자기의 뜻을 이루고 남부럽지 않은 재산과 명예와 경험을 얻어서 안락한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못 느끼고 성취감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은 세상적인 성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은 진정한 만족과 보람을 주지 못합니다. 이러한 생존과 성공의 단계를 넘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의미단계(Significant Level)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왜 사느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하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나를 향하신,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찾으며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아픔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어려움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러한 목적 때문에, 그러한 의미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그저 세상 풍조에 발맞추어 나부끼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모든 일에 의미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단계에 속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생존단계입니까? 아니면 남부럽지 않는 세상적인 성공에 목숨걸고 살아가는 성공단계입니까? 아니면 매일 매일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의미단계입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아무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한번 불면 날아가 버리는 허상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아까끼에비치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당신의 평생 소원이 무엇입니까?” 혹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아주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오.”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고급 외투를 하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까짓 외투가 어떻게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의 소원은 오직 고급 외투였습니다. 그 노인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 동안 일하고 저축했습니다. 오직 고급 외투를 위해서 열심히 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80루불의 돈을 저축하여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 노인은 그 고급 외투를 입고 한번 고급 사교파티에 멋지게 등장해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외투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 날은 노인에게 성공한 날이자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외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노인은 강도에게 그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노인은 매우 절망했습니다. 그 노인은 단순히 고급 외투를 강탈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노인은 그의 성공을 강탈당하고 그의 행복을 강탈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노인은 좌절의 늪에 빠졌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하루하루를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골리라는 사람이 쓴 단편소설, ‘외투’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작가 고골리는 ‘외투’라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경우, 일시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행복은 강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절대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따라가는 듯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기루를 좇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달러를 자신의 왕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열심히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유의 미신과 소유병에 걸려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좀 더 좋은 아파트에 한번 들어가는 것을 평생 소원으로 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에 아주 좋은 자동차 하나 사는 것을 평생 소원으로 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배우자 얻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어떤 자리하나 차지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기쁨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유가, 세상의 성공이 어느 정도의 자기만족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삶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참으로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과 다윗입니다. 먼저 바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위대한 의미를 따라 인생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에는 분명한 비전과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180도로 변화된 후,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목숨걸기로 작정했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에서 ‘달려갈 길’이란 말을 NIV 영어성경에서는 Race, 즉 달리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육상의 달리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리기를 끝낼 때까지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조금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달리기 선수가 마지막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가듯이 어떠한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1973년 일본 마이니치 마라톤경기에서의 일입니다. 이 대회에 바로 전해인 72년도 뮌헨 올림픽 우승자였던 프랭크 쇼터가 출전했습니다. 그는 올림픽 챔피온답게 선두로 달렸습니다. 레이스가 중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두로 달리던 프랭크 선수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더니 시민들이 흔들어대는 종이깃발을 차례로 찢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코스를 이탈하더니 길옆에 있는 풀밭에 주저앉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레이스 도중에 갑자기 복통이 생겼고 그로 인하여 급한 용무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찢어간 종이깃발조각으로 급한 볼일을 마쳤습니다. 용무를 마친 프랑크 선수는 기가 막혀 그를 쳐다보는 관중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코스로 돌아와 경기에 임했고, 결국 그는 이 대회에서 2시간 12분 13초라는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승을 하려면, 우리가 승리의 면류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때로는 따가운 시선도, 사람들의 비웃음도 견디고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달리기를 끝낼 때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그 때까지는 자신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사명과 생명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지난주일 내내 묵상했습니다. 월요일부터 어제 저녁 늦게까지 계속해서 바울의 고백을 묵상했습니다. 제가 바울의 이 고백을 깊이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 목표가 뚜렷한 사람, 삶의 비전이 있는 사람은 그것에 목숨도 건다는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사도 바울은 31절에 의하면 3년 동안 에베소 지방에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려고 하는 예루살렘은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위험이 자신을 기다리고, 어려움이 자기 앞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가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가 그곳에 가서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자기 사명과 비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전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비전은 사람을 신명나게 하며 비전은 사람을 힘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9장18절에서 “비전이 없으면 망한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숨 걸만한, 인생을 걸만한 비전을 가지고 있을 때, 인생은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 있는 비전이 없다면 인생은 이미 실패한 인생입니다. 