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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며 권한 말
행 20:25-38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행 20:25-38 / 나는 여러분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 둡니다. 앞으로 여러분 가운데 누가 어떤 심판을 받게 되든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27) 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여러분에게 남김없이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28) 이제 여러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령께서 맡겨 주신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그 교회를 자라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 떼와 같은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양 떼들을 마구 해칠 것이며 30) 여러분 중에서도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들이 나타나 자기를 따르라고 할 것입니다. 31) 잘 살피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함께 보낸 그 3년을 잊지 마십시오. 밤낮으로 여러분을 보살피고 여러분을 위해 흘린 내 많은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돌보심과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된 사람들이 상속받는 그 모든 몫을 여러분에게도 줄 것입니다. 33) 나는 지금까지 돈을 탐한 일도, 훌륭한 의복을 탐한 일도 없습니다. 34)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나는 내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했고 심지어 나와 함께 지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까지도 공급해 왔습니다. 35)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언제나 여러분에게 본보기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6) 바울은 연설을 다 끝내자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37) 그들은 작별을 슬퍼하며 모두 한 사람씩 바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38)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애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바울을 배가 있는 곳까지 전송하였다.
바울이 삼 년 동안 쉬지 않고 눈물로 목회한 에베소 교회를 잘 양육하고 지킬 것을 부탁합니다.
바울은 책임을 다했다고 함(25-27)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 예루살렘에서 심각한 공격을 받으리라는 것을 안 바울은 자신이 소아시아를 다시 방문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 했습니다. 첫 번째 로마 감금에서 풀려난 후 그곳을 다시 방문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 바울은 이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26)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책임을 완수했으므로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자기로서는 책임질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겔 3:16-21). 이만큼 책임을 다한 바울은 장로들과 모든 성도에게 모범이 됩니다.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7)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바울이 떠난 후 상황에 대한 권고(28-32)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여러분’은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내가 떠난 후에”(29) 교회 밖에서 거짓 스승들이 양의 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침투하리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거짓된 자들은 교회의 허약한 틈을 타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참과 거짓을 섞어 “어그러진 말”로 치명적인 공격해 옵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악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합니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했습니다.
바울과 작별(33-38)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34) 바울은 복음에 근거하여 생계를 지원받을 권리가 있었고(고전 9:3-14) 때로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비량 전도를 했고 돕고 주는 것이 복됨을 권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고 울며 모든 사람들이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말에 근심하며 전송을 했습니다. 사역은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적용: 우리는 예수를 본받아 바울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주님이 주신 현재로 충분하기에 이미 가진 것에서 감사하면 삶이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날마다 싸워야 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잘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미 완성하신 일을 믿고 바라보며 안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갈 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싸우십니다.
호크마 주석
=====20:25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막 1:4). 왜냐하면 븍음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이기 때문이다(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막 1:14-20 주제 강해 참조). 따라서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해서 구별되게 생각하는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그릇된 신학의 결과이다.
=====20:26
오늘 - '엔 테 세메론 헤메라'(* )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날' 즉 '너희와 작별하는 마지막 이날'을 강조한 것이다. 증거하노니 - '마르튀로마이'(* )는 일반적으로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는 뜻이며 본절에서처럼 중간태로 사용되면 주로 '엄숙하게 호소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특히 이 말은 신약에서 바울만이 자주 쓴 표현으로 중대한 선언을 할 때 사용했다(갈 5:3).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바울은 여기서 겔 33: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겔 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는 죄악 중에서 죽고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다(겔 33:8, 9). 따라서 바울의 이 선언은 20절의 진술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엄숙한 고백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자기의 책무(責務)를 남김없이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20:27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전하였음이라 - 20절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온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말한다.
=====20:28
너희는 - '너희'는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들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같은 수고를 당부한다. 삼가라 - '프로세코'(* )는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인데, 계속의 의미를 내포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 었어야 함을 강조한다.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 삼가라고 당부한 구체적인 첫번째 이유이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 삼가라고 당부한 두번째 이유로 성령에 의하여 그 임무가 위탁(委託)되었다는 신성성을 상기시킨다.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가라고 촉구한 것이다. 감독자를 - 여기서 감독(* , 에피스코포스)은 17절의 장로 (* , 프레스뷔테로스)와 같은 직무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사도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오늘날처럼 구별이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 목사, 감독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감독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으니 이것이삼갈 것을 당부한 세번째 이유이다. 여기서의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만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한 단어가 빠져버린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면서 '자기 아들의 피로'라는 말을 넣어야맞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하나인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교회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예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확증임을 강조한 것이다(G. Campbell Morgan). 그런데 본 구절이 몇몇 사본과 역본들에는 '데우' (* , '하나님의') 대신에 '퀴리우'(* , '주의')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해서 '주님의 교회'(* ,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ange, Meyer). 그러나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는 표현이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여클레시아 투 데우'(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11번 나타날 뿐 아니라(고전 1:2;고후 1:1;딤전 3:5).
=====20:29
흉악한 이리가...들어와서 -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豫見)으로서 흉악한 이리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이것이 유대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영지주의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거짓된 교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 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찍이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해 경계하신 예수의 가르침(마 7:15)과 연관된 것으로 배교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될 시대의 성격을 상기시켜 준다.
=====20:30
너희 중에서도 - 흉악한 이리가 외부로부터 침입해서 양떼를 해칠 것이라는 29절과대조적으로 에베소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어그러진 말 - '디에스트람메나'(* )는 '왜곡하다', '구부러지다'는 뜻이며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써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획책(劃策)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들이 목회 서신(딤후 1:15;2:17)과 계시록(2:1-7)에 나타나 있다.
=====20:31
너희가 일깨어 - '그레고레이테'(* )는 '깨우다'를 뜻하는 '그레고레오'(* )의 현재 명령법으로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도 이 말을 사용했다(막 13:35). 따라서 이는 배교의 시대의 성격을 예견한 사도가 파수를 보는 데 정신을 차려서 최선의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목회적 용어이다(Bengel). 기억하라 -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능력을 펴서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이 광야에서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고(신 8:2, 18) 그리하여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라(신 8:1-6)고 촉구한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이 삼년 동안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으라는 권면이다. 언행 일치한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화력 있는 교육 방법이다.
=====20:32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 )는 '넘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탐하지 아니하였고 - 자신의 자랑으로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은, 금,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왕하 5:22).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았고(고전 9:4-18; 고후 11:7-12;12:14-18;살전 3:8, 9) 오직 자족(自足)한 삶을 살았다. 이것은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그의 직무롤 마칠 때 온 이스라엘 앞에 고백한 말과 같다(삼상 12:3, 5).
=====20:34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 바울은 데살로니가(살후 3:7-12)와 고린도(고전 9:11-15;고후 11:7-12)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친히 노동을 하여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다(18:3;고전 4:12; 살전 2:9). 그러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자급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고전 9:14). 여기 바울의 경우는 당시 반대자로부터 탐욕을 위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잡히지 않기 위한 특별한 예이다. 따라서 바울 역시 생계비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고 손수 일했다는 것을 밝힌 것뿐이다. 여기서 바울이 한 일은 천막 깁는 일이며, 동행들이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당하여'란 표현은 '휘페레테산'(* )으로 낮은 자리에서 함께한 자들을 섬겼다는 뜻으로 본서에만 나오는 단어다(13:36).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옴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 그 정신이 이미 나타났으며 또한 눅 6:38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이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가장 타당한 견해는 구전을 통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초기에는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결론을 삼는다. 그리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 한다. 여기서 '약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영적인 면에서 믿음이 약한자를 가리킨다(Meyer, Bengel, Calvin). 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킨다(Lenski 등). 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Matthew Henry, Pulpit). 와 의 견해가 본문의 문맥상 더 자연스럽고 또한 엡 4:28의 바울의 권고와도 일치한다.
=====20:36
무릎을 꿇고...함께 기도하니 - 지금까지 경고하고 권고한 것의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기도로 마감하는 모습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으로써만 신령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주님을 향하여 겸손히 무릎을 꿇은 바울의 태도는 하나님께 향한 간절함과 동시에 이별의 슬픈 감정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 자세로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다(눅 18:10,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한 내용의 본질적인 것을 짐작할수 있겠다(엡 1:15-23;빌 1:3-11;골 1:3-12;살전 1:2, 3).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이것은 작별에 대한 유대인의 관례적인 인사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작별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견디지 못한 즉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목을 안았다는 것은 요셉이 그 아우 베냐민과(창 45:14) 아버지 야곱에게(창 46:29)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입을 맞추다'의 헬라어 '카테필룬'(* )은 미완료 시제로서 점잖게 한번 나누는 거룩한 관례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정에 차서 몇번이고 연거푸 입을 맞추는것을 뜻한다(눅 15:20).
=====20:38
근심하고 - '오뒤노메노이'(* )는 '오뒤나오'(* )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로 인해 '깊이 슬퍼했다', '몹시 괴로워 마음이 아팠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배에까지...전송하니라 - 정박 기간이 끝나서 이제 밀레도를 출항하려는 배에까지 전송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바올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무튼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에 대한내용과 그 광경이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기술된 것은 본서가 당시 바울과 함께 동행하면서 모든 현장을 목격했던 누가의 기록이라는 것을 더욱 뒷받침한다.
< 설 교 >
신앙의 선배님들의 삶과 사역(2)
행 20:24, 고후 5:13, 빌 1:20-21 / 김명혁 목사
3. “예수 천당, 최권능 목사님”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고후 5:13). 사도 바울의 몸은 예수님으로 충만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우리 나라에도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이 있었고,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예수님에게 미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분은 한국교회가 신사에 무릎을 꿇을 때 마지막까지 일본 형사들 앞에서도 “예수 천당”을 외치며 회개하라고 호통을 치던 사람입니다. 그분은 이기풍, 길선주 목사님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865년에 평양에서 출생했고, 길선주 목사님은 1869년에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고, 최권능 목사님은 같은 해인 1869년에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세 분은 모두 평양에서 예수님을 믿었고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나중에는 전국 방방 곳곳에 그리고 만주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김화식 목사님, 그리고 저의 부친도 평양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평양을 “조선의 예루살렘” 이라고 부릅니다. 평양은 조만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한 최권능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의 본명은 최봉석입니다. 이제 최봉석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셨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최봉석은 “예수 천당”을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7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글씨를 잘 썼다고 합니다. 성격은 무척 괄괄하고 급했다고 합니다. 최봉석은 16살 때 평양 감사 민병석의 비서가 되었고 나중에는 평양 감사 아래 감찰의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찰의 자리를 이용해서 국고금 3만 량을 횡령했다는 죄로 반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평북 삭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울분 속에서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주에는 1896년에 교회가 설립되어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삭주에 백유계란 유명한 한의사가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최봉석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참다운 생활을 해 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주고 갔습니다. 최봉석은 복음서를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삭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3살 때였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03년 그가 34살 되었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불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불 같은 열심이 일어나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솟아나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전도는 간단하고 단순했습니다.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예수님을 믿고 천당 가라고 했습니다. 1905년에는 삭주교회의 집사가 되었고 후에는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삭주교회에서 전도와 목회 사역을 너무 열심히 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압록강 지역과 만주 지역을 다니며 “예수 천당”의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고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1907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며 벽동교회에서 조사의 일을 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보다는 기도와 전도에 열중했습니다. 공부는 겨우 하고 시간이 있는 대로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를 했고 밤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에 시험을 볼 때는 백지를 내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게 해 다라고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답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 매는구먼!” 그는 다음 날 시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또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을 병력 같은 소리로 외치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받은 달란트였습니다. 죄인들을 무너뜨리는 가장 성능이 좋은 총탄은 “신학 탄”이 아니라 “예수 탄” 이라고 믿고 “예수 탄”을 쏘아 댔습니다. 방앗간 앞을 지나다가 방앗간을 향해 “예수 천당”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망아지는 놀라서 벌떡 뛰었고 방아가 엎어져 난리가 났습니다. 주인이 최봉석 조사에게 달려 들어 야단을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예수 천당”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방앗간 주인은 항복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최봉석은 기도로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최봉석은 1907년에 신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4년 후인 1911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이 지났는데도 최봉석 조사는 계속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벽동교회의 교인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조사님, 졸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봉석 조사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1년 더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3년이나 반복되었습니다. 1913년도 졸업생 명단에도 최봉석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계속해서 낙제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좀 난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봉석 조사는 교무실로 들어가 교수들을 만났습니다. 3년씩이나 낙제를 한 44세가 된 노 학생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마음은 거북하고 곤란했습니다. 최봉석 조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교수님들에게 아뢸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들 먼저 저와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시고 또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하시고 또 목사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공부만 잘해야 목사가 됩니까? 하나님의 종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야 하는데 저는 기도하고 전도 할레기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이 나에게 졸업장을 주어 나도 목사 될 수 있도록 길을 열러 주옵소서. 주실 줄 믿고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교수님들은 모두 덩달아 아멘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최봉석은 샘 마펫 교장님에게 졸업장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안됩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최봉석 조사는 “교장님과 교수님들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 전에 저의 기도에 모두 아멘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교장과 교수들은 할 수 없이 졸업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전무후무한 낙제의 기록을 세운 최봉석 조사가 이렇게 해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당한 기도에는 교수들도 쩔쩔매며 졸업장을 주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최봉석 조사는 당당하게 기도하고 당당하게 전도하고 당당하게 공부하고 당당하게 졸업했습니다.
셋째로, 최봉석 목사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1913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8월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벽동교회에서 1년 동안 목회하다가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멩이로 맞아서 쓸어지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쓸어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 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 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12년 동안의 만주 전도를 마치고 1926년에 평양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양 거리는 이제 최봉석 목사님의 “예수 천당” 소리로 날이 밝게 되었습니다. 새벽 4시마다 들려오는 “예수 천당”의 외침은 생명 길을 알리는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였고, 나라 잃은 평양 시민들의 멍든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청량제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길선주 목사님의 주선이 컸다고 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최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 소리가 멈추는 날 조선의 예루살렘인 평양이 망한다” 라고 말하며 최봉석 목사님을 격려하며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불타는 심정으로 “예수 천당”을 외쳤는데 그 소리에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항복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최권능 목사” 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머리 좋고 설교 잘 하는 채필근 목사가 지나가는데 최봉석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 천당”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깜작 놀란 채필근 목사는 “나 채 목사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최봉석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목사지만 뻘지(벙어리) 목사요.”