어느 가스 파이프를 묻는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현장소장은 작업 인부들에게 오더를 내렸습니다. 어느 정도의 깊이로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파도록 했습니다. 현장소장의 오더를 받은 인부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열심히 땅을 팠습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현장소장은 작업 인부들에게 어제와는 정반대의 오더를 내렸습니다. 어제 파 놓은 곳을 다시 흙으로 메우라고 하자, 인부들은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어제는 파라고 해놓고 오늘은 메우라니 “도대체 우리 소장은 어떻게 된 사람이야, 실력이 없어, 사람을 놀려도 유분수지"라는 불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인부들은 현장소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그에 따른 노임을 받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던 인부들이 다음 날에는 하루 종일 불평하며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메우는 일은 땅을 파는 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쉬운 일인데도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비록 힘이 들어도 의미가 있는 일은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노동현장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의미 없는 일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의미만 분명히 주어진다면, 확실한 명분만 있으면 열심을 다합니다. 사도 바울은 의미 있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간질이나 안질과 같은 육신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좌절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의 갈멜산의 참피온 엘리야는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며 좌절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시자 낙심하여 갈릴로 동료들과 돌아와 고기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가 ‘지쳤다, 좌절했다, 낙심하여 주저앉았다‘라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던 것은 그가 초능력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가 우리와 성정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더 극심한 어려움과 고난과 환난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낙심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후4:8,9)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낙심 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그에게는 비전이 있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찾았기 때문에, 넘어질지라도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맡겨진 일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목적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왜 우리가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중동 사막에는 베드윈이라는 무리가 있는데 이들은 장막을 치며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니는 유목민입니다. 1947년 어느 봄철 이들 중 한 목동이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어느 지역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유난히 동굴이 많았는데, 그는 심심풀이로 돌 하나를 들어 어떤 동굴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던진 돌이 동굴로 들어가더니 쨍그랑하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신기하게 여긴 목동이 들어가서 보니 그 동굴 안에는 10개의 항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10개의 항아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홉 개의 항아리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고 한 개의 항아리에서만 글씨가 적혀있는 가죽으로 된 두루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망한 채 그 두루 마리를 가지고 와서 자기 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 가죽으로 신발 끈이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신발 끈으로도 적합할 것 같지 않아 그냥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해사본’이라 불려지는 성경사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보물이나 진주보다도 더 귀한 역사를 보여 준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성경 사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사본을 그저 신발 끈으로 사용하려 했을 뿐더러 가치도 모른 채 2년 동안이나 묵혀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에게 원하시는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의미를 발견하면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도 극복합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봉사의 의미가 분명하면 자기 재산을 다 팔아가면서 봉사합니다. 그런데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교회 나가는게 지겹습니다. 고달프기만 합니다. 봉사하다가 시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43:7)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우리를 지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고전10:31)에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모든 삶에 현장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하나님의 영광 가리는 것이라면 삼가시기 바랍니다.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고 오늘 새벽에 떠나신 이여호수아 목사님은 금요일 저녁, 선교의 밤에서 당신은 삶의 분명한 목적을 찾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했습니다. 저는 이 목숨을 드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서원 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면 떠나고 머무르라고 하면 머무르겠습니다. 반대로 저는 떠나라고 하는데 떠나지 않는 죄를, 머무르라고 하는데 머무르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여호수아목사님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떠나야 할 때 미련 없이 떠나고, 머물러야 할 때 확실하게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기를 바랍니다. 또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평생동안 무엇에 의미를 두고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13장 36절 말씀을 읽다가 이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저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다같이 (행13:36)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다윗의 80년 인생을 요약해 놓은 말씀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사람이 죽으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에 새겨 넣는 비문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간단하게 다윗의 비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동안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다가 잠들었더라.” 보통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고 누구의 묘”하고 몇 년 출생, 몇 년 사망,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뒷면에는 자손들 이름을 적어놓는 것이 고작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성경구절 한 절 적어 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구인들은 좀더 구체적으로 새겨 넣는 경우가 많아 존 루이 같은 교육학자의 비문에는 “가르치는 즐거움을 알고 산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페스탈로찌의 비문에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놀다 간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 36절을 통해서 본 다윗은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다가 잠들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비문이라면 이러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비문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절은 다윗 자신이 스스로 남긴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충실한 신하들을 시켜 그들이 남긴 말도 아닙니다. 다윗이 죽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붙여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 땅을 떠나게 된 후 우리의 비문에 뭐라고 새겨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뭐라고 정리해주실 것 같습니까? “나다, 먹다, 죽다”라는 글이 새겨지지는 않을런지요? “평생동안 돈 돈 돈만 외치다가 간 사람”이라고 새겨지지는 않을런지요? “싱글 핸디를 목표로 발버둥치던 사람”이라고 새겨지지는 않을언지요? “당구알을 벗삼아 살아가던 사람”이라고 새겨지지는 않을언지요? 저는 다윗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거룩한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대신에 우리의 이름이 들어가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성도들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힘쓰다가 잠들었노라”라는 비문이 새겨지기를 축원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입든지 운전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다가 잠들었노라"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
행 20장 22~27절 / 김영규목사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2-27)
나의 달려갈 길을 완주하라
오늘 읽을 말씀은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설교 중에서 두 번째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 앞에 놓인 당면 과제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 부분의 핵심 구절은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먼저 24절의 전반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24) 수식어들을 빼고 이 문장을 요약하면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달려가고 있는 길이 있습니다. 바울 당시 그리스에서는 매년 올림픽 경기, 혹은 이스무스 경기와 같은 경기가 열렸습니다. 각종 경주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정된 트랙을 달려야 했습니다. 자기에게 지정된 트랙을 달리지 않으면 실격입니다. 인생은 달리기 경주와 같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트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내가 달려갈 길”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 “drovmon mou”영문 성경에는 “my course”라고 번역합니다. 사람마다 정해진 트랙이 있습니다. 그 길을 달려야 합니다.
바울이 달리는 트랙은 곧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 주님이 주신 바울의 사명은 곧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사명(diakoniva)이란 말은 종으로서 시중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공무상의 직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받은 직무가 있습니다. 그 직무는 일시적인 것도 있고 평생 담당해야 될 것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 전파의 직무를 평생 직무로 여겼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 떠나는 날까지 감당해야 될 직무가 바로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인생의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영부영 사는 게 인생이 아닙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냥 즐기는 게 인생이 아닙니다.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결혼도 소명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 한 가문을 이루는 것,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것, 공적인 직책, 내가 가진 지위나 재산, 혹은 무형의 재능...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들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내가 달려갈 길, 즉 사명이 있다면 또한 그 길을 마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24절 후반부가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 경주장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마라톤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그 코스를 완주하는 겁니다. “마치려 한다”는 단어는 “teleiovw”(텔레이오)입니다. 이 단어를 영문 성경은 “finish”(KJV, NIV)로 번역하기도 하고, “accomplish”(RSV)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끝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해진 과정을 완수했다는 의미에서의 마침입니다. 도중 하차가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야 합니다.
마라톤 경기는 매우 힘듭니다. 42.195km를 달리는 동안 무슨 변수가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신체적 이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불쑥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앞날이 매우 험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세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2-23) 미래에 당할 일들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오직 확실한 것은 고난의 길이란 점입니다.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울이 당할 일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예언들이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21:4)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행21:10-11)
힘들어도 경주는 계속됩니다. 결코 코스를 이탈할 수 없습니다.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보맨 편지에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롬15:30-31) 힘들어도 인생은 전진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완주할 때까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생명을 바쳐라
24절의 두 번째 주제는 생명을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인생 경주를 위해 내가 할 일은 생명을 바치는 일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삶의 과제가 있다면 그 과제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죽을까봐 두려워합니다. 병드는 것 두렵고, 사고 나는 것 두렵고, 전쟁 나는 것 두렵고, 지진 일어나는 것 두렵고, 굶주리는 것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사문제가 그리스도인의 테마는 아닙니다. 생사를 초월하여, 어디에 생명을 바칠까 하는 것이 테마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섹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최불암 씨리즈”에 보면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있다가 없는 게 뭐가 문제냐?” 유모어가 섞인 해석입니다. 사람들은 살고 죽는 데 가장 큰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죽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 즉 세상 살 동안의 생명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바쳤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
무엇엔가 생명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 목숨을 바친 사람은 세상에서 당하는 일들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22절 23절 말씀을 보세요. 바울은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그런 중에도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성령께서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너는 예루살렘에 가면 붙잡혀 옥에 갇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크게 문제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까? 건강이 문제입니까? 돈이 문제입니까? 자식이 문제입니까? 직장 일이나, 사업이 문제입니까? 그런 문제들이 너무 크게 느껴집니까? 주님이 주신 인생의 사명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주님께 목숨을 바쳐 보세요. 저는 대학 시절에 큰 병을 만나 좌절한 적이 있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려고 하면 모든 것이 다 힘들었습니다. 먹고 사는 게 힘들고, 경쟁하는 게 힘들고, 건강 유지하는 게 힘들고, 사람 만나는 게 힘들고, 다 힘들어요. 그런데 주님을 위해 내 인생을 쓰기로 작정하고 났더니 모든 것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경험을 자주 고백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고후6:4-5)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오늘 주님께 내 생명을 바치세요. 주님을 위해 인생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세요. 그러면 내 인생의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보세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인생 짐을 다 주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평안합니다. 안식합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 보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그 멍에가 뭘까요? 주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 자기 부인이 뭡니까? 자기 십자가가 뭡니까? 자기를 주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목숨을 거는 거예요.