최봉석 목사님은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 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기절하면 물을 끼 얹고 기절하면 또 물을 끼 앉으며 고문을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 사랑 하심은”을 큰 소리로 불러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감방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그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그의 기도로 힘을 얻고 그의 찬송으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감방이 교회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형사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고문할 때마다 최봉석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영광이요. 나는 죽기 위해서 오늘까지 당신들의 신을 경배하지 않고 살아왔소.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오. 주님이 나의 집을 예비하고 나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님을 때리니까 최 목사님은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때때로 감방에서 금식 기도를 했는데 1944년 3월 1일부터 40일간 금식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3월 1일 사모님과 아들과 딸이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면회를 왔습니다. 그는 반갑게 가족을 맞았습니다. 보통 때는 사모님에게 “항상 기뻐하라” 라고 말하면 사모님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말하므로 간단히 면회를 마치곤 했는데 그날의 면회는 길어졌습니다. “내가 금식 기도 작정한 것을 알고 마귀가 맛있는 음식으로 시험하는군” 이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애들아, 집에 가서 날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금식기도 끝나는 4월 10일까지 누구도 면회 오지 말고 기도해다오. 미안하다. 땅 위에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인데 내가 주님께 충성하다 보니 지나치게 가정과 너희들에게 등한히 하였구나. 하하, 이것도 육신의 생각이지” 하더니 딸과 부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지켜 주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고 너희들도 나와 같이 저 낙원에 가서 즐거이 살게 될 때 그때 땅에서 못 받던 위로를 하늘 나라에서 받자.” 그날의 면회는 정이 넘치는 면회였습니다. 그날 가족이 가지고 온 음식은 모두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4월 11일 병 보석으로 평양 기홀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성도들이 기홀병원으로 몰려들어 “목사님!” “목사님!” 하고 부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봉석 목사는 오히려 성도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박 집사, 오집사, 왜 이러는가? 그동안 나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또 주기철 목사님 위해서, 박관준 장로님 위해서, 이기선 목사님 위해서, 한상동 목사님 위해서, 손양원 목사님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모두 고마워.” 그의 주치의인 장기려 박사가 안정해야 한다고 하며 면회를 사절시키려고 했지만 “장 박사, 그러지 마시요. 나를 위해 오는 형제들을 내가 기쁘게 맞이해야 하지 않겠소” 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일일이 맞았습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15일 동안 의사와 간호원과 가족들의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찾아오는 교우들을 다 만나보다가 1944년 4월 25일 오후 1시에 부인과 아들과 딸과 며느리와 손자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하면서 찬송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부른 다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 지 4일 후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4월 21일 최권능 목사님은 4월 25일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 개의 큰 별이 4일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4.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1900-1965)이 우리 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간지 어언 50여 년이 지났지만 그분이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가슴에 남기고 간 주님 사랑의 뜨거움은 아직도 냉랭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는 영원한 불꽃이 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한 평생을 편안하게 살지 않았으므로 장수하지 못하고 65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하여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값진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신앙의 특징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에 의해서 형성되고 완성된 삶이었습니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씨와 김진실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6살 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소년 이성봉은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김익두 목사님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한 동안 반항과 타락의 생활을 했는데 어느 주일날 밤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중 넓적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습니다. 골막염으로 다리를 절단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 달렸습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신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과로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환상 중에서 십자가의 주님과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는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아프던 내 몸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나았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라고 한 것 같이 그 후로 항상 그 환상이 나의 신앙생활을 격려하여 주고 소망 중에 살게 하고, 현실보다 영원한 내세를 더욱 그리워하게 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님은 성령의 뜨거운 불 세례를 체험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 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습니다. 가슴은 뜨거워야 하지만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고 항상 경고했습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과 각종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사역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사역은 우리들에게 깊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구령의 열정에 불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방방 곳곳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복음 전도자의 삶이요,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농어촌 교회까지 찾아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부흥사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청주에서 있었든 셋째 딸의 결혼식에 인사하러 올라가서도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많이 모인 호기를 노칠 세라” 라고 생각하며 곧 이어 전도 강연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복음전파와 교회부흥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눈 앞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랑곳 없었고 명예 지위도 거들떠 볼 새도 없이 다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이 전도 구령하겠다는 일념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그의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의 제물로 주님께 바쳤습니다. 순회 집회하는 부흥 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 가서 어떤 교회 건축에 딱한 사정을 듣고 근근이 작만한 그 집을 선뜻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아 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목사님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 한 교회라도 더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의 한 평생을 모두 불 사르고 말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1961년부터 1년 5개월간 “1일 1교” 운동에 나서서 500 여 교회를 순회하며 교회 재건과 교단 합동에 전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 십 리씩 리어카나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니면서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의 복음적 열정이 그의 전 생애를 불 태운 것이었습니다. 복음 전파보다는 “사업” 확장에, 희생보다는 “대우” 받음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에 한 평생을 헌신하여 다 바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청년 시절부터 철저한 회개에 기초를 둔 성결하고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애착을 두지 않았고 이성의 정욕과 물질의 탐욕을 항상 경계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돈과 이성의 유혹에 빠지면 목회자의 삶은 끝장이란 말을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습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에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평가하며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 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시90:10,39:5,144:4).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개혁을 외쳤으며 일제의 만용과 무지를 공격하면서 일제의 멸망을 외치다가 체포되고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또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부정한 것이지 세상 안에서의 믿음의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대 교회는 말로는 문화변혁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이나 순교적 신앙을 주창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너무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저는 중세의 금욕주의의 잘못도 알고 요한 번연의 현세 부정주의의 잘못도 알지만 지금 우리는 차라리 그들로부터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죽고 자신을 비우는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겸허하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님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깃들어 있는 현세 초월적 청빈의 삶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넷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제일주의 예수 중심주의 성결과 사랑 순간순간 주로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와 동행하라.”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동기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 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신의주 교회가 1,000여명의 신자를 가진 대교회로 부흥하던 때 갑자기 총회로부터 전국 부흥사로 임명 받았습니다. 신의주 목회는 이성봉 목사님에게 있어서 “제일 부흥되고 제일 재미있게 일한” 목회였습니다. 헌당식을 한지 사흘 만에 떠나려고 하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고 사랑하는 목양지를 떠나 우리 밖의 양들을 찾아 험하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고 이성봉 목사님은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헌신의 글이었습니다. “일을 일으키시는 이도 여호와요 일을 그대로 이루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니라. 창세 전에 나를 아시고 모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출생 후 지금까지 거룩하신 품 안에 영육을 보존하시고 전지전능의 손에 붙잡으사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만사 합동하여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심을 감사할 뿐이로소이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벌써 만세 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이요, 4년 전에 보여 주신 이상의 감동이 오늘에 성취될 때 일희일비의 정을 금할 길 어렵도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영이나 육이나 우리 전부가 주께로 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도상에 순간순간 최후 숨결까지 그 안에서 사라짐을 나타내겠노라.”(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pp. 64,65). 우리는 이 글에서 이성봉 목사님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분명하게 접합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과 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품을 친밀하게 체험하고 의지하며 그 사랑의 품에 안기면서 고난의 길을 흔쾌히 그리고 겸허하게 걸어 가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생생하게 접합니다.
다섯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예수 중심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의 본문과 주제와 내용을 분석한 정인교 교수는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가 신약 중심적이고 복음서 중심적이며 예수 중심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신본주의적,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갖고서 모든 본문을 풀어간다.”(「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p.88). 이성봉 목사님의 사명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성봉 목사님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뜨겁게 부어져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대부분의 설교에서 설교의 목표를 패역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설적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자주 사용하던 예화 중의 하나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 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 라는 예화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패역한 죄인대신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님은 역설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또 다시 아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모스크바에 흉년이 들어 어떤 아기 어머니가 며칠을 굶고 풀 뿌리라도 캐어 먹으려고 들에 나왔는데 등에 업힌 어린 애기가 젖을 먹겠다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삼 일간을 굶은 어머니 가슴에서 젖이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그만 그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장도를 꺼내어 젖꼭지를 찢어 피를 내어 어린 아이에게 물리니 어린 것은 피를 빨고 있고 어머니는 기절을 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패역하여 비참하게 된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고 좇는 데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란 뜻이 구원이란 뜻이다.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구원하신다.”(「사랑의 강단」, pp. 149f).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랑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서 항상 감사 찬송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말마다 그가 가신 자취를 따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때까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다.”(같은 책, p. 121). 예수 사랑에 녹아진 가슴과 예수 사랑만을 전하는 입술과 몸을 가졌던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십자가 없이 갖가지 불순한 것으로 오염되고 변질된 신앙을 붙잡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신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회개와 중생의 복음 신앙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와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 회개를 통한 중생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의 시간은 추상같은 권위로 죄를 책망하는 시간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성봉 목사님은 항상 죄를 무섭게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에게는 대중들을 아부하는 설교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이성봉 목사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평생토록 스스로 크고 작은 일들을 회개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죄인이 중생하고 구원 얻어 천국 간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과 실제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이야기들을 항상 소개했습니다. “회개는 천국 가는 길이요 제이의 무죄라고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는 또한 숨은 부끄러움 곧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니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또한 사람과 해결 지어야 한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p.60). 이성봉 목사님은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는 주님의 명령이요 소원이며, 회개란 지 정 의 행의 전폭적인 변화라고 폭 넓게 설명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이 구원의 첫 단계요 현재적 단계라고 설명하며 중생이 기독교의 기초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구원이란 말을 중생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사람이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중생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서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천국을 보고(요3:3),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고(요일5:18), 의를 행하고(요일2:29, 죄를 범치 않고(요일3:9), 서로 사랑하고(요일4:7), 세상을 이기고(요일5:4), 산 소망을 가지고(벧전1:3),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천국에 들어가서 후사가 된다(요3:5).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성도는 흑암에서 나아와 광명으로(요일2:8), 죽음에서 나아와 생명으로(요일5:24), 슬픔에서 나아와 기쁨으로(롬14:17), 자기 중심에서 떠나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부흥의 비결」, pp. 38,39). 성공과 축복의 메시지에 가리워져서 회개와 중생의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 가는 오늘에 비추어 볼 때 회개와 중생의 복음을 강조한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일곱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성결의 복음 신앙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평생 성결을 추구하며 성결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성결은 구원의 둘째 단계 즉 현재적 단계라고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성결의 복음” 이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성결은 성결교회의 전매 특허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을 그대로 받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12:14). 성결은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5). 이 하나님의 말씀은 결정적이다. 이 말씀 들어야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 이 말씀 들어야 복 받고 듣지 않으면 화 받는다. 이 말씀은 시금석이다. 성결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거룩하여 음란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성결은 천국민의 자격이다. 성결은 그리스도 신부의 단장이다.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이 중대하고 귀한 성결은 말씀과 성신과 그리스도의 피와 징계의 채찍으로 된다.” (「임마누엘 강단」, pp.70-74).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님이 전한 성결의 복음을 오직 은혜와 오직 신앙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복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정성구 교수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중생한 신자와 사역자의 현재적 삶에서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삶이 깨끗하고 순결해야 은혜와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이성봉 목사님이 오직 믿음의 진리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복음 사역자가 성결을 상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성결이 천국시민의 자격이 된다는 말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와 결코 상치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레 뿐 아니라 요한 칼빈도 경건과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성결을 소홀히 하거나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믿음”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나타내는 삶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평생 성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성결의 메시지를 전한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신앙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여덟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신유의 복음 신앙이었습니다.
신유는 이성봉 목사님이 23세 청년 시절부터 한 평생 친히 체험한 은혜요 그의 목회 및 부흥 사역에서 수 없이 많이 나타난 은혜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의약을 쓰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질병의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도 한 평생 의약을 쓰지 않고 신유의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서 신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나는 신유의 체험을 많이 하였다. 본시 나 자신이 폐디스토마로 오래 고생하여 어릴 때 별명이 깔다귀였다. 신학공부 할 때에도 심히 쇠약하고 수원서 교역할 때에도 쇠약하여 몇 달 휴양하는 중 주야에 기도로 나음을 얻고 복막염에서도 나음을 얻었는데 나의 몸은 22관까지 나가는 뚱뚱보가 되었다. 해남에서 부흥회 하다가 맹장염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집회를 결사적으로 하였다. 너무나 고통을 당하니 송의사가 와 보고는 급성 맹장염인데 24시간 안에 수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사적으로 기도만 했는데 그날 밤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침에 이상하게 씻은 듯 나음을 주시었다.”(「말로 못하면 죽음으로」pp. 100-102). 이성봉 목사님은 그의 신유에 대한 소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기 때문에 오늘도 그 권능, 그 사랑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시니라. 그래서 나는 신유의 신앙으로 30년간 의약을 의지하지 않고 그의 손에 치료를 받아 오늘까지 나왔다. 물론 의약을 쓰는 것이 죄가 되거나 구원 문제는 아니다. 의약으로 치료하는 것은 자연의 요법이요 신유로 구원 받는 것은 초자연의 요법이다.”(「사랑의 강단」, pp. 154,5).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님이 무분별하게 기사와 이적을 예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신비주의를 경계하며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천국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요, 나의 진상을 살피는 거울이다. 성신 충만은 말씀 충만이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기분으로 좌우되지 말고 이 말씀에 건전히 굳게 서야 될 것이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이단과 사설을 퇴치해야 할 것이다.”(같은 책, pp. 209-210). 이성봉 목사님은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신유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유와 이적 중심으로 나가는 신비주의와 이단을 경계했습니다. 오늘날 한 편에서는 성령의 현재적 은사들을 모조리 부인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신유와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양극화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균형 잡힌 신유 복음 신앙은 우리들에게 신중한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아홉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재림의 복음 신앙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 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여러 번 직접 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는 허무한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한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하며, 재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상하고 허무한 이 세상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의 신앙이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에게 있어서 재림은 구원의 셋째 단계 즉 미래적 단계였습니다.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최대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 소망이다. 만물이 고대하는 소망이요 마귀를 진멸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당신의 신부들을 영접하시는 주의 날이다.”(같은 책, p. 66). 그리고 재림의 날이 임박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오리라, 도적같이 오리라는 약속을 굳게 잡고 요제인가고제인가 눈물로 기다리는 주의 재림, 천지는 변하여도 그 약속은 변치 않으시리라. 깨어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 밝게 켜 들고 거룩함과 인애로 신 혼 신을 단장하고 공중 혼연을 고대하는 신부들은 복이 있으리라.” (같은 책, p. 66). “사랑하는 나의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택한 신부 맞으시려 언제나 오시렵니까? 일구월심 오래도록 주님 생각 간절합니다 사모하는 나의 주님 속속히 오시옵소서.”(같은 책, p. 168).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종말 신앙과 재림 신앙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성봉 목사님의 재림 신앙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둔탁해진 우리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청량제가 됩니다.