여러분! 살려고 발버둥치지 마세요. 죽음이 두려워 평생 떨면서 살지 마세요. 어차피 잠시 후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납니다. 차라리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어디에 바칠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뭔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에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가. 그래서 언제든지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5-27)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말은 빚진 게 없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파수군이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경고 나팔을 불지 않아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면 그 피 값을 찾겠다고 했습니다.(겔3:17-19, 33:1-6) 바울은 복음의 나팔을 열심히 불었습니다. 그러므로 피 값을 갚을 일이 없습니다. 자기 사명을 완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께 매여 있으라
세 번째 주제는 성령께 매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성령께 매여 살았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안에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특히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담당하는 모든 일에 성령께서 간섭하십니다. 바울을 보세요. 바울을 선고사로 뽑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바울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부르시고 인도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행16:6)
바울의 앞길을 미리 알려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고, 로마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께 매여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2-23) 복음 전파의 주인공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일군들은 성령님께 매여 살면 됩니다. 성령의 깨우침, 성령의 감동을 예민한 감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당처럼 무슨 신령한 감각을 따로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들으면서 삶을 면밀히 관찰하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바울의 고백 중에 보면 수동형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집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행4:8)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행6:10)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8:2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행10:19)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행11:12) 사도들은 성령께 매임으로써 능력과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성령께 매임으로써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께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는 나아갈 뿐입니다.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을 따르세요. 성령 충만을 받으세요. 성령께 사로잡혀 성령이 인도하는대로 사세요. 최대의 능력자가 됩니다. 귀신을 이깁니다. 병을 고칩니다. 박해를 이기고, 고난을 이깁니다. 성령이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오늘 이 시간에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세요. 내 뜻을 버리세요. 성령 충만을 구하세요. 성령께 매여 말씀 들으세요. 성령께 매여 전도하세요. 성령께 매여 기도하고, 성령께 매여 예배드리세요. 성령께 매여 귀신을 쫓아내세요. 성령께 매여 병을 고치고, 성령께 매여 생명에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령께 매일 때에 주님이 주신 모든 사명을 완수할 줄 믿습니다. 성령께 매일 때에 주님이 주신 내 인생 경주를 완주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행복한 인생을 사는 지혜
행 20:22-27 / 문기태목사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어느 부인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두 아이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그녀를 떠나버렸고 그녀는 쓰러져 누운채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친척들의 권유로 홀로 기차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불행을 내 보이고 싶었고 함께 슬퍼해 주기를 원했던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여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하소연했습니다.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여자가 있을까요."
자기의 슬픔을 다 털어놓은 뒤 그녀는 애원하듯 여인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처음부터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여인은 쓸쓸히 웃으며, "저는 그토록 아이를 원했으나 낳지 못했답니다. 그 때문에 남편과 시댁식구로부터 내침받아 혼자 살고 있지요. 저는 아직 엄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저도 엄마라는 말을 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여인이 자기에게 이렇게 다그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아이도 낳았어요. 엄마라는 말도 들어봤고요.'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세상은 새롭게 열렸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슬픔의 늪에서 벗어나 햇살을 만지는 삶을 새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수록 더 고귀한 행복을 누리는 가치관의 전이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알아갈수록 천국 지향적으로 사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설정하고 사느냐에 따라 행복지수가 달라집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평생 행복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치관의 중요성을 이렇게 정리해줍니다.
첫째, 분명한 가치관은 동기를 부여합니다. 즉 가치철학이 분명할수록 뚜렷한 목표를 정하고 살아갑니다.
둘째, 분명한 가치관은 결정을 도와줍니다. 어려운 결정에 직면할 때도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쉽게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셋째, 분명한 가치관은 성장의 기초가 됩니다. 분명한 가치를 세워두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더욱 성숙으로 이끌어갑니다.
넷째, 분명한 가치관은 내면적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사람일수록 갈등이 많고 자주 흔들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이 분명할수록 마음에 평안이 있고, 흡족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가장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탁월한 인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입니다. 당대에 최고의 권력과 부와 화려함을 쥐고 있던 로마의 총독과 분봉왕인 베스도, 버니게, 아그립바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게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행복했습니다. 바울을 행복으로 이끈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1. 성령에 지배받는 성품입니다.(22)
복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품입니다. 성품은 하나님에 의해 빚어집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재능은 혼자서 배양하지만 성품은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성품이 좋으냐, 나쁘냐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 행동입니다. 그러나 자연인의 성품만으로는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는 것이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연인의 성품으로는 해를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예루살렘의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지배받는 바울은 손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순종합니다. 22절에 '보라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성령께 사로잡혀 이끌려가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위대하게 쓰임받습니다.
어제 어느 집사님과 통화를 하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때는 내가 성령 충만해서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자원했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이것 저것 따져보니까 아닌것 같아요. 바꾸어 주세요. "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집사님! 성령 충만할때 결정한 것이 최선입니다. 최고로 잘한 결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면 후회가 밀려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번복하지 마세요. 성령께서 감동하실때 순종하면 결국 행복해집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곧 사단이 그 감동을 빼앗으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햇갈리게 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바울과 같이 성령에 이끌려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떠다밀면 이것 저것 계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가장 행복한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2. 비전과 명확한 인생의 목표입니다(24)
행복한 인생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꿈과 비전이 명확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목표설정에 유의할 점은 목표가 확실해야 하고 목표는 시기적으로 적절해야하고 목표는 성취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목표가 구체적이고 단순해야 합니다. 목표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언제까지 이룰 것인가 명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비전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며 별과 같이 번성하는 자손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을 해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그가 인생을 사는 이유요, 목적임을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보여 주셨지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자신의 생명조차 맞바꿀 수 있다고 하며 비장한 각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비전은 보는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려고 하는 대로 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명의 두령이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중에 열 명은 가나안 사람들을 거인으로, 자신들은 메뚜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사람들을 밥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대상을 보고 돌아왔는데 전혀 다르게 보입니까? 한 무리는 나타난 현상만을 보았고 다른 무리는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비전은 항상 함께 갑니다. 비전은 믿음의 눈으로 앞을 내다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건을 보게 된다면 믿음과 비전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기 전에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기 전에 하늘의 수 많은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비전을 보게 하시고 계속 믿음으로 바라보며 끈기있게 나아갈 때 성취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비전과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그것은 영원토록 가치가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입니까? 혹 여러분이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아무 비전도 없이 살거나 쉽게 가치가 변하는 세상의 시시한 것에 인생의 목표를 두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분에게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고귀한 비전을 주시고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들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3. 탐심으로부터 자유입니다(26)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것은 탐심입니다. 인간의 탐심은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을 때 사단은 이 탐심을 하와의 마음속에 집어넣어 범죄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재물의 탐심에서 자유를 누리고 선교사역을 감당합니다. 26절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라고 말합니다. 33절에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믿으나 행복은 돈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다 된다고 생각하나 실상 돈으로 안 되는 일이 무척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요셉은, 여호수아는, 엘리사는, 바울은 모두 욕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애를 크게 쓰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크게 쓰실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크게 쓰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탐심을 버리기까지 기다리십니다.
15분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유망한 청년이 30세에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그만 병이 들어 의사로부터 15분 후면 죽는다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는 불안과 초조에 떨며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15분, 14분, 13분 흘러갑니다. 그때 "편지요." 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가 배달됩니다. 내용은 억만장자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으로 그 삼촌의 재산 상속자가 쳥년이라고 하는 변호사의 통보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또 흘러 시계는 이제 청년의 생명이 10분, 9분, 8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때 다시 "편지요." 하면서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용은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시간은 생명이 7분, 6분, 5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때 또 "편지요." 하면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결혼을 승락했다는 애인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시계는 멈추지 않고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마침내 청년이 숨을 멈추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 납니다.
억만장자의 유산 상속도, 박사학위도, 결혼 승락도 그 청년에게는 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15분은 15개월이 될 수도 있고 15년이 될 수도 있고 그 두 배인 3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를 붙잡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15분이든, 15년이든 의미가 없기는 똑같지 않습니까?