저는 위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시도하면서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철저하게 복음적이고 철저하게 한국교회적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과 삶의 모습은 바로 우리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이요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보여 주고 물려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앙과 성결한 삶의 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배우고 개발하여 새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 사명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선교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는 자의 복
사도행전 20:25-38 / 이필재 목사
바울 사도는 그의 선교 일정에서 아주 확실히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데살로니가에 가니까 데살로니가 교회가 생겼고 고린도에 가니까 고린도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가 빌립보에 가니까 빌립보 교회가 생겼고 에베소에 가니까 에베소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가는 곳마다 이루어졌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신학교 다닌 사람들은 신학교 때 다 이런 생각을 하고 기도도 하고 결심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것만큼 나도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 바울이 선교를 다닌 것만큼 나도 선교를 다닐 것이다.’ 그때는 모두 선교자적으로 불타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결심들을 다 합니다. 한 가지 좋은 것은 바울이 다닐 때는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인데 지금은 문명의 기구가 생겨서 바울보다도 열배 더 다닐 수가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에 그렇게 기도하고 마음먹은 것이 제 목회에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다가 떠나는 장면의 기록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기간이 31절에 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 중에 제일 오래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과 작별하면서 또 다른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마지막 석별의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떠난 다음에 교회가 훌륭하게 계속 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희망을 교인들에게 부탁합니다.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객관성 있게 평가를 해보면 에베소 교인들은 참 훌륭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은 지 3년 밖에 안 된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떠난 다음에 마땅한 담임 목사가 없는 상태에서도 평신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서 교회를 잘 운영해 나간 아주 성숙한 크리스천들이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교회를 다녀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의문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저도 과거를 돌아보면 이 동네에 제가 5살 때 복음이 처음 들어와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를 믿었으니까 65년 믿음의 생활을 했고, 목회한 것만 해도 48년째 접어들었으니까 지금쯤은 예수님의 그림자같이 제가 보여야 되는데 자신을 보면 어떤 때 아직도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태신앙이라면 평생 예수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앙은 아기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말씀에 3년 동안 눈물의 목회를 했다는 말을 자신이 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에베소 교인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 교회를 잘 운영해 나갈 것을 바라는 그 희망 때문에 그렇게 했고, 33절에 보면 자신이 본을 보인 몇 가지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물질 욕심을 부린 것이 단 한건이라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3년 동안 신앙 교육 받은 여러분이 나와 같이 사심을 버리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 이 교회를 잘 운영해 나가는 작은 사도들이 되십시오.”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 위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십시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본받는 자 되십시오.” 이런 자신감 있는 결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한 눈물의 3년 목회를 여러분이 인정해 주시고 나를 따라서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지막 신앙적 복에 대한 교훈 하나를 선물해 주고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이 35절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 모범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시고 또,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자기만 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길러보면 갓난아기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만 알고 이기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뭐든지 자기 것으로 다 생각하고 마음대로 잡아당겨서 입에 갖다 대고 먹으려는 소유 본능적 행동을 합니다. 남의 집, 남의 상점, 남의 물건…. 비싸고 싸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행동합니다.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집어던지고 먹고 망가뜨리고 마음대로 합니다. 지금 이렇게 조용히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데, 이 예배 시간에도 울고 싶으면 예배고 엄마 체면이고 낯짝이고 없습니다. 엉엉 웁니다. 다른 아이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리에서 달라고 떼를 쓰고 성경책도 쭉쭉 찢어버립니다. 옆에서는 밥을 먹고 있는데 똥을 싸며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게 어린아이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이 그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철이 들면서 인간은 자기 밖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자기 욕구에 대한 절제를 하며 받을 줄만 알았던 단계에서 주는 자가 되어져 갑니다. 프로이드 심리학 가운데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나르시소스”라는 사람은 희랍 신화에 나오는 미남 청년인데 어느 날 호숫가에 서서 호수 물에 비치는 자기 얼굴 모습을 바라보면서 황홀 지경에 빠집니다. ‘어떻게 내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자기도취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도 그 자리를 떠날 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사고마저도 가장 올바른 판단이라고 착각을 하고 결국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침식을 잊고 황홀지경에 빠져 자기 모습을 보다가 죽어서 한포기의 수선화로 변해서 연못물에 떠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눈이 밖으로 향해있지 않고 자기만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자신이 좋은 대로 갓난아기와 같이 행동해 버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이 환자스러울만치 없는 사람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약간의 정신질환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업주의 원리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어떤 일도 손해를 안보는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이 배웠지 않습니까? 투자성의 상업 원리를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공부한 그 지식 때문에 어떤 일에도 손익 계산이 확실한 것에 대해서만 투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식물원에 가서 관리인에게 들은 소리입니다. 예쁘게 꾸며 놓았는데 사람들이 오면 제일 먼저 묻는 소리가 “이거 하는데 얼마 들었느냐?” 랍니다. 이것은 보라고 해놓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와서 얼마 들었는데 하루에 손님이 몇 명 오느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오는 사람들마다 전부 손익 계산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문화 속에서 삽니다.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손실 계산부터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손해가 안 날까?’
오늘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말씀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3년 눈물의 목회를 하고 이제 다시는 나를 볼 길이 없다고 석별의 정을 나눈 그 날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여, 당신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헤어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제자들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것에 손익 계산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얻으리까?” 그것을 계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도 계산이 나고 저렇게 해도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손익 계산에서 절대로 손해를 안보고 남보다도 더 좋은 이익이나 위치를 차지하고 자기가 투자한 것만큼의 상업적 이익을 계산하고 온갖 싸움을 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에 결론 내리신 것이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주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나와 같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 주려고 우리는 사는 것이다. 만약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주인이 와서 볼 때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로다.” 이렇게 결론해 주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명에 대해서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이방 사람에게나 빚진 자다.” 이 사람이 무슨 빚을 졌습니까? 아무 빚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갚아야 될 사람이라고, 많은 것을 주어야 될 사람이라고 자신을 그렇게 정의했지 않습니까? 잠언에 보시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풍성케 하는 자는 풍성케 되리라.” 우리 사회에 기업인들을 평가하는 것이 신문에 가끔 나옵니다. ‘모범 기업체’, ‘모범 기업인’이라는 말도 쓰고, 나쁜 말로 ‘악덕 기업주’이라는 말도 씁니다. 모범 기업은 누구입니까? 분명히 자기가 피땀 흘려 돈을 벌었습니다. 정말 그 돈 번 과정을 생각하면 단 돈 1불도 함부로 쓸 수가 없는 피땀 어린 돈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피 땀이 섞인 그것을 소위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이름 아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짜로 주어 버리는 것입니다. “학교에 장학금을 보내주고, 고아 사업을 위해서 후원해주고, 선교 사업을 해서 헌금을 하고, 교회를 건축하고, 노인 아파트를 짓고, 병을 세워서 진료를 하고 100퍼센트 지출하는 모범 기업이다.” 이렇게 평가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기가 쓰는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쓸 때 “훌륭하지 못하다.” 이런 평가를 합니다.
제가 리버사이드 교회에 가서 목사 안수식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거기 역사가 쓰여 있습니다. “롱펠로우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리라.” 자기 사재를 털어서 그 교회를 건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와서 예배를 드리는 많은 사람의 행복을 바라볼 때 ‘아! 내가 할 일은 교회 건축을 많이 하는 것이로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배드릴 장소를 마련해 주는 것을 내 기업의 목적으로 하자.’ 그는 5천 교회를 혼자서 세웠습니다. 롱펠로우가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카네기가 ‘나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 그 사람도 돈 벌어서 5천 교회를 혼자서 건축했습니다. 제 주변에 계신 집사님은 항상 이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집안은 예수 믿다가 망한 집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지어준 별명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집은 예수 믿다가 진짜 망했습니다.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은 것만 있으면 다 교회에 가져다 바쳤기 때문에 집안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더 합니다. 조상이 물려준 논과 밭을 가지고 겨우 먹고 사는데 싹 다 팔아서 교회 세 개를 짓느라 빈털터리 거지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다 망했다. 예수 믿으면 부자로 잘 살아야 우리도 예수를 믿지 저 집은 날마다 망해가는 집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그 집사님은 자기가 손자인데 중고등학교 다닐 때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침을 굶고 학교 가야 해서 자기가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 잘 믿고 다 팔아서 하나님 좋으신 것을 모두 했으면 복을 좀 주셔야지 왜 점점 못살게 하시나요?” 그래서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자기가 기도하던 자리에다 가래침을 뱉고 안 나갔다고 하십니다. 그 분이 저에게 오셔서 다 고백하셨습니다. 제가 그분께 “지금도 돈이 없으십니까?” 여쭤보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재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항상 말씀하십니다. “나는 김우중과 친하고 항상 같이 돌아다닙니다. 그 사람이나 나나 정주영 씨나 나나 비슷합니다.” 재산이 얼마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재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냉수 한 그릇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당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때문에 이렇게 잘 사시는지 아십시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할아버지보다 더 많은 일을 하셔야지요.” “네,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똑같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제가 온 다음에 지난 10년은 주는 교회로 살아왔습니다. 제가 어제 재정부 직원 불러서 지난 10년 동안 우리 선교비 얼마를 썼는지 한번 대략 계산해서 뽑아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10년 동안 250억 세계 선교비로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온 세상에 나누어 주었느냐? 은행에 빚을 내서 가져다주었습니다. 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갈보리 교회는 선교 하다가 망한 교회 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소리 들어도 괜찮습니다. 다른 것을 하다 망해야 창피하지 그 교회는 세계에 퍼주는 교회로 선교를 많이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순복음교회에서 저를 불러서 장로라는 분들이 “목사님 교회가 하는 선교를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에 한 2천여 명 오실 테니까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부탁을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가서 모두 이야기를 했더니 갈보리교회 성도님들은 이렇게 안 놀라시는데 그곳 성도님들은 제가 설교 하는 동안 박수를 10번이나 치셨습니다. 주는 교회 괜찮습니다. 저는 아이다호 감자 농장에 갔을 때 그 밭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듣고 찾아간 것입니다. 아이다호 감자 농장 주인들은 성경대로 감자를 수확할 때 마지막 한 고랑은 가난한 사람들 캐다 먹으라고 수확을 안했습니다. 감자 농장이 아주 깁니다. 끝이 없습니다. 한 도랑만 파도 자동차에 감자를 가득 채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 캐 먹으라고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밭에 가면 한 고랑의 감자가 언제나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주민들이 언제나 호미를 가지고 가서 그 밭의 감자를 캐다가 먹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 세계의 맥도널드 후렌치 프라이드 만드는 감자는 아이다호 감자 아니면 안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다호 감자가 팔려서 감자 농장 주인들이 모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제가 가 본 것입니다. 주는 자는 망할 것 같지만 패러독스 진리라는 반대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는 교회가 망할 것 같으십니까? 선교하다 망한 교회라고 소문날 만큼 해보십시오. 제가 일본 교회에도 가끔 가서 집회를 하는데 갈 때마다 제가 메시지를 세게 합니다. “왜 일본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습니까? 도요다 자동차, 소니 TV 세계 시장 다 석권하고 온 세계 돈이 다 일본으로 들어오는데 왜 보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본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입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게 뭡니까? 동남아를 피로 물들인 것이 일본인데 지금쯤 선한 사업을 많이 해야지 잘 나가는 나라가 뭐하는 것입니까?” 내가 일본 교회 담임 목사로 나갈 것도 아니고 막 혼냈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영적으로 감각이 없으신데 왜 유럽이 망해갑니까? 유럽은 지금 세계 경제학자들이 가라앉는 배라고 했습니다. 세계 경제 문제가 다 유럽에서 터져서 세계가 혼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 사랑을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교회를 모두 나가지 않습니다. 1980년부터 지금 올림픽 하는 영국도 30년 동안에 9천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세계를 구원하는 주는 나라가 되고 주는 교회가 되라. 주는 자가 되라.” 성경의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잘 살고 있는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을 빼내서 인간들이 살기에 가장 부적합한 조건이 많은 가나안 땅에 “너 거기 가서 살아라.”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세계인이 오고 가는 그 삼각주에 서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르쳐주어라.” 그래서 거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바로 그 이스라엘 국민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사명을 왜곡해 버렸습니다. 국수주의, 내셔널리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백성은 택한 백성인데 그 택한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말한다.” 남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유대인들이 세상에 전도합니까? 전도하지 않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과 그 사람들이 마찰을 겪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내셔널리즘을 모두 깨어서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되는 패러독스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여! 내가 당신들과 목회할 때 물질 욕심 부린 적 있습니까? 말해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3년 동안 눈물의 목회를 하였는지 당신들이 다 알지 않습니까? 당신들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이 교회를 잘 지키십시오. 내 얼굴 다시는 못 볼 것입니다.” 이런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주지 않는 교회, 주지 않는 사람, 주지 않는 나라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제 사무실에 사진이 있고 여러분 가정에도 더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길거리에 5불, 10불로 팝니다. 인공위성에서 한 나라를 사진 찍어서 확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일렬로 세 가지 색깔이 나옵니다. 맨 위에 만년설, 헐몬산입니다. 하얗게 덮여 있습니다. 그 눈이 녹아 내려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헐몬산입니다. “헐몬의 이슬의 시온의 산들을 적심 같도다.” 이런 시가 나오고 그 물을 받은 갈릴리 호수는 123종의 고기를 생산해서 유대인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거기에서 뱃놀이를 하고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 물을 다시 흘려서 내보내지 않습니까? 요단강에서 아이들이 목욕을 하고 고기를 잡고 농업용수로 사용해서 생명의 젖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에는 맨 아래 갈릴리보다도 5배나 물량이 더 많은 큰 바다가 있습니다. 바로 사해 바다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물은 한 방울도 쓸 데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열대 기후의 이스라엘 땅에서 그 물은 버려진 물입니다. 사해 바다, 죽음의 바다로 고기 한 마리도 못삽니다. 사해 바다 들어가실 때 조심하십시오. 제 친구 목사는 사해 바다 들어가서 1분 만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사해 바다입니다. 왜 그런 무시무시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까? 이기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받기만 하지 내보내지 않습니다. 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거저 받았다. 거저 주어라. 주다가 망해도 괜찮다. 나는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야만인에게 빚진 자로다.” 아무 빚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나는 생명이 주어지는 한 빨리 빨리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복을 나눠주어야 될 사람입니다. 내가 3년이나 여러분과 함께 있었으니 이 교회는 여러분에게 맡기고 나를 부르는 새로운 사명의 장소를 향해서 내가 떠납니다. 주는 교회가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복을 받습니다.” 주는 손, 주는 교회, 주는 나라! 우리 갈보리교회가 지난 10년 동안 약 250억의 선교비를 외국에 보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우리 교인보다 외부에 교인이 몇 배가 됩니다. 아마 비판적인 교인들이 저를 향해 목회를 잘못했다고 책망할 교인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아닙니다. 내가 있는 한은 계속 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이 교회 나오십시오.” 제가 할 말은 이것입니다. 3년 밖에 안 되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 못하느냐? 주는 자가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나도 똑같이 바란다.” 양보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신학 사상을 끝까지 그들에게 선물해주고 작별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주는 손이 되고 하나님께는 받는 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사랑한 교회
행 20:25-32 / 이윤재 목사
오래전에 한 집에서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있었습니다. 큰 가게를 운영하는 이 집은 자녀들이 부모를 도와 함께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임종직전에 숨을 몰아쉬며 물었습니다. “큰 애 왔냐?” “예,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둘째는?” “예, 아버님, 여기 있습니다”. “셋째는?” “예, 아버님, 여기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럼 가게는 누가 보고?” 참 우리가 이렇게 될까 염려됩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같은 질문을 바울에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울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28절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를 보살피라!”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때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끝난 시점, 학자들은 대략 이때를 주후 58년경으로 봅니다. 바울이 순교한 것이 주후 64년이라면 순교 약 6년전입니다. 바울은 그간의 전도여행을 모두 마치면서 3년간 그와 함께 고락을 같이 한 장로들을 밀레도에 초청하여 자신의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22절입니다. 행20:22-23, “보라 이제 나는 성령의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른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믿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여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어떻습니까? 비장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가 예고한 대로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가이사랴 총독부 감옥에서 약 2년간 갇혀 있다가 로마에 가서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 순교의 날을 앞두고 바울은 마지막 고별사를 하면서 장로들에게 교회와 양떼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마지막 말을 “교회를 부탁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말을 한다면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잘 믿으세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세요”. “건강에 조심하세요”. “서로 사랑하고 사세요” 여러 가지로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탁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보살피세요”.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 많은 좋은 말을 제쳐놓고 교회를 부탁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 사랑합니까? 그러나 교회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서로 사랑합니까? 아무리 모든 것이 잘되어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교회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은 교회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다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살면 모든 것이 삽니다. 교회 죽으면 모든 것이 죽습니다. 교회 잘 되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교회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사랑한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어떤 교회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라
바울은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아는대로 교회는 마16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회세우겠다고 선포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예수님이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교회세우겠다고 했다고 해서 바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희생해야 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기전에는 아직 교회가 아닙니다. 가끔 “예수님의 생애에 제자들과 가졌던 아름다운 관계”가 교회가 아닌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아직 교회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공자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교회를 세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중 누구도 십자가에 죽거나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성전이 모리아산에 흘린 어린양의 피위에 세워진 것처럼 신약의 교회도 예수님이 흘린 피위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피없이는 교회 아닙니다. 아름다운 산상수훈만 가지고는 교회 아닙니다. 횐두교인 간디도 산상수훈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만 가지고도 교회 아닙니다. 신천지도 신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비유를 강조합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것만 가지고도 교회가 아닙니다. 병고치고 죽은 자 살린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죽음에서 그가 부활한 것이 믿을 때 비로소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집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왜 사랑합니까?” 물으면 이유는 다양합니다. 몇 년 전 우리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한신교회 사랑합니까?” 했더니 “사랑합니다”. 그래서 “왜 사랑합니까?” 했더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옛날 교인들은 “이중표 목사님과 별세신앙 때문에 사랑합니다”. 요즘 오신 교인들은 “이윤재 목사님 설교와 주차장 때문에 사랑합니다”. 제 이름이 들어가서 감사하지만 우리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적어도 자신의 행복과 축복 이상이어야 합니다.”
요즘 교회마다 ”평생 내 교회“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목회자가, 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는 이 교회 말고도 많다는 식입니다. 옛날에는 ”내 교회 의식“이 강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오고, 아무리 시험에 들어도 오고, 누가 발로 차도 안 나갔습니다. 몇 년 전 영락교회 설교하러 갔는 데 영락교회 교인중 매주 부산에서 비행기 타고 오는 교인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자기 기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날로 떠나 유목민처럼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닙니다. 어떤 교회학자는 이것을 ”신유목민 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이동하는 교인들의 특징은 교회는 나에게 행복과 유익과 평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복과 만족이 교회 생활의 주목표입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조사를 보면 미국교인중 45%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교회나가고, 26%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 때문에“ 교회나간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성경적인 교회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래리 크랩이 <교회를 교회되게>에서 말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요즘 교회의 메시지다. 그 메시지 때문에 교인 수는 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줄어들고 있다”. 뼈아픈 지적입니다. 교인 수는 행복지수와 관련되지만 그리스도인은 제자지수와 관련됩니다. 이렇게 교인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교회 생활하니까 교회도 교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즐거운 프로그램을 개발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트위첼이 <하나님 쇼핑, 마음에서 얼굴로 옮겨간 기독교>에서 말했습니다. “성공한 교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우리에게 행복도 만족도 유익도 주지만 교회는 행복한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는 개인적 만족과 유익 이상을 주는 곳입니다. 한때 철저한 무신론자였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론자가 된 C,S.루이스는 회심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행복은 포트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참으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한다면,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소비자 심리”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는 소매점이 되었고, 신앙은 일개 상품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교회와 목사를 자주 바꿉니다. 심지어 거래 은행이나 단골 식료품 가게를 갈아치우듯이 교회를 너무 쉽게 바꿉니다. 이것을 어떤 사회학자는 “자아도취적 문화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영적 소비자들은 교회가 추구하는 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배달해 주는 상품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한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교회가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교회를 디자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집중할 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교회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만족은 교회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 결과입니다.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피흘려 사셨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내 생명 다 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아멘. 예수님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내 양을 보살피라
바울은 장로들에게 교회를 사랑도록 부탁할 아니라 양떼를 돌보라고 말합니다. 다시 28절, 행20:28,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다같이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 무의식중에 떠올리는 것이 교회 건물입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예배당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거기 모인 사람들입니다.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영어로 church, 독일어 Kirche합니다만, 이 말은 어원상 “키르케”, “주님께 속 속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주님께 속했다는 말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닙니다. 성도입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성경은 “양, 양떼”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양, 양떼”라는 말을 여러번 썻습니다. 28절 앞부분,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29절에도 행20: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 양떼를 위해 세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28절 중간에,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여기서 말하는 감독자는 실제 에배소 지방의 장로들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장로”는 요즘의 장로보다는 넓은 의미의 교회지도자, 지금의 목사, 교회 일꾼을 포함한 개념이었습니다. 이 교회 일꾼은 누가 세웠고 왜 세웠는가? 28절 중간을 보세요. “성령이”, 성령이 세웠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직접 세웠습니다. 여러 목회자, 장로, 직분자 여러분, 여러분을 누가 세운 것입니까? 교회가 세웠습니까? 당회가 세웠습니까? 목회자가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세우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운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왜 세웠느냐가 더 중요합니까? 왜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을 교회일꾼으로 감독자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 세웠다는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그가 세운 목적에 부합하게 일해야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목회자의 최고 사명은 무엇입니까? 설교입니까? 기도입니까? 심방입니까? 교육입니까? 한마디로 목양입니다. 양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을 위임하여 보살피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한시라도 잃어버리면 목회자가 아닙니다.
이중표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인 중 태어날 때부터 치아상태가 좋지 못한 교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올라오는 계단에서 목사님이 그 교인과 마주쳤는데 “아~ 해봐. 치아는 괜찮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 교인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운지 “목사님, 제 치아는 보기는 흉하지만 건강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괜찮지?”하고 물어서 그 교인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마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믿음이 약해서 조금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교회를 나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남편 따라 가끔 오후예배에 출석했는 데 목사님이 그것을 알고 전화했답니다. “왜 교회 안 왔어. 아무리 둘러봐도 안보여서 서운했어요.” 그 순간 그 교인은 전화기를 붙들고 울고 말았답니다. 그때 목사님이 깜짝 놀라 왜 우느냐고 성도가 우는 것은 목사의 잘못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감했습니다. “그렇다. 성도가 눈물 흘리는 것은 목사의 잘못이다”. 지난 주 저는 제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갑자기 들으셨겠지만 저는 하루 이틀 기도하고 내린 생각이 아닙니다. 오래 전 젊을 때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이 기억나게 하고 오랫동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발표를 듣고 우는 성도들 때문에 저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성도를 울게 한 것은 목회자의 책임입니다. 너무 죄송하고 미안한 일입니다. 성도들에게 웃음을 주어야 하는 데 눈물을 주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저를 위해 우는 것과 제가 목회자로서 올바로 서서 하나님의 길을 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 성도를 양떼처럼 돌보라고 세운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장로제도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산물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회안에 평신도를 대표하는 조직이 있었지만 성직자 중심의 중세시대에는 큰 빛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칼빈이 제네바시를 신앙으로 다스리기 위해 목사와 장로 24명으로 구성된 “컨시스토리”를 구성함으로 장로제도가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역시 성도 곧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양들을 많이 관찰했습니다. 양을 잘 돌보려면 양들의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양들은 크게 네 가지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이 양을 치는 사람들이지만 대표적인 직분자가 장로입니다. 그래서 양을 잘 보살피기 위해서는 장로님들은 양이 가진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양의 가진 첫 번째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혼자 있다는 감정입니다. 양은 아무 문제가 없어도 힘들어 합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할 일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은 성도들과 자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환란을 만난 성도들을 자주 찾아가야 합니다. 슬플 때 울어주고 기쁠 때 웃어줘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장례식때는 참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시간만 나면 슬픔당한 사람, 부모 잃은 사람, 입원한 사람들을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러라고 세웠습니다. 둘째 양은 내부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내부의 갈등은 왜 생깁니까? 서로 다투기 때문입니다. 이 때 누군가 교인간의 평화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무라지 말고 잘 들어주고 중재안을 내서 중재와 화해의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 일을 주로 장로님들이 하셔야 합다. 셋째 양은 해충 때문에 힘듭니다. 두려움이 양의 존재론적 문제라면 갈등이 양의 관계적 문제라면 해충은 사단의 공격에 의한 영적 문제입니다. 실제로 쇠파리, 진드기, 말파같은 해충들이 양을 괴롭힙니다. 장로님들은 교회안에 있는 해충이 무엇인지 늘 살펴야 합니다. 때로 해충과 담대히 싸워야 하고 때로 해충을 잡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초기에 해충을 잡지 않으면 교회안에 문제를 키우는 것입니다. 양이 힘든 네 번째 이유는 굶주림 때문입니다. 양이 다 좋아도 못먹으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잘먹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로님들이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잘 배워야 잘 먹입니다. 장로님, 기억하십시오. 감독자를 위해 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있고 양을 위해 감독자가 있는 것입니다. 양없는 감독자는 할 일도, 사명도, 존재 이유도 없습니다. 양을 더 사랑하십시오. 양을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양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양들은 그런 사람을 감독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이리떼를 쫓아내라
그러나 교회의 감독적 기능은 양을 돌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행20:29-30,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여기 “이리떼”가 나옵니다. “이리떼”는 “늑대”입니다.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가면 늑대가 많습니다. 늑대는 광야에 살면서 새, 토끼, 쥐, 도마뱀, 심지어 노루까지 잡아 먹고 삽니다. 이스라엘에 사자는 거의 없지만 사자와 늑대의 차이는 사자는 낮에 활동하고 늑대는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사자는 앞에서 공격하는 데 늑대는 비겁하게 뒤에서 공격합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사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어두운 데서 활동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늑대가 이깁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안팎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악한 존재로 늑대를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늑대는 교활하고, 어둡고, 겉다르고 속다르고, 이기적이고 사납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늑대가 29절에는 밖에서 들어오고 30절에서는 안에서 생겨납니다. 외부자와 내부자가 있습니다. 먼저 내부에서 교회를 허무는 세력이 있습니다. 30절 말씀 보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 특징을 보겠습니다. 먼저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파당적입니다. 분열적입니다. 우리와 남을 가릅니다. 우리에 속한 사람은 어떤 잘못을 해도 공격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속한 사람은 사사건건 비판합니다. 잘못된 패거리의식입니다. “어그러진 말을 하며”,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끌어”했습니다. “끌었다”는 말은 유혹하여 분리시킨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그 편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감언이설로 끌어 들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교회나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 교회안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경고합니다. “회개하든지 교회를 떠나든지 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회개하든지 떠나든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곧 본인들이 행한대로 판단받을 것입니다. 교회의 감독적 기능은 양들은 지팡이로 인도하고, 늑대들은 막대기로 응징합니다. 회개하든지 떠나든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밖에서 공격하는 세력입니다. 이 세력을 29절은 “흉악한 이리와 같은 세력”이라고 말합니다. 곧 사단의 세력입니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들입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과 주장과 구호를 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교회 파괴입니다. 주님이 요10장에서 목자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하여 말합니다. 요10:10-11,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요....나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두 가지입니다. 양은 사랑하고, 늑대는 싸우고, 양을 보호하고, 늑대는 퇴치하고. 제 방에 가면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가 한쪽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 데 저 편에서는 양을 노리는 이리들이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습니다. 양은 그 사이에 서서 한편으로는 양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리떼와 싸웁니다. 그 메시지가 아주 좋아 늘 제 방에 걸어 놓고 묵상합니다.
서울의 어떤 신흥주택가에 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부터 주변에 모텔들이 들어섭니다. 하나 둘이 아니고 수십 개가 들어섭니다. 이 때 교회 목사님이 성도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모델 건축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경찰이 와서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주동자입니다”. 목사님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목사가 주동자인 것을 안 경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신자입니다만, 왜 목사님이 이 일을 합니까? 목사님은 교회나 잘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이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렇소. 나는 양을 지키는 목자요. 그러나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이리와도 싸웁니다”.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늑대와도 싸웁니다. 양에게 침투하는 늑대를 보고 훤히 웃고 있는 목자가 좋은 목자가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좋은 목자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가 누구입니까? 천사처럼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다니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까?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싸우는 목자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양들을 위해 싸우는 목자입니다. 제가 지난 주 사임의사를 밝혔더니 몇 언론가가 알고 보도했는 데 그중에 신천지 기관지인 <천지일보>가 기사를 썻습니다. 내용은 이윤재 목사가 사임을 발표하고 해외 선교사로 나가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고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약속을 이행할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고 썻습니다. 꼭 누구하고 똑같은 어법을 썼습니다. 한 마디로 말합니다. “참 친절도 하십니다. 남이야 하든 말든 무슨 염려가 그리 많습니까? 당신의 속셈을 누가 모를 것 같습니까? 혹시 제가 사의를 표명하는 사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신교회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그렇게 쉽게 당할 교회가 아닙니다. 제가 눈 뜨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입구에 붙인대로 일체의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 교인 여러분은 신천지로 의심되는 사람 보면 즉각 교구장에게 이야기하고 그래도 안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세요. 혹시 이 중에 신천지 있으면 좋은 말 할 때 떠나십시오. 금주부터 등록자는 바로 교회앞에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본인이 다닌 교회를 확인해야 등록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대 목사님은 몸으로 별세하고 2대 목사인 저는 믿음으로 별세하고자 합니다. 목회자가 조금 일찍 그만 두었다고 한신교회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달라지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별세를 촉구하지 말고 각자 선 자리에서 모두 별세해야 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말했습니다. “교회는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달라라져야 합니다. 조금씩 자기 자리를 내려놓으십시오. 욕심이 있다면 조금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읍시다. 32절 보십시오. 행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죽기만 해서는 진정으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여러분은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그 분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제도도 고치고, 잘못된 관행도 고치고, 이것 저것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공급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농부가 몇 년 걸려 지은 마굿간도 말이 뒷발길 한번 잘못하면 무너집니다. 행20:19절을 보십시오. ”모든 겸손과 눈물과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교회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절대 그냥 되는 교회는 없습니다. 겸손하게 눈물흘리고 인내하며 씨를 뿌리고 또 뿌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한신교회를 사랑합시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 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한신교회 이루어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신년
양향모목사 / 행 20:25-27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3:1-2)라고 했습니다. 메시야를 통하여 시작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시작할 그 메시야가 오실 때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말씀을 시작하시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나라를 시작할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빼앗긴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되찾고 이스라엘을 막강한 나라로 다스려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했던 설교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된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 하나님나라가 완성이 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나라로 시작을 하고 하나님나라가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하나님나라를 계속 전파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으로 사도행전이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사도를 통하여 그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놓고 설교를 하는 가운데서도 바울 자신이 그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오늘 설교제목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입니다.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자주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바울이 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자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 표어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입니다. 여기 주고받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받은 복이 있는 사람인데 이제 그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도 바울이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서 그런 심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본문 25절에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힘을 다하고 애를 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중에 왕래를 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전했고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하나님나라를 간절하게 여러분에게 전한다고 했습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냥 “여러분 중에 왕래하여”라고 표현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 속에 바울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다녔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교통사정은 오늘날 같지가 않았습니다. 걸어서 가거나 배를 타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요즘처럼 길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험한 길이었고 도처에 강도들이 숨어 있었고 가다가 쉴 곳도 없는 다니기가 어렵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배도 요즘처럼 튼튼하고 엔진이 달려서 빨리 가는 배가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노를 젓거나 바람을 이용해서 가는 돛단배였습니다. 풍랑도 심하고 배도 작고 약한 배였기 때문에 배를 탈 때마다 목숨을 걸고 타야만 했을 것입니다.