탐심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유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우리가 실제로 가져야 하는 것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세상의 소유를 바라보게 하는 태도와 방식입니다. 탐심과 탐욕은 영혼을 병들게 하며,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어 여러분 모두 성령에 지배를 받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비전을 주시어 여러분 모두 명확한 인생의 목표를 붙잡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붙잡고 여러분 모두 탐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집중, 최대, 그리고 사랑
행 20장 23~24절 / 이장호목사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은 의미 있다고 받아들이고 의미를 발견하면 실천도 잘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치나 의미를 주지 못하는 일에는 금방 싫증내고, 지치며, 짜증내기도 합니다. 오래 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싱가포르 단기 선교사로 출국하려고 잠시 한국에 머물 때였습니다. 저희 가정이 빌려 쓰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습니다. 여름 폭우로 인해 지하가 물에 잠겨 전기적인 고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아파트가 11층에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외출하기 위해 11층 집에서 오르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까마득했는지요? 무거운 것 운반할 수 없으니 조금씩만 장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무튼 최소한 하루 한번 이상은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폭우가 쏟아진 후 닥친 폭염 속에서 11층 아파트 계단 하나하나를 걸어 올라가고 걸어 내려가는 일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빨리 고쳐내지 못하면서도 죄송하다는 방송 한번 제대로 하지 않는 관리사무실 때문에 짜증도 많이 났습니다.
그런데 발상과 의식의 전환을 해보니 11층 오르내리는 일이 참 다르게 와 닿았습니다.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날에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면서도 콧노래마저 흘러나왔습니다. 비결이 무언지 아십니까? “한 며칠 운동도 못했는데, 덕분에 하체가 튼튼해지겠다.”요즘 흔히 말하는 웰빙을 위해 운동 기회로 삼겠다고 작정하니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꼭 같이 힘든 일을 놓고도 의미나 가치를 발견할 때 짜증이 아니라 신바람 콧노래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 발견의 여부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주에 매우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축제 0527” “0527 전도축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왜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인 줄 아십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서자는 이 행사는 단순히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잔치가 아닙니다. 이 축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새 생명 천국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두루 다니시며 회개와 용서의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사람들을 이 생명 전도축제로 초청하신 것이고,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복음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내리신 것도 이 새 생명 천국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들의 선배 사도 바울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최고로 가치 있는 일로 간주하며 살겠다는 좌우명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23, 24절.”사도 바울도 예수님 본받아 새 생명 천국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고자 한 평생을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잃어버린 나이 어린 자녀, 오랜 세월 지난 후 다시 찾게 되었을 때 부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장기 미아를 되찾은 부모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잃어버린 영혼이 회심하게 되면 그 이상의 기쁨이 하늘 천국에 가득해집니다. 눅 15:10“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눅 15:24에는 돌아온 탕자를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다가 내가 다시 얻었노라.”“I found you!"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 풍악과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감격스럽게 회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베풀어진 세례식입니다. 모든 예배순서는 세례식에 초점 맞추어져 있습니다. 설교도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 무척 짧게 진행됩니다. 세례자와 가족, 그리고 인도자도 함께 단 위로 올라갑니다. 세례가 진행되는 동안 이미 녹음되어 있는 세례자들의 짤막한 간증이 들려나고 있습니다. 때론 영상도 비쳐집니다. 자신이 아는 새 신자가 세례 받을 때마다 청중들은 환호성을 칩니다. 심지어 휘파람도 붑니다. 세례를 받으면 가족과 인도자는 단에서 내려오지만 세례자는 그대로 준비된 자리에 도열합니다. 그리고는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모든 청중들은 새 신자들을 향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칩니다. 자신이 예수님 만나 구원받고 세례 받은 그 때의 감격이 기억나는지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 천국의 기쁨!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준비해온 “전도축제 0527”는 다만 인간에게만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대단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치 있는 전도 축제에 임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집중의 원리가 발견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마치려 함에는,”“if only” “단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칠 수만 있다면,”하면서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목회 한 적이 있었고, 이방 땅을 다니며 장막 제조하고 판매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복음 전도자요, 사도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에겐 이 복음 전파가 가장 중요한 핵심 사명이었습니다.
돋보기로 종이 태우는 실험이 기억납니다. 초점을 정확하게 맞춰야 종이가 타기 시작합니다. 이 초점은 곧 집중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관심이 분산되면 효과를 내기 참 어렵습니다. 근육운동도 관심있는 부위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치기만 하고 근육이 늘지 않습니다.