가는 거리도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도시를 지나서 나라를 지나서 대륙을 건너서 다니는 먼 길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먼 길을 건너다니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한번만 방문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세 번을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 갔던 도시를 다시 방문한 것은 바울이 전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그대로 변함이 없이 바르게 유지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떠나오면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 복음을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을 전하여서 바른 믿음을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방문하여서 복음을 바로 잡고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다시 왕래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오늘 이렇게 대면하고 헤어지고 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다시 오지 못한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라고 강조를 하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질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고 끌려 다니다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유언적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유언적인 설교가 그동안 자신이 왕래를 하면서 애를 써서 전파했던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애타게 전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복음이 변질되게 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을 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6절에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믿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따르지 못하고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도바울이 에스겔 33장을 생각하면서 한 말입니다. 에스겔서 33장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들이 사는 주변에 성을 쌓고 성 위에 파수꾼을 세워서 적군이 침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적군이 칼을 휘두르며 침입을 하는 것을 파수꾼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미리 약속한 대로 나팔을 불든지 고함을 지르든지 해서 적군의 침입을 알리는 것이 파수꾼의 임무였습니다.
파수꾼이 약속한 신호대로 적군의 침입을 알렸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을 하거나 방어를 하지 않고 방심하고 있다가 죽임을 당하면 그 책임이 죽은 사람 자신에게 있고 파수꾼에게는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졸았다거나 다른 짓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함으로 인해서 사람이 적군을 피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면 그 피의 책임이 파수꾼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기를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외쳐라 그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으면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기 때문에 네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지 않고 회개를 외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죄로 인해서 죽으면 그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외쳤기 때문에 당신들이 복음을 믿고 따르지 않거나 다른 복음을 따라서 감으로 멸망을 당한다고 해도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에스겔과 같이 사도바울과 같이 파수꾼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책임이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파수꾼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서 우리 주변에 내가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들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된다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변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받은 이 위대한 믿음을 전하여 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단순히 전도해서 우리교회 식구 한 사람 늘리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영원한 천국을 알지 못하여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여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복음은 전해도 그만이고 전하지 않아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전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면하여야 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복음을 전하기 힘이 든다고 하면 전도지라도 한 장 그 손에 넣어주거나 위대한 믿음 진실한 고백 이 책이라고 한권 선물하시기 바랍니다. 그 책에 믿음의 핵심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읽어보고 믿거나 읽지 않고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7절에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꺼리지 않았다는 말은 움츠러들거나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는 이 일은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주저하거나 움츠러들 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의 베드로 사도나 사도바울이나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을 제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따르려고 했고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고전 1: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너무나 확실하고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뜻에 따라서 사람이 계획하고 만든 일이라면 확실하지도 않을 것이고 수시로 변하게 될 것이고 다른 길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생각도 해보고 망설이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추진하신 일이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하게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먼 길을 왕래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사명을 받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거리낌 없이 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을 받는 것도 복이 있지만 이 복음을 나누어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
행 20장 26~28절 / 이규왕목사
어느 사람은 한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에 출석하여, 동일한 말씀을 들으면서 주일마다 기대감과 행복감에 젖어서 기쁨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반면에 어느 누구는 무엇이 불만인지 마치 먹기 싫은 음식을 먹는 사람처럼 불평만 늘어놓고 다른 사람까지 시험에 들게 합니다.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물론 음식도 중요하지만 식성이나 입맛은 더 중요한 것처럼 교회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이상이 생기면 교회에 대한 회의가 제일 먼저 찾아오게 됩니다.
악한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하여 시험에 듣기를 바라고 날마다 유혹을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교회와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싫어지면 자연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평안과 재충전을 위해서 가정이 절대로 필요하며 가정의 안정이 없이 국가의 안정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평안과 재충전을 위해서는 교회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이란 가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몸담고 있는 집을 포함하는 것처럼 교회도 교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건물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한방에서는 인체의 양과 음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질병의 원인으로 보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좌와 우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좋은 가정, 좋은 교회의 균형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관에 있어서도 보이는 지상 교회와 보이지 않는 천상교회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상주의도 문제가 있지만 무교회주의는 더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갈수록 가정이 해체되어가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처럼 교회에 대한 무관심과 탈루 현상이 젊은 세대일수록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더 바울이 변하여 사도가 된 후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생명을 다 바치는 가운데 오늘 성경은 에베서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과 사랑이 나의 관심과 사랑으로 일체화되어지는 것이 승화된 사랑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심사가 곧 나의 관심사요 사랑의 대상이 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처럼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지상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라고 호칭한 것은 하나님이 지상 교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할까요?
행복한 사랑은 일방적인 짝 사랑이 아니라, 서로 이해와 섬김과 배려와 주고받음이 있는 나눔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상, 독생자 예수, 구원의 복까지 값없이 주신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던 어린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신앙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용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을 때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가 이전보다 더 큰 신앙의 기쁨이 동반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회가 성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지고 오늘날도 신학적인 대립이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성전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형식의 장소로는 오늘의 교회가 성전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라는 영적 의미로는 오늘의 교회는 여전히 성전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지상 교회를 낳은 어머니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바로 그 성령이 임재하시고 주관하시는 예배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곳이며, 교회가 성령이 임재하여 예배를 주관하시는 곳이며,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교회는 여전히 성전인 것입니다.
1)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곳입니다.
2)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령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3)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을 통해 인간들을 만나시고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교회를 묘사하는 여러 호칭들이 열거되어 있는 가운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깊이 배어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1) (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2) (시 28: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3)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4)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5) (사 56:7)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6)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7)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상 열거한 일곱 가지 중에서 집이나 뜰과 같은 것들은 언제든지 바꾸기도 하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떠나는 것은 죽음외에는 불가능한 것이라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말씀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앱 4: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골 1: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 몸된 교회 사랑
세상에서 아무리 몰인정한 사람도 자기 몸은 사랑합니다. 현대인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건강입니다. 그 건강은 바로 자기 몸을 돌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몸을 돌보는 것으로 표현되어진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 몸을 못 박아 피 흘려 값을 지불하여 교회를 사신 것은 곧 교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단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피를 팔아서 무엇을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를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보다 더 고귀한 피가 없다면 그 거룩한 피로 교회를 사신 것은 세상에서 교회보다 소중한 곳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배와 전도
예수께서 피 흘려 교회를 사실 정도로 교회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교회의 어떤 면이 그 정도로 중요한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성은 곧 교회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은 여려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두 가지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일과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1)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구약의 성전보다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처소가 되도록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드려지는 일에 전교인이 참여해야 합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중간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아와서 예수님을 믿어 천국가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본보여 주신 대로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전진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 봉사와 헌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아와서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과 복음을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구체적으로 헌신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모든 사명들의 주권자이시다. 공적인 예배란 부활하신 구속주께서 자기 백성들과 만나시는 것이며, 복음 전파란 사람들을 구세주께서 초청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율법을 공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성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육성은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고 기성 신자들을 훈육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충복시키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대의사(大醫師)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다.
1) 이를 위해 한주간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예배시간에 늦지 말고, 질서를 지키고, 예배의 훼방자가 되지 말고 봉사자와 섬김이가 되어야 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공생애 기간에 주님이 본보여 주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교회 안에 조직된 여러 기관과 계획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의 실천을 위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필요로 하심을 깨닫고 기관의 회원이 되어 회비를 드리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헌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교회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몸된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역점 두고 있는 일에 방관자나 비판자가 아니라 기도와 헌금과 시간을 드려 헌신하는 성도가 되는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말로만 교회를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갈수록 교회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성도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얼굴에 기쁨으로, 입술의 고백으로, 삶의 수고로 나타나질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회복하는 일과 복음 전파와 선교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도 교회를 세우신 주목적도 예배와 전도와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시고 훈련시키신 궁극적인 목적도,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는 까닭도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예배는 전 교인이 참여하면서도, 전도와 선교와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에는 소수만이 참여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가 저절로 부흥하고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들에 의해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2005년 전 교우들이 공 예배에 다 참여하고, 태신자를 작정하여 전도하고, 선교회와 장학회원이 되는 전교인 회원 되기 운동에 참여 바랍니다.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행 20장 28절 / 김명혁목사
오늘 너무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을 감사하고 담임목사 취임을 축하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하누리시민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교회는 돈으로 산 것이 아니고 피로 사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서울 창동교회(나중에는 대창교회로 이름이 바뀌었음)에 다니면서 은혜와 감동을 너무너무 많이 받곤 했는데 어느 해 여름 김치선 목사님께서 대구 주암산에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따라가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간에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피 흘려 사신 교회”라는 찬송가 가사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더 이상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옆에서 저를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 있어?” 라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도 못하고 그저 한 2,30분 동안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를 생각할 때 충격과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 창동교회에서 새벽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셨고 이만 팔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즉 교회를 세우라고 하셔서 저는 고등학생 3학년 때 왕십리 벌판에 가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전도하다가 개척교회를 하나 세운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권면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피를 흘리신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지적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는 돈으로 산 것이 아니고 피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100세가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께서 교회는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회개의 무릎을 꿇면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정결하게 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샘이 나의 앞에 있도다 성령께서 권고하되 죄 씻으라 하시네 찬양하리 찬양하리 죽임 당한 어린 양 주께 영광 돌리어라 우리 죄를 씻어주셨네”(198). 교회에 와서 기도의 무릎을 꿇면 죄악의 세력을 이기고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승리를 얻게 됩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이 교회로 향하고 계십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5,16).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마음껏 화개하고 마음껏 기도합니다.
둘째로 목회자는 피로 사신 교회와 양무리를 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에베소교회의 감독자에게 부여하신 엄청난 은혜와 축복과 특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과 특권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이와 같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과 특권을 사도 바울에게 부여하셨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2-14).
이와 같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과 특권을 부여 받은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행20:28). 삼가라 조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말도 행동도 삼가고 조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2-4). 양 무리를 부득이함으로 치지 말고 자원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면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4). 한 말씀을 추가로 드립니다. 목회자로써 세상 유행을 너무 따르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각종 음악과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무릎을 꿇고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김삼환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새로운 것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새벽기도에 치중하고 말씀 중심과 주님 중심과 복음 중심으로 일관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목회자는 자기 손에 붙잡혀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계2:1과 1:20에 보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다고 했는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2:1).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얼마나 큰 위로와 큰 기쁨과 큰 용기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셋째로 양무리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양무리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귀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씀을 요10장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면서 양들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시23에서는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계2장과 3장에 보면 주님께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즉 양무리들 가운데로 걸어가시면서 양무리들의 형편을 다 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계2:1,2).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계2:13).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계2:1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계3:15). 누군가가 우리의 형편을 다 알아주신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용기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정과 형편을 모두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양무리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잘못하는 것을 애정을 가지고 지적하시면서 결국 우리들을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시는 가장 선하신 목사이십니다. 우리 양무리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갈 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착한 양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곳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피로 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양무리들을 치는 직분만큼 귀하고 축복된 직분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우리들에게 맡기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양무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받는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교회당 입당과 담임목사 취임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직의 삶과 사역
김명혁목사 / 행 20:28, 엡 4:11,12
오승철 목사님이 오늘 오후 예배 시간에 “제직 훈련”에 대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직이란 교회를 섬기는 여러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교회를 섬기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권사 등의 직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권사들이 모여서 교회의 일을 의논하는 모임을 “제직회”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권사들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제직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교회 사랑”과 “교회 섬김”이 얼마나 귀중한 사역인지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피로 사시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이 항상 향하시는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46장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초등학생 때 평양에서 살았는데 북한에서는 주일에도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일 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지만 저는 주일날엔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 저는 11살 때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38선을 혼자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고향과 부모님을 떠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한 평생을 외롭게 살았지만 남한에 와서 주일 날 교회에 가서 종일 예배 드리며 봉사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서울에서 살았고 1950년 6.25 전쟁 때는 대구로 피난을 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는데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 드리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 빠지지 않았습니다.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로 돌아와서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저는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를 열심히 드리며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삼각산이든 관악산이든 어디든지 따라다녔는데 대구 주암산까지 따라다녔습니다. 대구 주암산 부흥회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을 불렀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의 찬송을 부르다 말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너무 감동적이고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귀한 교회를 늘 사랑하여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곳보다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곳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직은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직의 삶과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목사와 장로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삶과 사역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저들로 하여금 목자의 삶과 사역이 어떠함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17-24). 목자 또는 목사의 삶과 사역은 “겸손과 눈물”로 이루어지는 삶과 사역임을 상기시켰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그리고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기면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치는 것”이 목자 또는 목사의 삶과 사역인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 목자 또는 목사의 삶과 사역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라고 고백하면서 목자 또는 목사의 삶과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헌신”과 “희생”의 삶과 사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과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장로들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치며 그렇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8-31). 장로들의 삶과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삼가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그리고 장로와 교역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 너무나 귀중한 책임을 맡은 자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학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음악 공연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기 피로 사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장로들과 교역자들은 앞으로 흉악한 이리와 같은 이단들과 박해자들이 들어와서 양떼를 끌어가려고 할 때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양떼들을 지켜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교역자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치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장로교 헌법은 장로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를 심방하여 위로하고 교훈하며 보살핀다. 신자를 심방하되 특별히 병자와 상가를 찾아 위로하며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자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돌봐야 할 것이니 일반 신자보다 장로는 개인적 의무와 직무상 책임이 더욱 중하다. 신자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 특히 환자와 슬픔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도움 받아야 할 자가 있을 때에는 목사에게 보고한다.” 사도 베드로도 장로들을 권면하면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1-4)고 지적했습니다. 교역자와 장로의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 사명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양무리들을 “치고” "지키고" “보살피는” 사명을 교역자들과 장로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둘째로, 집사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들의 삶과 사역의 모습을 살펴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 니라”(행6:3-6). 여기 예루살렘 교회가 택하고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해서 세운 일곱 사람들을 일곱 집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라고 했는데 이 일이란 구제하는 일을 말합니다. 집사들의 사역은 우선적으로 구제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구제가 교회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도 사역도 함께 했습니다. 일곱 집사 중 스데반과 빌립은 유명한 전도자로 역사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는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란 세상 지혜가 아닌 영적 지혜가 충만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집사는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덕망과 신임성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집사들의 구제와 봉사의 삶과 사역을 소개하면서 사도들 즉 목회자들의 삶과 사역이 어떠하여야 함을 다시 한 번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즉 목사와 교역자의 중요한 본질적인 삶과 사역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는 삶과 사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그 다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집사의 삶과 자격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딤전3:-13을 읽습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8-13). 즉 집사의 자격은 단정한 사람, 일구 이언을 하지 않는 사람,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한 사람,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는 사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여 집사들도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를 세우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장로교 헌법은 집사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집사의 직무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환자와 갇힌 자와 과부와 고아와 모든 환난 당한 자를 위문하되 제직회의 결의에 따라 행하며 교회에서 책정된 구제비와 일반 재정을 수납 지출한다(행6:2-3).