교회도 참 여러 가지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복음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 구원하는 사역, 사람 살리는 이 사역과 우선순위를 다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빈민 자활을 하고, 통일 대비 사역을 하며, 인재를 양성하고자 함도 결국에는 생명을 살리는 천국 잔치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국내에 여러 기관을 돕고, 해외에 선교를 하며, 우리의 차세대를 양육함도 결국에는 생명을 살리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만인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도 결국 우리가 만나는 영혼들이 회심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번 5월 27일까지만이라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그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사역에 집중하십시다.
이 시간에는 특별한 순서를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이를 위해 주보와 함께 나눠드린 태신자 카드에 각자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함께 전도대상자의 이름만이라도 기록하십시오. 자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태신자 카드를 작성하여 제출하신 분들도 다시 한 번 작성합니다. 저를 보지 마시고 지금 작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주일 출석이 거의 확실한 분들은 태신자의 이름 외에도 몇 부 예배에 오실 예정인지 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이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만일 출석이 확실치 않으면 그래도 희망하시는 예배와 함께 물음표를 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다 작성해주십시오. 그리고 봉헌 시간에 제출하여 주십시오. 계속 작성하시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최대의 원리가 발견됩니다. 바울은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영혼 구원하는 일을 더 가치 있게 생각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희생의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죽을 각오로 미친 듯이 달려들면 아무도 못 건드리고 무언가 이뤄냅니다.
지금은 미국 이민교회의 집사님이 되신 한 북파공작원의 이야기입니다. 이민 초창기에 시카고 일대의 5인조 조직 “엽전 파이브”가 시비를 걸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사님께서는 그 5명을 보란 듯이 다 해치운 무용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전직 북파공작원이라 그런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체구는 왜소했는데 그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집사님의 대답은 참 간단했습니다. “목숨 내놓고 죽기 살기로 덤비면 이깁니다.”였습니다.
여러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한가롭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참여하는 행사가 아닙니다. 다 바쁘게 살아갑니다. 정신 빼놓는 생업전선에서 다른 영혼까지 배려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영혼 구원하는 이 일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 희생하며 최대 에너지로 열심 내자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이번 일주일 동안만큼이라도 예수님 없이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목숨 한번 걸어보십시다.
끝으로는 사랑의 원리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고백에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의 동기가 깔려 있습니다. 천국 잔치를 꿈꾸며 달려대었던 바울은 고후 5:1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자신의 여정을 이끌어갔던 것은 동인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음을 감격스레 표현했습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사랑이 특심하여 롬 9:3에는“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따라서 내가 어떻게 취급당하고 어떤 대접 받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영혼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빌 1:15-18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만일 우리 좋기 위해 한마당 잔치벌이는 것이라면 자기만족 위해 열심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사랑이 빠지면 안 됩니다. 고전 13:1-3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 산을 옮기는 믿음, 모든 내어주는 구제와 내 몸 불사르는 열심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 없다 하셨습니다.
이번 전도축제의 최고 host는 행사 맡은 몇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도 아닙니다. 잔치의 주인장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축제의 주빈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입니다. 그 영혼을 긍휼이 여기고, 그 영혼 사랑하여 진행되는 천국 잔치여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취급되어도 복음이 전파되어 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집시다.
실종된 지 20년 된 장기 미아가 전기료 고지서에 사진을 통해 가족의 품에 안기는 일이 지난 2005년에 있었습니다. 복지재단 “어린이 찾아주기 종합센터”는 미아 찾기 캠페인을 벌이면서 요금 통지서에 미아들의 사진을 싣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겁니다. 1986년 3월 당시, 지능 발달이 늦은 10살의 박재명 군은 집을 나간 뒤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가족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수년간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있으면 괴로워하며 더 이상 찾을 필요는 없겠는데.....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사람들한테 구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실종된 지 15년 정도 지난 2000년, “어린이 찾아주기 종합센터”을 알게 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진 등록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5년 만에 인천보육원으로부터 자신들이 한 때 보호했던 아이와 비슷하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가족 재회가 일어났습니다. 정신발달 지체아를 남들은 벌써 포기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또 다른 자녀, 방황하고 있는 우리의 예비 가족,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별설교
행 20장 24절, 32-38 / 유민용목사
바울의 고별설교 가운데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 고백했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한주 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설교도 했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이 죽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며 담아 내고자 했던 그 깊은 고백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 보면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완수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24절)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32절) 바울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은혜와 사랑의 길’은 자신의 생명 보다 더 귀한 어떠한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현대교회에는 사라진 것일까요?