셋째로, 권사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에 권사라는 직분은 없지만 권사에 해당할 수 있는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5장에서 “참 과부” 라는 이름으로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디모데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딤전 5:5-10을 읽습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딤전5:5-10). 사도 바울이 “참 과부”라는 이름으로 권면한 내용을 권사에게 적용한다면 권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일락을 좋아하지 않고 가족을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하고,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고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디도서에서 “늙은 여자” 라는 이름으로 여성 지도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었습니다. “늙은 여자로서는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딛2:3) 라고 지적했습니다. 장로교 교단의 장로교 헌법은 권사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권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제직회의 회원이 되어 교역자를 도와 궁핍한 자와 환난 당한 교우를 심방하고 위로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힘쓴다.” “당회의 지도대로 교인을 방문하되 병환자와 곤란을 당하는 자와 연약한 교인을 돌아본다(딛 2:3-5).”
저는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권사님들에게 권사의 모델로 빌립보 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를 제시하곤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는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리고 헌신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두아디라를 떠나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13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믿음과 기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사람 루디아는 결국 헌신과 섬김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몸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헌신과 섬김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헌신과 섬김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그것은 루디아의 “기도”와 “헌신”과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기도”와 “헌신”과 “교제”와 “섬김”과 “기쁨”의 삶과 사역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 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믿음”과 “기도”와 “헌신”과 “교제”와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넷째로, 제직은 아니지만 신자들의 삶과 사역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의 삶과 사역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 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38,41-47).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신자들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회개”와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성도들의 친밀한 “교제”를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자들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구제”와 “봉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여서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신자의 의무 일곱 가지를 정해서 가르치곤 했습니다. 참고로 그 일곱 가지 신자의 의무를 소개합니다. 1) 주일에는 “주일”을 성수하여 상행위와 매식을 금한다. 2) “예배”를 삶의 중심으로 삼으며 모든 예배에 참석한다. 3)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을 규칙적으로 드린다. 4)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성경공부에 참여한다. 5)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각종 기도회에 참여한다. 6)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에 힘쓴다. 7) 성도간의 “교제”와 이웃에 대한 “봉사”에 힘쓴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게 하시므로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피 흘려 사신 교회의 일꾼들로 삼아주시고 주님과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혹은 목사로 혹은 장로로 혹은 집사로 혹은 권사로 혹은 신자들로 세워주셔서 주님과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직분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 죄인들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섬기게 해 주셨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몸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 바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받들어 섬기는 일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정성껏 섬기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양향모목사 / 행 20:28-30
개혁주의 교회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중심을 최우선의 행동지침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섬기고 우리의 생사화복이나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하에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고 있음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믿고 따르는 모든 삶의 원리나 구원의 도리가 모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르기 때문에 교회는 성경중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교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회 중심입니다. 교회 중심이라고 할 때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다가 세워주셨고 교회에 하나님나라 문을 여는 열쇠를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를 흘려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처럼 작은 교회들을 화려한 건물 하나 없이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 있다고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외형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든 교회들은 다 소중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마지막으로 유언적인 설교를 하면서 이 교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교회의 일꾼 된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운교회
본문 28절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운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피를 흘려서 세운 너무나 소중한 교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하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모인 귀중한 단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운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죽을 대신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세우신 너무나 귀한 곳입니다. 이 교회에다가 천국열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면 하늘에서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교회에서 죄인이라고 정죄하면 하늘에서도 그 사람에게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교회의 권위로 의인이나 죄인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믿음을 가지게 하고 그 믿음이 무엇인줄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고백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들이 그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른 신앙을 고백할 때나 신앙을 바르게 고백을 하면서도 신앙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권면을 하거나 징계를 통하여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을 따라서 바른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는데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해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거짓이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믿음의 고백은 형식적이거나 가식적이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철저하게 진실 된 고백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거짓교회인지를 구별하는 지표가 셋이 있습니다.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지, 바른 성례를 시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른 권징을 시행하고 있는지가 참된 교회인지 거짓된 교회인지를 구별하는 지표가 됩니다. 우리교회는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있고 성찬식이나 세례식을 바르게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교회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징의 실행에 있어서는 좀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듯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바르게 지도를 하거나 잘못된 일에 대해서 징계를 하거나 권면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교회에 와서 진리를 바로 배우고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안다면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소중한 교회에 와서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다거나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지 못하고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엄청난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앞서 인용한 본문 28절 말씀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 “조심하라”, “집중하라”, “전력을 다하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삼가야 할 것이 무엇에 대하여 삼가 할 것인지를 직접 말씀하지 않지만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오면 예수님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그 복음에 따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얻는 일이 너무나 소중한 것인데 그것을 소홀히 여겨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이 일에 집중을 하고 전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 집중해야 되고 혹시 거짓복음이나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해서 살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가장 귀한 일은 교회에 오는 일입니다. 교회에 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바로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내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다 헛되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라면 내가 갖지 않고 남에게만 주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구원이란 내가 먼저 확실하게 가져야 하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먼저 확실히 받아야 합니다.
또 내가 꼭 받아야 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을 때는 그것을 남에게 줄 때도 확신도 없이 주고, 받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
양떼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교회에 온 성도들은 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입니다. 어느 한 사람 소홀히 여기거나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이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낙오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인지 버림을 받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는 하지만 복음을 듣고도 오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교회에 온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줄 알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세운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피로 한 형제가 된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형제보다 더 친밀한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형제는 이 세상에서만 형제이지만 교회안의 형제는 영원한 형제입니다.
이렇게 귀한 성도들이 나로 인해서 상처를 받으면 안 됩니다. 나 때문에 믿음에 실망을 주면 안 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믿음을 보고 더 강한 믿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형제들에게 보여줌으로 교회 안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믿음을 굳건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본문 28절 말씀 중에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감독자란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을 감독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목사와 장로와 감독자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목사와 장로와 같은 교회의 직분들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집사들도 오늘날의 목사들처럼 복음을 전하였고 장로도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가 구별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직분들은 후세에 교회의 편의상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구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감독이란 감리교에서 말하는 감독이나 또는 오늘날의 목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서 교회의 일꾼이 된 모든 사역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모든 직분들이 당시의 감독과 같이 다 성령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직분들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귀한 직분들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교사나 찬양팀이나 어느 직분 하나 중요하지 않은 직분이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귀한 직분입니다. 세상의 어느 직분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할 직분이고 세상에 그 어느 직분보다도 더 충성을 다하여야 하는 직분입니다.
금년에 우리교회는 전 교인들이 하나씩 다 직분을 가지고 충성하자고 말씀을 드렸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직분을 맡았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직분에 충실 할 때 교회도 부흥하고 우리 개인도 더 보람되고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직분을 맡겨주신 목적은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목적도 예수님을 잘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장로나 권사가 심방을 하고 성도들을 살피는 목적도 성도들이 목사가 한 설교대로 믿음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집사가 재정을 관리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이런저런 교회의 일들을 하는 목적도 또한 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가르치는 것이고, 찬양팀이 예배를 도우면서 찬양을 하는 목적도 다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신앙의 제일가는 것임을 알고 성도들의 신앙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8-29)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 믿음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은 그냥 취미생활이나 하기 위해서 서로 교제나 나누기 위해서 좋은 일이나 하기 위하여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은 교회이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구원의 방주입니다. 이런 귀한 모임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 믿음의 위대함을 알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2
행 20장 28~30절 / 양향모목사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할 때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 세우셨다고 했는데 그 신앙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세우셨다고 할 때 그 교회 안에 오게 된 성도들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구원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며 이 신앙고백을 함에 있어서 그 고백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 신앙고백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제목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유언적인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그 중요한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이리를 조심하라
본문 29절에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양떼라고 하면 그 양떼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그들을 노리는 사나운 이리입니다. 이리는 자기가 먹을 양식을 위해서 다른 짐승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난 후에 이단이나 거짓선생들이 교회에 침투해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따져보지도 않고 그냥 거짓선생들을 너무나 쉽게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다시 그 교회를 방문하든지 아니면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다른 복음을 따르지 못하도록 경고를 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에서 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기회도 없습니다. 오늘 이 마지막 설교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다시 살아서 그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 양떼들이 그 사악한 거짓선생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복음을 가르치고 또 가르쳐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라고 했습니다.
1) 이단의 무리들이 수시로 우리들을 넘보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면 엄청나게 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공식적으로 인정된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요즘 한창 기승을 부리는 신천지를 비롯해서 수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판정하고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있는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단의 신학을 연구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이 왜 이단인지를 명확하게 구분을 한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성도들은 교단에서 공적으로 이단이라고 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이단들의 말을 믿고 이단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적으로 이단은 아니지만 이단성이 있는 교회들은 더 많이 있습니다. 특정인을 우상화 하거나 부자세습을 하거나 여자관계가 있거나 엄청난 재산을 가지거나 이런저런 불법을 행함으로 이단이라고 취급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맡은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여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외치면서 자신은 세상의 쾌락이나 세상의 이익을 챙김으로서 말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합니다. 이단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의 교리를 성경에서 가져왔다고 말하고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럴듯하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가짜일수록 더 자신들을 그럴듯하게 꾸밉니다. 남을 속이는 사기꾼일수록 더 완벽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보통의 눈으로는 그들을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런 이단들을 만나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2)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선생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침투해 있는 이단도 있습니다. 신천지는 추수꾼들을 교회 안에 침투시켜서 한 사람 한 사람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거짓선생들입니다. 거짓선생들은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힘듭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더 재미있고 그럴듯하기 때문에 더 쉽게 넘어갑니다.
거짓선생들을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도 거짓에 속아서 엉뚱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배운 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알고 보니 거짓선생에 속아서 엉뚱한 길로 걸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거짓선생들 중에는 자기가 거짓선생인 줄 알고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남을 속이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도 거짓선생에게 배웠기 때문에 자기가 가르치는 것이 거짓인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 가서 유명한 신학교 교수님이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서글펐습니다. 신학교 교수가 하는 설교라고 하면 그래도 교리에 어긋나는 설교는 아니어야 하는데 교리에도 어긋난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 설교를 하면서 좀 유치한 설교를 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예수님께서 재해석을 하시면서 살인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까지 살인에 해당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똑바로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엄청나게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보다 더 바르게 살지 않고 그들보다 더 열심을 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설교를 듣고 있던 목사들이 다 아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 문제를 제기하거나 인상을 쓰는 사람도 없이 평화롭게 그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저만 인상을 쓰고 속으로 불평을 하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설교가 왜 틀렸는지 아실 것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진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수시로 말씀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율법을 잘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지키는 척만 했을 뿐 정말로 율법 속에 있는 그 정신은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살인은 하지 않았지만 살인하지 말라는 그 율법 속에 있는 정신 즉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그 정신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들보다 더 착하게 삶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처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요 형제를 욕하거나 거짓말 한 것이 살인죄라고 한다면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천국에 갈 사람이 없습니다.
로마서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살펴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의 의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리의 핵심이고 그것이 성경의 핵심인데 그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엉뚱하게 이야기하고 거짓말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유치한 설교를 하는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여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천국을 향하에 가게 하는 곳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이단이나 거짓선생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받아야 할 이단이며 거짓선생이며 우리의 생명을 해치는 악한 이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사람들을 조심하라
본문 30절에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 중에서 그런 믿음 외에 다른 말로 꼬여서 자기의 제자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그러진”이란 “왜곡하다”, “그릇 해석하다”, “미혹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왜곡하거나, 잘못해석을 해서 다른 사람을 미혹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는 이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복음을 왜곡하고 복음 외에 엉뚱한 것들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초기에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분은 기도가 제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분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새벽기도가 시작이 되었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기도운동을 전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새벽부터 하든지 철야를 하면서 하든지 기도는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기도하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를 너무 강조하다가 보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보다 기도를 해서 응답받는 믿음이 더 강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이름과 거리가 먼 기도들을 하고 끝에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마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보다도 다른 것들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합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것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좋은 기도운동이 너무나 세상 것을 위한 기도에만 치우치다가 보니까 예수님의 제자에서 기도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따르게 됩니다.
구원을 죄에서 구원보다 이 세상의 가난에서 질병에서 구원을 더 강조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 제자로 삼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해서 부자도 되고 기도해서 병도 고치고 기도해서 행복한 삶을 살자고 외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보다는 이 세상의 행복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것을 복음이라고 외치는 사람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내서 자기제자로 삼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하고 어그러진 말로 그들을 유혹하였습니다.