32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번역 합니다.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말씀의 큰 가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바르트 (K. Barth :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은 매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을 가르키며, 계시된 말씀은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배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뿌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는 권위와 전통의 뿌리를 거부합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 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교훈이 됩니다.
바울은 말씀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의인화 하듯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마음 안에 담겨 질수록 한개인의 인격은 아름답게 빚어지게 됩니다.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향을 맡게 되듯이. 바울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안에 가득 찬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로 가득 찬 바울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 바로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관계에 목말라 하거나 관계를 떠나 홀로 있는 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인간은 은혜가 없으면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경쟁사회속에서 뒤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적인 사람이었는데 율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마음 안에 죄가 가득하다고 곤고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씀 안에서 인격적 관계 안으로 초대되어 보니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뛰어난 성과를 이루고 높을 성적을 받게 해주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속상한 일, 참기 힘든 사람을 만날때에도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가도 주께서 오래 참아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맡길 때에 신앙이 바로 세워 질 것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 받는 유산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세상에서 경험한 것들로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학습된 생각 경험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교만에 갇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성경을 묵상해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으니까 말씀을 알아도 거룩한 종교성만 유지하게 되는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결국 십자가에서 찌르는 창과 못을 다시 빼서 사랑으로 그 피를 손수 닦아 주시며 자신을 찌르냐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심방을 가면 은혜와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시곤 합니다. 이 큰 사랑을 받아도 될까하는 마음이 들지만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하늘가족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하늘 가족으로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조건들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입술의 말은 한없이 가벼워 지고, 작은 시련과 핍박에도 믿음이 요동치듯 흔들립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가야할 길 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고 실제적으로 키우다 보면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느끼는 때를 경험합니다. 삶을 통해서 부모의 헌신을 실제로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리더십들에게 사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31절에서 (1) 자신을 먼저 살피기 전에 양떼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고 합니다. (3) 교회 내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눈물과 겸손으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울때에 3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들이 들어 올 텐데, 그들을 흉악한 이리떼에 비유합니다. 이리떼는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와 대조되는데, 양떼를 늑탈하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라고 했습니다. 1989년 뉴욕의 리디머 교회를 설립한 팀켈러 목사(1950-2023)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몇주 전에 녹화한 영상 메시지를 교회 리더십들에게 공유를 했는데요. 그는 3가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사명자는 칼날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참여하되 동화되면 안되고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소비만 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뉴욕에 와서 이력서도 넣고, 행복한 교회 경험도 하고 싶고, 좋은 음식점도 가고 싶겠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일에 시간과 돈과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자신과 교회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림으로 죄의 값을 치른 예수님을 전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남긴 세번째 조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명성과 자격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과 명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을 경우에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합니다. 세상만큼 성과를 내야하고 세상보다 더 그럴듯 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교회가 세상의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경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세워가려는 순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리더들이라면 교회를 세우는데 나의 생각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한마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자신의 태도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점검하고, 다른 이에게 향하는 마음은 관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은혜의 인격성을 파괴하는 뿌리가 되지요.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연약한 지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하는 은혜의 말 한마디가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삶이 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주님의 거룩함을 세상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명자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은 예수님의 겸손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길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흔적이 사명자의 영성을 더 깊어지게 합니다.
이제 바울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죽음은 언젠가 모든 사람이 홀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죽음과 헤어짐의 두려움이 바울이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믿음이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열심과 어떤 사명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그리스도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 할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대신 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해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풍랑, 경제적 풍랑, 인생의 문제의 풍랑이 몰려올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고, 잠잠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다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항구에서의 뜨거운 눈물 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울고 에베소 장로들도 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이신 길은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기도하는 그 장면이 너무 진하게 그려집니다. 바울은 가야할 길이었기에 함께 했던 장로들을 뒤로하고 밀레도 항구로 갑니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이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의지를 사로잡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역사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마친 후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교회가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며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과 은혜, 사랑과 눈물의 현장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우리가 계속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항해하며 바라 본 그 바다는 주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강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탄 배는 방향 없이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항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키를 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돛에 바람을 불게하여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항해였을 것입니다. 한주도 인생의 바다속에서 주와 동행하시며 승리하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