회개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바르게살기를 각오하게 한 사람도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 참 중요합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회개와 바르게살기가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생활을 잘 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그것 자체가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천 날 만날 하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르게살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 바르게 사는 것 자체를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오해 살만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 믿음보다 더 중요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많아 한다고, 기도를 하여 부자가 되고 성공을 한다고, 기도를 하여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는다고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를 하고 바른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만이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나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것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믿음보다 다른 것들을 더 소중하게 가르치면서 자기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빼앗아서 자기 제자로 삼기 위한 아주 나쁜 교활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도바울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에 침투하는 이리와 같은 존재인 이단과 거짓선생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이 외에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가는 악한 이리와 같은 악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일들을 하여서 유혹을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에서 인간의 제자로 만들어서 인간을 추종하게 만드는 악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 믿음의 교회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피로 세운 교회라고 하신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행 20:28-32 / 피종진목사
교회는 인간이 창조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으로부터 이어져왔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해서 영원히 그 자손과 함께 가인의 계열이 이어지고, 예배에 성공한 아벨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축복의 대열이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곳을 구약시대에는 ‘장막, 성전’이라 호칭했고, 신약시대에는 ‘예배당, 교회’ 등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는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신앙을 고백한 성도들이 모인 단체가 곧 교회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b) 여기서 ‘자기 피’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주고 교회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대개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성도들 가운데에도 교회가 담임목사나 또는 많은 돈을 헌금하여 교회를 지은 사람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어떤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말씀했고,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했으며, 골로새서 1장 18절에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둘째, 교회는 구속의 역사가 이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b) 여기서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 즉 속죄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보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했고, 요한일서 1장 7절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죄 사함을 얻게 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만 받고 죄를 용서받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심적인 고통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죄의 대가를 지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모든 죄 값을 지불해주십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셋째,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은 자로 보살피게 하시는 곳입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고 에베소를 떠나왔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교회를 맡긴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라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는 또한 장로들을 감독자로 부르면서 그들이 에베소교회의 양 떼를 위한 목자임을 주지시켰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 사신 교회를 올바로 양육하기 위해 에베소에서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했습니다(행 20:31).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은 자로 보살피게 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구속의 역사가 이어지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은 자로 보살피게 하는 곳임을 깨달아 교회를 위하여 더욱 더 충성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직분자의 위험
전승문목사 / 행 20:28~38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주신 대표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만약 잘못해서 자연을 훼손하면 그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고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잘 살아야 합니다. 잘못 살면 그에 따르는 책임을 반드시 져야합니다. 그런데 그 책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바로 영원한 형벌 지옥에 떨어지는 겁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의미입니다.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집사든 권사든 장로든 혹은 셀리더든 선교회장이든 그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직분을 받았으면 잘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그에 따르는 책임을 하나님께서 직접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좋은 교회, 은혜로운 교회, 능력 있는 교회는 직분자들이 잘해야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직분자들이 많은 교회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직분은 절대로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직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 직분을 주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문교회는 직분자들이 아주 열심히 맡은 사명을 감당해주시는 좋은 교회입니다. 특히 6개 부서 부장님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직분을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 관리부장님은 관리부장으로 임명되자마자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매주일, 정말 지난 1년 여 동안 한주도 빠짐없이 교회 전체의 방역을 주일마다 책임지고 계십니다. 방역만이 아니라 교회 관리 전반에 걸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충성하고 계십니다. 다른 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무부장님은 코로나로 전교인이 교회에 오지 못할 때도 매주일 재무일을 책임져주셨습니다. 재부부원들이 오지 못할 때도 재무부장님은 혼자서라도 재무일을 다 감당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재정이 얼마나 빈틈없이 운영되는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교육부도 문화부도 선교부도 사회봉사부도 또 여선교회 남선교회 모두 최선을 다해주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교회 교역자님들이나 관리직원들께서도 정말 성실하게 직분을 잘 감당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지켜지는 겁니다. 성실하게 책임을 지시는 분들이 있어서 큰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님들을 부른 것도 그것을 당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장로의 직분을 받았으니 그 직분을 잘 감당해달라고 부른 겁니다. 사실 에베소교회는 아주 열심히 충성하는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 최고의 교회로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 중에서 사실상 가장 으뜸인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바울이 3년이나 머물며 말씀을 전했던 교회이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개척을 시작한 교회이고 바울의 뒤를 이어 디모데와 사도요한이 목회한 교회입니다. 특히 에베소교회의 가장 큰 업적은 바울의 서신을 수집하고 전파한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디모데 전서와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이 13권의 성경이 에베소교회 덕분에 수집되고 전파된 겁니다. 또한 누가에 의해 기록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도 사실상 에베소교회에서 집필된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요한이 성모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낸 곳도 에베소교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집필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약성경은 에베소교회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에베소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철저한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그래서 많은 사명을 감당할 때는 아직 성경이 확립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리적으로는 아직 많이 취약할 때라 각종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이단들을 판별해내고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교회가 바로 에베소교회입니다. 주님도 에베소교회의 그 공로만큼은 분명하게 인정해주셨습니다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시록 2:2~3)” 이처럼 훌륭한 교회, 참으로 대단한 교회가 바로 에베소교회였던 겁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리고만 교회가 에베소교회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큰 역할을 감당했지만 교회사에서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잊혀진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떠나고 나서 약 200년 정도 흐른 뒤에 에베소는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AD 260년부터 8년 동안 고트(Goth)족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끔찍하게 약탈당했고 그토록 자랑하던 아데미신전도 이 기간에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지진들이 일어났고 해변에는 엄청난 양의 진흙이 밀려들었습니다. 결국 에베소는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고 밀려온 진흙으로 도시가 완전히 늪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던 아데미 신전의 대리석은 이곳저곳으로 팔려나갔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양의 대리석이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소피아 성당)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실제로 1863년 아데미신전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장장 1600년 동안이나 그 신전의 모습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는 멸망이 임박한 도시였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그토록 열심히 복음을 전했던 겁니다. 또한 그래서 그토록 훌륭한 사도들이 찾아와 복음을 전했던 겁니다. 회개하라고, 잘 믿으라고, 그래서 멸망을 피하라고 간곡히 권면했던 겁니다. 밧모섬에 갇혀있던 사도요한에게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시록 2:4~5)” 만약 에베소교회가 그때 회개했다면 에베소의 운명은 달라졌을 겁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에베소도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아주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한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여러분은! 여러분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삼가라! 삼가라는 말은 프로세코(προσέχω)라는 말인데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도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인데 구약에서는 솨마르(שָׁמַר)라고 합니다. 솨마르, 이 말의 원뜻은 가시로 울타리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서 넘어가지 않게 한다는 뜻인 겁니다. 그게 솨마르입니다. 스스로 가시 울타리를 만들고 넘어가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좌우에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겁니다.
바울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을 예로 들어 말씀했습니다 :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18절~21절)” 시험을 참으면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 말씀을 전했다는 겁니다. 지난 3년 동안 바울은 그렇게 참으면서 눈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일깨어! 원어로는 그레고레오(γρηγορεύω)라는 말인데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정신을 잘 차리고 주변을 살피면서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그게 직분자의 사명입니다. 일깨어있는 겁니다. 항상 정신을 잘 차리고 있는 겁니다. 원수 마귀가 교회를 흔들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리고 삼가 경계하는 겁니다.
지금 바울의 눈에는 교회를 흔들려는 마귀들이 이미 덤벼들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겁니다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제 바울이 떠나고 나면 사나운 이리가 에베소교회를 찾아올 겁니다. 그들은 목자처럼 나타나겠지만 실상은 사나운 이리들입니다. 목자는 양을 보호하는 존재지만 이리는 양을 잡아먹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들도 겉으로는 목사라고 하겠지만, 겉으로는 장로라고 하겠지만, 겉으로는 직분자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양을 잡아먹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나운 이리 곧 마귀의 하수인들인 겁니다. 그런 자들이 찾아올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깨어 조심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장로들 중에서도 그들과 함께 교회를 무너뜨릴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여러분 중에서도!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중에서도! 바울이 세운 바울의 제자들 중에서도, 사나운 이리가 될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성도들이, 교인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어그러진 말! 디아스트레포(διαστρέφω), 왜곡된 말이라는 뜻입니다. 비틀어진 말이라는 뜻입니다. 어그러진 말로 왜곡된 말로 교인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보이는 겁니다. 지금은 바울의 제자라고, 바울이 세운 장로라고, 그곳에 함께 앉아있지만, 얼마 후에는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 왜곡된 말을 만들어낼 사나운 이리들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부른 겁니다. 그래서 당부하는 겁니다. 그들은 어떤 말로 교인들을 현혹할까요? 어떤 어그러진 말을 만들어낼까요? :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한 적이 없는데 바울이 마치 그런 것을 위해 성도들을 이용한 사람인 것처럼 왜곡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직접 벌어서 모든 경비를 충당했건만, 오히려 약한 사람들을 도왔건만, 그런 바울을 파렴치한 삯꾼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거라는 말씀인 겁니다. 그것도 이 사람들 중에서! 지금 바울의 앞에 있는 그 장로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나올 거라는 말씀입니다.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에서 그것도 바울이 직접 세운 장로들 중에서 그런 사람이 나올 거라니...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여기 있는 이 사람들 중에서도 변질될 사람이 있을 거라는 말씀인 겁니다. 지금은 바울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나중에는 바울을 험담하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겁니다. 왜곡된 말, 비틀어진 말을 하는 겁니다. 없는 말은 아닌데 그 말을 비틀어서 하는 겁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데 그 말을 아주 묘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바울을 향해서, 교회 지도자를 향해서, 담임목사를 향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담임목사와 성도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목사님이 좋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목사님을 의심하게 되는 겁니다. 전에는 목사님이 정직한 분으로 보였는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나서는 목사님이 의심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그러진 말입니다. 그게 사나운 이리들이 양을 잡아먹으려고 퍼뜨리는 왜곡된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겁니다. 예수님 때도 제자들 중에 가룟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당연한 일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3~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이것은 대단한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람들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천지처럼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만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교회 그 위대한 교회의 장로들 중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바울을 안고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그렇게 될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변질되면 버려야 합니다. 값비싼 재료를 사용한 귀한 음식이라도 변질이 되면 음식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건 절대로 먹으면 안 됩니다. 먹으면 탈이 나고 문제가 생기고 병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질되기 전에는 값비싼 음식이었겠지만 귀한 음식이었겠지만 좋은 음식이었겠지만 변질되면 못 쓰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모두가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변질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변질되지 않은 것이 맞습니까? 변질된 신앙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변질되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장로들이, 얼마나 많은 직분자들이 변질되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안타깝고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분에는 반드시 그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분 잘 감당하십시오. 절대 변질되지 말고 끝까지 잘 하십시오 :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오직 말씀, 은혜의 말씀에 바로 서도록 하십시오. 말씀은 시간이 지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새신자 때나 직분자가 되었을 때나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십시오. 음식이 변질되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끓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쉬지 말고 뜨겁게 기도하십시오. 항상 은혜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이동휘목사 / 행 20:28-38
1.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20:17-25)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교회를 두고 “(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엑클레시아’(?κκλησια)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17:11입니다.
(레17:11)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죄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사함을 받아야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영생)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바로 인간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이렇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두고 “(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교회,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 즉 성도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6:19-20입니다.
(고전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교회는 예수의 이상(理想)을 찬양하고 그의 고상한 윤리적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자기의 것으로 삼으신 사람들의 무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근본이 되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교회, 즉 하나님의 피값 주고 사신 바된 성도들은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했습니다.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는 바 된 교회, 성도 여러분은 이제 사람들의 종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사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교회를 위해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든 서신을 보면, 은혜란 말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전 1:3-4)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갈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이같은 사실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변화된 삶을 설명하는데도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재창조되는가, 그러한 변화와 재창조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신에게 끼쳐준 변화의 결과를 결코 잊을 수 없으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 전서15:10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의 속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의 성구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속에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20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삶의 원리는 오직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은혜를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은 십자가가에 못박혀 죽고, 자기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임하는 박해와 곤란 속에서도, 오직 은혜만이 그 인생의 무서운 긴장을 뚫고 나가게 할 수 있게 하는 무기인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힘과 능력과 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2:15-17입니다.
(살후2:15-17)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을 말하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워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면에서 몹시 불편하고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로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만,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며, 그것은 바로 ‘육체의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후서12:6-9입니다.
(고후12:6-9)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 말씀하신 것은 ‘육체의 가시’를 기뻐하고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고, 그 ‘육체의 가시’로 인해 끝까지 겸손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는 삶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자신의 삶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는 날마다의 굳굳함과 힘으로 인간에게 무장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은혜는 인간의 생활을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은혜는 “(고후6:9-10)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32절의 말씀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는 그 의미가 이렇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사신 그의 것이다. 너희를 위협하는 크고 극악한 위험들이 있는데, 밖으로부터는 흉악한 이리의 위험이고 안으로부터는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의 위험이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너희를 구하고 너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은 언제나 교회에게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삶의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가 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섭리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3.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성도 여러분을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으셨다.” 고 했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성도 여러분을 감독의 직무를 수행할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감독은 영어로 오버시어(overseer)인데 이는 ‘지켜보며 감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감독은 그가 감독하는 대상을 가까이에서 보지 않고 멀리서 보며, 일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봅니다. 감독의 또 다른 기능은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마땅히 보아야 할 자들임에도 보지 못하고, 마땅히 양떼를 먹여야 함에도 오히려 먹기만을 탐하는 입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위험 가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부로부터의 위험이고 또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위험입니다. 내부로부터의 위험은 “제자들을 이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30절)의 위험을 말하고, 외부로부터의 위험은 “흉악한 이리(29절)”의 위험을 말합니다. “흉악한 이리”는 거짓 선생들, 즉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가짜들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7:15-23)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눅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교회 지도자라 하면서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영적인 상황은 이리 가운데 보냄받은 양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거짓된 선지자, 거짓 선생, 거짓 그리스도 등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 있습니다.
(벧후2:1-3) (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러한 종교적 협잡꾼들을 찾아내어 물리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부로부터의 위험, “제자들을 이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30절)의 위험은, 교회 내에서 자리와 권력에 야망을 품은 사람들로 인한 위험입니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교회사는 교회에서 항상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내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에 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삼1:9-11)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초대 교회 시대 초기 <순회 복음전도자>는 오로지 복음 전파를 위해 아무런 보수도 없이, 또한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순수하게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열정적으로 봉사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순회 복음전도자>들을 잘 이해했습니다. 자신도 역시 <순회 복음전도자>의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달리 그들을 이해하면서 따뜻하게 영접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후원하며 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해줌으로 해서 그들에게 복음전도에 힘을 얻게 하므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는 오직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순수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심지어는 비방을 서슴지 않고 이들을 대접하려는 교인들까지, 자신에게 집중하여 섬기지 아니한다 해서, 교회에서 내어 쫓으려는 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디오드레베가 바로 그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교인 중 독선적인 지도력으로 자기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쓸어버리려는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사도 요한의 권위까지도 무시하고 희롱하며, 자신의 위치를 교회에서 가장 높은 데 두어, 교권과 이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하는 사악한 인물이었습니다. 소위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그같은 지도력을 따르는 세력이 있을지 모르나, 사도 요한이 볼 때는 디오드레베는 분명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지도력, 카리스마는 사랑과 섬기는 겸손함에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 막는다고 해서 베드로나 가롯 유다를 가차없이 내몰아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므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어느 한 개인의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과 섬김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목회자의 목회 성공 운운하는 것은 교회를 잘못 이해하거나 교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어느 한 개인의 지도력에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의 카리스마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 자체에 있었던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지도력이나 인격에 있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카리스마는 사랑과 섬김의 표상인 십자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나는 신앙과 지도력이 참된 신앙이며 참된 지도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자신의 교권과 이권을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순수한 복음 사역자와 자기들편이 되지 아니하는 성도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는 디오드레베같은 무리들은 없지않습니다. 복음과 진리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카리스마를 두지 않고, 자신의 지도력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휘둘러,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감히 그 교회에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면서, 교회 내부 질서를 파괴하고 교회를 혼란시키는 무질서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친구 가이오에게 본 편지를 보냈습니다. 가이오는 신약성경에 셋이나 등장할만큼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에베소의 난동 때에 사도 바울과 생사를 함께 있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행20:4)가 있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연보를 전해주러 간 더베 교회의 대표 가이오(롬16:23)가 있으며, 사도 바울이 세례를 준 사람으로 나중에 데살로니가 초대 주교가 된 가이오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 복음을 위해 자신의 가정과 마음을 개방하고 복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이오 역시 복음과 순회 복음 전도자를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해 봉사하고 희생을 아끼지 아니했던 인물로, 사도 요한은 그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마음도 건강하고 하는 일들이 잘 되어 더욱 더 복음 전도에 쓰임받게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기독교인이라도 디오드레베는 순수하고 희생적인 복음 전도자들을 거부하고, 이들을 영접하려는 교회 교인들까지 몰아낸 악행을 서슴지않은 가짜 성도이고, 데메드리오와 가이오는 복음 전도에 충성을 다 할 뿐만 아니라, 순회 복음 전도자들을 정성껏 영접하고 그들의 복음전도에 필요한 물질을 아낌없이 제공했던, 그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생활로 증거하며 살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요한 당시에 순회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 전도 사역에 종사하면서 아무런 삯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이용하여 부를 취하는 자라는 인상을 주지않기 위해서, 그들이 전도하는 이방인들에게서 어떠한 물질적 도움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쓸 것은 틈틈히 자신이 벌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천막을 수리하는 일에 종사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순회 복음 전도자들에게 교회와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은 그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복음 전도 사역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계는 거짓 선지자들의 무리와 수많은 적그리스도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교회 감독자로 세우심을 받은 성도는 성령으로 이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일2:18-19)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본문 28절의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에서 감독자는 성도뿐만 아니라 성직자 또는 교회 지도자를 말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라고 했습니다. “삼가라”는 말뜻은 깨어 지키며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삼가라는 것입니다. 남의 구원 문제를 가지고 힘쓰다 보면 자기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히 여기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없으며, 자기가 영적으로 살지 못하고는 남을 살릴 수 없으며, 자기가 영적으로 부요하지 못하고는 남을 영적으로 부요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챠드 백스터는 “많은 사람들이 남들을 가르쳐 지옥에 가지 말라 하고 자기 자신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지도자(성직)는 성령께서 세웠기 때문에 삼가야만 합니다. 교회 직분이 사람들이 세운 직분이라면 사람들의 눈에만 들게 일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직은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직분자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직분자가 흔히 주님을 기쁘시기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착각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으로 교회 직분자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 자이기 때문에 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이니 만큼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영광 얻은 사람들이 그 자신들의 선행을 찬송하지도 않고, 그들의 율법 지킨 일이나 충성한 것을 찬송하지도 않고, 다만 예수님의 피(어린양의 피)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7:10-12입니다.
(계7:10-12)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그런데 교회 직분자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의 어떤 노력이나 잘 한 것으로 교회가 될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영국의 런던에서 세계적인 대형 백화점을 경영하는 고든 셀프리지라는 사람은 지도자와 보스(boss)가 되는 것은 다르다 것을 말하며 그 차이점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상관은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인도합니다. 상관은 권위를 휘두르지만, 지도자는 선한 뜻을 잘 전달합니다. 상관은 위협적인 경우가 많지만, 지도자는 감동적입니다. 상관은 ‘나는’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지도자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상관은 잘못된 것을 책망하지만, 지도자는 잘못된 것을 교정합니다. 상관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지도자는 그 방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상관은 주로 ‘가라’고 명령하지만, 지도자는 ‘갑시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관이라고 하여 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상관이라고 하여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명령하는 상관이 되기 보다는, 그들을 인도하고 이끌며 솔선수범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는 지도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한 힌두교도가 마음에 변화가 생겨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낯선 환경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다가 주변 사람들을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큰 혼란을 주었습니다. 두리번거리는 사람, 턱을 고이고 있는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사람 등 가지 각색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고민 끝에 턱을 고이고 한쪽 눈만 감고 있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처음 오는 사람들은 앞서 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대로 배우기 쉬운 것입니다. 사명자는 삼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솔선수범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1절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의 심령을 가진 사람 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위해 울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일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전부를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을 사랑의 눈물로 감당해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실된 눈물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깨끗했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행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20: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거룩한 성도로 부름받은 성도는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 하며 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 특히 물질생활이 깨끗지 못하면 양떼를 다스리거나 사명감당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받기보다는 베푸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거지가 마을로 구걸을 나섰습니다. 집집을 기웃거리며 구걸을 하던 거지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한 대의 황금 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황금 마차를 바라보며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왕이 아니면 저런 마차를 탈 수 없을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갑자기 희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이제 구걸 행각도 끝이라고 단정했습니다. 틀림없이 저 마차 속의 왕은 인자하신 분이라서 많은 보물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면서 왕이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왕은 거지에게 인자한 눈길을 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거지는 마침내 행운이 찾아왔다고 감격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왕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거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청한 표정이 되어 왕에게 말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무엇을 달라는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설마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러나 거지는 주삣거리면서 자기의 호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의 동냥 자루에는 마을에서 구걸한 얼마의 돈과 갖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호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곡식의 낟알 한 개를 꺼내어 왕의 손바닥에 올려놓았습니다. 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 곡식 낟알을 소중히 집어들고 돌아섰습니다.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거지는 종일토록 구걸한 물건이 가득한 자루를 방바닥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초라한 무더기 가운데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낮에 왕에게 주었던 곡식의 낟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낟알은 웬 영문인지 반짝반짝 빛을 내는 황금 낟알로 변해 있었습니다. 거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 임금님께 나의 전부를 바칠 마음을 지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거지였던 것입니다. 그로서는 누구에겐가 얻어 오는 일만 경험했지 한 번도 남에게 어떤 것이라도 주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마음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참으로 “범사에 모본을 보여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베푸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나로부터 사랑을 나누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는 교회, 성도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칭찬과 존경과 인정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김명혁목사 / 행 20:28, 롬 12:1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곳은 교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일보다 귀중한 일은 세상에 없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이 항상 향하는 곳이라고 성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어서 헌납하는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 7:12-16).
사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출애굽의 목적이 성부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데 있다고 모세에게 10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9: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10:1).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좀 극심하신 말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안식일 성수를 거역하는 자들은 반듯이 잡아서 죽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출 31:14-17).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 피를 흘려서 세우신 성자 예수님의 몸과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학생일 때 찬송가 246장을 부르다가 가사에 감동을 받고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일 때 대구 주암산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새벽마다 김치선 목사님의 눈물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곤 했고,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이곳 저곳을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많이 받곤 했는데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흥회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1절을 부르고 나서 더 이상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고 찬송을 부를 때 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나는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하지 못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놀랍고 너무 감사라고 부끄러워서 뜨거운 눈물을 계속해서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까 옆에 있던 어른 한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느냐” 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아마 20여분 동안을속해서 울었습니다.
사도행전 20:28은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성자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자기의 피를 흘려서 세우신 예수님의 교회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성자 예수님의 몸이고 머리라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교회는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강림하시고 임재하심으로 구체적으로 세워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과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의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는 괴로움을 당해도 고난을 받아도 좋고 수고를 해도 피를 흘리며 죽어도 좋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리고 예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교회를 잘 섬기고 양떼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아주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실 천국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도 예배입니다. 설교도 전도도 구제도 다 없어지지만 예배만은 영원토록 계속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곳은 세상에 없고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족한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집보다 더 좋아하고 학교보다 더 좋아하며 사랑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신의주 제이 교회에 9년동안 평양 서문밖 교회에 2년동안 다니면서 주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 가서 정성껏 예배 드리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다른 일 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답게 여기면서 좋아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 학생일 때 평양 서문밖 교회에 다녔는데 주일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2년 동안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고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교회를 사랑하고 정성껏 예배 드림을 사랑하다가 교회에 가서 마음껏 예배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떠나기 한 달 전에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저 남한으로 가겠어요” 라고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고 “그러면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저 없이는 살지 못한다고 자주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부족한 저는 11살 때인1948년 8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평양에 남겨두고 북한을 떠나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어서 남한으로 와서 한 평생을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고 슬프게 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이모님을 만나서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주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 가서 정성껏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몇 년 동안은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사실 저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하루 종일 교회에 가서 정성껏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고 기도와 전도와 봉사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도 않았고 수요일 저녁 예배를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의 한 평생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저는 지금도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교회를 사랑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14년 동안 전국의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주로 찾아가서 작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과 눈물과 물질과 생명을 다 쏟아 바치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어머니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 발전했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지녔던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세 가지를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을 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둘째로 예루살렘교회는 교제하며 떡을 떼는 일에 전혀 힘을 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셋째로 예루살렘교회는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 전혀 힘을 썼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어머니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가 주력한 것은 첫째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 일이었고 둘째로 교제와 떡을 떼는 에 전무한 일이었고 셋째로 섬김과 봉사에 전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가들은 교회의 특징 세 가지를 말씀 곧 “케리그마”와 교제 곧 “코이노니아”와 봉사 곧 “디아코니아” 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보시던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6 가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성자 예수님께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보시던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6 가지를 살펴보면서 그 6 가지 모습을 가리며 “기회말교봉기” 즉 기도와 회개와 말씀과 교제와 봉사와 기쁨이 충만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2017년 1월 29일 주일 강변교회에 가서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그때 한 설교를 절반으로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그 때 한 설교의 본문은 행2:37-47, 빌1:1-11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 저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계속하고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는 강변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소원하면서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교회가 어떤 곳인가에 대한 말씀을 간단하게 몇 마디로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들 중에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복되고 더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귀가 항상 향하고 게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복되고 더 아름다운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주일에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지만 저는 10살 11살 때 평양에 있는 제 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2년 동안 주일 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평양 서문밖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저는 11살 때인 1948년 8월 고향과 부모를 떠나 38선을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고향과 부모를 떠난 고아와 나그네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외롭게 한 평생을 살았지만 남한에 와서 주일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집에 가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들은 아닙니다. 학원과 같은 교회들도 있고 회사와 같은 교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을 내려다 보셨을 때 일곱 교회들 중에서 주님의 칭찬을 받은 귀중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는 두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다섯 교회들은 모두 주님의 책망을 받은 문제가 많은 교회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슷하게 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순수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기도”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기도” 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 21:13).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부탁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일백 이십 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서 열흘 동안 전력을 다해서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루살렘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행 1:13-15).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로 시작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기도”에 전력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행 4:24,29). 교회가 성장한 후에도 사도들이 새로운 행사나 멋진 프로그램에 치중하지 않고 무식할 정도로 기도에 전무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얼마나 소박하고 무식하고 순진하고 행복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기도”가 부족한 신자는 참된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로 시작했고 “새벽기도”로 성장해왔습니다. “새벽기도”를 등한시하는 교회는 교회의 기본을 상실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기도”를 힘쓰는 교회이고 특히 “새벽기도”를 힘쓰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회개”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리”(마 4:1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부탁하신 메시지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다섯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회개하라” 라는 말씀을 다섯 번 써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그러므로 회개하라”(계 2:16).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계 2:22). “그러므로 회개하라”(계 3:3).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20). 예루살렘교회는 “회개”하므로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회개하라" 라고 외쳤을 때 3천 여명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렇게 “회개”로 시작해서 “회개”로 이어갔습니다. “회개”가 부족한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회개”가 부족한 신자는 참된 신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회개”로 시작했고 “회개”로 성장해왔습니다.
『셋째로,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막 1:1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말씀” 전파로 시작해서 사도들의 “말씀” 가르침으로 발전한 “말씀”이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 선포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말씀”이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들도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순종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인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독했고 요한계시록을 모두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에만 전력했습니다. 세상 유행에는 뒤 떨어진 좀 무식한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사회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도덕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셔서 친밀하게 교제하시고, 세리장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친밀하게 교제하시고, 저주 받아 마땅한 핍박자요 포행자요 살인자인 사울을 찾아가서 친밀하게 “교제”하신 너무너무 이상하신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제”가 충만한 귀중한 교회였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인들은 물론 메소보다미아 가바도기아 애굽 구레네 로마 아라비아 등 십 사오 개 지역에서 온 다 문화 다 인종들 수 천 명이 함께 모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1,42).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회사이고 학원이고 공연장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친밀하게 “교제”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이 친밀하게 “교제”하고, 한국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이 친밀하게 “교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보시고 너무너무 기뻐하실 것이고 사회와 백성들도 감동을 받으며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 “봉사”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과 “봉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병자들을 친히 “섬기고” “봉사” 하시는데 전력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루살렘 교회는 “섬김”과 “봉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와 “회개”와 “말씀”과 “교제”에 전혀 힘썼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섬김”과 “봉사”에 제일 힘을 많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구제”와 “섬김”과 “봉사”를 전적으로 하게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습니다.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면서 “섬김”과 “봉사”에 전력을 다했더니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있게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다운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랑”과 “구제”와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데 전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일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고 불쌍한 연변 조선족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일이 너무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기뻐하셨고 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눅 10:2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돌로 침을 받아 순교의 죽음을 죽으면서도 원망 불평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기도했는데 그의 영혼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참 근원을 찾아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 안에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쁨”은 사도 바울의 가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가슴 가슴에도 전염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는데 그때 그 기쁨은 간수에게 전염되었고 루디아에게 전염되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염되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의 “기쁨”과 섬김의 "기쁨"이 충만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사랑의 “기쁨”이 없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아니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도 아니고 행복한 교회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사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쁨”을 지니지 못한 교회는 불행한 교회입니다. 회사와 같은 교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을 지니고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과 후원과 격려로 한 평생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두려움을 지니는 대신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지니고 “행복하게”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어떤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입니까? 첫째로, “기도”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회개”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교제”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봉사”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여섯 가지를 줄여서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교회가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는 강변교회가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곳은 교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신 성자 예수님의 몸과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고 교회에 나와서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보다 귀중한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교회를 집보다 일터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면서 사랑하며 섬기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배 드리는 일을 공부하는 일보다 돈을 버는 일보다 놀러 다니는 일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며 사랑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고 늘 고백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교회다운 귀중한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와 신자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혀 힘쓰고, 교제와 떡을 떼는 일에 전혀 힘쓰고, 그리고 구제와 섬김과 봉사하는 일에 전혀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말교봉기”가 충만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찬송가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246, 208) 를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